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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나는 그의 형의 신부가 되었다
조이람이 아이를 잃던 날, 강제헌은 첫사랑의 귀국을 축하하고 있었다. 남편을 위한 3년간의 헌신과 함께 한 시간. 하지만 제헌이 내뱉은 말은 잔인했...
Chương (1)
第1章
조이람이 아이를 잃던 날, 강제헌은 첫사랑의 귀국을 축하하고 있었다.
남편을 위한 3년간의 헌신과 함께 한 시간.
하지만 제헌이 내뱉은 말은 잔인했다.
“그냥 집안일 하는 가사도우미였을 뿐이야.”
그날, 이람은 모든 미련을 버리고 이혼을 결심했다.
주변 사람들은 입을 모았다.
“조이람은 미련 덩어리야. 절대 못 떠나.”
“형수님? 늘 그랬던 대로 하루면 돌아오겠죠.”
“...”
“하루는 무슨, 반나절이면 충분해.”
제헌은 웃으며 확신했다.
하지만 이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잃어버렸던 삶을 되찾기 시작했다.
커리어에 복귀하고, 꿈을 좇고, 그리고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집 안에 이람의 흔적이 사라져갔다.
그제야 제헌은 깨달았다.
그녀가 진짜로 떠났다는 현실을.
그리고 어느 날.
그는 업계 행사장에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눈부시게 웃고 있는 이람을 다시 마주했다.
질투, 후회, 분노.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온 순간.
“조이람, 도대체 언제까지 이럴 건데?!”
그 순간, 한 남자가 이람 앞을 가로막는다.
냉랭한 눈빛, 단호한 목소리.
“네 형수 건드리지 마.”
서하준이었다.
처음엔 사랑이 아니었다.
그러나 뒤늦게 사랑하게 됐을 땐, 이미 조이람 곁에 강제헌의 자리는 없었다.
제1화
강제헌과 결혼한 이후, 조이람은 한 번도 이혼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람은 제헌을 미치도록 사랑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만큼.
그런데 제헌의 첫사랑이 돌아왔다.
그때, 이람은 병원에 있었다.
의사의 목소리는 무표정하고 차가웠다.
“이번 수술로 손상이 좀 커서 앞으로 임신 가능성은 크게 떨어질 겁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겁니다.”
‘뭐라고...?’
이람의 머릿속이 ‘윙’ 하고 울렸다.
이 아이를 위해 그녀는 3년을 준비해왔고, 겨우 임신 2개월 차였다.
그러나.
오늘 오후, 잠깐 나간 길.
이람은 갑자기 튀어나온 차 한 대에 놀라 넘어진 게 문제였다.
의사가 다시 말을 걸었다.
“조이람 씨, 괜찮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람은 남들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보이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눈을 꼭 감았다 다시 떴다.
그리고 왈칵 치솟는 눈물을 억지로 꾹 눌러 담은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뒤편에 서 있던 간호사들의 속닥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상황이 이렇게 나쁜데 남편은 왜 안 와?”
“아유, 말도 마. 아까 거의 쓰러지다시피 하면서 남편한테 전화하더라고. 울면서 제발 와달라고... 근데 결국 안 왔대.”
“헐... 부부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게 너무 티 나네. 저러고도 이혼 안 하고 있다니 진짜 용하다.”
“...”
이람은 이미 병원 복도를 벗어났기 때문에 간호사들의 뒷말은 들리지도 않았다.
하지만 사실, 제헌은 병원에 오는 걸 거절했을 뿐만 아니라, 전화를 받은 그 순간에도 이렇게 말했다.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애 잃은 게 그렇게 큰일이야? 왜 그렇게 오버해? 지금 바쁘니까, 더는 귀찮게 하지 마.]
그 뒤로 이람은 몇 번 더 통화를 시도했지만, 제헌은 한 번도 받지 않았다.
사실 이런 식의 냉대는 어제오늘 일이 아니었다.
지난 3년 동안, 제헌은 이람에게 언제나 이런 식이었다.
차갑고 무심하고, 남보다 못한 거리감.
솔직히, 이람은 제헌의 냉대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3년 전, 이람은 우연히 강수철 회장의 생명을 구했다.
강 회장은 이람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고, 제헌과의 결혼을 밀어붙였다.
그 덕분에 이람은 강씨 가문의 며느리가 될 수 있었지만, 애초에 제헌은 이 결혼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오늘 이렇게 간절히 연락한 것도... ‘혹시라도 아이를 위해서 마음이 조금은 움직이지 않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었다.
‘내가 또 바보같이 헛된 기대를 품었네.’
이람은 깊은숨을 들이쉬며 마음을 다잡았다. 집으로 돌아가 쉬려고 폰을 꺼내 들었을 때, 알림 하나가 떴다.
고지후에서 온 메시지였다.
지후는 제헌과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한 동생이었다.
그가 보낸 건 영상 하나였다.
이람은 아무 생각 없이 영상을 눌렀다.
영상 시작, 프레임 가득 붉은 장미가 등장했다.
적어도 천 송이는 되어 보였다. 너무 많아서 화면에 다 담기지도 않았다.
카메라가 천천히 왼쪽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제헌이 나타났다.
이 남자의 옆에는, 한 여자가 서 있었다.
바로 하유리였다.
이람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리더니, 손끝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그리고 영상 속에서는 시끌벅적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유리 누나, 제헌이 형이 오늘 유리 누나 귀국하는 거 알고 며칠 전부터 환영회 준비했대요! 진짜 정성 100점 만점에 100점!”
“유리야, 이쯤 됐으면 포옹 한 번쯤 해줘야 하는 거 아냐? 제헌이 형한테 고맙다고!”
“포옹은 무슨! 그냥 키스해! 옛날에 했던 거잖아? 그때 찍은 3분짜리 키스 영상, 나 아직도 안 지웠다!”
“...”
유리는 어이없다는 듯 고개를 살짝 저었다.
“여러분, 그만해요! 지금은... 내 입장이 좀 애매해서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제헌이 먼저 유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돌아와 줘서 고마워.”
남자의 목소리도, 동작도, 말도 안 되게 다정하고 자연스러웠다.
그 장면에 주변 사람들이 탄성을 질렀다.
“유리 누나, 그것 봐요! 제헌이 형 하나도 안 달라졌잖아요!”
“키스해! 키스해!”
“...”
그리고 바로 그 순간, 영상이 뚝 끊겼고, 그저 알림창엔 메시지 하나가 덩그러니 남아 있었다.
[형수님, 죄송해요. 잘못 보냈어요.]
영상은 곧 삭제되었고, 지후는 아무 설명 없이 사라졌다. 아마도 이람이 아직 보기 전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람은 이미 오래전부터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채팅창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그녀는 조용히 입꼬리를 올렸다.
‘이게... 그 사람이 말한 중요한 일이었구나.’
자그마치 3년이었다.
이람은 제헌의 마음을 얻기 위해 매일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그 따뜻함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돌아온 건... 제헌이 끝끝내 잊지 못했던 첫사랑.
‘그 사람 마음은, 애초에 내 자리가 아니었어.’
이람은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이 욕심 많은 꿈에서... 이제 그만 깨야지.’
...
집으로 돌아온 이람은 조용히 여행용 가방을 꺼냈다.
생활도, 일도 모두 단순했던 삶이었다.
자신을 위해 뭔가를 산 적은 별로 없어서 꼭 필요한 옷가지와 서류 몇 장이 전부였다.
26인치 캐리어 하나로 충분했다.
그래서 30분도 안 되어 그녀의 짐 정리는 끝났다.
그다음은, 기다림.
이람은 제헌이 돌아오는 시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
새벽 2시가 되어서야, 현관문이 열렸다.
제헌이 거실을 지나며 조이람과 눈이 마주쳤다.
익숙한 장면이었다.
술자리가 있는 날이면 언제나 이람은 말 없이 그를 기다렸다.
“수술했다면서. 왜 안 자고 있어?”
목소리는 차가웠고, 그 어떤 걱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당신 기다리고 있었어요.”
이람은 입을 열자마자 시선을 고정했다.
제헌의 입술.
부드럽게 굽은 그 선이, 오늘따라 유난히 낯설었다.
하지만 남자의 입꼬리는 갈라져 있었고, 셔츠 목덜미엔 붉은 립스틱 자국이 번져 있었다.
심지어 목덜미 아래로는, 더 선명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정말로 키스까지 했구나.’
‘아니, 아마 그 이상도 했겠지.’
이람의 가슴이 세게 쑤셨다.
두 사람이 결혼한 지 어언 3년.
제헌이 이람에게 손을 댄 건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나마도 대부분은 강씨 가문 어른들의 압박에 못 이겨 마지못해 같이 한 침대에서 잤다.
그는 단 한 번도 먼저 이람에게 키스를 해준 적 없었고, 항상 무표정한 얼굴로, 아무런 전희도 없이 시작됐다.
그 과정 내내 이람은 고통스럽기만 했으며, 끝나고 나면 그녀는 조용히 안아달라고 속삭였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언제나 등을 돌려 욕실로 들어가는 차가운 남자의 뒷모습뿐이었다.
그랬던 제헌이 유리에게는 ...달랐다.
결국 제헌의 시선은 이람 옆에 놓인 캐리어를 발견했다.
그리고 무표정하게 말했다.
“지후가 보낸 영상, 다 봤나 보네.”
“응. 다 봤어요.”
가까이 다가온 제헌에게서 술 냄새가 짙게 풍겼다.
게다가 그 사이사이, 불쾌할 정도로 짙은 향수 냄새가 섞여 있었다.
“우리 이혼...”
이람이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제헌이 먼저 내뱉었다.
목소리는 담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미 다 알았으니까, 이혼하자. 처음부터 당신도 알았잖아. 유리가 해외에 나가 있지 않았으면, 나도 당신이랑 결혼할 일 없었다는 거.”
이 정도 말까지 나왔는데, 이람도 더 이상 남편을 붙잡을 이유는 없었다.
“좋아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까 그냥 자고, 내일 서류 하는 게 어때?”
“괜찮아요. 이혼 서류는 이미 다 준비해서 사인해 뒀어요.”
이람은 고개를 살짝 돌리며, 차분히 거실 테이블을 가리켰다.
“거기 있어요.”
...
신혼 첫날밤, 제헌은 이혼 서류를 이람에게 건넸다.
그리고 오늘, 이람은 드디어 그 서류에 사인했다.
이번엔 제헌이 놀랄 차례였다.
제헌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람이 진심인지 의심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당신... 술 마시고 올 거 알았어요. 해장국 끓여놨어요. 주방에 있어요.”
잠시 망설이다가, 이람이 입을 열었다.
