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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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끝자락에서 깨달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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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생활 6년 동안 그들 사이에 사랑은 없었다. 주민혁을 사랑했던 최수빈은 한때 그를 위해 기꺼이 헌신했다. 최수빈의 친딸은 주민혁을 아빠라고 부...

Chương (1)

第1章

결혼 생활 6년 동안 그들 사이에 사랑은 없었다. 주민혁을 사랑했던 최수빈은 한때 그를 위해 기꺼이 헌신했다. 최수빈의 친딸은 주민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없었으나 주민혁의 첫사랑인 박하린의 아들은 주민혁의 다리 위에 앉아 그에게 안긴 채로 그를 아빠라고 불렀다. 주씨 가문 사람들은 양아들 주시후를 귀한 후계자로 여기며 그를 끔찍이 아끼면서 정작 주민혁의 친딸인 주예린은 냉대했다. 그러다 최수빈과 주예린은 죽게 되었고 주민혁은 딸과 아내의 화장 동의서에 직접 사인한 뒤 아들을 데리고 박하린의 귀국 축하 파티에 참석했다. 최수빈은 그제야 본인이 아무리 헌신해도 주민혁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는 걸 뼈저리게 깨닫게 되었다. 매정한 주민혁에게는 마음이라는 게 존재하지 않았다.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최수빈은 굴욕과 수모만이 존재하는 결혼 생활을 끝내려고 했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한심하게도 학업을 포기하고 가정주부가 되어 가정을 위해 헌신했다. 이번 생에 그녀는 주민혁에게 주저 없이 이혼 합의서를 건넨 뒤 딸을 데리고 진흙탕 같은 삶을 벗어나 커리어를 쌓으며 새로운 삶을 꾸려가려고 했다. 최수빈이 떠난 지 일주일째, 주민혁은 최수빈이 심술을 부린다고 생각했다. 최수빈이 떠난 지 한 달째, 주민혁은 그녀가 뭘 하든 신경 쓰지 않았다. 최수빈이 떠나고 한참이 지난 뒤, 주민혁은 업계 최정상 엘리트 모임에서 그녀를 보았다. 최수빈은 커리어에만 집중했고 주예린은 새로운 아빠를 찾는 데 열중했다. 최수빈과 주예린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에 주민혁은 결국 이성을 잃고 말았다. 늘 냉정하고 오만하던 그가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모녀를 붙잡고 애원했다. “수빈아, 내가 이렇게 무릎 꿇을게. 그러니까 다시 날 사랑해 주면 안 돼?” 제1화 “최수빈 씨, 죄송합니다. 최수빈 씨 따님은 2월 15일 새벽 1시 13분에 사망하셨습니다.” 최수빈은 토끼 인형을 손에 쥔 채 무감한 표정으로 수술실을 바라보았다. 이제 그만 딸을 보내줘야 했다. 최수빈은 수술 침대 위에 누워 있는 딸의 작은 손을 그러쥐었다.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차가운 손이었다. 딸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던 최수빈은 응급실로 실려 가기 전 딸이 힘없는 목소리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엄마, 아저씨 아직도 안 왔어요?” 주예린이 말한 아저씨는 주예린의 생부 주민혁이었다. 주민혁은 주예린에게 아빠라고 부르지 못하게 했으면서 정작 그의 첫사랑인 박하린의 아들에게는 자신을 아빠라고 부르게 했다. 주예린의 생일 소원은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내는 것, 그리고 주민혁을 아빠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면역력이 약한 주예린은 지난해 겨울 찬바람 속에서 주민혁이 집으로 돌아와 밥을 먹기를 기다리다가 독감에 걸려 폐렴까지 앓게 되었다. 그러다 올해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해 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해 있었다. 오늘도 혹독히 추운 날이었다. 주예린은 또다시 최수빈 몰래 밖으로 나가 주민혁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최수빈은 주예린이 정신을 잃은 걸 뒤늦게 발견하고는 곧장 병원으로 달려갔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최수빈은 주민혁에게 연락해 딸의 생일날만이라도 함께 있어달라고 애원했다. 그러나 주민혁은 또 한 번 약속을 저버렸다. 최수빈은 딸의 작고 야윈 몸을 끌어안은 채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딸... 이젠 아프지 않겠네.” 이제 더는 병마에 시달릴 필요도 없고, 아빠에게 미움받거나 영원히 받지 못할 아빠의 사랑을 갈망할 필요도 없었다. “엄마, 아저씨는 왜 아빠라고 부르게 못 하는 거예요? 저랑 다르게 오빠는 아빠라고 부를 수 있잖아요...” “엄마, 하린 이모가 오빠를 좋아해서 아빠도 오빠를 좋아하는 거예요?” 딸의 천진난만한 질문이 아직도 최수빈의 귓가를 맴돌았다. 너무 어렸던 주예린은 아빠가 왜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지, 왜 아빠를 아빠라고 부를 수 없는지 몰랐다. 단순했던 주예린은 본인이 오빠만큼 잘나지 않아서 아빠가 자신을 싫어하는 거라고 생각했다. 6년 전, 최수빈은 주민혁과 얼떨결에 관계를 가졌다가 임신하게 되어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 주예린을 낳을 때 최수빈은 난산으로 인해 과다 출혈까지 했지만 주민혁은 그녀에게 관심조차 주지 않았다. 그날 주민혁은 그녀와 똑같은 날 출산하는 박하린의 곁을 지켰다. 그 점만 보아도 주민혁이 누구를 더 소중히 여기는지 쉽게 알 수 있었다. 박하린은 아들을 낳은 뒤 주민혁에게 아이를 맡기고 해외로 출국하여 자취를 감추었다. 주민혁을 오랫동안 짝사랑한 최수빈은 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박하린의 아이를 데려와 친아들처럼 살뜰히 키웠다. 주민혁은 딸은 아빠라고 부르지도 못하게 했으면서 박하린의 아들은 끔찍이 여겼다. 차별 대우였다. 난산이었을 때 깨달아야 했다. 주민혁은 평생 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말이다. 심지어 주예린이 오전에 먼저 태어났는데도 주민혁은 아들을 첫째로 정해서 주씨 가문의 장손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다들 주예린을 사생아라고 생각했다. 의사는 최수빈의 뒤에 서서 애처롭게 떨고 있는 그녀의 뒷모습을 무거운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아이 아빠는 아직 안 왔나요?” 주예린이 입원하고 나서 지금까지 의사는 단 한 번도 주예린의 아빠를 본 적이 없었다. 최수빈은 차가운 눈빛을 해 보이며 자조하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이 아빠는 본인의 사생아와 함께 아이 엄마를 보러 갔어요. 그 아이의 생일을 함께 축하해 주겠다면서요.” 매년 그랬다. 그런데 최수빈은 멍청하게도 4년 동안 남의 아이를 정성을 다해 키웠다. 두 아이는 생일이 같은데 오직 주예린만이 냉대를 받았다. 의사는 당황했다. 그는 눈앞의 가련한 여자를 어떻게 위로해 줘야 할지 몰랐다. ... 주예린이 세상을 떠난 날, 최수빈은 주예린을 위해 모든 걸 정리했다. 은산시에서 화장을 하기 위해서는 부모 양쪽의 사인이 필요했고, 최수빈은 해운 별장으로 돌아가 주예린의 유품들을 정리했다. 이때 아래층에서 엔진 소리가 들려왔다. “아빠, 언제 엄마를 버리고 하린 이모랑 결혼할 거예요? 저는 하린 이모가 제 엄마가 됐으면 좋겠어요!” 주민혁은 겉옷을 팔뚝에 걸치더니 허리를 숙이며 아이의 뺨을 꼬집었다. “시후야, 너는 하린 이모를 엄마라고 불러도 돼.” 위층에 있던 최수빈은 그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그녀는 가슴이 저려 눈을 감으면서 심호흡했다. “가서 엄마한테 씻겨달라고 해. 그리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에 하린 이모 마중 나가자.” 주시후는 기뻐서 방방 뛰었다. “좋아요!”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주시후는 울상을 하며 말했다. “하지만... 만약 엄마가 이 사실을 알고 가지 못하게 하면 어떡해요? 엄마 진짜 싫어요. 바깥 음식들을 못 먹게 하잖아요!” 주민혁은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그의 편을 들어주었다. “걱정하지 마. 아빠가 뭐라고 하면 엄마는 아무 말도 못 해.” 시선을 드는 순간, 주민혁은 아래층으로 내려오는 최수빈과 눈이 마주쳤다. 주시후는 달려가서 최수빈의 손을 잡아당겼다. “엄마, 저 씻겨주세요. 저 이따가 나갈 거예요.” 최수빈은 손을 빼낸 뒤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주민혁 씨, 뭐 잊은 것 없어요?” 주민혁은 덤덤한 눈길로 최수빈을 힐끗 보았다. “뭐?” 그동안 주민혁은 늘 최수빈과 주예린에게 쌀쌀맞게 굴었다. 최수빈은 자조하듯 피식 웃었다. 주민혁이 주예린과 주시후의 생일이 같다는 걸 기억할 리가 없었다. 매년 주시후의 생일 때마다 그는 주시후를 데리고 박하린을 만나러 가서 주시후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반대로 주예린은 매년 생일 때마다 찬바람 속에서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주민혁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나 할 말 있어요.” 주민혁은 코웃음을 쳤다. “오늘 시간 없어.” “얼마 걸리지 않을 거예요.” 최수빈이 말했다. “여기 두 서류에 사인만 해주면 돼요.” 최수빈은 서류를 들고 사인해야 할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주민혁은 언짢은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있는 매 순간이 짜증 난다는 듯이 말이다.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린 채로 대충 사인한 뒤 그녀에게 서류를 건넸다. “오늘 나랑 시후는 집에 돌아오지 않을 거야. 내일 아침에 예린이에게 시후 대신 선생님께 얘기 전하라고 해. 시후는 오전 수업을 듣지 못한다고 말이야.” 최수빈은 이를 악물고 서류를 꽉 쥐었다. 힘을 너무 많이 주어서 관절 쪽이 창백해질 정도였다. 주민혁이 조금이라도 서류 내용에 신경을 썼다면 그 서류 중 하나는 이혼 합의서이고 다른 하나는 주예린의 화장 동의서라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주민혁은 서류에 사인할 때마저 무심했다. “그리고 예린이에게 나한테 전화하지 말라고 해.” 최수빈은 차갑게 웃었다. 주예린은 그에게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이젠 그럴 수가 없게 되었으니 말이다. 주민혁은 평소와 다른 주예린의 모습을 보고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시간이 넉넉지 않은 것인지 박하린 쪽에서 그들에게 연락하여 언제 오냐고 물었다. 주시후는 샤워도 못하고 옷도 갈아입지 못한 채 주민혁을 따라 밖으로 나가면서 말했다. “저 오늘 밤에는 새엄마한테 씻겨달라고 할 거예요.” 주민혁은 애정 가득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래.” 최수빈은 그 자리에 서서 그들의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그녀는 집에 있던 자신과 주예린의 소지품들을 전부 정리해서 불태웠다. 그리고 주예린의 시신을 화장하러 화장터로 향했다. 유골을 받았을 때 최수빈은 끝내 눈물을 참지 못했다. “예린아, 조금만 기다려. 엄마도 곧 갈게...” ... 다른 한편, 주민혁은 주시후를 데리고 박하린의 귀국 축하 파티에 참석했다. 세 사람은 마치 진짜 가족처럼 화기애애했다. 다들 그들의 사이가 좋아 보인다면서 최수빈이 염치없이 주민혁의 아내 자리를 꿰차고 있으면서 방해꾼 노릇을 한다고 나무랐다. 이때 누군가 사람들 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주민혁의 앞에 섰다. “대표님, 사모님과 따님이 오늘 화장될 겁니다. 화장터로 가서 유골을 챙기셔야 합니다.” 주민혁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냉담하게 말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사람이 질투 때문에 이런 유치한 짓을 벌여?” “하지만 화장 동의서에 사인한 것은 대표님이십니다. 그리고 이혼 합의서에도 사인을 하셨으니...” 주민혁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뭐라고?” 주민혁은 미친 듯이 달려 화장터에 도착했고 아내와 딸이 화장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짧은 순간이었으나 주민혁은 심장 한 군데가 찢기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화장터 직원은 털썩 소리를 내며 주저앉은 주민혁을 보았다. 제2화 탁— 발치에 폭신한 무언가 떨어지는 순간, 최수빈은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렸다.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숙여 보니 푸른 크림이 덕지덕지 발린 케이크가 보였다. “엄마, 엄마가 만들어준 생일 케이크 싫다니까요!” 주시후의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고개를 들어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못생기고 맛도 없다고요. 