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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후, 아빠가 되었습니다
술에 취한 남자는 잠결에 첫사랑의 이름을 불렀다. 이튿날 잠에서 깬 남자는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고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어젯밤 그 여자 당...
Chương (1)
第1章
제1화
호텔 바닥은 아수라장이었다.
잠에서 깬 지유는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았다.
지유는 미간을 주무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커다란 몸집을 가진 남자가 옆에 누워 있는 걸 발견했다.
지나칠 정도로 잘생긴 얼굴은 조각과도 같았고 눈매도 깊고 진했다.
아직 깊은 잠이 들어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지유가 몸을 일으키자 이불이 그녀의 몸에서 미끄러져 내렸고 뽀얗고 매혹적인 두 어깨에 어젯밤 남긴 흔적이 보였다.
지유가 앉았던 자리에 선명한 핏자국이 보였다.
시간을 보니 어느새 출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지유는 바닥에 널브러진 출근룩을 다시 집어 들어 얼른 갈아입었다.
스타킹은 이미 남자에 의해 찢겨 있었다.
지유는 스타킹을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하이힐을 신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깔끔하게 차려입은 지유는 어느새 워커홀릭 비서로 완전히 돌아왔고 가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들어온 사람은 청순한 미녀였다.
지유가 부른 사람이었다.
이현의 취향이 이런 여자였다.
지유가 그 여자에게 이렇게 말했다.
“침대에 누워서 대표님 깨나길 기다리면 돼요. 다른 건 한마디도 하지 마요.”
지유는 고개를 돌려 아직 단잠에 빠진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억울한 마음에 코끝이 찡해졌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방에서 나왔다.
지유는 두 사람이 어젯밤 잠자리를 가졌다는 사실을 이현이 아는 게 싫었다.
그들 사이에 계약에 의하면 아무도 모르게 3년간 결혼을 유지하면 바로 이혼할 수 있었다.
이 기간에 선을 넘는 행동은 그 어떤 것도 용납되지 않았다.
지유는 7년째 이현의 비서로, 3년째 이현의 와이프로 있었다.
졸업한 그날부터 이현의 곁을 한시도 떠난 적이 없었다.
같은 날, 이현은 지유에게 두 사람은 그저 상사와 부하의 관계일 뿐 이 관계를 뛰어넘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지유는 복도 창가에 서서 어제 일을 떠올렸다. 이현은 그녀를 안고 침대에 누워 ‘승아’라는 이름을 연신 불러댔다.
지유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승아는 이현의 첫사랑이었다.
이현은 지유를 승아의 대용품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지유도 그런 이현을 잘 알았다. 이현은 지유와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걸 원치 않을 것이다.
지유만 진지하게 대했던 이 결혼도 곧 끝나갈 때가 된 것 같다.
어젯밤에 있었던 일은 둘이 함께한 3년이라는 시간에 마침표를 찍기 위해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핸드폰을 꺼내보니 헤드라인을 장식한 뉴스 하나가 보였다.
[신인 가수 노승아, 약혼자와 함께 귀국.]
핸드폰을 잡은 지유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씁쓸한 감정이 코가 찡해질 정도로 거세게 밀려왔다.
지유는 그제야 이현이 왜 어젯밤 그렇게 술에 취해 그녀의 품에 안겨 울었는지 알게 되었다.
찬바람이 불어왔다. 지유는 씁쓸하게 웃더니 핸드폰을 도로 넣고는 가방에서 담배 한 갑을 꺼냈다.
지유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담배를 잡았다. 연기가 피어오르며 어딘가 외로워 보이는 지유의 어여쁜 얼굴이 흐릿해졌다.
이때 윤정이 잰걸음으로 달려오더니 숨을 헐떡거리며 말했다.
“온 비서님, 대표님 슈트 도착했어요. 지금 바로 가지고 들어갈게요.”
덕분에 지유는 사색에서 빠져나왔고 그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슈트를 힐끗 훑어보던 지유가 이렇게 말했다.
“잠깐만요.”
