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길에 오른 너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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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승준은 첫사랑과 결혼하기로 했다. 7년을 함께한 여자, 강시아는 눈물 한 방울, 원망 한 마디 없이 승준을 축복했고, 그의 결혼식을 직접 준비해주기...

Chương (1)

第1章

구승준은 첫사랑과 결혼하기로 했다. 7년을 함께한 여자, 강시아는 눈물 한 방울, 원망 한 마디 없이 승준을 축복했고, 그의 결혼식을 직접 준비해주기까지 했다. 그리고 승준의 결혼식 날, 시아 역시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웨딩카 두 대가 거리를 스쳐 지나가고, 서로 다른 부케가 하늘을 가르던 순간, 시아의 입에서 마지막 인사가 흘러나왔다. “행복하길 바랍니다.” 그제야 승준은 깨달았다. 시아를 향해 달려가 여자의 손을 붙잡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시아야, 넌 내 사람이야.” 그 순간, 시아의 웨딩카에서 내린 한 남자가 그녀를 품에 안으며 차분히 물었다. “이 여자가 당신의 사람이라면... 저는 누구의 사람이었을까요?” 제1화 7년을 기다렸어 강시아는 사직서를 다 작성하고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봤다. 대형 전광판에서는 구승준과 진은채의 결혼 소식이 벌써 일주일째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주위 사람들은 모두 말했다. 승준은 은채를 미친 듯 사랑한다고. 하지만 아무도 모른다. 시아가 승준의 곁을 지켜온 시간이 무려 7년이라는 사실을. 열여덟 살부터 스물다섯 살까지.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간을 시아는 모두 승준에게 바쳤다. 하지만 그 남자는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 하고, 이제 시아도 떠나려 한다. 결혼식을 올리는 날, 승준의 세상엔 시아라는 사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시아는 시선을 거두고, 사직서를 접어 하얀 봉투에 넣었다. 그 순간, 사무실 문이 열리면서 승준이 들어왔다. 검은 셔츠에 검은색 바지. 길게 뻗은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오는 모습에 강한 아우라가 느껴졌다. 차가운 고급스러움이 그의 몸에 배어 있었다. 시아는 아직도 승준을 처음 만난 그날을 기억하고 있다. 역시 검은 셔츠 차림으로 바 한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마치 모든 걸 잃은 듯 낙담한 눈빛이었다. 그때 승준의 집안은 파산 상태였고, 밀린 술값은 손목시계를 맡겨서 해결하던 때였다. 시아는 대신 나서서 그 시계를 찾아주면서, 승준을 자신의 인생에 끌어들였다. 그러나 진흙 속에 묻힌 용은 결국 하늘로 솟는 법. 승준은 다시 일어섰고, 지금의 구영시 재벌가의 자리에까지 올라왔다. “내가 문자 보냈는데 왜 답이 없어?” 승준의 날카로운 시선이 시아 손에 든 봉투에 꽂혔다. 시아는 봉투를 쥔 채 창밖을 가리켰다. “대표님과 은채 씨의 결혼 홍보 영상을 보고 있었습니다.” 승준의 눈빛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 홍보 영상, 네가 직접 기획한 거잖아. 뭘 더 볼 게 있다고.” 그렇다. 그 영상은 시아가 직접 기획한 것이었다. 영상 속 승준과 은채의 모든 사진, 모든 달콤한 순간, 모든 사랑의 문구 하나하나까지 시아가 직접 구상하고 정리해 넣었다. 그때 승준은 시아에게 말했다. “이건 네가 직접 해. 다른 사람이 하면 은채가 안심이 안 된대.” 승준과 은채의 관계는 고작 3개월 전에 시작된 것이지만 두 사람의 감정은 학창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7년 전, 은채가 외국으로 유학을 떠나고 구씨 가문이 파산하면서 둘은 헤어지게 되었다. 3개월 전, 은채가 가족과 함께 귀국하자 승준은 은채와 다시 인연을 이어갔고, 화려하게 프러포즈까지 했다. 시아가 승준의 곁을 지킨지도 벌써 7년이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 승준이 시아와 결혼할 거라 생각했고, 심지어 시아 스스로도 그렇게 믿고 있었다. 3개월 전, 승준이 시아에게 좋아하는 반지 디자인을 고르라고 했을 때, 시아는 자기 손가락 사이즈로 반지를 골랐다. 하지만 그날 밤, 불꽃놀이가 터지던 순간 승준이 말했다. “반지 이리 줘.” 시아가 온 마음을 다해 고른 반지를 건네자 승준은 그대로 돌아서서 무릎을 꿇고 은채의 손가락에 끼웠다. 찬란한 불꽃이 하늘을 수놓는 그 순간, 시아는 남자가 은채에게 하는 말을 들었다. “7년을 기다렸어. 그 오랜 시간 동안... 단 하루도 너 없이 산 적 없어.” 그 순간, 시아의 마음은 그 불꽃처럼 산산이 부서졌다. 다시는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승준의 말에 따르면 그 모든 날들 속에서 남자의 마음을 차지하고 있던 것은 은채였다. ‘그럼 그 이천오백 일 동안 너의 곁에서 일하고, 술에 취한 너를 챙기고, 너의 품에 안겨 잠든 난 뭐지?’ 하지만 시아는 그 질문을 입밖으로 내뱉지 않았다. 왜냐면 승준과 은채의 결혼 자체가 그 질문의 답이었으니까. 승준을 7년이나 지켜온 것은 아무 의미도 없었다. 둘이 학창 시절 나눴던 짧은 첫사랑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그 7년 동안 승준은 여자에게 어떤 약속도 하지 않았다. 언제나 여자 혼자만의 기대였고, 그 기대가 무너졌다고 해서 승준을 탓할 수도 없었다. 시아는 흐트러졌던 감정을 정리하고, 담담한 표정으로 자신이 7년 동안 짝사랑했던 남자를 바라봤다. “대표님, 무슨 지시사항 있으신가요?” “오늘 밤 나랑 진씨 가문에 같이 가. 선물은 네가 알아서 준비하고.” 승준은 형식적인 말투로 지시했다. “네.” 시아는 승준의 비서였다. 어떤 요구든 언제나 응하는 위치. 승준은 시아의 얼굴을 훑어보다가 뭔가 이상함을 느꼈다. “시아, 너...” 세 글자까지만 말하고 멈췄다. 승준도 그 느낌이 무엇인지 정확히 설명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요즘 통 잘 웃질 않네.” 결국 승준은 그렇게 말했다. 온통 은채에게만 관심을 쏟아온 승준은 시아가 웃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알아챘다. 