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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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빌어? 나 임신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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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3년이 되는 어느 날, 온채아는 남편 주율천의 가슴속에 영원히 자리 잡은 그녀가 누구인지 마침내 알게 된다. 놀랍게도 바로 그의 형수였다. ...

Chương (1)

第1章

결혼한 지 3년이 되는 어느 날, 온채아는 남편 주율천의 가슴속에 영원히 자리 잡은 그녀가 누구인지 마침내 알게 된다. 놀랍게도 바로 그의 형수였다. 큰 형이 세상을 떠난 그날 밤에도 주율천은 조강지처인 온채아는 안중에도 없는 듯 형수를 대신해 뺨을 맞는다. 온채아는 잘 알고 있었다. 주율천이 그녀와 결혼한 이유가 단지 그녀가 사리 분별을 잘하기 때문이라는 것을. 사리 분별을 하도 잘해서 이혼하는 순간까지도 주율천을 조금도 귀찮게 하지 않는다. 주율천은 알지 못했다. 그녀가 이미 이혼 서류에 도장을 찍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곧 다른 남자와 새로운 시작을 하려 한다는 사실도. 암 치료 신약을 성공적으로 개발한 그날, 온 세상이 온채아에게 찬사를 보낸다. 그런데 그 환호성 속에서 무릎을 꿇고 붉어진 눈으로 그녀에게 용서를 비는 주율천. “채아야, 내가 잘못했어. 제발 다시 나한테로 돌아와 줘.” 늘 신사적이던 그가 무슨 잘못이 있겠는가? 온채아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서자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가 온채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단호하게 말한다. “미안하지만 채아 곧 나랑 결혼해.” 제1화 결혼한 지 3년이 되던 해, 주율천의 큰형이 세상을 떠났을 때 온채아는 주율천에게 이혼 얘기를 꺼냈다. 주율천이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작 내가 서정이를 대신해서 뺨 한 대 맞았다고 이러는 거야?” ‘서정이... 참 다정하게도 부르네.’ 하지만 심서정은 주율천의 형수였다. 온채아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맞아요. 그것 때문이에요.” 이혼 얘기까지 나왔는데 어찌 그깟 일 하나뿐이겠는가? 병원에서 맞은 그 따귀의 붉은 자국이 주율천의 준수한 얼굴에서 유난히 돋보였다. 그때 그가 심서정을 감싸는 모습에 주씨 가문 사람들은 모두 크게 놀랐지만 온채아는 놀라기는커녕 무덤덤하기만 했다. 사흘 전 온채아와 주율천의 결혼기념일 날. 깜짝 이벤트를 해주려고 주율천이 출장 간 도시로 날아간 온채아는 우연히 그가 친구와 나누는 대화를 듣게 되었다. “율천아,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이렇게 피하는 것도 방법이 아니야. 채아 씨의 진심을 이렇게 저버려서는 안 되지.” 평소 온화하고 품격이 넘치던 남자의 두 눈에 쓸쓸함이 스쳤다. “난 뭐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그동안 내가 채아한테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는 걸 걔가 믿지 않는단 말이야.” “걔?” 온채아의 편을 들어주던 친구가 이내 그의 말을 알아듣고 화를 내면서 비아냥거렸다. “심서정을 말하는 거야? 주율천, 너 제정신이야? 아직도 잊지 못했어?” 친구가 계속 말을 이었다. “채아 씨한테 계속 이렇게 상처 주면 성유준이 가만두지 않을 텐데.” “절대 그럴 리 없어.” 주율천이 손가락을 문지르며 덤덤하게 말했다. “채아가 나랑 결혼하면서 두 사람 사이가 틀어졌어. 카톡 연락처도 3년째 차단한 상태고.” 문밖에서 그 대화를 들은 온채아는 차분하게 발걸음을 돌렸지만 옆으로 늘어뜨린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사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주율천이 마음에 품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그 여자가 누구인지 수많은 사람에게 물어봤었지만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 여러 가능성을 생각해봤으나 형수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온채아가 3년 동안 형님이라 부르던 그 여자라니, 이보다 더 어이없는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클럽에서 나왔을 때 억수 같은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비를 온몸으로 맞았다. 그날 밤 그녀는 바로 비행기를 타고 경성으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이틀 내내 고열에 시달리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는데 주율천의 큰형 주석현이 사고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주일 뒤 주석현의 장례식이 경성에서 치러졌다. 그동안 온채아는 주씨 본가에서 매일 두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장례식을 마치고 추모공원을 나서는데 몸은 걷고 있지만 영혼은 이미 가출한 기분이었다. 운전기사 진명환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온채아는 차에 오르자마자 눈을 감았다. “기사님, 집으로 가주세요.” “본가 안 가시고요?” “안 가요.” 장례가 끝나긴 해도 주씨 가문은 한동안 시끄러울 것이다. 주석현은 이 집안의 장손이라 어릴 적부터 가족들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자랐다. 이번 사고도 심서정이 스카이다이빙을 하겠다고 억지만 부리지 않았어도 피할 수 있었다. 마지못해 하러 갔다가 장비 결함으로 고공에서 추락하고 말았다. 응급조치를 하려고 병원으로 옮긴 게 아니라 시신을 봉합하려고 옮긴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심서정에 대한 주씨 가문 사람들의 분노가 아직 사그라지지 않았다. 온채아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감싸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에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런데 차가 막 출발하려던 그때 뒷문이 갑자기 열렸다. 주율천이 새카만 수제 양복을 입고 늘씬하고 단정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잘생긴 얼굴에 웬일로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채아야, 집에 가려고?” “네.” 온채아가 대답을 마치자마자 그의 곁에 서 있는 심서정과 남자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바로 심서정과 주석현의 아들 주시윤이었다. 올해 네 살이 되었고 통통한 편이었다. 주율천이 왜 이러는지 파악하기도 전에 주시윤이 제멋대로 차에 올라타더니 예의 없게 말했다. “숙모, 나랑 엄마도 태워줘.” 온채아가 미간을 찌푸린 채 주율천을 쳐다보자 주율천이 입술을 적시고 말했다. “어머니 아버지 아직 화가 안 풀리셨어. 당분간 우리 집에서 지내게 하자.” 그녀가 반대할까 봐 한마디 덧붙였다. “너도 아이를 원했잖아. 이참에 시윤이를 돌보면서 연습해봐.” “...” 온채아는 어이가 없어 소리 내 웃으려다가 추모공원에서 웃는 건 좀 아닌 것 같아 꾹 참았다. 심서정 모자와 온채아를 집에 보내고 주율천 혼자 본가에서 가족들의 분노를 감당하겠다는 말이었다. ‘쓸데없는 책임감은.’ 주율천이 미리 전화했는지 집에 돌아와 보니 가정부 오경애가 이미 게스트룸을 정리해놓았다. 온채아는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생각에 바로 샤워한 다음 침대에 누워 잠을 잤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밤 9시였다. 핸드폰을 손에 쥔 그때 친구에게서 전화가 왔다. “이혼 합의서 네가 말한 대로 준비했어. 