Đang tải thông tin quảng bá...
남편의 결혼을 지지해요
방탕했던 하룻밤의 대가로 그녀에게 딸이 생겨버렸다. 보물처럼 애지중지 키우던 딸인데 정작 연지훈은 제 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첫사랑과 ...
Chương (1)
第1章
방탕했던 하룻밤의 대가로 그녀에게 딸이 생겨버렸다. 보물처럼 애지중지 키우던 딸인데 정작 연지훈은 제 딸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오직 첫사랑과 낳은 아들만 끔찍이 아끼며 심지어 그 애가 제 딸을 짓밟고 올라서도록 내버려 두었다.
딸이 죽은 지 7일째 되던 날, 연지훈은 첫사랑 유이영을 위해 성대하고 호화로운 결혼식을 치렀다. 그와 유이영의 아들은 고급진 슈트 차림에 화동이 되어주었는데 그녀의 딸은 제대로 된 묘지조차 살 수 없었다.
그녀는 딸의 유골함을 안고 바다에 몸을 던졌고, 그 시각 연지훈은 첫사랑 유이영과 함께 막 신혼 방에 들어섰다.
...
전생을 겪고 다시 태어난 그녀는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선뜻 연지훈과의 관계를 정리했다.
전생에 그녀는 연지훈과 유이영 사이에서 광대처럼 굴었지만 이 남자의 연민이나 애정 따위 얻지 못했다.
이번 생에서 그녀는 연지훈과 유이영의 관계를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전생에 유이영은 매정하게 그녀의 딸 연하나의 시신을 밟고 올라섰다.
이번 생에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똑같이 갚아주고 유이영의 추악한 본모습을 뭇사람들에게 폭로했다.
전생에 그녀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은 연지훈이었고 온 세상이 연지훈으로 물들었다.
이번 생에는 다른 남자들도 만나보고 연지훈 따위는 거들떠보지 않았다.
연지훈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바닥에 무릎을 꿇고 그녀에게 제발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애원했다.
제1화
그녀의 딸이 죽었다.
하지만 그녀는 장례식도, 발인도, 평범한 묘지를 살 돈도 없었다.
그저 검은색 나무관과 유골함에 딸 연하나의 모든 걸 담았다.
장례식장의 TV에서 극도로 사치스러운 세기의 결혼식이 생중계되고 있었다. 신랑은 그녀의 전남편이자 연하나의 친아빠인 연지훈이었고, 신부는 그가 줄곧 마음에 품어왔던 첫사랑 유이영이었다.
연지훈은 마침내 소원을 이루었다.
서현주는 유골함을 안고 화장터에서 나왔다. 밖에는 비가 주룩주룩 내렸다.
화장터에서 일하는 젊은 여직원이 무언가 말하려다 망설였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물었다.
“손님, 밖에 비가 많이 와요. 혹시 데리러 오신 분 있나요?”
서현주는 핏기없는 얼굴로 유골함을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오지 않을 것이다. 그녀의 유일한 가족은 첫사랑 여자친구와 결혼식을 올리고 있으니까. 그는 이 두 모녀에게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 딸의 죽음을 알 리가 있을까?
설령 여유가 있다고 해도 결코 그녀를 데리러 오지 않을 것이다.
연지훈은 그녀를 끔찍이 미워한다.
너무 밉다 보니 그녀의 딸까지 증오했다.
며칠 전, 유이영이 차에 아들을 싣고 운전하다가 서현주와 연하나가 탄 버스를 들이받았다. 연하나는 심각한 부상을 입고 현장에서 기절했다.
서현주는 인파 속에서 연지훈을 한눈에 알아보고 구명줄이라도 잡은 듯 그에게 달려갔다.
“지훈 씨, 하나가 다쳤어요. 상태가 심각해요. 제발 우리 하나 병원으로 데려다줘요!”
하지만 연지훈은 그녀를 밀쳤다. 서현주는 머리가 땅에 부딪혔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서현주, 뻔한 연기는 제발 그만 좀 해!”
말을 마친 연지훈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더니 유이영의 아들을 안고 구급차로 향했다.
서현주는 머리가 어지러운 와중에도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잡았다. 자존심까지 다 내려놓고 비참하기 그지없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하나 곧 죽을 것 같다고요! 우리 하나도 지훈 씨 딸이잖아.”
연지훈은 전혀 믿지 않고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째려봤다.
“몇 번을 말해? 내 생에 아이는 딱 한 명이야. 이영이가 낳아준 우리 아들.”
“너랑 하나는 필요 없어. 쓰레기라고. 아 그리고 이혼합의서 당장 가져와!”
연지훈은 그녀를 발로 걷어차고 약간의 찰과상만 입은 소년을 안고서 구급차에 올라탔다.
서현주는 마음이 재가 되어갔다. 결국 30분이 늦어서 연하나는 골든타임을 놓치고 수술대에서 생을 마감했다.
한편 연지훈이 병원까지 실어갔던 남자아이는 한창 그들의 결혼식에서 화동 역할을 하며 신랑 신부에게 결혼반지를 전달해주었다.
서현주는 차갑게 웃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알아서 갈게요. 감사합니다.”
그녀는 거센 빗줄기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여직원은 잠시 머뭇거리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쫓아가고 싶었지만 끝내 발걸음을 멈췄다.
이미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이 일로 연 대표님의 심기를 건드리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서현주는 빗속을 걸으며 외투를 벗어 유골함을 덮었다. 그녀는 몸을 앞으로 기울여서 비바람을 막아주었다.
“하나야, 엄마가 비 맞지 않게 해줄게.”
한 줄기 밝은 빛이 안개를 뚫고 눈앞을 환하게 비췄고 경적과 함께 검은색 마이바흐가 그녀 옆에 멈춰 섰다.
다만 그녀는 걸음을 멈추지 않고 억척스럽게 앞으로 나아갔다.
...
반 시간 후.
그녀와 연지훈의 신혼집, 아니 이제는 연지훈과 유이영의 신혼집으로 꾸며진 이 공간은 활기찬 분위기가 한창이었다.
엉망진창의 모습인 서현주는 거실에 서서 이 집안 분위기와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가정부는 심지어 그녀더러 현관에만 서 있으라고, 방금 닦은 바닥을 더럽히지 말라고 했다.
서현주는 유골함을 바닥에 내려놓고 주머니에서 푹 젖은 이혼합의서를 꺼냈다.
가정부는 합의서를 받아 들고 외투로 덮인 유골함을 발로 걷어찼다.
“이건 뭐예요? 얼른 치워요.”
외투가 스르륵 벗겨지며 유골함의 한쪽 모서리가 드러났다.
유골함의 이름을 본 가정부는 표정이 굳어버렸다.
그건 바로 서현주의 딸 이름이니까.
서현주는 외투로 유골함을 꼭 감싸고 자리를 떠났다.
한 시간 후, 근처 바닷가.
그녀는 품 안의 유골함을 꽉 안고 바닷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창백한 얼굴과 결연하고 단호한 눈빛으로...
“하나야, 괜찮아. 무서워하지 마. 엄마는 죽어서라도 영원히 네 옆에 있어.”
바닷물이 서서히 그녀의 머리 위까지 차올랐다.
...
결혼식장
유이영은 드레스를 갈아입고 대기실 밖으로 걸어 나왔다. 버건디 컬러의 드레스는 그녀를 꽃처럼 아름답게 물들였고 날씬한 자태를 한껏 드러냈다.
“지훈 씨, 하객들 기다리고 있죠? 얼른 함께 나가서 인사드려요.”
유이영은 연지훈에게 새하얀 손을 내밀었다.
“그래.”
연지훈은 부드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나란히 손을 잡고 대기실을 나왔다.
갑자기 연지훈의 수행비서가 다급한 표정으로 뛰어 들어왔다.
“대표님, 서현주 씨가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했답니다.”
뭇사람들은 표정이 굳어졌고 이때 누군가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무슨 서현주 타령이에요? 대표님은 이미 그 여자랑 이혼했어요. 죽든 말든 상관없으니 귀찮게 굴지 말아요. 결혼식 망칠 일 있어요?”
다만 곧이어 연지훈이 다가오며 끔찍한 얼굴로 수행비서 임지안을 쳐다봤다.
“방금 뭐라고 했어?”
그는 갑자기 차갑게 웃으며 자신을 설득하는 듯 말을 이었다.
“말도 안 돼. 현주가 또 거짓말하는 거 아니야? 그렇게 교활한 여자가 어떻게 죽을 수 있어?”
수행비서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대표님, 정말입니다. 수색대가 방금 바다에서 서현주 씨 시신을 인양했대요. 그리고... 연하나 씨 유골함까지도...”
모든 이가 연지훈은 절대 서현주에게 흔들리지 않을 거로 믿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표정이 돌변하고 싸늘한 시선으로 먼 곳을 응시했다.
이에 뭇사람들은 침묵하며 감히 꼼짝하지 못한 채 서로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직 유이영만 쪼르르 달려와 그의 손을 잡고 애틋한 눈길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훈 씨...”
뜻밖에도 연지훈은 그녀조차 외면하며 손을 뿌리치더니 밖으로 뛰쳐나갔다.
유이영은 그 순간 사색이 되었다.
제2화
연씨 저택, 커다란 거실.
서현주는 자신의 앳된 손을 내려다보며 마침내 본인이 환생했다는 걸 확신했다.
소파 한가운데 연지훈의 할아버지 연동욱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진중하게 말했다.
“현주 너 정말 지훈이 따라 한성시로 출장 갈 거야?”
서현주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이것이 전생의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음을 떠올렸다.
연지훈이 한성시로 가는 것은 출장의 명목으로 첫사랑 여자친구 유이영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서현주 역시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녀의 아빠는 연동욱의 운전기사였고, 연동욱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다. 연씨 가문은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그녀를 연씨 가문으로 데려와 키워줬다.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해줬고 친딸 못지않게 키워왔다.
하여 이번에도 연동욱은 그녀가 연지훈의 출장에 따라가겠다는 요구를 수락했다.
그녀는 연동욱의 옆에 있는 연지훈을 바라보았다.
이 남자는 세련된 블랙 슈트 차림에 단추는 마지막까지 꼼꼼히 채웠고 무심하게 다리를 꼬고 있었다. 이마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은 날카로운 눈빛과 습관적으로 굳게 다문 얇은 입술을 가렸다.
그를 처음 본 순간, 서현주는 숨이 턱턱 막히고 지난날의 모든 일들이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재현되었다.
심장 박동이 거의 멈췄고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그녀를 지배하던 이 남자, 그녀를 완전히 쓰레기 취급하던 이 남자.
서현주는 그를 증오했다.
뼛속까지 증오했다.
자신을 경멸하던 그 눈빛, 모든 걸 제압하던 그 몰골이 밤낮으로 머릿속을 맴돌아서 찢어 죽이고 싶은 충동까지 생겨났다.
연지훈의 눈가에 드러난 경멸감이 더욱 짙어졌고 손가락은 천천히 무릎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것은 짜증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는 걸 서현주는 누구보다 잘 안다.
연지훈은 꼭 마치 그녀가 무조건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것을 확신하는 눈치였다.