제 말 못 알아듣겠어요?” ‘이건...’ 최수빈은 헛숨을 들이켰다. ‘설마,다시...? 내가 정말 돌아온 거야?’ 그녀는 1년 전 주시후의 생일 파티 때로 돌아왔다. 주시후는 여전히 투덜거렸다. “저는 하린 이모가 만들어준 케이크를 먹을래요!” “엄마, 예린이는 엄마가 해준 케이크가 맛있어요. 시후가 안 먹으면 예린이 혼자 먹을게요.” 딸의 앳된 목소리를 다시 듣는 순간, 최수빈은 고개를 숙여 아이의 야윈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차오른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릿해졌다. 최수빈은 쭈그리고 앉아 딸의 작은 얼굴을 조심스럽게 받쳐 들었다. 따뜻한 온기가 전해지자 그제야 자신이 1년 전으로 돌아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이번 생에는 절대 딸이 그 어떤 상처도 받지 않게 할 것이다. 주예린은 주시후를 바라보았다. “엄마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엄마가 앞으로는 네게 케이크를 해주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무섭지 않아?” “먹으려면 너 혼자 먹어. 난 그딴 거 싫어.” 주시후는 상관없다는 듯이 말한 뒤 박하린의 손을 잡았다. “난 하린 이모가 내 엄마가 되게 할 거야. 하린 이모는 나한테 맛있는 것도 많이 해주고 승마랑 암벽등반도 같이 해줬어. 하지만 엄마는 기마술이 뭔지도 몰라. 정말 창피해. 그리고 아빠도 하린 이모를 좋아하고 나도 하린 이모를 좋아해!”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가죽 재킷을 입은 박하린은 당당하게 웃었다. 그녀는 아주 친한 친구처럼 왼손으로 주민혁의 어깨를 감싸면서 다른 손으로는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네 아빠의 아내가 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야. 나랑 네 아빠는 생사를 함께한 적이 있는 친구야. 그리고 시후야, 이모가 말했잖아. 엄마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된다고. 이제 이모 말을 안 듣는 거야?” 주시후는 입을 비죽이면서 박하린 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최수빈이 준 생일 선물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하지만 엄마는 저한테 이렇게 값싼 만년필을 생일 선물로 준걸요. 심지어 장난감은 안 사줬어요. 반대로 하린 이모는 제게 직접 만든 비행기 모형을 선물로 줬어요. 심지어 그건 진짜 날 수도 있잖아요. 엄마가 준 생일 선물보다 훨씬 더 멋지다고요!” 주민혁이 그랬다. 앞으로 박하린은 비행기를 설계할 거라고, 그리고 앞으로 박하린이 설계한 비행기에 탈 수도 있을 거라고 말이다. 너무 멋졌다. 반대로 최수빈은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촌스러운 사람이었다. 최수빈은 자신이 키운 아이가 박하린의 편을 드는 것을 보니 웃음이 나올 것만 같았다. 왜 예전에는 이런 것들을 인지하지 못했던 걸까? 주시후는 박하린의 친아들이기 때문에 박하린과 가까이 지내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시후가 박하린이 자신의 친모라는 걸 모른다고 해도 말이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주민혁의 환심을 사려고 주시후를 친아들처럼 여겼다. 그리고 모두가 그걸 당연하게 여겼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주예린과 함께 그런 수모를 견딜 생각이 없었다. 최수빈은 바닥에 떨어진 만년필을 주었다. 엷은 미소를 짓는 그녀의 얼굴에서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린 씨는 아이들과 정말 잘 놀아주네요. 그러면 앞으로 시후와 주민혁 씨는 하린 씨에게 부탁할게요.” 박하린은 당황했다. 그녀는 최수빈이 그렇게 말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한 눈치였다. 최수빈은 화를 내지도, 그녀와 싸우지도 않았다. 그리고 비굴하지도, 나약하지도 않았다. 최수빈은 그저 한없이 평온한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박하린은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민혁 오빠, 내 말 때문에 언니가 오해한 건 아닐까? 난 아무 말도 안 할게.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 주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면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나이도 많으면서 왜 아이처럼 유치하게 굴어? 그런 말 함부로 하는 거 아니야.” 주민혁은 티가 나게 박하린을 감싸고 들었다. 그는 최수빈이 자신의 체면을 고려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최수빈은 주민혁의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한결같이 매정하고 쌀쌀맞았으며, 이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티 나게 박하린의 편을 들어주며 최수빈에게 망신을 주었다. 그가 그럴 수 있는 이유는 최수빈이 자신을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걸 확신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모든 걸 당연하게 생각했다. 이번 생의 최수빈은 지난 생처럼 딸이 아빠와 함께 생일을 보낼 수 있게 해주려고 수모를 견디면서 억지웃음을 지어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생일 파티에 끝까지 남아있지도 않을 것이다. 새로운 삶을 누리게 되었는데 지난 생처럼 똑같이 멍청한 짓을 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딸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고 싶었고 다른 사람들이 갖고 있는 건 주예린에게도 똑같이 해주고 싶었다. 최수빈은 무심하게 시선을 옮긴 뒤 딸의 손을 잡았다. “예린아, 가자. 엄마랑 같이 생일 파티 하러.” 이번 생에 최수빈은 주예린이 다른 사람들에게 경멸당하거나 괴롭힘당하는 걸 절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주예린은 주민혁을 힐끗 보더니 결국 엄마의 손을 잡고 자리를 뜨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몇 걸음 걷지 않았는데 직원이 그들을 막았다. “대표님께서 주시후 도련님의 생일 파티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자리를 뜰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최수빈은 가라앉은 기분으로 자신을 막아선 직원을 바라보았다. 주민혁이 주시후를 얼마나 끔찍이 여겼으면 다들 주시후가 주민혁의 친아들이고 주예린은 사생아라고 여겼다. 주시후의 생일에 주민혁은 다른 사람들이 파티장을 먼저 떠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주민혁은 오늘이 주예린의 생일날이기도 하다는 걸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가 과연 기억할까? 주예린을 낳을 때 최수빈은 난산으로 주예린과 함께 저세상으로 갈 뻔했는데 당시 주민혁은 박하린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는 박하린에게 다른 가족이 없어서 자신이 챙겨줘야 한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댔고 박하린은 아이를 낳자마자 자신의 커리어를 위해 해외 연수를 떠났다. 금융공학과 항공우주공학 석사 복수 학위를 취득하고 귀국한 박하린에게 수많은 기업들이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박하린은 그중 마음에 드는 곳이 없었는지 은산시의 항공기 연구원인 511 연구원의 항공기 설계에 참여하고 싶어 했다. 511 연구원은 채용 기준이 상당히 엄격했기에 주민혁은 박하린이 511 연구원에 들어갈 수 있게끔 힘을 썼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그러한 것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는 오로지 주민혁에게만 신경을 썼기에 박하린의 커리어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렇게 최수빈은 한심하게도 5년간 박하린을 대신하여 아이를 키웠고, 아이와 남편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포기하면서까지 조강지처로 살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멍청했다. 최수빈은 입꼬리를 올리며 차갑게 웃었다. “주 대표님의 명령이 있다고 해서 제 자유를 제한하면 되죠.” 예전에 최수빈은 주민혁을 깊이 사랑했기에 기꺼이 주민혁의 아내로 살았다. 그러나 새로운 삶을 얻게 된 지금 그녀는 더 이상 주민혁 곁의 별 볼 일 없는 비서로 살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원래 업계로 돌아가 딸을 데리고 멋지게 살 것이다. 주민혁의 안색이 눈에 띄게 어두워졌고 그의 기운 또한 차가워졌다. 최수빈은 속으로 냉소를 흘렸다. 아마 주민혁도 의아할 것이다. 늘 자신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던 순종적인 아내가 갑자기 사람들 앞에서 그의 말을 거역하니 말이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정상이었다. 그러나 최수빈은 더 이상 늘 당연하다는 듯이 희생을 감수하는 아내가 되지 않을 것이다. 이내 최수빈은 결혼반지를 빼서 바닥에 내팽개쳤고 결혼반지는 매끄러운 바닥에서 몇 번 튀어 올랐다. 금속이 부딪치는 소리에 근처에 있던 사람들 모두 헛숨을 들이켰다. “주민혁 씨, 우리 이혼해요. 시후는 당신이 키우고 예린이는 내가 키울게요. 그리고 이혼 합의서는 내일 아침 당신 사무실로 보낼게요.” 주시후와 박하린이 그렇게 좋다면 이번 생에는 세 사람이 함께 살 수 있도록 그들의 인생에서 빠져줄 것이다. 최수빈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일을 벌이자 주민혁은 난감해졌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최수빈을 응시했다. “최수빈, 언제까지 이렇게 심술부릴 거야? 예린이는 아직 어려. 이렇게 사소한 일로 이혼한다는 게 말이 돼?” 최수빈을 사랑하지 않는 주민혁에게 있어 최수빈의 모든 행동은 심술을 부리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최수빈은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딸과 함께 매정한 주민혁의 언행에 상처받으며 살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양아들인 주시후를 키우고 싶지도 않았다. 주민혁과 주시후 둘 다 버릴 것이다. “네.” 최수빈은 싸늘한 눈빛으로 경호원을 바라보았다. “비켜요.” 상황을 파악한 경호원은 당황스러워하며 길을 내주었다. 그는 더 이상 최수빈을 막지 않았다. 최수빈이 주예린의 손을 잡고 미련 없이 떠나는 뒷모습을 본 주민혁은 안색이 매우 나빴다. “언니 혹시 우리 사이를 오해한 건 아닐까?” 박하린이 말했다. “내가 해명할게. 오늘 일 쉽게 생각하지 마. 여자는 화가 나면 정말 가차 없어지니까.” 박하린은 그렇게 말하더니 초조한 얼굴로 최수빈을 붙잡으려고 했다. “해명할 필요 없어.” 주민혁이 차갑게 입을 열었다. “최수빈이 나랑 이혼할 리가 없으니까.” 제3화 저녁이 되고 생일 파티가 끝났다. 주시후는 차 안에서 기분이 좋아 가만히 있지 못했다. 오늘 저녁에는 엄마가 없어서 그의 일에 간섭할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생일 파티 때 먹고 싶은 것도 마음껏 먹을 수 있었고 그를 예뻐해 주는 박하린도 있었다. 주시후는 박하린이 최수빈보다 훨씬 좋았다. 별장 앞에 차가 멈춰 서자 주시후는 입을 비죽이며 미련 가득한 얼굴로 주민혁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주시후는 매번 놀러 나가면 집으로 돌아오기가 싫었다. 집에 엄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하린은 주시후에게 엄마의 모든 성과를 존중해줘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주시후는 박하린의 말을 잘 들으면 다음번에 더 많은 흥미로운 것들을 놀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주민혁도 주시후에게 최수빈의 말을 듣지 않으면 다음번에 박하린과 함께 놀지 못하게 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주시후는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집에 돌아왔다. “아빠, 저 내일도 하린 이모랑 같이 놀고 싶어요. 하린 이모한테 출국하지 말라고 하면 안 돼요? 그러면 앞으로 엄마도 제 일에 간섭하지 않을 테니까요.” 주민혁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하린이는 이제 곧 해외로 떠날 거야. 그리고 다음에 돌아오면 떠나지 않고 너랑 같이 있을 거야.” 주민혁과 최수빈은 결혼한 지 6년이 되었다. 그동안 최수빈은 주민혁의 환심을 사려고 노력했고 그의 말이라면 늘 고분고분 따랐다. 그러나 최수빈이 뭔가 요구하는 게 있다면 주민혁은 대부분 거절했다. 반대로 박하린이 뭔가를 요구한다면 최대한 다 들어주었다. 