시아는 즉시 입꼬리를 올려 정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앞으론 좀 더 신경 쓰겠습니다. 대표님.” “시아야.” 승준이 낮은 소리로 시아의 이름을 불렀다. “네가 지금 맡고 있는 이 비서 자리는 어떤 일이 있어도 바뀌지 않아. 내년에는 부대표로 승진도 시킬 생각이야.” 작은 비서에서 시작해 대표의 비서실장, 곧 부대표 자리까지. 그건 지난 7년 동안 승준이 시아에게 준 보상의 결과였다. 하지만 승준은 몰랐다. 시아가 진짜로 원했던 건 그런 직위가 아니었다는 걸. 여자가 바랐던 건 단 하나. ‘구승준의 와이프’라는 자리였다. 그러나 그건 시아 혼자만의 착각이자 환상일 뿐이었다. “알겠습니다.” 시아는 미소 띤 얼굴로 승준의 말을 받아들였다. 7년 동안, 승준이 주는 것에 시아는 뭐든 받아들였고, 주지 않는 것에 한 번도 목맨 적 없었다. 승준은 설명할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고, 시아를 바라보는 눈빛이 점점 차가워졌다. “전제 조건, 어떤 실수도 없어야 한다는 거야. 특히 결혼식에서.” “걱정 마세요. 대표님과 은채 씨의 결혼식, 제가 완벽하게 준비해 드리죠.” 시아가 약속했다. 승준은 시아를 몇 초간 바라보다가 돌아섰다. 그때, 시아 손에 들린 흰 봉투가 승준의 눈에 들어오고, 남자는 발걸음을 멈췄다. “그거, 뭐야?” 제2화 고수였다 “사직서예요.” 시아는 숨김없이 말했다. 승준은 예전부터 말해왔었다. 거짓말을 제일 싫어한다고. 아무리 선의라도 용납 못 한다고. 승준의 얼굴에 드리운 먹구름이 더 짙어졌다. “앞으로 누가 사직서를 내든 인사팀에 바로 넘겨. 네가 나설 일 아냐. 시간 남아도는 거면 가서 외할머니나 챙겨드려.” 쾅!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시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서서히 사라졌다. “이건 내 사직서야.” ———— 저녁 6시. 시아는 승준과 함께 진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차가 막 멈추자마자, 은채가 하얀 강아지를 안고 달려 나왔다. 은채는 승준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수줍은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여자 품에 있는 강아지는 승준을 향해 연신 짖어댔다. “도니, 그러지 마. 아빠잖아.” 은채의 그 한마디에 시아의 입꼬리가 살짝 떨렸고, 곁눈질로 승준을 힐끔 바라봤다. 승준은 평소 강아지나 고양이를 좋아하지 않았다. 털 알레르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승준은 손을 내밀어 강아지 머리를 툭툭 두드렸다. “도니라고? 다음에 또 나한테 짖으면, 너희 엄마한테 너 입양 보내라고 할 거야.” 시아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섰다. 강아지 머리를 툭툭 두드리는 승준의 손을 바라보며 가슴 깊은 곳에 시큼한 감정이 번졌다. 예전에 시아도 고양이를 키운 적이 있었다. 그것도 철장 안에서 조심스럽게. 하지만 승준은 알레르기를 이유로 그 고양이를 보내라고 했었다. 그런 남자가, 지금은 은채의 강아지를 쓰다듬으며 말을 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선 알레르기도 사라지는 법이구나.’ “승준아, 아빠 엄마 안에서 기다리고 계셔.” 무용을 전공한 여자답게 은채는 몸매는 가늘고 유연했으며, 말투며 시선 하나하나에 부드러움이 묻어 있었다. 사르르 녹아드는 그런 여자... 좋아하지 않을 수가 없다. 여자인 시아조차 은채를 봐도 한 번 더 돌아보게 되는 외모였다. 두 사람은 다정하게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갔다. 뒤따르는 시아는 운전기사와 함께 크고 작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뒤를 따랐다. 오늘 이 자리는 양가가 결혼식 세부 사항을 조율하기 위한 자리였다. 시아는 한쪽에 앉아 노트를 펴고 빠르게 메모를 해 나갔다. 직업적으로도, 태도 면에서도 흠잡을 데 없었다. “우리가 생각한 건 이 정도야.” 은채 아버지가 말을 마쳤을 무렵, 시아의 노트에는 이미 빼곡한 메모가 가득했다. 하지만 은채 어머니는 여전히 못 미더운 눈빛으로 물었다. “시아 씨, 다 적으셨어요? 빠진 거 없죠?” “엄마, 걱정 그만하세요. 강 비서님 얼마나 일 잘하는데요.” 은채는 시아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강 비서님이 이렇게 유능하니까 그동안 승준이 곁을 지켜왔던 거죠.” 승준의 팔을 살짝 흔들며 말했다. “그치? 승준아?” “강 비서는 뭐든 확실하게 하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승준은 시아를 힐끗 바라보며 무심하게 대답했다. 표정은 담담했지만 그 시선엔 경고가 담겨 있었다. 실수하지 말라는 그런 경고. 은채가 말한 것처럼 시아는 그 오랜 시간 동안 승준의 곁에서 공사 구분 없이 모든 걸 맡아왔고, 한 번도 실수한 적 없었다. 세상 그 누구도 시아를 의심할 수 있지만 승준만은 그러면 안 됐다. 그런데 그런 경고를 한다니. 시아의 식어버린 마음이 더 차가워졌다. “결혼식 때 강 비서님이 내 들러리 해줬으면 좋겠어.” 은채는 눈을 반짝이며 시아를 바라봤다. “강 비서님, 괜찮으세요?” 시아는 그날 자신의 스케줄을 떠올렸다. “죄송합니다. 그날은 일정이 있어서요.” “승준아.” 은채는 애교 섞인 목소리로 승준에게 기대며 말했다. “그날은 제발 강 비서님한테 다른 일 맡기지 마. 그냥 드레스 입고 옆에서 우리 행복한 순간을 지켜봐 줘야지.” 시아의 가슴이 무너져내렸다. 은채는 정말 고수였다. 겉으론 아무것도 아닌 듯 말하지만 말 한마디에 상대의 숨통을 조르고, 천진난만한 얼굴로 칼을 꺼내드는 기술자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시아는 말이 없었다. 승준은 피곤한 듯 미간을 자주 문질렀다. 차는 풍림원에 도착했고, 시아는 평소처럼 형식적인 태도로 인사했다. “대표님, 안녕히 주무세요.” “나 알레르기 올라왔어. 연고 좀 찾아줘.” 승준은 말하며 넥타이를 풀었다. 목덜미와 쇄골 사이로 붉은 두드러기가 퍼져 있었다. 제3화 누가 우리 끝났다고 했어? “대표님, 병원에 가시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요.” 시아는 단호하게 말하며 승준의 손을 뿌리쳤다. 처음이었다. 시아가 승준에게 ‘안 된다’고 말한 건. 승준의 이마에 깊게 패인 주름이 더 깊어졌다. 