하지만 환생한 그녀는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말자고 다짐했다.
이제 막 입을 열려던 참인데 뒤에 있던 엄마 엄진경이 한껏 자세를 낮추고 말했다.
“그럼요, 당연히 따라가야죠. 우리 현주랑 지훈이는 사이가 좋아서 어디든 꼭 붙어 다닐 거예요. 한성시도...”
“아니요.”
이때 서현주가 엄마의 말을 잘랐다.
거실에 있던 뭇사람들이 전부 그녀에게 시선이 쏠렸다.
늘 차가운 표정의 연지훈만 제외하고.
서현주는 고개를 들고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연동욱을 바라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할아버지, 저 곧 있으면 대학 입시라 공부에 집중해야 해서 지훈 오빠 출장 업무에는 방해가 되고 싶지 않네요.”
연동욱의 눈가에 약간의 놀라움이 스쳤다.
엄진경은 초조해하며 이를 갈았다. 그녀는 재빨리 달려와 서현주의 손목을 잡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현주가 헛소리한 거니 마음에 새겨두지 마세요. 다들 보시다시피 얘 엄청 따라가고 싶어 하잖아요.”
“엄마,”
서현주는 엄진경의 손에서 손목을 빼냈다.
“저 진짜 공부 열심히 하고 싶어요.”
엄진경은 잘 모르겠지만 그녀는 너무 잘 안다.
연동욱이 겉으론 너그럽게 대하는 것 같아도 실은 서현주를 별 볼 일 없는 장난감처럼 키우고 있다는 것을.
전생에 그녀가 사고를 겪었을 때 연동욱은 거들떠보지도 않았고 친손녀 연하나마저 눈길 한번 준 적이 없다.
서현주는 단호하게 다시 한번 말했다.
“할아버지, 지훈 오빠, 전에는 제가 너무 철이 없어서 그랬지만 이제는 오빠가 얼마나 바쁜지 다 알아요. 출장도 오빠 혼자 가세요. 더는 오빠 일에 방해하지 않을게요.”
연동욱이 말하기도 전에, 연지훈은 인내심이 고갈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차가운 시선으로 서현주를 힐긋 쳐다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네 마음대로 해.”
이어서 뒤도 안 돌아보고 자리를 떠났다.
연동욱도 더는 붙잡지 않고 다들 방에 돌아가라고 손짓했다.
서현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씨 저택 밖 마이바흐 안에서, 임지안은 조심스럽게 백미러로 연지훈을 보고 있었다.
그는 연지훈의 수행비서인지라 연씨 가문의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이번에 연지훈이 저택으로 돌아온 이유도 분명 이 집안의 말썽꾸러기이자 골칫거리인 양녀 서현주가 무슨 일을 저질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또 연지훈이 양녀를 늘 탐탁지 않게 여기고 심지어 혐오한다는 것까지 알고 있다.
연씨 저택에 들어선 순간부터 연지훈은 줄곧 미간을 찌푸린 상태였으니까.
지금은 저택에 들어가기 전보다 기분이 더 나빠 보였다.
이에 임지안은 분명 그 양녀가 연동욱을 등에 업고 연지훈에게 지나친 요구를 했을 거라고 추측했다. 또 예전처럼 연지훈을 따라 출장을 가고 싶다고 조른 거겠지.
임지안은 차 밖을 곁눈질했는데 평소처럼 들러붙던 소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과감하게 말했다.
“대표님, 처음부터 단호하게 서현주 씨를 거절해서 물러나게 했어야죠.”
하지만 예상과 달리 연지훈이 고개를 들고 어두운 눈길로 쏘아봤다.
“잔말 말고 출발해.”
임지안은 즉시 입을 다물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그는 잠시 기다리다가 연지훈이 피곤한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는 걸 보더니 질문을 이어갔다.
“대표님.”
임지안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서현주 씨는 왜 안 왔어요? 항상 대표님을 따라다녔잖아요.”
오늘은 주말이라 서현주도 수업이 없으니 평소대로라면 늘 연지훈을 따라 회사나 그의 집으로 갔을 것이다.
연지훈은 입술을 앙다물고 무심코 저택 입구를 살펴봤다.
입구는 매우 조용했고 가정부들이 오가는 모습만 보일 뿐 늘 꽁무니를 쫓아다니던 서현주는 없었다.
그는 갑작스러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신경 끄고 출발해.”
임지안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시동을 걸었다.
보아하니 서현주가 정말 그의 심기를 건드렸나 보다.
연지훈은 무심하게 좌석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이때 갑자기 방금 서현주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방해하고 싶지 않다고?’
이까짓 밀당으로 수작을 부리다니, 정말 티 나는 꼼수였다.
한편 엄진경은 가슴을 치며 분통을 터뜨렸다.
“대체 왜 안 따라가는 건데? 지훈이가 누구 만나는지 몰라?”
서현주가 침착하게 말했다.
“알아요.”
이에 엄진경은 더욱 이를 갈았다.
“그런데 왜 따라가지 않는다는 거야? 지훈이가 전 여친이랑 재결합하는 걸 눈 뜨고 지켜볼 셈이니? 그때 되면 너만 떨어져 나가게 돼 있어!”
“그러려니 하죠 뭐.”
서현주는 차가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두 사람이 서로 좋다는데 왜 굳이 끼어들어야 해요?”
엄진경은 그녀의 말이 아예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다짜고짜 딸의 귀를 움켜쥐고 고함을 지를 뿐이었다.
“절대 안 돼! 어르신께 너도 따라갈 거라고 말씀드릴 거야. 이번엔 무조건 내 말 들어!”
서현주는 그런 그녀를 상대하기도 귀찮았다.
엄진경은 아직도 제 딸이 연지훈과 결혼할 거란 망상에 빠져있다. 시간이 모든 걸 깨우쳐줄 것이다.
서현주는 책장에서 문제집을 꺼냈다.
전생에는 비록 연씨 가문이 지켜주었지만 연지훈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밤낮으로 열심히 공부하며 학업을 소홀히 하지는 않았다.
다만 안타깝게도 대학 입시 전날 사고가 발생하여 시험을 치르지 못했다.
그 이후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하면서 그녀는 재수도 하지 않았고 대학도 포기했다.
이번 생에는 대학 입시 기회를 소중히 여기고 연씨 가문과 연지훈으로부터 아주 멀리 떨어진 대학을 선택하여 훨훨 날아갈 생각이었다.
다만 전생의 원한은 잊지 않을 것이며 잊어서도 안 된다.
언젠가는 연하나를 해친 자들에게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다.
밤이 깊어질 때까지 공부하던 와중에 엄진경이 갑자기 방에 들어와 캐리어를 들고 그녀의 짐을 싸려고 했다.
서현주는 엄마의 손에서 캐리어를 빼앗았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엄진경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이마를 찌르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르신께서 네가 지훈이 따라 출장 가는 걸 허락하셨어. 얼른 짐 싸야지. 나중에 지훈이한테 얘기 잘해야 해. 오늘처럼 무례하게 굴어서 심기 건드리지 말고.”
제3화
서현주가 곧장 반박했다.
“말했잖아요, 안 간다고요.”
엄진경이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봤다.
“도대체 왜 이렇게 고집 피우는 거야? 이게 얼마나 좋은 기회인데!”
서현주는 주먹을 꽉 쥐고 단호하게 말했다.
“무슨 기회인데요?”
엄진경의 목소리가 커졌다.
“당연히 연지훈 유혹할 기회지. 너 지훈이 좋아하잖아!”
어쩌면 전생의 경험 때문이겠지. 서현주는 ‘연지훈’ 이름 석 자를 들을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몸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눈시울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런 거 아니...”
똑똑.
예고 없이 노크 소리가 울렸다.
서현주는 눈가의 슬픔을 거두기도 전에 문밖의 연지훈의 차갑고 무심한 눈빛과 마주쳤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서현주는 전생의 연지훈이 자신을 그렇게 쳐다보던 기억이 떠올랐다. 쓰레기를 보는 듯, 죽은 시신을 보는 듯한 저 눈빛.
그녀는 순간 지옥 같았던 전생으로 돌아온 것만 같았다.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눈길을 피했지만 얼굴에 닿은 이 남자의 강렬한 시선이 여전히 느껴졌다.
연지훈은 방금 두 모녀의 대화를 들었다.
그는 줄곧 꼼수와 계략으로 가득 찬 인간을 싫어했다. 게다가 엄진경의 속셈은 이제 너무나 명백하게 드러났다.
연지훈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할 리가 없었다.
엄진경 역시 멍하니 넋 놓고 있다가 약간 당황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훈아, 난 그런 뜻이 아니라...”
“됐어요. 당신들 역겨운 얘기는 듣고 싶지도 않아요.”
그는 미간을 찌푸리고 혐오에 찬 표정으로 눈길을 돌렸다.
더는 이 두 모녀를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듯 몸을 홱 돌리고 이 한 마디만 내던졌다.
“할아버지가 식사하라고 부르세요.”
그가 떠난 후 방안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다.
서현주는 마음을 가다듬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엄마가 원하는 결과예요?”
엄진경은 문을 닫으며 이를 갈았다.
“이렇게 된 이상 더 포기하면 안 되지.”
“엄마 생각이 어떻든 나 짐 안 싸요!.”
서현주는 완고한 엄진경을 설득할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에 엄진경은 씁쓸하게 그녀를 따라 내려갔다.
식탁에서 연동욱과 연지훈은 마주 보고 앉아 있었고 양쪽으로 빈자리가 몇 개 있었다.
서현주는 연지훈 뒤에 멈춰 섰다.
예전에는 항상 그의 옆에 앉아 귀찮게 굴며 음식을 집어주려고 했다.
물론 연지훈은 그녀가 집어준 음식을 그릇째 버리곤 했지만.
지금 보니 정말 어리석기 짝이 없었다.
그녀는 차분한 표정으로 걸어가 연동욱 옆의 의자를 빼내서 앉았다.
동작은 유창하고 자연스러웠지만 연동욱과 가정부들 모두 의아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늘 그녀를 없는 사람 취급하던 연지훈마저 젓가락질을 멈추고 무심코 힐끗 쳐다봤다.
평소 서현주는 손님이 있든 없든 연지훈 옆에 앉아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그를 귀찮게 했다. 이 남자가 자신을 귀찮아하는지도 모른 채 말이다.
하지만 오늘은 처음 이런 광경이 펼쳐졌다.
엄진경이 즉시 다가와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왜 여기 앉았어? 얼른 지훈이 옆에 가서 앉아!”
서현주는 능숙하게 엄진경의 손을 뿌리치고 연동욱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 여기 앉아도 돼요?”
연동욱의 흐릿한 눈동자에 흥미가 깃들었다.
“안 될 건 없지. 그런데 너 줄곧 지훈이 옆자리만 고집하지 않았냐? 둘이 싸웠어?”
“아니요.”
서현주가 고개를 숙이고 낮은 목소리로 답했다.
문득 연지훈이 헛웃음을 터뜨렸다.
서현주도 돌연 말을 멈추었다.
연동욱은 그녀와 연지훈을 번갈아 보다가 웃으며 말했다.