주시후 또한 주민혁과 박하린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는 걸 알았기에 주민혁의 말을 듣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주시후는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신난 목소리로 외쳤다. “엄마, 저 씻겨주세요. 저 우유 목욕할 거예요!” 오늘 박하린은 주시후의 몸에서 우유 향이 난다면서, 주민혁의 어릴 때 향기와 비슷하다면서 칭찬했다. 이때 가정부 장수미가 그들을 맞이하며 말했다. “도련님, 오늘 밤에는 사모님이 집에 안 계셔서 제가 대신 씻겨드려도 될까요?” 주민혁은 무심하게 물었다. “수빈이 어디 갔어요?” “모르겠어요. 오늘 사모님과 아가씨 모두 돌아오시지 않았어요.” 장수미는 서류봉투를 꺼내며 말했다. “사모님께서 대표님께 이걸 전달하라고 하셨어요.” 시선을 내려뜨린 주민혁은 서류봉투를 건네받더니 그것을 테이블 위에 던져두고 주시후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주머니한테 씻겨달라고 해.” 주시후는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엄마랑 예린이 모두 집에 없으니까 앞으로 장난감 방은 제 거네요!” 주민혁은 싱긋 웃으면서 주시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다 네 거야.” “주예린이 선물로 준 블록이랑 장난감은 앞으로 가지고 놀지 않을래요. 재미없어요. 저는 하린 이모가 선물로 준 장난감들을 전부 장난감 방으로 가져갈 거예요. 그리고 주예린이 놀지 못하게 할 거예요!” 주예린이 박하린을 좋아하지 않고 최수빈만 좋아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촌스러운 최수빈이 뭐가 좋단 말인가? “아빠, 엄마 집에 없는데 하린 이모한테 저랑 같이 자달라고 해주면 안 돼요?” “안 돼.” 주민혁이 말했다. “하린 이모는 아주 바빠.” 주시후는 입을 비죽거리다가 씻으러 위층으로 올라갔다. 장수미는 위층으로 올라가다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대표님, 사모님께서 본인의 짐과 아가씨의 짐을 챙겨서 떠나신 것 같았어요. 친정으로 돌아가신 것 같아요...” 주민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전혀 관심이 없는 태도였다. 최씨 가문은 최수빈에게 별로 좋은 곳이 아니었기에 최수빈은 주씨 가문을 제외하면 갈 곳이 없었다. 최수빈은 그동안 늘 너그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고 주시후가 박하린과 만나는 것을 반대한 적도 없었다. 오늘은 잠시 기분이 상해서 투정을 부린 것뿐이니 시간이 흘러 화가 풀린다면 다시 돌아올 것이다. 예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주민혁은 소파에 앉아 업무 메일을 하나 처리한 뒤 위층으로 올라가서 씻으려다가 조금 전 테이블 위에 던져두었던 서류봉투에 시선이 닿았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서류봉투를 열어 보았고 그 순간 이혼 합의서라는 다섯 글자가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주민혁은 덤덤한 얼굴로 조항들을 살펴보았다. 최수빈이 원하는 건 10억과 주예린의 양육권뿐이었다. 주민혁은 같잖다는 듯이 코웃음을 치면서 서류를 쓰레기통 안에 넣었다. 최수빈은 화가 풀리면 다시 그의 곁으로 돌아올 것이다. ... 최수빈은 짐을 챙겨 주예린을 데리고 호텔로 향했다. 그녀는 당분간 딸과 함께 호텔에서 머무를 생각이었다. “예린아, 엄마랑 같이 밖에서 지내는 거 괜찮아?” 주예린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다. 최수빈은 쭈그리고 앉아서 말했다. “우리 예린이, 아빠랑 오빠랑 떨어져 있는 게 싫은 거지?” 주예린은 주민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기를, 오빠와 함께 놀 수 있기를 바랐다. 예전에 최수빈은 주시후와 주민혁이 식사하러 집으로 돌아올 때까지 그들을 기다렸다. 그러다 음식이 다 식은 뒤에도 그들이 돌아오지 않아 주예린을 부르면 주예린은 몇 젓가락만 먹고는 배부르다고 했다. 주예린은 배가 고프면서도 늘 주민혁과 주시후를 기다리려고 했다. 그게 습관이 되다 보니 한창 클 때인데도 불구하고 주예린은 점점 야위어 가면서 건강도 나빠졌다. 최수빈은 처음엔 주예린이 어려서 밥을 많이 먹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다 뒤늦게 주예린이 사실은 주민혁, 주시후와 함께 밥을 먹고 싶어서 그랬던 것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주예린은 시선을 들고 맑은 눈으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엄마, 아저씨는 저를 좋아하지 않는 거죠? 그래서 엄마도 좋아하지 않는 거겠죠...” 주예린의 말을 듣는 순간 최수빈은 마음이 난도질당한 것처럼 괴로워졌다. “예린아, 너는 정말 훌륭한 아이야. 아저씨가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아저씨가 사람 보는 눈이 없기 때문이야.” 최수빈은 주예린의 손을 잡고 말했다. “예린아, 엄마랑 같이 있어도 괜찮겠어?” “네...” 주예린은 결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비록 아저씨랑 오빠가 보고 싶지만 저를 가장 사랑해 주는 사람이 엄마라는 걸 저는 알아요. 저는 엄마가 가는 곳에 따라갈래요.” 최수빈은 눈시울을 붉히며 딸을 끌어안았다. 이번 생에는 반드시 딸을 지켜줄 것이다. 별장으로 돌아간 최수빈은 본인과 주예린의 옷을 몇 벌 챙겼다. 결혼생활을 시작하면서 주민혁은 정기적으로 매달 1억씩 돈을 입금해 주었고 최수빈은 그 돈으로 두 아이를 키우면서 가정을 꾸렸다. 그러면서 주민혁은 늘 몰래 주시후에게 용돈을 챙겨주었고, 출장을 갔다가 돌아오면 항상 주시후를 위해 비싼 옷과 액세사리를 사줬다. 주시후의 친아빠는 죽었고 주시후의 엄마는 주시후를 버렸다고, 주시후는 사실 아주 불쌍한 아이라면서 말이다. 지난 생에 주민혁을 죽도록 사랑했던 최수빈은 그의 요구라면 모두 들어주었고 그에게 여러 가지 선물을 주기도 했다. 주민혁과 아이에게만 신경을 쓰다 보니 대부분의 돈도 그들을 돌보고 가정을 꾸리는 데 쓰였고, 평소 재벌가 사람이 집에 찾아오거나 할 때도 그녀가 다 챙겨야 했다. 그래서 그녀의 수중에는 돈이 얼마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가련하고 한심한 삶이었다. 최수빈은 주예린을 씻기고 달래서 재운 뒤 씻으러 가려고 했는데 그때 갑자기 휴대전화가 울렸다. 장수미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우유 목욕을 하고 싶으시다는데 비율은 어떻게 해야 하고 물 온도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될까요? 제가 해봤는데 도련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시지 않네요.” “박하린 씨에게 전화해서 시후를 씻겨주라고 하면 돼요.” 장수미는 어리둥절했다. 그리고 그녀가 뭔가 말하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장수미는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그녀에게 다시 한번 연락했다. “저 주민혁 씨랑 이혼해요. 시후는 주민혁 씨 아들이고 저랑은 아무 상관 없으니까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최수빈은 차분하게 말한 뒤 다시 전화를 끊었다. “...” 주민혁은 휴대전화를 들고 있는 장수미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라고 해요? 언제 돌아온대요?” “사모님께서...” 장수미는 침을 꿀꺽 삼킨 뒤 말을 이어갔다. “사모님께서 본인은 곧 대표님과 이혼할 거라서 박하린 씨를 불러 도련님을 씻겨주라고 하셨어요.” 제4화 주민혁은 그 말을 듣고도 미간 한 번 찡그리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는 최수빈의 감정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장수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는데 최수빈은 결국 다시 돌아와서 주민혁에게 잘 보이려고 했다. 주시후는 자신이 원하는 우유 목욕을 하지 못했다. 결국엔 박하린이 찾아와서 주시후를 달래주었고, 주말에 같이 항공우주 전시회에 가겠다고 약속해서야 주시후는 겨우 투정을 멈추었다. 최수빈은 주시후가 높은 곳에 올라가지 못하게 했고 놀이공원에도 가지 못하게 했다. 주시후는 최수빈이 가난해서 박하린만큼 돈이 많지 않다고 생각했다. 최수빈이 돈이 많았더라면 생일 선물로 값싼 만년필을 줬을 리도 없고 못생긴 케이크를 손수 만들지도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박하린은 그를 데리고 진짜 비행기와 전투기를 보러 가려고 했다. 다음 날 아침, 잠에서 깬 주시후는 신나서 아침을 먹으려고 했다. 오늘 아침은 해물 죽이었다. 어젯밤 주시후는 장수미에게 해물 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평소 최수빈이 그에게 해물을 먹지 못하게 했기 때문이다. 최수빈이 없는 지금 주시후는 자신이 먹고 싶은 걸 마음껏 먹을 수 있었다. 한편, 최수빈은 아침 일찍 일어나 정성스레 아침을 만들어 주예린에게 먹인 뒤 딸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녀가 떠나자마자 주시후가 차에서 내렸다. “하린 이모가 주말에 같이 진짜 전투기를 보러 가자고 했어. 그리고 친구들이랑 같이 가지고 놀라고 플레이도우도 엄청 많이 사주셨어.” 주시후는 거만한 태도로 자랑했다. “네가 나한테 선물해 준 블록보다 몇천 배는 더 좋아. 너도 놀고 싶다면 나한테 부탁해. 그러면 내가 하린 이모한테 얘기해서 너도 데려가 달라고 해줄 수도 있어. 어때? 하린 이모랑 아빠가 없다면 엄마가 너를 데리고 전투기를 보러 가는 일은 절대 없을 거야.” 주예린은 눈시울이 빨개지고 코끝이 찡했다. 그 블록들은 주예린이 직접 만든 것들이었다. 주민혁이 주시후를 아꼈기에 주예린은 주시후의 환심을 사면 아저씨를 아빠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주예린은 주시후를 쳐다보며 말했다. “내, 내가 선물로 준 블록들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는 있어. 그런데 어떻게 엄마를 그렇게 무시할 수가 있어?” “엄마는 촌스러운 사람이야. 그래서 너 같은 애들이나 좋아하는 거라고. 앞으로 너랑 엄마 둘 다 집에 돌아오지 마. 우리 주씨 집안은 너랑 엄마를 환영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내게는 곧 새엄마가 생길 거야. 어제도 하린 이모가 날 재워줬어!” ... 최수빈이 주예린을 어린이집에 보낸 뒤 하늘이 어두워졌다. 곧 비가 내릴 것 같았다. 고개를 든 최수빈은 맞은편에 있는 버스 정류장에 포스터가 하나 붙어 있는 걸 보았다. [화국 항공전이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최수빈은 당황했다. 그녀는 지난 생에 이때쯤 은산시의 항공우주 전시회가 시작됐다는 걸 떠올렸다. 은산시의 항공우주 전시회는 세계 5대 항공우주 전시회 중 하나로 2년마다 개최되는데 이번 주말에 열리는 항공우주 전시회는 제15회 항공우주 전시회였다. 전시회에서는 아주 다양한 내용이 소개된다. 육해공뿐만 아니라 전기, 인터넷 등 여러 분야도 포함되고 각종 항공기, 미사일, 드론, 위성 등이 있으며 전투기 에어쇼까지 있었다. 최수빈은 그 포스터를 넋을 놓고 바라보았다. 만약 최수빈이 커리어를 포기하지 않았다면, 조강지처가 되기로 마음먹지 않았다면 이번 전시회에 그녀가 설계한 항공기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전시회에서 사람들을 위해 비행기의 설계 과정과 의도를 직접 설명했을지도 모른다. 과학 기술의 발전에 기여하고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은 한 나라의 국민으로서 무한한 영광이었다. 최수빈은 시선을 거둔 뒤 휴대전화를 꺼내 전시회 티켓을 예매하려고 했으나 티켓은 이미 매진된 상태였다. 그녀가 휴대전화를 가방 안에 넣자마자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주예린을 어린이집에 데려다줄 때는 마침 출근 시간이라 교통 체증이 심했다. 특히 어린이집 앞은 차가 꽉 막혀서 택시를 타는 것이 불가능했다. 최수빈은 폭우를 무릅쓰고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카페로 달려갔다. 문을 여는 순간, 마침 밖으로 나오려던 남자와 부딪쳐 남자가 들고 있던 뜨거운 커피가 그의 옷 위로 쏟아졌다. 커피 때문에 흰색 셔츠에 얼룩이 선명하게 남았다. “정말 죄송해요. 옷값은 따로 드릴게요.” 최수빈은 서둘러 고개를 들며 사과했다. 상대가 최수빈임을 확인한 육민성은 잠깐 놀라더니 이내 미소를 드러냈다. “수빈아, 항공청에서 실험할 때도 내 몸에 시약을 쏟더니 오늘은 커피야? 너 진짜 하나도 안 변했구나.” 최수빈은 당황했다. 그녀는 이곳에서 육민성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 육민성은 그녀의 선배였고 박사 과정 때 같은 지도교수님을 두었었다. 한재준은 511연구원 원장으로 우리나라 항공우주 업계의 거물이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지도교수로 삼고 싶어 했다. 최수빈은 그의 셔츠를 보면서 말했다. “선배도 여전하네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걸 보면 말이죠. 커피라서 얼룩 지우기 힘들 거예요. 옷값 드릴게요.” 육민성은 웃었다. “괜찮아. 너 결혼하고 난 뒤에는 얼굴 보기 힘들었는데 오늘 이렇게 마주친 김에 얘기 좀 나눌까?” “사실 안 그래도 선배한테 연락할 생각이었어요.” 