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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하자더니 갑자기 연애
결혼 2년 차, 의외로 임신하게 된 윤혜인. 기대와 설렘 끝에 놓인 건 이혼서류 한 장뿐이다. 차 사고로 피범벅이 된 윤혜인은 바닥에 쓰러진 채 이준혁...
Chương (1)
第1章
제1화
”축하해요. 임신하셨습니다!”
멍 때리고 있던 윤혜인 머릿속에는 오후에 의사 선생님이 했던 말만 계속 떠올랐다.
그때, 조용하게 다가온 이준혁이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면서 물었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그녀가 대답을 하기도 전에 이준혁이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잡으며 그녀의 입술에 키스를 퍼부었다.
한참 뒤, 이준혁은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고 윤혜인은 온몸에 힘이 풀린 채 침대에 누워 있었다. 땀으로 젖은 머리와 글썽이는 눈망울은 조금 전에 많이 힘들었음을 설명해 주었다.
겨우 숨을 고른 그녀는 서랍을 열어 임신 검사 보고서를 꺼냈다.
요즘따라 계속 위에 통증을 느꼈던 윤혜인은 오늘 오후 병원에 찾아갔고 피검사를 한 결과, 의사는 그녀에게 임신 5주 차라고 얘기했다.
그 말을 들은 윤혜인은 도무지 믿어지지가 않았다. 분명 매번 안전 조치를 확실하게 취했는데.
다시 돌이켜보니 저번 달에 딱 한 번, 술자리를 마친 이준혁은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준 뒤, 집 앞에서 갑자기 그녀에게 한마디 물었었다.
“지금 안전하지?”
그런데 안전기에도 임신할 수 있는 거구나…
욕실 안에는 물소리로 가득했다. 안에 있는 남자는 2년 전에 윤혜인과 아무도 몰래 결혼한 그녀의 남편이자 그녀의 상사이기도 한 이산 그룹 대표 이준혁이다.
그때 당시 술이 많이 취한 윤혜인은 뜻하지 않게 그녀의 상사와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고 마침 이준혁의 할아버지가 갑자기 병으로 쓰러지시는 바람에 이준혁은 그녀에게 가짜 결혼을 제안한 것이다.
이준혁 할아버지의 최대 소원이 손자가 하루 빨리 가정을 이루는 모습을 보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렇게 결혼 계약서에 사인하게 되었다.
대외적 비밀 결혼으로 언제든 종료할 수 있는 가짜 결혼이었다.
그때 당시 윤혜인은 그저 너무 행복했다. 그녀는 자신이 8년 동안이나 짝사랑해온 남자와 결혼할 수 있다는 말에 고민없이 동의했던 것이다.
결혼한 뒤에도 이준혁은 매일 너무 바빴다. 한달 동안 그를 볼 수 있는 시간은 일주일도 채 되지 않았다.
하지만 2년 동안 그의 곁에는 다른 여자가 없었으며 그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
이준혁은 조금 차갑고 냉정한 성격만 빼면 완벽한 남편이었다!
윤혜인은 손에 든 임신 보고서를 보면서 설레기도 하고 살짝 불안하기도 했다. 그녀는 이 사실을 이준혁에게 얘기하려고 마음먹었다!
또한 그들의 첫만남은 2년 전이 아니라는 사실과 그녀가 그를 10년 동안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얘기해주고 싶었다.
어느새 욕실에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이준혁이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그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는 샤워 가운만 걸친 채 베란다로 가서 전화를 받았다.
윤혜인은 저녁 열두시가 넘은 시간을 확인했고,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안해졌다.
이 늦은 시간에 대체 누구한테서 전화가 온거지?
통화가 끝나고 돌아온 이준혁은 스스럼없이 샤워 가운을 벗어 던졌다. 건장한 몸매의 이준혁은 온몸에 근육들로 가득했으며 길게 뻗은 두 다리는 오늘따라 유난히 섹시했다.
그가 벗은 모습을 수도 없이 봤지만 윤혜인은 아직도 너무 부끄러웠으며 어느새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채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다.
이준혁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서 셔츠와 정장 바지를 챙겨 입더니 기다란 손가락으로 넥타이까지 정갈하게 묶었다. 턱선이 살아있는 그의 수려한 외모와 고귀한 기품이 느껴지는 전체적 분위기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었다.
“일찍 쉬어.”
지금 이 시간에 나간다는 건가?
살짝 실망한 윤혜인은 손에 쥐고 있는 임신 보고서를 몰래 숨기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시간이 많이 늦었어요.”
그녀의 말에 넥타이를 매고 있던 이준혁의 손이 멈칫거렸다가 이내 윤혜인의 귓볼을 살짝 만지면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오늘 밤에 진짜 안 자고 싶은 거야?”
윤혜인의 얼굴이 순식간에 달아올랐고 심장도 쿵쾅거렸다. 그녀가 입을 열려고 하던 그때, 이준혁이 그녀에게서 손을 떼며 말을 이어갔다.
“아직 볼일이 좀 남았으니깐 나 이제 기다리지 마.”
그리고는 밖으로 나가려고 했고 윤혜인이 그의 뒤를 쫓아가며 그를 불렀다.
“준혁 씨.”
“왜?”
고개를 돌린 이준혁이 윤혜인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조금 전보다 살짝 차가웠기에 순간 말문이 막힌 윤혜인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내일 시간 되면 저랑 제 할머니 보러 갈래요?”
그녀의 할머니는 요즘 건강 상태가 악화되어 많이 우울해하고 계셨기에 윤혜인은 이준혁과 함께 할머니 병문안을 가서 할머니를 안심시켜 드리고 싶었다.
“내일 다시 얘기해.”
동의하지도 않고 거절하지도 않은 이준혁은 그렇게 떠나버리고 말았다.
방으로 돌아와 샤워를 마친 윤혜인은 아무리 뒤척여도 잠이 오지 않았기에 침대에서 일어나 따듯한 우유를 한 잔 마셨다.
제2화
윤혜인은 우유를 마시면서 핸드폰을 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 화면에는 연예 뉴스로 가득했지만 윤혜인은 이런 쪽에 관심이 없었던 터라 핸드폰을 내려놓으려 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익숙한 이름이 보여서 그 기사를 클릭하게 되었다.
<유명 디자이너 임세희의 귀국, 공항에서 베일에 싸인 남자친구와 함께 나타나다.>
기사와 함께 기재된 사진 속에서 임세희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었고 함께 걷고 있는 남자는 흐릿한 실루엣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한 눈에 봐도 몸매 비율은 완벽했다.
