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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에서
강지연과 온하준의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 온하준의 첫사랑이 귀국했다. 그날 밤, 강지연은 온하준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첫사랑의 이름을 부르며 홀로...
Chương (1)
第1章
강지연과 온하준의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 온하준의 첫사랑이 귀국했다.
그날 밤, 강지연은 온하준이 그토록 그리워하던 첫사랑의 이름을 부르며 홀로 화장실에서 욕망을 해소하는 것을 발견했다.
‘이게 온하준이 5년째 나를 건드리지 않았던 이유구나.’
온하준이 말했다.
“강지연, 하나 혼자 돌아와 있는 게 불쌍하잖아. 나는 친구로서 도와주는 거야.”
“알았어.”
온하준이 또 말했다.
“강지연, 오늘 연회에는 내놓을만한 비서가 필요해. 하나가 너보다 잘할 것 같아.”
“그래, 데리고 가.”
강지연이 더 이상 화내지 않고, 울지 않고, 신경을 쓰지 않을 때, 온하준이 도리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너 왜 화를 안 내?”
화가 안 나니까 내지 않았을 뿐이다. 왜냐하면 강지연은 떠나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결혼은 고이다 못해 썩은 물과 같았다. 그녀는 그동안 몰래 영어 공부를 하고 시험을 보면서 유학 준비를 했다.
모든 준비가 끝난 날, 그녀는 이혼협의서를 꺼냈다.
“장난하지 마. 네가 나를 떠나서 살 수 있겠어?”
강지연은 항공권을 예약하고 멀리 떠나 연락을 완전히 끊었다.
온하준이 다시 강지연의 소식을 보게 된 건, 그녀가 붉은 드레스를 입고 해외에서 전통 무용을 하는 모습이 인터넷에서 열기를 일으킬 때였다.
그는 이를 악물었다.
“강지연, 네가 어디에 있든 꼭 잡아 오고 말 거야!”
제1화
욕실 안에서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온하준이 샤워를 하고 있었다.
새벽 세 시, 그는 막 돌아온 참이었다.
강지연은 욕실 문 앞에 서 있었다. 그에게 상의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었다.
그녀는 조금 긴장했다. 이제 막 그에게 말하려는 이 일을, 그가 듣고 과연 동의해 줄지 알 수 없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생각하던 찰나, 안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다.
강지연은 귀를 기울여 한참을 듣고서야 그 소리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그가 스스로 욕구를 해결하고 있는 소리였다...
거칠게 섞인 숨소리와 억눌린 신음이 한 번 한 번, 무수한 망치질처럼 그녀 가슴을 촘촘하고도 강하게 내려쳤다.
아려 오는 통증이 파도처럼 번져 나갔고, 그녀는 그 아픔 속에 잠겨 허우적거리면서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사실 오늘은 두 사람의 결혼기념일이었다. 강지연과 온하준이 결혼한 지 다섯 해째 되는 날이었다.
하지만 그들 사이에는 단 한 번도 부부 사이의 관계가 없었다. 알고 보니 그는 이렇게 혼자 해결할망정 그녀에게는 손가락 하나 대고 싶지 않았던 걸까?
온하준의 숨소리가 점점 더 가빠질수록, 그는 마치 극도로 억누르다 못해 터져 나오는 듯 낮게 소리를 뱉었다.
“하나야...”
그 한마디가 그녀에게 마지막 일격이 되어 내리꽂혔다.
강지연의 가슴속에서 쿵 하는 소리가 울렸고,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 가루가 되어버린 것 같았다.
그녀는 필사적으로 입을 틀어막아 울음을 터뜨리지 않도록 버텼다. 그리고 바로 몸을 돌려 도망치듯 뛰어가려 했다.
하지만 첫걸음을 내딛자마자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세면대에 부딪혔고,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강지연?”
욕실 안에서 온하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직 숨이 완전히 가라앉지 않은 탓에 애써 목소리를 고르려 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거친 숨소리는 여전히 짙게 배어 있었다.
“나... 나 화장실 가려고 했어. 네가 샤워 중인 줄은 몰랐어...”
그녀는 서툰 거짓말을 늘어놓으면서 허둥지둥 세면대를 붙잡고 어떻게든 일어나려고 애썼다. 하지만 마음이 급할수록 꼴은 더 우스꽝스러워졌다.
바닥에도, 세면대 위에도 물이 흥건했다. 그녀는 겨우 몸을 일으켰지만, 그 순간 온하준이 이미 나와 있었다. 서둘러 걸친 흰색 목욕가운은 제대로 여며지지도 않았고, 그럼에도 허리끈만은 단단히 동여맨 상태였다.
“넘어졌어? 내가 안아 줄게.”
온하준은 그녀를 안아 올리려는 듯 손을 뻗었다.
그녀는 통증 때문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지만, 그럼에도 그의 손을 밀어냈다.
초라하면서도 단호한 목소리가 나왔다.
“괜찮아, 나 혼자 일어날 수 있어.”
그 말 이후, 강지연은 또 한 번 미끄러질 뻔하며 비틀거리다가 한쪽 다리를 절뚝이며 겨우 침실 쪽으로 도망치듯 돌아갔다.
그래, ‘도망치다’는 말이 조금도 틀리지 않았다.
온하준과 결혼한 이 5년 내내, 그녀는 늘 도망치고 있었다.
바깥 세계를 피해 도망치고, 사람들의 이상한 시선을 피해 도망치고, 그리고 무엇보다 온하준의 동정과 연민을 피해 도망쳤다.
온하준의 아내가 절름발이라니...
절름발이가 어떻게 구름 위를 걷는 듯 반듯하고 빛나는, 커리어도 성공한 온하준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녀에게도 원래는 곧고 아름다운 다리가 있었다.
온하준도 곧바로 그녀를 따라 나왔다.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부드러웠고 진심으로 걱정하는 기색이 묻어 있었다.
“많이 다쳤어? 어디 좀 보자.”
“아니, 괜찮아.”
그녀는 이불을 바짝 끌어당겨 몸을 감쌌다.
그 안에 조금 전 자신의 초라함까지 함께 꾹꾹 숨겨 넣었다.
“정말 괜찮아?”
온하준의 걱정은 진심처럼 들렸다.
“응.”
그녀는 그를 등진 채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
“그럼 자는 거야? 아까 화장실 간다고 하지 않았어?”
“이제는 또 안 가고 싶어졌어. 그냥 자자.”
그녀가 조용히 말했다.
“맞다, 오늘 우리 기념일이잖아. 선물 하나 사 왔어. 내일 일어나서 열어 보고 마음에 드는지 봐.”
“응.”
선물은 침대 머리맡에 놓여 있었다.
그녀는 이미 힐끗 본 터였다.
하지만 굳이 포장을 뜯어보지 않아도 알았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해마다 크기가 똑같은 상자, 그 안에 들어 있는 것도 늘 똑같은 시계 한 개였다.
서랍 속에는 생일 선물을 합쳐 이미 똑같은 시계가 아홉 개나 파묻혀 있었다. 이건 열 번째였다.
대화는 거기서 끝났다.
그는 불을 끄고 누웠다.
공기 속에는 샤워 후의 축축한 바디워시 향이 번져 있었지만, 그녀는 침대가 어느 쪽으로 꺼지는지조차 거의 느끼지 못했다.
2m짜리 큰 침대 위에서 그녀는 이쪽 끝에, 그는 저쪽 끝 가장자리에 누워 있었다. 둘 사이에는 사람을 세 명쯤 더 눕혀도 될 만큼의 거리가 있었다.
둘 중 누구도 “하나”라는 이름을 꺼내지 않았다. 욕실에서 그가 방금 무슨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단 한마디 언급하지 않았다.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강지연은 꼼짝 없이 똑바로 누운 채 눈가가 화끈거릴 만큼 아려 왔다.
하나, 본명은 이하나. 그녀는 온하준의 대학 동기였고, 그의 첫사랑이자 여신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할 때, 이하나는 해외로 떠났고 둘은 결국 헤어졌다. 그때 온하준은 한동안 완전히 무너져 매일 술에만 기대어 살았다.
강지연과 그는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녀는 인정한다. 중학교 때부터 이미 그녀는 몰래 그를 좋아했었다.
그때 온하준은 학교에서 가장 잘생긴 남학생이었고, 차갑고 도도한 수재였다.
반면 그녀는 예체능 쪽이었다. 예쁘기는 했지만, 예쁜 아이는 어디에나 있었다.
성적이 전부인 고등학교 시절에 예체능은 그리 눈에 띄지 않는 부류였고, 심지어 편견 어린 시선까지 따라붙었다.
그래서 그 마음은 언제나 그녀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남았다. 언젠가 자신의 발로 그 앞에 당당히 서게 될 줄은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해 여름, 무용학원에서 집으로 방학을 보내러 돌아왔던 그녀는 마침 완전히 무너진 상태의 그와 마주치게 되었다.
그날 밤, 온하준 역시 잔뜩 취해 있었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길 위를 S자 모양으로 헤매다가 신호를 보지도 않고 그대로 길을 건너려 했다.
마침 쏜살같이 달려오던 차 한 대가 미처 속도를 줄이지 못했고, 강지연은 불안한 마음에 그의 뒤를 따라가다 마지막 순간 그를 밀쳐냈다.
밀려난 쪽은 그였고, 차에 치인 쪽은 그녀였다.
강지연은 무용 전공생이었다. 이미 대학교 진학이 확정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 한 번의 교통사고로 그녀는 다리를 절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춤을 출 수 없게 되었다.
그 후로 온하준은 술을 끊고 그녀와 결혼했다.
그는 언제나 그녀에게 미안해했고, 언제나 그녀에게 감사해했고, 언제나 낮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대했다.
하지만 동시에 언제나 물처럼 차갑고 담담했다.
온하준은 강지연에게 수없이 많은 선물을 안겼고 넉넉한 돈도 쥐여 주었다. 하지만 오직 하나 사랑만은 주지 않았다.
그녀는 시간이 모든 것을 덮어 주리라 믿었다. 시간이 모든 상처를 둥글게 깎아 줄 거라고도 믿었다.
하지만 상상도 하지 못했다.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는 여전히 ‘이하나’라는 이름을 그렇게 깊이 새기고 있었을 줄은. 심지어 스스로를 위로하는 그 순간에도 부르던 이름이 여전히 그 이름일 줄은...
결국 바보 같고 순진한 쪽은 언제나 그녀였다.
강지연은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휴대폰 속 메일 한 통을 이 긴 밤 동안 백 번은 넘게 열어본 것 같았다.
해외의 한 대학교에서 보내온, 그녀의 합격 통지 메일이었다. 그리고 그 메일이야말로, 오늘 밤 원래라면 그와 상의하려 했던 일이었다.
그녀가 해외로 유학을 가도 되는지, 가도 괜찮은지 물어보려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니 굳이 그와 상의할 필요도 없게 된 것 같았다.
5년의 결혼 생활.
수없이 뒤척이며 보냈던 밤들.