“그래, 앉아.”
엄진경은 마지못해 손을 놓고 씁쓸하게 서현주 옆에 앉았다.
연지훈은 시선을 내리고 냉담한 표정으로 무심하게 샐러드를 집어 들었다.
서현주는 그런 그를 힐끗 보았다.
‘내가 더 이상 식탁에서 귀찮게 굴지 않으니 아까 방에서 있었던 일은 부디 잊어주라.’
그녀와 엄진경은 당분간 연씨 저택에 머물러야 한다.
이 집안은 연지훈이 주도권을 쥐고 있으니 그의 심기를 건드리면 두 모녀 모두 편하지 않을 것이다.
음식을 몇 숟갈 뜨기도 전에, 연동욱이 갑자기 물었다.
“지훈아, 이번에 한성시 가는 거, 잘 해낼 자신 있니?”
연지훈은 간결하게 말했다.
“네. 좋은 결과 가지고 돌아올게요.”
연동욱은 자신이 키워온 손자이기에 높이 평가하며 미소를 지었다.
“그래. 회사 일로 나를 실망시키진 않겠지.”
“하지만...”
어르신이 대뜸 화제를 돌렸다.
“한성시 가는 거 또 다른 목적도 있는 거지?”
이번에 연지훈은 즉시 대답하지 않았다. 오히려 몇 초간 침묵하며 낮은 목소리로 부드럽게 말했다.
“네, 이영이한테 사정이 좀 생겨서 도와줘야 해요.”
예고도 없이 연지훈의 입에서 유이영의 이름을 들었지만 서현주는 놀랍게도 더 이상 마음에 어떠한 파동도 일지 않았다. 그녀는 어느덧 제삼자의 시점에서 연지훈과 유이영의 일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연동욱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너랑 유이영은...”
“할아버지.”
연지훈이 거리낌 없이 연동욱의 말을 잘랐다.
“이건 저랑 이영이 사이의 일이니 다른 사람들에겐 폐 끼치고 싶지 않네요.”
서현주는 적어도 이점만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유이영의 입장에서 볼 때 연지훈은 그야말로 좋은 남자였다.
직업과 학업 발전을 위해 유이영은 몇 년 동안 해외로 나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지훈은 여전히 마음속에 그녀를 품고 있었고 수년 동안 여자도 안 만나고 일말의 스캔들도 없었다.
서현주가 어쩔 수 없이 그와 관계를 가지고 연하나를 낳았지만 이 남자의 마음속엔 여전히 유이영 뿐이었다.
마치 지금처럼 그는 아무도 자신과 유이영의 일에 대해 함부로 말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사람이 자신을 키워준 할아버지일지라도.
옆에서 엄진경이 서현주의 허벅지를 꼬집으며 연지훈 앞에서 존재감을 좀 드러내라고 암시했다.
다만 서현주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밥만 먹었다.
연동욱이 다시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과거에 연지훈의 첫사랑 여자친구에 관한 이야기만 나오면 서현주는 늘 얼굴을 찌푸리며 그더러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했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무관심한 모습인 걸까?
늘 그녀를 무시하던 연지훈마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
좀 전까지 유혹하느니 마느니 수군거리더니 지금은 왜 또 이런 반응일까?
서현주가 젓가락을 내려놓기도 전에, 연지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회사에 볼일이 있어서 먼저 가보겠습니다.”
밤 11시, 서현주는 이미 침대에 누웠다.
그런데 갑자기 정원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아마도 연지훈이 야근을 마치고 돌아온 모양이다.
그녀는 졸음이 쏟아졌는데 불현듯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현주는 불을 켜고 일어나 앉았다.
“들어오세요.”
가정부가 문 앞에 서서 오만함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서현주 씨, 대표님께서 취하신 것 같은데 해장국 끓여주시겠어요?”
서현주는 침묵하며 시선을 내렸다.
전생에 그녀는 연지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이 남자가 술자리에서 돌아올 때면 언제나 해장국을 끓여줬다.
가정부의 도움도 받지 않고 손수 끓여서 연지훈이 국을 마시는 것까지 확인하곤 했다.
그랬던 그녀가 지금은 싫다고 한다.
서현주는 다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알아서 끓이세요. 저는 피곤해서 자야겠어요.”
제4화
가정부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여 이불을 뒤집어쓴 그녀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러더니 심드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서현주는 기껏해야 어르신 운전기사의 딸인데 무슨 자격으로 자신에게 일을 시키는 걸까?
“이봐요, 현주 씨. 이런 일은 원래 현주 씨가 해야 할 일이잖아요.”
서현주는 대꾸도 없었다.
한참 후, 가정부가 이불을 뒤집어쓴 그녀를 째려보다가 문을 닫고 나가버렸다.
샤워를 마치고 방에서 나온 연지훈은 1층 부엌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곳에서는 희미하게 그릇 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음주로 인한 불편함을 완화했다.
그러고는 별다른 생각 없이 계단을 내려가 거실 소파에 앉아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했다.
5분 후, 가정부가 부엌에서 나왔다. 그녀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해장국을 연지훈 앞에 내려놓았다.
“대표님, 해장국이 아직 뜨거우니 천천히 드세요.”
예상과는 완전히 다른 목소리에 연지훈이 눈을 떴다. 그는 눈앞의 가정부를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왜 아줌마예요?”
가정부는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는데 눈가에 악의가 스쳐 지나갔다.
이것은 원래 서현주가 해야 할 일이었다. 그녀가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면 가정부도 이곳에서 연지훈을 조심스럽게 시중들 필요가 없을 것이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현주 씨가 싫다고 해서요. 대표님, 현주 씨를 잘 가르쳐주셔야 해요. 계속 저런 식이면 안 돼요.”
연지훈은 서현주의 방을 힐긋 바라봤다.
그녀의 방 문은 마침 거실과 마주해서 한눈에 보였다.
방 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가정부의 말대로 정말 자는 듯했다.
연지훈은 그릇을 집어 들었다. 그의 눈빛은 평온했고 아무런 동요도 없었다.
“알았어요.”
그는 막 한 모금 마셨을 뿐인데 미간을 찌푸렸다.
이에 가정부는 심장이 바짝 조여왔다.
“왜요? 입맛에 안 맞으세요?”
연지훈은 해장국을 한 모금 더 마시고는 아무런 대답도 없었다.
맛이 확실히 달랐다.
서현주는 14살 때 연씨 가문에 왔다.
반년이 지난 후, 그녀는 계속해서 연지훈을 위해 해장국을 끓여왔다.
스스로 단맛을 좋아했기에 당연히 모두가 단맛을 좋아할 거로 생각했다. 하여 해장국에 설탕을 넣었고 단맛이 매우 강했다.
한편 연지훈은 원래 단 것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처음 마실 때는 도저히 적응할 수 없었다.
서현주가 나이가 어린 걸 고려해서 한때는 더 이상 끓이지 말라고 간접적으로 얘기했지만 아쉽게도 그녀가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매일같이 끓여왔다.
시간이 지나면서 연지훈은 달달한 맛의 해장국에 적응하게 되었다.
막상 지금 이 밍밍한 해장국을 마시려 하니 실로 입맛에 안 맞았다.
그는 두어 모금 마시고는 내려놓았다.
가정부는 깜짝 놀라더니 조심스럽게 그의 표정을 살폈다.
“대표님, 더 안 드세요?”
그녀는 약간 긴장했다. 연지훈의 표정이 썩 언짢아 보였으니까.
하지만 아까 맛보았을 때 분명 괜찮았는데...
연지훈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가정부는 그가 가는 방향을 주의 깊게 살펴보지 않다가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자 그제야 심장이 덜컥했다.
이 남자가 서현주의 방 문을 열었다.
가정부는 마치 말 못 할 재벌가의 스캔들이라도 겪은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그릇을 챙겨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귓가에 들려오는 바스락거리는 소리에 서현주가 어렴풋이 눈을 떴다.
흐릿한 불빛 아래,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검은색의 거대한 실루엣을 본 순간, 그녀는 하마터면 심장이 튀어나올 뻔했다.
상대의 옆모습을 똑똑히 쳐다본 후에야 그녀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훈 씨?”
연지훈은 손에 든 책을 책상 위에 놓고 고개를 돌렸다. 날카롭고 차가운 옆모습은 어두운 불빛 속에 잠겨 있었고 검은 눈동자에 매서운 한기가 스쳤다.
서현주는 경계하며 이불을 꽉 잡았다.
“여긴 왜 왔어요?”
불현듯 연지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에게 바짝 다가왔다. 그는 거만한 눈길로 서현주를 내려다보며 싸늘하게 물었다.
“방금 뭐라고 불렀어?”
“네?”
서현주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 이때 연지훈이 갑자기 턱을 잡고 여린 피부를 꾹 누르며 얼굴을 들어 올렸다.
“현주야.”
그는 음침한 표정으로 서현주를 쳐다보며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무슨 심술을 부리는 거야?”
서현주는 그제야 이 남자의 말뜻을 이해했다. 방금 평소처럼 ‘지훈 오빠’라고 부르지 않고 ‘지훈 씨’라고 불러서 이 사달이 난 것이다.
그녀는 침대 시트를 꽉 잡고 최대한 침착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그냥 좀 피곤해서 자야겠어요.”
연지훈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턱을 꽉 잡았다.
“나더러 그 말을 믿으라고?”
서현주는 이제 그만 연지훈과 명확하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불필요한 문제를 면하고 둘 사이에 거리를 둬야 하니까.
“오후에 있었던 일은 엄마가 실수했어요. 제가 대신 사과드릴게요. 그 말들은 제 진심이 아니에요.”
어둠 속에서 소녀는 청아한 목소리로 단호하게 말했다. 눈빛 또한 더할 나위 없이 해맑았다.
“지훈 오빠, 앞으로는 제가 좀 더 어른스럽게 행동할게요. 더는 오빠를 귀찮게 하지 않아요. 그리고 걱정 말아요. 저도 딱히 오빠를 유혹할 생각은 없으니까.”
짤막한 몇 마디 말이지만 그녀는 겨우 입밖에 내뱉었다. 그리고 다행히 명확하게 말을 마쳤다.
연지훈이 갑자기 손을 떼더니 책상 위의 책을 집어 들어서 그녀에게 내던졌다.
책이 펼쳐진 순간, 서현주는 그 안에 적힌 글을 보게 됐다. 그녀의 맑고 고운 글씨체로 쓴 연지훈 이름 석 자.
빽빽하게 페이지를 채워 넣은 연지훈 이름 석 자였다.
서현주는 안색이 창백해지고 숨이 멎을 것만 같았다.
환생하기 전에 써두었던 것, 미처 지우지도 못한 채 연지훈에게 들켜버리다니.
그는 또다시 서현주의 턱을 잡고 날카로운 시선으로 째려보며 한없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거짓말을 하겠으면 잘하던가, 들키지 않게.”
말을 마친 연지훈이 자리를 떠났다.
서현주는 졸음이 거의 사라졌다.
그녀는 노트를 집어 들고 연지훈의 이름이 쓰인 종이들을 갈가리 찢었다.