사진을 확대한 윤혜인은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사진 속 실루엣의 주인공은 다름아닌 이준혁이다!
그럼 오후에 갑자기 회의를 취소하고 외출을 했던 게, 그의 전 여자친구인 임세희를 데리러 공항에 간 거란 말인가?
그 순간, 윤혜인의 가슴에는 큰 돌멩이 박힌 듯 답답했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만지다가 의도치 않게 이준혁에게 전화를 걸게 되었고 다급하게 끊으려고 했지만 상대방은 이미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난히 다정하고 부드러운 여자의 목소리였다.
너무나도 깜짝 놀란 윤혜인은 바로 핸드폰을 던져버렸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구토를 했다.
한참 뒤, 날이 밝아오자 윤혜인은 시간에 맞춰 회사로 출근했다.
이준혁과 가짜 결혼을 한 뒤, 이준혁은 그녀가 집에 있길 원했지만 그녀는 자신의 능력으로 돈을 벌고 싶다고 했다.
이준혁도 그녀의 말에 동의하긴 했지만 다른 회사가 아닌 이산 그룹에 취직해야 한다고 했고 그렇게 윤혜인은 이준혁 곁에 비서로 남아 물을 따르거나 간단한 심부름을 하는 등 소일거리 역할을 맡게 되었다.
그리고 중요하고 핵심적인 비서 일은 이준혁의 수행 비서인 주훈이 도맡아 하고 있었다.
회사에 윤혜인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사람은 주훈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이산 그룹의 이준혁 대표는 지금까지 계속 남자 비서만 채용했고 2년 동안 여자 비서는 윤혜인 한 명밖에 없었기에 다들 윤혜인과 회사 대표가 특별한 사이일 거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시간이 오래 지나고 이준혁은 그 사이에 단 한번도 윤혜인을 특별하게 대한 적이 없기에 직원들은 점점 윤혜인을 아니꼽게 생각했다.
그들은 윤혜인이 지금까지 비서로 남아있었던 건 몸으로 대표님을 모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이때, 직원 한 명이 윤혜인에게 서류를 건네며 대표 사무실에 전달해 달라고 했다.
어젯밤 이준혁은 밤새 돌아오지 않았고 윤혜인도 뜬 눈으로 밤을 지샜으며 머릿속에는 전화를 받은 여자가 누구일까, 두 사람은 밤새 함께 있지 않았을까 궁금증만 가득했다.
물론 윤혜인도 짐작가는 사람이 있긴 했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현실에 한 방 제대로 맞아야 정신을 차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이 순간, 윤혜인은 마음이 평온했다. 그녀는 어찌 됐든 이 10년 간의 짝사랑에 대한 답을 얻고 싶었다.
담담한 표정으로 엘리베이터에 들어선 윤혜인은 옷깃을 잘 정리한 뒤 정갈한 모습으로 대표 사무실 앞에 멈춰 섰다.
사무실 문은 살짝 열려 있었고 그 안에서 들리는 남자의 목소리에 윤혜인이 잠시 멈칫했다.
“너 대체 혜인 씨 좋아하는 거야, 아닌 거야?”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준혁의 절친 김성훈이다.
“그럼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야?”
이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되물었고 김성훈이 혀를 살짝 찼다.
“난 혜인 씨가 참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정말 네가 좋아하는 스타일이 아닌 거야?”
“그럼 너에게 소개해줄까?”
이준혁이 대수롭지 않은 듯 물었다.
“됐거든.”
사무실 안에서 김성훈의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고 그 소리는 유난히 귀에 거슬렸다.
그들은 윤혜인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물건 하나를 얘기하듯 그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숨이 턱 막힌 윤혜인은 서류를 잡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었고 이내 김성훈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임세희 기사 속 스캔들 주인공이 너지?”
“응.”
“아이고, 대단하네. 임세희를 즐겁게 해주려고 아주 별의별 희생을 다 하네. 너 어젯밤 임세희랑 밤새 있었잖아. 그렇게 오래 떨어져 있다가 간만에 만났는데 불타는 밤은 안 보냈어?”
김성훈이 비꼬듯이 하는 말에 윤혜인은 마음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얼굴이 창백해진 그녀의 두 손은 얼음장 마냥 차가웠다.
밤새 같이 있었다! 간만에 만난 사이다!
김성훈의 말들은 비수 마냥 윤혜인 마음에 꽂혔다. 머릿속이 하얘진 그녀는 갑자기 머리가 너무 어지러웠고 눈앞은 까맣게 변한 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뒤돌아서 도망가려고 하던 순간, 사무실 문이 열렸다.
“윤혜인 씨?”
제3화
사무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김성훈이었다. 그는 사무실을 떠나려는 듯했다.
윤혜인은 주먹을 꽉 쥐고 감정을 숨긴 뒤, 고개를 숙여 인사를 했다.
“김 대표님, 안녕하세요.”
그러고는 김성훈을 지나 대표 사무실로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책상 앞에 앉아있는 이준혁은 고가의 정장을 입고 있었고, 윤혜인은 단번에 이 옷이 어젯밤 그가 입고 나갔던 옷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다.
윤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이 대표님, 마케팅 보고서입니다. 결재해 주세요.”
이준혁은 아무런 표정의 변화도 없이 서류에 사인한 뒤 윤혜인에게 건넸고 서류를 받은 윤혜인이 사무실 밖으로 나와보니 김성훈이 여전히 사무실 입구에 서있었다.
그녀의 모습이 엘리베이터 입구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나서야 김성훈이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젠장, 혜인 씨가 우리 대화를 들은 거 아니야?”
이준혁의 눈빛에는 그 어떤 미동도 없었다.
그는 김성훈의 말에 크게 신경 쓰지도 않았다.
성격이 온순하고 착한 윤혜인은 질투 같은 걸 절대 안 한다. 그녀가 계속 지금처럼 조용하게 살아준다면 이준혁은 앞으로도 그녀에게 많은 걸 해줄 것이다.
한편, 엘리베이터 안에서.
윤혜인은 최대한 눈물이 흐르지 않게 고개를 높이 들었지만 어느새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녀는 2년이라는 시간이 충분할 줄 알았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녀가 얼마나 괜찮은 사람인지 충분히 보여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그저 그녀 혼자만의 착각일 뿐이였다. 그녀가 아무리 노력해도 전 여자친구의 복귀에는 역부족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윤혜인이 평소와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노력했지만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녀는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가눈 채,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로 정신을 좀 맑게 하고 싶었다. 탕비실 안에서 수다를 떨고 있는 직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기사 봤어? 임세희 귀국했대.”