이것도 습관이었다.
제헌이 자신을 사랑해주길 바라는 마음에, 이람은 남편의 식습관과 생활을 꼼꼼히 챙겼다.
요리에 소질이라고는 없던 이람이 능숙한 요리 솜씨를 갖추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장을 보고, 재료를 손질하고, 요리를 완성하기까지 몇 시간씩 걸렸고, 이람의 손과 팔에는 칼에 베이고 불에 덴 자국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하지만 제헌은 까다로웠고, 아무리 맛있게 만들어도 ‘맛있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다.
비록 표정은 분명히 만족하는 것 같았지만.
제헌은 알고 있었다. 자신이 단 ‘맛있다’라는 한마디만 해도, 이람은 며칠이고 기뻐할 거란 걸.
그래서 그는 이람에게 작은 기쁨마저 주고 싶지 않았다.
“지금 나갈게요.”
3년의 부부 생활, 이별을 앞두고 이람은 더 할 말이 없었다.
제헌은 찌푸린 얼굴로 말했다.
“오늘 밤은... 그냥 여기 있어.”
“아니요.”
이람은 조용히 캐리어를 끌고 돌아섰다.
말을 안 듣는 이람이, 제헌의 눈에 점점 불편해졌다.
얼굴에 서늘한 기색이 감돌았다.
문이 닫혔다.
그때 지후에게서 전화가 왔다.
[형, 집엔 잘 도착했죠? 형수님한테 물어봤어요? 영상 본 것 같아요?]
[미안해요, 형. 진짜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어요. 근데 뭐, 봤다 해도 괜찮잖아요? 어차피 형이랑 형수님은 맨날 싸우고 화해하고...]
제헌이 좀 이상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너희 형수, 나랑 이혼한대.”
[네? 이혼이요?]
지후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그 영상 때문이에요? 설마요. 형수님이 형이랑 이혼할 리가 없죠. 진짜 이혼하면요, 나 진짜... 생방으로 똥 먹을게요!]
“내가 하자고 했어.”
제헌이 결국 진실을 밝혔다.
순간, 지후는 말이 없었다.
제헌이 먼저 이혼을 꺼냈다면, 아무 일도 아닌 셈이었다.
이람은 질긴 접착제처럼 절대 떨어지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난번에도 형 이혼 얘기한 지 한 달도 안 됐잖아요. 또요? 와, 진짜 형수님 또 돌아오시겠네요.]
지후는 웃으며 말했다.
[전에 우리 반나절 안에 돌아온다고 내기했잖아요. 그때 내가 이겼어요. 이번엔 하루 걸게요. 또 이기면 이번에도 형이 밥 사는 거죠?]
제헌은 굳게 닫힌 현관문을 흘끗 보았다.
그때, 바깥에서 자동차 시동 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이람은 꽤 단호했다.
하지만 제헌의 차가운 눈매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하게 중얼거렸다.
“내일 아침이면 돌아올 거야. 굳이 밤을 새워 기다릴 필요 없지.”
제2화
이혼 이야기를 먼저 꺼낸 건 제헌이었다.
언제나 그랬듯, 이람은 잠시 집을 나갔다가 금세 돌아왔다.
그러고는 더 열심히, 더 애처롭게 제헌에게 매달렸다.
그간 단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
이번에도 당연히 이람이 전처럼 제헌에게 매달릴 줄 알았다.
제헌은 이람이 오늘따라 유난히 서둘러 나간 것이 잃은 아이 때문일 거로 생각했다.
‘아이...’
제헌의 눈빛이 차갑게 일그러졌다.
이람은 애초에 아이를 가질 자격조차 없는 여자였다.
그 아이가 생긴 것도 그저 우연일 뿐.
그러니 없어진 지금이 오히려 다행이었다.
...
이람은 제헌과 이혼하면, 100억의 위자료를 받게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의 이혼 서류와 함께 놓여 있는 은행 계좌였다.
3년 전, 이람이 그때 바로 사인만 했다면 아무런 고생도 없이 그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람은 그 3년 동안 끝없는 기대와 환상에 자신을 몰아넣었다.
심지어는 몸도, 마음도,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능력까지도.
‘이쯤에서 그만두자.’
인제 와서 후회하고 따지고 분노하는 건 다 소모일 뿐이었다.
그런 소모엔 미래가 없고, 인생은 앞으로 나아가야 했다.
그리고 돈은... 없는 것보단 있는 편이 낫다.
이람은 조용히 은행카드를 챙겨서, 심야 택시에 올라탔다.
...
택시가 멈춘 곳은 ‘더 하이엘’ 아파트 단지.
이 도시에서도 손에 꼽히는 고급 아파트.
한 층에 두 세대뿐인 구조, 대형 평수.
그중 한 세대가 이람의 명의로 되어 있었다.
이 집은 이람 외삼촌의 소유였고, 이람의 어머니가 사고를 당한 후, 외삼촌은 외국으로 떠나버렸다.
그 후 자연스럽게 이 집은 이람에게 맡겨졌다.
이람은 이 집을 평생 쓸 일이 없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인생은 언제나, 계획보다 빠르게 뒤집힌다.
바로 지금, 이혼한 지금처럼.
7동, 펜트하우스 1호.
이람은 여행용 가방을 끌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섰다.
오후에 미리 청소 업체를 불러 깨끗이 정리해 뒀기 때문에, 집은 깨끗했지만 150평 가까운 공간은 지나치게 텅 비어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이렇게 큰 집에 이람이 혼자 있는 것이 적막하고 무서웠을 것이다.
하지만 제헌의 차가운 침묵을 3년이나 견디고 나니, 이제 그녀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 한켠에서 처음 느끼는 안정감이 들었다.
‘드디어... 끝났어.’
이람은 몸이 풀리자, 동시에 극심한 피로가 덮쳐왔다.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워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띵-
새벽 6시.
익숙한 알람 소리가 울렸다.
‘남편 아침밥 준비’라는 알림이었다.
이람은 그대로 눈을 떴다.
제헌은 보통 아침 8시에 식사했고, 간단한 음식은 절대 입에 대지 않았다.
그래서 이람이 아침을 준비하려면 한두 시간은 기본이었다.
만약 제헌이 전날 밤 늦게까지 술자리를 가졌다면, 그녀는 남편이 잠든 걸 확인한 후 새벽 두세 시나 되어야 눈을 붙였다.
그런데도 다음 날 아침이면 가장 먼저 일어나 주방으로 향했다.
하지만, 아내가 그렇게 정성껏 차린 아침을, 제헌은 입에 대지도 않았다.
결국 풍성한 상차림은 고스란히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다행히도 이제는, 이람도 그렇게 남편을 위해 열심히 아침을 준비할 필요가 없어졌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의 기분에 휘둘리며 새벽에 일어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자신의 수고가 아무렇지도 않게 무시당할 일도 없을 것이다.
이람은 조용히 알람을 삭제했다.
이어서 수면 안대를 쓴 채, 다시 이불을 당겼다.
잠이 안 올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금방...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아침 8시.
지끈거리는 두통과 함께 제헌이 눈을 떴다.
‘젠장...’
술을 마신 다음 날, 숙취약을 먹지 않으면 늘 머리가 아팠다.
어젯밤엔 너무 피곤해서 해장국도, 숙취해소제도 다 잊고 그냥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침대 머리맡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물 한 컵이 놓여 있었다.
제헌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조이람, 그렇게 단칼에 나가더니 결국 또 돌아온 거냐?”
물을 다 마신 후, 한결 나아진 머리로 지후에게 문자를 보냈다.
[내가 이겼다.]
곧바로 답장이 왔다.
[형수님은 진짜 한 번만이라도 튕겨볼 수 없는 거임?? 갈수록 형을 더 못 놓네 아주...]
뒤이어 또 온 메시지엔 억울함이 가득했다.
[아 진심 억울해서 잠도 안 옴. 아오아오아오.]
[형! 제발 저한테도 형수처럼 나한테 죽고 못 살 여자 좀 소개해 주세요. 인생 좀 누려보자고요 형님 복이라도 나눠줘요!]
제헌은 냉소적으로 입을 한쪽만 올리며 답장을 보냈다.
[개소리 그만하고 정신 차려.]
핸드폰을 툭 던진 제헌은 자리에서 일어나 씻으러 갔다.
1층으로 내려온 뒤, 익숙한 분주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조이람? 어디 있어?”
차갑게 물으며 거실을 둘러보던 제헌 앞에, 이순심이 식판을 들고, 주방에서 나왔다.
“대표님, 일어나셨어요? 아침 다 준비됐습니다.”
제헌의 미간이 잔뜩 구겨졌다.
“이모님이 왜 여기에 있어?”
“제가요? 사모님이 어젯밤에 오늘은 집에 없다고 하시면서 아침 일찍 와달라고 하셔서요.”
“그 물도 이모님이 가져다 놨어?”
이순심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대표님께서 일어나셨을 때 드시라고...”
제헌은 순식간에 표정이 어둡게 변하고 말이 없어졌다.
눈치챈 이순심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대표님... 일단 식사 먼저 하시는 게...”
제헌은 한참을 서 있다가 무표정하게 식탁에 앉았다.
하지만 식탁 위엔 우유 한 잔, 토스트 두 장, 계란프라이 하나, 그리고 작은 치즈 한 통이 전부였다.
이람이 해주는 아침은 언제나 다양했다.
떡이든 죽이든 한식, 양식, 중식까지 매일 다른 메뉴에 정성 가득한 플레이팅.
한 상 가득 푸짐하게 차려졌고, 그 정성은 늘 과하다 싶을 정도였다.
오늘의 아침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했다.
겨우 가라앉았던 제헌의 분노가, 순식간에 다시 치밀어 올랐다.
“이게, 나 먹으라고 차려준 아침이라고?”
차가운 목소리에 이순심의 어깨가 움찔했다.
“죄... 죄송해요 대표님. 평소엔 사모님이 다 준비하셔서... 대표님 입맛을 잘 몰라서요...”
“모르면 전화라도 해서 물어봐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게... 전화했는데, 안 받으시더라고요...”
제헌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잘한다, 조이람. 진짜 어디까지 해보자는 거야?’
그렇다고 해도, 그는 전혀 걱정되지 않았다.
이람은 언제나 돌아왔다.
가장 조용하고, 가장 은근하게.
어쩌면 점심쯤, 회사 앞으로 슬쩍 찾아올지도 모른다.
그게 이람의 방식이었다.
하지만 오늘 아침만큼은, 최악이었다.
제헌은 숟가락도 안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쾅!
현관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순심은 고개를 갸웃했다.
“뭐지, 왜 이래?”
