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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되어 빛나리
남편이 내연녀 생일이라고 경매 최고 낙찰가를 지르는 동안, 그녀는 자궁외임신으로 인한 심한 출혈로 수술대 위에서 거의 죽을 뻔했다. 결혼 4년, 그...
Chương (1)
第1章
남편이 내연녀 생일이라고 경매 최고 낙찰가를 지르는 동안, 그녀는 자궁외임신으로 인한 심한 출혈로 수술대 위에서 거의 죽을 뻔했다.
결혼 4년, 그녀의 헌신적인 사랑에도 남편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던 중 남편이 그녀 원수의 딸을 보물처럼 아끼는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순간 그녀는 이 결혼을 철저히 단념하고 이혼합의서만 남겨둔 채 단호하게 떠나갔다.
다시 직장으로 복귀한 그녀는 치열하게 커리어를 쌓아가며 강현시 전체를 깜짝 놀라게 했고 상류 사회의 높은 관심을 받게 되었다.
이제 그녀의 주변엔 괜찮은 남자들이 끊이질 않았고 이를 지켜보던 매정 보스는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었다. 직접 나서서 그녀에게 호감을 보이는 남자들을 일절 차단했고 그녀를 벽에 몰아붙였다.
“넌 언제나 내 와이프야. 이혼? 절대 동의 못 해!”
제1화
강현시 모 병원.
“자궁외임신이에요. 나팔관이 파열되면 정말 위험해요. 이렇게 큰 수술인데 왜 혼자 오셨어요? 남편은 어디 있는 거죠? 당장 불러서 서명받아야 해요!”
송하나는 복부가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을 참으며 전화를 걸었다.
통화연결음이 한참이나 울리고 마침내 전화기 너머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야?”
“강우 씨, 바빠요? 배가 너무 아픈데, 당신이 좀...”
“됐어!”
그녀가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짜증이 섞인 목소리가 가차 없이 심장을 후벼팠다.
“배 아프면 의사 찾아. 나 바빠!”
“강우 씨, 누구예요?”
전화기 너머로 낯선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야, 아무것도.”
그의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졌다.
“어떤 게 더 마음에 들어? 골라봐, 내가 사줄게.”
귓가에는 통화가 끊긴 연결음이 뚜뚜 울렸다.
송하나의 심장이 칼날에 베이듯 잔인하게 찢겨 나갔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지고 호흡이 가빠지자 의사가 다급하게 외쳤다.
“안 되겠다. 당장 수술실 준비해. 이 환자분 수술 진행해야겠어.”
송하나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병실에 누워 있었다.
“이제 정신이 좀 들어요? 환자분 어젯밤에 정말 위험했어요. 다행히 제때 수술해서 목숨을 건졌어요!”
간호사가 링거를 놓으며 투덜거렸다.
“환자분 남편 참 너무하네요! 이렇게 큰 수술을 했는데 어쩌면 얼굴 한번 안 비춰요? 정말 무책임하네요!”
“자, 여기 간호센터 전화예요. 필요하시면 간병인 부르세요.”
“고맙습니다.”
송하나는 간호사가 건네는 명함을 받았다.
휴대폰을 꺼내 간호센터에 전화를 걸려던 순간, 화면에 갑자기 [핫 뉴스] 알림이 떴다.
[강현 갑부 이원 그룹 이강우 대표, 연인을 위해 경매 최고가 280억 원 들여 마담 뒤 바리 다이아몬드 목걸이 낙찰!]
강렬한 타이틀에 송하나는 동공 지진을 일으켰다.
사진 속 티 없이 완벽한 얼굴의 소유자는 바로 그녀의 남편 이강우였다.
송하나는 그가 항상 수치스럽게 느끼는, 숨겨야만 하는 아내였다.
결혼 생활 4년 동안 이강우는 그녀에게 얼음처럼 차갑고 무심했다.
태생이 그런 사람인 줄 알고 마음을 녹이기 위해 순종적인 아내로 살아보려 노력했지만, 막상 그가 딴 여자를 껴안고 애정을 과시하는 모습을 보게 되니 철저하게 깨달았다.
이 남자는 나를 전혀 사랑하지 않았구나...
가슴을 쥐어뜯는 듯한 고통이 밀려왔다.
송하나는 저도 몰래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제는 정말 단념할 때가 되었다.
4년이나 끌어온 결혼이란 쇼는 막을 내릴 때가 되었다.
의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몸이 많이 허약한데 두 날만이라도 더 입원하지 그래요?”
“집에 일이 있어서요.”
“이 기간에는 절대적인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격렬한 운동은 피하고 부부관계도 가지면 안 돼요. 그럼 7일 후에 다시 검사받으러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선생님.”
송하나는 성수 빌리지에 있는 단독 주택으로 돌아왔다.
가정부 서민경은 아니꼬운 얼굴로 그녀를 타박했다.
“사모님, 대체 요즘 어떻게 된 거예요! 며칠씩이나 외박하다니. 대표님이 아시면 분명 화내실 거라고요!”
그녀는 비록 이씨 가문 가정부이지만, 사실상 반쪽짜리 시어머니나 다름없다.
이강우의 유모인지라 스스로 특별한 존재로 여겼으니까.
제대로 사랑받지 못하는 이씨 가문 사모님 송하나였기에 서민경은 처음부터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송하나는 잘 안다.
서민경이 자신에게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설령 이강우가 직접 지시한 것이 아니더라도 그의 묵인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감히 이렇게 오만하게 굴 수는 없을 터였다.
송하나는 이전에 이강우의 환심을 사려고 그의 주변 사람들까지 챙겼었다.
서민경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억압받아도 언제나 이를 악물고 참아왔다.
하지만 이번에는 더 이상 참고 싶지 않았다.
송하나는 곧바로 귀싸대기를 날리며 싸늘한 어투로 쏘아붙였다.
“건방진 것! 한낱 가정부 따위가 감히 나한테 이딴 식으로 말을 해?”
“야!”
서민경이 얼굴을 감싸고 당황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손을 댈 거라곤 미처 상상도 못 했나 보다.
“감히 날 때려?”
“그래! 때렸다, 어쩔래? 반격이라도 하게?”
송하나의 살벌한 기세에 서민경은 기가 눌렸다.
그녀가 아무리 이강우에게 사랑받지 못해도 이 집안 어르신 홍경자가 직접 선택한 손주며느리인지라 서민경은 차오르는 분노를 삼키는 수밖에 없었다.
송하나는 고개를 홱 돌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곧이어 서민경이 뒤에서 구시렁댔다.
“예쁘게 생기면 뭐해? 도련님은 어차피 거들떠보지도 않는데. 이씨 가문 사모님 자리는 조만간 딴 사람이 차지할 거야!”
공격적인 말은 날카로운 칼날처럼 송하나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그녀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이제는 그 어떤 것도 중요치 않다.
오늘이 지나면 이강우에 관한 모든 것이 아무 의미가 없을 테니까.
방으로 돌아온 송하나는 자신의 개인 물품을 일일이 정리했다.
그녀의 물건은 많지 않아 상자 하나면 충분했다.
상자를 옮기다 실수로 상처 부위를 건드렸더니 복부에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고 식은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진통제를 몇 알 삼키고 나서야 겨우 통증이 가시는 듯했다.
약효 때문인지, 아니면 지쳐서인지, 그녀는 침대에 누워 몽롱한 상태로 잠이 들었다.
깊은 밤.
훤칠한 실루엣의 남자가 방으로 들어섰다.
욕실에서 물소리가 쏴 하고 들리더니 20분 후, 이강우가 허리에 샤워 타월을 두른 채 걸어 나왔다.
그는 더할 나위 없이 잘생긴 얼굴에 넓은 어깨와 좁은 허리를 지녔고 초콜릿 복근은 보기만 해도 힘이 차 넘쳤다. 물방울이 복근을 따라 흘러내리며 느슨하게 늘어진 수건 속으로 스며들었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늘 하던 대로, 형식적으로 송하나의 잠옷 치맛자락을 들어 올렸다.
꿈속에서 헤매던 그녀는 통증에 화들짝 놀라 몸을 뒤척였다.
“아파...”
그녀는 본능적으로 이강우를 밀어냈다.