“응? 그게 누군데?”
“너 몰라? 임세희는 임씨 가문의 아가씨잖아. 본인도 유명한 탑급 디자이너고. 가장 중요한 건, 임세희는 우리 대표님이 인정한 유일한 여자친구였어. 듣는 소문에 의하면 우리 대표님의 첫사랑이었대!”
“근데 우리 대표님 윤 비서랑 뭔가 있는 거 아니었어?”
“윤 비서? 기껏해야 잠자리 보좌관이지 뭐. 대표님은 한 번도 인정한 적이 없는데 혼자 아주 신났더라고. 누가 보면 대표님 와이프인 줄 알겠네. 멍청하긴!”
직원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윤혜인이 씁쓸하게 웃었다.
모든 사람이 다 알고 있는데 그녀만 착각속에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 대표 사모님의 꿈이 드디어 깬 건가?”
윤혜인 등 뒤에서 비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은 이준혁의 사촌 여동생 송소미였다.
송소미는 평소에도 윤혜인을 아니꼽게 생각하고 있었다.
괜히 회사에서 송소미와 충돌이 생기기 싫은 윤혜인이 돌아서서 떠나려고 했지만 송소미가 그녀의 앞길을 막았다.
그녀는 손에 커피를 들고 비아냥거렸다.
“이제 우리 세희 언니도 돌아왔는데 준혁 오빠가 계속 너 같은 천박한 여자와 잠자리를 가질 거 같아?”
윤혜인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자 송소미가 계속 비꼬았다.
“내가 늙은 남자 몇 명 소개해줄까? 너 스킬 좋잖아. 어차피 어떤 남자랑 자든 다 똑같은데 뭐.”
고개를 살짝 돌려 주먹을 꽉 쥐던 윤혜인이 차갑고 냉랭하게 대꾸했다.
“여긴 회사예요! 그런 저질스러운 장소가 아니란 말입니다. 송소미 씨 그런 장사하고 싶으면 다른 곳 좀 알아보세요.”
“너 진짜!”
윤혜인의 말에 송소미 표정이 확 굳어버렸고 화가 치밀어 오른 탓에 손에 들고 있던 뜨거운 커피를 윤혜인에게 뿌려버렸다.
송소미가 이렇게까지 미친 사람일 줄은 몰랐던 윤혜인은 다급하게 손으로 막았고 뜨거운 커피는 그대로 그녀의 팔에 닿았다.
새하얀 피부는 순식간에 빨갛게 부어올랐고 극심한 고통에 윤혜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언성을 높였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이에요!”
마침 쉬는 타임이라 구경하러 온 직원들이 꽤 많았기에 송소미는 더욱 의기양양했다.
제4화
”뭐가 그렇게 잘나서 맨날 머리 치켜들고 다니는 거야? 다들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거든. 부모도 없는 잡종 주제에…”
팍!
송소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이 그녀의 뺨을 강하게 내리쳤다. 송소미는 평소에 고분고분하던 윤혜인이 감히 그녀에게 손찌검을 할 줄은 상상도 못해서 순간 멍한 표정이었다.
한참 뒤, 송소미가 이를 꽉 깨물며 소리를 질렀다.
“너, 너 지금 감히 날 때린 거야?!”
“당신에게 예의를 가르친 겁니다.”
윤혜인이 싸늘한 눈빛으로 송소미를 보며 대답했다.
윤혜인은 아주 어릴 때 부모님을 잃었지만 그렇다고 절대 아무나 그녀의 부모님을 모욕하는 걸 용납할 수 없었다.
송소미는 화가 나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준혁의 사촌 여동생인 그녀는 늘 타인의 아부를 받아왔기에 이렇게 대놓고 그녀와 맞서 싸우는 사람은 윤혜인이 처음이었다.
“이 나쁜 계집애!”
송소미가 미친 듯이 소리를 지르며 윤혜인에게 달려들었고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할퀴려고 했지만 반응 속도가 빠른 윤혜인이 그녀의 손목을 덥석 잡은 채 송소미를 꿈쩍도 못하게 만들었다.
윤혜인보다 체구가 작은 송소미는 어떻게든 윤혜인을 때리려고 발버둥을 쳤고 그 모습은 매우 추했다.
화가 잔뜩 난 송소미가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네가 뭐라도 되는것 같아? 넌 단지 우리 준혁 오빠가 침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일 뿐이라고! 넌 몸 파는 여자보다 더 천박해!”
송소미는 갈수록 심한 욕을 입 밖에 꺼냈고 모여드는 직원도 점점 많아졌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낮게 깔린 이준혁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그는 사무실에서 나오자마자 난동을 부리고 있는 송소미를 발견했던 것이다.
그의 등장에 순식간에 탕비실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준혁 오빠?”
송소미는 평소에도 이준혁을 조금 무서워했다. 이 사촌 오빠는 가차없는 성격이라 그녀의 어머니도 그녀에게 이준혁 앞에서는 까불지 말라고 경고했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뺨을 맞은 게 생각나자 송소미는 허리를 꼿꼿하게 펴고 벌겋게 부어오른 얼굴을 만지며 울먹거렸다.
“준혁 오빠, 이것 좀 봐요, 윤혜인 저 여자가 미친 거 같아요!”
창밖의 햇빛이 이준혁의 완벽한 얼굴에 비추어 지금 이 순간, 유난히 더 잘생겨 보였다.
윤혜인은 이준혁을 보자 괜히 서러운 마음에 울컥해졌다. 뜨거운 커피 때문에 부어오른 팔도 유난히 더 아프게 느껴졌다.
윤혜인과 눈이 마주친 이준혁이 눈살을 확 찌푸리며 물었다.
“윤 비서, 회사 규칙을 잊은 거야?”
차갑고 냉랭한 이준혁의 얼굴을 보며 윤혜인은 가슴이 답답해서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다.
주변은 여전히 고요했다. 윤혜인은 가녀린 몸을 거느린 채 그렇게 외롭게 우두커니 서있었다.
회사에 처음 들어올 때부터 이준혁은 그녀에게 회사는 그녀의 사사로운 감정을 받아주는 곳이 아니며 그도 절대 그녀의 실수를 눈 감아주지 않을 거라고 했다.