그리고 곧장 이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러 번 시도했지만, 끝내 받지 않았다.
“이상하네...”
평소 같으면 이람이 제헌의 상황을 물어보려고 먼저 이순심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타이밍을 잘 맞춰 곧장 돌아오곤 했다.
이람이 전화를 받지 않는 건 처음이었다.
“흠... 혹시 사모님... 밀당 좀 해보려는 건가? 오히려 잘됐네. 대표님도 사모님 없으면 얼마나 불편한지 좀 느껴봐야지.”
사실 이순심은 그게 괜찮다고 생각했다.
제헌이 마음을 주지 않는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제헌은 재력도, 외모도, 능력도 완벽한 남자였기 때문에, 밖에서 그를 유혹하는 여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람이 마음을 다해 잡지 않으면, 어떻게 이런 남자 곁에 있을 수 있겠는가?
...
토요일, 이람은 출근할 필요가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알람도 끄고, 낮이 훌쩍 지나서야 눈을 떴다.
집에 먹을 게 없어서 그녀는 배달 앱으로 점심을 주문했다.
거하게 한 상 배달받아 혼자 다 먹고 나자 이람은 노트북을 켜고 IT 커뮤니티 사이트를 한참 둘러봤다.
자신이 한때 친했던 닉네임의 소유자들은 이제는 업계 리더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정작 스승님 소식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직도 연구실에서 연구만 하시나?’
이람은 스승님이 자신을 바라보던 눈빛이 문득 떠올랐다.
엄마의 따뜻함과 닮은 그 눈빛.
그런데 자신은 그 기대를 배신했다.
뜨거운 기운이 여자의 눈가에 차올랐다.
잠시 망설이다가 이람은 연락처 목록을 스크롤 해 한 번호를 눌렀다.
“민서야, 우리... 한번 보자.”
진민서는 이람의 대학 동기였다.
예전 같으면 이람의 전화를 반가워했을 친구.
하지만 오늘, 민서의 목소리는 차가웠다.
[나랑 열 번 약속 잡으면, 너는 아홉 번을 깼잖아. 친구라도 이렇게 계속 당하면 지친다고.]
그 말에 이람은 말문이 막혔다.
민서는 덧붙였다.
[진짜로 볼 생각 있는 거야? 잘 판단해.]
이람은 결혼 후 거의 전업주부처럼 지냈다. 의도적으로 친구를 멀리한 건 아니지만, 민서를 소홀히 한 것도 사실이었다.
민서는 몇 년째 스타트업을 일궈내며 업계에서 주목받는 CEO가 되어 있었다.
그 화려한 커리어가 오히려 이람을 더 움츠러들게 했다.
그래도 이번만큼은 다른 이유였다.
이람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조용히 말했다.
“나... 이혼했어.”
잠깐의 침묵.
그리고 민서의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시간, 장소 찍어. 바로 갈게.]
...
이람은 이혼 서류를 들고, 가정법원에 들러 정식으로 이혼 신청 서류를 넣었다.
이제 ‘이혼숙려기간’만 지나면 모든 게 끝난다.
모든 절차를 마치고 나니 오후 3시도 채 되기 전이었다.
이람은 약속 시각보다 일찍, 민서와 만나기로 한 카페에 도착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반쯤 마시고 있던 그때였다.
이람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리며, 커피잔을 쥔 손끝은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불과 하루도 다 지나기 전에, 이람은 제헌과 마주치고 말았다.
제3화
제헌은 정장 차림으로 카페 입구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급스러운 분위기, 모델 같은 큰 키와 단정한 이목구비는 단번에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카페 안 여기저기서 몰래 제헌을 훔쳐보는 손님들의 눈빛에는 감탄이 그대로 드러났다.
제헌 옆에는 깔끔한 인상의 또 다른 남성이 나란히 서 있었다.
삼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그 남성은 단정한 외모에, 은근한 품위가 느껴지는 사람이었다.
이람은 그 남자가 누구인지 단번에 알아보았다.
시우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교수, 한빈.
이람은 종종 IT 커뮤니티 사이트를 둘러보곤 했는데, 거기서 한빈이 AI 데이터 기반 안정성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는 글을 본 적이 있었다.
제헌과 한빈 뒤에는 제헌의 비서 허기성이 서류를 한 뭉치 안고 따르고 있었다.
KU그룹은 H시에서 손꼽히는 테크 기업이다.
제헌과 한빈이 함께 있는 건 업무상 자리일 가능성이 컸다.
‘제발 강제헌과 마주치지만 말자...’
이람은 자리를 피하고 싶었지만 지금 일어나면 오히려 더 눈에 띌 게 뻔했다. 그저 들키지 않길 기도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세상일은 늘 기대와는 반대로 흐른다.
다음 순간, 제헌의 시선이 정확히 이람을 찾았다.
둘의 시선이 마주쳤다.
제헌은 이람을 낯선 사람이라도 보는 듯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곧 무표정하게 고개를 돌렸다.
제헌은 이람의 존재에 아무런 의미도 두지 않는 듯했다.
기성도 제헌의 시선을 따라 이람을 바라봤지만, 역시 별다른 반응 없이 고개를 돌려 말했다.
“룸은 이쪽입니다. 한 교수님, 대표님, 이쪽으로요.”
이람은 조금 안도했다.
그런데 그 순간, 제헌과 한빈이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한빈이 불쑥 물었다.
“강 대표님, 창가에 앉아 계신 분... 아는 사이신가요? 실례일 수도 있지만, 방금 강 대표님이랑 허 비서님 두 분 모두 그분을 보신 것 같아서요. 우연히 눈에 띄었어요.”
제헌은 이람이 회사에 나타날 거라 예상한 적은 있었지만, 이런 장소에서 마주칠 줄은 몰랐다.
하지만 그 사실이 제헌을 놀라게 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반갑지도 않았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히 답했다.
“집안일 돕는 사람입니다.”
한빈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그가 이 질문을 한 건 제헌이 누군가를 봤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도 그 여성을 본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분명 시우대학교 연구팀에 있던, 잊을 수 없는 학생이었다.
하지만 시우대학교는 전국 최고 수준의 대학이다. 이 학교 졸업생이라면 아무리 실력이 형편없어도 가사도우미를 할 리는 없었다.
무엇보다 한빈의 기억 속 그 학생은, ‘천재’라 불러 마땅한 사람이었다.
현재 연구팀이 기술적인 난관에 부딪히고 있는 상황에서, 만약 그 천재가 팀에 합류한다면 단기간에 상황을 완전히 뒤바꿀 수 있다고 판단한 적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학생은 몇 년 전 아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한빈은 모든 졸업생 기록을 다시 살펴봤지만, 그 천재는 어디에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이력뿐이었다.
‘그런 재능이라면 논문 몇 편만 냈어도 학계가 떠들썩했을 거야.’
‘시우대 최연소 교수? 그 이상도 가능했을 텐데...’
‘컴퓨터과학연구원 명예의 전당까지도...’
한빈은 아쉬움 가득한 표정으로,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 본 거겠지.’
이내 다시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가시죠, 강 대표님.”
제헌은 더 이상 이람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곧장 룸으로 들어갔다.
...
이람의 손톱이 커피잔을 긁었다. 날카롭고 불쾌한 소리가 조용한 공간에 퍼졌다.
예전에 고지후가 집에 놀러 온 적이 있었다. 이람이 만든 음식을 먹고는 깜짝 놀라며 말했다.
“형수님 같은 요리 실력을 소유한 여성분이 제 이상형이에요. 꼭 그런 여성분이랑 결혼할 거예요.”
그때 제헌은 무심하게, 시큰둥한 얼굴로 한 마디 내뱉었다.
“여자 셰프 하나 데려다주면 되겠네.”
사랑이라는 감정은 사람을 정말 어리석게 만들기도 하니까... 그때 이람은 아무렇지 않게 상황을 넘겼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자신이 참 우습고도 한심했다.
자신에게 가장 값진 3년의 세월을 바쳤지만, 돌아온 건 고작 셰프, 가사도우미 취급이었다.
‘그래도 명색이 아내인 나에게 준다는 게 이게 전부였어? 그 사람이?’
이람의 가슴이 뻐근하게 아팠고, 뒤늦게 밀려드는 감정은 더 날카롭고 잔인했다. 끝없이 이어지는 통증은 바늘 끝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했다.
똑똑-
제헌이 룸에 들어간 직후, 기성이 이람의 자리로 다가와 테이블을 두드렸다.
생각이 끊긴 이람은 고개를 들었다.
기성은 냉랭한 표정으로, 불쾌감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사모님, 여기서 뭐 하시는 겁니까? 대표님께서 사모님한테 더 이상 대표님 동선 캐지 말라고 분명히 경고하셨던 걸로 압니다만?”
며칠 전, 강수철 회장이 위중하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이람은 제헌과 연락이 닿지 않았다.
결국 기성에게 연락했고, 비서를 통해 제헌이 술집에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날 제헌은 만취 상태였다.
이람은 그를 부축하려다, 소파에 함께 쓰러졌고, 제헌이 이람을 껴안으며 거칠게 입을 맞췄다.
그 순간, 그녀는 놀라기도 했지만... 솔직히 기뻤다.
항상 차갑기만 했던 제헌이 처음으로 먼저 다가온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단 한 마디로 산산이 부서졌다.
제헌의 입에서 나온 이름.
“유리...”
그 말을 듣는 순간, 이람이 진짜 머리끝까지 얼어붙었다.
그녀는 정신이 번쩍 들었고, 온몸으로 밀쳐냈다.
그날 이후, 제헌은 결혼 후 처음으로 큰 화를 냈다. 한 달간 집에 들어오지도 않았고, 이람에게 다시는 자기 일에 간섭하지 말라고, 또다시 그런 일이 생기면 이혼이라고 못 박았다.
“명심해! 또 이런 일이 한 번이라도 있으면, 누가 나서도... 난 이 결혼 끝낼 거야.”
그게 제헌의 마지막 말이었다.
이람은 겁이 났다. 그 이후로 어떤 상황에서도, 제헌의 스케줄을 캐묻지 않았다.
기성은 그걸 알고 있었다.
이람이 제헌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질문을 던진 순간, 기성도 느꼈다.
‘설마 사모님이... 또 그런 무모한 짓을 할 리가 없는데...’
하지만 그는 곧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이렇게까지 따라온 걸 보면, 뭔가 충격적인 일이 있었던 거겠지.’
기성은 눈매를 좁히며 낮게 말했다.
“만약 하유리 씨 귀국 때문에 사모님이 이런 무리수를 둔 거라면...”
그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차갑게 덧붙였다.