“저리 가.”
“갑자기 웬 밀당? 우리 하나 또 새로운 수법이 늘었네?”
낮고 조롱 섞인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이강우는 물러나기는커녕 오히려 보복하듯 그녀를 비웃었다.
“한 달에 한 번 합방하는 거 네가 할머니께 졸라서 받아낸 거잖아. 이제 하기 싫어진 거야?”
상처 부위가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고통에 송하나는 순식간에 눈물을 쏟았다.
그녀는 이강우가 자신을 증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실은 이씨 가문의 어르신 홍경자가 그녀와 이강우의 결혼을 부추겼다.
결혼 후, 이강우는 송하나를 대하는 태도가 마냥 냉랭했다. 이를 본 홍경자가 뒤늦게 규칙을 정했는데 매달 하루는 송하나와 합방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매번 송하나를 단순히 욕망을 해소하는 도구처럼 대했다.
지난 4년간의 결혼 생활을 되돌아보니 송하나의 마음은 고통으로 가득 찼다.
매사에 조심스럽고 서러움도 참으면서 굽혀왔지만 이 남자의 마음을 요만치도 얻지 못했다.
이럴 바에야 뭐가 아쉬워서 미련을 버리지 못할까?
“강우 씨, 우리 이혼해요...”
송하나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이강우는 평소라면 밤늦게 걸려오는 전화를 질색하지만, 이번에는 부드러운 말투로 받았다.
“그래, 무슨 일이야?”
“강우 씨, 나 혼자 너무 무서운데 와서 좀 같이 있어 주면 안 될까요?”
수화기 너머로 애교 섞인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알았어.”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이 목소리에는 송하나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다정한 온기가 담겨 있었다.
“20분만 기다려. 금방 갈게.”
통화를 마치고 이강우는 몸을 돌려 떠났다.
송하나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몇 분 후, 아래층에서 차가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송하나는 눈물이 베개를 적시고 창백한 손가락으로 이불을 꽉 움켜쥐었다.
사랑하는 것과 아닌 것의 차이가 이토록 선명할 줄이야.
다음 날 아침.
송하나는 이혼합의서를 남겨두고 캐리어를 챙겨서 집을 나섰다.
복부에서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고 몸 아래에 뜨거운 무언가가 흘러내리는 듯했다.
고개를 숙이고 보니 다리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고 끔찍한 핏자국이 바닥을 뒤덮었다.
제2화
송하나는 떨리는 손으로 119에 전화했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자 그녀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의식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땐 어느덧 다음 날이었다.
온몸에 빽빽하게 꽂힌 튜브들이 그녀를 뒤덮고 있었다.
의사는 속상하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를 질책했다.
“당분간 부부관계를 가지면 안 된다고 분명히 말했잖아요! 남편분이 그렇게 참을성이 없나요? 수술 직후에 관계를 갖는 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이제 됐네요. 상처에 또 출혈했어요. 제때 오지 않았으면 목숨을 잃을 뻔했다고요!”
“폐 끼쳐서 죄송해요, 선생님.”
의사는 고개를 숙여 송하나의 무기력하고 창백한 얼굴을 내려다보더니 마음속으로 안쓰러움이 더해졌다.
결국 의사도 거친 태도를 거두어들였다.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환자분 남편 정말 인간도 아니에요. 아내 몸을 전혀 아끼지 않잖아요!”
“당장 전화해서 가족분들 병원 나오라고 하세요. 환자분 간호해줘야죠, 뭡니까 이게? 만에 하나 무슨 일 생기면 저는 책임 못 져요.”
의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를 떴다.
송하나의 마음은 씁쓸하기만 했다.
그녀에게 과연 가족이 남아있기나 한 걸까?
17살 되던 해, 부모님은 한순간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고, 그날부터 그녀는 고아가 되었다.
삼촌 송종현이 후견인으로 나타나 부모님이 남긴 재산을 조금씩 갉아먹기 시작했고 회사와 별장까지 차지해버렸다.
송하나가 19살 되던 해, 술에 취한 삼촌은 돌아가신 그녀 어머니의 이름을 부르며 다짜고짜 그녀의 방으로 쳐들어가 하마터면 강간할 뻔했다.
그날 이후로 송하나는 이 집과 완전히 인연을 끊었다.
그녀는 의사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아 절친 차설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30분 후.
차설아가 병원으로 달려왔다.
간호사로부터 송하나의 딱한 사정을 들은 그녀는 분노를 참지 못했다.
“이강우 이 개자식! 널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얼굴 한번 안 비춰? 전화번호 이리 내! 이런 자식은 욕사발을 들어야 정신을 차리지.”
차설아가 격분하며 말했지만 송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어.”
지금 전화해봤자 자존심만 더 상할 뿐이니까.
오히려 그녀를 더 혐오할 게 뻔하다.
더 추하게 싸우느니 이대로 헤어지는 게 나을 법했다.
“하여튼 넌 정말!”
차설아는 그녀가 안쓰럽기도 하고 아무런 도움이 못 돼서 무기력함을 느꼈다.
“4년 전에 너 결혼한다고 신나서 말할 때 난 또 뭐 재벌가에 시집가서 편하게 살 줄 알았더니 이게 뭐야? 고생길을 자초한 거였잖아!”
“이강우는 너한테 신경조차 안 쓰고 온갖 서러움을 다 겪게 했는데 대체 뭘 보고 계속 옆에 남아있었던 거야?”
“돈 때문에? 그래, 돈 때문이라고 치자! 그런데 하필 이 개자식이 매달 몇십만 원씩 용돈 주는 것도 가정부를 통해서 주고 아주 그냥 짠돌이가 따로 없네?”
“하나야, 이강우가 네 생명의 은인이라도 돼? 그래서 그렇게 사랑하는 거야?”
송하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맞아. 날 죽음에서 건져줬어.”
부모를 잃고 우울증이 가장 심했던 시절, 그는 한 줄기 빛처럼 송하나의 삶에 나타났고 그 순간부터 그녀는 걷잡을 수 없이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다.
하지만...
송하나는 손을 들어 자신의 아랫배를 매만졌다.
그를 위해 두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고 이 정도면 은혜는 갚은 셈이었다.
이제 그녀는 이강우에게 아무것도 빚진 게 없다.
병원에 입원한 일주일 동안 차설아가 곁을 지키며 간호해주었고 이강우한테서는 전화 한 통도 오지 않았다.
그날 오전.
차설아가 송하나를 부축해 병실을 막 나설 때, 복도 저편에서 갑자기 소란이 일었고 간호사들이 모두 한 방향으로 달려갔다.
“우리 병원에 여자 의사 한 명 새로 왔는데 25살에 부교수래!”
“이렇게 젊은 나이에 부교수라니, 너무 대단한 거 아니야?”
“그러게 말이야. 전에 줄곧 해외에서 공부하면서 상도 거의 다 휩쓸었대. 귀국하자마자 의료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던데?”
“실력도 뛰어나지만 외모가 엄청 예쁘고 신비주의 톱클래스 재벌 남자친구가 있대! 자기 여자친구 밀어주려고 병원에 건물 하나 기부할 생각까지 한다더라!”
“헐, 대박! 이거 완전 레전드잖아.”
병원에서 지낸 며칠 동안 차설아는 지루해 죽을 지경이었는데 이토록 대단한 인물이 온다는 소식에 즉시 입을 열었다.
“하나야, 우리도 가서 한번 보자!”
병원 입구는 이미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병원 측에서도 새로 온 여자 의사를 매우 중시하는 듯 원장까지 직접 나와서 환영하고 있었다.
송하나가 혹시라도 다칠까 봐 그녀들은 가장 뒷줄에 섰다.
차설아는 까치발을 들고 머리를 앞으로 쭉 내밀며 투덜거렸다.
“스케일 뭐야? 누가 보면 톱스타가 오는 줄 알겠어.”
화려한 검은색 고급 승합차가 천천히 멈춰 섰고 안에서 두 남녀가 나란히 내려왔다.
인파 때문에 여자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남자는 훤칠한 키 덕분에 인파 속에서 유독 눈에 띄었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송하나는 어딘가 모르게 낯익은 느낌을 받았다.