윤정이 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혹시 다른 지시 사항 있나요?”
“대표님 파란색 별로 안 좋아하시니까 까만색으로 바꿔요. 넥타이는 체스 무늬로 하고요. 그리고 구김이 없게 한 번 더 다리는 게 좋겠어요. 대표님은 비닐 주머니 소리를 싫어하시니 절대 투명한 주머니에 담으면 안 돼요. 옷걸이에 걸어서 가져다주면 돼요.”
지유는 마치 이현의 집사처럼 그의 작은 습관도 일일이 다 기억하고 있었고 지금까지 일하면서 한 번도 실수한 적이 없다.
윤정은 화들짝 놀랐다. 여기로 온 지 3달이 지났는데도 이현의 저승사자와도 같은 얼굴을 보면 살이 떨렸다.
오늘도 하마터면 사고를 칠 뻔했다.
윤정이 얼른 바꾸러 가며 이렇게 말했다.
“온 비서님, 고마워요.”
그러다 순간 스위트룸에서 갑자기 낮은 호통 소리가 들려왔다.
“꺼져!”
그리고 많이 놀란 듯한 여자의 비명도 잇따라 전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방문이 열렸다.
윤정이 눈시울을 붉힌 채 머리를 푹 숙이고 걸어 나왔다.
아마도 한 소리 들은 듯했다.
그리고 이번엔 이현도 매우 언짢아 보였다.
윤정은 도움을 청하는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보며 말했다.
“온 비서님, 대표님이 찾으세요.”
지유는 활짝 열린 문을 보며 윤정이 처리하기엔 어려울 것 같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일단 먼저 내려가서 일 보세요.”
지유는 담배를 눌러서 끄더니 곧장 스위트룸 안으로 들어갔다.
방안은 참으로 아수라장이었다. 이현의 주위에 있는 물건들이 하나같이 엉망진창이었다.
던져서 깨진 랜턴과 액정이 깨진 채로 계속 진동하는 핸드폰도 보였다.
지유가 불러온 여자는 놀라서 아무것도 못 했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 어디에 서 있어야 할지 몰라 했고 뭔가 켕기는 듯한 눈치였다.
이현은 어두운 얼굴로 침대에 앉아 있었다. 그는 원래도 비율이 좋았지만 장기간 꾸준히 운동을 했기에 근육이 선명하고 어깨가 떡 벌어져 있었다. 보일 듯 말 듯한 치골은 지금 이불 뒤에 숨어 있다.
몸은 너무 매혹적이었지만 얼굴은 칠흑같이 어두웠고 눈동자는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화를 내기 일보 직전인 것 같았다.
지유는 앞으로 다가가 쓰러진 랜턴을 일으켜 세우고 물 한 잔을 따라 침대장에 놓아주며 말했다.
“대표님, 9시 반에 회의가 하나 잡혀 있습니다. 지금 일어나시면 됩니다.”
이현은 차가운 눈동자로 눈앞에 서 있는 여자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 듯한 눈치였다.
지유는 그런 이현의 속내를 눈치채고 옆에 서 있는 여자에게 말했다.
“먼저 가봐요.”
여자는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옷을 들고 잽싸게 밖으로 나갔다.
세상이 조용해졌다.
이현은 시선을 지유에게로 돌렸다.
지유는 습관적으로 컵을 그의 손에 들려주고는 셔츠를 침대맡에 놓아줬다.
“대표님, 이제 옷 갈아입으세요.”
이현은 얼굴을 굳히고 언짢은 표정으로 차갑게 쏘아붙였다.
“어젯밤 어디 갔었어?”
지유가 살짝 멈칫했다. 지금 지유가 자기를 잘 지켜내지 못해 다른 여자가 기회를 엿보고 그의 침대에 기어오르게 해 승아에게 잘못할 짓을 했다고 지유를 탓하기라도 하는 건가?
지유의 눈빛이 살짝 바뀌었다.
“대표님은 술김에 다른 여자와 관계를 가지게 된 거예요. 다들 성인이니 신경 쓰지 마세요.”