마침내 이 순간부터 하나하나 끝을 세어 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온하준이 일어났을 때 강지연은 여전히 자는 척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바깥에서 그가 가정부에게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밤 약속이 있어서 늦을 거예요. 지연이한테는 기다리지 말고 일찍 자라고 해 주세요.”
당부를 마친 그는 다시 침실로 돌아와 한 번 더 그녀를 살폈다.
강지연은 여전히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린 채 누워 있었고 눈물은 이미 베개를 흠뻑 적신 뒤였다.
평소 같으면 그가 회사에 나갈 때마다, 그녀는 미리 그가 입을 옷을 챙겨 두고 옆에 잘 정리해 두고는 했다. 그는 늘 그대로 입고 나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오늘, 강지연은 그러지 않았다.
온하준은 혼자서 옷방에 들어가 양복을 골라 입고, 그대로 회사를 향해 떠났다.
그제야 그녀는 눈을 떴다. 눈이 퉁퉁 부은 느낌이었다.
휴대폰 알람이 울렸다. 그녀가 스스로 맞춰 둔 시간이었다. 일어나 영어를 공부해야 할 시간.
결혼 이후, 다리 때문에 그녀는 하루의 90%를 집 안에서만 보냈다.
더 이상 밖에 나가지 않았고, 그저 하루를 잘게 잘라 매 시간마다 할 일을 억지로 만들어 채우는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알람을 끄고, 휴대폰을 들고 이것저것 앱을 무의미하게 넘겨 보기만 했다.
머릿속은 웅웅거리는 실타래처럼 엉켜 있어서 무엇을 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SNS에서 문득 어떤 영상을 스치듯 보게 되었다.
화면 속 인물이 너무 익숙해 보였다.
계정을 다시 확인해 본 순간 적혀 있는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하나HN]
‘이 빌어먹을 빅데이터...’
게시 시간은 바로 어젯밤이었다.
강지연은 그 영상을 눌러 재생했다.
경쾌한 음악이 먼저 들려왔고, 곧이어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하나, 둘, 셋! 하나야, 돌아온 거 환영해!”
그 목소리는 다름 아닌 온하준의 목소리였다.
제2화
온하준이 결국 금기를 깨고 술을 마셨다. 목소리만 들어도 이미 조금 취한 게 느껴졌다. 하지만 온하준이 이렇게까지 큰 소리로 웃고 떠드는 사람이었나?
강지연이 알고 있는 온하준은 이랬다.
고등학교 때 그는 차갑고 무뚝뚝한 수재였다. 문제집을 풀 때는 말할 것도 없고, 운동장에서조차 그를 좋아하는 여자애가 물을 건네도 한 번도 받아 준 적이 없었다.
나중에 자신의 남편이 된 온하준은 더더욱 공손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감정 기복이란 게 전혀 없는 사람 같았다. 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언제나 담담했다. 너무 담담해서 가끔 그의 손가락에 스치기라도 하면 체온마저 차갑게 느껴질 정도였다.
영상 속 카메라는 사람들 얼굴을 하나씩 훑고 지나갔다.
그 사이로 살짝 취기가 오른 온하준이 보였다. 눈동자에는 빛이 번쩍였고, 그는 잔을 들고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외쳤다.
“이하나, 돌아온 거 환영한다!”
그제야 알았다.
그도 웃을 줄 아는 사람이라는 걸. 그에게도 저렇게 뜨거운 순간이 있다는 걸. 그도 여자의 이름을 이토록 다정하게 불러 줄 줄 안다는 걸.
다만 그 웃음을 그녀에게는 한 번도 보여주지 않았고, 그 뜨거움을 그녀를 향해 준 적도 없으며, 그 입에서 그녀의 이름이 다정하게 나온 적은 더더욱 없었다.
“사모님, 일어나셨어요?”
문밖에서 진경숙의 목소리가 들렸다.
강지연의 하루는 늘 정해진 패턴대로 흘러갔다.
진경숙은 아직 그가 일어날 기척이 없자, 혹시 도움이 필요할까 봐 일부러 물어보는 것이다. 어쨌든, 강지연의 다리에 문제가 있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강지연은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일어났어요, 바로 나갈게요.”
말을 꺼내는 목소리가 쉰 데다가 코끝이 막힌 것처럼 뭉개져 나왔다.
아침 식탁에는 진경숙이 만든 만두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강지연은 하나를 겨우 먹고는 더 이상 넘어가지 않았다.
“사모님, 점심하고 저녁은 뭐로 챙겨 드릴까요?”
진경숙이 우유 한 잔을 건네며 물었다.
“아무거나요, 그냥 먼저...”
그녀는 예전처럼 온하준이 좋아하는 걸 먼저 준비하면 된다고 말하려다가 뒷부분을 꿀꺽 삼켜 버렸다.
진경숙은 그래도 무슨 말을 하려는지 단번에 알아들었다. 매일 반복되는 대화였으니까. 그래서 서둘러 말했다.
“대표님께서 오늘은 집에서 밥 안 먹는다고 하셨어요. 약속 있으시대요.”
강지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집에 들어와 밥을 먹을 리가 없었다. 조금 전 이미 SNS에서 봤으니까.
이하나는 앞으로 일주일 동안 누가 밥을 사 주는지, 어디에서 무엇을 먹을지, 일정표처럼 차곡차곡 올려놨다.
[역시 학생 때의 감정이 제일 진짜야. 나는 이렇게 많은 오빠들한테 예쁨받는 귀여운 막내 시절로 돌아간 거라고요!]
낮 시간 동안, 강지연은 보통 두 시간 정도 영어 공부를 하고, 그 뒤에는 몇 시간 동안 예술 이론을 공부했다.
스스로에게 할 일을 만들어 주지 않으면 이 끝도 없이 긴 시간을 도대체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 평생을 다 써서 한 사람의 귀가만을 기다리며 보낼 수는 없지 않겠나?
하지만 강지연은 이미 한 번 그렇게 기다려 본 적이 있었다.
그 기다림의 맛은 너무나도 괴로웠다. 그렇지만 오늘은 이전과 조금 달랐다.
이번에 받은 메일은 학교에서 내준 마지막 합격 통지에 가까운 것일 테고, 그녀는 서둘러 등록 의사를 밝혀야 했다.
그래서 오늘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학교에 등록금을 결제하는 일이었다.
휴대폰 화면에 카드 결제 완료 알림이 떠올랐을 때, 그녀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온하준에게서 떠나게 될 날이 또 하루 가까워졌다.
해 질 무렵,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나갈 채비를 했다.
진경숙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사모님, 어디 가세요?”
온하준이 함께하지 않는 이상, 강지연은 거의 밖에 나가지 않는 사람이었다.
“아, 대학교 친구가 여기 근처에서 공연을 해서 잠깐 얼굴 보자고 했어요.”
강지연은 그렇게 말했다. 실제로는 시험장 근처 호텔에서 묵을 생각이었다.
내일 그녀에게는 영어 시험이 있었다. 그것도 아침 시험이었다.
아침에 집에서 출발했다가는 혹시라도 길이 막혀 시험장에 늦을까 봐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마지막으로 시험을 본 건 몇 달 전이었다. 그때는 원하는 점수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유학 지원 마감 시기가 다가와 어쩔 수 없이 먼저 지원서를 넣었고, 설마 붙을 줄은 생각도 못 한 채 며칠 전 다시 이번 시험을 예약한 것이다.
다행히 학교 측에서는 영어 성적을 나중에 보충 제출해도 된다고 했다.
“하지만...”
진경숙은 강지연의 다리를 힐끔 바라보며 말했다.
“제가 같이 가 드릴까요?”
“괜찮아요, 아주머니. 여자들끼리 모이는 자리라 한 명 더 가면 민폐예요.”
강지연은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럼 대표님께는 제가 따로 말씀드릴게요.”
진경숙은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어쩌나 싶어 책임이 두려웠다.
“괜찮아요, 그냥 편하게 약속 즐기라고 해요. 괜히 방해하지 말고. 나도 친구들이랑 다 놀고 나서 전화할 거라고 전하면 돼요.”
강지연은 가방을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그녀의 다리가 불편한 걸 고려해, 결혼할 때 그들이 선택한 신혼집은 엘리베이터가 바로 연결되는 구조였다.
강지연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그대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햇빛이 내리비치는 밖으로 한 발 내디디는 순간, 그녀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잔뜩 움츠렸다. 모자를 눌러쓰고 코트 깃을 세웠다.
다리를 다친 뒤로, 무대 위에서 누구보다 당당하던 강지연은 사라졌다. 절뚝거리는 강지연은 더 이상 사람들 앞에 나설 용기를 잃어버렸다.
진경숙은 항상 말했다. 밖에 나가려면 웬만하면 온하준과 같이 나가라고.
온하준 역시 입버릇처럼 말했다. 자신이 동행하지 않는 이상 그녀는 집에 있는 편이 좋겠다고.
하지만 그들 둘 다 모르는 게 있었다.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건 혼자 나가는 게 아니라 온하준과 함께 나가는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을 바라보는 사람들 눈에는 늘 이런 말이 적혀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저렇게 완벽한 남자가 왜 절뚝거리는 여자랑 결혼했지?’
강지연은 택시를 불러 호텔 쪽으로 향했다.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문득 길가 주차 구역에 세워져 있는 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온하준의 차였다.
“잠깐만요, 여기 세워 주세요.”
그녀는 서둘러 기사에게 말했다.
온하준의 차는 한 음식점 앞에 서 있었다.
어제는 온하준의 친구 중 한 명이 쏘는 자리였고, 오늘은 온하준이 사는 날이라고 이하나가 SNS에 적어 둔 걸 그녀는 분명히 봤다.
강지연은 마치 홀린 듯 차에서 내렸다.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강지연은 곧장 말했다.
“일행이 도착해 있어요. 아마 온하준으로 예약했을 거예요.”
그러면서 온하준 휴대폰 번호 뒷자리를 불러 주었다.
종업원은 강지연을 곧장 안쪽으로 안내했다.
“여기입니다.”
“고맙습니다.”
강지연은 그렇게 인사를 건네고 혼자 문 앞에 남겨졌다.
사실 그녀도, 자신이 여기에 도대체 왜 온 건지 잘 몰랐다.
집에 있을 때까지는 가슴속에서 자꾸 뭔가가 치밀어 올라 여기까지 한달음에 달려와 버렸는데, 막상 이 문 앞에 서 보니 문을 밀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안에서는 이미 떠들썩한 목소리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너무 늦게까지 못 놀고, 술도 많이 못 마셔. 어제 취해서 들어갔다가 우리 집 호랑이한테 들켜서 죽는 줄 알았다니까.”
온하준의 어느 한 친구 목소리였다.
“진짜 내 알던 그 오빠 맞냐? 예전에 뭐라 그랬어, 누가 와도 동생이 1순위라고 했던 사람이 지금은 완전 와이프한테 쩔쩔매고 있다니까? 그래도 우리 하준이 오빠가 제일 의리 있지.”
이번에는 이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말투는 나른하고도 달콤하게 들렸다.
이하나는 이런 성격이었다. 그리고 온하준이 좋아하는 타입의 여자도 이런 스타일이었다.
안타깝게도 강지연은 도저히 이런 사람을 연기할 수 없었다. 흉내조차 낼 수 없었다.