한번 확인해볼래?” “고마워, 다슬아.” 막 잠에서 깬 터라 목소리가 나른했다. “괜찮아. 그냥 퀵서비스로 보내줘.” “그렇게 급해? 진짜 결심한 거야?” 수많은 사건을 다뤄본 정다슬은 온채아가 충동적으로 결정한 건 아닌지 걱정했다. “주율천이 좋은 남편은 아니어도 그래도 어느 정도는...” 온채아가 불을 켜고 일어나 앉았다. 정신도 점점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결심했어. 그 사람 다른 여자 사진을 보면서 자기 위안까지 하더라.” 제2화 그 말에 정다슬은 머리가 윙 했다. 평소 내성적인 온채아가 그런 말을 내뱉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충격적인 건 주율천 그 나쁜 놈이 사람을 이렇게까지 모욕했다는 점이었다. 정다슬은 욕설을 내뱉은 다음 계속 말했다. “퀵서비스 말고 직접 가져다줄게. 가져다주고 와서 야근할 거야.” 두 바퀴보다 네 바퀴가 더 빠르지 않겠는가? 전화를 끊은 후 온채아마저도 자신이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할 줄은 몰랐다. 이 답답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을 쭉 짓누르고 있었나 보다. 몸도 마음도 시원한 데가 없이 답답하기만 했다. 그날 밤 클럽에서 주율천이 말했던 것처럼 그는 단 한 번도 그녀를 건드리지 않았다. 아마 누구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결혼한 지 3년이나 됐는데 그녀는 여전히 처녀였다. 처음에는 주율천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의심했었다. 그런데 나중에 주율천이 서재에서 앨범을 들여다보며 낮게 신음하면서 자기 위안을 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다. 온채아는 자존심이 철저히 짓밟히는 것만 같았다. 한번은 그녀가 보고 있는 걸 주율천이 알아챘는데 그녀를 끌어안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은 채 낮게 변명했다. “미안해. 그런 걸 하면 널 다치게 할까 봐 차마 손을 댈 수가 없어. 그래서 네 사진을 보면서...” 그런데 웃긴 건 온채아가 그 말을 믿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얼굴까지 빨개졌었다. 그러다가 밤새 경성으로 돌아온 그날 밤에 해열제를 먹고 마지막 남은 정신력으로 서재에 들어가 그가 늘 잠가 놓던 캐비닛을 열어 앨범을 꺼냈다. 앨범에 있던 사진은 전부 심서정의 생기 넘치고 매혹적인 사진들이었다. 주율천은 심서정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보물처럼 소중히 여기고 있었다. 그 순간 온채아는 자신이 한낱 웃음거리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과거 주율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때가 떠올랐다. 정확히 말하면 그를 따라다닌 게 아니었다. 왜냐하면 온채아의 오빠가 늘 그와 붙어있었으니까. 자주 보다 보니 나중에 그와 결혼하면 참 좋을 것 같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다. 주율천의 성격이 참 좋았다. 인내심 많고 다정했고 오빠를 만나러 올 때면 늘 그녀의 선물을 챙겨왔다. 오빠의 친구들 중에 주율천이 가장 점잖은 신사였다. 그런 신사가 형수를 보면서 자기 위안을 하고 정작 옆에 있는 아내에게는 손도 대지 않았다. 정다슬의 일 처리 속도가 이렇게 빠를 줄은 온채아도 몰랐다. 일어나 세수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가정 법원 직원들이 퇴근하지 않았더라면 당장이라도 그녀와 주율천을 데리고 가서 이혼시킬 기세였다. 온채아가 이혼 합의서를 받고 마음이 조금 안정된 그때 위층에서 갑자기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오경애가 놀란 얼굴로 뛰어 내려오더니 머뭇거렸다. “작은 사모님...” “무슨 일이에요?” “작은 사모님이 침실에 걸어두셨던 가족사진... 시윤 도련님이 망가뜨렸어요.” 온채아는 처음에는 단순히 액자가 깨진 줄 알았다. 하지만 오경애가 내민 사진 조각을 본 순간 온채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다섯 살 때 온채아의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그 가족사진은 그녀에게 남은 유일한 추억이었다. 온채아는 갈기갈기 찢긴 사진을 들고 위층으로 성큼성큼 올라갔다. 마침 심서정이 아들을 안고 그녀의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온채아가 심서정을 싸늘하게 노려봤다. “형님, 여긴 제 방인데요?” “삼촌이 앞으로 여긴 시윤이 집이라고 했어.” 주시윤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그리고 아빠처럼 시윤이랑 엄마를 돌봐주겠다고도 했어.” 아이가 잘못을 저질러도 혼낼 생각이 전혀 없는 심서정의 모습에 온채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주시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며칠 뒤 크리스마스인데 산타클로스가 너한테 뭘 할지 알아?” 주시윤이 턱을 치켜들었다. “캔디를 아주 많이 줄 거야.” “아니.” 온채아가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내 사진을 망가뜨린 네 두 손을 잘라 오븐에 구운 다음 괴물한테 줄 거야.” “엉엉...” 역시 애는 애였다. 주시윤은 겁에 질린 나머지 심서정을 꽉 안고 목청이 터지도록 울었다. 심서정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불쾌한 표정으로 온채아를 쳐다봤다. “아직 애인데 이렇게까지 겁줄 필요는 없잖아요.” “애 하나 제대로 가르치지 못하니까 그러죠. 형님은 익스트림 스포츠 말고 할 줄 아는 게 뭐가 있어요?” 온채아는 이 말을 던진 후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늦은 밤 검은색 마이바흐가 마당으로 천천히 들어섰다. 통유리 앞에 서 있던 온채아는 주율천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주시윤이 심서정을 끌고 달려가는 모습을 봤다. 그들이야말로 단란한 세 식구 같았다. 한참 뒤 방 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주율천이 흰 셔츠 차림으로 성큼성큼 들어오면서 퉁명스럽게 물었다. “시윤이한테 겁줬다면서?” “네.” 온채아가 침대 머리맡 서랍에 놓인 물건을 가리켰다. “시윤이가 내 가족사진을 찢어버렸어요.” 순간 멈칫한 주율천은 한참이 지나서야 일의 자초지종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팔을 내밀어 온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지만 그녀가 피하자 아직 화가 풀리지 않은 줄 알고 다시 다정하게 말했다. “내가 잘못했어. 시윤이 대신 사과할게. 보상해줄 테니까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온채아가 피식 웃었다. “뭐든지 다 해줄 거예요?” 주율천은 진심으로 사과할 생각이었다. “당연하지.” “원하는 게 두 가지가 있어요.” 그러고는 미리 준비해둔 서류를 내밀었다. 주율천은 부동산 계약서임을 확인하고 바로 서명했다. 그리고 두 번째 서류도 아예 마지막 페이지로 넘겨 망설임 없이 서명했다. 돈에 관한 거라면 항상 통쾌했다. 서명을 마친 그는 안도하면서 온채아의 가느다란 허리를 끌어안았다. “채아야, 네 오빠는 어떻게 널 이렇게 이해심이 많고 착한 사람으로 키웠을까?”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았던 온채아가 그를 밀어내려는데 누군가 반쯤 열린 문을 두드렸다. 문 앞에 선 사람을 보자마자 주율천은 무의식적으로 온채아를 밀어냈다. 온채아는 흠칫 놀랐다가 바로 깨달았다. 그는 사랑하는 여자에게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3년간 아내와 잠자리하지 않았다. 이제 한집에서 지내게 되었으니 당연히 더욱 잘 보여야겠지. 심서정이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율천아, 시윤이가 너랑 자고 싶다고 떼를 써.” “지금 갈게.” 주율천은 대답을 마치고 온채아를 쳐다봤다. “화 안 났지?” “네.” 그가 등을 돌린 후 온채아는 또 다른 서류를 꺼냈다. 이혼 합의서였다. 