덤덤한 지유의 표정은 마치 다른 여자가 와서 귀찮게 하지 못하게 다 처리해 줄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이현의 이마에 핏줄이 섰다.
“마지막으로 물을게. 너 어젯밤 어디 있었어?”
지유는 켕기는 게 있었지만 그래도 꿋꿋하게 말했다.
“요즘 프로젝트 처리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사무실에서 보다가 잠들었어요.”
이 말에 이현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차가운 얼굴로 입을 앙다문 채 침대에서 일어나 샤워 타올로 몸을 감쌌다.
지유는 그런 이현의 뒷모습을 보며 눈가가 살짝 촉촉해졌다.
이현은 지유 앞에서 항상 꽁꽁 가리고 다녔다. 마치 지유가 그의 몸을 보는 게 역겹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어제 지유를 승아라고 생각했을 때는 전혀 이러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이현은 이미 샤워하고 나와 전신거울 앞에 서 있었다.
지유가 그쪽으로 다가가 늘 그래왔듯 셔츠 단추를 채워줬다.
이현은 188의 큰 키를 자랑했다. 지유도 168은 되는 키였지만 넥타이를 매주기엔 부족한 키였다.
이현은 자신의 몸이 더러워진 게 승아에게 미안한지 오만한 자세로 몸을 숙이려 하지 않았다.
지유는 하는 수 없이 까치발을 하고 넥타이를 이현의 목에 둘렀다.
그렇게 열심히 이현의 넥타이를 묶어주고 있는데 이현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귓가에 전해졌다. 이현은 갈라진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지유야, 어젯밤에 너 맞지?”
제2화
이에 지유가 화들짝 놀라며 하마터면 발을 삐끗할 뻔했다.
중심을 잘 잡지 못한 지유는 그렇게 이현의 몸에 기댔다.
이현은 지유의 몸이 앞으로 쏠리자 손으로 지유의 허리를 잡아줬다.
뜨거운 체온이 전해지자 지유는 어젯밤 그가 저돌적으로 그녀를 덮치던 화면이 떠올랐다.
지유는 가까스로 진정하고 고개를 들어 이현의 깊은 눈동자를 마주 봤다.
이현의 눈동자는 매우 진지했고 그 속엔 질문과 의혹도 담겨 있었다. 눈빛은 지유를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지유는 심장이 벌렁거렸다.
이현과 더는 눈을 마주칠 엄두가 나지 않아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아까 나간 그 여자라고 생각했을 때도 이현은 불같이 화를 냈는데 여기서 만약 지유가 자신이었음을 인정한다면 후과가 그리 좋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니라고 하기엔 억울했다.
만약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라는 걸 이현이 알게 된다면 결혼 생활을 조금이라도 더 이어나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도 지유는 그와 눈을 마주치는 게 겁나 고개를 숙인 채로 물어봤다.
“그건 왜 묻는 거예요?”
지유는 사실 남몰래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현이 코웃음을 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너는 그런 용기가 없을 것 같아서.”
지유는 멈칫하더니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어쩌면 이현은 어젯밤 잠자리를 가진 사람이 지유가 아니길 더 바랄지도 모른다. 계약 결혼일뿐이니 말이다.
게다가 며칠만 더 지나면 계약도 끝나간다
순간 이현이 지유의 손을 힘껏 낚아챘다.
지유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이현이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심사하듯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지유는 심장이 멎는 것만 같았다.
발버둥 치며 손을 빼려 했지만 이현이 지유를 전신 거울 앞으로 바짝 몰아갔다.
“뭐 하는 거예요?”
지유는 애써 침착한 척했지만 떨리는 목소리가 그녀의 긴장과 두려움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었다.
“너 정말 사무실에서 잠들었어?”
지유는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혹시나 들킨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3년 전, 결혼한 첫날 밤, 지유는 이현이 원해서 그녀와 결혼한 줄 알고 손을 내밀어 이현의 손을 잡으려 했지만 이현이 차가운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온지유, 내가 너랑 결혼한 건 임종 전 할아버지의 소원을 이루어드리기 위해서야. 3년 뒤면 우리는 서로 모르는 사이가 되겠지. 그전까지 내 몸에 손대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아니면 무서운 게 뭔지 알려줄 테니까.”