사실 1년 전만 해도 그녀와 연지훈의 관계는 지금처럼 껄끄럽지는 않았다.
그녀가 연씨 가문에 처음 왔을 때, 연지훈은 때때로 그녀를 데리고 집안 환경을 익히게 해주었고 끊임없이 재잘대는 그녀의 이야기도 인내심 있게 들어주었다. 또한 밤에는 따뜻한 우유를 건네주는 자상한 오빠였다.
다만 이 모든 게 유이영의 귀국으로 종결됐다.
서현주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유이영이 그녀가 몰래 쓴 연애편지를 연지훈에게 보여주고 그에게 달라붙더니 아름답고 섹시한 뱀처럼 그 남자의 몸을 휘감았던 모습을.
한편 늘 침착하고 점잖았던 연지훈마저도 스캔들이 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유이영은 모두가 지켜보는 가운데 새하얗고 섹시한 두 팔로 이 남자의 목을 휘감고 나직이 속삭였다.
“지훈 씨 옆에 여자들이 맴도는 게 싫어요. 그게 한낱 고등학생일지라도.”
“지훈 씨, 나랑 서현주, 누구 선택할 거예요?”
유이영의 질문에 연지훈이 고민 없이 대답했다.
“너.”
서현주는 연지훈의 눈가에 드리운 혐오감을 잊을 수가 없고 그 냉담한 말투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서현주, 너의 그 더러운 생각 따위 내게 쏟아내지 마.”
연지훈은 자신을 향햔 서현주의 감정이 단지 악취가 나는 하수구의 쓰레기처럼 느껴질 뿐이다.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역겨운 존재였다.
그때의 서현주는 연지훈의 눈가에 스친 혐오감이 그토록 두려웠지만 지금의 그녀는 이 남자한테서 최대한 멀리 떨어지고 싶을 따름이다.
회상에서 빠져나온 서현주는 피곤한 듯 침대에 누웠다.
어젯밤에 늦게 잤는데 아침 댓바람부터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를 침대에서 거칠게 일으켰다.
“빨리 일어나. 지훈이 곧 출장 갈 텐데 너도 얼른 준비해야지!”
서현주는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분노를 억눌렀다.
“내가 안 간다고 했잖아요!”
엄진경도 울화가 치밀어 그녀를 침대에서 끌어냈다.
“지금 여름방학이라 시간 많잖아. 싫어도 가! 무조건 가야 해. 네 멋대로 고집 피울 생각 마!”
제5화
서현주가 머리카락을 움켜쥐며 짜증을 낼 때, 엄진경이 그녀의 어깨를 잡고 정색하며 다그쳤다.
“연씨 가문에 우리를 환대해 주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아직도 모르니? 가정부들도 이제 우릴 깔보고 있잖아. 엄마는 네가 성공해서 우릴 구원해주기만 바라고 있어!”
전생에 서현주는 이 말을 귀가 아프게 들어서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말했잖아요. 난 절대...”
“두 사람 아직도 망상에 빠진 거예요?”
갑자기 앙칼진 목소리가 모녀의 귀를 파고들었다. 엄진경은 문 앞을 바라보더니 곧바로 아부하듯 말했다.
“오셨어요, 아가씨.”
서현주는 말없이 엄진경의 손에 들린 여행 가방을 빼앗아 침대 밑에 밀어 넣으려 했다. 그때 문가의 여자가 하이힐을 신고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연채린, 연지훈의 사촌 여동생이자 연동욱의 유일한 친손녀.
그녀는 모두의 사랑을 독차지하며 귀하게 자랐다.
연채린은 거만한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 눈빛은 서현주가 너무나 잘 아는 눈빛이었다.
“왜요? 내가 안 돌아오면 당신들 우리 집안 발칵 뒤집어 놓을 속셈이었어요? 지훈 오빠가 아무 말 안 하던가요?”
연채린의 농염한 얼굴에 비웃음이 걸려 있었다.
“오빠가 제발 좀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하는데 왜 이렇게 뻔뻔해요? 그렇게 오빠 옆에 들러붙고 싶어요? 출장까지 따라갈 만큼?”
서현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일어서서 연채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채린 씨, 여기는 제 방이에요. 나가주세요.”
연채린의 얼굴에 띤 야유가 더욱 짙어졌다. 꼭 마치 어처구니없는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이봐요, 서현주 씨, 여기 오래 살았다고 제집인 줄 알아요?”
그녀가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똑똑히 봐요. 여긴 연씨 저택이에요. 당신들 집이 아니라. 나만 원한다면 어느 방이든 다 갈 수 있어요.”
서현주의 눈가에 서늘한 빛이 스쳤다.
“하지만 적어도 할아버지 앞에서는 여기가 제 방이에요.”
연채린의 안색이 굳어졌다.
“감히 나한테 말대꾸하는 거야? 게다가 할아버지를 내세워서 날 협박해? 네가 뭔데?”
전생의 서현주는 연지훈에게 사랑받으려고 연씨 가문의 모든 이에게 잘 보이려 애썼다. 그 가운데는 거만하기 짝이 없는 연채린도 포함됐다.
이 여자가 뭐라고 하든 서현주는 묵묵히 받아들였다.
심지어 유이영의 편을 들며 괴롭혀왔어도 아무 말 없이 참았다.
이번에 처음 연채린에게 반박했는데 속이 후련하기 그지없었다.
또 한편으론 심드렁한 연채린의 표정도 훤히 보였다.
서현주가 몸을 돌리려 할 때, 정원에서 자동차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이에 연채린이 가볍게 웃었다.
“그래, 서현주, 네가 왜 오빠를 따라가고 싶어 하는지 내가 모를 줄 알아? 그딴 수작 소용없어. 백퍼 실패야.”
이어서 그녀를 밀치고 창가로 걸어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오빠, 이영 언니, 왔어요!”
서현주의 방은 별장 2층에 있어서 정원의 소리가 항상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녀는 오랜만에 유이영의 목소리를 들었다. 여전히 전생처럼 당당하고 기품이 차 넘치는, 연지훈이 딱 좋아할 만한 차갑고 도도한 목소리였다.
“채린아, 네 선물 가져왔어. 얼른 내려와 봐.”
연지훈의 목소리가 적당하게 들려왔다. 동생을 향한 사랑스러운 말투가 서현주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왔다.
“힐 신었으면 천천히 내려와. 넘어질라!”
서현주는 순간 심장이 움찔거렸다.
유이영이 예상보다 일찍 연씨 가문에 왔다.
전생에는 연지훈이 한성시로 가서 유이영을 연씨 가문으로 데려왔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렇게 빨리 연씨 가문에 오다니.
그녀는 주먹을 꽉 쥐고 유이영을 뚫어지라 쳐다보았다.
유이영은 바로 그녀의 친딸을 죽게 만든 주범이었다.
활짝 웃는 유이영을 보고 있자니 서현주는 치 떨리고 질식할 것만 같았다. 머릿속엔 온통 연하나가 그녀의 품에서 죽어가던 모습으로 가득 찼다.
유이영은 친히 인정했다. 연하나를 죽게 만든 교통사고가 바로 그녀가 계획한 것이라고.
연하나는 그렇게 어리고 건강했었는데, 다섯 살 어린 나이에 유이영의 손에 죽음을 맞이했고 심지어 사후에는 묘지도 없었다.
다만 유이영과 그녀의 아들은 모든 걸 챙겼다.
연채린은 유이영의 말에 대답한 뒤 돌아서서 조롱하는 눈으로 서현주를 쳐다봤다.
“현주 씨, 이영 언니 왔는데 함께 내려갈래요?”
서현주는 차갑게 웃었다.
‘물론 만나야지. 이 여자는 마땅히 대가를 치러야지!’
그녀는 거실에 서서 연지훈이 유이영의 분홍색 여행 가방을 들고 들어오는 것을 보았다. 이 남자는 한창 연채린이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유이영에게 안기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부드러운 눈빛으로...
유이영은 연지훈의 손에서 선물 가방을 받아 연채린과 연동욱에게 건넸다.
“채린 씨랑 할아버지 선물이에요. 마음에 들지 모르겠네요.”
연채린은 나직이 환호하며 얼굴에 화색이 감돌았다.
“언니, 내가 이 목걸이 갖고 싶어 하는 거 어떻게 알았어요?”
유이영이 부드럽게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한편 연동욱은 쇼핑백 안의 건강식품을 보면서 말했다.
“그래, 이영아. 온 김에 여기서 잘 지내렴. 난 볼일 있어서 먼저 간다.”
유이영은 수줍게 웃었다.
“네, 할아버지, 고마워요.”
곧이어 그녀는 연지훈 옆에 서서 팔짱을 끼더니 마치 이제야 서현주를 본 듯 예의 바르면서도 냉랭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현주 씨 선물은 준비하지 못했네요. 서운해하는 거 아니죠?”
서현주는 담담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볼 뿐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별일 없으면 저는 이만 올라갈게요.”
유이영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연지훈의 눈빛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이때 연채린이 차갑게 웃으며 다가왔다.
“지금 그게 무슨 뜻이에요? 이영 언니가 우리 집에 왔는데 이렇게 예의 없이 굴면 어떡해요?”
서현주는 그녀를 침착하게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요. 환영해요, 이영 씨.”
연채린은 피식 웃었다.
“뭐가 그리 잘났다고.”
“채린 씨.”
이때 유이영이 난처한 표정을 드러내며 부드럽게 말했다.
“됐어요. 괜찮아요. 서현주 씨도 연씨 가문 사람이니 당연히 방으로 돌아가고 싶으면 가는 거죠. 그러고 보니 저도 사과해야겠어요.”
유이영은 연지훈의 팔짱을 끼고 그녀를 바라보며 얼굴에 약간의 수줍음과 미안함이 엿보였다.
“지훈 씨가 너무 보고 싶어서 사전에 말도 없이 찾아왔어요. 괜찮으시죠, 현주 씨?”
연채린은 코웃음을 쳤다.
“현주 씨가 왜 우리 집안 사람이에요? 여기선 아무런 발언권도 없다고요. 할아버지께서 키워준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지. 우리 집에서는 할아버지 말고 아무도 서현주 신경 안 써요. 그러니까 언니는 여기서 편하게 지내기만 하면 돼요. 서현주처럼 질투에 눈이 먼 여자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유이영은 시선을 내리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띠며 연지훈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갔다.
“말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닌가요?”
연채린은 거만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언니. 서현주는 얌전히 지내야 해요. 안 그러면 내가 조만간 이 집에서 내쫓을 거야!”
그녀는 말하면서 서현주를 빤히 쳐다봤다. 혐오와 경멸에 의해 위축된 표정을 보고 싶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서현주는 줄곧 담담한 얼굴이었다.
마치 연채린의 말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 어떠한 표정 변화도 없었다.
연채린은 가슴이 답답했다.
‘서현주, 네가 언제까지 덤덤한 척하는지 지켜볼 거야 내가!’
“오빠, 나는 오빠랑 이영 언니가 잘 지내기만을 바라요. 둘의 관계를 망치려는 인간들은 단 한 명도 용서하지 않을 거예요. 역시 나밖에 없죠?”
서현주가 저도 몰래 연지훈을 쳐다봤다.