그리고 말없이 시아의 손목을 잡고는 억지로 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문을 발로 차며 닫는 소리에 현관이 쿵 울렸다. “지금 너 삐친 거 내가 모를 줄 알아?” 승준의 눈빛은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알고 있었구나.’ 알고 있으면서 승준은 여전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심장 밑바닥부터 올라온 시큰한 감정이 콧끝까지 밀려 올랐다. “넌 나랑 7년 동안 한 침대에서 잤어. 이제 와서 말도 없이 날 버린다고? 내가 억울해할 자격도 없어?” 승준은 은채와 함께하기로 마음먹기 전 시아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설령 그저 연인이었다 해도 이제 필요 없어졌다면 한마디는 해야 했다 하지만 승준은 그러지 않았다. 마치 시아가 그냥 회사의 일개 비서일 뿐인 것처럼 시아 눈앞에서 다른 여자와 공개적으로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누가 우리 끝났다고 했어?” 승준은 견디기 힘든 듯 셔츠의 단추를 세게 당겼다. 딸각딸각 떨어지는 단추 소리와 함께 셔츠가 활짝 열리며 붉은 두드러기로 뒤덮인 가슴이 드러났다. 시아는 몇 번 승준의 알레르기를 본 적이 있었기에 지금 얼마나 고통스러운 상태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자신에게 말하면서도 결국 참지 못하고 연고를 챙겨왔다. 시아의 손과 약이 승준의 뜨거운 손에 닿는 순간 승준은 시아의 손을 단단히 붙잡았다. “나는 단 한 번도 널 버리겠다고 말한 적 없어. 너도 그랬잖아. 날 떠나지 않겠다고. 그 약속, 잊으면 안 돼.” 승준이 그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니. 시아는 승준이 이미 잊은 줄 알았다. 예전에 승준을 집에 데려온 후, 시아는 남자의 얼굴에 반해버렸고, 작은 고시원 방에서 둘은 함께 밥을 먹고 자고, 사랑을 나눴다. 그러던 어느 날, 돈이 완전히 떨어졌다. 승준은 인형탈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다. 무더운 여름, 두꺼운 팬더 옷을 입고, 아이들 손을 붙잡으며 거리를 돌아다녔다. 번 돈으로 시아에게 음식을 사다 주면서도 힘든 내색 한마디 한 적 없었다. 결국 승준은 거리에서 탈진해 쓰러졌다. 그때 시아가 물었다. 왜 그렇게까지 하냐고. 승준은 이렇게 대답했다. “내 여자가 고생하게 둘 순 없잖아.” 그 한마디에 시아의 마음은 송두리째 넘어갔다. 그 후로 7년 동안 한 번도 흔들림 없이 승준의 곁을 지켜왔다. 7년 동안, 승준은 분명 시아에게 모든 따뜻함과 애정을 주었다. 심지어 친구들이 시아에 대한 승준의 사랑을 의심했을 때도 그녀는 당당하게 말했다. “승준이는 평생 나 말고 다른 여자랑 절대 결혼할 리 없어.” 하지만 현실은 늘 그렇게 입으로 먼저 말한 사람을 난처하게 만든다. 승준은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하게 되었다. “너 이제 결혼할 사람이 있잖아. 지금 이런 말이 무슨 의미가 있어?” 시아의 눈에 조명이 비추며, 그 속에 맺힌 물방울들이 반짝거렸다. “시아야, 내가 진짜 결혼하고 싶은 사람은 너야.” 승준의 손이 시아의 얼굴에 부드럽게 스쳤다. “내가 왜 은채와 결혼하는지는... 결혼식 날이 되면 알게 될 거야.” “내 인생이 가장 힘들었던 순간 옆에 있어준 건 너야. 그 자리는 아무도 대신 못 해.” 승준의 눈동자는 밤처럼 깊고 어두웠다. “꼭 기억해. 나와 은채는 그냥 보여주기식일 뿐이야. 꼭 날 믿어줘.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승준은 시아의 손에 입을 맞췄다. “날 믿어주면 안 될까?” 시아는 믿지 않았다. 정말 자신을 와이프로 삼고 싶었다면 이미 성공을 이루고 난 7년 동안 기회는 숱하게 많았다. “승준아...” 입술까지 올라온 말을 채 다 내뱉기도 전 소파 위에 둔 승준의 핸드폰이 울렸다. 시아는 화면에 뜬 발신자를 보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요양원이었다. ‘참, 나 핸드폰 차에 두고 내렸지. 설마 외할머니한테 무슨 일 생긴 거야?’ 시아는 빠르게 전화를 받았다. “네, 강시아입니다... 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시아는 승준을 바라봤다. 외할머니가 승준을 찾았다. 시아는 승준을 데리고 가야 할지 아직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 망설이고 있었다. 제4화 못 지킬 약속은 왜 했어? “아가, 이건 외할머니가 네 결혼식 하라고 모아둔 돈이란다. 너랑 승준이가 이제 결혼하게 될 거니까 필요한 거 있으면 이걸로 준비해라.” 외할머니는 시아의 손을 꼭 붙잡고, 그 손을 승준의 손 위에 겹쳐 올리고, 두 사람이 맞잡은 손에 카드를 쥐여주었다. 시아의 얼굴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외할머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볼 자신이 없었다. 승준의 결혼 소식은 이미 온 세상에 퍼졌고, 외할머니 역시 분명 봤을 것이다. 하지만 기억이 흐려진 외할머니는 신부가 당연히 시아라고 믿고 있었다. “승준아, 외할머니랑 약속해. 시아한테 잘해주겠다고.” 외할머니는 승준의 손을 붙잡고 간절히 당부했다. “걱정 마세요, 외할머니. 시아한테 평생 잘할 거예요. 우린 생사고락을 함께하기로 약속도 했거든요. 이생이 다할 때까지 절대 손 놓지 않을 거라고.” 승준의 말에 시아의 심장이 다시 한번 쿡 찔렸다. 4년 전, 출장 중에 승준은 시아를 데리고 만불산에 간 적이 있었다. 그곳 삼생석 앞에서 두 사람은 세 번 절을 올리며 맹세했다. 이번 생뿐만 아니라 다음 생까지도 함께하겠다고. 절대 떨어지지 않겠다고. 하지만 두 사람은 이번 생조차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 맹세는 결국 깨지기 위해 존재했고, 약속은 배신을 위한 도입부일 뿐이었다. “시아야, 승준아, 결혼식 날 꼭 나 데리러 와야 해. 외할머니가 너희 둘 결혼식을 보고 싶어.” 외할머니는 다정히 당부했다. “외할머니, 꼭 올게요. 저희가 절도 올려야 하잖아요.” 승준은 외할머니 앞에서만큼은 회사 대표도, 냉정한 남자도 아닌 그저 시아의 연인이었다. 요양원을 나선 후 시아는 가슴 깊숙한 곳까지 무언가로 꽉 막힌 듯 답답했고, 눈가엔 금세 눈물이 맺혔다. “못 지킬 약속은 왜 약속했어?” ‘나와 결혼할 생각도 없으면서 왜 결혼하겠다고 말한 거야?’ ‘외할머니 데리러 갈 일도 없으면서 왜 그렇게 말했어?’ 승준은 고개를 숙인 채 휴대폰을 확인했다. 