지유에게 건드리지 말라고 한 것도 자신의 첫사랑 승아를 위해 몸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현이 얼마나 승아를 사랑하는데, 지유가 잘못 건드려서 그의 노력이 무너지는 날엔 무조건 그녀를 죽이려 들것이다.
지유는 여전히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이렇게 대답했다.
“네...”
순간 이현은 손을 지유의 가느다란 목에 갖다 대더니 점점 아래로 향했다. 이현이 손에 힘을 주자 살이 벚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다 세 번째 단추에 멈췄다.
“단추를 잘못 끼웠어.”
지유는 그의 손목을 따라가 보니 단추가 정말 잘못 끼워져 있었다.
놀란 서유가 이현의 손을 쳐내더니 얼른 단추를 풀며 이렇게 말했다.
“미안해요. 다음부터 착장 유의할게요.”
이 말에 이현은 갑자기 짜증이 치밀어올라 지유를 밀쳐내며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다.
이현은 등을 돌린 채 옷깃을 잘 정리하며 말했다.
“이런 저급 실수는 두 번 다시 없었으면 좋겠어.”
지유는 심장을 후벼파는 것 같은 아픔에 그저 바닥만 내려다봤다.
그녀에겐 한 치의 잘못도 용납하지 않으면서 본인은?
이현이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를 바라봤다.
“여기 서서 뭐 해? 회의 준비하러 안 가?”
지유가 고개를 숙이고 있어 얼굴은 확인할 수 없었다.
“여이현 씨, 노승아 씨 돌아왔어요.”
이현의 표정이 굳었다. 3년간 지유가 이현의 이름 석 자를 다 부른 건 처음이었다.
눈물을 힘겹게 도로 삼킨 지유는 이현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물었다.
“우리도 이혼할 때 됐죠.”
이를 들은 이현의 손등에 핏줄이 올라왔고 얼굴도 한층 어두워졌다.
“온지유, 지금은 업무 시간이야. 네가 해야 할 일을 해.”
이현은 이렇게 말하더니 성큼성큼 방을 나섰다.
지유는 그런 이현의 뒷모습을 보며 숨이 막혀왔다.
침묵으로 인정한 거나 다름없었다.
손등에 따듯한 뭔가가 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내려다보니 눈물이었다.
결국 또 이렇게 울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이현의 말이 맞다. 지유는 아직 이현의 비서였기에 일은 해야 한다.
회의에 쓸 서류를 집에 두고 왔기에 지유는 집에 들렀다 가야 했다.
간 김에 3년 전부터 준비해 두었던 이혼 서류도 챙길 생각이었다.
...
여진그룹 대표이사실.
이현은 가죽 소파에 기대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이현의 비서 배진호가 들어왔다.
“대표님, 조사 끝났습니다. 어제 온 비서님은 사무실에서 주무신 게 맞습니다.”
이를 들은 이현의 미간이 더 구겨졌다.
“그 외 노승아 씨도 대표님이 묵은 호텔로 찾아가 카운터에 방 번호를 확인했다고 합니다.”
한편.
여씨 가문 본가로 돌아온 지유가 대문을 들어서는데 여진숙의 각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얌전히 일하지 않고 왜 들어온 거야? 우리 여씨 가문은 쓸모없는 사람 필요 없다. 특히 너처럼 아이도 못 낳는 애는 더더욱.”
지유는 시어머니의 비아냥에 적응한 지 오래였다.
하지만 아이를 낳는 건 지유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었다.
다행히 앞으로 더는 이현의 아이를 낳지 못한 것으로 시어머니께 욕먹을 걱정은 없게 되었다.
들어보지도 못한 의사가 아들을 낳을 수 있다며 내어준 거무튀튀한 약도 마시지 않아도 된다.
지유는 그래도 공손하게 대답했다.