“대표님 마음속에 하유리 씨가 어떤 존재인지... 사모님께서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러니까, 이런 행동은... 너무 무의미하지 않습니까?”
하유리는 박사 학위 취득 후 귀국하자마자 한빈 교수의 연구팀 면접에 합격했고, 정식 연구원으로 합류했다.
한빈은 업계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였다.
그 연구팀에 들어가는 것 자체가 이미 실력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팀원들은 모두 업계 최정점에서 활동하는 인재들이었고, 연구 주제는 인공지능 기술의 가장 선두에 있는 실전 응용이었다.
하유리가 사는 세계는, 조이람이 아무리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는 곳이었다.
기성은 생각했다.
‘내가 사모님 입장이라면... 적어도 현실 인식은 했겠지.’
‘괜히 하유리 씨를 직접 만나면 더 비교될 텐데...’
‘자기 비참함만 드러낼 걸 왜 굳이 자초하나?’
하지만... 이람은 그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는 점은 분명했다.
기성과 이람의 사이는 원래부터 좋지 않았다.
실은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기성은 제헌의 비서였고, 제헌이 차가우면 그 역시 똑같이 차갑게 이람을 대했다.
‘주인’의 태도를 그대로 반영하는 게 기성의 방식이었고, 이람은 기성으로부터 날 선 말을 수도 없이 들었다.
그래도 예전엔, 이람은 늘 제헌에게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기성에게는 항상 예의를 갖췄고, 그가 날을 세워도 맞대응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이람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이람이 기성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뭐가 무의미하다는 건데요?”
이어지는 말은 날카로웠다.
“허 비서님 논리대로면, 제가 아침부터 강제헌을 그림자처럼 쫓아다니고, 어디 가든 몰래 따라붙는 게 훨씬 간단하고 직접적이겠네요.”
“더 효율적이고요. 그렇게 하면 적어도 허 비서님 말대로, 질투로 미쳐버린 스토커처럼 보이겠죠?”
기성은 눈을 크게 떴다.
항상 말도 조심스럽게 하던 이람이... 지금은 똑 부러지게, 딱 잘라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기성은 곧 상황을 이해했다.
‘어제... 사모님은 아이를 잃었지.’
‘그리고 그 시간에 대표님은 하유리 씨 곁에 있었어.’
이렇게 생각하자, 기성도 아이를 잃은 여자가 조금은 달라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아무리 온순한 성격이라도, 그런 충격 앞에선 버틸 수 없는 법이니까.
하지만 기성이 보기엔 그렇다고 해서 이람의 날카로움이 오래갈 것 같지 않았다.
기성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사모님이랑 말싸움하고 싶지 않습니다. 대표님은 사모님과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아요. 이제 돌아가시죠.”
기성의 입장에서는, 지금 이람의 존재는 방해물일 뿐이며, 불필요하게 감정을 소비할 이유도 없었다.
이람은 한 박자 멈추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저, 강제헌이랑 이혼했어요. 앞으로 내가 뭘 하든, 당신들이 간섭할 이유 없어요. 다신 저한테 명령하지 마요.”
그 말이 끝나자마자, 이람은 단호하게 돌아섰다.
똑- 똑- 똑-
굽 높은 힐 소리가 카페 바닥을 울렸다.
기성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웃음이 새어 나오는 걸 참았다.
‘진짜 어이가 없네. 대표님이 이혼 얘기를 그렇게 여러 번 꺼냈을 때...’
‘진짜 이혼한 적 한 번이라도 있었나?’
‘나한테 화낸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그리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약간의 연기라도 해보시지.’
‘결혼반지는 여전히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그대로인데...’
‘거짓말을 하려면, 티 안 나게 하던가.’
기성은 조용히 시선을 거두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아.’
...
이람은 자리를 떠나자마자 민서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우리 다른 데서 만나자.]
원래는 민서를 만난 후에 들를 생각이었던 주얼리 샵.
하지만 지금은 더 기다릴 수 없었다.
...
주얼리 샵.
직원이 조심스럽게 핀셋을 들어 이람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살폈다.
“잠깐 움직이지 마세요.”
차가운 금속 소리가 들리고, 반지가 ‘딱’하고 끊어졌다.
결혼반지는 두 조각이 되었다.
이람은 무표정하게 그 조각들을 바라봤다.
이 반지는, 몇 해 전 결혼식 날 손에 끼워졌고, 그날 이후로 그녀는 한 번도 뺀 적이 없었다.
그리고 아이를 갖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어머니는 온갖 민간요법과 의심스러운 약들을 들이밀었기 때문에 이람의 몸이 점점 붓고, 살이 쪘다.
그래서 어느새 반지는 손가락에 낀 채로 박혀버렸다.
‘언젠가 빼게 될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잘라낼 줄은 몰랐네.’
직원은 말없이 반지를 저울에 올렸다.
“순도는 좋아요. 근데 잘랐으니까, 재활용 처리로 들어갑니다.”
작은 다이아몬드들이 박힌 심플한 디자인이었다.
화려함보다는 실용성을 중시했던 이람의 취향 그대로.
하지만 그 작은 조각 다이아몬드는 중고 시장에선 거의 가치가 없었다.
“회수 금액은... 48만 원 나옵니다.”
직원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순간, 민서가 코웃음을 치며 웃었다.
“야, 겨우 그 돈에 이걸 파는 거야? 진짜 이혼할 마음 먹은 거 맞긴 하구나.”
그러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니, 네가 지난 3년 동안 얼마나 강제헌한테 매달렸는데. 그런 네가 먼저 반지 자르고, 이혼 선언하고, 진짜... 이번엔 연기 좀 제대로네.”
이람은 아무 말 없이 미세하게 웃었다.
‘웃기지 마. 이건 연기가 아니야. 이제 진짜 끝내는 거야.’
긴 시간 억눌렸던 자신의 감정이, 잘린 반지처럼 조용히 정리되고 있었다.
제4화
이람은 아무 말 없이 무표정하게 자신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바라보았다.
오랫동안 끼웠던 반지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흉하다. 진작 뺐어야 했는데.”
민서는 그 말을 듣고, 이람이 이번엔 진심이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물론 백 퍼센트 확신할 순 없었지만, 지금 이람의 태도는 예전과는 분명 달랐다.
굳이 더 비꼴 필요는 없었지만... 또 입이 근질거렸다.
“네 사랑, 내 한 끼 밥값만도 못 하네.”
이람은 변명하지 않았다.
“그럼 가자. 오늘 내가 살게.”
민서는 움직이지 않았다. 팔짱을 낀 채, 한쪽 눈썹을 올리고 이람을 바라봤다.
“내 시간 비싸. 밥 먹기 전에 먼저 말해. 넌 왜 날 부른 건데? 어디 한번 들어나보자, 내가 너랑 밥 먹을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 좀 하게.”
이람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리고 잠시 후,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 중단했던 논문, 다시 쓰려고. 실험 데이터 돌릴 수 있게, 네 실험실 좀 쓰자.”
요즘 업계 변화는 하루가 다르게 빠르다.
이람은 그 흐름에 맞춰 논문의 방향도 바꿔야 했다.
그래서 전화로는 차마 말을 꺼내지 못했다.
‘그때 그냥 졸업하고 논문 냈으면...’
민서라면 분명 이렇게 말할 테니까.
예상대로 민서는 비웃듯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갑자기 생각난 거야?”
“진심이야.”
민서는 이람을 조용히 관찰했다.
산업 최전선에 있는 사람답게, 흐름에 민감한 그녀는 최근 시우대학교 한빈 교수의 프로젝트가 국내외 굵직한 테크 기업들로부터 주목받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몰랐다. 한빈 교수팀이 요즘 붙잡고 있는 기술적 난관을... 이람은 이미 3년 전에 풀어냈다는 사실을.
완성된 Lugi-X.
그 핵심 소스는 지금 민서 회사의 서버에 있다.
이람은 Lugi-X 언어 기반 대형 모델의 유일한 개발자였다.
그가 해결해낸 기술적 허들은, 연구팀 하나가 몇 년간 붙잡고도 못 풀 정도의 난이도. 이람은 민서가 본 인물 중 단연 최고의 천재였다.
하지만 그 천재가 사랑에 빠지더니, 결혼하겠다고 선언하고 사라져버렸고, 지금은 비서 일을 하며 커피나 나르고 있다.
‘이해가 안 돼. 이런 재능을 갖고도... 왜 스스로를 버리냐고.’
민서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3년을 손 놓았잖아. 그 논문, 지금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수정할 거야. 교수님 나오시는 대로 찾아가서, 연구 방향 다시 정하고, 통과되면 이어서 계속 진행할 생각이야. 교수님이 날 만나주신다면.”
“그럼 너 꽤 오래 기다려야 할 걸. 그분 요즘 나라 위해서 몸 바쳐 연구 중이시라, 웬만해선 안 나오셔.”
“기다릴 수 있어. 더 이상, 강제헌이 날 사랑해주길 바라지 않아. 시간은 지금 내 편이야.”
민서는 뭐라 말하려다 그만뒀다.
사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몇 년을 쉬었어도, 이람이 하려는 연구에 자신이 해줄 수 있는 조언은 거의 없었다.
‘이람은... 그냥 넘사벽이지.’
민서는 입꼬리를 올렸다.
“좋아. 그 밥, 같이 먹어줄게.”
말은 시니컬했지만, 마음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원래 안 따라갈 사람이 따라나선다는 건, 민서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이람은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영광이네, 진 대표님.”
...
고지후는 한 시간 전에 연애를 시작한 SNS 스타 여자친구와 강남 거리를 걷고 있었다.
데이트 기분에 취해 있던 그 순간, 뜻밖의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어... 저 사람?’
지후는 고개를 돌려 뒤따르려 했지만, 벌써 사라진 뒤였다.
‘그 사람’이 들어간 건 한 주얼리 샵이었다.
지후는 여자친구에게 자연스럽게 말했다.
“여기 들어가자. 너 반지 좋아하잖아.”
여자친구가 진열대를 구경하는 사이,
지후는 직원에게 슬쩍 물었다.
“혹시... 방금 나간 여자분, 무슨 반지 팔았는지 기억 나세요?”
직원이 별 의심 없이 답해줬고, 이야기를 들은 지후는 입꼬리가 씰룩거렸다.
‘제헌 형, 나한텐 거짓말까지 하네?’
‘형수님이 아침부터 순하게 돌아갔다면, 결혼반지를 잘라 팔겠냐고.’
지후는 한동안 생각에 잠겼다가, 곧바로 단톡방에 메시지를 뿌렸다.
[오늘 밤 무조건 모여. 제헌 형도 포함임. 내가 한잔 살게.]