윤혜인도 잘 알고 있고 이준혁을 이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이준혁에게 조금 전에 송소미가 했던 말을 들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그가 들었는데도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거라면 송소미의 말을 묵인했다는 뜻이다. 그럼 윤혜인은 정말 그가 침대에서 가지고 노는 장난감뿐인 셈이다.
구경을 하고 있던 직원들은 이준혁이 나타나자 뿔뿔이 흩어졌지만 겁이 없는 몇몇 직원은 여전히 몰래 숨어서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었다.
이준혁의 차가운 눈빛에 윤혜인은 온몸이 얼음장 마냥 차가워졌다. 주먹을 꽉 쥔 그녀는 서러운 마음을 가까스로 참고 송소미에게 고개를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산 그룹의 직원으로써 제가 송소미 씨에게 손찌검을 한 건 잘못된 행동입니다.”
송소미는 고개를 숙인 윤혜인을 보며 머리를 치켜들더니 의기양양했다.
“참나, 사과 한마디로 될 거 같아?....”
하지만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혜인이 말을 이어갔다.
“조금 전의 행동은 회사와 상관없이 저 개인을 대표하는 행동입니다. 윤혜인으로서 저는 절대 사과할 수 없습니다.”
말을 끝낸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돌아서서 떠났다.
“너 이… 나쁜 계집애!”
송소미는 화가 나서 미칠 지경이었다. 늘 건방만 떨던 그녀는 태어나서 처음 한 방을 먹은 것이다. 그것도 그녀가 제일 만만하게 생각하는 상대에게 말이다.
제5화
송소미는 지금 이 순간, 윤혜인을 갈기갈기 찢어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준혁 오빠, 저 나쁜 계집애가 하는 말 좀 들어봐요. 내 얼굴을 이렇게 만들어 놓고 감히 계속 건방을 떨다니. 준혁 오빠, 저 여자 다시 불러와요! 난 오늘 화가 풀릴 때까지 저 여자를 때려야겠어요!”
이준혁은 가녀린 윤혜인의 뒷모습을 보며 표정이 점점 어두워졌다.
“적당히 해.”
이준혁이 차갑게 대꾸했다.
평소에도 독하기로 소문난 송소미는 이준혁이 조금 전에도 윤혜인의 편을 들지 않았기에 이준혁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람이라고 확신했다.
그녀는 이를 악물며 윤혜인의 뒷모습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다음에는 사람 불러서 저 여자 얼굴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거예요!”
“송소미!”
이준혁이 실눈을 살짝 뜬 채 송소미를 쳐다보았고 송소미는 그 눈빛에 순간 소름이 쫙 돋았다.
“딱 한 번만 얘기할게. 네 머릿속에 있는 꿍꿍이를 접어. 저 여자 건드리지 마.”
송소미는 어마어마한 압박감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었기에 마음속에서 들끓던 복수심을 도로 삼킬 수 밖에 없었다.
“알, 알겠어요…”
이준혁이 싸늘한 표정으로 송소미를 힐끗 쳐다보다가 탕비실을 떠나면서 곁에 있던 주훈에게 명령을 내렸다.
“앞으로 연관 없는 외부인은 회사에 들이지 못하게 해.”
이준혁의 말 뜻을 이해하지 못한 송소미는 그의 뒤에서 계속 아부를 떨었다.
“준혁 오빠 이렇게 큰 회사에 그런 명확한 규칙은 있어야 돼요.”
하지만 잠시뒤, 주훈이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송소미 씨, 이만 나가주세요.”
송소미는 그제야 그녀가 바로 그 연관 없는 외부인이었다는 걸 깨닫게 되었고 단호하게 떠나는 이준혁을 쫓아가고 싶었지만 주훈이 부른 경호원에게 잡혀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갔다.
송소미가 아무리 발악을 하고 발버둥을 쳐도 경호원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한편, 자리로 돌아온 윤혜인은 깨끗한 옷으로 갈아 입었고 차가운 이준혁의 얼굴이 생각나자 마음이 아팠다.
어느새 퇴근 시간이 되었고, 회사를 나서려던 윤혜인 앞에 주훈이 나타났다.
“윤 비서님, 대표님께서 급하게 처리할 일이 있으셔서 오늘은 저에게 비서님을 집까지 모셔드리라고 하셨습니다.”
주훈의 말에 윤혜인이 단호하게 거절했다.
전에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준혁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때문에 이준혁은 그녀와 함께 할머니를 보러 갈 이유도 없다.
윤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간병하는 아주머니가 할머니에게 밥을 먹여주고 있었고 윤혜인이 숟가락을 받아 직접 할머니에게 먹여주었다.
할머니는 전까지 쭉 작은 마을에 살고 있었는데 지난 달 췌장염에 걸려서 윤혜인이 할머니의 반대에도 끝까지 고집을 부려 할머니를 서울로 모시고 와서 병치료를 받게 한 것이다.
할머니는 그녀의 가짜 결혼을 모르고 계셨다.
사실 윤혜인은 오늘 이준혁과 함께 할머니 앞에 나타나서 할머니에게 서프라이즈를 하고 싶었는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다.
할머니가 잠들자 윤혜인이 병실을 나섰고 병원 앞에 서서 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때, 멀리에서 한 검은색 고급 외제차가 다가오더니 병원 앞에 멈췄다.
이준혁의 차를 발견한 윤혜인의 두 눈이 반짝였다.
이준혁이 그녀를 찾으러 병원에 온 건가?
그 순간, 서러움과 불쾌했던 모든 기분들이 온데간데 없이 사라졌다.
이준혁이 그녀에게 왔다는 건 그도 그녀를 신경 쓰고 있다는 말이니까…
차문이 열리고 이준혁이 긴 다리를 뻗어 차에서 내렸다.
윤혜인은 반가운 마음에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다가 다음 순간, 그대로 자리에 굳어버렸다.
차에서 내린 이준혁은 차 반대편으로 걸어가 허리를 굽히더니 차안에서 조심스럽게 한 여인을 안아서 내려주었다.
잘생긴 이준혁의 얼굴에는 걱정과 긴장으로 가득했다.
그 순간, 윤혜인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고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제6화
이준혁의 건장한 실루엣이 점점 가까워지다가 한 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윤혜인을 그대로 스쳐갔다.
그녀를 보지 못한 건지 아니면 못 본 척하는 건지는 알 수 없지만 윤혜인은 이준혁 품에 안겨 있던 여자의 얼굴을 정확하게 보았다. 그녀는 바로 얼마 전에 기사가 났던 임세희였다.