“대표님이 회의에서 쓸 자료 좀 가지러 왔어요.”
“중요한 서류라면 처음부터 제대로 준비했어야지. 흘리고 다니다가 이제야 가지러 와? 그것도 업무 태만이야 얘. 우리 집안에 갚아야 할 빚이 20억이라는 건 잊지 않았겠지? 한평생 이현이를 위해 일해도 모자랄 판에 어디서 게으름을 피워?”
지유는 너무 마음이 아파 시선으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깜빡하고 있었다. 이현의 할아버지가 그녀의 아버지를 대신해 20억의 빚을 갚아주면서 이현에게 그녀와 결혼할 것을 요구했다.
아까 이현에게 이혼 소리를 꺼낼 때 왜 그가 별로 신경 쓰지 않고 그녀에게 맡은 바 임무를 잘하라고 했는지 이해가 갔다.
아마 이혼하더라도 여씨 가문에 빚진 돈은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돈은 꼭 갚을 거예요. 대표님이 아직 기다리고 있어서 일단은 서류만 가지고 나가볼게요.”
이 말을 뒤로 지유는 이현의 서재로 향했다.
“가라는 말도 안 했는데 먼저 자리를 비워? 그게 무슨 버릇이니? 됐다. 마침 물어볼 게 있어.”
“무슨 일이세요?”
“이번 달 병원에는 가봤니? 아직 소식 없어?”
“저도 그렇고 대표님도 그렇고 일이 바쁘다 보니 아직 애 생각 없어요. 이따 시간 좀 비면 노력해 볼게요.”
여진숙는 표정이 삭 변하더니 바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 말은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어. 안 되면 되는 애로 바꿔야지. 얼른 이현이랑 이혼해!”
지유는 얼굴이 창백해졌다. 결혼 첫날부터 언젠간 이혼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지만 지유는 그래도 확실히 해두고 싶었다.
“대표님도 그렇게 생각한대요?”
“아니면?”
여진숙이 되물었다.
지유의 얼굴이 순간 하얗게 질렸다.
“아주머니, 아주머니가 제일 좋아하는 삼계탕 끓였어요. 한번 드셔보세요.”
주방에서 나온 여자가 정적을 깼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지유는 그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몸속에 흐르는 피까지 차가워지는 듯한 느낌이었다.
제3화
고개를 들어보니 승아가 앞치마를 두르고 손에 국자를 들고 있었다.
지유를 본 승아는 표정이 살짝 굳었다가 다시 부드럽게 인사했다.
“아주머니 손님이에요? 마침 삼계탕을 조금 더 끓였는데 같이 와서 먹어볼래요?”
승아의 느긋한 태도는 마치 그녀가 이곳의 안주인인 것 같았다.
오히려 지유가 멀리서 찾아온 손님처럼 보였다.
하긴 얼마 지나지 않아 지유는 곧 이 집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이 된다.
지유는 이런 거지 같은 상황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이현과 결혼할 때 모든 사람에게 알렸고 승아도 축복을 보내왔기에 지유가 이현의 와이프라는 걸 모를 리가 없었다.
승아는 지유가 문 앞에 서서 꼼짝도 하지 않자 얼른 다가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왔으면 손님이죠. 얼른 들어와요.”
승아가 가까이 다가오자 옅은 재스민 향이 풍겨왔다. 이현은 작년 생일에 지유에게 똑같은 향수를 선물했다.
지유는 목구멍이 점점 메어와 숨쉬기가 힘들었고 다리가 천근만근인 듯 움직이기 힘들었다.
여진숙은 지유가 그 자리에 우뚝 서서 움직이지 않자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유야, 여기 서서 뭐 하는 거야? 손님이 왔으면 차라도 내와야지.”
지유는 승아와 겨뤄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이렇게 물었다.
“어머님, 승아 씨가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예요?”
여진숙이 답했다.
“승아도 오랜만에 귀국했으니 한 번쯤은 나 보러 와야 할 거 아니니? 왜? 승아가 우리 집에 오면 안 돼? 현이도 뭐라 안 하는데 네가 뭐라고 시비야?”