...
밤이 되자, 단골 바에 하나 둘 친구들이 모였고, 술이 돌자 분위기는 빠르게 달아올랐다.
제헌이 나타난 건, 이미 술자리가 무르익을 즈음이었다.
지후는 제헌을 보자마자 일부러 목소리를 높였다.
“야야, 다들 들었어? 이람 형수님이 갑자기 결혼반지를 팔았다네? 이게 무슨 시추에이션이냐?”
사실 이런 모임에서는 늘 한두 마디씩 이람을 소재로 장난이 오갔다.
처음엔 다들 제헌 눈치를 봤지만, 곧 알게 됐다.
제헌은 그런 얘기에 딱히 신경 쓰지 않았다.
그가 눈썹 하나만 찌푸려도 다들 눈치를 보고 입을 다물었겠지만,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아무도 웃기 전에, 제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보여주려고 쇼하는 거지.”
톤은 여전했지만, 의미는 달랐다.
카페에서 이람이 했던 말.
기성이 그 말 전부를 전했고, 제헌은 듣자마자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가짜지.’
기성과 마찬가지로, 이람이 갑자기 저런 행동을 한 건... 자극을 받아서라고 생각했다.
결혼반지까지 자른 건... 그녀 나름대로의 ‘퍼포먼스’라는 것.
“보여주기용 쇼라... 이람 형수님이라면 그럴 만도 하죠.”
“근데 그런 수작, 제헌 형한테 안 통하잖아요. 결혼하고 반지 한 번도 안 낀 형 아니었어요?”
지후가 헛웃음을 치며 맞장구쳤다.
“특정 상황에서는 꼈겠죠. 강 회장님 앞에서는 꼈잖아요... 안 그랬어요?”
제헌이 무심하게 흘긴 눈빛에, 지후는 즉시 자세를 고쳐 앉으며 헛기침했다.
“어... 어쨌든! 단 한 번도 안 꼈다는 걸로 정정합니다!”
그제야 제헌의 얼굴에서 묘한 불쾌함이 사라졌다.
지후는 민망한 듯 입꼬리를 씰룩이며, 조심스레 또 물었다.
“아, 근데 나중에 보니까 형수님이 다른 주얼리 샵도 들르던데요? 혹시 새 커플링 맞춰서 형한테 줄지도 모르잖아요. 그럼 형은... 낄 거예요?”
제헌은 아무런 반응 없이 잔을 들었다.
그는 말이 없었지만, 긴 손가락이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왼손 약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눈동자에 살짝, 아주 미세하게 부드러운 감정이 번졌다.
차가운 인상과 다르게 그는 ‘제헌’이라는 이름처럼 절제된 사람이다.
항상 단정하고 이성적인 태도.
그런 그에게서 보이는 이따금의 ‘온기’는 매우 보기 드문 아이템이었다.
지후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그 시선 끝엔, 제헌의 핸드폰 화면.
잠깐 열린 카카오톡 창.
그 안에는 ‘하유리’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하지만 제헌은 바로 핸드폰을 잠그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표정엔 노골적인 불쾌감이 떠올라 있었다.
“날 부른 이유가 이딴 쓸데없는 얘기 때문이야?”
지후는 그제야 확실히 깨달았다.
이람이 한 달이고 집에 안 들어와도 제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는 걸.
무슨 짓을 하든, 제헌이 신경 쓰지 않는다면... 아무 의미도 없다.
관심 없다는 건, 그 어떤 ‘쇼’도 통하지 않는다는 뜻이니까.
지후는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형, 내가 이긴 건 아닌데 말이죠. 그래도 형이 먼저 진 거니까, 밥은 형이 사는 걸로?”
그 말은 몇 주 전 내기였다.
이람이 언제 집에 돌아올지를 두고 했던 게임.
제헌은 아무렇지 않게 받았다.
“시간 정해.”
“유리 누나 생일 얼마 안 남았잖아요. 그날 보자. 다 같이 시끌벅적하게.”
제헌은 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네가 말 안 해도, 다 초대할 생각이었어.”
지후는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와, 형 진짜 준비 다 했네요? 이래서 사람 마음이란 건 참... 다 티 나는 거잖아요.”
‘누굴 신경 쓰는지, 안 쓰는지... 형은 정말 한 치도 숨기는 것이 없구나.’
지후는 기억을 더듬었다.
이람의 생일이 딱 한 달 전쯤이었다.
그날, 자신과 제헌은 단 둘이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제헌은 술이 꽤 올랐고, 이람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 전화는 지후가 대신 받았다.
“여보세요?”
[바쁘세요? 내 생일... 지나버렸네요.]
목소리는 조용했고, 감정은 눌러져 있었다.
그때가 새벽 1시.
지후는 당황하며 말했다.
“어, 형수님... 저 지후예요. 죄송해요, 형이 좀 많이 마셔서요. 그, 생신 축하드려요.”
전화 너머, 짧은 정적.
그리고 담담한 목소리.
[아, 네. 감사합니다. 지후 씨, 제헌 씨 좀 챙겨주세요. 술 취했으면, 차 키는 절대 주지 말고요.]
단 한 마디의 원망도 없었다.
남편이 생일을 잊어버렸는데도.
지후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한동안 멍하니 있었던 기억이 났다.
‘이람 형수... 진짜 연애 고수네.’
‘아니면 그냥...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한없이 바보처럼 구는 사람.’
...
새벽.
제헌은 지후와의 술자리를 마치고 집에 돌아왔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그는 자동처럼 와인색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거실을 지나쳤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소파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늘 익숙한 그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제헌은 아무렇지 않게 발걸음을 옮겼고, 계단을 올라 2층 복도 끝에 시선이 닿았다.
불이 꺼진 채 어둠 속에 잠긴 방.
손님방...
즉, 이람의 방.
안방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2층 구석에 위치한 그 작은 방.
벌써 하루가 지났다.
이람은 여전히 돌아오지 않았다.
제헌은 별다른 표정 없이 몸을 돌려 조용히 안방 문을 열고 들어갔다.
...
월요일 아침.
출근일.
제헌은 단정하게 차려입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이순심은 분주하게 주방과 식탁을 오가며 정성스레 한 상 가득 아침 식사를 차려놓았다.
제헌은 음식들을 스쳐보듯 바라봤다. 맛이 없어 보이는 건 아니지만, 이상하게 입맛이 돌지 않았다.
그래도 의자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그 모습을 본 이순심은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람이 집을 비운 이틀 동안, 이순심의 하루하루는 눈치로 시작해 눈치로 끝났다.
제헌은 기본적으로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고용인이나 직원에게 목소리를 높이는 법도 없고, 막무가내로 화를 내지도 않는다.
하지만 제헌이 풍기는 분위기는 단순한 ‘태도’ 이상이었다.
제헌이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이순심 같은 소시민은 기가 눌릴 수밖에 없었다.
“대표님, 천천히 드시고 가세요.”
음식은 충분히 먹을 만했지만, 이람이 해주던 아침식사에 비하면 어딘가 심심했다.
이람 없이 불과 이틀 지났을 뿐인데, 제헌은 문득 이람이 차려준 아침 식사가 떠올랐다.
‘손맛이라는 게 진짜 있긴 있나?’
젓가락질을 멈추던 제헌이 조용히 물었다.
“그 사람, 전화 왔었나?”
식탁을 정리하려던 이순심은 깜짝 놀라 손에 들고 있던 접시를 덜컥 내려놨다.
“네... 네에?”
제헌의 이마가 살짝 찌푸려졌다.
“사모님 말씀인가요?”
이순심은 바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 아니요! 아니에요! 안 하셨어요!”
제헌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한 번도?”
제5화
“맞... 맞아요. 사모님한테서 연락은 안 왔고, 제가 전화 드려도... 계속 안 받으세요. 그게... 아마... 저를 차단하신 것 같기도...”
탁!
제헌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일어났다.
그리고 표정은 싸늘하게 굳어 있었다.
이순심은 순간 머릿속이 하얘졌다.
‘내가 착각했네. 사모님과 좀 떨어져 지내면 대표님도 잠잠해질 줄 알았는데...’
제헌은 평소에 화를 내는 사람은 아니었다. 웬만해선 목소리조차 높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렇게 불쾌해하는 태도만으로도 주위를 얼어붙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이순심은 그제야 깨달았다.
‘사모님... 대표님한테 이렇게 튕길 게 아니었어...’
‘대표님은 강하게 나오는 사람한테 절대 약하지 않거든.’
‘그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이순심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모님, 정말 눈치도 없다니까.’
...
제헌은 사무실에 도착해 평소처럼 정례회의를 마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성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왔다.
“대표님, 택배입니다.”
그가 내민 작은 선물 봉투.
제헌은 말없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상자를 열자, 안에는 심플한 디자인의 실반지 하나.
‘지후 말이 맞았네. 결혼반지를 팔아놓고... 또 다른 주얼리 샵을 들렀다더니.’
‘이틀 동안 연락 한 통 없더니, 결국 이런 식으로 나타나는 거야?’
‘이따가 도시락 들고 회사까지 찾아오겠지.’
‘기성이 말로는 매번 점심 무렵에 맞춰 오는 패턴이니까.’
제헌의 이마가 좁아지며 주름이 생겼다.
그는 반지 케이스를 닫고, 무심하게 책상 한쪽으로 밀어놨다.
몇 초 뒤, 내선 전화 수화기를 들었다.
“오늘 와이프 들어오게 하지 마. 출입 절대 금지시켜.”
목소리는 차갑고 명확했다.
기성이 당황해 아무 말 못 하고 끊자, 제헌은 반지 케이스를 그대로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이런 식의 계산된 접근, 딱 질색인데...’
월요일 아침.
이람은 SY그룹의 사무실, 자신의 자리 앞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결혼 초반 몇 달간, 이람은 직장을 다니지 않았다.
하지만 어느 날, 강 회장은 집안 사람들이 모두 모이는 식사 자리에 참석하지 않았고, 그 자리를 채운 채영희 여사는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이람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집에서 빈둥거리면서 남편 뒷바라지도 못하고, 애는커녕 몸조리 하나 제대로 못 하면서 입은 잘 나불대. 창피해서 내 친구들 앞에서 며느리 얘긴 꺼내지도 못해요.”
그 자리에 제헌도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는 단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일부러 외면했다.
그날 밤, 이람은 바로 노트북을 열고 이력서를 썼다.
지원한 곳은 KU그룹이 아닌, 완전히 다른 계열사인 SY그룹이었다.
‘같은 건물 안에서 숨 쉬는 것도 싫었거든.’
...