은채가 보낸 메시지를 읽으며 손가락으로 답장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고는 무심히 입을 열었다. “조금 있으면 잊어버리실 거야. 일단 기분 좋게 해드리는 거야.” 승준이 방금까지 외할머니 앞에서 한 말들은 모두 거짓이었다. 달콤한 위로였고, 그저 일시적인 달래기일 뿐이다. 승준이 시아에게 했던 사랑한다는 말, 끝까지 함께하겠다는 말도 결국 같은 거였다. “은채가 야식 만들어서 갖다준대. 나 먼저 갈게. 넌 택시 타고 가.” 승준은 핸드폰 화면을 시아에게 들이밀며 은채와의 메시지까지 아무렇지 않게 보여주었다. 너무도 당당했다. 하지만 승준은 잊고 있었다. 시아는 승준의 여자이고, 승준이 사랑하는 사람은 시아였는데, 그런 시아에게 다른 여자와의 다정한 메시지를 보여주는 건 시아의 가슴을 칼로 찌르는 일이었다. “응.” 단 한 글자. 그 이상 말을 하면 눈물이 쏟아질까 봐 삼켰다. 마음은 이미 죽었지만 고통은 여전히 선명했다. 속이 찢기고, 폐까지 뜯겨나가는 듯한 통증이었다. 지난 3개월, 시아는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고통을 맛보고 있었다. ‘7일 뒤, 내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과연 넌 어떤 기분일까.’ ‘아픔이라는 걸 한 번을 느낄 수 있을까?’ 승준은 차를 타고 떠났고, 남자의 모습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입으로는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시아를 이 외로운 밤에 홀로 남겨두고 떠났다. 시아는 사랑에 눈 먼 사람은 아니었다. 은채가 돌아온 순간부터 승준의 마음이 자신에게서 떠났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승준은 시아를 완전히 놓지 않았다. 아마도 시아가 아직 승준에게 이용가치가 있어서일 것이다. 지난주, 시아는 승준이랑 친구 둘이 나눈 통화를 우연히 듣게 된 적이 있었다. “은채가 굳이 결혼식 준비를 시아한테 맡기지만, 않았어도 진작에 잘랐을 거야.” “...” 시아를 아직 곁에 있는 이유는 은채가 원했기 때문이었다. 시아는 손 안의 카드를 꼭 쥐었다. 손바닥이 아릴 정도였다. 뒤돌아본 요양원 창문에는 등이 굽은 외할머니의 실루엣이 희미하게 비치고 있었다. 시아는 고아였다. 시아의 어머니는 시아를 낳고 얼마 안 있어 세상을 떠났고, 외할머니가 시아를 맡아 길렀다. 이 세상에서 시아에게 가족이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존재가 할머니였다. 2년 전, 외할머니는 위암 말기 진단을 받았고, 지금껏 버텨온 것만도 기적이었다. 외할머니의 바람은 그저 손녀가 결혼해 행복하게 사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싶은 것이 전부였다. 시아는 폰을 꺼내 대화창 맨 위에 고정된 그 사람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나랑 결혼해줄래요?] 제5화 어떻게 날 이렇게 모욕해? “하지호 있잖아, 우리 구영시 재벌가 도련님, 곧 결혼한대!” “맞아, 한밤중에 갑자기 결혼 발표 나서 나 완전 한숨도 못 잤어. 도대체 누구랑 결혼하는지 너무 궁금해.” ... 시아는 티타임에 탕비실에서 몇 동료들이 들떠서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도 하지호를 알고 있었고, 몇 번 마주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지호는 시아를 도왔다. 한 번은 시아가 운전 중에 타이어가 펑크 나서 어쩔 줄 몰라 할 때 마침 그 옆을 지나가던 지호가 와서 타이어를 교체해 주었다. 또 한 번은 고객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상대가 술에 취해 시아한테 손을 대려고 하자 지호가 재빨리 취객을 끌어내서 거래도 지키고 시아의 체면도 지켜주었다. 그 밖에도 여러 차례 있었는데, 시아도 다 기억하지 못했다. ‘이 정도면 나는 하지호한테 은혜 많이 입었네.’ ‘결혼하면 축하 선물을 보내야지. 날 기억할지 모르겠지만...’ “언제 결혼해?” 커피 타러 가면서 시아가 물었다. “다음 주. 대표님이랑 같은 날에 결혼한대!” 커피잔을 들던 시아의 손이 덜컥 떨려서 뜨거운 커피가 손에 튀었다. “얘기 나누고 있어.” 시아는 그대로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말들이 들려왔다. “하하, 대표님 결혼하는 얘기를 왜 해. 강 비서님 마음 아프겠다.” “강 비서도 참 불쌍해. 대표님 곁에 몇 년이나 있었는데,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결혼식에 가서 축복해주는 처지가 됐으니.” “휴, 남자 마음이란 게 그렇지 뭐. 근데 하 대표님은 다르대. 자기 결혼 상대가 10년간 짝사랑한 여자라고 하더라고...” 오후 승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잠깐 나랑 같이 나가자.” “네!” 시아는 어디 가는지도 묻지 않았다. 묻는다고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알고 있었고, 지금은 승준과는 말 한마디도 더 하고 싶지 않았다. 시아는 하던 업무 인수인계 리스트를 저장하고 닫은 후 짐을 챙겨 승준을 따라나섰다. 차는 진씨 가문 저택 앞에 멈췄다. 은채가 공주처럼 발랄하게 달려와 승준 품에 안겨 승준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승준은 자연스럽게 웃으며 여자의 손을 잡고 말했다. “차에 타.” 은채가 차에 앉아 시아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 비서님, 승준이랑 웨딩드레스 입으러 갈 건데 미리 들러서 신부 들러리용 드레스 골라봐요.” 그게 바로 시아가 미리 두 사람의 행복을 지켜보게 하려는 뜻이었다. 승준과 은채는 뒷좌석에 앉았다. 은채는 승준에게 기대며 말했다. “하지호 결혼 소식 봤어? 우리랑 같은 날이래. 설마 우리 골탕 먹이려고 일부러 이날로 잡은 거 아니야?” 하지호와 구승준은 모두 이 바닥에서 유명한 귀공자이다. 하지만 가문 배경으로 따지면 하지호 쪽 배경이 훨씬 탄탄했다. 그쪽은 돈과 권력 모두 갖췄고, 구승준에게 있는 것은 돈이 전부였다. “그런 생각 하지 마. 그날 너는 가장 눈부시고, 사람들의 모든 시선을 사로잡는 신부가 될 거야.” 승준의 목소리는 달콤했다. 시아는 백미러를 통해 승준을 바라보았다. 언제부터인지 저렇게 자상하고 다정한 모습이었는지 기억조차 희미했다. “네가 있어서 참 좋아. 우리가 7년이나 함께하지 못하고 놓친 게 너무 아쉬워.” 