안에서 온하준의 친구가 말을 이었다.
“하준이는 뭐 말해 뭐 해. 강지연이 감히 한 마디라도 토를 달 수 있겠냐?”
“맞다, 생각났어.”
이하나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하준아, 내가 들었는데 네 와이프가 절뚝거린다며? 왜야?”
아무도 이하나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지연의 가슴은 움켜쥔 것처럼 조여 왔다.
온하준의 친구들이 슬슬 말을 이어 갔다.
“그러니까 말이야, 하준아. 우리는 진짜 네가 아깝다니까. 너 봐, 돈도 많지, 얼굴도 되지, 어디 내놔도 빠지는 데가 없는데, 어떤 여자를 못 만나서 하필 절뚝거리는 사람을 데려와?”
“진짜로, 하준아. 넌 우리 중에서도 제일 잘나가잖아. 그런데 지금 네가 강지연이랑 결혼한 덕에, 밖에서 회의를 하든, 접대를 하든, 기자회견을 하든, 어디든 부인 데리고 나가야 하는 자리는 죄다 포기해야 되는 거야. 그게 손해가 아니고 뭐냐?”
‘그래서였구나...’
온하준은 늘 말했다. 자기 일에는 그녀가 굳이 나설 필요가 없다고. 그저 얌전히 집에 있으면서, 자신이 벌어 오는 돈을 쓰기만 하면 된다고.
친정 식구들은 그런 온하준을 두고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모두 그녀더러 팔자 좋다고 했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온하준은 그녀를 사람들 앞에 내세울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뿐이다.
곧이어 실내에서 온하준의 쓴웃음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쨌든 나한테는 은인이야. 내가 빚지고 있는 사람이라고.”
“빚진 거라면 너 그동안 돈도 얼마나 줬냐? 그 정도면 다 갚은 거지 뭐!”
“그러게. 그때 그냥 돈 넉넉하게 쥐여 주고 끝냈어야지, 뭐 하러 평생을 걸었냐?”
“내 말이. 하준아, 너 차라리 집에다 부처를 한 분 모셔다 놓고 매일 향 피우고 절이라도 하면 재물운이라도 기원할 수 있지. 근데 지금 같이 이런 사람을 아내로 들여놔서 집에 둬 봐야 뭐가 좋냐고?”
“그러니까, 네 인생에 뭐가 도움이 되냐? 접대 자리에도 못 데려가지, 집에서는 차 한 잔 주는 것도 쏟을까 봐 걱정될 거고. 하준아, 너 물 마셔... 이렇게, 이렇게, 이렇게 걷는 거 맞냐?”
문틈 사이로 웃음소리가 한 번에 터져 나왔다.
그 가운데 이하나의 까르르 웃음까지 섞여 있었다.
“하준아, 너희 와이프 진짜 그렇게 걸어?”
문에 몸을 붙이고 듣고 있던 강지연은 온몸의 피가 죄다 머리로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분노와 수치심이 뒤엉켜 그녀의 중심을 무너뜨렸다.
강지연의 몸이 문을 밀어 올리듯 들이받았고, 결국 문이 벌컥 열렸다. 안은 마침 한창 큰 웃음으로 뒤덮여 있는 순간이었다.
온하준의 친구 중 한 명인 김도윤이라는 남자가 컵에 물을 들고, 일부러 다리를 심하게 절뚝이며 과장된 걸음으로 방 안을 돌아다니고 있었다. 목소리까지 높게 깔아 잡으며 떠들어댔다.
“하준아, 하준아, 하준아, 물 마셔, 하준아. 아... 넘어졌다, 하준아, 안아 줘...”
강지연은 온하준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남편,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했던 그 사람이 바로 지금 이 순간만큼은 어떤 태도라도 보여 주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제3화
그 과장된 몸짓에 안에서는 웃음이 그칠 줄을 몰랐다.
이하나는 온하준의 옆에 딱 붙어 앉아 아예 그의 어깨에 기대 쓰러지듯 깔깔 웃고 있었다. 그리고 온하준은 그런 와중에도 한마디 말도 하지 않았다...
김도윤이 웃으면서 몸을 돌렸다.
“하준아, 이게 딱 네 와이프...”
‘맞지?’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못했다.
문 쪽에 서 있는 강지연을 본 순간, 그의 얼굴에 걸려 있던 웃음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형... 형수님...”
모두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전부 얼어붙었다.
이하나는 온하준의 어깨에서 몸을 떼고 일어나 웃으면서 말했다.
“어, 여기서 소문만 듣던 하준이 아내분이구나? 안녕하세요, 얼른 들어와요. 저는 하준이 절친이에요.”
강지연은 룸 안에 있는 사람들을 쭉 훑어봤다. 가슴속은 이미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온하준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쪽으로 걸어왔다.
“지연아, 너 어떻게 왔어? 다들 그냥 장난친 거야, 신경 쓰지 마.”
강지연은 온하준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가 이렇게까지 낯선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사람들이 자기 아내를 비웃고 있을 때, 그가 서 있는 자리는 아내 곁이 아니라 그 사람들 쪽이었다.
“맞아요, 형... 형수님, 미안해요. 나 그냥 장난 좀 쳐 본 거예요. 화 풀어요.”
김도윤이 잔을 내려놓으며 사과했다.
“지연아!”
온하준이 다가와 그녀를 끌어안으려 했다.
그 순간, 강지연은 문득 조금 전 온하준의 어깨에 기대 웃던 이하나를 떠올렸다. 욕실에서 스스로를 위로하던 그의 손을 떠올렸다. 그리고 절정의 순간, 그가 목이 터져라 불렀던 ‘하나’라는 이름을 떠올렸다.
그 생각이 스치자, 지금 자기 허리로 뻗어 오는 이 손이 갑자기 견딜 수 없을 만큼 더럽게 느껴졌다.
그녀는 황급히 몸을 피했다.
“지연아.”
허공만 허우적대는 자기 손을 내려다보던 온하준은, 그런 반응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내가 대신 사과할게. 화 좀 풀어, 응? 집에 돌아가면 선물 사 줄게. 갖고 싶은 거 있으면 뭐든 말해.”
이하나는 새침하게 눈을 부릅뜨고 김도윤을 째려보았다.
“하준이 와이프까지 화나게 해 놓고 아직도 사과가 안 나와? 너는 진짜 맨날 그렇게 둔하고 털털하니까 아무 말이나 해도 되는 줄 알게 만드는 거야. 다른 여자들도 다 나 같은 줄 알아? 대충대충 아무 말이나 해도 안 삐지는 줄 아냐고.”
강지연은 속으로 비웃었다.
‘이 멘트 진짜 클래식하네...’
하지만 눈앞의 남자들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다들 그 말에 오히려 더 즐거워 보였다.
한 소리 들은 김도윤은 억울하다는 듯 입을 내밀었다.
“나 이미 사과했잖아! 나도 형수가 갑자기 들이닥칠 줄은 몰랐어. 진짜 그냥 장난친 거라니까.”
“장난이면 당하는 사람도 웃겨야 장난이죠.”
강지연은 온몸을 떨면서도 그 말을 끝까지 했다. 지금 그녀가 짜낼 수 있는 모든 용기를 다 끌어모은 말이었다.
그녀는 절뚝거리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온하준과 어울릴 자격이 없다고, 그 인식이 지난 5년 동안 마치 저주처럼 그녀를 옭아매고 있었다.
단 한 번이라도 자신을 의심하거나 깔보는 눈빛이 느껴지면, 그녀는 언제나 뒷걸음질 치기만 했다. 제 집 속으로 쑥 숨어버려 한참 동안 나오지 못하고, 혼자 상처를 핥으며 버텼다.
김도윤은 중얼거렸다.
“그래서 저 사과 했잖아요...”
“저... 저는 못 받아들이겠어요...”
강지연의 떨림은 더 심해졌다.
누군가의 조롱 앞에서 이렇게 정면으로 맞받아치는 것은 태어나서 처음이었다.
“그럼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거예요?”
김도윤이 또 투덜거렸다.
강지연도 자신이 어떻게 하길 바라는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남편 친구들이 자기 다리를 흉내 내며 비웃는 것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고, 그런 상황에서 남편이 그들 편을 들어서 있는 모습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됐어, 다들 그만해.”
온하준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와 김도윤 사이에 서서 둘을 가로막았다.
이 모임에서 그는 중심이었다.
대학교를 졸업한 뒤, 바로 이 무리를 이끌고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그였다.
타고난 사업 감각과 실행력으로 지금 회사의 판을 키운 주역이 바로 온하준이었다. 그래서 그가 말만 꺼내면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순식간에 입을 닫았다.
“강지연.”
온하준의 눈빛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
조금 전 영상 속, 이하나를 바라보며 눈을 반짝이던 그 눈과는 완전히 다른 빛깔이었다.
“다들 나랑 오래 알고 지낸 친구들이야. 악의는 없어. 그냥 장난 좀 심하게 친 거뿐이야. 내 얼굴 좀 봐서라도,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 줄래? 기사 불러서 집에 데려다줄게.”
“형수님...”
이하나는 입술을 내밀며 온하준의 옆으로 바짝 다가섰다.
“정 화낼 거면 저한테 화내요. 하준이한테 화내지 말고요. 오늘 이 자리도 제가 다시 돌아와서 만든 자리잖아요. 하준아, 아내분 같이 앉아서 밥 먹게 해. 내가 형수님께 한 잔 올리면서 제대로 사과할게.”
‘하, 정말 가지가지 하네.’
“미안한데요.”
강지연은 온하준을 똑바로 바라봤다.
이하나가 이런 말을 거리낌 없이 내뱉을 수 있게 된 건, 전부 그가 그런 분위기를 만들어 줬기 때문이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쓰라림을 겨우 눌러 삼키며 그녀가 말했다.
“저는 술 안 마셔요. 특히 연극 소품 같은 술은 더더욱.”
이하나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온하준을 올려다봤다.
“하준아, 나... 나 욕먹은 거야? 나 보고 하는 말이지? 나...”
곧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은 표정으로 겨우 버티는 척 연기했다.
“됐어, 괜찮아. 형수가 나를 오해한 거야. 내가 한 소리 좀 듣는 건 상관없어. 하준아, 형수한테 너무 뭐라 하지 마, 응?”
온하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강지연, 하나가 이렇게까지 신경 써서 말하는데 네가 그렇게까지 날카롭게 받아칠 필요가 있나?”
‘신경 써 준다고?’
이 말을 진심이라고 믿는 건 세상 가장 순진한 바보뿐일 것이다.
온하준이 바보일까?
아니다.
그는 다 알았다. 다 알면서도 옳고 그름 사이에서 철저하게 ‘편애’를 택했을 뿐이다.
가슴이 기우는 쪽이 곧 정답이 되는 법이었다.
강지연은 눈앞의 두 사람, 그리고 그들 뒤에 서 있는 몇 명의 얼굴을 차례로 바라봤다. 그녀와 그들 사이에는 도저히 건널 수 없는 깊은 골짜기가 하나 놓여 있는 것 같았다.