주율천의 말대로 그녀는 참 이해심이 많고 착했다. 이혼할 때마저 스스로 합의서를 준비해 그에게 건넸다. 제3화 다음 날 아침, 온채아가 생체 시계에 맞춰 눈을 떴다. 커튼을 걷자 창밖이 온통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일기예보에 눈이 온다는 얘기가 없었는데. 첫눈이 제법 크게 내렸고 창문을 사이에 두고도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니트 스커트를 갈아입고 세수하던 그때 복도에서 쨍그랑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모르는 사람이 들었으면 리모델링 업체라도 들어온 줄 알겠다. “아주머니, 무슨 일...” 온채아가 긴 머리를 대충 묶어 올리고 문을 열었다. 그런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넋을 잃고 말았다. 리모델링 업체가 아니라 전쟁터를 방불케 했다. 평소 깔끔하던 집 안이 엉망진창이 돼버린 것이었다. 1층 소파에 있어야 할 쿠션이 그녀의 방 앞에 굴러다녔고 위에 정체 모를 짙은 갈색 얼룩이 묻어 있었다. 그리고 깨진 꽃병이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복도에 걸려 있던 2억 원짜리 유화도 망가져 있었다. 그야말로 입이 쩍 벌이지는 상황이 눈앞에 벌어졌다. 오경애는 거의 애원하면서 주시윤을 쫓아다녔다. “시윤 도련님, 그건 건드리면 안 돼요. 작은 사모님이 제일 아끼시는 다기란...” 쨍그랑.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주시윤이 장난기 어린 얼굴로 혀를 날름 내밀더니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메롱. 갖고 놀 거야. 삼촌이 이젠 여기가 내 집이라고 했어. 가정부 주제에 감히 날 막아?” 그러고는 고개를 들었는데 온채아의 싸늘한 눈빛과 마주쳤다. 순간 겁에 질려 본능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나쁜 여자! 어젯밤에 너 때문에 악몽까지 꿨어. 밤새 산타클로스랑 괴물한테 쫓겼다고. 널 언젠가는 꼭 내쫓고 말 거야. 엄마가 그랬어. 너만 없으면 삼촌이 나랑 엄마의 것이 된다고.’ 온채아가 차분하게 말했다. “가지고 놀아. 마음껏.” “정말?” 주시윤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쁜 여자가 좋아하는 물건을 이렇게나 많이 망가뜨렸는데 화를 안 낸다고?’ 온채아는 난간 옆에 서서 아래층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척 앉아 있는 심서정을 힐끗 보고는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만 거실에 걸려 있는 수묵화는 절대 건드리지 마. 그건 내가 제일 아끼는 거거든.” 지금 이런 난동을 부리는 게 심서정이 시킨 건지, 아니면 주시윤의 자발적인 행동인 건지 확신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온채아도 그리 좋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누군가 그녀에게 이렇게 가르쳤었다. 누가 괴롭히면 열 배, 백 배로 갚아주라고. 주시윤이 바로 눈알을 굴렸다. “알았어.” 그러고는 쏜살같이 달려갔다. 그 모습에 오경애가 한숨을 내쉬었다. “작은 사모님이랑 도련님 모두 시윤 도련님을 너무 오냐오냐하세요.” “괜찮아요.” 온채아가 오경애를 달랬다. “아주머니도 막지 마세요. 시윤이 주씨 가문의 유일한 손자예요. 아이가 행복해하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죠. 그리고 형님도 가만히 있잖아요. 형님의 육아 방식을 존중해야지 않겠어요? 간섭하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아주머니나 나나 책임 못 져요.” “알겠습니다.” 오경애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사모님은 너무 착해서 문제예요. 이러니까 아무나 다 작은 사모님한테 막 대하죠.” 온채아가 웃으면서 화제를 돌렸다. “집에 안 쓰는 선물 상자 있어요?” “어떤 거요?” “A4 용지 정도 들어갈 수 있는 거면 돼요.” “창고에 있어요.” 오경애의 기억력이 꽤 좋았다. “지금 가져다드릴게요.” 상자를 받은 후 온채아는 다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사인한 이혼 합의서를 상자에 넣고 정성스레 리본까지 묶었다. 갑자기 아래층에서 쾅 하는 굉음이 들렸다. 온채아는 못 들은 척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리본을 단단히 묶고는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쁘네. 잘했어, 아주.’ 곧이어 오경애가 급히 방 문을 두드렸다. “작은 사모님, 빨리 내려와 보세요. 시윤 도련님이 어르신의 유작을 망가뜨렸어요.” 온채아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굳은 얼굴로 말했다. “뭐라고요? 거실에 걸어둔 그 그림 말이에요?” “네...” 오경애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채아가 너무 서둘러 내려간 탓에 발을 삐끗하고 말았다. 그녀를 본 주시윤이 턱을 들고 얄미운 표정을 지었다. ‘날 어쩔 건데?’ 온채아가 오경애에게 물었다. “본가에 전화했어요?” “아직요.” “지금 당장 전화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시윤이 그녀에게 돌진했다. “하지 마. 고자질하지 마, 이 나쁜 여자야.” 어린아이의 힘이 이 정도로 셀 줄은 몰랐다. 온채아는 미처 피하지 못하고 비틀거리다가 바닥에 넘어져 꼬리뼈를 세게 부딪히고 말았다. 엄청난 고통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채아 씨, 괜찮아요?” 심서정이 황급히 다가와 부축하더니 원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내가 시윤이를 너무 오냐오냐하면서 키워서 장난을 칠 때 힘 조절을 못 해요. 그런데 애들은 다 이러니까 화내지 말아요.” “...” 온채아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커다란 구멍이 뚫린 수묵화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그러니까 시윤이가 남의 집 물건을 망가뜨린 것도 형님이 오냐오냐해서 그런 거란 말이죠?” 심서정의 눈시울이 금세 붉어졌다. “내가 잠깐 한눈팔아서 애를 보지 못해서 그런 건데 꼭 이렇게까지 몰아가야겠어요?” “아, 잠깐 한눈판 거였군요.” 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난장판이 된 집 안을 둘러보았다. “오전 내내 이 난리를 쳤는데 잠깐만 한눈을 팔았다고요?” “온채아!” 주변에 아무도 없자 심서정도 더는 착한 척 연기하지 않았다. “꼭 이렇게까지 꼬치꼬치 따져야겠어요? 본가까지 들쑤셔야 속이 후련해요? 할머니가 고작 이깟 그림 하나로 날 어쩔 것 같아요?” “이깟 그림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생전에 남긴 마지막 작품이에요.” 온채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검은 세단이 마당으로 들어섰다. 주씨 본가의 사람들이 아주 빨리 도착했다. 제4화 심서정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창밖으로 익숙한 차가 보이자 그녀도 당황하기 시작하더니 날카로운 눈빛으로 온채아를 노려봤다. “일부러 그런 거죠? 맞죠?” “형님, 지금 무슨 말씀하시는 거예요? 전 방금 위층에서 율천 오빠한테 줄 선물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왜 절 탓하시는 거죠?” 온채아의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누가 봐도 엄청난 억울함을 당한 듯한 모습이었다. 본가의 집사 정병규가 들어오자마자 그 광경을 목격하고 말았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난장판인 집을 보더니 심서정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모님, 어르신께서 사모님이 자식을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으니 먼저 사모님을 가르쳐야겠다고 하셨습니다.” 심서정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뭐라고요?” 