그가 옆에 있는 여자를 팔짱 끼고 돌아서는 순간, 송하나는 숨을 멈췄다.
완벽하게 잘생긴 저 얼굴은... 바로 그녀의 남편 이강우였다!
“새로 오신 송 선생님 남자친구분은 이원 그룹 대표님이라고 하던데 역시 말이 안 될 정도로 잘생겼네요.”
“며칠 전, 뉴스에서 대표님이 여자친구 기쁘게 해주려고 경매에서 최고가 280억을 들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낙찰했다고 하더니 오늘은 또 당당하게 여자친구 응원하러 왔네? 여친 사랑이 너무 지극한 거 아니야?”
“송 선생님 너무 행복하시겠다. 모든 걸 다 갖췄잖아.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완벽할 수가 있지!”
주변의 탄성과 의논 소리가 끝없이 송하나의 귓가에 쏟아졌다.
차설아도 이강우의 얼굴을 보고는 단단히 충격을 받았다.
“헐, 이런 개자식이!”
‘하나가 죽다 살아났는데 안부 한 마디 없다가 여기서 당당하게 제삼자나 응원하고 있어?”
차설아는 화가 나서 대신 따지러 가려 했지만 송하나가 얼른 말렸다.
“됐어, 설아야. 이만 돌아가자.”
이혼은 이미 결정된 일이니 여기서 더 추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차설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이제 막 수술을 받은 송하나가 이런 자극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질까 봐 걱정되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그녀를 부축해 병실로 돌아왔다.
“이강우 이 개자식! 명색이 유부남이면서 이렇게 대놓고 제삼자랑 애정행각을 하는 거야?”
“그년도 참 뻔뻔하기 그지없네. 의사는 개뿔! 남의 남편 꼬시는 주제에. 의사 도덕이라곤 찾아볼 수가 없어.”
차설아는 인간쓰레기 이강우와 그 내연녀를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송하나의 표정은 매우 담담했다.
차설아는 그녀가 이강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잘 아니 별안간 걱정이 앞섰다.
“하나야, 괜찮아?”
송하나는 애써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괜찮아. 어차피 난 이미 이혼 결심했어.”
이혼 서류는 침실에 놓아뒀으니 늦어도 다음 달이면 이강우가 보게 될 것이다.
차설아는 조금 놀란 표정이었다.
“너 정말 마음 정리한 거야? 이강우랑 이혼한다고?”
송하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러려고.”
그녀는 평온한 표정이었지만 가슴은 칼날에 베이는 듯한 고통이 차올랐다.
그녀는 이강우를 꼬박 7년을 사랑했다.
이강우 이름 석 자가 이미 마음에 깊이 새겨졌다.
심장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거칠게 뜯어내야만 비로소 그를 완전히 지워낼 수 있을 터였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그녀는 이 결혼을 끝내기로 했다.
“잘 생각했어, 하나야!”
차설아는 조금 흥분한 듯했다.
“너처럼 훌륭하고 예쁜 여자가 어떤 남자인들 못 만나겠어. 왜 굳이 이강우라는 한 나무에만 매달려 있겠니?”
“이혼해! 당장 이혼해! 너 이혼하면 이 언니랑 같이 호빠 선수들 불러서 놀자. 에겐남, 테토남, 연하남, 근육남, 원하는 건 다 있으니 실컷 놀아보자고.”
제3화
며칠 후, 송하나는 퇴원 수속을 밟았다.
그녀는 온라인으로 집을 알아봤는데 월세 100만 원에 연세 계약이었다.
ATM 기기에서 돈을 찾으려고 확인해 봤더니 통장에 단 몇만 원밖에 남지 않았다.
차설아는 참지 못하고 또다시 욕설을 퍼부었다.
“이강우! 강현 갑부에 재산이 수십 조인데 X발 자기 아내한테 이렇게까지 인색한 거야?”
“내연녀한텐 툭하면 몇백억, 몇천억씩 퍼붓고 경매도 최고가로 낙찰하고 건물까지 기부해대면서, 막말로 지나가는 거지에게도 몇만 원 쥐여줄 기세인데 왜 정작 자기 아내한테는 낯선 사람보다도 못하게 대하는 거야!”
“하나야, 너 대체 지난 몇 년 동안 어떻게 지내온 거니?”
송하나는 마음이 시큰거렸다.
이강우는 분명 그녀를 뼛속까지 증오할 것이다.
4년 전.
홍경자가 그녀를 이씨 저택으로 초대했다.
저녁 무렵, 폭우가 쏟아져서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홍경자는 그녀더러 이강우의 바로 옆방에서 하룻밤 묵고 가라고 했다.
한편 이강우는 중요한 약속이 있었는데 누가 그의 술에 약을 탔는지 한밤중에 만취 상태로 집에 돌아와 방을 헷갈려서 결국 그녀와 관계를 가졌다.
또한 홍경자는 원래 두 사람을 이어주고 싶어 했다.
다음 날, 그들이 함께 잔 걸 알게 되고는 이를 핑계로 삼아 이강우에게 그녀와의 결혼을 강요했다.
이 일로 이강우는 송하나를 단단히 오해했다.
재벌가에 시집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여자로 여겼고 조종당하는 게 딱 질색인지라 본인만의 방식으로 그녀에게 가혹한 복수를 시작했다.
이전의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서민경은 그녀에게 용돈을 줄 때마다 항상 자존심을 짓밟고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이었다.
“하나 씨는 종일 장을 봐요? 밥을 해요? 그렇다고 전기세나 관리비를 내는 것도 아닌데 대체 돈 쓸데가 어디 있죠? 도련님이 매달 몇십만 원 주는 것만 해도 감사한 줄 알아요!”
송하나는 물욕이 아주 적은 사람이다.
이강우와 함께할 수만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하늘 아래 가장 큰 행복이라 전혀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야 자신이 이씨 가문의 며느리 노릇을 참으로 비굴하게 해왔음을 깨달았다.
카드를 지갑에 다시 넣다가 우연히 클립 안에서 오래된 카드 한 장을 발견했다. 그것은 대학 시절 쓰던 카드였다.
송하나가 해마다 받던 장학금과 각종 대회 수상금이 이 카드에 들어 있었다.
그렇다면 아마 방세는 충분히 마련할 수 있을 듯싶었다.
카드를 ATM 기기에 넣었는데 화면에 놀랍게도 엄청 긴 숫자가 나타났다.
옆에 있던 차설아도 입이 쩍 벌어졌다.
“헐! 이게 뭐야? 코드 오류인가?”
“천, 만, 십만... 백만, 천만...”
그녀는 숫자를 꼼꼼하게 세어보았다.
“무려 200억이 넘잖아!”
송하나 역시 이 금액에 충격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명세서를 확인해보니 한 제약회사에서 지급하는 특허 로열티 수익이었고 매달 수억 원씩 입금되고 있었다.
학창 시절.
그녀는 지도교수와 함께 제약 관련 연구를 진행하여 특효약을 개발했고 특허까지 취득하여 학교에서는 파격적으로 그녀에게 해외 박사과정 지원 자격을 부여했다.
당시 송하나는 오로지 이강우와 결혼할 생각에 다른 어떤 것에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녀는 해외에서 심화 학습할 기회를 포기했고, 연구 성과를 전적으로 지도교수에게 맡겨 처리하게 했다.
지도교수가 애타게 권유했지만 그녀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지도교수는 어쩔 수 없이 그녀에게 은행 계좌번호를 물었고, 그녀의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않았다.
송하나는 이제야 알게 됐다...
이 특허 로열티 수익이 매달 자신의 계좌로 입금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돈의 출처를 들은 차설아는 그녀에게 감탄하여 무릎을 꿇을 지경이었다.
“하나야, 넌 정말 천재야! 대학교 때 그냥 연구 한번 했다고 이렇게 큰돈을 벌다니! 진짜 너무 대단해.”
송하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렇게 오랜 세월 이씨 가문의 며느리로 살아오면서 그녀는 까마득히 잊고 있었다. 자신이 15살 어린 나이에 수석으로 국내 최고 의대에 입학했던 천재 소녀였다는 것을.
게다가 20살에는 특효약을 개발하여 제약 업계 전체를 뒤흔들었던 촉망받는 연구자였다.