그들은 같은 편이었다. 한 줄로 서 있는 ‘우리 편’이었고 단단히 묶인 하나의 집단이었다.
반면 그녀는 그들의 세계에 잠깐 잘못 발을 들여놓은 이방인에 불과했다. 아니, 애초에 발을 들여놓은 적조차 없었는지도 모른다. 바깥 가장자리에서 맴도는 것조차 이미 지나치게 넘치는 은혜였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겨우겨우 눈물을 참으며 작게 코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돌아서서 밖으로 걸어 나갔다.
등 뒤로 이하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준아, 형수님은...”
“괜찮아, 원래 착한 애야. 내가 나중에 달래면 돼. 자, 계속하자. 신경 쓰지 마.”
겉으로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강지연의 뒷모습을 한 번 더 확인했다. 그러고는 운전기사에게 메시지를 보내 그녀를 따라 나가 보라고 지시했다.
강지연은 사실 침착하게 걷고 싶었다.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녀의 다리는 감정이 격해질수록 더 심하게 흔들렸다.
지금 이 순간, 이렇게 비틀거리며 허둥대는 모습이 조금 전 김도윤이 흉내 내던 바로 그 모습과 얼마나 닮아 있을까.
아마 자기 등이 사라진 뒤에도 그들은 계속 웃으면서 그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그녀는 눈물을 거칠게 한 번 훔쳤다. 그리고 더 빠르게, 더 심하게 흔들리는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온하준의 운전기사가 허겁지겁 뒤따라 나왔을 때 식당 앞에는 이미 강지연의 그림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기사는 돌아가 그 사실을 온하준에게 알렸다.
온하준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강지연에게 전화를 걸었지만 그녀는 받지 않았다. 그리고 곧바로 통화를 끊었다.
다시 걸었을 때는 이미 전원이 꺼져 있었다.
애초부터 마음이 개운치 않았던 김도윤이 이때를 틈타 입을 열었다.
“하준아, 형수 그 성격 진짜 너니까 봐주는 거다. 너 지금 어느 정도 위치고, 이미지가 어떤데. 너랑 결혼만 하면 누가 집에서 너를 안 모시고 살겠냐. 그런데 형수는 이렇게 얼굴까지 붉혀 가면서 너한테 성질을 내네. 네가 너무 착해서 그래.”
온하준은 입을 다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이 김도윤의 말에 거들며 나섰다.
“도윤이 말이 맞지. 네가 그동안 형수랑 집을 위해 얼마나 애썼는데. 밖에서 그렇게 고생하고, 힘들게 일하고, 다 그 집 때문이잖아. 그걸 이해해 주지도 못하고, 챙겨 주지도 않고, 이런 일 하나로 눈 흘기고 나가 버리면 그게 말이 되냐?”
“그러니까 말이야. 네가 걔랑 결혼해 준 것만으로도 이미 하늘이 내린 은혜지. 아니었으면 다리 저는 애를 누가 데려가? 네가 아니면 나중에 남는 건 그냥 장애인하고 결혼하는 길밖에 없을 거야.”
제4화
이하나는 눈치를 보다가 알맞은 순간에 말을 끼워 넣었다.
“하준아, 너 사람이 형수 욕 좀 했다고 기분 상해하지는 마. 다들 진짜 너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너도 알잖아, 우리 안 지가 몇 년인데. 말이 조금 지나쳤다고 쳐도 그냥 한 번 듣고 넘기면 되는 거지, 괜히 마음에 담아 두지 마.”
“나 화 안 났어.”
온하준은 휴대폰을 집어넣었다.
“그만해. 지연이 갈 데도 없어. 어디 멀리 가겠어, 됐어.”
어차피 지난 5년 동안 그녀는 집 말고 다른 어디에도 가 본 적이 없었다. 갈 만한 곳도 딱히 없었다.
김도윤은 슬쩍 이하나를 힐끔 보더니 중얼거렸다.
“역시 우리 하나가 속도 넓지. 너희 그때 안 헤어졌으면...”
“무슨 소리야?”
이하나는 눈을 크게 뜨고 김도윤을 흘겨봤다.
“오늘 하루 종일 입을 못 닫고 헛소리만 하네! 하준아 이제 결혼까지 했는데, 그런 말 하는 거 진짜 아니지...”
말은 그렇게 해 놓고, 시선에는 묘하게 서운함이 배어 있었다. 그러다 온하준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말했다.
“나 이번에 돌아와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그냥 너희가 아직도 나를 받아 줄 수 있고, 예전처럼 내 옆에 있어 주면 그걸로 됐어.”
“그게 무슨 바보 같은 소리야? 넌 영원히 우리 팀 마스코트야. 누가 너를 괴롭히면 우리 다 가만 안 둔다? 하준아, 맞지?”
김도윤이 의리를 과시하듯 가슴을 쿵 하고 두드렸다.
온하준은 별다른 말 없이 잔을 들어 가볍게 흔들기만 했다.
이 장면, 어디선가 본 것 같았다.
오래전에도 그는 늘 이렇게 북적거리는 친구들과 이하나가 웃고 떠드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장난이 도를 넘어서고 일이 자기 앞으로까지 넘어왔을 때야, 슬쩍 나서서 공정한 것처럼 정리를 하고는 했다.
그리고 지금도 사람들이 다시 그에게 의견을 구하자, 그는 옅게 웃으며 말했다.
“당연하지.”
...
강지연은 집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예약해 둔 호텔에 그대로 들어가 묵었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서러움과 고통이 호텔방 문이 닫히는 순간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김도윤이 자기 다리를 흉내 내며 절뚝거리던 모습이 눈앞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방 안에 가득했던 폭소가 마치 주문처럼 귓가를 끝없이 맴돌았다.
사실 온하준의 친구들이 뒤에서 자신을 어떻게 이야기하는지,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온하준에게 그 얘기를 꺼낸 적은 없었다.
그들은 그와 수년을 함께해 온 친구들이었다. 그녀는 그것을 이해했다.
그가 바깥에서 얼마나 고생하는지도, 그녀는 이해했다. 그래서 더 이상 그에게 짐을 얹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자신 때문에 그와 친구들 사이가 틀어지는 일은 무엇보다 피하고 싶었다.
그저 지금 와서 돌아보니 그 모든 이해와 배려가 다 헛된 생각이었다.
그가 왜 자기 때문에 친구들과 사이가 나빠지는 일을 감수하겠는가.
그들은 그의 오랜 친구들이었다.
그럼 그녀는?
강지연은 그저 온하준이 진 빚을 갚기 위해 억지로 맞춰 끼운 결혼 생활의 대상일 뿐이었다. 그의 인생에 달라붙어 있는 짐이었고, 그녀가 없었다면 그의 삶은 더 가볍고 행복했을 것이다.
“걔는 절뚝거리는 애잖아! 네가 아니면 누가 데려가 줘?”
“다리 저는 주제에 하준이 같은 남자한테 시집간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거 아니야?”
“나라면 절뚝거리는 사람을 집에 데려가서 평생 사람들 앞에서 비웃음거리가 되느니, 차라리 그때 차에 치여서 다리 저는 사람이 내가 되겠어.”
“다른 회사 대표들은 다 반듯하고 품위 있는 부인 데리고 나와서 행사 나가는데, 우리 하준이는 사람들 앞에 내놓을 만한 사람도 없잖아.”
...
5년 동안 그녀의 귀에 들려왔던 온갖 종류의 뒷말들이 밀물처럼 한꺼번에 가슴으로 들이닥쳤다.
거대한 소용돌이가 되어 거칠게 몸을 휘감고 그녀를 완전히 집어삼키려 했다.
숨이 막혔다.
심장이 찢겨나가는 것 같은 고통이 폐까지 함께 후벼 팠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도 열어 보지 않았던 휴대폰 속 앨범 하나를 열었다.
그 안에는 학부 시절 연습과 공연을 하던 기록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무대에 다시 오를 수 없게 된 뒤로, 그녀는 춤과 관련된 사진과 영상들을 모두 그 앨범 하나에 모아 넣었다. 비밀번호를 걸어 다시는 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자리였다.
지금, 그녀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아무 영상이나 하나 눌러 재생했다.
음악이 흐르는 가운데 화면 속의 그녀는 회전하고, 몸을 던지고, 공중에서 일자 다리를 그렸다.
그때의 강지연은 눈빛이 살아 있었고, 몸은 매끄럽고 탄력 있게 움직였다. 폭풍 같은 박수 소리도 분명히 그녀를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사람을 구한 일은 잘못이었을까?
하지만 온하준을 밀쳐낸 바로 그 순간에도 그를 남편으로 맞이할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결혼 이야기를 먼저 꺼낸 쪽은 그였다.
그가 결혼하자고 했고, 성대하고 화려한 프러포즈를 준비했고, 커다란 다이아몬드 반지를 들고 그녀 앞에 무릎을 꿇었고, 그렇게 그녀에게 희망이라는 것을 쥐여 주었다.
강지연은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그리고 5년 만에 처음 침대로 몸을 던지듯 쓰러져 목이 터져라 울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주 오랫동안 울었다.
스스로 지친다고 느껴질 만큼 오래... 더 이상 눈물이 나오지 않을 때까지, 가슴 한가운데만 뜨겁게 남아서 타들어 가는 통증만이 남을 때까지.
불길에 그을리는 것처럼 타오르는 그 아픔이 역설적으로 그녀를 이 질식할 것 같은 소용돌이 속에서 한 가닥 맑은 정신으로 끌고 나왔다.
아프면 아플수록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그녀는 욕실로 가서 얼굴을 세게 씻었다. 차가운 물로 정신을 다잡듯 손에 힘을 주어 물을 끼얹었다.
거울 속 이미 빛을 잃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한참 바라보다가, 그녀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강지연, 울 일은 오늘 한 번으로 끝이야. 더는 울지 마. 지금은 잘 먹고, 잘 자고, 내일 시험 잘 보는 게 먼저야.”
그녀가 그나마 다행이라고 여기는 것이 하나 있었다.
길고도 지루했던 5년의 결혼 생활 동안, 무료한 시간을 견디기 위해 매일 조금씩 공부를 해 왔다는 점이었다.
대단한 꿈이 있어서라기보다는 그저 시간이 너무 많고, 너무 심심했기 때문이었다.
온하준이 집에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것이 그녀 인생의 거의 전부가 되어 버렸었다.
하지만 온하준은 언제나 아주 늦게야 귀가했다.
처음에는 정말 일이 바쁜 줄 알았다.
이후에야 그가 그저 자신이 있는 집으로 너무 일찍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날 역시 그녀가 직접 들었다.
그때의 강지연은 온하준의 고생을 생각해 오히려 더 마음을 썼다. 용기를 내어 그를 챙기고 싶어 했다.
정성껏 야식을 만들어 회사로 찾아갔을 때, 그녀는 도저히 듣지 말았어야 할 대화를 듣고 말았다.
온하준의 사무실 안에서 그와 그의 친구가 나누던 대화였다.
친구가 물었다.
이 시간에 왜 아직도 안 가냐고. 회사에 남은 사람도 거의 없는데 대표가 아직 야근을 하고 있냐고.