육민성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러면 연구원에 가서 얘기 나누자. 나도 옷 좀 갈아입어야겠어.” ... 최수빈은 연구원 외부 손님 응접실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연구원을 찾았다. 익숙한 광경 때문에 옛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모든 것이 그토록 생생했다. 그러나 처음으로 손님의 신분으로 응접실에 앉아 있으려니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옷을 갈아입고 돌아온 육민성은 최수빈의 맞은편에 앉으며 그녀를 향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때? 여기 많이 달라진 것 같아?” “과학 기술 발전이 빨라서 그런지 연구원도 많이 달라진 것 같아요.” “나한테는 무슨 일로 연락하려고 했어? 항공우주 분야에서 여성으로서 일인자가 되겠다고 했던 애가 갑자기 학업과 연구를 포기하고 결혼하여 아이를 키우겠다고 했잖아. 게다가 우리랑 연락도 끊고 말이야...” 최수빈은 미안한 마음에 시선을 들지 못했다. 그녀는 그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고 그들에게 아직 사과 한마디 못 했다. “청운x7 이 이미 성공적으로 완성되어 이번 주말 전시회에서 선보이게 될 거라고 들었어요.” 최수빈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때 갑자기 떠나서 미안해요. 그동안 미안하다는 말을 못 했네요.” “너 소식 빠르다.” 육민성은 그녀를 바라보며 웃었다. “그때 네가 빠지고 나서 우리 프로젝트 한동안 진전이 없었어.” “저...” 최수빈은 진심으로 미안했다. “미안해요.” 그녀가 할 수 있는 건 사과밖에 없었다. 최수빈이 갑작스럽게 빠지는 탓에 다른 사람들도 피해를 보았다. 지금은 과학 기술 발전 속도가 상당히 빨랐다. 비록 최수빈은 그동안 조강지처로 지냈지만 전공 지식을 계속 공부하면서 그 분야를 깊이 파고들었다. 그녀는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어도 남에게 뒤처지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사실 다들 네 사과를 바란 적은 없어. 대신 네가 행동으로 보여주길 바라지.” 육민성은 최수빈이 돌아오기를 바랐다. 최수빈은 이곳에 있어야 빛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전시회에 직접 가봐도 돼요?” “사실 청운은 네가 반쯤 완성한 거지. 우리는 그걸 마무리하는 데만 몇 년이 걸렸어. 너는 우리 업계 사람이야. 가정에 묶여있으면 안 돼. 그런데 왜 전시회를 보고 싶은 거야? 돌아오기로 마음먹은 거야?” 육민성은 기대 어린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는 컵을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그거 티켓 예매하기 힘들어. 정말로 보고 싶다면 나한테 연락해. 내가 들여보내 줄게.” 최수빈은 입술을 깨물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도 제가 항공우주 산업계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최수빈은 어렸을 때부터 하늘과 우주를 동경했다. 그녀의 소망은 항공기를 설계하는 것에 그치지 않았다. 그녀의 소망은 우주에 닿는 것이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그녀는 자신을 잃어버렸다. 지난 생에서 그녀는 항공전이 열릴 때 주예린과 함께 집에서 주시후의 숙제를 도와주고 있었다. 그때 최수빈은 주민혁이 주시후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다고 생각했으나 나중에 그들과 박하린이 함께 전시회에 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최수빈은 당시 주예린이 직접 전투기 에어쇼를 본 그들을 얼마나 부러워했는지 생생히 기억했다. 그러나 주예린은 당시 부러운 티를 내지 않았고 떼를 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어머니로서 실패했다. 최수빈은 앞으로 주예린이 주시후를 부러워할 일이 없게끔 할 것이다. 이번 생에 그녀는 잃어버린 자신을 되찾고 주예린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자랑스러운 엄마가 될 것이다. 선생님을 다시 만나게 되더라도, 선생님이 더는 그녀를 받아주지 않으려고 해도, 전시회에 가서 옛 친구들을 만나거나 업계 거물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적어도 같은 업계 사람들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릴 수 있으니 말이다. 육민성은 싱긋 웃으며 흐뭇하게 말했다. “우리 연구원에서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할 생각이야. 그래서 총괄 엔지니어랑 도와줄 친구들이 필요한데 아직 적임자를 찾지 못했어.” 최수빈은 육민성이 자신을 영입하려고 한다는 걸 알았다. 총괄 엔지니어는 감히 기대할 수도 없었으나 기본적인 것부터 다시 시작하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이력서 넣을게요.” 육민성은 최수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 우리 연구원에서는 결혼 생활이 안정적인 사람들만 고용해.” 최수빈은 뜸을 들였다. 예전에 없던 새로운 규정이 생긴 걸 보니 그녀 때문에 생긴 규정인 듯했다. “저 이혼하려고요.” 육민성은 당황했다. 한때 사랑을 위해서 커리어를 포기했던 그녀가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이때 최수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시후 어머님, 시후가 갑자기 온몸에 발진이 생겼고 배도 아프다고 해서 병원에 보내야 할 것 같거든요. 이곳으로 와주시겠어요?” 제5화 “앞으로 시후에게 문제가 생겼을 때는 저 말고 시후 아빠에게 연락하세요.” 최수빈은 평온한 어투로 말했다. “저는 시후 엄마가 아니거든요.” 선생님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최수빈과 주민혁이 부부싸움을 했고 최수빈이 단단히 화가 난 상태라 주시후를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한다고 생각했다. “시후 어머님, 시후 지금 위급한 상황이에요. 화풀이할 때가 아니에요. 얼른 오세요.” “시후 아빠 연락처 보내드릴게요.” 최수빈은 말을 마친 뒤 전화를 끊었고 빠르게 주민혁의 연락처를 선생님에게 보내주었다. 육민성은 최수빈이 전화를 받을 때 자리를 피했다. 최수빈은 고개를 들어 육민성을 바라보았다. 육민성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창문 앞에 서서 바깥 경치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수빈은 육민성에게 다가갔다. “오늘 고마워요.” “전화 다 했어?” 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고 육민성은 진지한 얼굴로 최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빈아, 다시 돌아온 걸 환영해.” 최수빈은 덤덤히 웃었다. “그러면 제 이력서가 통과할 수 있기를 기도해 주세요.” 511연구원은 지원자에 대한 요구가 상당히 높은 편이었다. 최수빈은 오랫동안 이 업계를 벗어나 있었기 때문에 이력서가 통과할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육민성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혹시 떨어지게 되면 내 비서로 고용할게.” ... 주민혁이 어린이집에 도착했을 때는 여전히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어린이집 안에서 주시후는 온몸에 발진이 생긴 채로 보건실에 앉아 엉엉 울고 있었다. 주시후는 오늘 오전부터 몸이 간지러운 걸 느꼈었는데 오후가 되자 얼굴 전체에 발진이 생겼다. 주예린은 주시후에게 발진이 생겼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금 걱정했다. 예전에 최수빈이 주시후의 체질이 상당히 특이하여 밤마다 약욕하지 않으면 온몸에 발진이 생긴다고 했었기 때문이다. 주예린은 작은 우산을 펴고 반에서부터 보건실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비바람이 워낙 거세다 보니 우산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몸이 비에 젖었다. 보건실에 도착하자 주시후는 주예린을 바라보며 화를 냈다. “지금 내 꼴을 비웃으러 온 거지?” “엄마가 그랬어. 오빠는 매일 약재로 목욕해야 한다고, 그렇지 않으면 발진이 생길 거라고 말이야. 선생님한테 그 얘기를 해야...” “네가 뭔데 참견이야!” 주시후는 주예린의 말허리를 자르더니 주예린을 향해 옆에 놓인 컵을 던졌다. “내 일에 신경 쓰지 마! 난 너 같은 거 보고 싶지 않다고!” 선생님이 서둘러 말렸다. “주시후, 여동생을 때리면 안 돼.” “쟤는 제 여동생이 아니에요. 다들 그랬어요. 쟤는 우리 주씨 집안이랑 아무 상관 없는 사생아라고요!” 당황한 주예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어 눈물을 글썽였다. “오빠, 계속 그러면 오빠는 엄마한테 버림받을 거야.” “엄마가 날 버리는 게 아니라 내가 엄마를 버리는 거야. 나도 아빠도 너랑 엄마가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아!” 주예린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부들부들 떨었고 선생님은 옆에서 두 사람을 말렸다. 주예린은 주시후가 걱정돼서 그를 보러 온 것인데 오히려 그에게 미움을 받았다. 주예린은 입술을 꽉 깨물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주민혁이 보건실에 도착했다. 주예린은 꽤 오랫동안 보건실에 있었으나 조금 전에 비를 맞아서 몸이 으슬으슬 추웠다. 주예린은 구석에 있다가 아빠가 온 걸 보고 기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아빠...” 그러나 주민혁이 아빠라고 부르는 걸 싫어한다는 걸 떠올린 주예린은 그를 다시 아저씨라고 부르려고 했다. 그런데 주민혁이 오자마자 주시후가 더욱 큰 소리로 울었고 그탓에 주예린의 목소리가 묻혔다. 주시후는 침대에서 뛰어내려 주민혁의 앞으로 달려가더니 속상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아빠, 저 지금 너무 못생겼어요. 몸도 아프고 가려워요.” 얼굴에도 몸에도 모두 발진이 생겼다. 만약 박하린이 이 모습을 본다면 그를 싫어할 것이다. 선생님은 오늘 주시후가 몇 번이나 설사했다고 말했고, 주민혁은 아들의 몸과 얼굴에 발진이 생긴 걸 보고 마음 아파했다. 그는 허리를 숙여 주시후를 안아 들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괜찮아. 아빠가 왔잖아. 아빠랑 같이 병원에 가보자.” 주예린은 주시후가 주민혁을 향해 애교부리며 투정 부리는 모습과 주민혁이 주시후를 안아주고 다정하게 위로하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너무 서운했다. 주예린은 주민혁을 부르고 싶었으나 주민혁은 곧바로 주시후를 안고 보건실에서 나갔다. 주예린을 발견하지도 못한 듯했다. 주예린은 주시후를 안고 떠나는 주민혁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코를 훌쩍였다. “선생님, 저 추워요...” ... 주민혁은 주시후를 안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비서가 뒤에서 그를 따르며 말했다. “대표님, 아가씨도 한 번 살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이때 주시후가 주민혁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아빠, 저 아파요...” 주민혁은 무표정한 얼굴로 무심하게 말했다. “어린이집에 선생님들 있잖아. 내가 굳이 챙겨야 할 필요는 없어.”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확실히 지금은 도련님의 상태가 더욱 중요했다. 최수빈은 육민성과 헤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다시금 선생님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예린이 어머님, 예린이가 비를 맞고 감기에 걸린 건지 고열을 앓고 있어요.” 최수빈은 그 순간 온몸이 굳어버렸다. 마치 본능처럼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지난 생에 주예린은 고열로 인한 폐렴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이번 생에 최수빈은 주민혁에게 이혼하자고 한 뒤 주예린을 데리고 떠났다. 또 한 번 삶의 기회를 얻게 됐는데도 딸의 운명을 바꿀 수는 없는 것일까? 다시 한번 고열이라는 말을 듣게 되자 최수빈은 온몸이 덜덜 떨렸다. 그녀는 자신이 어떻게 폭우를 뚫고 어린이집으로 달려갔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어린이집에 도착했을 때 주예린은 보건실 침대에 누워 몸을 떨고 있었다. “엄마...” 고열 때문에 얼굴이 새빨개진 주예린은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엄마. 오빠가 아프다는 소식을 듣고 보건실로 오다가 비를 맞았어요.” “바보 같긴. 우리 예린이가 왜 사과를 해?” 최수빈은 눈가가 촉촉해졌다. “앞으로는 시후 일에 절대 신경 쓰지 마. 알겠지?” 최수빈은 주예린이 주시후와 주민혁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다는 걸 알았다. 