멍하니 넋 놓고 있던 사이, 부동산 중개인의 전화가 걸려왔다.
“송하나 씨, 그 집은 어떻게... 임대하시겠어요?”
“아니요, 임대는 안 할래요.”
“혹시 집주인이 팔 의향이 있는지 알아봐 주시겠어요? 제가 사고 싶어서요.”
“지금 바로 집주인에게 전화해 볼게요!”
그날 오후.
송하나는 매매 계약서에 서명하고 소유권 이전 절차를 마쳤다. 그리고 드디어 자신의 보금자리로 이사했다.
차설아가 그녀의 새집을 함께 꾸미고 소소하게 집들이 파티까지 열어주었다.
“우리 하나 인간쓰레기 개자식 이강우한테서 벗어난 거 진심으로 축하해요. 앞으로는 꽃길만 걸을 거예요.”
밤이 깊어갈 무렵.
송하나는 잠자리에 들려다 문득 안재준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안재준은 그녀의 아버지가 생전에 고용했던 운전기사였다.
정말 급한 일이 아니라면 이렇게 늦은 시간에 전화할 리가 없었다.
송하나는 전화를 받았다.
“네, 기사님.”
“하나 씨, 그해 회장님과 사모님의 죽음이 단순한 사고가 아닐 가능성이 커요.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하신 겁니다.”
송하나의 눈동자가 걷잡을 수 없이 흔들렸다.
“기사님 혹시 뭔가 알아낸 거예요? 우리 부모님이 대체 어떻게 돌아가셨는데요? 누가 그분들을 해친 거예요?”
“범인은 바로 하나 씨 삼촌 송종현이에요. 아직은 죄를 입증할 직접적인 증거가 없지만, 회장님과 사모님의 죽음은 분명 송종현 씨와 관련이 있어요. 제가 장담합니다!”
송종현...
송하나는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모든 이익을 독차지한 것은 그녀의 삼촌 가족이었다.
그들은 부모님이 20년간 피땀 흘려 일궈온 모든 것을 빼앗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탐욕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돈 때문에 부모님의 목숨까지 앗아갈 거라고는... 단 한 번도 의심한 적 없었다.
송하나는 그날 밤, 단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을 감기만 하면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의 참혹한 장면들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악몽에서 깨어난 송하나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부모님의 죽음에 얽힌 진실을 반드시 밝혀내고 범인 가족에게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한다.
다음 날 오전.
차설아가 그녀와 함께 쇼핑을 나서기로 했다.
“하나야,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어제 제대로 못 잤어?”
“새 침대라서 그런지 습관이 안 되더라.”
차설아가 그녀에게 립스틱을 얇게 발라주었다.
“이제 훨씬 보기 좋다!”
“가자. 우리 하나 이렇게 예쁘고 몸매도 좋은데 옷도 몇 벌 안 사면 그건 완전 낭비지.”
차설아는 송하나의 손을 잡고 강현의 고급 백화점으로 향했다.
송하나는 옅은 은색의 오프숄더 롱 드레스가 눈에 들어왔다.
“고객님, 안목이 정말 뛰어나시네요. 이 드레스는 올해 저희가 선보인 런웨이 한정판이라 딱 한 벌 있어요!”
점원이 드레스를 꺼내 송하나에게 건넸다.
이제 막 손을 뻗으려는 순간, 옆에서 누군가가 먼저 낚아챘다.
“이거 괜찮네요. 포장해 주세요.”
송하나는 고개를 돌리고 익숙한 얼굴을 마주했다.
정교한 메이크업에 옷차림도 깔끔한 이 여자는 바로 송하나의 삼촌 송종현의 딸 송태리였다.
예전에도 송태리는 그녀의 집을 독차지하고 그녀를 괴롭히기를 일삼았다.
거기에 어젯밤 안재준과의 통화를 생각하니...
송하나는 그녀를 향한 분노가 점점 더 치밀었다.
“내가 먼저 봐둔 거야. 손 떼!”
송하나가 차갑게 쏘아붙였다.
한편 송태리는 그녀를 알아보고 눈가에 당혹감이 스쳤다.
거만한 표정으로 송하나를 흘겨보더니 의심 가득한 말투로 물었다.
“이 드레스 무려 5600만 원이야. 네까짓 게 살 수나 있겠어?”
“알 바야? 신경 꺼!”
직설적인 성격의 차설아가 드레스를 즉시 뺏어왔다.
“하나야, 가서 한번 입어 봐.”
송하나가 피팅룸으로 가려던 찰나, 굵고 힘 있는 커다란 손이 갑자기 그녀의 팔을 붙잡았다.
머리 위에서 울리는 중저음의 목소리는 거절할 수 없는 위엄을 띠고 있었다.
“그 옷 태리 줘. 대신 내가 보상으로 다른 옷 사줄게.”
머리를 든 송하나는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녀 앞에 선 이 남자는, 원수의 딸에게 옷을 양보하라고 말하는 이 남자는 뜻밖에도 그녀의 남편 이강우였다!
제4화
이 광경을 본 송하나는 발끝부터 차가운 기운이 치밀어 오르고 사시나무 떨듯 몸이 파르르 떨렸다.
이강우가 뼛속까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바로 송태리였다니!
왜 하필 그녀인 건데? 왜 하필 원수의 딸이냐고?
“싫다면요?”
송하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그럼 네 생활비를 일절 끊어버려야지.”
이강우의 목소리에는 차가움과 거리감이 느껴졌다.
“참나.”
송하나는 웃음을 터뜨리다가 눈물이 핑 돌 지경이었다.
얼마나 아이러니한가.
송태리를 기쁘게 하려고 이 인간은 정말 못 하는 게 없었다.
“괜찮아요, 강우 씨.”
송태리가 애교를 부리며 이강우의 팔짱을 꼈다.
“얘는 내 사촌 동생이에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어릴 때부터 집에서 내 물건을 뺏는 걸 좋아했어요. 고작 옷 한 벌 뿐이니 그냥 얘 줘요.”
도저히 지켜볼 수 없던 차설아가 송태리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이런 뻔뻔한 세컨드 주제에 우리 하나가 먼저 찜한 옷을 뺏는 것도 모자라 사실까지 왜곡해? 아갈머리를 확 찢어버릴라!”
이강우의 안색이 보기 좋게 일그러졌다.
송하나는 차설아를 잡아당겼다.
자신과 이강우, 송태리 세 사람의 분쟁에 다른 이들까지 휘말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이강우는 송하나를 빤히 쳐다보면서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그녀가 양보하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송하나는 그대로 카드를 점원에게 건넸다.
“이 옷 제가 살게요. 카드 결제해 주세요!”
그녀가 노골적으로 거절하자 이강우는 미간을 찌푸렸고 얼굴에는 불쾌감이 역력했다.
다만 송하나는 그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비싸게 산 드레스를 들고 뒤돌아섰다.
그녀의 등 뒤에서 이강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거, 이거, 그리고 저것도. 매장에 들어온 신상들 싹 다 포장해서 태리 집으로 보내줘요.”
그 순간 송하나는 걸음을 멈칫했다.
모든 신상품이면 적어도 수억 원은 될 터였다.
송태리가 마음에 드는 옷을 득템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그는 이토록 사치스럽게 보상해주고 있었다.
송태리를 뼛속까지 사랑해서 일말의 서러움도 겪지 않게 해줄 건가 보다.
이런 상황에 차설아는 욕설을 내뱉지 않을 수가 없었다.
“X발! 이강우 눈깔이 삐었나? 너 같이 현명한 아내를 옆에 두고도 몰라주다니. 송태리 저 여우 같은 년이 대체 뭐가 좋다는 거야?”
송하나는 가슴 한쪽이 찌릿했지만, 이내 다시 담담해졌다.
어차피 이혼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왜 굳이 또 이강우 때문에 괴로워해야 할까?
다음 날 오전.
송하나는 혼자 무료함을 달래며 거리를 거닐었다.
어슬렁거리다 보니 어느덧 모교 앞에 도착했다.
캠퍼스에서는 한창 채용 박람회가 열리고 있었다.
후배들의 맑고 생기 넘치는 얼굴을 보니 그녀의 마음도 잠시 아련해졌다.