“그런 뜻 아니에요.”
지유가 고개를 푹 숙였다.
“아, 지유 언니였구나. 이현 오빠가 결혼사진을 보여준 적이 없어서 못 알아봤네요. 기분 상했다면 죄송해요.”
지유는 환하게 웃는 승아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허.’
하긴 자기가 제일 사랑하는 여자에게 다른 여자와 결혼한 사진을 보여줄 리가 없지.
이때 여진숙이 호통치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얼른 승아한테 차를 내주지 않고 뭐 해?”
지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옆에 놓은 주전자를 들었다.
승아는 여진숙과 웃고 떠들며 소파에 앉았다. 여진숙은 승아가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겨주며 자상하게 웃었다. 지유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모습이었다.
지유는 불편한 마음을 꾹꾹 참으며 승아에게 차를 따라주었다.
승아는 손으로 찻잔을 살짝 건드렸다.
지유는 차가 뜨거울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승아가 다치는 게 싫어 얼른 막으려 했지만 승아가 찻잔을 그대로 엎었고 그렇게 승아의 손에 차가 쏟아졌다.
스읍.
지유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이내 승아의 비명이 들렸다.
“아악!”
소리를 들은 여진숙이 긴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떻게 된 거야?”
승아는 눈물이 글썽해서 이렇게 말했다.
“아주머니, 저는 괜찮아요.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빨갛게 부어오른 승아의 손을 보며 여진숙은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러더니 지유를 돌아보며 바로 귀싸대기를 날렸다.
철썩하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손에 지유는 맞고도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여진숙이 이렇게 감정적으로 자신에게 손을 댈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너 도대체 뭐 하자는 거야? 승아 피아노 연주하는 거 몰라? 화상이라도 입으면, 그 가정 형편에 병원비는 낼 수 있겠어?”
여진숙이 매섭게 쏘아붙였다.
지유는 볼이 얼얼했지만 마음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그 두 사람을 바라보며 이렇게 말했다.
“혼자 쏟은 건데, 저랑 무슨 상관이에요?”
여진숙이 그런 지유를 노려보며 말했다.
“따박따박 말대꾸는! 거기 누구 없어? 당장 저년 가둬!”
여진숙의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도우미 둘이 지유를 잡아당겼다.
순간 지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 그들이 무슨 짓을 하려는지 알고 발버둥 쳤다.
“이거 놔요! 이거 놓으라고요!”
하지만 그들을 이기기엔 역부족이었고 그렇게 지유는 컴컴한 방으로 끌려갔다.
안에 던져진 지유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고 이미 잠겨버린 문을 두드리다가 힘없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유는 순간 모든 힘이 풀렸고 온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근녀는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무서움을 이겨내려 했다.
거실에 둔 지유의 핸드폰이 계속 울려댔다.
승아의 상처를 치료해 주던 여진숙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향했다. 화면에 뜬 이현의 이름을 보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전화를 받았다.
“응, 이현아.”
수화기 너머로 이현의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여진숙이 답했다.
“그래, 나다.”
이현이 멈칫하더니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지유는요?”
“집에 있지.”
이현은 별 생각 없이 이렇게 말했다.
“지유한테 서류 좀 가져다 달라고 해요. 서재 서랍에 있어요.”
진작부터 그 전화에 모든 신경이 쏠려 있던 승아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기대에 찬 눈빛으로 물었다.
“아주머니, 이현 오빠예요?”
“그래.”
여진숙이 말을 이어갔다.
“지유더러 서류 좀 챙겨오라는구나. 지유도 현이 비서라는 이유로 현이 와이프 자리까지 올라갈 수 있었지.”
여진숙은 승아를 바라보며 그녀의 손을 꼭 잡더니 미소를 지었다.
“승아야, 그때 네가 외국으로 가지만 않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현이가 너를 그렇게 좋아했는데, 결혼도 당연히 너랑 하지 않았겠어? 네가 우리 집 며느리로 들어왔으면 진작에 아이가 들어섰을 텐데. 밥만 축내는 애가 우리 집에 발을 붙일 일도 없었을 테고.”