주예린은 늘 아빠에게 사랑받을 수 있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최수빈 본인은 주민혁을 향한 마음을 접고 홀연히 떠날 수 있었지만 아빠의 사랑을 기대하는 딸의 마음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까 아빠가 오빠를 데리고 병원으로 갔어요.” 주예린의 목소리에서 서운함이 느껴졌다. 최수빈은 주예린이 무엇을 바라는지 알았다. 주예린은 주민혁이 자신에게 눈길 한 번 주길, 말 한 번 걸어주길 바랐을 뿐이다. 주민혁이 말이라도 걸어주는 날이면 주예린은 하루 종일 기뻐했다. 최수빈은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아 딸을 안고 말했다. “우리 착한 예린이. 엄마랑 같이 병원에 가자.” 은산의 어린이 병원. 의사 선생님은 최수빈에게 주예린이 원래부터 몸이 약하다고 했다. 지난 생에 주예린은 주민혁과 주시후를 기다리느라 늘 다 식은 음식을 먹어서 영양실조를 앓았다. 최수빈은 1년 전으로 돌아온 그날부터 주예린을 위해 정성껏 음식을 만들었지만 원래 허약한 몸이 하루아침에 좋아질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검진해 본 결과 단순 감기로 인한 고열이었다. 의사는 해열제를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가서 경과를 지켜보라고 했다. 그러나 지난 생에 많은 일들을 겪은 최수빈은 도무지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선생님, 입원시켜 주세요. 이대로 집으로 데려가기에는 너무 불안해서요.” 최수빈은 비를 맞으며 어린이집으로 달려가서 온몸이 젖어 있었지만 본인은 신경 쓸 새도 없었다. 그녀는 입원 절차를 마친 뒤 주예린을 병실에 눕히고 약을 가지러 갔다. 그러다 돌아오는 길에 VIP 병실을 지나치게 되었다. “전부 엄마 탓이에요. 엄마가 우유 목욕을 안 해줘서 또 병이 난 거예요.” 병실 안에서 불만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린 이모, 제 새엄마가 돼줄래요?” 제6화 박하린은 웃었다. “이모가 시후 엄마가 되려면 시후 아빠의 아내가 되어야 해. 시후는 시후 아빠가 이모랑 결혼했으면 좋겠어?” 주시후가 말했다. “잠시 뒤에 아빠한테 엄마랑 이혼하고 이모랑 결혼하라고 할게요!” 최수빈은 그 말을 듣고 차갑게 웃었다. 주시후는 박하린이 그의 친모라는 걸 몰랐다. 박하린은 당시 출산한 뒤 아이를 주민혁에게 맡기고 떠나버렸다. 그러고 보면 박하린은 상당히 교활한 여자였다. 자신의 학업과 커리어를 지키면서 자신이 원하는 남자까지 얻었으니 말이다. “난 네가 정말로 병원에 오지 않을 줄 알았어.” 등 뒤에서 남자의 무심하면서도 약간의 조롱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린 최수빈은 검은색 정장을 입은 주민혁을 보았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우아하고 고고해 보였다. 예전이었다면 최수빈은 주민혁의 환심을 사려고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최수빈은 주민혁을 발견하고 미간을 한껏 찌푸렸다. 주민혁이 오랫동안 주예린을 외면하지 않았더라면 지난 생에 주예린이 찬바람 속에서 오도카니 그만을 기다리는 일이 없었을 것이고, 그랬다면 폐렴을 앓다가 세상을 뜨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오늘 어린이집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민혁은 또 한 번 고열을 앓고 있는 딸을 내버려두고 주시후만 데리고 떠났다. 그가 주예린이 고열을 앓고 있다는 걸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만약 그가 정말로 딸에게 관심이 있었다면 딸이 고열을 앓는다는 걸 모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주민혁은 온몸이 젖은 최수빈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주씨 집안을 떠나더니 꼴이 아주 말이 아니네. 시후 안에 있으니까 들어가 봐도 좋아.” 최수빈은 심호흡을 한 뒤 주민혁을 향해 차갑게 웃었다. “시후가 내 아들도 아닌데 내가 왜 안으로 들어가서 시후를 봐야 하죠?” 말을 마친 뒤 최수빈은 주민혁의 안색 따위 신경 쓰지 않고 곧장 자리를 떴다. 이번 생에 최수빈은 주민혁이 딸에게 관심을 주는 걸 더 이상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가 갑자기 달라져서 그들 모녀를 챙기는 날도 오지 않을 것이다. 지난 생에 주예린은 주민혁의 무관심 때문에 죽었다. 그녀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이때 박하린이 문을 열고 최수빈의 떠나는 뒷모습을 보았다. “언니 설마 나 때문에 또 화가 난 거야? 내가 여기 있어서 불쾌한 건가?” 주민혁은 덤덤히 시선을 거두었다.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 “의사 선생님이 시후 위장이 약하고 유당불내증이라 토하고 설사한 거래. 그리고 진드기 알레르기 때문에 급성 두드러기가 난 거라고 했어. 피검사 해보니까 최근에 알레르기 예방을 위한 약욕을 중단했대.” 박하린은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언니가 집에 안 돌아오면 내가 가서 시후 약욕시켜줄게.” 주민혁은 거절하지 않았다. ... 최수빈이 병실로 돌아왔을 때 주예린이 물었다. “아빠 오셨어요?” 조금 전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었다. 최수빈은 기대 가득한 주예린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팠다. 주민혁이 주예린을 보러 온 게 아니라 주시후를 돌봐주러 왔다는 말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최수빈은 딸의 곁에 앉으며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는 예린이가 아빠를 좋아한다는 걸 알아. 하지만 아빠는 지금 일 때문에 바쁘셔서 예린이를 보러올 수가 없어.” 주예린은 시선을 내려뜨리며 작은 손으로 침대 시트를 꼭 쥐었다. “아빠는 예린이를 안 좋아하는 거죠? 제가 아무리 오빠와 아빠한테 잘 보이려고 해도 오빠랑 아빠는 예린이를 안 좋아해요. 제가 못난 사람이라 그런 거예요?” 최수빈은 주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예린아, 너는 아주 훌륭한 아이야. 하지만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예린이를 좋아할 수는 없는 법이야. 그리고 남들이 다 예린이를 좋아할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니야. 그러니까 다른 사람들이 널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 그게 아빠라고 해도 말이야. 다른 사람이 우리 예린이를 싫어한다고 해도 예린이는 예린이야. 굳이 남에게 잘 보일 필요도, 남을 위해 달라지려고 할 필요도 없어.” 그 말은 만 네 살인 아이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말일 것이다. 그러나 최수빈은 같은 일이 반복되는 걸 바라지 않았고 영원히 받을 수 없는 아빠의 사랑을 계속 기대하는 딸의 모습도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았다. 주예린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글썽였다. 엄마의 말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리고 왠지 모르게 굉장히 슬펐다. 아빠도 언젠가는 돌아올 것이다. 다른 아이들에게는 모두 아빠가 있지 않은가? 주예린은 눈물을 뚝뚝 떨구면서 흐느꼈다. “하, 하지만 오빠가 저는 주씨 가문 딸이 아니고 사생아라고 했는걸요... 그게 정말인가요?” 최수빈은 순간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헛소리니까 믿지 마.” 최수빈의 눈빛이 싸늘해졌다. 어린아이인 주시후가 그런 말을 한 걸 보면 누군가 옆에서 바람을 넣은 게 틀림없었다. 그동안 최수빈은 주씨 가문을 위해 헌신했는데 결국에는 말도 안 되는 오명만 쓰게 되었다. 이로써 그녀의 결혼 생활이 얼마나 끔찍하고 최악이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 하루 동안 병원에 입원한 주예린은 열도 내리고 상태도 호전되었다. 침대에서 내려와 걷고 있던 주예린은 마침 복도에서 장난감 비행기를 조종하고 있는 주시후와 마주쳤다. 주예린은 고개를 들어 장난감을 보았다. ‘하린 이모가 오빠에게 준 선물인 건가?’ 너무 멋져 보였다. 주시후는 주예린도 병원복을 입고 있는 걸 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주예린, 너 진짜 징글징글하다. 내가 아프니까 그것까지 따라 하는 거야?” “아니야!” 주시후는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아빠가 널 보러 가지 않는 거야.” 주시후는 고개를 숙이고 장난감 비행기를 주예린 쪽으로 조종했다. 장난감이 딸을 향해 돌진하자 최수빈은 아침에 먹을 음식을 든 손으로 주예린을 안아서 다른 곳으로 옮겼고 장난감은 바닥에 내리꽂히게 되었다. 주예린은 겁먹은 얼굴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엄마...” 주민혁은 주예린을 좋아하지 않았고 주예린이 그를 아빠라고 부르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게다가 주씨 가문에서 가장 사랑받는 것은 주시후였다. 그 때문에 주예린은 늘 조심스럽게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게 되었다. 주예린은 주씨 가문에서 엄마를 제외하면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이 없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주시후보다 더 사랑받을 일도 없다는 걸 알고 일찍 철이 들었다. 최수빈은 그제야 자신이 자녀 교육에 실패했음을 뼈저리게 느꼈다. 예전에 그녀는 주예린이 내향적인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주예린이 늘 그녀의 앞에서 밝은 척을 했기 때문이다. “예린아, 앞으로 누군가 널 괴롭힌다면 똑같이 돌려줘야 해. 엄마가 있으니 무서워하지 말고 반격해.” 주시후는 최수빈이 다가오자 조종기를 든 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최수빈은 아주 매서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최수빈은 주시후를 보며 말했다. “예린이한테 사과해.” “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예린이가 하필 그곳에 서 있었을 뿐이에요!” 주민혁과 박하린이 없으니 최수빈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다. ‘엄마 진짜 싫어. 항상 날 가르치려고 하고 아무것도 못 하게 하잖아.’ 그러나 주시후는 이내 생각을 바꾸었다. 주민혁은 최수빈과 주예린을 버렸고 앞으로 박하린이 그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그러니 아무것도 모르는 촌스러운 최수빈 따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주시후는 용기를 내어 말대꾸했다. “예린이가 하린 이모가 저한테 선물로 준 장난감 비행기를 망가뜨리면 어떡할 거예요? 이거 배상할 수 있겠어요?” 최수빈은 시선을 내려뜨려 차가운 눈빛으로 바닥을 나뒹굴고 있는 장난감 비행기를 보았다. 그다지 비싸지도 않은 장난감이었다. 어떻게 만드는지 알 수만 있다면 누구든지 만들 수 있었다. 최수빈은 아이와 싸우고 싶은 마음이 없었으나 오늘은 반드시 주예린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었다. “그래. 사과하지 마.” 최수빈은 주예린을 바라보았다. “예린아, 지금부터는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해.” 예전에 최수빈은 주예린에게 남을 때리거나 욕하는 건 예의 없는 일이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쳤다. 주예린은 최수빈의 말에 조금 흔들렸다. 오늘 주시후를 때리거나 욕한다면 주민혁이 자신을 더 싫어하게 될까? 주예린은 어젯밤 엄마가 해준 남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라는 말을 떠올렸다. 그래서 주예린은 주시후에게 다가갔다. 주시후는 조금 겁이 났다. 생수를 들고 오던 박하린은 그 광경을 전부 보게 되었다. 그녀는 앞으로 나서더니 주시후를 자신의 뒤로 감추면서 최수빈을 보며 말했다. “왜 시후에게 그렇게 겁을 주는 거예요? 엄마로서 아이를 그렇게 가르치면 안 되죠. 언니, 아이끼리 다툰 것뿐이잖아요. 언니가 이러면 시후 겁먹어요.” 주민혁은 아침을 사 오는 길에 박하린의 말을 듣게 되었다. 그는 주시후가 덜덜 떨며 박하린의 뒤에 숨은 걸 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최수빈이 차갑게 웃으면서 입을 열려는데 갑자기 등 뒤에서 싸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병원에 있을 필요 없으니까 예린이 데리고 돌아가.” 제7화 주민혁의 무심한 목소리가 유독 귀에 거슬렸다. 고개를 돌린 최수빈은 그의 새까만 눈동자를 보았다.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무감각한 눈빛이었다. 주민혁은 늘 그랬듯이 모든 것을 그녀와 딸의 잘못이라고 생각하며 무턱대고 박하린과 주시후의 편을 들었다. 주민혁은 최수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박하린을 바라보며 조금 누그러진 어조로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서 아침 먹자.” 