그러자 온하준은 분명 이렇게 말했다.
“나도 집에 가긴 가야 하는데, 지연이 그 뜨거운 마음을 어떻게 받아줘야 할지 모르겠어.”
그 말에 담긴 뜻을 그때의 순진한 강지연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는 단번에 알아들었다.
친구는 과장되게 소리를 질렀다.
“설마 진짜야? 하준아, 너 설마 지금까지도 형수랑 한 번도 같이 잔 적이 없는 건 아니지?”
온하준은 침묵했다.
그것은 사실이었다.
온하준은 한 번도 그녀에게 손을 뻗은 적이 없었다.
그녀는 여러 번 눈치도 주었고, 심지어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로 먼저 다가간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그는 온갖 이유를 들어 그녀를 밀어냈다.
“너 요즘 몸 상태가 별로잖아.”
혹은...
“나 요즘 너무 피곤해서 안 되겠어.”
강지연은 바보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모든 말 뒤에 있는 진짜 이유가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을 서서히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해도 온하준이 자기 입으로 그 사실을 털어놓는 말을 듣게 되었을 때, 그녀의 가슴에는 수천 개의 바늘이 한 번에 꽂힌 것처럼 숨이 막힐 만큼의 통증이 몰려왔었다.
나중에 그의 친구는 반은 농담, 반은 진심 섞인 목소리로 또 물었다.
“하준아, 설마 형수 보면 아무 반응도 없는 건 아니지? 그래도 겉으로 보기에는 예쁘잖아.”
그때 온하준이 한 대답은 그 후 몇 년 동안 내내 그녀 가슴 한가운데 박힌 채, 자그마한 바늘처럼 틈만 나면 그녀를 찔러댔다.
생각만 나면 심장이 도려지는 것처럼 아려 왔다.
그날, 온하준은 이렇게 말했다.
“나도 노력은 해 봤어. 정상적인 부부처럼 지내보려고. 근데 지연이 다리만 보면... 나는 그냥 바로 아무 느낌이 없어져.”
‘그랬구나...’
그녀가 그를 구하려다 다치게 된 다리, 수술 자국이 뒤엉켜 있고 근육이 말라붙어 버린 그 다리가...
그의 눈에는 추하고, 속이 울렁거릴 만큼 보기 싫고, 모든 욕구를 단번에 사라지게 만드는 그런 존재였던 것이다.
강지연은 결국 사무실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그날 준비해 간 정성스러운 야식은 회사 건물 쓰레기통에 그대로 버려졌다.
그리고 그 이후로 강지연은 다시는 그의 회사를 찾아간 적이 없었다.
제5화
그날 이후로 강지연은 다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때는 이것저것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냥 너무 창백해져 버린 자기 인생에 살짝이라도 숨을 붙여 줄 무언가가 필요했을 뿐이었다.
뭔가에 몰두하고 있으면 그날 들었던 그 말이 떠오를 때마다 무너져 내리는 일은 덜 할 것 같았다.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그녀 혼자만의 비밀스러운 의지로 남아 있던 것들이 오늘에 이르러서는 그녀 자신을 건져 올릴 구명줄이 될 줄은.
내일은 반드시 시험을 잘 봐야 했다.
그리고 여기를 떠날 것이다.
멀리, 아주 멀리,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그렇게 생각해도 가슴은 여전히 아프고 또 아팠다.
강지연은 심지어 이 아픔이 온하준 때문인지, 아니면 스스로가 바쳐 버린 5년이라는 시간 때문인지조차 구분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따로 있었다.
이제는 이런 고통 속에 스스로를 더 이상 가두지 않겠다는 것. 설령 이 고통이 아주 오랫동안 계속되다가 천천히 옅어지더라도, 그녀는 스스로를 구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끌어 올리기로 했다.
그녀는 배달 음식을 시켰다. 담백한 저녁 식사와 일회용으로 갈아입을 속옷 몇 벌.
그리고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걸어 다음 날 아침에 깨워 달라고 모닝콜을 요청했다.
그런 다음 억지로라도 눈을 감고 잠을 자려고 애썼다.
아마 전날 밤을 꼬박 새워 버린 탓일 것이다.
그날 밤 그녀는 뜻밖에도 꽤 푹 잤다.
다음 날, 정해 둔 시간에 맞춰 일어나 휴대폰 전원을 켰다.
순식간에 쏟아져 들어오는 메시지 알림들.
손에 쥔 휴대폰이 쉬지 않고 떨렸다.
전부 단 한 사람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온하준]
강지연은 그 메시지들을 열어보지 않았다.
시험에 영향을 받을까 봐, 괜히 마음이 흔들릴까 봐.
호텔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준비를 마친 뒤, 그녀는 시험장으로 향했다.
이 호텔은 시험장과 가까워서 걸어서 가도 5분이면 충분히 도착할 거리였다.
호텔 문을 나서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온하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놀란 그녀는 그만 휴대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허둥지둥 화면을 밀어 전화를 거절하고 다시 한번 전원을 꺼 버렸다.
시험장을 나올 때까지 그녀의 심장은 계속 요동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기쁨 때문이었다.
왠지 시험을 잘 본 것 같았다.
스피킹 시험에서 마주 앉은 시험관은 내내 웃는 얼굴로 그녀와 대화를 이어 갔다.
리스닝은 대부분 또렷하게 들렸고, 리딩과 라이팅도 큰 막힘없이 끝까지 써냈다.
몇 점이 나올지 감히 짐작할 수는 없었지만, 적어도 모든 영역을 끝까지 해냈다.
자신이 그렇게까지 쓸모없는 사람은 아니라는 사실이, 그제야 아주 조금 실감 났다.
강지연은 혼자 인도 위를 걸어가고 있었다. 고개를 숙인 채 머릿속으로 오늘 시험의 자잘한 장면들을 하나하나 되짚었다.
그러다가 눈앞에 갑자기 구두 한 켤레가 불쑥 들어왔다.
일부러 길 한가운데 버티고 서서 사람의 발길을 막아선 사람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탓에, 발을 거둘 틈도 없이 그대로 그에게 부딪히고 말았다.
그가 재빨리 그녀를 붙잡아 주지만 않았다면 그녀는 그대로 넘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절대로 마주치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온하준.
“강지연!”
강지연은 한눈에 온하준이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어떻게든 그 분노를 꾹 눌러 삼키려 애쓰는 것 같았다.
“지연아, 너 왜 집에 안 들어가?”
온하준은 그녀의 어깨를 붙잡고 평소처럼 목소리를 낮추어 물었다.
언제나 그랬듯 부드럽고, 또 다정하게.
강지연이 속으로 되묻고 싶은 말은 따로 있었다.
‘왜 안 돌아가는지 정말 모르는 걸까?’
하지만 지금은 온하준과 일일이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방금 부딪히는 바람에 그녀의 가방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고, 가방이 열리면서 시험용 펜이 살짝 튀어나와 있었다.
그녀는 그가 자신이 시험을 보러 왔다는 사실만큼은 절대로 알아채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는 온하준의 손을 힘껏 뿌리치고 재빨리 쪼그려 앉았다. 그리고 펜을 잽싸게 집어 가방 안에 밀어 넣고 가방을 꽉 여몄다.
“뭐야, 방금 그거?”
그가 고개를 숙여 그녀의 가방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펜이야.”
그녀는 최대한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가방을 잡은 손가락 마디는 하얗게 질릴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나한테 줘.”
온하준이 말했다.
안 된다.
그에게 그 펜을 보여 줄 수는 없었다.
강지연은 더 세게 가방을 끌어안았다.
“펜 가지고 뭐 하게?”
“휴대폰 줘.”
이번에는 그렇게 말했다.
잠시 실랑이가 이어졌고, 결국 그녀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그에게 건넸다.
휴대폰은 꺼져 있었다.
그는 한 번 힐끗 보기만 하고는 그대로 다시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전화도 그렇게 많이 하고, 메시지도 그렇게 많이 보냈는데, 왜 한 번을 안 받는 거야? 아직도 화났어?”
그녀는 휴대폰을 꼭 쥔 채 속으로 생각했다.
‘다행이다.’
혹시라도 메일함까지 뒤져서 시험 안내 메일이라도 보면 어쩌나, 그게 제일 걱정이었다.
‘만약 문제가 이것뿐이라면...’
강지연은 잠시 생각했다.
더 이상 이런 걸로 화를 내고 싶지 않았다. 그냥 멀리 도망치고 싶었다. 이곳에서, 그리고 이 사람에게서 가능한 한 멀리.
그 생각은 이렇게 다시 온하준을 눈앞에서 마주한 지금 이 순간 더욱 선명하고 강렬해지고 있었다.
강지연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는 여전히 그녀가 삐쳐 있다고 생각한 듯 한숨을 쉬었다.
“지연아, 너 원래 착하고 눈치도 잘 봤잖아. 그런데 이번에는 겨우 이런 일 가지고 집에도 안 들어가 버리면 어떡해?”
강지연은 맹세했다.
정말로 이제는 그런 일들로 더 이상 화내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방금 그 한마디는 아마 부처라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어제 일도 결국 내 잘못이라는 거야? 내가 철이 없는 거고? 내가 거기 들어가서 김도윤한테 박수라도 치면서 ‘와, 나 연기 잘한다, 나랑 똑같다’라고 해 줘야 했어?”
참고 참고 참아 오던 말이 마침내 터져 나왔다.
온하준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난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니야. 내 말은, 남들이 뭐라고 떠드는지는 너도 어쩔 수 없는 거니까, 굳이 그런 말들...”
“나는 못 막았겠지만, 너는 막을 수 있었잖아.”
강지연은 똑바로 그를 바라봤다.
“근데 그때 너는 뭐 하고 있었는데? 이하나랑 껴안고 웃느라 정신이 없었지.”
“강지연!”
그의 얼굴에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노가 떠올랐다.
그제야 그녀는 알았다.
‘이하나’라는 이름은, 그에게 있어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되는 금기가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더 이상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강지연은 가방을 끌어안고 그를 지나쳐 걸어 나갔다. 그러나 그는 팔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안으며 멈춰 세웠다.
“미안해, 지연아. 내 잘못이야. 아까 내가 너무 목소리를 높였어.”
그는 한 톤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냥 네가 하나를 오해하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 우리 진짜 그냥 친구야. 다른 애들이랑 똑같이 나한테는 그저 ‘형제 같은 친구’고.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너까지 그렇게 말하면 걔가 얼마나 곤란하겠어.”
강지연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 눈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어깨에 기대 깔깔거리던 이하나는 충분히 오해받을 행동을 해 놓고도 지적당하는 것이 그렇게 억울한가.
하지만 그녀는 입안에서 그 말을 굴리다가 결국 조용히 한마디만 흘렸다.
“그래.”
“지연아...”
온하준은 그녀의 차가운 반응을 느끼고 더 다가왔다.
“너 아직도 화난 거야? 혼자 호텔에 가서 자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나는 너한테 아무 말도 안 했잖아. 그런데 너는 언제까지 이렇게 화내고 있을 거야?”
그래, 결국 모든 잘못은 그녀의 탓이었다.