만약 4년 전, 연애 호구가 되어 이강우에게 시집가지 않았더라면, 자신의 학업과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지금은 또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겠지...
“송하나?”
등 뒤에서 누군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뒤돌아보니 놀랍게도 대학 시절 지도교수 장현서가 서 있었다.
“교수님.”
장현서는 이전보다 조금 늙어 보였고 흰머리가 늘었지만, 여전히 독설을 내뱉던 영감탱이였다.
“많이 야위었어. 안색도 안 좋고. 사는 게 많이 힘들었니?”
“그게...”
송하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이걸 대체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그때 멀리서 그 녀석 얼굴을 한번 본 적이 있는데 널 진심으로 대하는 것 같지 않더라. 하나 너는 꼭 직접 겪어보고 넘어져 봐야 정신을 차리는 애였지. 이제 드디어 상처도 받고 아픈 줄 알겠어?”
장현서는 안타까움과 답답함을 담아 그녀를 타박했다.
이에 송하나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직접 부딪혀 보니 얼마나 아픈지 알겠더라고요.”
“교수님, 그 약품 특허 건은 정말 감사했습니다.”
“원래 네 것이었으니 당연한 거야. 돈을 손에 쥐고 있어야 막다른 길에 섰을 때 탈출구라도 있지.”
이제야 송하나는 교수님의 깊은 배려를 깨달았다.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은 스승과 제자의 인연을 끊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눈앞의 길이 불바다임을 뻔히 알기에 그녀가 그곳으로 뛰어드는 모습을 차마 직접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점심 무렵.
송하나는 장현서와 함께 학교 식당에서 식사했다.
“직장은 구했어?”
송하나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도 일자리를 찾아볼 생각이 있었다. 4년 동안 전업주부로 살아오면서 거의 세상과 단절된 채 오로지 이강우만을 바라봤었다. 그러다 보니 갑자기 사회생활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장현서가 명함 한 장을 건넸다.
“이 회사 대표가 내 제자인데 너만 원한다면 언제든지 출근할 수 있을 거야.”
송하나는 명함을 쓱 훑어보았다.
[현진 바이오테크.]
이곳은 근 2년 사이에 급성장한 기업으로 암 치료제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그녀의 전공과도 정확히 일치했고 회사 규모도 비교적 단순해 직장 경력이 거의 없는 신입인 그녀에게 안성맞춤이었다.
하지만 송하나는 스승의 인맥을 이용해 손쉽게 취직하고 싶지 않았다.
그날 오후, 장현서는 수업에 들어갔다.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이력서를 작성하여 현진 바이오테크 HR에게 전송했다.
곧바로 HR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는데 다음 날 오전 관련 서류를 지참하여 면접에 응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송하나는 서류를 정리하다가 졸업증명서가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성수 빌리지에 두고 온 모양이다.
그녀는 급히 저택으로 달려가 증명서를 찾았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서민경이 통화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이번 달에 보내주신 금액이 혹시 잘못된 거 아니에요?”
전화기 너머로 이강우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돈은 저택 유지비용으로 쓰세요. 이달부터 송하나 생활비는 전부 중단시킬 겁니다!”
송하나를 본 서민경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이강우는 매달 서민경의 계좌를 통해 송하나에게 생활비를 보내왔다.
그녀는 송하나가 사랑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몰래 그 돈을 횡령하고는 상징적으로 몇십만 원만 쥐여주었다.
무덤덤한 표정인 걸 봐서 송하나는 아직 아무런 낌새도 눈치채지 못한 듯싶었다. 이에 서민경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송하나를 뒤따라 오며 끊임없이 설득하려 애썼다.
“사모님, 혹시 또 도련님 화나게 하셨어요?”
“도련님과 결혼한 건 사모님 인생에 최대의 행운이에요. 도련님이 밖에 여자가 있으면 어때서요? 사모님 의식주는 아무 문제 없잖아요. 대체 왜 이런 사소한 일로 심술을 부려요?”
“제 말 듣고 얼른 도련님께 전화해서 잘못했다고 사과하고 빌어요. 그럼 아마 도련님도 용서해주실 거예요.”
“저도 다 사모님 위해서 하는 말이니 쓸데없는 고집은 부리지 말아요.”
서민경은 송하나의 뒤에서 끊임없이 잔소리를 늘어놓으며 그녀를 따라 침실까지 들어왔다.
송하나는 뒤돌아보며 눈가에 미소를 띠었다.
“그게 과연 나를 위해서일까 아니면 본인 주머니나 채우려는 수작일까? 나보단 본인이 더 잘 알겠지?”
서민경은 그 자리에서 완전히 얼어붙었다.
그녀는 손에 쥔 물티슈로 탁자를 닦는 척하며 말을 얼버무렸다.
“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네요.”
서민경의 어색한 행동을 보고 송하나는 자신의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이강우가 전에 달마다 그녀에게 생활비를 얼마만큼 주었는지 더 이상 알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이제 아무 의미도 없으니까.
서랍에서 졸업증명서를 찾아낸 송하나는 곧장 집 밖을 나섰다.
한편 서민경은 탁자 위에 놓인 이혼 서류를 보고 잠시 멍해졌다.
그녀는 서둘러 송하나를 뒤쫓았다.
“도련님과 이혼하시려고요?”
송하나는 고개를 살짝 돌렸다.
“이왕 본 김에 나 대신 강우 씨한테 좀 전달해줘.”
떠나가는 송하나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서민경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엔 그녀가 죽자사자 매달려서 결혼한 건데 겨우 이씨 가문에 발을 들였더니 선뜻 사모님 자리를 내놓겠다고?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제5화
다음 날 오전.
현진 바이오테크 대표이사실.
인사팀 직원이 서류를 가져왔다.
“대표님, 오늘 면접 보러 온 지원자들 서류입니다.”
“거기 놔둬. 이따가 회의가 있으니 면접은 참석 못 할 것 같아.”
“네.”
서유준은 회의실로 향하려 몸을 일으키다가 무심코 가장 위에 놓인 이력서에 시선이 멈췄다.
[송하나.]
그 이름을 본 순간 그는 잠시 멈칫했다.
이력서를 건네받고 사진 속 익숙한 얼굴을 보자 서유준의 마음속에 복잡한 감정이 순식간에 밀려왔다. 심지어 약간의 놀라움까지 더해졌다.
그는 장현서의 자랑스러운 제자였고, 송하나보다 몇 살 더 많았다.
유학 시절, 이미 장현서한테서 똑똑하고 재능 있는 제자를 거뒀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녀는 그야말로 천재나 다름없다고 했다.
장현서는 그와의 전화 통화 중 학술적인 문제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늘 이 후배에 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처음에는 단순히 그녀가 얼마나 대단하길래 교수님이 그토록 높이 평가하는지 알고 싶어서 그녀의 소식에 귀 기울였다.
그러다 점차 사진으로만 보았던 이 후배에게 마음을 빼앗기게 되었다.
유학을 마치고 서유준은 망설임 없이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러나 비행기에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들린 소식은 그녀가 곧 결혼한다는 것이었다.
이번 생에 다시는 엮일 일이 없을 거로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하게 그녀의 이력서를 받게 된 것이다.
서유준은 즉시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오전 회의는 취소하라고 전달해!”
서유준은 면접실로 향했다.
인사팀 직원들은 그를 보고 잠시 놀랐다가 황급히 가운데 자리를 내주었다.
“대표님.”
서유준은 억누르기 힘든 설렘을 애써 참았다.
“시작하지.”
면접이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는 메인 석에 앉아 말없이 지켜보았고, 인사팀 직원이 지원자에게 질문을 던졌다.
“대표님, 아까 그 지원자...”
인사팀 직원이 서유준의 의견을 구했다.
“너희가 알아서 해.”
“네, 알겠습니다.”
“다음 지원자, 송하나 씨.”
마침내 송하나가 면접실 안으로 들어왔고 서유준의 시선은 온통 그녀에게 집중되었다.
그녀의 안색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인사팀 직원이 몇 가지 공식적인 질문을 던졌다.
송하나는 4년간 전업주부로 지냈지만, 그 기간에도 꾸준히 책을 읽고 자기 계발을 해왔기에 질문에 막힘없이 답했고 별다른 실수가 없었다.