그는 심지어 주예린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두 사람과 함께 병실로 들어가서 문을 닫았다. 최수빈은 닫힌 문을 바라보며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 정도로 말이다. 주민혁의 냉담한 태도에 최수빈의 눈빛이 한없이 어두워졌다. 이렇게 사람을 무시하는데 그렇게 오랜 시간 이런 모욕을 견뎌왔다니.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우스운 일이었다. 최수빈이 주민혁의 사랑을 받겠다고 고집을 부리지만 않았다면, 일찌감치 딸을 데리고 떠났다면 지난 생에 주예린이 죽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엄마, 저 많이 좋아졌으니까 저희 오늘 퇴원해요.” 시선을 내려뜨린 최수빈은 철이 든 딸의 모습에 가슴이 찢기는 것만 같았다. “앞으로 누가 괴롭히면 절대 참지 마. 알겠지?” 주예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최수빈은 주예린을 위해 퇴원 절차를 밟은 뒤 엄마를 만나러 갔다. 최수빈의 엄마는 교외에 있는 별장에 살고 있었다. 도심과는 꽤 멀리 떨어진 곳이지만 공기가 맑고 풍경이 아름다워서 좋았다. 최수빈의 엄마는 최수빈의 아빠와 이혼하고 싶어 했으나 최수빈의 아빠가 줄곧 동의하지 않아 혼자 이곳으로 와서 살고 있었다. 최수빈은 딸을 데리고 엄마를 찾아와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했다. 주예린은 외할머니를 보자 신나서 곧장 그녀에게 달려가 안겨서 애교를 부렸다. 이혜정은 웃으며 주예린을 안아 들었다. “어머, 우리 예린이 키가 또 컸네. 오늘은 뭐 먹고 싶어? 외할머니가 다 해줄게.” “갈비찜 먹고 싶어요!” “그래. 외할머니가 갈비찜 해줄게.” 이혜정은 주예린과 잠깐 시간을 보내다가 주예린에게 위층으로 올라가서 TV를 보고 있으라고 한 뒤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수요일이라서 바쁠 텐데 웬일로 온 거야?” 최수빈은 의자에 앉았다. “요즘 사업은 잘돼가요?” 이혜정은 사업을 하고 있었지만 요즘 경기가 좋지 않아 매출이 떨어져 적자를 면치 못했다. 이 사업 때문에 최진식이 이혜정과 이혼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오랫동안 부부로 지내서 재산 분할을 하기가 쉽지 않았고 이익 관계도 복잡해서 이혼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최진식은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고 그 여자는 최진식을 위해 아들 한 명, 딸 한 명을 낳았다. 그 때문에 최진식은 줄곧 최수빈을 좋아하지 않았다. 최수빈이 주민혁과 결혼한 뒤 최진식은 주민혁의 인맥을 이용하여 사업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민혁은 최수빈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녀의 집안 사정에 관심이 없었고, 그 탓에 최진식은 이혜정에게 자기 인생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쓸모없는 아이를 낳았다면서 이혜정을 모욕했다. 이혜정이 대답했다. “그냥 똑같지, 뭐.” 최수빈은 시선을 내려뜨렸다. 그동안 최수빈은 여윳돈이 생기면 모두 이혜정에게 주었지만 그녀의 사업에는 크게 신경을 기울이지 못했다. 최수빈은 지난 생에 주민혁에게만 온 신경을 쏟아부었다. 그리고 최수빈의 딸이 사망하기 이틀 전 이혜정은 파산했다. “다음에 돈 보내드릴 테니까 회사 내부 운영 방식을 바꿔보세요. 지금의 방식은 너무 구식이에요. 시대에 뒤처졌다고 볼 수 있죠. 신재생에너지 같은 새로운 산업도 한 번 고민해 보세요. 그리고 회사 내부의 보수적인 경영진도 과감히 바꾸시고요.” 이혜정은 미간을 찌푸리며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어디서 난 돈이야? 설마 민혁이가...” “아니에요.” 최수빈은 아주 단호히 말했다. “저 이혼하려고요.” 주민혁과 결혼한 지 꽤 됐지만 그는 단 한 번도 최씨 가문의 일에 간섭한 적이 없었다. 최씨 가문이 파산하기 직전에도 그랬다. 그러나 박하린이 해외에서 유학하다가 돈을 다 쓰면 몇억씩 흔쾌히 보내줬다. 당시 삼촌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이혜정은 아마 수백억대의 채무를 지게 되었을 것이다. 이혜정은 안타까운 눈빛으로 최수빈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다 엄마가 능력이 없는 탓이야. 친정이 너를 든든하게 지켜줄 수 있었다면 주씨 가문에서 그렇게 시달리며 살지 않아도 됐을 텐데...” 이혜정은 고개를 돌리면서 눈물을 머금고 말했다. “그랬다면 그동안 쭉 참고 살다가 이제야 이혼하려고 했을 리도 없었겠지.” “다 지난 일이에요.” 처음부터 주민혁과 결혼하려고 고집을 부리면 안 되었다. 사랑에 빠진 그녀는 자신이 조강지처가 되면 주민혁이 자신을 사랑해 줄 거라고 착각했다. ... 최수빈은 이혜정에게 딸을 맡긴 뒤 회사로 가서 퇴사 절차를 밟을 예정이었다. 회사 로비에서 최수빈은 주민혁과 마주쳤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주민혁은 급한 일이 있는지 밖으로 빠르게 나가고 있었고, 최수빈은 무표정한 얼굴로 옆으로 비켜섰다. 주민혁은 늘 습관적으로 최수빈을 무시했다. 그녀가 인사를 건네도, 존재감을 드러내도 주민혁은 언제나 못 본 척했다. “민혁 오빠, 여기야!” 문밖에서 박하린이 웃는 얼굴로 주민혁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왜 직접 내려왔어? 내가 알아서 올라가면 되는데.” 최수빈은 문득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치는 날에도 주민혁이 한 번도 자신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는 걸 떠올렸다. 상대가 달라지니 그의 태도도 달라졌다. 최수빈은 덤덤히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뭘 하든 더 이상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최수빈은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탔고 5층에 있는 인사팀으로 가서 사직서를 전달했다. 인사팀 직원 장혜윤이 뜻밖이라는 듯이 말했다. “정말 그만두려고요? 저는 그냥 농담인 줄 알았는데요.” 다들 최수빈이 일개 비서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하는 일이라고는 기껏해야 회의실로 마실 것을 가져다주는 것뿐이었다. 집으로 돌아가서 아이를 챙겨야 하니 복잡한 업무는 볼 수 없었으니 말이다. 주민혁은 최수빈을 무시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그럼에도 최수빈은 늘 주민혁의 뒤꽁무니만 쫓아다녔다. 그랬던 그녀가 오늘 갑자기 사직서를 내니 장혜윤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최수빈은 별로 대꾸하고 싶지 않아 차가운 표정으로 짧게 말했다. “네.” 장혜윤은 최수빈의 태도를 보고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별 볼 일 없는 비서가 그녀 앞에서 무게를 잡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오늘 주민혁의 여자 친구가 회사로 왔다는 소식에 회사 직원들 모두 깜짝 놀랐다. 다들 주민혁의 여자 친구가 해외에서 금융공학과 항공우주공학 석사 복수 학위를 취득한 엘리트라고 했다. 주민혁과 아주 잘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최수빈은 주민혁의 여자 친구가 얼마나 훌륭한 여자인지를 알고 자신은 그녀와 비교도 안 된다는 걸 깨달은 뒤 자괴감에 일을 그만두려고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다 됐어요.” 장혜윤이 최수빈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수빈 씨, 제가 충고 하나 할게요. 앞으로 어디서 일을 하게 되든 넘보지 말아야 할 사람은 넘보지 말아요.” 최수빈은 그 말을 듣고 과거 자신이 얼마나 비참한 처지였는지를 다시 한번 깨달았다. 그녀는 주민혁을 그토록 사랑했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그녀는 자기 분수도 모르고 주제넘게 주민혁을 넘본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이 다 알고 있던 것을 이제야 깨닫게 되다니. 지난 생은 어쩌면 하늘이 그녀에게 내린 벌일지도 몰랐다. 최수빈은 티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뒤 덤덤한 눈빛으로 장혜윤을 바라보며 말했다. “충고 고마워요. 하지만 제 커리어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최수빈은 인사팀을 떠난 뒤 로비로 내려갔다. 주민혁과 박하린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다. 예전에는 매일 최수빈을 마주치고 싶었는데 지금은 볼 때마다 짜증이 치밀었다. 최수빈은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런데 주민혁이 갑자기 여유로운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최수빈, 커피 한 잔 타서 하린이 사무실로 가져다줘.” 박하린이 곧바로 말했다. “민혁 오빠가 그러더라고요. 언니가 탄 커피가 엄청 맛있다고요. 민혁 오빠는 언니가 집안일을 엄청 잘한다고 칭찬했어요. 저는 이런 섬세한 일은 잘 못하거든요. 참, 커피는 핸드드립 커피로 가져다주세요. 인스턴트는 입에 안 맞아서요.” 최수빈은 걸음을 멈추고 박하린을 힐끗 보았다. “주민혁 씨 사무실에 찻잎이 있거든요. 그거 우려서 드세요.” 제8화 박하린이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최수빈은 곧장 몸을 돌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떠났다. 결국 말할 기회를 놓친 박하린은 주민혁을 바라보며 말했다. “민혁 오빠, 언니 성격 진짜 불같으시다. 그러니까 시후가 언니를 무서워하지. 언니 화난 것 같은데 안 달래줘도 되겠어?” 주민혁은 덤덤히 시선을 거둔 뒤 평온한 어조로 말했다. “시간이 흐르면 알아서 풀릴 테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박하린은 입꼬리를 올리면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언니가 도망가는 게 두렵지도 않아?” 저녁이 되어 주민혁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 안은 조명이 켜져 있지 않아 깜깜했다. 주시후가 집에 없어 할 일이 없었던 장수미는 일찍 잠을 자러 갔다. 조명을 켜니 원래도 큰 방이 텅 비어서 유독 넓고 쓸쓸해 보였다. 안방이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 보니 그곳도 텅 비어 있었다. 주민혁은 사실 이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그는 최수빈이 돌아오든지 말든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욕실로 가서 샤워하고 나온 뒤 최수빈의 화장대 앞을 지나칠 때도 그는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만약 시선을 줬더라면 그 위에 서류가 놓여 있다는 걸 발견했을 것이다. ... 주말. 항공전은 매우 붐볐다. 티켓을 예매하지 못한 사람들까지도 밖에 몰려들어서 구경하고 있었고 수많은 기자들이 카메라를 들고 취재에 열중하고 있었다. 최수빈은 일찌감치 주예린을 데리고 전시회 입구에서 육민성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예린은 온순하게 최수빈의 곁에 서서 떠들썩한 주위를 둘러보았다. 곳곳에 항공기 포스터와 소개 자료들이 가득했다. 예전에 최수빈은 딸을 데리고 이런 곳에 와본 적이 없었고 놀이공원도 거의 간 적이 없었다. 딸의 기분을 눈치챈 최수빈은 허리를 숙이고 주예린의 볼을 꼬집었다. “이런 곳은 어때? 재미없으면 외할머니에게 연락해서 데리러 오라고 할게.” “좋아요. 마음에 들어요.” 주예린이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예전에는 엄마가 이런 곳에 저를 데려온 적이 없었잖아요.” 딸의 말에 최수빈은 마음이 아팠다. 지난 생에 그녀는 주민혁의 비서로 일해야 했고, 또 살림도 해야 했으며 주시후를 가르치는 데도 신경을 써야 했기에 많은 사소한 부분들을 놓치게 되었다. 주민혁은 가끔 주시후를 데리고 다녔지만 주예린은 늘 집에만 있었고, 다 식은 음식을 먹고 주시후가 싫어하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았다. 주민혁은 주시후를 위해 선물을 사거나 장난감을 산 적은 많지만 주예린에게 뭔가를 사준 적은 없었다. 최수빈이 장난감을 사주겠다고 했을 때 주예린은 그녀에게 자신은 장난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장난감을 싫어하는 아이가 있을 리가 없었다. “예린아, 미안해.” 최수빈의 목소리에서 미안함과 자괴감이 느껴졌다. 앞으로 그녀는 주예린이 커가는 매 순간을 놓치지 않을 것이다. “하! 주예린, 여기서 뭐 해?” 멀리서 주시후가 정장을 입고 다가오며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도 안으로 들어가서 진짜 전투기를 보고 싶은 거야? 엄마 신분으로는 널 데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없어.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다면 나한테 애원해. 그리고 엄마한테 돌아와서 밥도 하고 옷도 씻으라고 해. 