언제나 결론은 거기에 있었다.
“지연아, 그만 화 풀어. 우리 먼저 점심부터 먹자. 그다음에 내가 너랑 쇼핑도 같이 가 줄게, 응?”
강지연은 잠시 생각했다.
‘그래, 오히려 잘됐네.’
마침 온하준에게 할 말이 있었던 참이었다.
온하준은 그녀를 데리고 근처의 식당으로 들어갔다.
식당 안으로 들어서자, 서빙하는 직원의 시선이 본능적으로 둘을 훑고 지나갔다.
습관처럼 강지연의 몸이 먼저 움찔했다.
고개를 숙이고 옷깃을 세워 가리려다가 온하준의 뒤로 살짝 숨어 걸음을 아주 천천히 옮겨 자신의 절뚝거림이 덜 티 나게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순간, 그녀는 스스로를 말렸다.
어울리지 못하면 어쩔 것인가. 어차피, 이제는 그와 맞추어 살 생각도 없었다.
강지연은 자리에 앉았다.
온하준은 능숙하게 메뉴판을 보고 음식을 주문했다.
음식이 하나둘 차려지고 나서, 그는 젓가락을 그녀 쪽으로 밀어주며 언제나처럼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먹어. 다 네가 좋아하는 것들로 시켰어.”
강지연은 상 위에 오른 요리들을 훑어보았다. 모두 다 매운 음식뿐이었다.
그녀는 속으로 살짝 쓴웃음을 지었다.
온하준은 여전히 몰랐다. 자신이 매운 것을 잘 먹지 못한다는 것.
집에서 매일 저녁 식탁에 매운 반찬이 빠지지 않았던 건 온전히 그가 매운맛을 좋아했기 때문이었다.
“나 배 안 고파.”
그녀는 젓가락을 들지 않은 채 말했다.
“그리고 나 할 말 있어.”
“뭔데?”
그는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띠었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오늘 나 하루 종일 시간 비워 뒀어. 오후에는 같이 놀러 가고, 저녁에는 우리 부모님 댁에 같이 가서 밥 먹자.”
강지연은 거의 보이지도 않을 만큼 희미하게 올라간 그의 웃음을 바라보았다.
곧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떠올리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짙고 거센 쓰라림이 치밀어 올랐다.
제6화
강지연은 참지 못하고 목이 메었다.
“온하준...”
“응, 왜?”
온하준이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왜 그래? 울고 싶어? 울 거면 울어. 참지 마.”
온하준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물처럼 부드러웠다.
수술실에서 나와 간호사와 함께 병실로 돌아오던 그날도, 그는 침대 곁을 지키며 물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아파? 아프면 울어도 돼, 참지 마...”
그때의 강지연은 믿었다. 이렇게 물살 같은 다정함은 최고의 진통제라고.
하지만 오래 걸려서야 알게 됐다. 한 남자의 다정과 배려는 끝내 사랑으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온하준, 우리 이혼하자.”
그녀는 낮게 말했다. 손을 빼내며 따끔거림이 번져 시야가 흐려졌다.
온하준이 미간을 좁혔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했다.
짧은 침묵 끝에 그는 직원을 불러 깨끗한 그릇을 가져오게 하고, 생선 한 점을 집어 고개를 숙인 채 가시를 발라냈다.
그리고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지연아, 네가 아직 화난 건 알아. 근데 이혼을 입에 올리는 건 이성적이지 않아. 나랑 이혼하면 너는 어떻게 살 건데? 혼자서 괜찮겠어?”
강지연의 숨이 거칠어졌다.
5년 동안, 모든 이들 눈에 그녀는 그의 부속물이었다. 그를 떠나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 불쌍한 사람. 그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나 할 수 있어!”
처음으로 온하준의 앞에서 강하게 말했다.
처음으로 자신을 위해 기어이 한마디 했다.
그는 짧게 웃었다. 여전히 그녀의 심정을 질투쯤으로 여기는 듯 잘 발라낸 생선을 그녀의 앞에 놓으며 말했다.
“먹어. 오늘까지는 화내도 돼. 근데 밥 먹고 나서 더는 화내면 안 돼.”
“나 화 안 났어. 정말 이혼하고 싶어!”
어떻게 말해야 이 말이 단순한 심통이 아니라는 걸 그가 이해할까.
“강지연.”
그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됐고, 오늘 회의 두 개랑 미팅 하나까지 다 미뤘어. 너랑 놀아 주려고 온 거야. 내일이랑 모레는 이렇게 못 해. 다시 말하지만 하나는 우리 친구야. 내 친구들이랑 같은 무리라고. 내가 하나를 대하는 건 김도윤 대하는 거랑 다르지 않아. 걔도 너 좋아해. 계속 친구하고 싶다더라. 네가 이러면... 내가 어떻게 너희를 한 자리에 앉힐 수 있겠어?”
“굳이 데려올 필요 없어.”
그녀는 이하나가 진심으로 친구하고 싶어 한다고 믿지 않았다.
“강지연!”
그가 약간 언성을 높였다.
그녀는 안다. 이하나만 걸리면 그의 인내심은 순식간에 바닥난다.
“빨리 먹자. 먹고 백화점 좀 돌면서 네가 좋아하는 거 사자. 저녁에는 부모님 댁에 들러서 밥 먹을 거야. 너 부모님 뵌 지 얼마나 됐어?”
그는 끊임없이 반찬을 그녀의 그릇에 덜었다.
그녀는 자신을 굶기지 않기로 하고 일단 젓가락을 들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몸을 챙겨야 한다. 분노에 자신의 위장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었다.
“그래, 이게 맞지.”
온하준의 목소리가 다시 부드러워졌다.
“이혼 같은 말, 다음부터 꺼내지 마.”
그녀는 잠시 멈췄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밥을 먹었다.
식사가 끝났다. 그녀는 쇼핑을 원하지 않았지만 온하준이 우겼다. 차를 몰아 그대로 백화점으로 갔다.
결혼 후 5년 동안, 그와 함께 백화점을 돈 시간은 손에 꼽았다. 정확히 말하면 둘이 함께 공개된 공간에 서 있던 시간 자체가 드물었다.
백화점 조명은 대낮에도 눈부시게 밝았다. 그녀는 적응이 되지 않아 가방을 끌어안고 그의 그림자를 따라 조심조심 걸었다.
1층은 명품 가방, 시계, 주얼리 매장이 즐비했다.
“뭐 사고 싶은 거 있어?”
온하준이 돌아서서 물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사고 싶지 않았다. 그냥 집에 가고 싶었다.
대답하기도 전에 멀리서 누군가가 불렀다.
“온 대표님!”
“최근에 알게 된 협력사야. 인사만 하고 올게.”
온하준은 강지연에게 일렀다.
“너 먼저 좀 보고 있어. 이따 내가 찾아올게.”
온하준의 고객은 그녀에게는 전혀 낯선 얼굴이었다.
그가 멀찍이 한 남자와 악수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자리에 서 있었다.
사방이 번쩍거리는 사치 속에 정작 그녀가 사고 싶은 건 하나도 없었다.
“이제 손님 차례예요.”
판매원이 다가와 말했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어느 명품 매장의 대기 줄에 무심코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그녀는 서둘러 빠져나왔다.
백화점 안을 목표 없이 걷던 그녀는 어느 순간 익숙한 뒷모습을 보았다.
유명 시계 브랜드 매대 앞에 이하나가 있었다.
그 브랜드 로고를 보는 순간 무언가가 가라앉듯 내려앉았다. 그녀는 저도 모르게 진열대로 걸음을 옮겼다.
이하나 곁에는 김도윤이 있었다. 점점 가까워지자 두 사람의 목소리가 또렷해졌다.
“마음에 들면 그냥 사.”
김도윤의 목소리였다.
이하나가 말했다.
“이건 좀 아니지. 이건 진짜 너무 비싸. 하준이가 카드 주면서 마음껏 긁으라고 했다고 해도, 이렇게 비싼 건 미안해서 못 긁지!”
강지연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발만큼이나 무거운 것이 바로 심장이었다.
카드.
온하준의 카드...
“줬으면 쓰라는 뜻이지. 하준이가 언제 말과 속이 다른 적 있었냐? 우리가 몇 년을 같이 굴렀는데 네가 걔 성정 몰라? 네 손에 쥐여 줬으면 진심으로 준 거야.”
김도윤이 보탰다.
“그렇긴 하지...”
이하나는 손목을 이리저리 돌려 시계를 비춰 보이며 김도윤에게 보여 주었다.
강지연도 그 모습을 봤다.
“어때? 도윤아, 나 진짜 이 모델 너무 좋아해. 대학교 때부터 좋아했잖아. 그때 하준이가 졸업하면 사 준다고 약속했는데, 나중에는...”
‘나중에는?’
강지연의 입가에 비웃음과 쓴맛이 동시에 번졌다.
나중에 온하준은 그녀의 생일과 기념일마다 늘 같은 시계를 건넸다.
그녀는 생각했다. 그가 마음이 없더라도 최소한 생일과 두 사람의 기념일을 기억은 한다고. 선택이 성의 없을지라도 값어치는 충분하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온하준은 무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나 마음을 썼다.
다만 그의 마음에 각인된 약속은 그녀가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해 있었다.
“그럼 이제 약속 지키는 거네. 네가 갖고 싶은 건 뭐든 다 살 수 있어. 네가 좋아하는 건 다 사 줄 수 있는 사람이잖아.”
김도윤이 부추겼다.
“그럼 진짜 긁어도 돼?”
이하나는 눈앞에서 마음이 흔들리는 게 보일 정도였다.
한편 온하준은 협력사와 인사를 마쳤다.
상대는 아내를 마중 나왔다가 쇼핑을 하러 들른 길이라고 했고, 온하준이 아내와 쇼핑 중이라는 말을 듣자 이렇게 제안했다.
“가서 인사라도 드려요.”
강지연은 그가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을 보고 재빨리 몸을 숨겼다.
큰 기둥 뒤로.
그러나 이하나는 이미 온하준을 발견했다. 그녀는 손을 흔들며 크게 외쳤다.
“하준아, 여기야, 이쪽으로 와!”
기둥 뒤에서 내다보니 온하준은 협력사 직원과 함께 이하나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이하나는 그의 팔을 끼고 흔들었다.
“하준아, 나 이 시계 사고 싶어. 괜찮지?”
“그래.”
온하준의 눈빛은 물처럼 부드러웠다. 그 눈 속의 빛이 얼굴 전체를 환하게 살렸다. 집에서 강지연과 마주할 때의 무심함과는 전혀 다른 표정이었다.
“고마워, 하준아. 그럼 나 가서 카드 긁고 올게!”
이하나는 그가 준 카드를 살짝 흔들었다.
함께 온 협력사 직원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온 대표님이랑 사모님 금슬이 참 좋으시네요. 정말 보기 좋습니다.”
‘온 대표님이랑 사모님?’
온하준과 이하나는 동시에 잠깐 굳었다. 그러나 둘 중 누구도 말을 고치지 않았다.
제7화
강지연은 온하준과 이하나가 잠깐의 어색함을 넘긴 뒤, 새로운 호칭에 금방 익숙해져 협력사와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지켜봤다.