윤혜인은 무거운 걸음으로 병원을 떠났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택시에 탄 윤혜인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고 목적지를 묻는 택시 기사의 말에 그녀는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스카이 별장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거긴 이제 곧 그녀의 집이 아니게 될지도 모르니까.
한참 고민하던 윤혜인이 택시 기사에게 말했다.
“기사님, 청월 아파트로 가주세요.”
청월 아파트는 윤혜인이 이준혁과 결혼하고 나서 구매한 집이었다. 그때 당시 그녀는 할머니를 서울로 모셔오기 위해 할부로 산 20평 남짓한 아파트였다. 집이 크지는 않았지만 할머니와 둘이서 살기에는 충분했다.
그녀를 이해할 수 없었던 이준혁이 큰 별장을 하나 사주겠다고 했지만 윤혜인이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그 결정이 그녀가 지금까지 한 일들 중에서 가장 잘한 일이다.
아파트 단지에 도착한 윤혜인은 택시에서 내린 뒤, 바로 올라가지 않고 아파트 공원에 앉아 정신이 맑아질 수 있도록 잠시 바람을 쐬었다.
지난 2년의 시간을 돌이켜보면, 달콤했던 순간도 있었고 서럽고 마음이 아팠던 때도 있었다.
2년, 700일이 넘는 낮과 밤들, 그 마음이 아무리 얼음으로 만들었다고 해도 이 시간이면 충분히 녹았을 텐데, 지금 그녀의 귓가에는 비웃음 소리만 들렸다.
그 소리들은 그녀에게 이 모든 게 그녀 혼자만의 착각이라고 비웃고 있었다.
어둠이 깃들고 나서야 윤혜인이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고 엘리베이터에서 나오자마자 문 앞에 기대고 서있는 이준혁을 발견했다.
옷소매를 거둔 이준혁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어서, 기다란 목과 섹시한 쇄골을 보일 듯 말 듯하게 드러냈다.
윤혜인은 흠칫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지금쯤 병원에서 임세희와 함께 하고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어떻게 이곳에 있는 거지?
두 사람의 눈빛이 마주쳤고 이준혁은 정장 외투를 어깨에 걸친 채 손은 주머니에 넣고 윤혜인을 빤히 쳐다보았다.
“전화는 왜 안 받아?”
이준혁은 많이 피곤한 듯 기분이 언짢아 보였다.
그의 말에 윤혜인이 핸드폰을 꺼내 확인해 보니 얼떨결에 무음 모드를 눌러 버렸던 것이다. 부재중 전화가 다섯 통이나 와 있었고 전부 이준혁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2년 동안 함께 하면서 이준혁이 그녀를 찾기 위해 이렇게 많은 전화를 한 건 처음이다.
예전의 윤혜인이라면 지금쯤 로또에 당첨된 것보다 더 기뻐하고 뿌듯했을 것이지만 이젠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핸드폰을 도로 가방에 넣더니 벽에 기대며 낮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못 들었어요.”
이준혁이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하더니 살짝 짜증난 듯 말했다.
“널 두 시간 동안이나 찾아다녔어.”
임세희를 병원에 데리고 간 뒤 집으로 돌아와보니 집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저기 찾아봐도 윤혜인이 보이지 않자 이준혁은 심지어 주훈에게 윤혜인이 회사에서 나와서 어디로 갔는지 길가의 CCTV까지 확인하라고 시켰다.
윤혜인이 이렇게 그에게 말 한마디도 하지 않고 청월 아파트로 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앞으로 어디를 가든 나에게 얘기를 하고 가. 가자.”
이준혁은 돌아서서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그의 말은 스카이 별장으로 돌아가자는 뜻이었다.
윤혜인은 남자의 건장한 뒷모습을 보며 마음속에 아쉬움과 욕심이 생겼다.
앞으로… 그들 두 사람에게 앞으로의 날들이 남아있긴 할까?
이준혁은 고개를 돌려 제자리에서 꿈쩍도 하지 않는 윤혜인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안아주기를 기다리는 거야?”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윤혜인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더니 이준혁을 물끄러미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준혁 씨, 우리 이제 그만 이혼해요.”
“무슨 뜻이야?”
이준혁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고 윤혜인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 청월 아파트로 이사 올 거예요. 어차피 저희는 곧 아무 관계도 없는 사이가 될 거니까…”
제7화
윤혜인이 가까스로 억지웃음을 보였지만 마음은 너무 아팠다. 누군가가 그녀의 심장을 갈기갈기 찢고 있는 것 같았다.
“관계? 윤혜인, 네가 보기엔 우리가 어떤 관계 같은데?”
이준혁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차갑게 웃었고 이 남자의 질문에 윤혜인은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렇다, 처음부터 이준혁의 태도는 확실했다. 두 사람은 계약 결혼으로 절대 사사로운 감정을 나누지 않기로 했다. 그리고 다른 사람 눈에 그들은 단지 직원과 상사의 관계였다.
이준혁은 여전히 서울에서 가장 핫한 골든 싱글이었고, 그와 결혼하고 싶은 규수들은 줄을 설 정도였다.
이준혁이 이렇게 묻는 건 그녀에게 절대 달라붙지 말라고 얘기인가?
아랫입술을 꽉 깨문 윤혜인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죄송합니다, 이 대표님. 제가 괜한 걱정을 했네요. 이만 돌아가세요. 그리고 앞으로 다시는 청월 아파트에 오지 마세요.”
말을 끝낸 윤혜인은 끝내 참지 못하고 눈시울을 붉히고 말았다.
10년 동안이나 사랑한 남자인데 슬프지 않을 수가 없지만 아무리 마음이 아파도 그녀는 손을 놓을 준비를 해야 했다.
계속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살 수는 없었다.
복도의 센서등이 꺼지고 켜졌다를 반복했고 이준혁은 실눈을 뜬 채 입술을 살짝 오므렸다.
온몸에서는 위험하다는 시그널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준혁은 윤혜인의 투정을 받아줄 수가 있지만 이번에는 실로 선을 넘은 것이다!
타오르던 분노는 윤혜성의 글썽거리는 눈망울을 본 순간, 사르르 녹아버렸고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혹시 송소미 때문이라면…”
“그 여자랑 상관없어요. 이 대표님, 그만 돌아가세요.”
두 사람 사이를 막고 있는 건 송소미 한 사람뿐만은 아니다.
하루 종일 너무 힘들었던 윤혜인은 이준혁을 지나쳐서 문을 열고 집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억지를 부리는 윤혜인 때문에 기분이 언짢아진 이준혁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치더니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 윤혜인의 손을 덥석 잡았다.