그러면 내가 아빠랑 하린 이모한테 얘기해서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해줄게.” “필요 없어. 엄마가 날 데리고 안으로 들어갈 거니까!” 최수빈은 볼을 잔뜩 부풀리며 말했다. “우리 엄마는 네 가정부가 아니야!” 주시후는 어리둥절했다. 최수빈이 주예린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집에서 밥을 하고 청소만 할 줄 아는 최수빈은 이런 고차원적인 것을 알지 못할 것이다. 주민혁과 박하린이 멀지 않은 곳에서 주시후를 따라 걸어오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갈색 옷을 입고 있어서 언뜻 보면 커플룩 같았다. 최수빈도 한때 소녀처럼 주민혁과 커플룩을 입고 싶었다. 그러나 주민혁은 전혀 협조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녀가 산 옷을 입기는커녕 눈길 한 번 준 적이 없었다. 최수빈을 발견한 박하린은 앞으로 나서며 친근하게 인사를 건넸다. “언니랑 예린이도 왔네요. 저한테 얘기하시지 그랬어요. 그랬다면 저랑 민혁 오빠랑 같은 차를 타고 왔을 텐데 말이에요.” 이때 주민혁이 옆으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그는 최수빈에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고, 주예린은 이따금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박하린의 도발하는 듯한 태도에 최수빈은 차갑게 미소를 지으며 단호히 거절했다. “괜찮아요.” “정말요?” 박하린은 눈썹을 치켜올리며 말했다. “저는 민혁 오빠랑 어렸을 때부터 같이 자라서 아주 친해요. 그러니까 편히 대하셔도 돼요.” 마치 주민혁이 자기 것이라는 듯이 말하는 박하린을 보니 자신을 이미 주민혁의 아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난 생에 최수빈은 멍청하게도 박하린이 주민혁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걸 몰랐다. 최수빈이 뭐라고 하기도 전에 주민혁이 전화를 끊고 다가왔다. 그는 최수빈을 무시하고 박하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그는 최수빈과 주예린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생각이 없었다. 박하린은 웃으며 말했다. “그러면 저희는 먼저 들어가 볼게요. 혹시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면 저한테 연락하세요. 제가 데리러 올게요.” 최수빈은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코웃음을 쳤다. 이번 생에 그녀는 세 사람이 어떻게 살지 지켜볼 것이다. “미안. 오래 기다렸지? 일 때문에 조금 늦었어.” 육민성이 마침 도착했고 최수빈은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자.” 육민성은 주예린을 바라보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건 아저씨가 예린이한테 주는 과자랑 장난감이야.” 주예린은 눈을 반짝반짝 빛내면서 말했다. “감사합니다!” 그것은 주예린이 살면서 처음 받아보는 선물이었다. 육민성은 관계자 출입증을 들고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은 햇볕이 아주 강해서 눈이 부셨기에 최수빈은 선글라스를 챙겼다. 육민성은 걸어가면서 말했다. “이 전시회는 3년에 한 번씩 열리고 규모가 아주 크다는 거 너도 알고 있지? 잠시 뒤에 나는 좀 바쁠 예정이니까 먼저 돌아보고 있어. 그리고 점심에 나랑 선생님이랑 같이 밥 먹자.” 최수빈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러면 다녀와요.” 현장은 매우 붐볐고 어딜 가든 사람들이 가득했다. 주예린은 신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엄마, 이 비행기 엄청 멋있어요.” 주예린은 최수빈의 손을 잡아당겼다. “저랑 이 비행기랑 같이 찍어주실래요?” “그래.” 최수빈은 웃으면서 휴대전화를 꺼냈다. “저기 옆에 가서 서 있어.” 주예린이 비행기 쪽으로 걸어가려는데 갑자기 사람들이 몰려들어 최수빈과 주예린을 밀어냈다. 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황급히 주예린을 부축했다. “박하린 씨, 해외 연수를 떠날 생각이라고 들었습니다. 주 대표님께서는 박하린 씨가 곧 511연구원에서 일하게 될 거라고 하던데 이 업계에 관한 생각을 짧게 얘기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기자는 카메라를 들고 있었고 그 뒤로도 수많은 사람들이 박하린을 찍고 있었다. 박하린은 사람들 사이에 서서 미소 띤 얼굴로 당당하게 말했다. “여러분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지금 제 뒤에 있는 비행기는 제가 설계한 거예요. 하지만 해외 유학을 떠나서 중도에 팀을 떠나게 되었죠. 이 비행기가 이렇게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걸 보니 굉장히 흐뭇하네요. 그건 우리나라에 인재들이 아주 많다는 걸 의미하니까요.” “저 사람, 형 아내 아니에요?” 멀지 않은 곳, 주민혁의 곁에 서 있던 남자가 어깨로 주민혁을 툭 쳤다. “여기는 왜 왔대요? 집에서 살림이나 하는 사람이 뭘 안다고.” 제9화 진승우는 최수빈을 빤히 바라보면서 경멸의 눈빛을 해 보였다. “진짜 여기는 뭐 하러 왔대요? 설마 형 눈에 띄고 싶어서 그러는 거 아니에요?” 주민혁은 무심한 눈길로 최수빈을 힐끗 본 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최수빈은 비록 아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들의 주목을 한 몸에 받으며 누구보다도 눈부시게 빛나는 박하린과 비교하면 초라할 수밖에 없었다. “형이 왜 집에 돌아가기 싫어하는지 알겠어요. 나였어도 하린 씨가 더 낫다고 생각했을 거예요. 학벌 좋고 능력도 있고 항상 열심히 하잖아요. 최수빈 씨는 하린 씨보다 나은 점이 하나도 없어요.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면서 형 돈만 펑펑 쓰잖아요.” 진승우와 주민혁은 같은 계층의 사람이었고 주민혁이 최수빈과 결혼했을 때부터 그는 최수빈을 진심으로 경멸했다. 주민혁을 함정에 빠뜨려 그와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괜찮은 사람일 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뻔뻔하게 이곳까지 쫓아온 걸 보니 기가 막혔다. “왜 저기 서서 인터뷰까지 보는 거죠? 알아들을 수는 있대요? 모르는 사람이 봤으면 최수빈 씨도 항공우주 산업계 사람인 줄 알겠네요.” 주민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진승우를 바라보았다. “시끄러워.” 진승우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주시후는 박하린이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는 걸 보자 자기도 우쭐해졌다. 박하린이 그의 엄마라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어도 괜찮았다. 박하린이 그를 가장 좋아하면 되니 말이다. 최수빈은 박하린이 사람들을 향해 비행기를 소개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감이 넘쳐 보였고 항공우주 산업계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최수빈은 심호흡하며 시선을 거두어들였다. 주민혁이 박하린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가정주부와 능력이 출중한 커리어 우먼 중 한 명을 고르라면 당연히 후자를 고를 것이다. 이렇게 간단한 것을 지난 생에는 미처 깨닫지 못했다. 주예린은 동그란 눈으로 박하린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그들의 대화를 들었다. ‘이 비행기를 설계한 사람이 하린 이모라니... 주시후가 하린 이모를 그렇게 좋아하는 이유가 있었어.’ ... 이때 최수빈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육민성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그는 그들을 위해 시야가 좋은 좌석을 마련했으니 잠시 뒤에 그곳에서 전투기 에어쇼를 보라고 했다. 그녀는 주예린을 데리고 그곳으로 걸어갔다. 그 모습을 본 진승우는 최수빈이 자신은 박하린과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딸을 데리고 도망치는 줄 알았다. 박하린이 인터뷰를 마치자 주시후가 그녀의 품으로 달려갔다. “하린 이모, 최고예요!” 박하린은 주시후를 안으면서 그의 볼에 입을 맞췄다. “고마워.” 주시후는 뽀뽀를 받게 되자 더욱 환하게 웃었다. 박하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주민혁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한 손에 주시후를 안고 주민혁을 향해 팔을 벌렸다. “민혁 오빠, 나 이렇게 잘났는데 축하의 의미로 한 번 안아줘야 하는 거 아니야?” 진승우는 웃으며 다가갔다. “하린 씨, 나는요?” 그는 말을 마치고는 주민혁의 의사 따위 묻지 않고 그를 데리고 가서 박하린을 안았다. 그러고는 주민혁을 보며 말했다. “잠시 뒤에 같이 밥이나 먹을까요?” 박하린은 주시후를 안고 주민혁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좋아요. 내가 쏠게요.” 세 사람은 멀리서 보면 다정한 가족 같아 보였다. 주예린과 최수빈은 아직 떠나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주민혁이 주시후, 박하린과 함께 있는 걸 본 주예린은 입술을 힘껏 깨물다가 그들을 보지 않기 위해 다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주시후처럼 잘났으면 아빠도 날 받아줬을까? 아빠는 나를 안 좋아해서 엄마도 안 좋아하는 걸 거야... 절대 엄마에게 짐이 되지 말아야지.’ 육민성이 최수빈과 주예린을 위해 준비한 자리는 최고로 좋은 자리였다. 그곳은 정중앙 자리인 데다가 시야도 굉장히 좋았다. “여기 앉으면 돼. 잠시 뒤 에어쇼가 시작될 거야.” 육민성이 웃으며 말했다. “다른 곳은 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사람이 워낙 많아서 자칫하면 길을 잃을 수도 있거든.” “고마워요.” 최수빈은 그를 바라보았다. “선배는 일 보러 가요. 우리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요.”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해.” 육민성이 떠난 뒤 최수빈은 좌석에 앉아 먼 곳에 있는 비행기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청운x7은 멋지게 완성되었고 전시회에서도 몇 번이나 언급되었다. 오늘 인터뷰를 한 사람은 적지 않았다. 중심 자리에 항공우주 산업계 유명 인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멀리 있던 주예린은 주민혁이 주시후를 안고 박하린과 함께 그들 쪽으로 오는 걸 보았다. “너는 왜 여기 있어?” 주시후는 주예린을 보더니 짜증 난다는 표정을 해 보였다. 주예린과 최수빈이 어떻게 이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일까? “여긴 잘난 사람들만 앉을 수 있어. 자기 자리도 아닌 데 앉았다가 쫓겨나면 창피하겠다.” “예의 차려.” 주민혁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차갑게 말했다. 위압감 넘치는 모습이었다. 주민혁은 주시후를 아꼈지만 주시후는 사실 은근히 주민혁을 두려워했다. 주시후는 곧바로 입을 다물고 억울한 표정으로 박하린을 바라보았다. 박하린은 싱긋 웃었다. “오빠, 시후는 아직 어려서 철이 없어. 앞으로 잘 가르치면 되지. 왜 그렇게 무섭게 굴어?” 최수빈은 그들을 힐끗 본 뒤 깔끔히 무시했다. 그들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진승우는 경멸에 찬 미소를 지으며 최수빈을 무시했다. 뻔뻔하게 주민혁을 따라 이곳까지 오다니. 게다가 이 자리에 앉은 걸 보면 뭔가 수단을 쓴 듯한데 그들의 앞에서 도도한 척까지 했다. ‘우리가 그 속셈을 모를 것 같아?’ 최수빈은 안쪽에 앉아 있고 주예린이 바깥쪽에 앉아 있었다. 주민혁은 힐끔 보더니 주예린의 곁에 앉았다. 주시후는 주민혁의 곁에 앉은 뒤 자신의 옆자리를 툭툭 치면서 말했다. “하린 이모, 앉아요!” 박하린은 싱긋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주민혁이 옆에 앉아 주예린은 긴장해서 작은 손으로 옷을 꽉 쥐며 조심스럽게 주민혁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주민혁은 아이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주시후와 박하린만 신경 썼고, 주예린은 진심으로 실망했다. 에어쇼가 시작되었다. 화려하고 웅장한 광경에 잇따라 환호가 터져 나왔고 어린아이들도 흥미진진하게 에어쇼를 관람했다. “하린 이모, 이모는 앞으로 저런 전투기를 설계하는 건가요? 너무 멋져요!” 박하린은 웃었다. “전투기가 좋아? 그러면 이모가 작은 모형을 만들어줄게.” “좋아요!” 주예린은 그들의 대화를 듣고 부러워했다. 그녀도 전투기가 매우 좋았으나 티를 내지는 않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에어쇼가 끝난 뒤 앞에 있는 무대에서 공연이 이어졌다. 앞자리의 어른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주예린은 자리에서 일어나도 볼 수 없었다. 주민혁은 주시후를 안아 들었고 주시후는 주예린을 향해 짓궂은 표정을 지었다. 주예린은 코웃음을 치면서 의자를 밟고 일어섰다. “키 작은 애들은 안겨야 하지만 난 이러고도 볼 수 있어!” 