‘둘이 참 잘 어울리네...’
그녀는 조용히 사진 한 장을 찍고 등을 돌렸다. 가슴속 깊이 박혀 있던 그 바늘이 다시 찌르듯 올라왔다.
잘게 쪼개진 날카로운 통증이 순식간에 가슴팍으로 번졌고 코끝마저 얼얼했다.
“강지연!”
백화점을 거의 벗어나려던 찰나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뒤돌아보니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선 사람이 두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이었다. 예전에 다니던 무용학원의 선생님 조민서.
“선생님!”
그녀는 놀라움에 눈이 환해졌다.
조민서는 재빨리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와 다가오더니 그녀의 양손을 꼭 잡았다. 표정도 환했다.
“멀리서도 네 얼굴은 딱 보이더라. 불러 보길 잘했네! 요즘 어떠니? 벌써 5년이네.”
강지연은 살짝 숙연해졌다.
5년이 흘렀고, 자신은 이렇게 망가졌다. 무슨 낯으로 선생님을 뵐 수 있을까.
“바쁘니? 안 바쁘면 우리 자리 잡고 티타임 할까?”
조민서가 그녀의 손을 이끌었다.
바쁘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자괴감에 스스로를 더 닫아 버리고 무용계 사람들과는 거리를 뒀을 것이다. 하지만 휴대폰 속 춤 앨범을 연 순간 그녀의 어두운 하늘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빛이 스며들기를 갑자기 갈망하게 되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선생님.”
말끝에 이유 없이 눈가가 촉촉해졌다.
둘은 1층 중앙의 영국식 티 살롱으로 들어갔다.
“선생님, 동창들은 다 어떻게 지내요?”
그녀는 너무 오래 자신의 세계에서 이탈해 있었다. 모든 동창 단톡방도 다 나와 버렸었다.
조민서가 그녀를 민감하게 살폈다.
“정말 알고 싶니?”
조민서는 그녀의 사정을 알고 있었다.
원래는 대학교에 쉽게 진학할 인재였지만 갑자기 포기했고, 나중에는 해성까지 직접 찾아와 위로해 주기도 했다.
그녀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민서는 조용히 이야기를 풀었다.
5년이면 사람 인생을 바꾸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동창 중 몇은 가무단에 들어가 수석 무용수가 되었고, 몇은 유학을 떠나 박사 과정을 마쳤다. 또 몇은 학교에 남아 새싹들을 길러내고 있었다.
모두가 각자의 궤도에서 한 걸음 더 멀리 나아갔다.
오직 그녀만...
하지만 오늘부터는 그녀도 달라질 것이다.
더 이상 춤출 수 없더라도 다른 영역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을 것이다.
“선생님, 저... 저도 이제 새로운 걸 해보려고요.”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순간만큼은 선생님의 기대가 부끄럽기도 했다.
“좋지.”
조민서의 미소는 예전 그대로였다.
강지연은 조민서의 귀에 바짝 다가가 유학 계획을 속삭였다.
“잘 됐다! 그럴 줄 알았어! 내 제자 중에 나약한 애는 없다니까!”
조민서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감탄했다.
“때마침 해외 투어가 하나 있어. 같이 가서 분위기도 느끼고 해외 생활도 미리 익혀 봐!”
“그런데 저는...”
그녀의 다리가 버틸까? 이제 무대는 꿈도 못 꿨다. 걷는 속도조차 남들보다 느리고 대학교도 이론 전공으로 넣었다.
“못 할 게 뭐가 있어! 그때 사고만 없었으면 원래 청년 무용단에 들어갔을 애야. 이번에는 스태프로 따라가. 무대 운영! 진행! 분장!”
조민서의 어조는 단호했다. 그녀를 ‘절뚝이는 사람’으로 보지 않았다.
강지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런 시선이 좋았다.
춤을 못 춘다고 해서 끝이 아니었다.
춤을 못 춘다고 해서 쓸모없는 사람도 아니었다.
막 그 말을 마쳤을 때, 조민서의 휴대폰이 울렸다. 문자였다.
“우리 남편인데, 같이 와서 차 한잔해도 괜찮겠니?”
조민서가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당연하죠.”
그녀가 웃었다.
사실 조금은 두려웠다.
5년을 틀어박혀 지내다 보니 낯선 사람을 만나는 일이 어색해졌다.
그래도 첫걸음을 떼어야 한다, 맞지 않나?
“그럼 오라고 할게.”
조민서가 답장을 보냈다.
하지만 상상도 못 한 일이 벌어졌다.
조민서의 남편이, 하필이면 온하준의 새 협력 파트너... 조금 전 그녀가 본 바로 그 사람이었다.
“남편이 해성에 일 보러 왔다가, 나는 겸사겸사 놀러 왔지. 여기서 너를 다 만나다니 이게 인연이지 뭐...”
조민서가 남편을 소개하는 사이 강지연은 온하준과 이하나, 그리고 조민서의 남편이 함께 티 테이블로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마침내 셋이 코앞까지 왔다.
강지연은 앉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온하준과 이하나의 얼굴이 붉어졌다가 하얘지고 다시 붉어지는 변화가 그대로 보였다.
“자자, 앉으세요. 이쪽은 내 아내 조민서 무용 선생님이에요.”
조민서의 남편이 소개를 시작했다.
“그리고 이분이 내가 이번에 일 보러 온 파트너, 온하준 씨. 그리고 이분은 아내분.”
‘아내’라는 두 글자가 떨어지는 순간 온하준의 손이 살짝 떨렸다. 이하나 역시 안절부절못하며 눈만 굴렸다.
둘 다 강지연만 똑바로 노려보고 있었다. 강지연은 그들을 보며 담담히 미소 지었다.
조민서가 다시 소개했다.
“이쪽은 우리 남편 오정훈.”
그리고 강지연을 가리켰다.
“이 친구는 내 제자야. 당시 도화배를 가장 유력하게 노리던 아이였지.”
‘도화배’라는 말을 듣자 온하준의 눈빛이 완전히 가라앉았다.
시선이 아래로 미끄러지더니 마치 그녀의 다리를 확인하고 싶어 하는 듯했다.
강지연은 그 눈을 놓치지 않았다. 그 순간 그의 눈에는 고통이 가득했다.
그렇겠지. 그때 그녀의 다리가 다치지만 않았다면, 온하준은 그녀와 결혼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 그의 곁에 있는 저 사람은 당당하게 ‘아내’로 앉아 있었을 것이다.
강지연이 옅게 웃었다.
“선생님, 사실 저는...”
“아!”
이하나의 날카로운 비명이 정확한 타이밍에 날아들어 그녀의 말을 끊었다.
강지연은 입을 다물었다.
이하나는 뜨거운 차를 흘렸다. 손이며 옷에 차가 흥건했다.
“죄... 죄송해요, 너무 실례였죠.”
이하나는 허겁지겁 냅킨으로 물기를 닦았다.
“괜찮아요, 괜찮아요.”
조민서는 상황을 몰랐지만 서둘러 냅킨을 더 건넸다.
한 잔의 차가 그녀의 진실을 향한 말을 막아섰다. 하지만 강지연이 계속 말하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과연 막을 수 있을까?
맞은편 온하준이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작게 고개를 저으며 입 모양으로 말했다.
“말하지 마, 말하지 마.”
하, 어차피 정면으로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저 반쪽만 던져 보고, 두 사람이 얼마나 허둥대나 구경해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이 오후의 차 한 잔은 누군가에게는 의자에 바늘이 꽂힌 듯했고, 누군가에게는 그저 평온했다.
강지연이 찻잔을 드는 순간, 조민서가 그녀의 손을 보고 물었다.
“지연아, 너 결혼반지 꼈구나? 남편은 누구야?”
마치 청천벽력 같은 한마디였다.
맞은편의 온하준과 이하나의 낯빛이 동시에 무너졌다.
강지연은 찻잔을 받치고 있는 온하준의 손을 힐끗 봤다.
입가에 비웃음이 스쳤다. 그는 반지를 낀 적이 없다.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반지를 빼 버렸고, 이후 어디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지조차 모른다.
“네, 저 결혼한 지 5년 됐어요.”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제 남편 성은 온 씨예요.”
“그렇게 우연일 수가? 성이 같네요?”
온하준이 재빨리 말을 받았다.
뜻은 분명했다.
‘더는 말하지 마.’
“네, 성도 같고 일도 비슷해요. 다만 온 대표님만큼 큰 사업가는 아니죠.”
강지연이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찻잔 너머로 그가 안도의 숨을 쉬는 것이 분명히 보였다.
“정말 우연이네요. 다음에는 그분도 모셔서 함께 차 한잔합시다.”
조민서의 제자이기에 오정훈은 더욱 공손하게 초대를 건넸다.
온하준의 표정이 또다시 변했다.
강지연은 속으로 정말 웃긴다고 생각했다.
결혼한 지 5년 동안 그의 표정 변화를 다 합쳐도 오늘 오후만 못했다.
분위기상, 온하준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말을 몇 마디 더 섞더니 볼일이 있다며 일어날 핑계를 댔다.
그러면서도 강지연을 여기 혼자 두기가 불안한지, 괜히 헛소리라도 할까 봐 눈짓으로 재촉했다.
‘너도 일어나.’
제8화
조민서가 때마침 전화를 받았다. 통화 내용으로 보아 누가 그녀를 찾는 모양이었다.
강지연은 선생님의 일정을 붙잡아 두기 어려웠다. 정말로 일어나야 했다.
온하준이 곧장 말했다.
“오 대표님, 조 선생님, 어디에 묵고 계세요? 제가 모셔다드리죠.”
두 사람은 바로 옆 호텔에 머무는 중이라 굳이 데려다 줄 필요는 없었다. 대신 조민서는 강지연이 걱정되어 어디에 사는지 물었다.
강지연은 온하준을 한 번 흘깃 보더니, 거리 이름과 아파트 단지 이름을 또박또박 말했다.
“여보, 나는 택시 타고 갈게. 너는 지연이 좀 바래다줘.”
조민서가 말했다.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온하준이 덧붙였다.
“저희가 강지연 씨 사는 단지 옆 단지에 살아요. 저희가 모셔 드리죠.”
“그건...”
조민서는 잠시 망설였다.
강지연은 오히려 담담하게 받아들였다.
“좋아요. 그럼 온 대표님께 부탁드릴게요.”
그녀는 ‘온 대표님’이라는 호칭에 힘을 실었다.
온하준은 그 말을 듣자 미간을 살짝 좁혔다. 강지연은 못 본 척했다.
그렇게 정해져 온하준과 강지연, 그리고 이하나가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이하나는 더 나아가지 않고 입구에 서서 방긋 웃으며 말했다.
“됐어, 하준아. 너희는 집으로 가. 나는 혼자 차 탈게. 지연 씨, 사모님 자리 돌려줄게요.”
‘돌려준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내가 언제 빌려준 적이 있었던가?’
이하나는 강지연의 팔을 끌어안고 살랑살랑 흔들며 달착지근한 목소리로 이어갔다.