다만 이 남자의 시선은 서현주에게 닿지 않았고 오히려 유이영의 어깨에 손을 걸쳤다.
그는 낮은 목소리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방 구경 시켜줄게.”
연지훈은 연채린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은 부정이 아니라 암묵적인 동의에 가까웠다.
즉 다시 말해 서현주가 유이영을 무례하게 대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순간, 연채린의 얼굴에 승리자의 미소가 떠올랐다.
유이영도 마침내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좋아요.”
연지훈의 반응에 서현주는 이미 무감각해진 지 오래였다.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시선을 거두고 계단을 올라갔다.
연지훈은 그런 그녀를 바라보다가 눈빛이 움찔거렸다.
이에 유이영이 다정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잠시 후, 연지훈의 눈빛이 차가워졌지만 말투는 여전히 온화했다.
“아니야, 아무것도. 얼른 가자.’
제6화
서현주는 생각에 잠겼다.
전생에도 똑같은 장면이 이 거실에서 펼쳐졌었다. 달라진 건 그녀의 태도뿐이다.
그때의 그녀는 유이영과 연지훈이 이미 헤어졌다는 사실을 근거로 유이영이 연씨 가문에 머무는 것을 필사적으로 막았고, 줄줄이 큰 망신을 당했다.
가정부는 시큰둥해서 지켜보기만 했고 연동욱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유이영은 늘 연지훈 뒤에서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채 우아하고 단정하게 서 있었다. 미쳐 날뛰는 그녀와는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그녀는 똑똑히 기억했다. 연지훈이 그녀에게 사과를 강요했고 한밤중에 연씨 가문 정원에서 반성하게 했다.
그날 밤, 서현주는 유이영이 연지훈의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고 밤새도록 방안의 불은 꺼지지 않았다. 굳게 닫힌 창문 너머로 두 사람의 실루엣이 은은하게 비쳤다.
서현주는 문득 계단에서 걸음을 멈췄다.
그때 왜 그렇게 유이영이 연씨 가문에서 지내는 걸 막으려 했던지 깨닫게 되었다.
전생에 서현주는 연지훈을 따라 한성시로 갔고 유이영과 같은 호텔에 묵었다.
유이영은 그녀와 연지훈의 컵에 약을 탔는데 본래의 의도는 그녀와 연지훈이 관계를 갖도록 하는 것이 아니었다. 적절한 시간에 둘을 떼어놓고 서현주가 일부러 연지훈을 유혹했다고 누명을 뒤집어씌워서 이 남자에게 미움받게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날 연지훈의 방 문 잠금장치가 고장 났다.
다음 날 아침, 유이영이 사람들을 데리고 문을 따고 들어왔을 때, 모든 것이 늦어버렸다.
유이영의 예상대로 서현주는 확실히 연지훈에게 미움받고 경멸당하며 평생의 치욕으로 여겨졌다.
또한 그날 밤, 서현주는 연하나를 임신했다.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그 아이를...
임신 때문에 서현주는 학업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못 따서 평생 제대로 된 직업을 찾기가 어려웠다.
계단에 멈춰선 그녀의 모습에 연채린이 물었다.
“또 무슨 수작이에요, 현주 씨? 이영 언니가 와서 속이 많이 심란하죠?”
그들을 등지고 있지만 자신을 향한 연지훈의 따가운 시선이 충분히 느껴졌다. 그건 마치 그녀가 유이영에게 위협이 되는지 감시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전생에서 수없이 감내해왔던 바로 그 눈빛.
서현주는 심장이 빨리 뛰고 숨이 멎을 것만 같아서 재빨리 위층에 올라가 방 문을 닫았다.
그녀는 문에 등을 기댄 채 숨을 고르게 쉬었다.
유이영이 전생처럼 또 약을 탈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방심은 금물이다.
오후 내내, 저택은 매우 조용했다. 점심 식사 시간에 서현주는 내려가서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가정부도 두 번 재촉하다가 포기했다.
저녁이 되어서야 유이영이 그녀의 방 문을 두드렸다. 부드럽고 우아한 미소를 지으며 신선한 과일 주스 한 잔을 건네는데...
“종일 아무것도 안 먹은 것 같아서 특별히 주스를 갈아왔어요. 한번 마셔봐요.”
서현주는 문손잡이를 잡고 유이영이 들어오지 못하게 막으며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요. 아직 목마르지 않아요.”
유이영의 입가에 미소가 살짝 굳었다. 그녀는 계속해서 주스를 건넸다.
“맛있어요. 할아버지랑 지훈 씨랑 채린 씨도 마셨는데 다들 맛있다고 하니 현주 씨도 맛보라고 가져왔어요.”
그녀는 말하며 약간 난감한 듯 뒤따르는 연지훈을 곁눈질로 흘긋 보았다.
“지훈 씨가 그러는데, 나 몇 달 동안 여기 머물 거래요. 우리 잘 지내봐요, 현주 씨. 그렇게 날 경계할 필요 없어요.”
서현주는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말했잖아요, 필요 없다고!”
“서현주.”
연지훈의 경고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서현주는 돌연 그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연지훈은 싸늘한 시선에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이영이 난처하게 하지 마.”
서현주는 웃음이 나왔다.
연지훈 이 남자가 마냥 무뚝뚝하고 상대를 배려할 줄도 모를 거라 여겼는데 실은 그게 아니라 오직 유이영한테만 자상하고 그녀가 낳은 아들만 중히 여길 따름이었다.
유이영이 실망한 듯 고개를 숙이고 한 걸음 물러섰다.
“괜찮아요, 지훈 씨. 현주 씨가 날 싫어하는 것도 당연해요.”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서현주가 연지훈의 따가운 시선 속에 주스를 받아 들고 단숨에 마셔버렸다.
다 마신 잔을 유이영에게 다시 건네주고 깊은숨을 들이쉬며 연지훈의 차가운 눈빛을 마주했다.
“이제 만족해요, 지훈 씨?”
연지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다시는 날 귀찮게 하지 말아요.”
서현주는 차갑게 웃으며 몸을 돌려 문을 세게 닫았다.
곧이어 허겁지겁 화장실 세면대 앞으로 달려가 고개를 숙이고는 손가락으로 목구멍을 찔러 주스를 모조리 토해냈다.
그녀는 세면대 가장자리를 잡고 숨을 몰아쉬었다. 머리카락이 젖어서 얼굴에 달라붙었고 입술은 창백하여 핏기가 없었다.
전생에도 유이영이 건넨 주스를 무방비 상태로 마셨는데 주스 안에 최음제가 들어 있었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그러한 함정들을 피하고 연지훈과도 거리를 분명히 하여 불필요한 문제를 면해야 한다.
5분 후, 문밖에서 비명이 들려왔다.
서현주는 아랑곳하지 않고 펜을 잡고 노트에 공식을 써 내려갔다.
불현듯 누군가가 힘껏 방 문을 두드리더니 연채린의 앙칼진 목소리가 들려왔다.
“서현주, 당장 나와! 우리 오빠 방에 왜 이렇게 역겨운 걸 넣어놨어? 당장 나오란 말이야.”
서현주는 처음에 신경 쓰지 않았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고 책상까지 흔들릴 지경이었다.
“죽은 척하지 마라!”
서현주는 헤드폰을 벗고 문을 확 열었다. 연신 문을 두드리던 연채린은 허공에 손이 붕 뜬 채 그녀를 뚫어지라 응시했다.
“왜 이러는 거예요?”
연채린은 차갑게 웃으며 그녀의 손목을 잡아서 강제로 맞은편 연지훈의 방으로 끌고 갔다.
방 안에서 연지훈은 손에 든 분홍색 편지를 음침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다. 손등에 튀어 오른 실핏줄과 하얗게 질린 손가락 끝이 그의 현재 기분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유이영은 연지훈 옆에 서서 두 팔로 그의 팔을 꽉 감싸 안고 어깨에 얼굴을 기댄 채 애처로운 척하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훈 씨, 어떻게 다른 사람 연애편지를 지훈 씨 방에 숨겨둘 수 있어요?”
유이영은 억울한 눈길로 서현주를 바라보며 말을 아꼈다.
연지훈은 손에 든 분홍색 편지를 꽉 움켜쥐었다. 손바닥으로 편지를 구겨버릴 기세였다.
곧이어 팔을 뻗어 유이영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아서 할게.”
유이영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믿을게요 지훈 씨.”
서현주는 몇 사람의 눈빛을 번갈아 보며 마음이 무거워졌다.
이때 연채린이 그녀의 손을 세게 뿌리쳤다.
“현주 씨, 대체 무슨 자격으로 우리 오빠 방에 연애편지를 넣어두는 거죠? 역겨워 정말!”
서현주는 자신의 손목을 문지르며 냉정하게 말했다.
“그런 적 없어요. 제 거 아니에요.”
그녀는 확실히 이런 짓을 한 적이 없다.
또한 이건 애초에 서현주의 필체가 아니었다.
연채린은 연지훈에게서 편지를 받아 봉투를 뜯고 안에 든 연애편지를 그녀 앞에 펼쳐 보였다.
“여기 글씨체랑 서명 좀 봐봐요. 이래도 아니라고요? 현주 씨가 아니면 대체 누군데요?”
연지훈은 유이영의 얇은 어깨를 손으로 감싸고 어두운 눈동자로 서현주를 응시했다. 그의 눈빛에는 차가운 냉기가 서려 있었다.
제7화
연채린은 비웃는 표정으로 편지를 한 글자씩 읽어내려갔다.
“지훈 오빠, 저는 항상 뒤에서 오빠를 지켜보고 있어요. 이런 저를 뒤돌아 봐줄 수 있나요?”
연채린의 목소리를 들으며 서현주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이것은 확실히 그녀가 쓴 것이다. 환생하기 전에, 연지훈에게 허황한 환상을 품고 있을 때 쓴 편지였다.
다만 그녀는 늘 연애편지를 잘 숨겨두었기에 연지훈의 방에 편지를 둘 리가 없었다.
단 한 가지 가능성이 있다면 누군가가 훔쳐서 연지훈의 방에 넣은 것이었다.
그건 연채린일 수도 있고 유이영일 수도 있다.
“됐어, 그만해.”
연지훈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분노가 잠겨 있었고 눈가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아.”
연채린은 차갑게 웃으며 입을 다물고 혐오스러운 듯 편지를 서현주의 품에 찔러 넣었다.
환생한 서현주조차도 연지훈의 이런 눈빛을 보고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온몸이 차갑게 식는 느낌이었다.
“서현주, 뭐라고 설명해봐야지?”
이때 유이영이 갑자기 연지훈의 팔을 잡아끌며 부드럽게 말했다.
“현주 씨가 아직 애라서 그래요, 지훈 씨. 너무 신경 쓰지 말고 화 좀 풀어요. 다만...”
유이영이 연민이 스친 눈빛으로 서현주를 쳐다봤다.
“현주 씨 공부에 집중하고 쓸데없는 생각은 하지 말도록 잘 가르쳐 줄 필요는 있겠네요.”
연지훈은 냉랭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서현주, 제발 그런 더러운 생각 좀 하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말해? 주제넘게 굴지 마.”