정병규가 손으로 안내했다. “정원에서 세 시간 동안 무릎을 꿇으라 하셨어요.” “집사님...” 온채아가 뭐라 하려던 그때 정병규는 그녀의 뜻을 알아듣고 다정하게 말했다. “작은 사모님, 대신 사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며칠 전 큰 도련님 장례식으로 고생 많으셨으니 푹 쉬세요.” “...” ‘그게 아니라 할머니의 건강이 어떤지 물어보려던 건데.’ 할머니의 상태가 괜찮을 때 찾아가 이혼 얘기를 할 생각이었다. 지금 주율천이 은성 그룹을 관리하고 있지만 주씨 가문의 집안일은 항상 본가에서 결정했다. 심서정은 내키지 않았지만 정원으로 나가 무릎을 꿇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도 차가운 눈 바닥에서. ‘쌤통이야, 아주.’ 온채아가 심서정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위층으로 올라가려는데 오경애가 난처한 표정으로 물었다. “작은 사모님, 그럼 이 그림은 어떡하죠?” “곧 누가 와서 가져갈 거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다 복원되면 다시 가져다줄 거예요.” 온채아가 짧게 대답했다. 집에 걸려 있던 그 그림이 가짜라는 건 절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이다. 진품은 현재 그녀의 친구가 운영하는 전시관에 온전한 상태로 전시되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생전에 가장 바랐던 게 더 많은 이들이 그의 작품을 보는 거라 집에 그냥 걸어두기엔 너무 아까웠다. “나쁜 여자!” 온채아가 계단을 오르려던 그때 주시윤이 씩씩거리며 소리쳤다. “나 삼촌한테 전화했어. 삼촌이 오면 넌 끝장이야.” “기다릴게, 그럼.” “삼촌이 너랑 이혼할 거야. 넌 이제 버려질 거라고.” 온채아가 피식 웃었다. “삼촌은 네 말 안 들어.” 주율천과 심서정 사이에는 아직 그녀가 있었다. 이혼할 경우 시동생과 형수가 한 지붕 아래에서 지내게 될 텐데 그러면 심서정의 명예가 완전히 망가지게 된다. 주율천은 절대 그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 ... 주율천이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심서정이 무릎을 꿇은 지 20분도 안 되어 나타났다. 블랙 캐시미어 코트를 입어 더욱 훤칠해 보였고 아주 점잖고 고귀한 분위기를 풍겼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곧장 심서정에게 달려가 품에 안고는 집 안으로 들어와 소파에 앉혔다. 그러고는 얼어붙은 그녀의 무릎에 연고를 발라주었다. 이젠 심서정에 대한 걱정도 서슴없이 드러냈다. “바보야? 꿇으라 했다고 진짜 꿇어?” “할머니가 말씀하셨는데 난들 뭐 방법이 있었겠어?” 심서정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주율천의 소매를 잡아당기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율천아, 너 그냥 이혼하면 안 돼? 너무 무서워...” 주율천의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온채아 말이야?” “응.” 심서정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시윤이가 왜 할아버지 유작을 망가뜨렸는지 알아? 채아 씨가 그러게끔 일부러 유도했어.” “엄마 말이 맞아요.” 주시윤이 눈물을 글썽거리면서 입을 삐죽거렸다. “삼촌, 숙모가 오늘 또 겁을 줬어요. 제 팔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그 그림 속에 있다고 해서 제가...” “그럴 리 없어.” 주율천은 단호하게 부정했다가 주시윤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었다. “시윤이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숙모는 우리 집에서 제일 착한 분이야. 어젯밤에 시윤이 화를 안 낸다고 했으니까 다시 겁주지 않을 거야.” “그리고 할아버지께서는 생전에 채아를 제일 예뻐하셨어. 할아버지의 작품 가지고 장난할 사람 아니야.” 이 말은 심서정에게 한 말이었다. 심서정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랑 시윤이가 일부러 채아 씨를 모함했다는 말이야? 주율천, 많이 변했다, 너!” 그 말에 주율천은 이유 모를 분노가 치밀었지만 심서정의 실망한 눈빛을 마주한 순간 화를 억누르는 수밖에 없었다. “서정아, 내 마음은 변한 적이 없어.” 심서정이 그를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진짜 채아 씨한테 마음이 한 번도 흔들린 적이 없어? 정말 한 번도 건드리지 않았다고 장담할 수 있어?” 주율천은 늘 그녀 앞에서 떳떳하다고 자부해왔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허리를 살짝 굽히고 시선을 늘어뜨렸다. “건드린 적이 한 번도 없어.” 지금까지 온채아에게 잘못한 건 주율천이었다. 온채아는 한 손으로 허리를 짚고 다른 손으로 선물 상자를 든 채 아래층으로 내려오다 그 말을 들었다. 아주 깔끔한 한마디였다. 온채아는 자신을 비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오빠, 내일 성씨 가문 가족 모임에 오빠가 갈 시간이 있는지 할머니가 물어보시래요.” 성씨 가문의 어르신 소원희와 온채아의 부모는 오랜 지인이었다. 부모가 사고로 세상을 떠난 뒤 소원희가 온채아를 성씨 가문으로 데려와 키웠다. 외부인의 눈에 온채아는 성씨 가문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그녀가 주씨 가문에 시집간 후에도 성씨 가문과 주씨 가문의 거래는 끊이지 않았다. 주율천은 조금 전 양심에 찔린 말을 한 터라 바로 대답했다. “알았어. 내일 저녁에 데리러 갈게. 같이 가자.” “알았어요.” 온채아는 선물 상자와 주율천의 옆에 앉은 모자를 번갈아 보고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나가려 했다. 정다슬이 오늘 승소했다고 온채아에게 함께 쇼핑하자고 했지만 발을 삐끗했다는 소리에 결국 밥만 먹기로 했다. “채아야.” 주율천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그거 뭐야?” 온채아가 뒤를 돌아보면서 상자를 흔들었다. “선물.” “선물? 오늘 친구 생일이야?” “결혼 3주년 선물이에요. 오빠 주려고 준비한 거예요.” “미안해, 채아야...” “괜찮아요. 오빠 많이 바쁘잖아요. 까먹을 수도 있죠.” 온채아는 여느 때처럼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주율천을 쳐다보며 선물을 건네고는 다정하게 말했다. “어차피 보름 후에 오빠 생일이니까 생일 선물로 하죠, 뭐. 오빠, 생일 미리 축하해요.” ‘나의 이혼도 축하하고.’ 제5화 선물 상자를 받아든 주율천은 뭔가가 심장 한구석을 빠르게 스치는 것 같았다. 아프다기보다는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상자 위에 리본이 정성스럽게 묶여 있었다. 온채아가 이 선물을 위해 얼마나 마음을 썼고 얼마나 오래 준비했는지 알 수 있었다. 반면 주율천은 정말 쓰레기만도 못했다. 사람들에게 드러낼 수 없는 더러운 속내를 품고 있었으니까. 주율천이 입을 열기 전에 온채아는 이미 현관 쪽으로 걸어가 베이지색 모직 코트를 걸치고 목도리를 둘렀다. 손바닥만 한 얼굴에 맑고 반짝이는 두 눈만 보였다. 그대로 문을 나섰는데 온채아의 걸음걸이가 어딘가 어색했다. 주율천이 물으려던 찰나 옆에 있던 심서정이 갑자기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소리를 질렀다. “으악, 너무 아파.” 그는 다시 생각을 거두고 심서정을 자리에 앉혔다. “무릎 많이 아파? 병원에 데려다줄게.” “가기 싫어.” 심서정이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면서 주율천이 손에 든 상자를 보며 중얼거렸다. “마음이 흔들리지 않긴. 채아 씨가 준 선물을 이렇게 소중하게 다루면서.” “...”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서정아, 난 이미 채아한테 미안한 짓을 너무 많이 했어.” 심서정이 눈을 크게 뜨더니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럼 나는? 율천이 너 대체 무슨 생각이야? 채아 씨가 나랑 시윤이를 괴롭혀도 그냥 내버려 두겠단 말이야?” “말했잖아. 채아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그만해! 