인사팀 직원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제 그녀를 돌려보내고 결과를 기다리라고 말하려던 참인데 옆에 있던 서유준이 대뜸 입을 열었다.
“기혼자라고 적었는데.”
그는 왜 갑자기 일하고 싶은 건지 묻고 싶었지만, 인사팀 직원이 그의 의도를 오해하고 방금 질문에 덧붙여서 물었다.
“하나 씨, 저희는 장기적으로 근무할 직원을 찾고 있어요. 혹시 단기간 내에 출산 계획이 있으신가요?”
송하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곧 이혼할 예정이라 출산 계획은 없습니다.”
이 대답을 들은 서유준은 잠시 멈칫했다. 그녀의 눈가에 스치는 희미한 쓸쓸함을 본 그는 왠지 모를 안타까움을 느꼈다.
4년간의 결혼 생활에서 그녀는 대체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일까?
“하나 씨, 상황은 잘 알겠습니다. 돌아가서 연락 기다리세요.”
“네.”
송하나는 면접실을 나왔다.
서유준에게 있어서 그 뒤의 면접은 무의미한 시간이라 차라리 일찍 자리를 떠버렸다.
송하나의 이혼은 그에게 있어 더 이상 망설일 여지가 없는 기회였다.
오랫동안 마음 깊은 곳에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통제할 수 없이 솟구쳐 올랐다.
그날 오후.
송하나는 현진 바이오테크 인사팀으로부터 다음 주에 회사에 출근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그녀는 이 소식을 교수님께 알렸다.
장현서는 그녀 성격이 겉으로는 온화해 보여도 실은 강단이 있어 분명 자신의 능력으로 면접을 통과했을 것이라 믿었다.
차설아는 송하나가 직장을 구했다는 소식에 매우 기뻐했다. 어떻게든 그녀를 불러내서 제대로 축하해주리라 마음먹었다.
그날 밤.
송하나는 약속대로 미스트라는 바에 도착했다.
화려하게 눈부신 조명과 술렁이는 분위기에 그녀는 약간 어색함을 느꼈다.
“하나야, 여기야 여기!”
차설아가 룸 입구에서 송하나를 향해 손짓했다.
송하나가 막 자리에 앉았을 때, 매니저가 웃통을 깐 남자들을, 아니 호빠 선수들을 줄지어 데리고 들어왔다.
송하나는 이 광경에 깜짝 놀랐다.
“설아 너 지금 뭐한 거니?”
“네가 곧 이혼하는 걸 축하하고, 직장 구한 것도 축하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걸 기념해서 이 언니가 특별히 준비해봤어. 마음에 드는 애 있으면 술 마시는 동안 옆에 두고 놀아.”
송하나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이건 좀 아닌 것 같아.”
그녀는 노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유일한 연애 경험은 사춘기 시절 이강우를 좋아했던 것, 그리고 그와 결혼한 게 다였다.
“쟤로 하자.”
차설아는 맨 안쪽에 있는 가장 잘생긴 애를 가리키며 송하나 대신 결정을 내렸다.
그 남자가 송하나의 옆자리에 앉았다.
완벽한 초콜릿 복근이 눈앞에서 흔들거리니 그녀는 차마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앞에 놓인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며 어색함을 달랬다.
문득 그 남자가 적극적으로 송하나의 손을 잡으며 그녀에게 눈빛을 보냈다.
“누나, 내 위에 앉아서 마셔요. 복근은 마음대로 만져도 돼요.”
송하나는 깜짝 놀랐다.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그녀는 너무도 어색한 나머지 재빨리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화장실에서 세수하며 정신을 가다듬었는데 나오다가 실수로 길을 잘못 들어서 자신도 모르게 VIP 구역에 발을 들였다.
그 시각, VIP 룸 안.
이강우가 송태리에게 자신의 소꿉친구들을 소개하고 있었다.
최로운과 심성빈은 어릴 적부터 이강우와 함께 자랐고, 집안 또한 부유하고 명망 있는 강현시의 유력 인사들이었다.
이강우는 팔을 소파에 걸치고 있었고 송태리는 그의 옆에 앉아 꼭 마치 자연스럽게 품에 안긴 듯한 모습이었다.
최로운이 술잔을 들었다.
“형수님, 한 잔 올리겠습니다.”
“우리 강우는 모임에 여자를 데려온 적이 단 한 번도 없어요. 태리 씨가 처음이라니까요.”
송태리는 이강우를 힐끔 쳐다보았다.
“자꾸 놀리지 말아요. 혹시 오는 여자들마다 이렇게 말해주는 건 아니겠죠?”
“제가 하는 말은 다 사실이에요. 못 믿겠으면 성빈이한테 물어봐요!”
심성빈이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강우는 여자한테 가까이하지 않기로 유명하잖아요. 하도 송하나가 수작 부려서 강우한테 결혼을 강요한 거지. 안 그러면 우리 강우 그딴 여자 쳐다도 안 봤을 거예요.”
이 말을 들은 송태리는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다.
그녀는 신이 나서 손에 든 술을 단숨에 비웠다.
최로운이 또다시 한 잔을 따라주었다.
“태리 씨, 술 정말 잘 드시네요! 자, 한 잔 더 해요!”
이때 이강우가 손을 뻗어 그녀를 제지했다.
“얘 술 약해. 적당히 줘.”
최로운이 옆에서 헛웃음을 터뜨렸다.
“벌써 감싸고 도는 거야?”
“고작 두 잔 마셨어. 강우 너 너무 인색한 거 아니야?”
이강우가 송태리의 손에서 술잔을 건네받았다.
“내가 대신 마실게.”
“그건 안 되지!”
최로운이 이강우의 술잔을 다시 송태리에게 넘겼다.
“적어도 러브샷 정도는 해야잖아.”
송태리는 살짝 수줍은 듯 이강우를 바라보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알았어요, 마실게요. 대신 이 잔까지 마시면 더 이상 권하지 않기예요.”
“역시 태리 씨가 통쾌하네요!”
송태리와 이강우가 술잔을 높이 들었다.
바로 그때, 송하나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개를 들자마자 이강우와 송태리가 러브샷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강우는 그녀를 본 순간, 얼굴에 노골적인 혐오감이 떠올랐다.
“네가 여길 왜 와?”
제6화
최로운과 심성빈은 이강우의 결혼식에 송하나를 딱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 그녀의 외모는 괜찮은 편이었다. 수년이 지났어도 두 남자는 그녀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이강우의 오랜 친구로서 그들 역시 송하나를 매우 싫어했다.
최로운이 옆에서 비꼬듯이 말했다.
“강우야, 네 와이프 이제 하다 하다 여기까지 미행하는 거야?”
이강우는 차갑게 콧방귀를 뀌었다.
“얘가 가당키나 할까?”
그의 냉랭한 말투, 송태리의 의기양양한 미소, 그리고 최로운과 심성빈의 조롱까지 전부 송하나의 심장을 깊숙이 찔렀다.
“미안, 방을 잘못 들어왔네요.”
그녀는 그대로 문을 닫고 나갔다.
송하나의 침착한 태도에 최로운과 심성빈은 약간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보통 여자들은 자기 남편이 다른 여자랑 있는 거 보면 야단법석을 떨 텐데? 쟤는 전혀 아무렇지 않아 보인다? 강우야, 쟤 설마 이제 너 안 사랑하는 거니?”
“말도 안 돼. 쟤 우리 강우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내놓을 기세잖아. 아마 쫓겨날까 봐 싸울 엄두도 못 내는 거야.”
문밖에서 송하나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그녀는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저들의 말을 담아두지 말자고 스스로 타일렀다.
“예쁜 누나!”
바로 그때, 선수 한 명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한참 찾았는데 여기 있었네요.”
그는 자연스럽게 송하나의 허리를 감쌌다.
“가요. 설아 누나 기다리게 하지 말고.”
송하나는 조금 어색했지만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최로운이 문 위의 유리를 통해 그녀가 다정하게 호스트바 선수의 손을 잡고 다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더니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헐, 대박! 이강우, 너희 부부 진짜 놀 줄 아는구나! 송하나 쟤 지금 선수 불러서 놀고 있어.”