서현주는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난 이 편지 이 방에 둔 적 없어요. 딴 사람 짓일 거예요.”
연채린이 실소를 터트렸다.
“뭐라고요? 이 집에서 현주 씨처럼 뻔뻔한 인간이 또 어디 있는데요? 이런 짓거리로 오빠랑 이영 언니 떼어놓으려는 수작이잖아요.”
서현주는 그녀의 말을 아예 무시했다.
그러고는 연지훈의 싸늘한 눈빛을 똑바로 쳐다봤다.
“연지훈 씨! 제가 잘못했어요. 이런 오해가 없도록 명확하게 말했어야 하는데.”
연지훈은 여전히 냉랭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잘 들어요. 난 진짜 연지훈 씨한테 관심 없어요. 더는 지훈 씨 안 좋아한다고요.”
유이영의 어깨에 얹었던 연지훈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거렸다.
유이영은 놀라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 남자가 서현주를 빤히 쳐다보자 유이영은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서현주가 계속 말을 이었다.
“전에는 내가 잘못했어요. 눈이 멀어서 그토록 뻔뻔스럽게 지훈 씨를 좋아했나 봐요. 이제 반성하고 고칠 거예요. 앞으로는 절대 이런 역겨운 생각 따위 안 해요. 지훈 씨랑 무조건 안전거리 유지하고 귀찮게 굴지도 않을게요.”
연지훈을 향한 마음이 역겹다고 직접 인정하니 서현주는 속이 뻥 뚫리는 것만 같았다. 줄곧 가슴을 짓누르던 돌덩어리가 쑥 빠져나가는 듯했다.
그녀는 한참 동안 연지훈을 쳐다보다가 본인마저 잊고 있던 연애편지를 집어 들었다.
그리고 이 남자 앞에서 직접 갈가리 찢었다.
연지훈은 꼭 마치 뒤이은 그녀의 말을 막으려 하는 듯했다.
“현주야.”
“마지막으로 한마디만 할게요. 앞으로 연지훈 씨랑은 선을 확실히 그을게요.”
말을 끝낸 그녀는 연지훈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 바람에 이 남자의 눈빛을 보지 못했다. 놀란 기색이 스친 눈빛과 굳게 다문 입, 찌그린 눈썹까지...
다시 허리를 펴자 유이영과 연채린이 언제 사라졌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방 안에는 오직 그녀와 연지훈만 남았다.
서현주는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제야 그녀는 이 사건 뒤에 숨겨진 음모를 깨달았다.
잽싸게 몸을 돌렸지만 방 문이 쾅 닫히고 방 전체가 침묵에 잠겼다.
그녀는 연지훈의 반응을 살필 겨를 없이 문 앞으로 달려가 필사적으로 문고리를 돌리며 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몇 번 돌리자 문고리가 갑자기 떨어져 나가 그녀의 손안에 꽉 잡혔다.
문고리가 또 고장 나다니.
전생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서현주는 심장이 쿵쾅대고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뒤에서 연지훈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졌다.
정말이지 유이영은 완벽하게 시간을 조절했다.
연지훈의 몸 안에서 약효가 발작하기 시작했다.
이 상황에 서현주는 좀 전에 입장 표명도 명확하게 했고 마셨던 주스도 전부 토해낸 걸 천만다행으로 여겼다.
그녀는 몸을 돌려 문에 등을 기댄 채 경계하는 눈길로 연지훈을 바라보았다.
연지훈은 침대 가장자리에 기대앉아 두 손으로 이마를 짚고 있었다. 귀밑까지 붉어지고 숨소리는 점점 더 거칠어졌으며 발작하는 약효를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있었다.
서현주는 입술을 굳게 다물고 경계심을 품고서 문손잡이를 꽉 잡았다.
만약 연지훈이 달려든다면 그녀는 손안의 문고리로 세게 내리칠 생각이었다.
“지훈 씨, 문이 고장 나서 열리지 않아요. 곧 사람들이 와서 문을 열어줄 테니 진정하고 있어요.”
연지훈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찡그린 미간을 보자 서늘했던 남자의 눈가에 핏기가 돌았다. 그는 입술을 앙다물고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나 중독된 거 알고 있었어?”
대놓고 의심하는 그의 눈빛에 서현주는 불편할 따름이었다.
“여기서 날 의심할 바엔 주스를 준 유이영 씨나 의심하세요!”
연지훈은 그녀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충혈된 두 눈과 이마에 튀어 오른 실핏줄, 그는 마치 이성을 잃어가는 짐승 같았다.
서현주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은 점점 더 세게 쥐었다.
오랜 침묵 끝에 연지훈이 고개를 숙이고 마디가 선명한 손가락을 머리카락 속으로 파고들었다. 손등에 튀어 오른 실핏줄도 애써 무언가를 참는 것만 같았다.
서현주는 도저히 안심할 수가 없었다.
유이영은 분명 맹독한 약을 탔을 것이다. 이런 약은 연지훈처럼 절제력이 강한 사람조차도 약효 때문에 이성을 완전히 잃게 된다.
지금으로선 유이영이 빨리 사람들을 데리고 오기를 기도할 뿐이었다.
시간이 1분 1초 흘렀지만 연지훈은 오랫동안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서현주는 겨우 안심하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조용한 방에서 기침 소리가 유독 더 크게 들렸다.
다음 순간, 연지훈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두 눈이 충혈된 채 먹이를 쫓는 야수처럼 그녀를 째려보다가 긴 다리를 뻗어 한 걸음씩 서현주에게 다가갔다.
서현주는 두 눈을 부릅뜨고 문손잡이를 번쩍 들었다.
곧이어 연지훈이 그녀의 손목을 꽉 잡고 안쪽을 세게 꼬집었다.
격렬한 고통에 그녀는 손을 놓았고 문손잡이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때 연지훈이 그녀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이어서 침대에 쾅 하고 내던졌다.
서현주는 재빨리 일어나서 자신에게 덮쳐드는 연지훈을 향해 베개를 던졌다.
“진정해요, 나 현주예요, 서현주라고요!”
하지만 연지훈은 갑자기 달려들어 커다란 두 손으로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뜨겁게 달아오르는 몸으로 그녀를 짓눌렀다.
어둠 속에서 연지훈의 혼란스럽고 붉게 물든 눈은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꾹 눌러댔다. 뜨거운 혀가 두 입술을 갈라놓았다.
그 순간, 서현주의 머릿속에 경종이 울렸다.
그녀는 이를 악물고 연지훈의 배를 걷어찼다.
이 남자가 고통스러워할 때 서현주는 힘껏 꿈틀거리며 그의 몸 아래에서 기어 나와 욕실로 달려갔다.
문손잡이에 손이 닿는 순간, 연지훈이 뒤에서 달려들어 그녀를 문에 밀어붙였다.
그가 허리를 더듬자 서현주는 이를 악물었다.
“지훈 씨,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연지훈은 목소리가 다 잠겼고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뺨에 전해졌다. 그는 큼직한 두 손으로 서현주의 허리를 움켜쥐었다.
“왜 도망쳐?”
서현주는 눈동자가 파르르 떨렸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나 유이영 아니에요. 제발 정신 좀 차려요!”
연지훈의 뜨거운 뺨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이영이니?”
제8화
“도망갈 생각 마.”
서현주는 이를 갈았다.
연지훈은 역시나 그녀를 유이영으로 착각하고 이토록 미쳐 발광하고 있었다.
그가 옷 속으로 손을 뻗으려 하자 서현주는 온몸으로 거부하며 팔꿈치로 그의 가슴팍을 내리쳤다.
“손대지 마!”
서현주는 이를 악물고 쏘아붙였다.
“역겨워 진짜.”
연지훈의 손이 갑자기 멈췄다. 곧이어 그의 거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뭐라고?”
서현주는 이를 갈았다.
“너 진짜 역겹다고, 연지훈!”
연지훈은 잠시 침묵하더니 곧바로 손으로 그녀의 입을 막고 분노에 찬 낮은 목소리로 외쳤다.
“닥쳐!”
이어서 서현주의 상의를 걷어 올리며 뜨거운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더듬었다.
서현주는 절망에 휩싸인 채 욕실 문에 머리를 맞댔다.
등 뒤에는 늑대처럼 달려드는 연지훈이 있어서 꼼짝달싹하지도 못했다.
설마 또 전생의 비극을 반복해야 하는 걸까?
어쩌면 하늘이 그녀를 돕는 건지도 몰랐다. 그때 마침 방 문이 자동으로 벌컥 열렸다.
그 순간 서현주는 온 힘을 다해 연지훈을 밀어내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밖으로 나오자마자 그녀는 문을 세게 닫았다.
정신없이 몇 걸음 뛰다가 유이영과 연채린과 마주쳤다.
유이영은 그녀를 보자 저도 몰래 목소리를 높였다.
“현주 씨,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서현주의 얼굴이 굳어졌다.
“난 여기 있으면 안 돼요?”
유이영은 불쑥 그녀의 손을 더욱 세게 잡으며 다그치듯 물었다. 손톱은 살을 파고 들어갈 기세였다.
“현주 씨 입술이 왜 이렇게 빨개요? 지훈 씨랑 무슨 일 있었던 거예요?”
서현주는 차가운 눈빛으로 침착하게 말했다.
“아니요. 그럴 일 없으니까 안심하세요. 난 절대 이영 씨 남자를 넘보지 않아요.”
연채린이 피식 웃었다.
“그걸 누가 장담해요? 현주 씨는 원래 뻔뻔스러운 여자잖아요. 내 말 틀려요?”
서현주는 그런 그녀를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계속 유이영을 향해 나직이 말했다.
“연지훈 씨 지금 많이 힘들어하는데 들어가서 함께해주는 건 어때요? 어쩌면 오늘 밤이 지나면 두 사람 다시 합칠 수도 있을 텐데...”
유이영의 얼굴이 서서히 빨개졌다. 그녀는 곧장 손을 놓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연지훈이 있는 방으로 달려갔다.
서현주는 유이영이 그 방으로 들어가는 것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문이 닫혔다.
예외가 없다면 오늘 밤 연지훈은 그가 항상 원하던 유이영을 얻게 될 것이다.
이 또한 나쁘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시 정상 궤도로 돌아올 테니까.
그녀와 연지훈 사이의 악연은 여기서 끝내야 한다.
이제 이 남자와 철저하게 선을 그어야 한다.
서현주의 목표는 단 하나, 연하나의 목숨을 앗아간 인간들에게 피의 복수를 하는 것이다.
지금부터 복수를 방해하는 사람은 모두 적으로 겨냥할 것이다.
그것이 연지훈, 더 나아가 연씨 가문일지라도.
서현주가 몸을 돌려 떠나려 할 때, 연채린이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다시 잡았다.
“현주 씨 지금 뭐 하는 짓이에요?”
서현주는 거침없이 그녀의 손을 뿌리쳤다.
“신경 꺼요.”
연채린은 안색이 일그러졌다.
서현주가 달라졌다. 그것도 아주 많이. 연채린은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통제도 안 되고 예전처럼 사람들에게 짓밟히는 만만한 여자가 아니었다.