SY그룹은 설립된 지 고작 5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시가총액은 이미 수천조 원을 넘어선 국내 대표 테크기업 중 하나였다.
이 정도 규모의 기업이라면, 비서직 하나도 전국 상위권 명문대 출신이 기본 조건이었다.
이람은 시우대학교 컴퓨터공학과 출신.
학벌도 전공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당연히 개발팀이나 R&D 부서로도 갈 수 있었다.
하지만 기술 직군은 대부분 ‘9 to 9, 주 6일’이라는 살인적인 일정이 기본.
대형 프로젝트에 투입되면 밤샘도 수시로 반복된다.
그렇게 일하면, 제헌을 챙길 시간이 없을 것 같아서 그녀는 비교적 여유가 있는 총무실 산하, 대표이사 비서실을 선택했다.
즉, 행정 업무 중심의 포지션이었다.
이람이 SY그룹에 들어간 걸 안 강수철 회장은 이람에게 KU그룹으로 오라고 권했다.
“내 회사니까 출퇴근도 융통성 있게 해줄 수 있고, 네가 너무 힘들지 않게 조정해줄게.”
하지만 이람은 단번에 거절했다.
‘시어머니가 날 얼마나 싫어하는데...’
‘KU 들어가면 그분이 날 더 가차 없이 몰아붙일 거야.’
채영희 여사는 틈만 나면 이람이 강씨 가문의 재산을 탐내는 것처럼 몰아갔다.
이람은 KU그룹에 가면 그런 소리를 공식적으로 듣게 될 것이 뻔해서 차라리 모르는 사람들이 많은 지금 회사가 더 편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SY는 국내에서 가장 앞선 기술과 데이터를 쥔 회사다.
다시 논문을 쓰기로 마음먹은 이상, 여기만큼 좋은 환경은 없었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이람은 임신 소식 때문에 사직서를 써놓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메일을 보낼 생각이 없다. 행정 업무는 충분히 여유가 있었고, 그 시간에 자신은 업계 자료도 충분히 살펴볼 수 있다.
게다가 자료 접근 권한도 넉넉했고, 사람들과 부딪힐 일도 거의 없었다.
“이람 씨, 오늘은 도시락 안 가져왔어요?”
옆자리 직원이 툭 던지듯 물었다.
이람은 살짝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가끔 아주 정성스럽게 도시락을 싸왔다.
하지만 점심 시간이 되면, 늘 그 도시락을 들고 회사 밖으로 나갔다.
도시락... 사실 남편 주려고 싸온 거였다.
제헌은 술자리가 잦았고, 이람은 그 다음 날 아침이면 속을 편하게 해줄 음식 위주로 직접 도시락을 쌌다.
그가 아침에 회사로 가져가면 편할 일이었지만, 제헌은 ‘들고 다니는 게 귀찮다’며 거절했다.
그래서 이람이 직접 들고 와 점심시간에 맞춰 택시를 타고 KU 본사 근처까지 배달하듯 건넸다.
거리도 그리 멀지 않았고, 시간도 맞출 수 있어서 그 정도 수고는 감당할 수 있었다.
“오늘은 그냥... 도시락 안 싸고 싶었어요.”
‘아니, 이제 싸줄 필요도 없지.’
그 순간, 비서실 실장 남진이 급하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일에 집중하던 이람과 다른 직원들이 모두 동시에 고개를 들었다.
“다들 주목해주세요. 우리 대표님 귀국이 다음 주 월요일입니다.”
순간 사무실이 술렁였다.
“각 부서 자료들 정리 다시 들어갑니다. 대표님이 열람하시는 문서에 누락이나 오류 하나도 없게 부탁드립니다.”
탁- 탁-
남진은 책상 가장자리를 두드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시간 없습니다. 전원 집중하세요.”
SY그룹은 창업 이래 지금까지, 실무의 거의 대부분은 모두 부대표 부연훈이 도맡아 처리해왔다.
회사의 실질적인 권한과 자금, 비전은 오로지 ‘대표’에게 집중되어 있었지만, 정작 단 한 번도 공식 석상에 등장한 적이 없다.
얼굴도, 나이도, 성격도 전부 미상.
신화처럼 떠도는 존재였다.
다음 주면... 드디어 나타날 것이다.
그날 이후, 사무실은 온종일 분주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
KU그룹.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한 여성이 제헌의 사무실에 들어섰다.
대표이사를 만나려면 최소 며칠 전부터 비서실을 통해 사전에 약속을 잡는 게 관례인데, 오늘 그 여성의 이름은 어떤 명단에도 없었다.
더 놀라운 건, 기성이 직접 1층까지 내려가 그녀를 안내해서 올라왔고, 문까지 닫아주고 나왔다는 점이었다.
이례적인 대응에 비서실 직원들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 여자 누구야? 완전 연예인 얼굴 아니야? 풍기는 아우라가 장난 아니던데.”
“강 대표님이 예고 없이 즉석에서 약속 잡는 거 거의 못 봤어. 그것도 단독 응대? 이건 진짜 흔한 일이 아닌데.”
“강 대표님이 원래 여자랑 단둘이 있는 것도 안 좋아하잖아. 입사하고 몇 년 됐는데, 여직원을 사무실오 부른 건 처음 봐.”
그 순간, 누군가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설마... 진짜 그분? 미래 사모님이신가?”
그 말에 몇몇 직원이 숨을 삼켰다.
모두 알고 있었다. 강제헌 대표가 결혼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알려진 바 없었다.
공식적인 발표가 없었기 때문에 대외적으론 ‘미혼’으로 보는 게 중론이었다.
하지만 제헌을 오랫동안 봐온 사람들은 알고 있었다.
그는 항상 절제되어 있었고, 스캔들에 연루된 적도 없었다.
그런 사람이 어떤 여자에게 특별한 대우를 한다면, 그건 ‘가능성’ 그 이상이라는 뜻이었다.
...
사무실 안.
제헌은 그 여성이 들어오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펜을 내려놨다.
바로 하유리였다.
유리는 여유로운 발걸음으로 책상 앞으로 다가와 양손을 책상 위에 짚고 몸을 살짝 기울였다.
그리고 남자의 손가락을 스치듯 바라보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반지, 못 받았어?”
제헌은 잠시 멈칫했다.
“네가 보낸 거야?”
그건 이람이 보낸 줄 알았다.
유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했다.
“어제 저녁에 우리 같이 식사하기로 했잖아. 근데 한빈 교수님 쪽에서 급하게 연락이 와서... 결국 그 자리에 못 갔지. 미안해서 선물로 반지 보냈어.”
그녀는 자신의 왼손을 들어 보여줬다.
무광의 심플한 반지가 빛을 반사했다.
“이 브랜드, 남자 반지는 별로 예쁜 게 없더라고. 그나마 내가 낀 이거 커플링으로 나온 게 제일 괜찮아서 그걸로 했어. 나 그냥 장난으로 끼고 다닌 거니까, 부담 안 가져도 돼.”
그 말과 달리, 여자의 눈빛에는 기대가 숨어 있었다.
제헌은 그제야 무언가 떠오른 듯 자리에서 일어나 휴지통 옆을 뒤적였다.
조금 전 쓰레기로 던져버렸던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손에 쥔 케이스를 열어보며 표정이 전과는 확실히 달라져 있었다.
유리는 순간 얼굴이 굳었다.
“버렸던 거야?”
제헌은 그녀를 조용히 바라봤다.
그 눈빛 속에 유리의 마음이 전부 읽혔다.
그는 반지를 꺼내 자연스럽게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웠다.
“네가 보낸 건 줄 몰랐어.”
말투는 변함없었지만, 그 말 한마디에 유리의 얼굴이 조금 환해졌다.
지후가 말했었다.
제헌은 절대 반지를 끼지 않는 사람이라고.
특히 결혼반지는 더더욱.
그 이유는 간단했다.
‘반지 따위 낀다고 해도 아무 의미 없으니까.’
제헌이 조용히 물었다.
“화났어?”
유리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니. 네가 싫어하는 건, 반지가 아니라 그 반지를 줬다고 생각한 그 사람이겠지.”
그녀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물었다.
“예뻐?”
“괜찮네.”
제헌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제는 뭘 그렇게 바빴는데?”
유리는 숨을 고르며 말했다.
“한빈 교수님 프로젝트가 한 기술에서 막혀서... 어젯밤엔 집에서 자료만 뒤적였어. 근데 잘 안 풀리더라. 다행히 내 친구가 다니고 있는 그 회사가 그 분야 기술을 다루거든. 시간 나면 연락해보려고.”
유리의 그 ‘친구’가 다니고 있는 회사의 대표이사는 바로 진민서였다.
유리와 민서는 시우대 동문.
유리가 선배, 민서는 후배였다.
둘이 같은 명문대를 나왔고, 업계에서도 이미 잘 알려진 사이였다.
그래서 유리는 민서 정도는 언제든 연락해서 쉽게 만날 수 있다고 예상했다.
제6화
“넌 정말 뛰어난 실력의 소유자야.”
제헌의 말에 유리는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남자의 눈은 분명히 유리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었다.
진심 어린 감탄, 그런 눈빛이었다.
‘이 반응쯤은 당연하지.’
유리는 속으로 말했다.
KU그룹은 최근 한빈 교수의 연구팀과 협업 중이다.
그 프로젝트가 성공하면, KU그룹에도 막대한 기술적 이익이 돌아갈 것이다.
유리는 이번 귀국을 단순한 제헌과의 재회가 아니라, 그 기술적 돌파구를 해결할 ‘핵심 인물’이 되기 위해서 준비했다.
그리고 그럴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이제는 바보처럼 굴어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는 시대이기 때문에, 밥 좀 잘하고, 애교 몇 마디 던져서 남자 마음을 얻는 시대는 끝났다.
능력 있는 여자가, 더 많은 기회를 갖는 세상.
그런 세상에서 유리는, ‘능력으로 인정받는 여자’가 되고 싶었다.
...
이람은 오전 내내 바쁜 일정으로 눈코 뜰 새 없었다.
점심 전, 잠시 커피 생각이 나 탕비실에 들렀다.
동료에게 줄 커피까지 챙기며 바삐 움직이던 그때.
핸드폰이 울렸다.
발신인은 장수란.
KU그룹 대표이사 비서실 비서.
이람과 수란의 유일한 연결고리는, 예전에 이람이 제헌의 동선을 알아보기 위해 전화를 걸었던 것이 전부였다.
요즘 이람은 제헌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그 누구와도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수란은 그때도 다정하고 예의 바른 사람이었다.
‘잠깐... 일단 받아보자.’
망설이다가 통화를 받았다.