주시후도 코웃음을 쳤다. “난 앞으로 키 클 거야. 그리고 넌 아빠가 없잖아.” 그 말에 상처를 받은 주예린은 흥미진진하게 에어쇼를 보다가 금세 풀이 죽었다. 최수빈은 미간을 찌푸리면서 주시후를 향해 차갑게 말했다. “그래. 그리고 너는 엄마가 없지.” 주시후는 흠칫했다. 박하린도 놀랐다. 그녀는 최수빈이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다. 주민혁은 언짢은 기색을 드러내며 말했다. “최수빈, 왜 아이랑 싸우려고 들어?” 최수빈은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러는 주민혁 씨는 왜 여자랑 싸우려고 들어요?” 최수빈은 그를 무시하고 주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엄마 여기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주예린은 이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민혁은 줄곧 표정이 굳어 있었다. 그의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요즘 들어 최수빈이 그를 매우 적대시하는 것 같았다. 공연이 끝날 때까지 주민혁과 최수빈은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공연이 끝날 때쯤 최수빈은 주시후를 내려놓았고 이때 주예린이 말했다. “엄마,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래.” 주예린은 의자에서 뛰어내리려다가 실수로 발을 삐끗하여 넘어졌다. “꺅!” 주예린은 눈을 꼭 감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프지 않았다. 큰 손이 주예린을 안았기 때문이다. 뒤늦게 눈을 뜬 주예린은 자신이 아빠의 품에 안겨 있는 걸 발견했다. 아빠의 품은 아주 넓고 따스했다. 주예린은 살짝 놀랐지만 이내 코끝이 찡했다. ‘아빠가 나를 신경 쓰는 거 맞겠지?’ 주예린은 저도 모르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빠...” 주민혁은 차가운 눈빛으로 주예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방금 뭐라고 했어?” 제10화 주민혁의 섬뜩한 기운을 느낀 주예린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움츠러들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작게 말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주예린은 속상한 마음에 눈시울이 빨개졌지만 울지 않으려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주예린은 아빠가 자신을 받아주려는 건 줄 알았다. 최수빈은 조금 전 상황에 깜짝 놀랐다. 주예린은 그녀의 반대 방향으로 넘어졌고 주예린을 받아주고 싶었으나 거리가 멀어서 그러지 못했다. 그래도 다행히 주예린은 다치지 않았다. 최수빈은 주예린을 주민혁의 품에서 건네받은 뒤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우리 예린이 많이 놀랐지? 다치지는 않았어?” 주예린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지금 말을 하면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주시후는 그 모습을 보자 불쾌해졌다. 최수빈은 오랫동안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그를 안아주지도 않았다. 주시후는 어쩐지 엄마가 조금 보고 싶었다. 게다가 조금 전 최수빈이 그에게 너는 엄마가 없다고 했을 때 주시후는 살짝 슬펐다. 그러나 엄마가 없으면 하린 이모가 옆에 있어 줄 테니 그걸 생각하면 손해는 아닌 것 같았다. 어차피 엄마가 그를 진짜로 버리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조금 전에 한 말도 다 홧김에 한 말일 것이다. 최수빈은 주민혁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주예린을 안고 떠나려고 했고, 주민혁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최수빈의 태도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으니 아무리 주민혁이라고 해도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최수빈은 대체 언제까지 심술을 부릴 생각인 걸까? “아이도 감사하다고 할 줄 아는데 최수빈 너는 왜 아무 말도 안 해?” 최수빈은 걸음을 멈추더니 고개를 돌리며 차갑게 웃어 보였다. “주민혁 씨가 예린이한테 빚진 거 이딴 걸로는 절대 못 갚아요.” 말을 마친 뒤 최수빈은 주민혁의 표정 따위 신경 쓰지 않고 주예린을 안고 떠났다. 주민혁은 최수빈이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알지 못했기에 미간을 찌푸리면서 차가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의 착각이 아니라면 조금 전 최수빈의 눈동자에서 보였던 것은 증오였다. 진승우는 옆에서 코웃음을 쳤다. “예전에는 형 앞에서 잘 보이려고 그렇게 애를 쓰더니 왜 갑자기 저렇게 차갑게 군대요? 설마 밀당하는 걸까요?” 주민혁은 얼굴을 찡그리면서 진승우가 말한 밀당이라는 단어를 생각해 보았다. 어쩌면 정말로 그런 걸지도 몰랐다. 그래야 모든 것이 설명되었다. ... 전시회가 끝난 뒤 최수빈은 주예린을 데리고 선생님과 함께 식사하러 가는 길에 송미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받았다. 전화를 받자마자 송미연이 불같이 화를 냈다. “수빈아, 너 실시간 검색어 봤어?” 송미연은 최수빈의 소꿉친구였다. 송미연이 화를 내자 최수빈은 웃으며 말했다. “실시간 검색어? 혹시 네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사고라도 쳤어?” “지금 그런 농담을 할 때야? 네 남편 바람피웠어!” 송미연은 이를 악물었다. “너 지금 어디야? 내가 지금 당장 너랑 같이 가서 그 빌어먹을 자식을 죽여버리겠어!” 최수빈은 흠칫한 뒤 고개를 숙여 실시간 검색어를 확인해 보았다. 대부분이 항공전과 관련된 검색어였고 사람들은 하나같이 우리나라의 국력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그사이에 조금 다른 내용의 검색어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주민혁이 가족들과 함께 항공전을 보러 왔다는 내용이었다. 최수빈은 그걸 본 순간 기분이 언짢아졌다. 사진 속에는 주민혁과 박하린, 주시후가 다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행복한 가족 같아 보였다. 최수빈은 그들이 단순한 친구 사이가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고 사진까지 찍힌 걸 보니 기분이 좋을 수가 없었다. 그동안 최수빈은 한심하게도 그들을 위해 남의 자식을 5년 동안 키웠다. 그녀는 주시후를 친아들처럼 키웠지만 주시후는 친모가 돌아오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박하린을 최고라고 여겼다. 박하린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최수빈은 평생 주시후가 자신을 그렇게 싫어했다는 것을 몰랐을 것이다. 지난 생에 이때쯤 주시후가 항상 그녀를 차갑게 대하고 그녀에게 화를 낸 이유가 있었다. 5년간 주시후에게 애정을 쏟아부었건만 결국 헛수고였다. 최수빈은 차분히 말했다. “전시회에서 만났어.” “그런데 왜 이렇게 덤덤한 거야?” 송미연이 말했다. “너무 화가 나서 미친 건 아니지?” “미연아.” 최수빈이 말했다. “나 이혼할 거야.” “이혼?” 송미연은 당황했다. 그녀는 최수빈이 이런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그녀는 최수빈이 주민혁을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 최수빈이 갑자기 이혼을 결심했다는 건 아주 큰 상처를 받았다는 걸 의미했다. “그 사람이 또 너한테 상처 준 거지?” 송미연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그런 거라면 내가 절대 가만 안 둘 거야. 이혼한다고 해서 그냥 넘어갈 수는 없어! 꼭 복수해야지.” 최수빈은 시선을 내려뜨렸다. 그녀는 송미연이 자신을 아껴서 그런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최수빈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이제는 좀 정신을 차려야 할 것 같아서.” 송미연은 그 말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여전히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진짜야? 혹시 무슨 일 생기면 나한테 얘기해.” “걱정하지 마. 무슨 일 생기면 꼭 너한테 얘기해서 네게 짐이 될 테니까.” “그 사람이랑 일찌감치 이혼해야 했어. 그래도 이제라도 이혼한다니까 정말 다행이다.” 송미연은 끝없이 재잘댔고 최수빈은 그녀의 잔소리를 들으면서 엷은 미소를 지었다. 푸른 하늘 아래 딸의 손을 잡고 길을 거닐며 친한 친구의 잔소리를 들으니 행복했다. 행복이란 이토록 단순한 것이었다. 그러나 지난 생에는 주민혁에게만 신경을 쓰다 보니 이런 사소한 행복들을 전부 놓치고 말았다. ... 송미연과의 통화를 끝낸 뒤 최수빈은 육민성이 얘기한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그들은 프라이빗 룸을 예약했고 최수빈은 일찍 도착해서 그들을 기다렸다. 그녀가 잠시 뒤 어떻게 선생님을 마주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며 한재준과 육민성이 함께 들어왔다. 최수빈은 주예린을 데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선생님.” 오랜만에 만났는데 그 사이 한재준은 많이 늙어서 흰머리가 많았다. 한재준은 대꾸하지 않았고 최수빈은 마음이 아파서 심호흡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한재준을 선생님이라고 부를 자격이 없었다. 커리어를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을 때 그녀는 이미 그 자격을 박탈당했다. 최수빈은 입술을 깨물며 주예린을 향해 말했다. “예린아, 할아버지한테 인사해야지.” 주예린은 순한 얼굴로 예의 바르게 말했다.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주예린은 목소리가 앳되고 귀여웠으며 웃는 모습이 사랑스러웠다. 한재준은 주예린을 보는 순간 곧바로 미소를 지으며 주예린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최수빈을 바라보며 말했다. “참 귀여운 딸을 낳았네.” 주예린은 주민혁과 최수빈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얼굴이 인형처럼 귀엽고 예쁘장했다. 육민성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앉아서 식사하시죠.” 육민성이 중간에서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최수빈은 어떻게 한재준을 마주해야 할지 몰랐을 것이다. 한재준이 배은망덕한 그녀와 함께 식사를 해주는 것만으로도 최수빈에게는 크나큰 영광이었다. 그녀는 한재준이 자신을 평생 보지 않을 줄 알았다. “시간이 참 빠르죠. 수빈이 예전에는 진짜 철없고 장난기도 많아서 매일 저랑 먹는 거로 다퉜잖아요. 그런데 이젠 이렇게 큰 딸까지 뒀어요.” 육민성은 과거를 회상했다. 그는 최수빈이 커리어를 포기했던 것이 너무 안타까웠다. 한재준은 차가운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겨우 남자 하나 때문에 뭐든 다 포기하려고 했으니 얼마나 어리석어.” 주예린이 있었기 때문에 한재준은 차마 심한 말을 하지 못했다. 최수빈은 딸을 보며 말했다. “예린아, 할아버지와 아저씨를 위해서 여기 직원분께 우롱차를 가져다 달라고 해줄래? 그리고 예린이가 마시고 싶은 음료수도 가져오도록 해.” “네.” 주예린은 그렇게 대답한 뒤 콩콩 뛰어서 밖으로 나갔다. 주예린이 떠난 뒤 한재준이 말했다. “민성이가 그러더라. 너 곧 이혼할 거라고. 우리 업계에서 일하고 싶은 거니?” “네.” 주예린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당시에 석박사 통합 과정을 포기해서 지금은 일자리를 찾는 게 쉽지 않아요.” 지금은 학벌이 중요한 시대였다. 그녀가 주상 그룹에서 일한 적이 있는 건 사실이지만 그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네가 넣은 이력서 봤어. 우리 연구원 기준엔 미달이야.” 최수빈은 거절당할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게 용서해달라고 할 낯짝도 없었다. 육민성은 분위기가 좋지 않자 곧바로 입을 열어 분위기를 풀었다. “오랜만에 만나는 건데 그런 얘기는 접고 식사에 집중하죠.” ... 다른 한편, 주예린은 직원에게 차를 부탁한 뒤 냉장고 앞에 서서 음료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마침 주민혁 일행이 안으로 들어오며 주예린을 발견했다. 진승우는 주예린을 보더니 혀를 찼다. “정말 징글징글하네. 밥 먹는 데까지 따라와? 아무리 우연인 척하고 싶어도 정도라는 게 있지. 어쩌면 이렇게 뻔뻔할까?” 주예린은 냉장고 안에 단 한 병 남은 음료수를 발견했고, 아주 맛있어 보여서 냉장고 문을 열어 그 음료수를 꺼내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누군가 먼저 선수를 쳤다. “잘됐다! 나 이거 좋아하는데!” 주시후는 주예린을 향해 으스대며 말했다. “나 대신 냉장고 문 열어줘서 고마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