연채린은 이유 없이 초조해졌다.
서현주는 방으로 돌아와 화장실에서 한참 머물렀다. 연지훈이 만졌던 곳을 씻고 또 씻었다. 하얀 피부가 빨갛게 될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이번 생은 마침내 달라졌다.
전생에 그녀는 정원에서 무릎을 꿇고 연지훈의 창문에 비친 두 사람의 실루엣을 바라보았지만 지금은 푹신한 침대에 홀가분하게 누워 있었다.
그렇게 편안한 하룻밤을 보낸 뒤, 서현주는 책가방을 메고 계단을 내려왔다.
아침 식탁에는 연동욱와 연채린만 있을 뿐 연지훈과 유이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어젯밤의 대혼란으로 아직 깨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서현주는 평소와 같이 연동욱의 옆자리에 앉았다.
“할아버지, 좋은 아침이에요.”
연동욱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애로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래, 오늘 개학이라고?”
서현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연동욱이 말했다.
“너랑 채린이는 같은 반이고 수능도 얼마 안 남았으니 서로 배우면서 좋은 대학에 붙어야지.”
연채린은 두 눈을 희번덕거렸지만 할아버지 앞이라 감히 뭐라 반박하진 못했다.
이때 연동욱이 갑자기 말을 꺼냈다.
“설령 좋은 대학에 못 가더라도 괜찮아. 너희 둘 유학 보낼 능력은 있으니.”
서현주는 연신 고개만 끄덕였다.
안타깝게도 전생에 연동욱은 그녀가 연지훈의 아이를 임신한 걸 알게 된 후, 학교에 나가지 못하도록 명령했다.
해외 유학은 물론이고 정상적인 수능조차 치르지 못했다.
그녀가 여유 있게 아침을 먹을 때, 위층에서 갑자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미난 쇼를 구경하는 마음으로 서현주가 고개를 들었다.
방 문 앞에서 연지훈이 조심스럽게 유이영을 부축하며 밖으로 나와 계단을 내려왔다.
두 사람 모두 어제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유이영은 기운이 빠진 듯 부축을 받고서야 겨우 계단을 내렸고 연지훈도 매우 조심스러웠다.
서현주가 시선을 돌리자 연채린의 야유 섞인 눈빛과 마주쳤다.
그녀는 눈썹을 치키고 연채린에게 미소를 날렸다.
이에 연채린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연지훈은 어느덧 유이영을 부축하여 식탁 옆, 서현주 맞은편에 앉았다.
연채린은 야릇한 눈길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오빠, 이영 언니, 두 사람 어젯밤에 뭐 했어요? 혹시 화해했나요? 밤새도록 안 나오더니.”
엄진경은 두 사람이 함께 방에서 나온 걸 본 뒤로 안색이 하얗게 질렸다.
유이영의 창백하던 얼굴도 연채린의 질문에 빨갛게 물들었다. 그녀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아니에요, 그런 거. 채린 씨, 말 함부로 하지 말아요.”
연채린은 계속 더 캐묻고 싶었다.
“말해봐요, 오빠. 어젯밤에 뭐 했어요 둘이?”
연지훈은 담담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다가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뭘 자꾸 물어? 얼른 밥이나 먹어.”
그럼에도 연채린은 여전히 웃음을 띠고 있었다.
“분명 뭔가 있는데... 안 그러면 왜 말을 안 하겠어.”
유이영의 얼굴은 더 붉어졌고 머리를 거의 식탁에 파묻을 지경이었다.
연동욱는 늘 젊은이들의 일에 끼어들고 싶어 하지 않았기에 한 번 묻고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밥 먹던 서현주가 언제 연지훈의 심기를 건드렸는지 뜬금없이 불똥이 튀었다.
연지훈이 수저를 내려놓고 차분하게 말했다.
“이따 학교 데려다줄게.”
순간 연채린이 활짝 웃으며 답했다.
“좋아요.”
“너한테 말한 거 아니야. 넌 차 기사가 데려다줄 거야.”
연채린의 젓가락이 손에서 떨어질 뻔했다.
“그럼 누구를 학교에 데려다준다는 거예요?”
서현주는 죽을 한 입 떠먹었다.
“거절해도 되나요?”
연지훈이 답했다.
“그럴 자격 없어.”
그도 그럴 것이 연씨 저택이 산 중턱에 있어 버스 정류장과 거리가 꽤 멀었다. 서현주는 외출하려면 이 저택의 기사 차승빈에게 의지하는 수밖에 없었다.
지금 연지훈이 학교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하니 그녀 또한 거절할 수가 없었다.
차에 탄 그녀는 온몸이 불편했다.
연지훈의 옆에 앉아 방어적으로 책가방을 앞으로 안아서 꽉 움켜쥐었다.
연지훈은 금테 안경을 끼고 태블릿으로 업무 자료를 보고 있었다. 태블릿의 푸른빛이 얼굴에 비치자 턱선이 더 날카롭게 보였다.
연지훈은 묵묵히 서류만 검토했다.
가능하다면 서현주는 그가 한 길 내내 입을 다물길 바랐다.
불현듯 연지훈이 안경을 벗고 태블릿을 끄고서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내가 역겨워?”
제9화
서현주는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녀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아니요. 잘못 들은 거예요.”
이 남자가 어젯밤 일과 그녀가 했던 말까지 전부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유이영으로 착각한 게 아니라고?
연지훈은 불쑥 손을 뻗어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반항하는 그녀를 무시한 채 강제로 무릎 위에 앉혔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그녀의 책가방이 차 시트 아래로 떨어졌다.
서현주는 미친 듯이 연지훈의 어깨를 때렸다.
“지훈 씨 왜 이래요 정말? 미쳤어요?”
연지훈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고 운전석 시트에 밀어붙였다. 이어서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고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바보로 보여?”
서현주는 둘 사이에 팔을 뻗쳐서 거리를 유지했다.
“날 유이영으로 착각하는데 역겹다고 하는 게 뭐가 잘못됐어요? 진작 말했잖아요. 지훈 씨랑 거리 두겠다고. 자꾸 선 넘는 쪽은 지훈 씨에요. 그리고 약 탄 거! 누가 한 짓인지 제대로 조사했어요?”
그녀는 연지훈의 깔끔하게 재단된 옷깃을 움켜쥐었다. 차가운 눈동자에 눈물이 서서히 고였다.
“더는 날 억울하게 만들 생각 마.”
“더는?”
연지훈은 어두운 눈길로 그녀를 차분하게 바라보았다.
“내가 언제 너를 억울하게 했는데?”
곰곰이 되새겨보니 전생에 수없이 많았다.
그토록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던 서현주... 연지훈과 유이영은 반드시 마땅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문득 연지훈이 피식 웃으며 그녀의 턱을 잡았다.
“그리고 또 뭐? 거리를 두겠다고? 난 허락한 적 없는데.”
서현주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무슨 뜻이에요?”
연지훈의 목소리는 아주 담담했다.
“내가 모든 것을 제대로 조사할 때까지 도망갈 생각 마.”
“결국 지훈 씨는 유이영을 의심하지 못하는 거잖아요.”
서현주는 이 상황이 참 아이러니했다.
“일이 이미 명백해졌어요. 그 과일 주스 말고 다른 의심할 곳은 없어요.”
그녀는 연지훈을 향해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
“유이영도 손에 넣었잖아요. 안 그래요?”
연지훈의 눈빛이 더욱 서늘해졌다. 그는 모호하게 말했다.
“아니야, 그런 거.”
하지만 서현주는 그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나랑은 상관없어요.”
그녀는 연지훈을 세게 밀치고 다시 제자리에 돌아왔다. 시트 아래에 떨어진 책가방도 얼른 주워서 품에 안았다.
남은 길 동안 두 사람은 모두 조용했고 연지훈은 다시 태블릿을 집어 자료를 보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하자 서현주는 즉시 차에서 내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차 안에서 연지훈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유이영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
“지훈 씨, 좀 괜찮아졌어요?”
연지훈은 나직이 응했다.
잠시 후, 유이영은 수줍은 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훈 씨, 어젯밤에 왜 내 도움 거절했어요? 날 아끼는 건 알지만 그래도 난...”
“이영아.”
그가 덥석 말을 자르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생각은 하지 마.”
유이영은 입을 다물었다.
오랜 침묵 끝에 그녀가 물었다.
“지훈 씨, 오늘 왜 현주 씨를 학교에 데려다주는 거예요? 둘이 무슨 얘기 나눴어요?”
연지훈은 간결하게 대답했다.
“별 얘기 안 했어.”
유이영이 불쑥 질문을 내던졌다.
“약 탄 거 혹시 나 의심해요?”
한참 침묵이 흘렀다.
마침내 연지훈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그런 일 없으니까 걱정 마.”
유이영은 그제야 안심하는 미소를 지었다.
“알았어요.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연지훈은 알겠다며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는 학교 정문을 바라보았는데 서현주의 모습은 이미 인파들 속으로 사라졌다.
잘난 연채린 씨 덕분에 서현주는 학교에서 인기가 없었고 오히려 따돌림당하는 처지가 돼버렸다.
이곳은 사립학교라 다들 집에서 귀하게 자란 아이들이었다. 연씨 가문은 이 도시에서 서열 1위였고 자연스럽게 한 무리 학생들이 연채린의 뒤를 따랐다.
어쨌거나 그녀야말로 연씨 가문의 진정한 따님이니까.
교실에 막 들어서자 연채린의 따까리가 애매한 말투로 나불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냄새야? 왜 이렇게 구려? 대체 며칠을 안 씻은 거야? 어디 시궁창 가서 뒹굴다 온 거 아니야?”
주변 학생들이 왁자지껄 웃음을 터뜨렸고 조롱과 비웃음이 서현주에게로 향했다.
다만 서현주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지나치며 길을 막고 있던 어느 학생의 발을 ‘우연히’ 찼다. 그리고 태연하게 자리에 앉았다.
연채린은 서현주의 그런 모습에 더욱 짜증이 났다.
그녀는 거만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나 따까리들과 함께 서현주의 책상 앞으로 다가갔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책상을 발로 걷어찼다.
서현주는 재빨리 뒤로 물러서며 책상에 부딪히는 걸 면했다.
그녀는 싸늘한 시선으로 연채린에게 물었다.
“무슨 짓이야?”
연채린이 피식 웃었다.
“무슨 짓이냐니? 당연히 너 같은 뻔뻔한 인간을 까발리는 거지.”
그녀는 목소리를 높여 반 전체의 이목을 끌었다.
“다들 잘 들어. 서현주 얘 뻔뻔스럽게 우리 지훈 오빠한테 최음제 타서 관계를 가지려고 했어. 일개 고등학생이 이런 짓을 벌이는 게 말이 돼? 역겨워 진짜. 다행히 우리 오빠랑 오빠 여친이 똑똑해서 덫에 걸리지 않은 거야. 서현주 얘는 우리 오빠랑 오빠 여친 사이를 이간질하는 나쁜 년이야.”
순간 교실 안은 떠들썩했고 서현주를 바라보는 시선에는 놀라움과 분노가 뒤섞여 있었다. 결론은 모두가 쓰레기를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서현주는 연채린의 이런 비난을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녀는 연채린보다 키가 컸기에 고개를 숙이고 내려다보았다.