[사모님... 요즘 괜찮으세요?]
조심스러운 목소리.
작고, 떨리는 숨결이 느껴졌다.
“네. 잘 지내고 있어요.”
이람은 수란이 왜 이렇게 갑작스러운 질문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냥 안부를 묻는 것일 수도 있었지만, 수란의 다음 말은 예상 밖이었다.
[강 대표님이... 방금 여자분 한 분이랑 회사에 오셨어요. 정말... 분위기 장난 아니었고요. 임원들도 전부, 그분을 미래 사모님으로 보는 분위기예요...]
[사모님은 혹시 알고 계셨을까 해서요. 그래서 조심스럽게라도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 여자분, 이름이 하...]
툭-
말이 끊겼다.
그 다음 들려온 건, 놀란 듯한 수란의 숨소리.
[허... 허 비서님... 저, 저 그게 아니고요...]
수란은 사무실 복도 한쪽 모서리에 몸을 숨긴 채 통화를 하고 있었지만, 기성이 그 바로 뒤에서 걸어 나오는 걸 예상하지 못했다.
...
KU그룹.
기성은 수란의 핸드폰을 툭 하고 낚아챘다.
화면을 힐끗 내려다본 그는, 순식간에 얼굴을 굳히며 미간을 좁혔다.
“사모님 또 대표님 동선 캐내려고 연락하신 겁니까?”
수란은 말을 더 잇지 못했다.
기성 뒤로 보이는 두 사람, 강제헌 대표와 그 옆의 여자, 하유리.
그 장면을 보는 수란의 몸이 얼어붙었다.
순식간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저 핸드폰만 멍하니 바라볼 뿐.
기성은 수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공적인 보고 톤으로, 대표에게 곧장 말했다.
“대표님, 사모님입니다. 또 대표님 일정 파악하려고 연락하신 듯합니다.”
통화는 끊기지 않았다.
기성은 전혀 당황하지도, 숨기려 하지도 않았다.
‘들으라면 들으라는 거지. 굳이 숨길 이유가 없으니까.’
...
SY그룹.
스마트폰을 쥔 이람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눈썹 사이가 천천히 좁아졌다.
‘또 이런 식으로 몰아가네.’
기성이 무슨 말을 하든, 이람은 반박할 생각이 없었다.
이제 와서 해명해봤자, 믿지 않을 사람이니까.
전화를 끊으려던 순간.
전화기 너머로 들려온 건, 제헌의 단호하고 차가운 목소리였다.
[신경 쓰지 마.]
익숙한 말투.
익숙한 무심함.
‘늘 그렇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이 사람은 단 한 번도 확인하려 하지 않았어.’
이람은 그 말에 놀라지도 않았다.
단지... 제헌이 사실을 확인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자기 멋대로 단정지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가슴 어딘가를 저리게 만들었다.
과거의 이람이라면, 이 상황에 당장 전화를 걸어 해명했을 것이다.
오해가 무서웠고, 무엇보다... 제헌의 분노가 두려웠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혼했잖아.’
이람이는 이미 모든 걸 내려놓았고, 제헌의 감정선에 맞춰 살아갈 이유도 없었다.
게다가 유리 얘기를 캐려고 연락한 것도 아니고,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
더 냉정했고, 더 예리하게 가슴을 찔렀다.
[내일부터 출근하지 마.]
이람은 순간 멍해졌다.
‘뭐라고? 강제헌이... 수란 씨를 정말 해고하려는 거야?’
기억이 떠올랐다.
예전에 이람이 처음 수란에게 연락했을 때도, 제헌은 그녀를 비서실에서 내쫓으려고 했다.
‘그땐 겨우 막았는데...’
이번엔... 막을 사람도, 이해해줄 사람도 없었다.
예전에 수란이 KU그룹에 남을 수 있었던 건, 이람의 간절한 부탁 때문이었다.
제헌은 그때 분명하게 말했다.
“다시는 이런 일 없게 해.”
그리고 그는, 말 그대로 ‘다시 봐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이람의 사람 하나쯤 남겨둘 자리는 없었다.
[비서 하나 때문에 이렇게까지 화낼 일은 아니잖아.]
그 목소리의 주인은 유리였다.
이름처럼 말투도 부드럽고 온화하다.
이람은 핸드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저런 목소리, 남자들이 좋아할 수밖에 없겠네...’
유리는 살짝 웃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
[이따 밥 내가 살게.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 내 부탁이야, 응?]
잠시의 침묵 후.
[그래.]
제헌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다.
아까의 차디찬 말투와는 확실히 달랐다.
말의 온도부터 완전히 달랐다.
유리는 작게 웃었다.
[그럼, 가자.]
그 뒤로는 더 이상 두 사람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
전화기 너머의 고요.
이람은 말없이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웃기다. 내가 저 사람 비위 맞출 땐 며칠씩 마음 졸여야 겨우 한 번 웃어줬는데...’
이람은 그 시간들을 떠올렸다.
제헌이 마음 풀지 않으면 밥도 잘 넘기지 못하고, 밤마다 뒤척이다 결국 뜬눈으로 아침을 맞이했던 날들.
일에 집중도 못 하고, 온통 제헌의 기분에 좌우됐던 나날들.
‘근데... 사랑하는 여자 말 한 마디면 끝이네. 그렇게 쉬운 사람이었어.’
...
기성은 통화가 끊긴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람이 전부 들었단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기성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이람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다.
이번 일로 수란이 해고되면, 이람은 분명 죄책감에 시달릴 것이다.
그래서 수란의 해고는 수란 본인에게 가해지는 처벌이자, 이람을 향한 ‘경고’였다.
기성의 생각은 단순했다.
‘이 정도 이야기 들었으면, 다음부턴 뒤에서 몰래 움직이는 일 없겠지.’
‘애초에 문제는 사모님이 자꾸 대표님 동선을 파악하려는 데 있었잖아.’
‘아무리 부부라도, 뭘 하든 옆에서 그걸 전부 감시하려 든다면...’
‘숨 쉬는 것조차 답답하지.’
기성은 손짓으로 비서실 실장 주미를 불렀다. 조용히 다가온 주미에게 그는 짧게 말했다.
“수란 씨 건, 오늘 중으로 정리해요.”
“네, 알겠습니다.”
“그럼 수고하새요.”
건조하게 한 마디 던지고, 기성은 자리를 떠났다.
수요일은 하유리의 생일.
제헌의 지시에 따라, 기성은 레스토랑 전체 대관을 준비 중이었다.
레스토랑 사장과 미팅까지 잡고, 유리를 위한 깜짝 생일 이벤트까지 조율하느라 바빴다.
기성은 수란의 해고 같은 ‘작은 일'에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가 무심코 건넨 핸드폰을 주미가 받았다.
그녀는 수란에게 돌려주려는 순간, 액정에 뜬 이름을 보고 눈썹이 찌푸려졌다.
‘조이람 씨?’
주미는 몇 초간 멍하니 생각하다가 금세 인상을 찌푸리며 비꼬듯 말했다.
“수란 씨, 진짜 멍청한 행동을 했어요. 조이람은 그냥 강 대표님 도시락 배달하는 가사도우미일 뿐이잖아요. 그런 사람 때문에 대표님 눈 밖에 나는 게 말이 돼요?”
수란은 차마 입에서 말이 떨어지지 않아, 얼어붙은 시선으로 주미를 바라보다, 뒤에 서 있는 제헌과 유리의 그림자가 스쳐간 순간, 생각회로가 정지되었다.
그제야 겨우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 그분, 가사도우미 아니에요. 강 대표님의... 아내세요.”
“수란 씨, 진짜 눈이 있긴 해요? 강 대표님이랑 하유리 씨, 커플링 낀 거 못 봤어요? 하유리 씨가 진짜, 공식적인 강씨 가문의 미래 작은 사모님이에요. 그건 아무도 못 부정해요.”
“그게 아니고...”
“됐어요. 얼른 인수인계나 해요.”
수란은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기계적으로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그런데 화면 아래, ‘통화 중’ 이라는 표시가 여전히 켜져 있었다.
‘아직 끊기지 않았다고?’
순간, 그녀는 등골이 서늘해졌다.
“사, 사모님! 괘, 괜찮으세요? 방금 들은 건... 못 들으셨죠...? 제발...”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실장님 말은 전혀 사실이 아니에요. 사모님이 무슨 가사도우미예요. 정말 죄송해요, 제가 너무 부족해서...”
이람은 말없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래... 어차피 숨길 수도 없지.’
제헌은 외부에 결혼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람에게도 회사 출입을 금지했다.
그래서 도시락을 들고 갈 때마다, 항상 비서를 통해 전달했고, 그래서 주변 사람들 눈에 이람은 ‘가사도우미’로 비쳤다.
그 오해가 굳이 억울할 것도 없었다.
‘근데... 커플링까지 낄 줄은 몰랐네.’
제헌의 손가락이 떠올랐다.
하얗고 길며, 관절이 오묘하게 잘 드러난 그 손.
결혼반지를 낀 손가락은 어딘가 기품 있고, 섬세하면서도 단단해 보였다.
그 손을 몰래 바라보는 게 이람의 작은 버릇이었다.
하지만 결혼한 내내 제헌이는 그 손가락에 반지를 낀 적이 거의 없었다.
이람은 줄곧... 그가 액세서리의 불편함을 싫어한다고 생각해왔다.
이제야 알았다.
그건 변명에 지나지 않았다.
그는 그저 ‘결혼반지’를 끼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미안해요, 수란 씨. 이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이 없어졌어요.]
수란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은 이람과 통화한 건 단 한 번뿐이었지만, 그 짧은 연결 속에서도 이람이 어떤 사람인지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그녀도 지금 더 미안했다.
“아니에요! 진짜 괜찮아요. 저 원래 부모님 가게 도와드리려고 생각 중이었어요. 사실 사표도 이미 반쯤 써놨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은 이람을 위로하려는 의도였다.
그 진심이 느껴졌고, 그 덕에 이람은 마음이 조금 놓였다.
잠시 뒤, 수란의 목소리는 조금 더 낮고 조심스러워졌다.
“근데 왜요? 사모님이 대표님의 진짜 아내잖아요. 왜 이렇게까지 하세요...? 강 대표님은...”
이람은 대답하지 않았다.
수란은 계속 말했다.
“대표님은 사모님이 사무실에 오는 것도 허락 안 하시면서, 하유리 씨는 아무렇지도 않게 들이고, 사람들 앞에서 반지까지 맞춰 끼고...”
“차라리 ‘집안 친척이다’라고만 설명했어도, 누가 의심했겠어요. 사모님이 매일 아침 손수 도시락 싸서 점심시간에 맞춰 와도 대표님은 늘 문 앞에서 돌려보냈잖아요. 그건 너무... 지나쳐요.”