아직도 눈치 못 챘어? 너 지금 하는 말마다 채아 씨를 두둔하고 있어.” 말을 마친 심서정은 눈물범벅인 채로 일어나 주시윤과 함께 위층으로 올라갔다. 주율천은 잠시 멍하니 있다가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사실 그도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다른 사람이 온채아의 험담을 하는 걸 한 글자도 듣고 싶지 않았을 뿐이었다. ... 눈이 끊겼다 내렸다를 반복하며 이틀 동안 내렸다. 온채아는 오전에 한의원에서 진료를 봤고 오후에 외국의 같은 업계 종사자가 선배에게 침술을 배우러 왔는데 선배가 급한 일이 생긴 바람에 그 일을 온채아에게 맡겼다. 오후 5시에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옷을 갈아입고 옅은 화장을 했다. 온채아는 본래 미모가 뛰어나 살짝만 꾸며도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래층으로 내려왔을 때 오늘따라 집이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는 걸 발견했다. 그 모자가 오늘 유난히 얌전했다. “온채아 씨.” 온채아가 롱부츠를 신고 있는데 뒤에서 심서정이 웃으며 말했다. “율천이 채아 씨를 선택할까요? 날 선택할까요?” 온채아는 잠깐 멈칫했다가 이내 웃었다. “형님, 무슨 말씀인지 못 알아듣겠어요. 주씨 가문의 과부가 시동생한테 꼬리 치는 연극이라도 하고 싶다는 말씀인가요?” “온채아!” 너무 노골적인 말에 심서정이 이를 악물고 화를 냈다. 온채아는 태연하게 캐시미어 망토 코트를 걸치며 피식 웃었다. “율천 오빠가 기다리고 있어서요. 먼저 가볼게요.” 심서정은 그녀의 시선을 따라 통유리창 밖을 내다보았다. 주율천의 차가 이미 마당에 서 있었다. 그 순간 심서정은 화가 나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때 주율천과 온채아의 결혼을 허락했던 건 온채아가 다루기 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언제든지 상대를 물어뜯을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차에 오른 온채아가 주율천에게 물었다. “오래 기다린 거 아니죠?” “아니. 나도 금방 도착했어.” 주율천이 그녀의 손을 잡고 치마를 내려다보았다. 치마 밑으로 드러난 곧고 하얀 다리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얇게 입었어?” 온채아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차 안에는 히터가 있고 본가에는 난방이 되잖아요.” 한의원에서 진료할 땐 환자들에게 절대 몸을 차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지만 정작 본인에게는 무심했다. 주율천도 달리 방법이 없었다. “감기 걸려서 열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그럼 약 먹으면 되죠.” 감기 치료가 가장 쉬웠다. 약 한 첩만 먹어도 절반 가까이 나았다. 지난 3년간 매번 그랬기에 경험이 많았다. 주율천이 그녀를 돌봐주는 건 기대도 하지 않았고 기댈 만한 사람도 없었다. 자기 몸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온채아의 모습에 주율천은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해? 내가 남편으로서 널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잖아.” 그 말에 온채아는 흠칫 놀랐다. “어제 준 선물 안 뜯어봤어요?” “아직 안 뜯어봤어.” 주율천이 덤덤하게 말했다. “생일 선물이라며? 생일에 뜯어보려고.” “...” 그것도 나쁘지 않았다. 그러면 그녀에게도 준비할 시간이 충분해지니까. 공통 주제가 별로 없었던 두 사람은 그 후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주율천이 고개를 돌려보니 온채아가 창밖의 차량 행렬을 조용히 쳐다보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지만 참으로 순하고 얌전한 모습이었다. ‘누구한테도 해를 끼칠 것 같지 않은 사람인데 서정이는 왜 이렇게 채아를 못마땅해하는지 모르겠네.’ 주율천이 입술을 적시고 화제를 찾으려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대표님, 심서정 씨가 맞선 보러 가셨습니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크지도 작지도 않았으나 온채아의 귀에 똑똑히 들렸다. 차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무거워졌다. 온채아는 주율천이 분노를 억누르려고 애쓰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는 절제를 잘하는 사람이라 좀처럼 화를 내지 않았다. “위치 보내.” 주율천의 얼굴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전화를 끊고 시선이 온채아에게 향했을 땐 표정이 차분했지만 말투에는 타협의 여지가 없었다. “채아야, 급한 일이 생겨서 가족 모임에 같이 못 갈 것 같아.” 그 급한 일이 무엇인지 온채아는 까발리지 않았다. 까발려봤자 본인만 더 초라해지니까. “알았어요.” 온채아가 고개를 살짝 숙이고 말했다. “진 기사님, 앞에서 세워주세요.” 차가 천천히 멈췄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율천이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온채아가 의아한 눈빛으로 쳐다봤다. “안 내리고 뭐 해요? 차 길가에 오래 세워선 안 돼요.” “알았어...” 주율천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스쳤지만 그녀의 다정한 눈빛을 마주하니 더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차에서 내렸다. 성씨 가문의 매달 한 번 있는 가족 모임은 다른 명문가처럼 그렇게 시끌벅적하지 않았다. 주율천까지 포함해서 총 다섯 명뿐이라 조용하기 그지없었다. 심지어 제사를 지낼 때처럼 조용한 분위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온채아가 본가에 들어서자 집사가 그녀를 주방으로 안내했다. “온채아 씨, 어르신께서 채아 씨가 오시길 손꼽아 기다리셨어요.” 온채아는 입을 굳게 다문 채 고개를 끄덕이고는 옆으로 늘어뜨린 주먹을 꽉 쥐었다. 주방 안. 소원희가 가운데 자리에, 왼쪽에 그녀의 큰딸과 둘째 딸이 차례로 앉아 있었다. 온채아는 들어가자마자 차례대로 인사했다. “할머니, 큰 고모, 둘째 고모.” 성씨 가문의 그녀 또래의 항렬에 맞춘 호칭이었다. 두 고모가 심드렁하게 대답했고 소원희는 뒤에 주율천이 없는 걸 보고는 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율천이는?” 온채아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갔어요.” 바로 그 순간 날카로운 호통과 함께 찻잔이 날아왔다. “나가서 꿇어!” 제6화 성씨 본가를 나설 때 온채아는 다리를 더욱 심하게 절뚝거렸다. 지난 3년간 주율천이 함께 오지 않을 때면 늘 이런 식으로 벌을 내렸기에 온채아는 덤덤하기만 했다. 하지만 주율천은 알지 못했다. 그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진심을 증명할 때마다 그녀를 절망의 끝으로 몰아가고 있다는 것을. 성씨 가문은 남편의 마음조차 붙잡지 못하는 무능한 아가씨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집사 성탁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어요? 좀 심각한 이유라도 둘러대서 어르신을 속였다면 이렇게까지 다치진 않았을 텐데요.” “집사님.” 온채아의 맑은 얼굴에 원망의 기색이라곤 전혀 없었다. “할머니는 저를 키워주신 은인이세요. 다른 사람은 속여도 할머니는 절대 속일 수 없어요.” “어휴.” 성탁수의 두 눈에 진심 어린 따뜻함이 더해졌다. 맞아서 새빨갛게 부은 그녀의 손바닥을 보며 말했다. “지체하지 말고 어서 병원에 가서 치료받아요.” “네.” 온채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이 운전기사 진명환을 진작 돌려보낸 터라 온채아는 홀로 가는 수밖에 없었다.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극심한 통증이 전해졌다. 어릴 때부터 온채아는 소원희가 신데렐라 속 악독한 계모의 환생은 아닌지 의심했었다. 