냉랭한 눈빛과 정색한 얼굴로 또박또박 말했다.
“첫째, 연지훈에게 약 탄 건 내가 아니야. 나 역시 피해자라고 볼 수 있어. 둘째, 연지훈 본인도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했는데 네가 무슨 자격으로 여기서 소문을 퍼뜨리는 거야? 셋째, 말끝마다 뻔뻔하다, 이간질한다고 하는데 너야말로 그게 고등학생다운 모습이니?”
연채린은 서현주의 반박에 할 말을 잃었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책가방을 들어서 바닥에 가차 없이 내던졌다. 맑은소리가 울려 퍼질 때, 서현주는 미처 반응할 겨를도 없었다.
잠시 후, 서현주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책가방을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떨리는 손으로 책가방 안감에서 품질이 별로인 옥고리 하나를 꺼냈다.
서현주는 옥고리와 붉은 끈을 손에 쥐고 두 손이 한없이 떨렸다.
옥고리가 부서진 것이다.
아빠가 남겨주신 옥고리가 부서지다니.
그녀는 머리가 백지장이 되었다.
주위에는 연채린과 친구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딱 봐도 싸구려 같은데 뭘 이렇게까지 안타까워하는 거야? 서현주 진짜 거지 맞나봐.”
“얘는 그냥 우리 집에서 키우는 개인데 스스로 인간이라고 여기나 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서현주는 연채린에게 달려들어 얼굴에 주먹을 한 대 날렸다.
연지훈과 유이영, 그리고 엄진경까지 빠르게 학교에 도착했다.
구경꾼들은 교장실 앞에 잔뜩 몰려서 머리를 들이밀고 안의 상황을 살피려 했다.
연채린은 너무 울어서 눈가가 빨갛게 충혈되었고 뺨에는 서현주가 남긴 붉은 자국들이 가득했다.
서현주는 교장 앞에 서서 옥고리를 꽉 쥐고 있었다.
연지훈과 유이영은 오자마자 연채린 곁으로 다가갔다.
유이영이 연채린의 얼굴을 안쓰럽게 바라보다가 매우 아낀다는 듯이 품에 끌어안았다.
“대체 어떻게 때렸길래...”
연지훈은 미간을 찌푸리며 날카로운 시선으로 고집스러운 서현주의 뒷모습을 째려봤다.
“서현주.”
차갑고 위엄이 넘치는 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린이한테 사과해.”
서현주는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연지훈이 오기 전에 담임 선생님이 그에게 일부 내용을 과장되게 전달했고 연채린에게 불리한 내용은 많이 삭제했을 터였다.
어쨌든 그녀를 용서받지 못할 악인으로 묘사한 게 틀림없었다.
서현주는 허리를 곧게 폈다.
“싫어요. 난 잘못한 거 없어요.”
담임 선생님이 차갑게 말했다.
“대표님, 저희는 더이상 현주 가르칠 수 없을 것 같아요. 그 많은 학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감히 채린이한테 손을 대다니...”
연지훈의 말투가 더욱 심각해졌다.
“서현주, 대체 언제까지 소란 피울 거야?”
제10화
서현주는 손안의 옥고리를 들어 연지훈에게 내밀었다.
“이 옥고리 연채린이 부순 거예요.”
담임 선생님은 옥고리를 흘긋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채린이가 얼마나 착한 애인데 어떻게 일부러 네 옥고리를 부쉈겠어? 학교에서 감히 채린이한테 누명 씌우지 마. 오히려 너야말로 앞뒤 안 가리고 주먹을 휘둘렀잖아. 진짜 언제 정신 차릴는지, 쯧쯧!”
얼마나 우스꽝스러운가.
연채린이 그녀의 옥고리를 부순 것은 고의가 아니고, 그녀가 연채린을 때린 것은 품행이 불량하고, 고의적이라고 한다.
이때 유이영이 그 옥고리를 보더니 부드럽게 말했다.
“이거 그다지 비싸 보이지도 않는데, 그렇게 아쉬우면 내가 하나 사줄게요. 이런 일로 굳이 화낼 필요는 없잖아요. 게다가 채린 씨한테 품질 좋은 옥이 차 넘칠 텐데 뭣 하러 현주 씨 옥고리를 부쉈겠어요. 현주 씨가 우리 채린이 오해했네요.”
그녀는 빙빙 돌려 말하면서 착한 사람 코스프레만 했다.
하지만 상황파악이 되는 사람이라면 유이영이 지금 얼마나 대놓고 야유를 날리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연채린은 연씨 가문의 따님이라 이딴 싸구려 옥을 거들떠보지도 않을 것이고 오히려 서현주만 하찮은 옥을 보물처럼 여기고 있다는 뜻이다.
모두가 그렇게 여기는 눈치였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웃음을 터트렸으니까.
서현주는 연지훈을 바라봤는데 이 남자가 한창 짙은 눈길로 그녀를 마주 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진술에 대해 그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건 아마도 묵인이겠지.
서현주는 마음속으로 아이러니하고도 씁쓸했다.
이곳은 모두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뿐이니 어찌 그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때 교장이 다가와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현주야, 이번 일은 네가 먼저 손댔으니 채린이한테 제대로 사과하렴.”
교장의 태도는 확고했다.
서현주가 연씨 가문에서 입양한 딸이지만 이 집안에서 중히 여기는 건 사실상 연채린이었다.
그렇다면 연씨 가문 사람들 앞에서 진실은 더 이상 중요치가 않다.
서현주는 반드시 사과해야 한다.
엄진경도 가슴을 두드리며 탄식했다.
“현주 너 대체 무슨 배짱으로 채린 씨를 때린 거야? 당장 사과 못 할까!”
연지훈이 최후통첩을 날렸다.
“사과해, 서현주.”
그의 눈동자가 한없이 어둡고 싸늘했다.
“사과 안 하면 우리 집으로 돌아올 필요도 없어.”
장내가 술렁거렸다.
이 말인즉슨 서현주를 연씨 가문에서 내쫓겠다는 건데!
한편 서현주는 모두의 말을 무시한 채 묵묵히 손에 쥔 옥고리만 쳐다봤다. 다 부서진 그 옥고리를...
“당신들은 당연히 이해 못 하겠죠. 다들 돈 많은 사람이라 이보다 좋은 옥고리는 얼마든지 살 수 있겠죠! 하지만 이건 달라요. 이건 우리 아빠가 1년 동안 돈을 모아서 산 거예요. 아빠가 죽기 전에 나한테 준 선물이라고요. 나한텐 남은 건 이것뿐이에요...”
엄진경의 분노에 찬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그녀는 문득 어쩔 바를 몰랐다.
“현주야, 왜 진작 말하지 않았어?”
연지훈의 표정과 다른 사람들 표정은 모두 똑같았다.
서현주는 거들떠보고 싶지도 않았고 신경조차 안 썼다.
그녀는 수중의 옥고리를 꽉 잡고 교장을 올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난 사과 안 해요. 잘못한 거 없으니까! 교실에 CCTV가 있는 거로 아는데 그거 돌려보면 다들 진실을 알게 될 거예요.”
교장도 약간 망설였다.
연채린은 눈동자가 파르르 떨리더니 재빨리 유이영의 품에 안겨 울먹이는 조로 말했다.
“어떻게 이래요? 난 현주한테 맞아서 이 지경이 됐는데, 고작 사과 한번 받기가 이렇게 어려운 건가요? 이영 언니, 나 너무 아파요. 온몸이 쑤셔요.”
유이영은 그녀의 어깨를 다독이며 측은한 눈빛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연지훈이 하려던 말을 머뭇거릴 때, 유이영이 부드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지훈 씨.”
연채린의 속상한 표정을 본 교장은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CCTV를 왜 조사해? 채린이 몸에 난 상처만 봐도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 수 있잖아. 대체 언제까지 변명할 거니?”
구경에 나선 학생들도 한마디씩 끼어들었다.
“다들 봤잖아. 채린이는 그냥 현주랑 좋게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인데 현주가 미친 듯이 공격했어. 누가 와도 말릴 수 없을 정도였다고.”
“그래. 서현주 원래 이렇게 비열한 애였잖아. 어디서 아닌 척은!”
유이영은 곤란하다는 듯 입술을 꼭 다물고 연채린의 어깨를 두드렸다.
“현주야, 우린 그냥 네가 사과해주면 돼.”
엄진경은 이리저리 둘러보며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그때 연지훈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지는 것을 보고 그녀의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그녀는 즉시 서현주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현주야, 빨리 사과해. 어서! 이러다 정말로 화나게 해서 쫓겨나야 만족하겠어? 고작 옥고리잖아. 엄마가 나중에 사줄게. 제발 좀 사과하라고!”
서현주는 깊은숨을 들이쉬고 엄마의 손을 뿌리치더니 돌아서서 연지훈을 빤히 쳐다봤다.
다시 돌아온 인생, 그녀는 누군가가 자신에게 더러운 누명을 뒤집어씌우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CCTV 한번 확인하자는 게 그렇게 어려워요? 난 그저 사건의 전말을 밝히고 싶을 뿐인데 연채린은 과연 무슨 의도로 CCTV 확인하는 걸 막고 있죠? 왜 못 보게 해요? 대체 뭐가 찔려서?”
연지훈의 눈빛은 날카롭고 차가웠다. 서늘한 눈가에 무거운 압력이 담겨 있었다.
한편 서현주는 계속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지훈 씨, 난 그저 CCTV를 보고 싶을 뿐이에요. CCTV를 보고 나서도 만약 다들 여전히 내 잘못이라고 확신한다면 그땐 나도 할 말 없어요.”
그녀가 야유 섞인 미소를 날렸다.
“하지만 CCTV도 확인 안 하고 무작정 내 입만 막으려 한다면...”
말 속에 담긴 조롱이 너무 선명했다. 연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전생에도 이런 식이었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연지훈은 그녀가 잘못했다고 단정하고 사랑하는 유이영만 일방적으로 편들어줬다.
또한 서현주를 별장 창고에 가둬 넣고 한 달 동안 하루에 한 끼만 먹였다.
별장의 가정부들은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비겁한 인간들이라 때로는 상한 음식까지 가져다주었다. 그런 날엔 서현주는 꼬박 하루를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했다.
창고의 창문이 굳게 닫혀 있어서 햇빛을 볼 수가 없었다. 서현주는 열이 심하게 올랐고 낮과 밤을 구분하지 못한 채 머리가 어지러워 때론 기절하고 때론 정신을 차리기를 반복했다.
울면서 밖의 사람들에게 애원했지만 연지훈의 수행비서에게서 돌아오는 것은 차가운 대답뿐이었다.
“계속 소란 피우면 더 오래 가둬둘 겁니다.”
한 달 후, 창고에서 나왔을 때 그녀는 뼈만 남아 곧바로 병원에 실려 갔다.
의사의 적시 치료가 없었더라면 그녀는 아마 고열로 잘못됐을지도 모른다.
다시 사는 인생, 서현주는 두 번 다시 그런 비극을 용납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