심성빈이 분석에 나섰다.
“그러고 보니 아까 현장 잡으러 온 게 아니라 진짜 실수로 방을 잘못 들어온 거였네?”
이강우의 잘생긴 얼굴이 순식간에 끔찍하게 짙어졌다.
‘송하나, 네가 감히?’
‘이강우 와이프’라는 이름표를 달고 윤리에 어긋나게 이런 곳에 와서 호빠 선수나 놀고 있다니. 이강우의 체면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는 행위였다.
한편 송하나가 방에 돌아왔을 때, 차설아는 이미 술에 잔뜩 취해 있었다.
“하나야, 어디 갔다 이제 와?”
“실수로 방을 잘못 들어갔어.”
송하나는 이강우를 만난 것까진 그녀에게 알리지 않았다.
문득 차설아가 제안했다.
“우리 게임 할래? 입으로 카드 옮기기. 누가 카드 옮기다가 실패하면 술 마시는 거로!”
송하나는 이런 이상한 게임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차설아가 그녀의 손을 잡고 소파에 앉혔다.
“같이 하자. 분위기 망치지 말고.”
송하나는 어쩔 수 없이 게임에 참여하게 되었다.
잘생긴 호빠 선수들이 입에 카드 조각을 물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낯선 남자가 가까이 다가오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몇 번의 실패 끝에 송하나 역시 벌주를 연이어 마셔야 했다.
그러다 맨 마지막엔 거부감을 극복하고 눈 딱 감고서 카드를 건네 물었다.
바로 그때, 최로운이 휴대폰으로 몰래 촬영했다.
남들 기분 따위 고려하지 않고 장난기가 심한 그는 돌아가서 이 영상을 이강우에게 보여줬다.
“강우야, 네 와이프 진짜 잘 놀더라. 너 자꾸 집 비워뒀다가 딴 남자가 낚아채 가는 거 아니야?”
영상 속에서 송하나와 호빠 선수는 거의 키스 직전까지 입술이 닿았다.
이 장면을 본 이강우는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아무리 싫고, 혐오한다 해도 자기 와이프가 코앞에서 딴 남자랑 애틋하게 놀아나는 모습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강우 씨.”
송태리가 옆에서 입을 열었다.
“그냥 강우 씨 신경 끌려고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걸지도 몰라요.”
최로운은 깨달음이라도 얻은 듯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럴 수도 있지!”
“송하나 걔 너한테 약 탈 정도로 치밀한데 혹시 알아? 일부러 선수 불러서 널 자극하려는 수작일지?”
이강우는 말없이 잔에 담긴 술을 단숨에 비웠다.
그는 몰래 이 가게 사장을 불러 좀전의 호빠 선수를 해고하라고 지시했다.
어찌 됐든 송하나는 명색이 그의 아내기에 딴 남자가 함부로 터치할 자격은 없다.
바에서 나온 후, 송하나는 만취한 차설아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밤이 깊어갈 무렵.
이강우는 성수 빌리지에 돌아왔다.
탁.
그는 몹시 언짢은 표정으로 침실 등을 켰다.
하지만 침대는 텅 비었고 송하나는 그림자조차 안 보였다.
인기척 소리에 서민경이 재빨리 위층으로 올라왔다.
“도련님, 돌아오셨네요.”
“하나는요?”
“사모님은 오늘 집에 안 돌아오셨습니다.”
이강우의 잘생긴 눈썹이 순식간에 찡그려졌다.
집에 안 돌아왔다고? 설마 그 호빠 선수랑 방이라도 잡은 걸까?
“사모님은 꽤 오랫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으셨어요. 이건 대신 도련님께 전달해 드리라고 했습니다.”
서민경이 이혼 서류를 내밀었다.
이강우는 [이혼합의서]라는 글자를 보았고 마지막 페이지에는 그녀의 단정한 서명까지 돼 있었다.
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실은 전에 수없이 이혼을 제안했었다. 그녀만 허락해준다면 돈은 얼마든지 주겠다고 했으나 번번이 거절하던 송하나였다.
그런 그녀가 이제 와서 갑자기 이혼을 요구하는 이유가 대체 뭘까?
물러서는 척하며 다시 이강우를 붙잡으려는 수작일까?
그는 망설임 없이 서류에 자신의 이름을 써 내려갔다.
이혼은 이강우가 무엇보다 바라는 바였다.
다음 날 아침.
송하나는 간단한 아침 식사를 준비했다.
샌드위치, 따뜻한 우유, 그리고 팬에 구운 연어와 곁들임으로 신선한 채소에 토마토까지 예쁘게 플레이팅했다.
차설아는 빙빙 도는 머리를 부여잡고 방에서 나왔다.
“일어났어? 뭐라도 좀 먹어.”
그녀는 송하나가 차려준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풍만한 가슴, 잘록한 허리, 깐 달걀 같은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 화장기 없는 민얼굴에도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예쁜 송하나, 거기에 성격까지 좋은 말 그대로 완벽 그 자체였다.
이강우 이 망할 놈의 개자식은 복에 겨운 줄도 모르고 그녀를 전혀 소중히 여기지 않았으니 친구 입장에서 화가 날 수밖에 없었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송하나는 낯선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실례합니다만, 송하나 씨 되십니까?”
“네, 전데요. 누구시죠?”
“저는 이강우 대표님 변호사 윤태오입니다. 대표님을 대신해서 이혼에 관해 상의하려고 연락드렸어요. 이혼합의서는 이미 확인했습니다. 대표님께서는 어느 정도 경제적 보상을 해드릴 의향이 있으시고 필요하다면 성수 빌리지도 다 드릴 수 있다고 하십니다.”
실은 이강우도 다음 날이 되어서야 이혼합의서의 내용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았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떠나가 버렸다.
한편 이강우는 그렇게까지 인색한 사람이 아니다.
적어도 4년간 자신과 함께 잠자리를 같이했으니 몇백억 대의 위자료는 기꺼이 지불할 의향이 있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송하나는 변호사의 호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이혼합의서에 나온 대로 저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가능한 한 빨리 이혼 절차를 밟을 수 있을까요?”
송하나의 대답에 변호사는 약간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네, 그럼 대표님과 상의해서 시간을 다시 정하고 연락드리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차설아는 약간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하나 너 바보야? 위자료를 왜 안 받아? 더 많이 요구했어야지!”
송하나는 가볍게 고개를 내저었다.
“가능한 한 빨리 이혼할 수만 있다면 그딴 거 다 중요하지 않아.”
그녀는 애초에 돈 때문에 이강우와 결혼한 것이 아니었다.
지난 몇 년간, 이씨 가문에서 검소하게 살아왔는데 이혼하면서 그의 돈을 받는다면 오히려 자신이 돈 때문에 결혼했다는 죄책감을 더욱 굳건히 만들 뿐이다.
이원 그룹.
변호사는 송하나의 뜻을 이강우에게 전달했다.
“대표님, 송하나 씨가 아무것도 원하지 않으신다고 합니다. 오직 가능한 한 빨리 이혼 절차를 밟고 싶다고 하시네요.”
이강우는 약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수십 조 자산가인 남편을 두고 그녀는 정말 단 일 푼도 원하지 않는단 말인가?
“알았어요. 그럼 그냥 걔 뜻대로 해줘요. 난 오늘 오후 해서국으로 출장 가야 하니 다음 주 수요일로 예약해서 이혼 절차 밟죠.”
제7화
월요일 오전.
송하나는 현진 바이오테크에 막 도착하자마자 윤태오의 전화를 받았다.
“송하나 씨, 대표님께서 수요일 오전에 시간이 가능하다고 하십니다. 그날로 이혼 수속 예약했으니 제시간에 맞춰서 와주시기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송하나는 깊은숨을 몰아쉬었다.
수요일까지 이틀 남았다. 이틀 뒤엔 드디어 이 억압적인 결혼 생활을 끝낼 수 있다.
“송하나 씨 맞으시죠?”
인사팀 직원이 그녀를 보자 안으로 안내했다.
“자리 배치는 이쪽이고요. 주요 업무는 신약 개발팀의 실험 진행과 자료 정리를 보조하는 거예요. 저희 회사는 최근 항암 표적 치료제 개발에 주력하고 있어요. 관련 자료는 이쪽에 있으니 먼저 살펴보도록 하세요.”