“지연 씨, 화내지 마요. 오늘 오해는 일부러 그런 게 아니에요. 하준이가 이번 협력을 엄청 신경 쓰잖아요. 오 대표님은 부부 사이가 좋은데, 파트너도 부부 사이가 좋으면 프로젝트에 플러스라서, 우리도 그 오해를 굳이 풀지 않았던 거예요. 아무래도 지연 씨는...”
그녀는 무심코 강지연의 다리를 슬쩍 내려다보고는 더 바짝 다가붙었다.
“지연 씨, 우리한테 화내지 않을 거죠?”
“우리?”
강지연은 차갑게 웃었다.
“누구랑 우리라는 거죠?”
이하나의 표정이 바로 굳었다.
강지연은 낯선 이가 이렇게 들러붙는 걸 원래도 싫어했다. 하물며 그 사람이 이하나라면 더더욱 싫었다.
그녀는 말을 마치자마자 팔을 빼냈다.
맹세컨대 그녀는 그냥 팔만 뺐다. 세게도 빼지 않았다.
정말, 절대로 밀지 않았다.
그런데 이하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강지연!”
온하준이 그제야 소리쳤다.
이하나는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더니 곧장 온하준을 가로막았다. 온몸으로 그를 막아서며 바짝 달라붙은 채 간절하게 달랬다.
“하준아, 화내지 마. 지연 씨를 탓하지도 말고. 방금은 내가 조심을 못 한 거야. 지연 씨가 살짝만 밀었는데 내가 중심을 못 잡았을 뿐이야. 하준아, 나 때문에 싸우지 마. 제발, 나 정말 속상해...”
‘이런 연기, 믿을 사람은 온하준뿐이겠지.’
이하나는 온하준을 막아서는 한편 자기 손목에 까진 상처를 일부러 보이도록 들어 보였다. 그 손목에는 방금 산 시계가 걸려 있었다.
강지연의 서랍에만 열 개가 누워 있는 바로 그 모델이었다.
온하준은 이하나의 손목에 까진 자국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 눈에 노골적인 연민을 띠고서 말했다.
“강지연! 너 왜 그래? 평소에는 착하고 사려 깊잖아. 왜 하나한테만 그렇게 큰 선입견을 가져?”
“내가 선입견을 가져?”
강지연은 짧게 웃었다.
“내가 뭘 가지겠어? 내가 어떻게 감히 네 아내한테 선입견을 가져? 안 그래?”
“너...”
온하준은 말문이 막혔다. 그는 고개를 숙여 이하나에게 물었다.
“아프지?”
“안 아파...”
이하나는 코로 새는 여린 소리를 내며 대답했다.
안 아프다면서 손목을 들어 그의 턱 가까이 가져갔다.
제9화
온하준이 고개를 숙여 상처에 살짝 입김을 불었다.
“이따 약 좀 발라. 흉지면 안 되잖아.”
강지연은 이런 눈빛의 온하준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그녀가 교통사고로 온몸이 다치고 한쪽 다리를 절게 되어 다리에 흉터가 가득했을 때조차, 그는 이렇게 뼛속까지 아파하는 표정을 자연스럽게 지은 적이 없었다.
그도 부드럽게 물은 적은 있다. 아프냐고, 아프면 울라고. 하지만 그건 마음 아파서가 아니라 죄책감이었다.
온하준은 그녀의 상처를 조심스레 떠안고 돌보는 사람이 아니었다. 상처투성이인 그녀를 마주하면 피했고, 외면했고, 보지 않았다.
“괜찮아, 나 진짜 안 아파!”
이하나의 목소리는 더 귀엽게 깔렸다.
“강지연.”
온하준이 고개를 들었다.
“하나가 얼마나 착한데. 아직도 사과 안 해?”
“내가 왜 사과해야 해?”
언제부터인지 통증이 강지연의 눈으로 밀려와 시야가 흐려졌다. 이 순간, 그녀는 온하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내 남편 아내를 사칭한 사람한테 사과까지 해야 해?”
“강지연! 너 왜 이렇게 독해졌어! 이건 하나가 이미 설명했잖아. 오 대표가 오해한 거고, 협력 프로젝트 때문에 우리가 그냥 맞춰 준 거야! 왜 그걸 붙잡고 못 놔?”
온하준은 또 화를 냈다.
그의 ‘하나’를 건드리기만 하면, 그는 반드시 화를 냈다.
강지연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온하준, 네가 틀렸어. 난 붙잡을 마음 조금도 없어. 현장에서 너희를 까발리지도 않았잖아. 사모님 자리 원하는 사람 마음대로 가져. 온하준, 나 이혼하자고 했지. 빨리 허락해. 그래야 모든 게 명분이 서.”
그녀가 현장에서 밝히지 않은 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다.
어차피 이혼할 건데, 굳이 일 하나를 더 만들 필요가 있나. 나중에 조민서를 만나면 또 두 사람과의 인연을 또 설명해야 한다. 정말 할 짓이 못 된다.
“강지연! 너 성질이 갈수록 괴팍해진다니까!”
온하준의 분노는 더 치솟았다.
“뭐든 선이 있어야 하는 법이야. 너 당장 하나한테 사과해!”
“안 해!”
강지연은 몸을 돌려 걸어가려 했다.
“거기 서!”
온하준이 한걸음에 다가와 그녀를 붙잡았다.
“어딜 가? 네가 하나를 밀어서 넘어뜨렸고, 하나 팔에 상처까지 났어. 사과도 안 하고 어딜 가?”
강지연은 자신의 손목을 움켜쥔 그의 손을 보았다. 절망이 파도처럼 번져 갔다.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보며 한 글자씩 말했다.
“그래. 난 한쪽 다리를 절고, 저 여자는 손이 긁혔네...”
그 말에 온하준의 눈에 격한 고통이 번쩍였다. 동시에 그의 손이 스르르 풀리며 두 걸음 물러섰다.
자유를 되찾는 그 순간, 그녀는 돌아서서 엘리베이터 쪽으로 달렸다.
달리는 거였다. 얼마나 볼품없어 보이든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이 눈물만큼은 그의 눈앞에서 절대로 보이면 안 됐다.
그녀가 다친 그때부터 결혼을 하고 5년이 지나기까지... 오늘 처음으로, 그녀는 자신의 다리 상처를 그에게 겨눴다.
예전의 그녀는 그의 감정을 그렇게까지 조심히 감쌌다. 그의 생각을 살피고, 그의 죄책감과 걱정과 자책을 염려했다.
그래서 자신의 다리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고, 5년 전 사고를 다시 꺼내지도 않았다. 사람들이 퍼붓는 험담과 차가운 시선은 늘 혼자서 삼켰다.
강지연은 그저 그에게 아늑하고 따뜻하고 가벼운 집을 만들어주고 싶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이 그에게 바친 사랑이 시간의 흐름 속에서 화사하게 피어나길 바랐다. 하지만 아쉽게도...
제10화
온하준도 아팠을까?
아팠을 것이다. 그의 인생은 강지연이라는 짐을 평생 짊어져야 하니까, 벗어날 수 없으니 안 아플 수가 없지.
온하준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곁에 있는데, 그녀의 존재 때문에 당당히 이름 붙일 수 없으니 안 아플 수가 없지.
양심과 탈출 충동 사이에서 계속 끓였을 테니 안 아플 수가 없지.
‘그러니까, 온하준. 날 놓아 줘. 놓아주면 안 되겠니?’
강지연은 혼자 집으로 돌아왔다.
앞에 시계 상자 열 개가 놓여 있었다.
그녀는 그 상자들을 한참이나 멍하니 바라봤다.
순간 상자 하나하나를 벽에 내던지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충동으로 해결되는 문제는 없으니까.
마음을 겨우 가라앉힌 뒤, 중고 거래 앱을 열어 명품 매입 상인을 찾기 시작했다.
곧 같은 도시의 업체를 발견했고, 다음 날 오전 10시에 수거 오기로 약속을 잡았다.
10시는 진경숙이 장 보러 나가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 일을 마치자 노트북을 켜고 비자 준비 관련 정보를 몽땅 찾아보기 시작했다.
조민서의 팀은 한 달 뒤 출발이다. 온하준과의 이별도 정말 카운트다운에 들어갔다.
컴퓨터 앞에 앉아 잡념 없이 게시글을 하나둘 읽어 내려가자, 가슴이 들썩였고 세상은 어느 때보다 고요하면서도 벅찼다.
모르는 새 밤이 새 버렸다.
너무 집중한 나머지 온하준이 돌아온 것도 몰랐다. 등 뒤 방문 쪽에서 ‘뭐 하고 있어?’라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강지연은 그제야 허둥지둥 노트북을 덮었다.
온하준은 언제나처럼 온화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녀의 곁으로 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드라마 보는 거야? 무슨 드라마가 그렇게 재밌어? 지금까지 안 자고?”
그녀와 할 말이 없으니 건네는 소리였다.
강지연은 노트북을 꼭 눌렀다. 아직 창을 닫지 못했다.
“네가 싫어하는 드라마야.”
“난 안 봤는데, 내가 싫어하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가 노트북을 열려고 손을 뻗었다.
‘안 돼. 방금 전까지의 검색 기록을 보이게 하고 싶지 않아.’
그녀는 손에 힘을 더 주었다.
그는 그녀가 아직 화가 났다고 여겼는지 더 이상 다투지 않았고 쭈그려 앉아 얼굴을 보며 물었다.
“아직 화났어?”
“아니.”
그녀의 감정에 실망이나 절망은 있었지만 유독 분노만은 아니었다.
분노란 그가 달래면 풀릴 수 있는 여지를 뜻한다. 하지만 그녀의 결혼은 더는 여지가 없었다.
5년, 이걸로 정말로 충분했다.
“강지연, 나랑 하나는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야. 그냥 동창, 친구. 걔가 해외에서 돌아오니까 친구끼리 모여 환영한 거고, 오늘 백화점에서 생긴 오해도 순전히 우연이야. 믿어 줘.”
온하준은 평소의 인내와 부드러움을 되찾은 듯했다.
그녀가 말이 없자 그는 다시 말했다.
“원래 오늘 네 집에 가서 부모님이랑 밥 먹기로 했는데 못 갔잖아. 다음에 가자, 응?”
강지연은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고 싶지 않았다.
거기서 부모와 동생은 분명 이렇게 말할 것이다. 다리 저는 네가 온하준한테 시집간 건 하늘이 준 복이라고.
“집에 가기 싫어? 우리 벌써 한 달 넘게 네 부모님 못 뵈었어. 보고 싶지 않아?”
온하준의 목소리는 점점 더 다정해졌다. 그녀는 그의 눈을 똑바로 봤지만, 그 다정 뒤에서 뜨거움을 보지 못했다.
다정함은 그의 몸에 심어진 자동 실행 프로그램 같았다. 전원이 켜지면 그냥 작동하는 그런 것이었다.
“온하준.”
그녀가 말했다.
“너 안 피곤해?”
온하준이 잠깐 멈칫했다.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네 마음에 누군가를 품고 있으면서, 매일 나한테 안부 챙기고 다정한 말 건네야 하잖아. 그거 안 피곤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