주씨 가문의 어르신 최해경은 기껏해야 심서정에게 정원에서 무릎을 꿇으라고 했지만 성씨 가문의 어르신 소원희는 가정부들에게 그녀를 자갈이 깔린 길로 끌고 가 무릎을 꿇게 했다. 겨울이라 무릎을 금방 꿇었을 땐 오히려 시원했다. 눈이 쌓여 있었으니까. 춥긴 해도 그다지 아프진 않았다. 하지만 한참을 꿇다 보면 눈이 녹아내려 날카롭고 울퉁불퉁한 자갈만 남게 된다. 온몸이 얼어붙었을 무렵 가정부가 회초리를 들고 와 손바닥을 때렸다. 그때의 고통이 가장 심했는데 살이 다 터지고 피도 흘렀다. 성씨 본가가 둘레 산길 쪽에 있었고 산과 강에 인접해 있어 경치가 그야말로 절경이었다. 온채아가 추가 요금까지 내고 겨우 콜택시를 불렀지만 밤이 깊은 데다가 눈까지 내리고 있어 기사는 산 아래에서 기다리겠다고 했다. 산을 내려가는 한 걸음 한 걸음이 그녀에겐 고통이었다. 한겨울임에도 통증으로 등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눈길이 미끄러운 도로 위, 멀리서 검은색 벤틀리 리무진이 천천히 달리고 있었다. 눈이 예리한 기사가 무의식적으로 속도를 내며 따라갔다. “도련님, 앞에 저분 아가씨 같은데요?” 뒷좌석에 앉은 남자는 의자에 기댄 채 긴 다리를 느슨하게 꼬고 있었다. 어둠에 가려진 얼굴이 더욱 날카롭고 엄숙해 보였다. 누가 봐도 높은 자리에 있는 권력자였다. “그래.” 기사의 말에도 눈 한 번 깜빡하지 않고 덤덤하게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조수석에 앉은 비서가 더는 참지 못하고 말했다. “도련님, 아가씨를 그냥 이대로 두실 건가요?” “신경 쓰고 싶어?” 남자의 낮고 매력적인 목소리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비서는 더는 찍소리도 하지 못했다. 한참 뒤 남자는 앞 유리를 통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온채아의 가냘픈 뒷모습을 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주율천이 오늘 밤 뭐 하러 갔는지 알아봐.” “이미 알아봤는데 아마 지금 심서정과 달콤한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겁니다.” 비서가 아주 빠르게 대답했다. “도련님, 아가씨가 눈밭에서 몇 시간은 무릎 꿇었을 텐데 더 버틸 수 있을지 걱정이에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비틀거리며 걷던 그녀가 힘없이 쓰러졌다. “도련님, 제가...” 쾅. 차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남자는 차가운 얼굴로 내려 눈밭에 쓰러진 온채아를 캐시미어 코트 속으로 끌어안고 번쩍 들어 올렸다. 비서가 황급히 내려 뒷문을 열었다. “어디로 갈까요? 병원으로 가실 건가요?” “일단 집으로 가자.” “알겠습니다.” “의사 불러.” “이미 연락했어요.” 기사가 눈치 있게 히터 온도를 높였다. 차 안 조명이 켜져 있었다. 남자의 시선이 그녀의 무릎에 닿은 순간 새까만 눈동자에 냉혹한 빛이 스쳤지만 말투는 여전히 무심했다. “참 세게도 때렸다.” 비서가 중얼거렸다. “어르신이 언제 가볍게 때린 적이 있었나요?” “윤혁이 요 며칠에 귀국한다고 했지?” “네.” “준비해.” “어느 정도까지 준비할까요?” 비서를 힐끗거리던 남자의 두 눈에 사나운 기운이 담겼다. “너라면 어떻게 하겠어?” ... 온채아가 깨어났을 때 몸이 힘이 하나도 없을 정도로 나른했다. 하지만 그리 힘들진 않았다. 원래 부어오르고 아파야 할 손바닥과 무릎도 보기엔 끔찍했지만 별로 아프지 않았다. 이틀간 욱신거리던 꼬리뼈도 한결 나아졌다. 하지만 그녀는 여기 있어선 안 되었다. 온채아는 미간을 찌푸리며 호텔 프런트에 전화해 상황을 확인하려 했다. 그런데 몸을 움직인 순간 몸에서 옅은 침향목 냄새가 났다. 잠깐 멍해졌다가 정신을 차린 뒤 씩 웃고는 침대 옆 서랍 위에 놓인 익숙한 특제 연고를 집어 들고 체크아웃했다. 집으로 돌아와 보니 분위기가 유난히 화목했다. 지난 이틀간 분위기가 불편했던 게 그녀라는 불청객 때문이었던 것처럼. “채아 씨 왔어요?” 심서정이 환히 웃으며 인사했다. 어젯밤에 주율천이 그녀를 잘 달랜 모양이었다. 온채아는 심서정과 말을 섞을 기분이 아니었지만 심서정은 그냥 넘어갈 생각이 없는 듯 가까이 다가와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눈부시게 아름다운 핑크 다이아몬드 귀걸이를 자랑했다. 수집 가치가 있는 희귀한 핑크 다이아몬드였는데 온채아가 오랫동안 갖고 싶었던 보석 세트였다. 주율천은 나중에 경매장에 다시 나오면 사서 온채아에게 주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런 연한 핑크가 그녀에게 잘 어울린다면서 하고 다니면 분명 예쁠 거라고 했었다. ‘심서정한테 선물할 때도 같은 말을 했겠지.’ 심서정은 온채아의 얼굴에 스친 실망감을 놓치지 않고 고개를 빳빳이 들었다. “할머니가 그러는데 채아 씨도 보석에 대해 좀 안다면서요? 이 귀걸이 어때요? 율천이가 20억 넘게 주고 낙찰받은 거예요. 그만한 값어치가 있나요?” “그럭저럭요.” 온채아는 속으로 자신을 비웃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아 참, 저랑 율천 오빠 아직 법적 부부예요. 이십몇억이 부부의 공동재산인 건 알고 있죠? 제 기억이 맞다면 정확히 24억 원이었어요.” 그러고는 핸드폰을 꺼내 두드리며 말했다. “형님, 오늘 밤 자정까지 이 계좌로 12억 원을 입금하세요. 안 그러면 할머니한테 이 돈을 달라고 하는 수밖에 없어요.”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서정의 핸드폰에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확인해보니 은행 계좌번호였다. 심서정은 순간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나쁜 년, 맨날 그 할망구로 날 위협해? 12억 원을 어디 가서 구해? 주석현이 죽고 내가 받을 유산이 기껏해야 10억인데. 게다가 아직 받지도 못했다고.’ 그녀에게 돈이 있든 없는 온채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뒤 딱히 할 일이 없어 방 정리를 시작했다. 필요 없는 물건들을 미리 정리해둬야 떠날 때 훨씬 수월할 테니까. 온채아는 우유부단한 사람이 아닌지라 물건들을 쓰레기통에 가차 없이 버렸다. 결혼할 때 입었던 웨딩드레스마저 오경애에게 아래층으로 옮겨 버려달라고 했다. 그때 마침 집으로 돌아온 주율천이 그 모습을 보고 말았다. 그의 시선이 웨딩드레스에 향한 순간 저도 모르게 불안감이 밀려왔다. “웨딩드레스는 왜 꺼냈어?” 온채아는 눈을 피하지 않고 차분하게 답했다. “버리려고요.” 쓸모없는 건 다 버릴 생각이었다. 제7화 평소처럼 차분한 목소리였지만 주율천은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찌릿했다.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갑자기 왜 버려? 평소 이 웨딩드레스를 엄청 아꼈잖아.” 온채아는 부정하지 않았다. 지난 3년간 그녀는 옷장에 특별히 자리를 마련해 웨딩드레스를 걸어두었고 매년 세탁소에 보내 관리하기도 했다. 그렇게 아낀 이유는 인생에서 결혼이 한 번뿐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웨딩드레스를 당연히 기념으로 잘 간직해야지. 하지만 지금은 이혼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다. 주율천이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할지도 모르는데 남겨둬서 뭘 하겠는가? 웨딩드레스는 그녀처럼 이 집에서 불필요한 존재였다. 온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망가졌어요. 큰 구멍이 난 걸 며칠 전에 봤지 뭐예요?” “그렇다고 그냥 이렇게 버려?” 주율천은 그녀가 억지로 웃는 모습을 보고 아쉬워한다고 생각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웨딩드레스 가게에 연락해서 고칠 수 있는지 물어볼게...” “괜찮아요.” 온채아는 고개를 젓고는 주율천을 똑바로 쳐다봤다. “이미 망가진 건 고칠 수 없어요.” 그녀가 말한 건 사람의 마음이었고 이 결혼이었다. 말을 마친 온채아는 주율천이 뭐라 더 말하기 전에 집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걸음이 어딘가 이상한 걸 보고서야 주율천은 마침내 생각난 듯 성큼성큼 다가갔다. “또 다쳤어? 이삼일이나 지났는데 왜 아직도 절뚝거려?” ‘이제야 관심을 보여? 그런데 너무 늦었어.’ 