“억지 그만 부려.”
이준혁이 눈살을 확 찌푸리더니 윤혜인을 돌려세운 뒤, 그녀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다음 순간, 그의 가슴팍은 불이 난 듯 뜨거웠다.
“열 나?”
머리가 어지러운 윤혜인은 휘청거리며 이준혁의 품에 안겼고 다리가 후들거렸다. 두 사람 사이에는 어느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애매한 분위기가 흘렀다.
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윤혜인의 상태를 살폈고 언제든 그녀에게 입을 맞출 것만 같았다. 머릿속이 하얘진 윤혜인은 지금 두 사람의 자세가 너무 야릇한 것 같아서 다급하게 이준혁의 가슴팍을 밀어내며 뒷걸음질 치려고 했다.
하지만 뒤로 가기도 전에 이준혁이 다시 그녀를 확 잡아당기더니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왜 피해?”
이준혁은 윤혜인을 번쩍 안아 올리더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고 열이 펄펄 끓고 있는 윤혜인은 흐릿한 정신으로 다급하게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같이 병원 가자.”
이준혁이 눈살을 찌푸리며 하는 말에 윤혜인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안 돼요!”
임신한 상태로 수액을 맞으면 뱃속에 있는 아이를 지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아이가 환영 받지 못하는 존재이긴 하지만 아이가 윤혜인의 뱃속에 자리를 잡은 만큼 윤혜인은 아이의 엄마로써 이 아이를 지킬 의무가 있다.
윤혜인은 발버둥을 치며 이준혁의 품에서 내려오려고 했지만 힘 차이가 너무 컸기에 도무지 이준혁에게서 벗어날 수 없었다.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이준혁은 윤혜인의 발버둥을 뒤로하고 단호하게 말했다. 윤혜인은 이준혁에게 질질 끌려가면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이준혁의 팔을 덥석 잡은 윤혜인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전 병원에 갈 수 없어요!”
제8화
이준혁이 걸음을 멈춘 채, 자신의 셔츠를 꽉 잡고 있는 윤혜인의 손가락을 보며 다소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왜?”
“그게… 저.. 무서워요.”
윤혜인은 고개를 숙인 채 대충 이유를 둘러댔다. 자신의 허접한 말에 윤혜인은 감히 이준혁을 쳐다보지도 못했으며 그가 과연 믿을지도 확신이 서지 않았다.
걱정된 마음에 그녀는 조심스럽게 말을 보탰다.
“조금 전에 약 먹었으니깐, 가서 한 숨 자면 괜찮아질 거예요.”
이준혁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품에 움츠린 채 안겨 있는 윤혜인을 바라보았다. 이 각도로 보는 그녀는 더욱 예뻤다. 갸름한 얼굴에 긴 속눈썹까지, 더군다나 열이 난 탓에 하얀 피부는 빨갛게 달아올라 유난히 가녀린 모습이었다.
이준혁은 순식간에 마음이 약해졌다. 그는 돌아서서 익숙한 듯 집 문을 열고 윤혜인을 안방 침대에 눕혔다.
그제야 마음이 놓인 윤혜인은 조금 전에 너무 긴장한 탓에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으며 머리카락도 젖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그녀는 얼른 시원하게 샤워를 하고 한 숨 푹 자고 싶었다.
“저 이제 괜찮아요.”
이준혁을 보내려는 뜻이었다. 별장 생활에 익숙한 이준혁은 그녀의 작은 아파트에서 살아본 적이 없었다.
“그래.”
간단하게 대답한 이준혁은 떠나지 않았고 되레 손으로 넥타이를 풀더니 셔츠 단추까지 하나씩 풀고 있었다.
“옷은 왜 벗는 거예요?”
순간 흠칫 놀란 윤혜인은 숨을 참으며 휘둥그레진 눈으로 물었다.
지금 그녀는 몸도 안 좋은데 설마 이 남자는 욕구를 풀 생각밖에 안 하고 있는 건가? 저게 인간인가?
이준혁이 말없이 윤혜인을 뚫어져라 쳐다보았고 윤혜인은 그 적나라한 눈빛에 심장이 멎을 것만 같았다. 그녀는 이렇게 가까이에서 그녀를 훑어보는 이준혁의 시선이 조금 불편하게 느껴졌다.
이준혁의 눈빛은 다른 남자와 달랐다. 마치 윤혜인을 꿰뚫어볼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그녀는 이준혁 앞에 알몸으로 서있는 기분이었다.
“저 지금 몸이 불편해요.”
윤혜인을 입술을 살짝 깨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은 오늘 잠자리를 가질 상황이 아니라는 뜻이다.
더군다나 두 사람은 이제 곧 이혼할 텐데 이런 일은 이제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
이준혁은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윤혜인을 쳐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두 손으로 침대를 지탱한 채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혜인아, 나 그렇게까지 짐승은 아니야.”
혜인이라고 부르는 이준혁의 입술은 유난히 섹시했고 분위기는 또다시 야릇해졌다. 그녀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르는 걸 보자 이준혁은 만족한 듯 몸을 일으켜 화장실로 들어갔다.
윤혜인은 괜히 오해할 만한 행동을 한 이준혁 때문에 얼굴이 더욱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내, 화장실에서 나온 이준혁은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쳐다보며 욕조에 물을 받아 놨다고 했고 윤혜인은 평소보다 다정한 그의 모습에 살짝 놀랐다.
평소에 결벽증이 조금 있는 윤혜인은 끈적거리는 몸을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금 당장 욕조에 몸을 담그고 싶었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난 윤혜인은 너무 급하게 일어난 탓에 눈앞이 까매져서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이준혁이 제때에 그녀의 허리를 잡아준 덕분에 그녀는 무사할 수 있었다.
윤혜인을 힐끗 쳐다보던 이준혁이 그녀를 안아 올린 채 욕조로 향했고 익숙한 향기가 가까워지자 윤혜인은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서 터질 지경이었다.
그녀는 말까지 더듬거리며 말했다.
“내, 내려줘요...”
이준혁은 윤혜인의 말에 그녀를 욕조 곁에 앉힌 채 손을 뻗어 그녀의 원피스 단추를 풀어주었다. 익숙한 듯 그녀의 옷을 벗기고 있는 이준혁의 표정은 서류를 확인하는 것보다 더 평온한 표정이었으며 그 동작은 매우 자연스러웠다.