송하나가 지원한 직책은 신약 개발 보조 연구원이었다. 인사팀 직원은 두꺼운 서류 뭉치를 그녀에게 건넸다.
신약 개발은 길고 복잡한 과정이라 단기간에 업무에 적응하려면 프로젝트 상황을 최대한 빨리 파악해야 했다.
송하나는 자신의 자리에서 끼니를 거르며 자료를 탐독했다. 중요한 부분에는 특별히 표시하고, 자신만의 생각과 견해도 덧붙였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훌쩍 넘었다.
자료가 4분의 1이나 남아서 그녀는 야근하기로 했다.
모든 일을 마쳤을 때는 이미 밤 9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밖은 이미 어두워졌고 사무실에는 그녀 혼자만 남아있었다.
송하나는 일어나 화장실에 다녀왔다.
돌아오는 길, 자신의 자리 옆에 서서 자료에 덧붙인 메모를 진지하게 읽고 있는 훤칠하고 준수한 남자의 실루엣을 발견했다.
“대표님.”
송하나가 정중하게 불렀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은 서유준은 고개를 들었다.
“이 자료들을 사흘 안에 다 읽어도 빠른 편인데 하루 만에 끝낸 건가요?”
“네... 대략적인 내용만 훑어본 정도예요. 세부적인 내용은 추가로 문헌 조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서유준은 손에 들고 있던 자료를 덮었다.
“아직 저녁 안 드셨죠? 같이 나가서 뭐 좀 먹을까요?”
“아닙니다, 대표님.”
송하나가 거절하려 했지만, 서유준이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출근 첫날부터 이렇게 늦게까지 야근하면 사람들이 날 가혹한 고용주라고 오해할 수도 있어요. 내 명예를 위해서라도 함께 나가주시죠?”
서유준이 이렇게까지 말하니 그녀도 더 이상 거절할 수 없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송하나는 가방을 들고 앞장서 걸었고 서유준이 그녀의 뒤를 따랐다.
그녀의 아리따운 뒷모습을 보며 서유준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희미한 미소가 번졌다.
오늘 그는 창업가 잡지 인터뷰를 했었다.
회사 근처를 지나다 불이 켜져 있는 사무실을 보게 되었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들어와 봤더니 야근하는 사람이 바로 송하나였다.
사실 그는 이미 저녁을 먹은 상태였다.
다만 그녀를 저녁 식사에 초대할 수만 있다면 한 번 더 먹어도 괜찮았다.
서유준은 직접 운전해서 송하나와 함께 한 이색적인 요리 전문점으로 향했다.
음식을 주문할 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이런 말이 입 밖으로 튀어 나왔다.
“고추는 빼주시고 요리에 생강 넣지 마세요.”
송하나는 미세하게 떨리는 눈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대표님이 주문한 음식은 전부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이었다. 또한 고추와 생강도 그녀가 피하는 식재료였다.
전에 전혀 만난 적이 없는데 대표님이 어떻게 자신의 식습관을 알고 있는 걸까?
서유준은 혹여나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는지 서둘러 말을 이었다.
“내가 요즘 몸에 열이 많아서 매운 거랑 생강을 못 먹거든요. 혹시 좋아하시면 좀 더 자극적인 걸로 몇 가지 더 시킬게요.”
송하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대로도 충분해요.”
어쩌면 그저 대표님과 우연히 입맛이 같았을 뿐이겠지.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어떻게 자신의 취향을 알겠는가.
식사를 마친 후.
서유준은 한사코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어찌 됐든 내 직원인데 밤늦게 혼자 집에 보내는 건 너무 위험해. 내가 얼마나 냉담하고 무심한 대표로 보이겠어.”
서유준의 도덕적 압박에 송하나는 결국 다시 그의 차에 올랐다.
젊은 모델과 데이트 중이던 최로운이 우연히 이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재빨리 사진을 찍어 자신과 이강우, 심성빈만 있는 단톡방에 올렸다.
[강우야, 네 와이프 요즘 좀 수상한데?]
[마이바흐 S클래스라니, 돈이 꽤 들었을 텐데. 혹시 너한테서 원하는 걸 못 얻어서 다른 남자로 갈아탄 거 아니야?]
이강우는 막 수천억 원 규모의 계약을 성사시킨 참이었다.
단톡방 메시지를 열어본 그는 사진 속 송하나가 낯선 남자의 외제 차에 타고 있는 걸 보더니 얼굴에 분노가 치솟았다.
어쩐지 예전에는 죽어도 이혼을 안 해주던 그녀가 이번에는 선뜻 요구하더라니.
딴 남자로 갈아탄 게 틀림없었다.
자신과의 결혼 존속 기간에 감히 이렇게 대놓고 딴 남자나 만나고 다니는 건 말 그대로 제 남편이 안중에도 없다는 뜻이었다.
이강우는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 따지고 싶었으나 한참을 뒤져도 그녀의 번호가 보이지 않았다.
결혼 생활 4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송하나의 번호를 저장한 적이 없었다. 먼저 전화를 건 적은 더더욱 없었고...
예전에는 그녀가 일주일에 적어도 두세 번은 전화를 걸어 저녁에 집에 돌아오는지 조심스럽게 묻곤 했다.
하여 용건이 있어서 그녀를 찾을 때면 통화 기록만 뒤져봐도 금방 전화번호를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날짜를 세어보니 송하나가 그에게 연락이 끊긴 지 한 달이 돼갔다.
이강우는 결국 홍경자와의 대화 기록에서 그녀의 전화번호를 찾아냈다.
그는 분노에 들끓은 상태로 다이얼 버튼을 눌렀다.
그 시각.
송하나는 서유준의 차 안에 있었다.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화면에 뜬 익숙한 번호를 본 그녀는 마음이 잠시 아득해졌다.
이강우의 전화를 놓치지 않으려고 그녀는 특별히 다른 벨 소리로 설정해 두었었다.
예전에는 밤낮으로 이 벨 소리가 울리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매번 실망으로 끝났다.
그가 무슨 일이 있어도 먼저 전화하는 법이 없으니까.
언제나 서민경이나 그의 비서를 통해 연락해왔다.
이제 와서 휴대폰에 울리는 벨 소리를 듣고 있자니 송하나는 오히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가 멍하니 넋 놓고 있자 옆에 있던 서유준이 입을 열었다.
“왜 안 받아?”
송하나는 수신 거부를 누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모르는 번호예요. 잘못 걸려온 것 같아요.”
서유준은 곧장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정말 잘못 걸려온 전화라면 그녀의 눈빛에 왜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할까.
다만 그는 더 따져 묻지 않고 눈치껏 침묵을 지켰다.
호텔 안.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뚜뚜 소리에 이강우는 속이 터질 지경이었다.
이 여자가 감히 그의 전화를 끊다니!
혹시 찔려서 못 받는 걸까?
이강우는 차량 모델명을 비서에게 문자로 보냈다.
[강현에 이 차량을 소유한 명단 전부 조사해. 사흘 안에 모든 정보를 내놓도록!]
대체 누가 죽을 용기를 내서 감히 내 와이프를 넘보는 것인지 반드시 알아내야만 했다.
아무리 송하나를 싫어한다 해도 그녀는 아직 명의상 이강우의 아내였다.
둘이 이혼하기 전까지 그녀는 언제나 이강우의 여자였다.
감히 내 여자를 건드리는 자가 있다면, 이 일이 소문이라도 퍼진다면 이강우는 대체 강현에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니겠는가.
차는 금세 아파트 단지 입구에 멈춰 섰다.
송하나는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대표님, 감사합니다.”
“그냥 가던 길이니까 이렇게까지 틀 차릴 필요는 없어.”
송하나는 아파트 단지로 걸어 들어갔다.
서유준은 차 안에서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참 후에야 시동을 걸었다.
이 아파트 단지는 강현에서 중간 정도의 수준이다.
그가 알기로 송하나의 남편은 사업가이고 집안이 손꼽히게 부유하므로 절대 이런 곳에 살 리가 없다.
유일한 가능성은 두 사람이 별거하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