주율천이 죄책감이라도 느끼게 하려고 온채아는 고개를 숙이고 솔직하게 말했다. “원래 거의 나았는데 어젯밤 성씨 본가의 눈밭에서 무릎을 네 시간 꿇었어요.” “뭐?” 주율천은 충격에 말을 잇지 못했다. 붉게 부은 그녀의 손바닥을 본 순간 눈빛이 급격하게 흔들렸다. “손은 또 왜...” 온채아가 눈을 깜빡였다. “맞았어요.” 목소리가 차분하기 그지없었고 억울한 기색조차 없었다. 주율천이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렇게 오래 꿇었어? 그리고...” 더 생각하기가 두려웠다. ‘채아 그래도 성씨 가문의 아가씨 아니었어? 한 번 다녀왔는데 왜 이렇게 심하게 다친 거야?’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던 온채아는 한때 온 마음을 다해 그와 결혼하고 싶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땐 정말로 주율천과 백년해로할 꿈을 꿨었다. 온채아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마음속 씁쓸함을 억누르고 웃으며 입을 열었다. “오빠가 같이 안 갔으니까요.” 주율천이 마음속의 불쾌함을 애써 참으며 말했다. “지금 웃음이 나와? 안 아파?” “아파요.” 온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젠 익숙해요.” “익숙하다고?” “네.” 온채아는 손바닥을 만지면서 마치 남의 일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오빠가 같이 안 가면 늘 이렇게 맞았어요.” 사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소원희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녀에게 벌을 내리곤 했다. 자갈이 깔린 그곳은 온채아를 위해 특별히 만든 곳이었다. 성씨 가문에 온 지 1년도 안 됐을 무렵 고작 여섯 살밖에 안 된 그녀는 무릎을 꿇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꿇어야 소원희가 만족하는지도 잘 알고 있었다. 무릎, 종아리, 발등이 자갈과 완벽히 맞닿아 일직선을 이루어야 했다. 주율천은 몸을 숙여 온채아의 긴 치마를 살짝 들추었다. 무릎이 심하게 부어 있었고 커다란 멍이 퍼져 있었다. 종아리 피부도 온전한 곳 없이 온통 피멍이었다. 피부가 하얗고 부드러워 상처가 더욱 끔찍해 보였다. 이틀 전 심서정의 살짝 붉어진 무릎과는 그야말로 비교도 안 될 정도였다. 분노가 치밀어 오른 주율천은 온채아를 번쩍 안아 소파에 앉힌 뒤 얼굴을 찌푸렸다. “이렇게 맞았는데 왜 나한테 전화 안 했어?” 주씨 가문과 성씨 가문이 예전에는 막상막하였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성유준이 성씨 가문을 맡아 과감한 개혁을 진행한 끝에 두 가문의 격차가 벌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주율천의 아내를 이렇게 함부로 괴롭혀도 되는 정도는 아니었다. 온채아는 맑은 눈동자로 그를 보면서 일부러 말했다. “아까 갈 때 급한 일 있다고 했잖아요. 중요한 일인 것 같아서 방해하고 싶지 않았어요.” 주율천은 할 말을 잃었다. 그러다가 문득 심서정의 맞선을 막으러 간 바람에 온채아가 이렇게 다친 거라면 끝까지 온채아를 버리고 갔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망설이다가 고개를 들었는데 온채아의 순하고 얌전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주율천은 가슴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약상자를 가져와 약을 발라주며 다정하게 물었다. “전에 맞았을 때 왜 한 번도 나한테 말 안 했어?” 온채아는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그녀는 진심으로 주씨 가문의 둘째 안주인 역할을 잘하고 싶었고 주율천이 좋은 반쪽이 되어줄 거라 믿었다. 사람들의 눈에 성씨 가문은 온채아의 친정이나 다름없었다. 누가 자기 남편 앞에서 친정이 얼마나 혹독하게 대했는지 말하겠는가?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고 남편이 그녀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며칠 전에 깨달았다. 별로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아예 사랑한 적조차 없었다는 것을. 다행히 온채아는 누구의 사랑에 의지해 살아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온채아가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오빠가 나 때문에 성씨 가문이랑 껄끄러워지는 게 싫어서요. 어쨌거나 은성 그룹이 성씨 가문이랑 계속 협력해야 하잖아요.” 진실을 얘기할 수 없었던 그녀는 그저 진심을 담아 둘러댔다. 온채아의 말에 주율천은 목구멍에 뭔가 막힌 듯 말을 잇지 못했고 그녀에게 너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이해심이 그녀에게 상처를 주는 구실이 돼서는 안 되었다. 주율천은 마음속의 답답함을 억누르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고는 온채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달랬다. “미안해. 이번엔 내가 잘못했어. 결혼기념일도 같이 보내지 못했고.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꼭 사줄게.” 집, 차, 보석, 가방, 뭐든지 다 사줄 생각이었다. 지금까지 온채아에게 돈은 아낌없이 썼다. “음...” 온채아는 잠시 생각하다 맑고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오빠한테 준 생일 선물을 좋아했으면 좋겠어요.” “그게 다야?” “네.” 온채아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스무 살 때 온채아의 생일 소원은 주율천과 결혼하는 것이었지만 스물넷이 된 그녀의 소원은 주율천과 깔끔하게 헤어지는 것이었다. 주율천의 진지한 눈빛과 마주친 순간 온채아는 마음이 약간 찔렸다. 그런데 그때 주율천의 핸드폰이 울렸다. 일반 벨 소리와 다른 전용 벨 소리였다. 온채아가 화면을 힐끗 봤는데 발신자는 역시나 심서정이었다. 주율천이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굳은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많이 다쳤어? 어쩌다가 발을 삐끗한 거야? 기사님을 부를 거지, 왜 혼자 가고 그래? 위치 보내. 지금 바로 갈게.” 그러고는 바로 나가려 했다. 그런데 온채아에게 약을 발라주던 중이라 약 묻은 면봉을 보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온채아는 면봉을 받아들고 배려 깊게 말했다. “내가 알아서 바를게요. 바쁜 일 있으면 가봐요.” 우는 아이 떡 하나 더 준다는 말이 있었지만 온채아의 인생은 달랐다. 울고불고 떼를 쓰면 떡은커녕 그녀를 기다리는 건 가문의 징벌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렇게 생각했다. 언젠가 스스로 떡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그것도 아주 많이. “그래...” 주율천이 안도하면서 변명을 덧붙였다. “서정이가 다쳤대. 밖에서 혼자 아이를 케어하기 힘드니까 아무래도 가봐야 할 것 같아.” 그러고는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온채아가 갑자기 질문을 던졌다. “오빠는 왜 형님을 형수님이라 부르지 않아요? 한 번도 못 들어본 것 같아서요.” 제8화 주율천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것 같았다. 발걸음을 멈추고 온채아의 맑은 두 눈을 마주한 순간 저도 모르게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온채아...” 온채아가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더니 나지막하게 말했다. “뭘 그렇게 긴장하고 그래요? 오빠랑 형님이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인 거 알아요. 이름을 부르는 게 익숙한 것도 당연하죠.” 검은색 마이바흐가 정원을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온채아는 소파에 천천히 몸을 기댔다. 그녀 스스로도 이렇게 충동적일 줄은 몰랐다. 