차가운 이준혁의 손끝이 윤혜인의 살결에 닿을 때마다 윤혜인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참다못한 윤혜인은 옷을 꽉 잡더니 살짝 언성을 높이며 입을 열었다.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제발 얼른 나가요!”
“널 씻기는게 이번이 처음도 아닌데 왜 그래?”
긴장한 듯한 윤혜인의 표정을 보며 이준혁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고 윤혜인은 너무 부끄러워서 귀까지 빨갛게 물들었다.
예전에 잠자리를 가진 뒤, 이준혁은 힘들어서 축 처진 윤혜인을 몇 번이나 씻겨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씻겨줬다고 하기보다는 욕실에서 한 번 더…
윤혜인은 이제 남자와 욕조만 보아도 부끄러웠다. 그녀는 가까스로 머릿속에 떠오르는 야릇한 장면을 뿌리친 채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그를 밀쳐냈다.
“이준혁 씨, 얼른 나가주세요.”
이준혁은 장난을 멈추고 욕실을 나섰고 이내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깨끗하게 씻은 윤혜인은 기분이 너무 상쾌했다. 샤워 가운을 걸치고 나와보니 이준혁이 여전히 방안에 있었고 윤혜인은 그를 무시한 채 잘 준비를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이준혁이 그녀의 허리를 잡고 그녀를 화장실로 끌고 갔다.
“머리도 안 말리고 잘 생각이야?”
말을 하던 이준혁은 수건으로 묶인 윤혜인의 머리를 풀더니 드라이기로 꼼꼼히 말려주었다.
제9화
윤혜인은 마음이 너무 착잡했다. 그녀는 거울속에 비친 수려한 이준혁의 외모와 익숙한 향기에 마음이 자꾸 설렜다.
이준혁의 다정함은 그녀에게 더할 나위 없는 고통이었다. 그녀는 나중에 자신이 욕심이 생겨서 이준혁을 놓아주지 못할까 봐 덜컥 겁이 났기 때문이다.
머리를 말린 뒤, 윤혜인은 거울 속의 이준혁에게 낮은 목소리로 고맙다고 중얼거렸고 그녀 가까이에 서있던 이준혁은 화장대에 손을 걸치더니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물었다.
“감사 표시는 어떻게 할 건데?”
그의 말에 윤혜인은 하마터면 사레에 걸릴 뻔했다. 그녀는 말똥말똥한 눈으로 어이없다는 듯이 이준혁을 쳐다보았다.
예전에 그녀는 항상 몸으로 감사 표시는 했는데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다.
두 사람은 곧 이혼할 거니까!
거울속의 윤혜인은 발그레한 표정으로 멍하니 이준혁을 쳐다보았고 그 모습에 이준혁은 괜히 마음이 싱숭생숭했다. 그는 갑자기 윤혜인의 턱을 살짝 잡더니 고개를 돌리고 사나운 얼굴로 경고를 했다.
“앞으로 그런 표정으로 다른 사람을 쳐다보지 마.”
그의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윤혜인은 흠칫 놀란 얼굴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고 이준혁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모든 남자가 나처럼 신사적인건 아니야.”
윤혜인은 그녀의 이 모습이 얼마나 유혹적인지, 남자들에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를 것이다. 이준혁의 얼굴이 점점 가까워지자 당황한 윤혜인은 고개를 돌려서 피하려고 했지만 이준혁이 그녀의 어깨를 살짝 잡더니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움직이지 마.”
그렇게 두 사람은 콧등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다. 윤혜인은 이준혁이 그녀에게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눈꺼풀까지 살짝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준혁은 가볍게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추더니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볼을 살짝 꼬집으며 말했다.
“이건 벌이야.”
이게 대체 무슨 말도 안 되는 헛소리란 말인가?
윤혜인은 화가 나면서도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았다. 이준혁의 다정한 모습에 이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이때, 이준혁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고 윤혜인은 순식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는 재빨리 자리를 피했고 이준혁은 핸드폰을 들고 베란다로 향했다.
몇 분 지난 뒤, 전화를 끊은 이준혁이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윤혜인은 침대에 누워 이불속에 몸을 숨겼다.
그녀는 그가 떠날 것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준혁이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윤혜인이 먼저 말을 걸었다.
“갈 때 문 좀 닫아줘요.”
“일찍 자.”
이준혁은 말 한마디 남긴 채 정장 외투를 챙겨 방을 나서다가 고개를 돌려 윤혜인을 힐끔 쳐다본 뒤, 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문이 완전히 닫히자 윤혜인은 눈물을 글썽이면서 이불속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심장은 누군가에게 베인 듯 그 안에서는 서러움 같은 무언가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었다.
임세희는 이준혁이 유일하게 사랑했던 여자라는 걸 모든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데 윤혜인은 과연 무엇으로 그녀와 경쟁할 수 있단 말인가?
태어나기 전부터 환영받지 못하는 뱃속의 이 아이로 경쟁이나 가능할까?
윤혜인은 서랍에 숨겨둔 임신 보고서를 꺼내 갈기갈기 찢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준혁에게 이 아이의 존재를 알리지 않은 게 너무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괜히 창피를 당할 뻔했다.
한편, 한 개인 병원에서.
이준혁이 창가에 멍하니 서있었다. 달빛에 비춰진 그의 얼굴은 오늘 따라 유난히 잘생겨 보였다.
“준혁 오빠.”
병실 침대에 누워있던 임세희가 허약한 목소리로 이준혁을 불렀다.
병원복 안에 보라색 원피스를 입은 임세희의 모습은 더욱 온화하고 여성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부름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이준혁이 임세희에게 다가가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깼어?”
“응, 또 오빠한테 신세를 졌네. 임씨 아줌마도 참, 큰 문제도 아닌데 호들갑을 떨어서 괜히 이 저녁에 오빠를 병원까지 불렀어.”
임세희가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말을 하는 그녀는 크게 감동을 받은 얼굴이었으며 이와 동시에 그녀는 이준혁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걸 끊임없이 이준혁에게 세뇌를 시키고 있었다.
“괜찮아. 뭐 좀 먹을래? 주훈한테 사오라고 할게.”
차가운 이준혁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었고 임세희가 애교 섞인 목소리로 그를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오늘밤에 어디 있었어? 내가 오빠한테 해를 끼친 건 아니지?”
“아니야.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까 얼른 쉬어.”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한 이준혁은 손목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준혁 오빠, 나 무서워.”