은채가 아쉬움이 묻어나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 얼굴을 싹 바꿔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그래도 나한테 행운이 따른 거야. 네가 7년 내내 한결같이 날 사랑해줬으니까. 고마워.” 은채는 입술을 내밀어 다시 승준에게 입맞춤했다. 시아는 그 순간 시선을 거뒀다. 이미 승준을 포기했고, 마음을 끊었지만 남아있는 미련이 여전히 아팠다. “근데 자기도 7년 동안 여자 만난 적 있지?” 은채가 민감한 질문을 던졌다. 시아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고, 손가락이 휴대폰을 꼭 움켜쥐었다. 다시 백미러를 통해 승준을 바라보았다. 승준도 무언가 감지한 듯 고개를 돌려 시아와 눈을 마주치고 옆 여자에게는 달콤한 목소리로 말했다. “없어. 사람들 말은 믿지 마.” “있어도 괜찮아. 생리적으로 남자한테 여자는 필요한 존재잖아, 그치?” 은채의 너그러운 태도에 시아는 자신이 지켜오던 상식이 완전히 뒤집어진 느낌이었다. 시아는 은채가 일부러 자신을 모욕하려는 걸 알고 있었다. 은채는 계속 시아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얘긴 그만하자.” 승준이 얼버무렸다. “왜 그만해? 그 여자 좋아하게 된 거야?” 은채는 정말 막무가내였다. “아니야.” 승준은 단호하게 부인했다. “남자의 성욕과 사랑은 달라.” 시아의 마음이 조였다. 승준의 말은 자신을 단지 성적 욕구를 풀어주는 도구로 여긴다는 것이었다. ‘나와 결혼하지 않아도 되고, 사랑하지 않아도 상관없지만 어떻게 날 이렇게 모욕해?’ 제6화 신랑도 같이 붙여줘야죠 “강 비서님, 이제 그쪽이 승준이에게 어떤 존재였는지 알겠죠?” 드레스를 입어보던 중, 은채는 마침내 천진한 얼굴 뒤에 감춘 진짜 본색을 드러냈다. 시아의 마음은 이미 무뎌진 지 오래됐다. “은채 씨야말로, 승준이가 바닥일 때 떠났다가 잘나가게 되니까 돌아왔잖아요. 그럼 은채 씨는 뭐죠?” “그래서 뭐? 그래도 승준이가 사랑하는 건 나야. 밤을 같이 보내고, 인생의 바닥을 함께한 건 너지만, 결국 승준이가 선택한 건 나야.” 은채는 자신만만하게 웃음을 보였다. 그렇다.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시아는 그런 싸움에 끼고 싶지 않았다. 누가 더 능숙하게 남자를 붙잡느냐 따위엔 관심 없었다. “그래서 지금 저한테 이런 말 하는 이유가 뭐예요?” “결혼식 끝나면 다시는 네 얼굴 안 봤으면 좋겠어. 회사든 어디든,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은채는 직설적이었다. 시아는 환하게 웃었다. 밝고 당당한 웃음이었다. 시아가 먼저 떠나는 것이지 누구에게 쫓겨나는 건 아니었다. 시아는 일부러 은채의 요구를 무시하며 도발하듯 말했다. “그런 말은... 구 대표님한테 직접 하라고 하세요.” “아직도 승준이가 널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거야?” 은채의 눈에는 분노와 질투가 섞여 있었다. 시아는 이미 승준이 자신 손에 끼워준 반지를 빼서 은채 손에 끼워주는 모습을 보고 모든 미련을 끊어냈다. “드레스 정말 잘 어울리네요. 결혼식 날엔 더 예쁘실 거예요.” 시아는 그 말을 남기고 피팅룸을 나왔다. 승준은 이미 예복으로 갈아입고 있었다. 짙은 색 턱시도에 무테안경을 쓴 남자의 모습은 처음 만난 그날 그대로였다. 그때 시아는 이렇게 잘생긴 남자가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지금도 여전히 멋지고, 여전히 보는 사람을 설레게 하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시아는 결코 이 남자에게 다가가지 않았을 것이다. 멀리, 아주 멀리 했을 것이다. 비록 시간을 되돌릴 수 없지만 시아에게는 미래가 있다. 그러니 이제 승준을 자신의 미래에서 지워야 한다. “마음에 드는 거 있으면 골라.” 승준은 시아 앞에 멈춰 서며 드레스를 가리켰다. ‘지금 웨딩드레스를 골라서 뭐 해? 결혼식 날 난입이라도 하라는 건가?’ 시아는 그렇게 어리석지 않았다. “대표님, 드레스만 주지 마시고 신랑도 같이 붙여줘야죠. 있나요?” 시아는 비웃듯이 물었다. 승준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어졌다. “무슨 뜻이야?” 시아는 손끝으로 드레스 자락을 쓸었다. “갑자기 저도 결혼하고 싶어졌거든요.” “일부러 이러는 거야? 내가 말했잖아...” 승준이 뭐라도 설명하려던 찰나 피팅룸 문이 열리고 은채가 나왔다. 몇억짜리 웨딩드레스를 입은 은채는 완벽한 인형 같았다. 시아는 그 순간 잠시 넋을 놓았다. 그녀도 언젠가 저런 웨딩드레스를 입고 승준 옆에 서는 날을 꿈꿨다. 하지만 그건 꿈이었다. 깨질 운명의 덧없는 꿈. “승준아, 나 예뻐?” 은채는 다시 한없이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여자의 얼굴이었다. “응. 우리 은채가 제일 예뻐.” 그건 예전에 승준이 시아에게 했던 말이었다. 사람 마음은 하루아침에 식는 게 아니라지만 승준은 그렇게 말 한마디, 행동 하나로 시아의 마음을 하루하루 무너뜨렸다. “강 비서님, 나 예쁘죠? 비서님도 하나 골라보세요. 결혼할 때 승준이가 선물로 줄 테니까.” 은채는 환하게 웃으며 시아 손을 붙잡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은채 손끝 어딘가 날카로운 것이 스쳤다. 시아 팔뚝이 따끔하게 아팠다. 시아는 갑자기 느껴지는 고통에 은채의 손을 뿌리쳤다. 은채는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고, 넘어지면서 시아 손목을 움켜쥐었다. 결국, 두 사람은 함께 쓰러졌다. “은채야!” 승준이 외치며 달려갔다. 그는 은채를 받아냈지만 시아는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머리를 부딪쳤다. 순간의 충격이 웨딩숍 전체에 울려 퍼졌다. 시아의 머릿속은 윙윙 울리고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순간 은채가 던졌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아직도 승준이가 널 사랑한다고 착각하는 거야?” 답은 조금 전 그 순간에 있었다. 제7화 한 사람밖에 구할 수 없었어 시아는 운이 좋았다. 그렇게 심하게 넘어졌는데도 뇌진탕은 아니었다. 하지만 뒤통수에 생긴 커다란 손으로 만져질 정도였다. 고개를 숙이고 뒤통수를 만지며 걷던 시아는 길을 제대로 보지 않아 누군가와 정면으로 부딪쳤다. “죄송...” 사과를 하려 고개를 든 순간 익숙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지호 씨.” 