이람은 조용히 숨을 들이켰다.
‘너무했던 건... 이제 와서 내가 말하지 않아도 상관없는데.’
제7화
이람은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수란은 그런 이람이 늘 걱정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이람은 좀처럼 하지 않던 설명을 덧붙였다.
[나, 강제헌 씨랑 이혼했어요.]
수란은 깜짝 놀랐다.
“사모님이랑 대표님이 이혼하셨다고요? 사모님은 그렇게 대표님을 사랑하셨잖아요...”
[네, 했어요.]
이람은 담담했다.
수란은 곧 마음을 추스렸다. 이람의 선택을 이해 못 할 이유는 없었다.
굳이 이해하려 들 것도 없었다.
수란은 제헌이 이람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방적인 감정에는 애초에 ‘왜’ 같은 이유가 필요 없었다.
“그럼 대표님... 정말 그 하유리 씨랑 결혼하시는 건가요?”
말을 꺼내고 나서야 수란은 자신이 너무 무례했다는 걸 깨달았다.
“죄송해요. 제가 괜한 말을... 못 들은 걸로 해주세요.”
[몰라요.]
‘그 사람의 마음은... 내가 3년을 안고 있어도 따뜻해지지 않았는데...’
‘지금 와서 어떻게 알 수 있을까?’
통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서로 더 할 말도, 들을 말도 없었다.
...
전화를 끊은 뒤, 이람의 머릿속에 유리가 떠올랐다.
제헌을 알기 전부터, 이람은 유리를 알고 있었다.
하지만 유리가 제헌의 첫사랑이라는 걸 알게 된 건 결혼하고 나서였다.
유리를 알게 된 계기는 단순하지 않았다.
정확히는, 유리는 이람의 이모 심혜영과 관련이 있었다.
이람의 어머니 심혜주가 사고를 당한 뒤, 외삼촌 심기정은 해외에 정착했고, 심혜영이 외할아버지가 일군 가업을 이어받았다.
그러던 중,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심혜영은 유리의 아버지를 사랑하게 되었다.
맹렬한 사랑이었다.
유리의 어머니는 아이 셋을 남긴 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럼에도 심혜영은 단호하게 하씨 집안으로 시집갔다.
그때의 하씨 집안은 H시에선 유명하지 않은 작은 기업 하나를 소유한 것이 전부였다.
심혜영은 자신이 가진 모든 자원을 하씨 집안에 쏟아부었고, 그 결과가 지금의 HT그룹이다.
몇 년 사이, HT그룹은 H시 재계에서 당당히 이름을 올리는 대기업이 되었다.
유리는 자연스레 재벌가의 정통 금수저가 되었다.
심혜주가 사고를 당하기 전까지만 해도, 이람은 이모인 심혜영과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심혜영이 하씨 집안으로 시집간 후에도 둘은 자주 만났다.
이람은 심혜영을 친엄마처럼 의지했을 정도였다.
하지만 이람이 제헌과 결혼한 이후, 심혜영의 태도는 눈에 띄게 달라졌다. 연락조차 쉽지 않았고, 1년에 한 번 얼굴을 보는 것도 어려웠다.
이람은 처음엔 이해하려 했다.
‘이모도 이제 자신의 가정을 꾸렸으니까. 이젠 내가 중심이 아닐 수 있지.’
‘서운하지만 어쩔 수 없어. 나도 받아들여야지.’
그래서 점점 이모를 찾는 횟수가 줄어들었고, 결국엔 아예 관계가 멀어졌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보면, 그 변화는 단순히 새 가정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제헌과 결혼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
‘...’
[수요일 저녁 시간 돼?]
민서의 전화가 이람의 생각을 끊었다.
“응, 돼.”
이람은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데 능했다. 목소리에도 아무런 흔들림이 없었다.
“왜?”
[‘황금빛 그릴’에서 만나. 내가 저녁 살게.]
...
SY그룹 대표가 곧 귀국한다는 소식이 돌자, 이람은 이번 주 내내 야근을 피할 수 없게 됐다.
수요일 밤 8시, 겨우 민서가 알려준 레스토랑에 도착했을 때였다.
입구에 들어서기도 전, 민서가 화난 얼굴로 식당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야?”
이람이 묻자, 민서는 이를 꽉 물며 말했다.
“네 생일, 제대로 챙겨주고 싶었는데, 개XX가 식당 통째로 빌렸대.”
‘생일을 챙겨준다고?’
올해 이람의 생일... 그날도 민서가 먼저 약속을 잡았었다.
하지만 이람은 막 임신 사실을 알게 된 날이었고, 기뻐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날, 남편한테 서프라이즈로 말해줘야지. 생일 선물처럼 말이야.’
그래서 미안하지만 민서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제헌을 기다렸다.
제헌은 일찍 들어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새벽 1시가 넘도록,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람이 전화를 걸었을 땐, 지후가 대신 받았다.
[제헌 형이요? 지금 술 마시고 있어요. 친구들하고 좀 많이 마셨거든요.]
그녀는 그제야 알았다.
‘내 생일인 것도, 내가 기다리는 것도... 그 사람은 잊고 있구나.’
다음 날 아침, 이람은 결국 참지 못하고 제헌에게 톡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어제, 무슨 날이었는지 기억나요?]
제8화
하루가 지나서야 제헌에게서 톡으로 메시지가 도착했다.
이람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핸드폰을 열었다.
‘혹시... 기억하고 있을까?’
‘기억하기만 해도 돼.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제헌의 답장은 이랬다.
[오늘 저녁 8시쯤 들어갈 거니까 저녁 미리 준비해 둬.]
순간, 그녀는 얼음물 한 통을 머리부터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몸은 멀쩡했지만, 심장은 얼어붙어버렸다.
‘이런 말, 결혼 3년 내내 수도 없이 들었어.’
제헌은 분명히 메시지를 보냈다. 하지만 그건 마치 상사가 부하직원에게 하는 지시처럼 무미건조했다.
무엇보다... 이람이 보낸 메시지는, 애초에 읽지도 않은 것 같았다.
‘읽었어도 그냥 무시한 거겠지.’
‘이 정도의 무관심... 그 사람답네.’
그날 이람은 스스로에게 말했다.
‘기대하지 말자. 생일은 그냥 지나가는 365일 중 하루일 뿐이야.’
‘괜히 의미 부여하지 말자.’
그래서 민서가 오늘 생일을 챙기겠다고 말했을 땐, 이람은 순간 당황스러울 정도로 놀랐다.
이람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속은 뒤집혀도 겉은 평온했다.
결국 겨우 한마디 입 밖으로 꺼냈다.
“감동이야.”
“감동은 무슨. 결국 자리도 못 잡았는데.”
민서는 쏘아붙이듯 말해놓고, 이내 한숨을 쉬었다.
“내 잘못이지 뭐. 미리 예약했어야 했는데... 평소엔 손님도 많지 않고 널널하길래 방심했지. 오늘 따라 하필 통째로 대관이래.”
그러더니 작은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람이 받으며 물었다.
“이게 뭐야?”
“생일선물. 일단 받아. 너는 잠깐 길가에서 기다려. 내가 차 끌고 올게. 자리 옮겨서, 더 좋은 데 가서 먹자.”
민서는 그 말만 남기고 주차장 쪽으로 걸어갔다.
이람은 민서의 당당한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손에 쥔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쇼핑백에는 익숙한 주얼리 브랜드 로고가 찍혀 있었다.
며칠 전, 결혼반지를 팔고 나온 날 민서와 함께 지나가던 매장.
안에 들어 있는 건 정사각형의 작은 박스.
아마 팔찌나 목걸이 같은 악세사리겠지.
‘그날, 이미 챙길 생각 하고 있었던 거야...?’
그때 민서는 밥도 같이 안 먹겠다고 할 만큼 감정이 예민했다.
그런데도 이렇게 세심하게 마음 써주는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이람은 또 한 번 마음이 울컥했다.
‘진짜... 내 소중한 친구 민서...’
그리고, 조용히 웃었다.
며칠 만에 찾아온... 아니 어쩌면 몇 달 만에 찾아온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 감정은 오래가지 않았다.
“강 대표님, 하유리 씨, 지후 도련님, 이쪽으로 안내해드릴게요!”
식당 앞 도로로 걸어가던 이람은 익숙한 호칭이 들려 고개를 돌렸다.
‘설마...’
익숙한 이름들이었지만, 설마가 사람 잡는다는 말은 이럴 때 쓰는 거였다.
이람이 고개를 돌린 순간, 제헌과 유리가 나란히 서 있었다.
그 뒤엔 지후와 다른 사람들이 따라오고 있었다.
제헌과 유리.
완벽하게 잘 어울리는 커플처럼 보였다.
그리고 제헌이 유리를 향해 보내는 시선.
그건 이람이 단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말랑하고 다정한 눈빛이었다.
‘저 눈빛은 뭐지?’
이람의 눈동자 순간적으로 수축됐고, 발이 저절로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웃기지도 않아... 나한테는 단 한 번도 보여준 적 없는 저 눈빛.’
...
식당 직원 유니폼을 입은 매니저가 반갑게 다가왔다.
“강 대표님, 준비는 다 끝났습니다. 이제 대표님만 오시면 됩니다.”
유리는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살짝 갸웃하며 물었다.
“뭐가 그렇게 준비됐다는 건가?”
제헌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곧 알게 될 거야.”
유리는 더 궁금해지며 지후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웃었다.
“제헌이가 안 알려주니까... 네가 말해줘.”
지후는 그 말에 바로 제헌을 팔아넘겼다.
“누나, 진짜 잘 물어봤어요. 내가 오늘 먼저 현장 봤거든요. 제헌 형이 누나가 하얀색 좋아하는 거 알고, 식당 전체를 하얀 테마로 꾸며놨어요. 솔직히... 남자인 나도 감동했어요.”
“닥쳐.”
제헌은 차갑게 한마디 했지만, 그럴수록 유리는 더 웃음이 나왔다.
“더 말해봐. 나 듣고 싶어.”
지후는 눈치껏 말 이어갔다.
“누나가 백합꽃 좋아하는 것도 알아서 형이 직접 백합으로 만든 핸드부케까지 만들었다니까요? 거기다 세상에 하나뿐인 백합 목걸이도 주문 제작했대요.”
제헌이 발끈하며 지후를 막으려 했지만, 지후는 이미 슬쩍 몸을 비켜 제헌 손을 피해 있었다.
그러다 지후의 시선이 골목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발걸음이 멈췄다.
“형수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