이미 얌전하고 착한 척하는 데 익숙해져서 주율천의 죄책감을 이용하여 순조롭게 이혼하면 그만이었다. 그런데 왜 불필요한 말을 덧붙였을까? 천장을 한참 동안 올려다보니 눈이 점점 마르는 것 같았다.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정다슬에게서 전화가 왔다. “채아야, 저녁에 술 한잔할래?” “좋지.” 온채아는 바로 대답했다가 이내 멈칫했다. “그런데 좀 늦을 거야. 건강 관련 라이브 방송이 있는데 아마 10시쯤에 끝날 것 같아.” 한의원의 일이었다. 원래는 그녀의 일이 아니었는데 담당 직원이 일이 생긴 바람에 그녀에게 한 번만 대신해달라고 부탁했다. 온채아는 주씨 가문과 성씨 가문을 고려해 처음엔 거절했지만 동료가 필터를 추가하면 친엄마도 못 알아볼 거라 설득한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동의했다. 외모가 뛰어나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해서 라이브 효과가 놀라울 정도로 좋았다. 그 뒤로 한의원에서 가끔 그녀에게 라이브를 맡기곤 했다. “알았어. 그럼 야근 끝나고 데리러 갈게. 시간 딱 맞을 거야.” “그래.” 정다슬과 몇 마디 나누고 나니 온채아의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곧장 방으로 돌아가 오늘 저녁 방송 자료를 다시 확인했다. 생각해보면 주율천과 결혼한 가장 큰 장점이 바로 자유로워졌다는 점이었다. 주율천은 그녀를 별로 신경 쓰지 않았고 성씨 가문은 그녀가 너무 높이 날아오르지 못하게만 막을 뿐 더 이상 일거수일투족을 조사하지 않았다. 주씨 가문을 어느 정도 의식해야 했으니까. 그 덕에 온채아는 의술을 갈고닦았고 틈틈이 한의원에서 진료를 보기도 했다. 3년 동안 그래도 꽤 많은 돈을 모았다. 저녁 10시에 라이브 방송이 끝났다. 온채아가 기분 좋게 아래층으로 내려오자마자 정다슬의 차가 도착했다. 차에 오른 그녀를 보며 정다슬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기분 좋아 보이네. 이혼이 순조로운가 봐?” “나름 괜찮아.” 온채아의 입꼬리가 씩 올라갔다. “축하주 한잔할 만 해.” 두 사람이 술집에 도착했을 땐 한창 손님이 많은 시간이었다. 다행히 정다슬이 사장과 아는 사이라 미리 자리를 남겨주었다. 정다슬이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온채아가 이미 마신 걸 보고는 실소를 터뜨렸다. “네가 술 마시는 걸 주율천도 알아?” “당연히 모르지.” 온채아가 입가에 보조개를 머금은 채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웃었다. “나도 예전에 몰랐어. 그 사람이 마음에 둔 사람이 심...” “키스해.” “키스해. 키스해.” “형수님, 적극적으로 나가요.” “...” 댄스플로어 쪽에서 터져 나온 함성에 온채아가 하던 말을 멈췄다. 고개를 돌린 순간 표정이 확 굳어졌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던 정다슬의 안색도 눈에 띄게 어두워졌다. “저 사람 주율천이지?” 주율천의 준수한 얼굴이 흔들리는 조명 아래 선명하게 보였다. 품에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를 안고 있었는데 참으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늘 침착하고 이성을 잃지 않던 그가 애정 가득한 눈빛으로 누군가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순간 정다슬이 충격받은 얼굴로 입을 쩍 벌렸다. “주율천이 마음에 품었다는 여자가 심서정이었어?” “응. 아주 충격적이지?” 온채아는 잔에 남은 술을 단숨에 들이켜고는 살짝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예전엔 몰랐어.”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심서정이 발끝을 세워 키스했다. 그리고 주율천은 본능적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쌌다. 정말 잘 어울리는 한 쌍이었다. “우와!” “형수님 대박!” “형 오늘 집에 못 가겠는데?” “...” 온채아보다 나이가 많으면서도 늘 형수라 부르며 놀리던 사람들이 흥분한 얼굴로 소리쳤다. 정다슬이 벌떡 일어나자 온채아가 급히 그녀를 잡았다. “가지 마.” “나 그 정도로 바보 아니야.” 정다슬은 재빨리 사진 두 장을 찍은 다음 온채아를 잡아당겼다. “너만의 계획이 있는 거 알아. 여기 너무 더러우니까 다른 데로 가자.” 온채아는 술을 못하면서도 마시고 싶어 하는 스타일이었다. 단 두 잔에 다음 날 오후가 되어서야 깨어났다. 머리가 지끈거렸고 눈도 살짝 부었다. 잠시 후 계좌에 거액이 입금되었다는 문자를 본 순간 잘못 본 건 아닌지 의심했다. 은행 계좌로 12억 원이 입금된 것이었다. 온채아는 눈을 비비고 입금한 사람이 심서정임을 확인하고서야 어제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정말로 보낼 줄은 몰랐다. 이것만 봐도 심서정이 최해경을 얼마나 두려워하는지 알 수 있었다. 다만 어젯밤 그 둘의 모습으로 보아 십중팔구 주율천이 준 돈일 것이다. 부부의 재산 중에서 절반은 온채아의 몫이었기에 당연히 받아야 했다. 온채아는 핸드폰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 꿀물을 한 잔 탔다. 오경애가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 말했다. “작은 사모님, 뭐 좀 드시겠어요? 방금 약선 요리랑 제비집 좀 만들었어요. 아니면 속이라도 달래게 콩나물국이라도 만들어드릴까요?” 1년 사계절, 각 절기에 맞춰 온채아는 그녀와 주율천의 건강 상태에 맞는 약선 처방을 오경애에게 건넸다. 온채아는 속이 울렁거려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다. “제비집 좀 주세요.” 그러고는 집 안을 둘러보면서 덤덤하게 물었다. “율천 오빠랑 형님 어젯밤에 안 들어왔어요?” “그런 것 같아요.” 오경애는 깊이 생각하지 않고 제비집을 가지러 주방으로 들어갔다. 온채아가 달달한 걸 좋아하는 걸 알고 황설탕을 조금 더 넣었다. 거실에 있던 주시윤이 뛰어오더니 허리에 손을 얹고 혀를 내밀었다. “어젯밤에 삼촌이 우리 엄마랑 같이 있었어. 너 이제 삼촌한테 버려질 거고 더는 숙모가 아니야. 너 같은 나쁜 여자는 삼촌이랑 어울리지 않아.” 마지막엔 씩씩거리면서 통통한 손가락으로 온채아에게 삿대질하기도 했다. “그래.” 온채아는 잠깐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의 통통한 손을 살짝 옆으로 쳐냈다. “그럼 네 엄마가 삼촌이랑 결혼하면 넌 뭐가 되는지 알아?” “뭐가 되는데?” “짐 덩어리.” 온채아는 몸을 숙여 아이의 얼굴을 쓰다듬으면서 나지막하게 말했다. “앞으로 넌 그냥 짐 덩어리야. 삼촌이랑 네 엄마가 동생이라도 낳으면 더 이상 아무도 널 좋아하지 않을 거야. 어때? 기쁘지? 짐 덩어리야.” “엉엉...” 주시윤이 목청 터져라 울면서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재빨리 태블릿 PC를 찾아 심서정에게 영상통화를 걸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화가 난 주시윤이 온채아를 노려보며 계속 전화를 걸었다. 눈물이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엉엉... 아니야. 삼촌이랑 엄마 동생 안 낳을 거야.” 뭔가를 증명하려는 듯 몇 번을 걸었지만 여전히 아무도 받지 않았다. 온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봐봐. 내 말 맞지? 벌써 널 좋아하지 않아.” 사실 그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었다. 어젯밤 두 사람의 분위기를 보면 심서정의 뱃속에 이미 동생이 들어섰을지도 모른다. “아니야. 엉엉...” 주시윤이 팔을 들어 눈물을 거칠게 닦았다. 하지만 눈물이 계속 멈추지 않고 흘러내렸다. 온채아가 꿀물을 들고 식탁에 앉았다. 핸드폰을 열자 정다슬의 문자가 떴는데 한 연예 기사를 보냈다. 마침 제비집을 들고나온 오경애가 울음소리를 듣고 물었다. “시윤 도련님 왜 저렇게 심하게 울어요?” 온채아가 핸드폰 화면을 오경애에게 보여줬다. “이 뉴스를 봤나 봐요. 자기 엄마가 내연녀가 됐는데 당연히 속상하겠죠.” 뉴스 사진과 제목을 본 오경애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은성 그룹 대표 주율천, 밤늦게 한 여성과 술집에서 뜨거운 키스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