하지호는 짙은 회색 실크 셔츠에 맞춤 제작된 슬랙스를 입고 있었고,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실루엣은 단정하고 절제된 고급스러움이 묻어났다. “다쳤어요?” 지호는 키가 컸다. 시아의 머리가 겨우 남자의 턱 밑에 닿을 정도였다. 지호는 시아의 뒤통수에 난 혹을 보고 있었다. “괜찮아요.” 시아는 뒷걸음질 치며 지호 손에서 벗어났다. 지호는 자연스럽게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고 그윽한 눈빛으로 시아를 살폈다. “도움이 필요해요?” “아니요, 괜찮아요.” 시아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는 뭔가 생각난 듯 말을 이었다. “결혼 축하드려요, 지호 씨.” 지호의 시선이 시아의 혹에서 얼굴로 옮겨지더니 그 깊은 눈 속에 잠깐 읽기 어려운 표정이 스쳤다. “시아 씨도요. 축하해요.” ‘무슨 축하?’ ‘사랑한 사람에게 버림받고 7년을 함께한 남자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는 걸 축하하라고?’ 하지만 시아도 결혼할 예정이다. 같은 날이니 굳이 따지자면 축하 인사를 받을 만했다. 시아는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이번에 크게 넘어져 유일하게 덕 본 것은 휴가를 낼 수 있는 핑계가 생긴 것이다. 시아는 그 틈을 타 자신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었다. 지금 살고 있는 이 집은 3개월 전까지만 해도 승준과 함께 살던 곳이었다. 하지만 승준과 은채가 다시 만나게 된 뒤 승준은 풍림원으로 옮겼고 여긴 시아 혼자만의 공간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집 안에는 승준의 흔적이 가득했다. 신발장에 있는 구두, 행거에 걸린 셔츠. 와인 선반 위에는 승준이 좋아하던 잔과 술병이 있었고 소파 위에는 종종 그가 덮던 담요도 있었다. 최근 3개월간 시아는 단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다. 마치 그 물건들이 그대로 있으면 승준이 다시 돌아올 것만 같아서였다. 하지만 시아는 알고 있었다. 자신도, 그 물건들도 이제 다시는 승준을 맞이할 수 없다는걸. 그래서 승준의 물건은 남기고 자기 옷, 신발, 생필품, 심지어 걸어둔 그림들과 소품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정리했다. 승준이 문을 열고 집에 들어왔을 때 어딘가 달라졌다는 걸 바로 느꼈다. 하지만 뭐가 달라졌는지는 금방 떠오르지 않았다. 은채와 사귀게 된 후 이 집에 오긴 처음이었다. 그만큼 낯설고 멀게 느껴졌다. 시아는 승준이 온 것에 놀랐다. “대표님, 무슨 일이시죠? 은채 씨에게 또 뭔가 필요하나요?” 승준은 시아의 창백한 얼굴을 바라보며 물었다. “상처는 좀 어때?” 오늘 드레스샵에서 다쳤을 때 시아는 혼자 병원에 갔다. 왜냐면 승준은 은채를 안고 있었고, 은채는 무서워하고 있었으니까. “죽을 정도는 아니에요.” 시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시아도 사람이었다. 무덤덤한 얼굴 뒤에도 감정은 살아 있었다. 비록 사랑은 사라졌어도 함께 싸워온 시간까지 사라진 건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시아가 다쳤는데도, 승준은 그녀를 병원에 혼자 보내버렸다. 승준은 다가와 시아의 팔을 잡아끌었고 그대로 시아를 품에 안아 머리를 살폈다. 승준의 손끝이 혹에 닿자 찌릿한 통증에 시아는 고개를 홱 돌리며 남자를 밀쳐냈다. “이렇게 큰 혹을 그냥 뒀어?” 승준이 다시 손을 뻗었다. “나랑 병원에 가자.” 시아는 한 발 더 뒤로 물러섰다. “의사 선생님 말씀으로는 피가 고여 있는 거래요. 병원 가면 뭐 하시게요? 피 빼주시려고요?” 이 증상은 혈종이라 시간이 지나야 자연스럽게 가라앉는다. 승준의 눈에 미묘한 아픔이 스쳤다. “오늘... 내가 일부러 안 도운 거 아니야. 그 순간에 난... 한 사람밖에 구할 수 없었어.” 결국 승준은 가장 소중한 사람을 택했다. 본능이 가장 솔직한 속마음이라는 것을, 시아는 알고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승준의 선택이 말해줬다. “은채 씨가 대표님 약혼녀니까요. 그렇게 하시는 게 맞아요.” 시아는 고개를 숙였다. 눈가엔 어느새 눈물이 맺혀 있었다. “나...” 승준이 뭐라도 더 말하려던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번호를 확인한 승준이는 벨소리를 끄고 말했다. “시아야, 오늘은 푹 쉬어. 결혼식 준비는 다른 사람에게 맡길 테니까. 근데 전날과 당일에는 꼭 참석해야 해.” 제8화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니까 승준이 시아에게 쉬라고 했지만 시아는 쉬지 않았다.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아있었다. 시아는 회사에 가서 하루 종일 인수인계를 마무리했고, 서명해야 할 서류와 수집해야 할 계약서, 승준의 주요 일정까지 정리해서 분류했다. 그날, 시아는 회사 탕비실에서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걸 들었다. 승준이 결혼식을 위해 구영시 전역의 전자 광고판을 사들여 생중계를 한다는 이야기였다. 이틀째 되는 날, 시아는 승준의 집에 남아 있던 자신의 짐을 모두 정리해서 박스에 담았고, 자원봉사자에게 맡겨 필요한 사람에게 기증하도록 했다. 그날, 자원봉사자들 사이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들렸다. 하지호의 결혼을 축하하기 위해 하씨 가문이 구영시 전체에 잔치를 열고, 축의금은 일절 받지 않는다고 했다. 사흘째 되는 날, 시아는 만불산으로 향했다. 무려 여섯 시간을 들여 삼생석에 새겨진 자신과 승준의 이름을 하나하나 손으로 긁어냈다. 이름을 모두 지웠을 무렵, 시아의 손끝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그날, 텔레비전에서는 승준과 은채가 함께한 인터뷰가 방송되었다. 승준은 시청자들에게 전에 없던 색다른 결혼식을 선사하겠다고 말했다. 나흘째 되는 날, 그러니까 결혼식 바로 전날이었다. 시아는 결혼식장이 어떻게 꾸며졌는지 보기 위해 현장을 찾았고, 그곳에서 승준과 은채의 리허설을 목격했다. 은채가 반가운 얼굴로 시아를 불렀다. “강 비서님, 무대 위로 올라오세요. 결혼식 당일에 제 뒤에 서 계시면 제가 부케를 던져드릴게요. 그러면 그 복이 전해져서, 곧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실 수 있을 거예요.” 시아는 은채의 요청대로 무대 뒤에 섰다. 