임세희가 갑자기 손을 뻗어 뒤에서 이준혁의 허리를 끌어안았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밤 안 가면 안 돼?”
제10화
임세희의 손길이 이준혁의 허리에 닿은 순간 이준혁이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고 임세희의 손은 그렇게 허공에 멈춘 채 멍한 표정으로 이준혁을 쳐다보았다.
병실 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고 분위기는 순식간에 어색해졌다.
손을 거둔 임세희는 몰래 주먹을 꽉 쥐더니 이내 눈시울을 붉혔다.
“준혁 오빠, 내가 싫어?”
“아니, 괜한 생각하지 마.”
이준혁이 임세희에게 휴지를 건네며 위로했다.
“내가 지금 오빠에게 짐이 됐다는 걸 알아… 아무래도 내가 돌아오지 말았어야 했나 봐.”
임세희가 눈물을 닦으면서 말했고 이준혁이 얼른 가까이 다가가 임세희의 어개를 꼭 잡더니 그녀를 위로했다.
“그런 말 하지 마! 난 끝까지 너를 지켜줄 거야.”
“준혁 오빠, 난 오빠가 날 버리지 않을 줄 알았어…”
임세희는 이준혁의 손을 꼭 잡은 채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참 뒤, 임세희가 깊은 잠에 빠지고 나서야 이준혁이 병실을 나섰다. 하지만 병실 문이 닫히던 순간, 곤히 잠든 줄 알았던 임세희가 두 눈을 번쩍 떴다.
조금 전, 임세희는 이준혁에게서 낯선 향기를 맡았다. 아주 은은한 향이기는 했지만 임세희는 여자의 향수라는 걸 바로 확실할 수 있었다.
그리고, 준혁 오빠 곁에는 염치없이 끼어든 윤혜인 말고는 다른 여자가 없다.
임세희는 이를 꽉 깨물었고 화가 잔뜩 난 탓에 얼굴이 점점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녀는 반드시 이 복수를 할 것이다. 언젠가 윤혜인 그 여자 눈에 피눈물이 나게 만들 것이다.
한편, 병원에서 나온 이준혁이 차에 타자 비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표님, 어디로 모실까요?”
“청월 아파트로 가.”
이준혁은 넥타이를 풀어 던진 채 손가락으로 이마를 꾹꾹 누르며 피곤한 듯 대답했다.
한참 뒤, 청월 아파트에 도착하자마자 이준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 익숙한 듯 비밀번호를 눌렀다.
안방 문은 비스듬히 열려 있었고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가보니 윤혜인이 곤히 잠들어 있었다. 헝클어진 머리에 잠옷 끈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려 조금 야릇한 모습이었다.
이준혁이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이마를 만졌다. 전보다 열이 많이 내린 듯했다.
그가 이불을 살짝 올리던 그때, 윤혜인이 갑자기 돌아눕더니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물을 달라고 중얼거렸다.
이준혁은 이내 따뜻한 물을 한 잔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낮은 목소리로 윤혜인의 이름을 불렀지만 상대방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눈썹을 들썩이던 이준혁은 커다란 손으로 윤혜인의 어깨를 조심스럽게 들어올리더니 그녀를 품에 안아 물을 먹였다.
목이 많이 말랐던 윤혜인은 손으로 컵을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은은한 불빛 아래 물을 마셨던 윤혜인의 입술은 촉촉하고 발그레했다. 이준혁은 두 눈이 벌겋게 충혈되더니 손가락으로 그녀의 입술을 쓱 닦아주었다.
인기척에 정신이 흐릿한 윤혜인은 낮게 신음 소리를 냈고 이준혁은 그제야 그녀의 입술에서 손을 뗐다. 그의 손가락에는 아직 윤혜인 입술의 온기가 남았고 이준혁은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가 끓어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는 벌떡 일어나 방을 나섰다.
윤혜인이 잠에서 완전히 깼을 때는 이미 점심이었다. 오늘은 주말이었고 별다른 잔업 지시가 없었기에 회사로 나갈 필요가 없었다.
더군다나 비서실에 그녀와 주훈 말고도 네 명의 비서가 더 있었다. 그들은 언제든 대표님이 지시한 업무를 완수할 수 있게 돌아가면서 자리를 지켰다.
침대에서 일어난 윤혜인은 머리맡에 놓인 컵을 보며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잠들기 전에 물을 마셨었나?
하지만 이내 별다른 의심없이 체온계를 꺼내 체온을 확인했고 열은 완벽하게 내린 듯했다.
몸이 뻐근한 윤혜인은 움직이기 싫어서 간단하게 점심을 챙겨 먹은 뒤 다시 낮잠을 청했다. 그러다가 날이 어두워졌을 때 갑자기 울린 핸드폰 소리에 눈을 번쩍 떴다.
발신자는 윤혜인의 절친 소원이었다. 이제 막 해외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그녀는 윤혜인에게 같이 저녁을 먹자고 전화를 했던 것이다.
고깃집에 도착한 소원은 먼저 와있던 윤혜인을 발견하자마자 한걸음에 달려가 그녀를 품에 와락 안은 채 중얼거렸다.
“혜인아, 진짜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어.”
윤혜인과 소원은 고등학교 동창이다. 그때 당시 귀족 학교인 청하 국제고에서 성적이 우수한 학생을 모집하고 있었으며 학비를 전부 면제한다고 했고, 마침 윤혜인이 막 서울로 상경했던 때였다.
어렸을 때부터 성적이 우수한 윤혜인은 전교 1등이라는 성적으로 순조롭게 청하 국제고에 입학하게 되었다.
하지만 계급 관념이 강했던 청하 국제고 일부 학생들은 가정 배경이 보잘것없는 윤혜인이 꼴 보기 싫어서 학교에서 그녀를 따돌리고 괴롭히기 시작했다.
우연한 기회에 소원이 윤혜인을 도와주게 되었고 두 사람은 그렇게 점차 모든 걸 함께 하는 절친이 되었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윤혜인은 소씨 가문이 서울에서 알아주는 명문 가문이고 소원은 그 가문의 둘도 없는 아가씨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는 그런 것들로 추호의 영향도 받지 않았다. 그렇게 윤혜인과 소원은 고등학교부터 대학교까지 거의 매일 붙어있었고 서로에게 숨기는 게 일도 없는 사이가 되었다.
신나서 수다를 떨던 소원은 한참 지나고 나서야 곁에 있던 키가 크고 건들거리는 남자를 윤혜인에게 소개했다.
“혜인아, 이 사람은 내 남자친구 김재성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