승준이 은채에게 사랑을 맹세하는 걸 봤다. 반지를 손에 끼워주고, 은채가 눈을 감고 고개를 들어 남자의 입맞춤을 기다리는 장면도 같이 말이다. 하지만, 승준은 끝내 입을 맞추지 않았다. 그는 시선을 돌려 시아를 바라보았다. 시아는 눈빛이 또렷하고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전혀 낯선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시아를 보는 순간, 말할 수 없는 낯섦과 불안함, 두려움이 승준의 가슴 속에 퍼졌다. “됐어. 오늘 리허설은 여기까지 하자. 좀 피곤하네.” 승준은 결국 은채에게 입맞추지 않았다. 그 장면을 시아가 봤다면 마음은 더욱 철저히 무너졌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 못 봤다면 내일은 더더욱 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시아는 내일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니까. “승준아...” 은채는 불만스러운 듯 승준의 팔에 매달렸다. 시아 앞에서 은채는 일부러 승준과 달콤한 연인인 척하고 싶었다. 그래야 시아가 더는 기대하지 않을 테니까. “강시아, 이리 와봐.” 승준이 은채를 제치고 시아를 불렀다. “대표님, 뭐가 필요하세요?” 시아가 그냥 형식적으로 물었다. 승준은 목에서 넥타이를 풀어내며 시아를 바라봤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넥타이를 시아한테 건넸다. “다시 준비해 줘.” “시아 씨, 내일은 절대 여기 오지 마세요. 결혼식장에서 그쪽 얼굴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은채가 승준의 넥타이를 낚아채며 싸늘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방금 승준이 나랑 키스하지 않은 건 분명 시아 때문이야.’ 은채는 승준이 시아를 바라보던 그 눈빛도 놓치지 않았다. 원래는 시아한테 승준이랑 행복한 모습을 보게 해서 스스로 물러나게 하려고 했지만 지금은 후회가 밀려왔다. 혹시라도 내일 시아가 무슨 일을 벌일까 두려웠다. 시아는 은채의 당황한 얼굴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신부 들러리 한 명 빠지겠네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어쨌든 내일 나타나기만 해봐요. 보기 흉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은채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시아는 피팅룸에서 자신을 함정에 빠뜨렸던 그날을 떠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런데 한마디만 해도 될까요?” “뭔데요?” 은채가 인상을 찌푸리며 물었다. 시아는 은채에게 손가락으로 사람을 불러 자신에게 다가오게 만들었다. 은채는 못마땅한 표정이었지만 결국 시아 앞으로 두 걸음 다가섰다. 시아는 상대방의 팔을 잡아당기고, 다른 손은 은채의 허리춤에 갖다 댔다. 곧이어 날카로운 통증이 은채의 온몸을 휘감았다. “강...!” “은채 씨.” 시아는 그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과 백년해로 하시고, 행복하세요.” 시아가 말 할 때마다 은채의 허리에 박힌 철침은 점점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날, 은채도 그런 식으로 시아한테 철침을 찔렀기 때문이다. 제9화 마지막 눈물 [내일 결혼식, 정말 할 거야?] 깊은 밤, 시아는 문자 한 통을 받았다. 시아는 곤히 잠든 외할머니를 바라보며 문자를 보냈다. [주소 보낼 테니까 내일 나랑 외할머니 데리러 와줘. 마음 바뀌면 안 와도 괜찮고.] [내일 봐, 나의 신부님!] 그 문자를 보는 순간, 시아의 가슴 한편이 뻐근해졌다. ‘그래, 나도 신부가 되는 거야.’ 하지만 시아를 맞아주는 사람은 한 번도 얼굴을 본 적 없는 온라인에 존재하는 상대일 뿐이다. 이것이 사랑에 상처받아 미쳐버린 결과는 아니었다. 단지 외할머니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고, 더 이상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사람과 실제로 얼굴을 맞댄 적은 없지만 온라인에서만 10년을 알고 지낸 사이였다. 인생에서 십 년을 함께 보낼 수 있는 존재가 얼마나 될까. 그 십 년을 자신에게 내어준 사람이 있다면 그만큼 믿을 수 있을 것이다. 자정이 막 지난 시각, 승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시아는 외할머니가 깰까 봐 조용히 방을 나가 전화를 받았다. “대표님, 무슨 지시 사항이라도 있으신가요?” 그 말투. 요즘 들어 승준이 시아한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었을 것이다. [왜 집에 없어?] 오늘따라 승준의 마음은 불안하고 초조했다. 결국 핸들을 돌려 시아와 6년 넘게 함께 살아온 집으로 향했다. 그런데 침대는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었고, 시아의 흔적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시아는 승준이 어디에 있는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자신의 짐이 사라진 걸 알아챘는지는 확신할 수 없었다. “외할머니댁에 있습니다.” 시아가 솔직하게 말했다. 불 꺼진 집 안, 승준은 아직도 불을 켜지 않고 소파에 앉아 있었다. 시아를 방해하지 않으려는 배려였지만 지금은 오히려 이 어둠 속에 있는 것이 마음이 더 편했다. 시아가 없는 이 집이 무서울 정도 너무 조용하다는 걸 깨달았다. [거긴 왜 간 거야?] 그 질문을 듣는 순간, 시아는 확신했다. 승준은 아직 여자의 짐이 사라졌다는 걸 모르고 있었다. 그 말은 곧 자신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조금이라도 여자를 아꼈다면 옷장이 비어 있는 걸 발견했을 것이고, 세면대에 늘 놓여 있던 칫솔도, 욕실에 걸려 있던 수건도 사라졌다는 걸 느꼈을 것이다. 이제 이 집은 더 이상 여자의 공간이 아니다. 모르는 게 오히려 나았다. 그래야 내일 아무 문제 없이 다른 사람과 결혼할 수 있을 테니까. “내일 외할머니 모시고 결혼식에 가신다면서요.” 시아는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잠시의 침묵 끝에 승준이 말했다. [내일 아침에 사람 보내서 데리러 갈게.] “아니에요. 제가 외할머니 모시고 갈게요. 내일 바쁘시잖아요.” 시아는 최대한 배려 깊은 말투였다. [시아야.] 승준은 낮은 음성으로 여자를 불렀다. 그 목소리에는 뭔가 눌러 담긴 감정이 담겨 있었다. [내일... 꼭 와야 해. 알겠지?] “왜 꼭 가야 하죠?” 시아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별이 많던 밤이었다. 마치 온 하늘에 별을 수놓은 것처럼. 승준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약속해줘. 내일 오면, 너도 알게 될 거야.] 하지만 시아는 내일 그곳에 가지 못한다. 앞으로 승준의 인생 속에 시아는 없다. 그래서 그 답도, 더는 알고 싶지 않았다. “승준아.” 시아는 담담하게 승준의 이름을 불렀다. 기쁨도, 슬픔도 담기지 않은 목소리였다. “꼭 행복해야 해.” 승준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울컥했다. 갑자기 아무런 이유도 없이 가슴 깊숙이에서부터 치밀어 오르는 감정이 남자를 덮쳤다. 그리고 얼굴을 감싸쥐고는 떨리는 숨을 내쉬었다. [그 말, 내일 내 앞에서 직접 해줘.] ‘혹시 진은채한테 뭘 보여주고 싶어서 이런 걸까?’ 시아는 더 이상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밤공기가 제법 차가워졌다. 시아는 몸을 움츠렸다. “나 이제 졸려. 자야겠어.” 시아는 전화를 끊고, 별빛으로 가득한 밤하늘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조용히 한줄기 눈물이 눈가에서 흘러내렸다. ‘구승준... 이건 내가 너를 위해 흘리는, 마지막 눈물이야.’ 제10화 웨딩카 어젯밤 별이 아름다웠던 만큼 오늘 아침 햇살은 그보다 더 눈부셨다. 시아는 햇살에 눈을 찡그리며 잠에서 깼다. 눈을 뜨자마자 햇빛 아래 환히 웃고 있는 외할머니의 얼굴이 가장 먼저 보였다. “아이고, 얘 참 천하태평이네. 오늘 결혼하는 날인데 어쩜 이렇게 잠을 달게 잔다니.” 시아는 외할머니의 손바닥에 얼굴을 묻은 채 게으른 목소리로 말했다. “외할머니, 저 아직 졸려요.” “졸리긴 뭐가 졸려! 너 데리러 온 웨딩카 벌써 도착했어!” 시아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들었다. 외할머니가 가리키는 창밖을 바라보니 요양원 앞엔 검은색 고급 차량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온라인에서만 알고 지내던 그 사람이 진짜 결혼하러 왔다고?’ 시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그 순간, 햇살 속에 서 있는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남자는 몸에 꼭 맞는 짙은 색 슈트를 입고 있었고, 맞춤 제작한 커프스 버튼은 햇살을 받아 다이아몬드처럼 빛나고 있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누가 봐도 귀족 그 자체였다. “거기 서서 뭐 해?” 외할머니의 말이 끝나자 그 남자가 천천히 돌아섰다. 시아의 시선이 그 남자의 얼굴에 닿는 순간 심장이 멎는 기분이었다. “당신인가요?” 오전 9시 59분. 구영시 중심대로 동서로 뻗은 두 갈래의 넓은 도로 위에 두 행렬의 웨딩카가 마주 달리고 있었다. 한쪽은 하씨 가문 하지호의 웨딩카이고, 다른 한쪽은 구씨 가문 구승준의 웨딩카였다. 구영시에서 가장 권력 있는 사람과 가장 돈 많은 사람이 같은 날 결혼을 하게 되면서 수많은 언론이 밤잠도 못 자고 중계 포인트를 선점하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만큼 스케일도 어마어마했다. 머리도 꼬리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끝없이 이어지는 웨딩카의 행렬. 적어도 100대는 족히 넘어 보였다. 차마다 붉은 리본과 장식으로 꾸며졌고, 햇빛마저 붉게 물들일 정도였다. 각기 다른 길을 달리던 두 행렬은 중앙대로의 교차 광장에서 맞부딪혔다. 이 장면에서 두 신부가 서로의 행복을 빌어주는 의미로 부케를 교환하는 게 오늘 결혼식의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오늘 하지호의 신부가 누군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모든 시선과 카메라는 하지호의 웨딩카에 초집중되었다. 구승준 한 명만 제외하고. 어젯밤 시아와 통화를 마친 승준이는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지금도 승준은 자신이 지금 어디에 발을 딛고 있는지 자신도 모를 정도로 혼란스러웠다. 지호가 누구랑 결혼하든 승준이는 관심 없었다. 오직 하나만 알고 싶었다. 시아가 결혼식장에 왔는지 안 왔는지였다. 식장 도착 전, 승준은 시아를 보지 못했다. 일에 있어 철두철미한 시아가 지각하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이번엔 이상하게도 오지 않았다. 전화를 걸었지만 연결되지 않았고, 사람을 보내봤지만 요양원엔 이미 아무도 없다는 말만 돌아왔다. 혹시나 사고라도 났나 싶어 지역 뉴스를 찾아봤지만 교통사고 소식도 없었다. 그렇게 걱정하는 사이, 지호의 웨딩카에서 천천히 창문이 내려갔다. 하얀 베일에 가려진 신부의 얼굴이 드러났다. 베일로 가려졌지만 얼굴은 살짝 보이는 정도였다. 기자들은 초점을 맞춰 고화질로 촬영을 시작했다. 은채는 가까이 있었기에 카메라 따위 필요 없고, 바로 알아봤다. 그 익숙한 얼굴에 은채는 매우 놀랐다. ‘강시아?’ ‘내가 잘못 본 건가?’ ‘왜 걔가 하지호의 웨딩카 안에 있지? 그것도,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시아는 손에 들고 있던 부케를 내밀었다. 은채는 얼떨결에 손을 뻗었다. 입술이 떨려 이름을 부를 듯했지만 말은 끝내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행복하길 바랍니다.” 시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부케를 은채 손에 넘기며, 시아는 진심을 담아 축복했다.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오늘 이 순간 다 지나가는 거니까. 승준도, 은채도, 그 모든 사랑과 미움, 얽힌 감정들까지 이제는 다 과거로 사라진다. ‘행복하라고?! 시아?!’ ‘방금 그 목소리 시아 아니야?!’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승준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그러고는 번쩍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