“네가 현이한테 서류 가져다주는 건 어때?”
“그래도 돼요?”
승아가 약간 주저하며 물었다.
“당연하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으니 현이도 좋아할 거야.”
여진숙이 한마디 덧붙였다.
“나는 네가 손주 안겨줬으면 하는데?”
승아가 부끄럽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주머니, 그런 말씀 마세요. 일단 자료부터 가져다주고 올게요.”
여진숙의 말에 승아는 희망이 생기는 것 같았다.
지유와 이현의 결혼은 이현의 할아버지가 결정한 일이었다. 3년간 아이가 없다는 건 한 번도 잠자리를 가진 적이 없다는 방증이었다.
승아는 이현이 아직 자기를 잊지 못하고 귀국하기만을 기다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아는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쓰고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밴을 타고 여씨 본가에서 나왔다.
이현에게 서프라이즈를 해주면서 회사 사람들은 모르게 하고 싶었다.
이현은 사무실에 앉아 시간을 확인했다. 회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지유는 아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다 문 앞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의자에 앉은 이현은 등을 돌린 채 고개도 들지 않고 차갑게 물었다.
“지금 시간이 몇 시야?”
대답하는 사람이 없었다.
이를 이상하게 생각한 이현이 그제야 몸을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승아가 거기에 서 있었다.
“오빠.”
승아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사실은 설렘이 더 많았다. 밤낮을 그리던 얼굴이 눈앞에 나타나자 승아는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다.
이현은 살짝 멈칫하더니 얼른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어쩌다 네가 온 거야?”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
“오늘 본가에 아주머니 뵈러 갔었어요.”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허락했지?”
이 말에 승아는 표정이 굳었고 심장이 살짝 저렸다. 그 말은 마치 승아가 못 갈 데라도 갔다는 뜻 같았다.
승아는 애써 진정하며 시선을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귀국했으니 먼저 아주머니 뵈러 가는 건 당연한 거죠. 서류 전해주러 왔어요.”
승아는 이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조심스럽게 서류를 꺼냈다.
이현은 원래 지유의 손에 들려있어야 할 서류가 승아의 손에 들려있는 걸 확인했다.
제4화
“지유 언니 오늘 기분이 별로 안 좋다면서 오기 싫다고 해서 내가 올 수밖에 없었어요.”
승아는 얼른 손에 난 덴 자국을 일부러 보여주며 말했다.
“오빠도 지유 언니 너무 미워하지 마요.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예요. 일을 그르친 건 아니죠?”
지유가 회사의 서류를 다른 사람에게 넘긴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현은 안색이 너무 어두웠지만 승아 앞이라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넥타이를 살짝 풀며 덤덤하게 말했다.
“아니야.”
이현은 화제를 다른 데로 돌렸다.
“왔으니 앉아.”
이현의 말에 승아는 내심 기뻤다. 그녀를 받아준다는 건 그래도 미워하지는 않는다는 뜻이다.
“회의하러 간다면서요? 내가 방해하고 있는 거 아니에요?”
이현이 어디론가 전화를 걸더니 이렇게 말했다.
“회의 시간 뒤로 30분 미루세요.”
승아는 입꼬리가 올라갔다. 전에 인사도 없이 떠나서 혹시나 이현이 원망하면 어쩌지 했는데 생각했던 것처럼 그렇게 심각한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잃어버린 시간은 다시 메꾸면 된다.
소파에 앉은 승아는 기대에 찬 눈빛으로 해명하려 했다.
“오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요. 그때 내가 인사도 없이 떠난 거 잘못한 거 알아요. 근데 지금은 다시 돌아왔으니까...”
“먼저 일 처리 좀 할게.”
이현이 승아의 말을 잘라버렸다.
승아는 하려던 말을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 바빠 보이는 이현의 모습에 승아는 별수 없이 이렇게 말했다.
“오빠 일 끝나는 거 기다릴게.”
승아는 방해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남은 반 시간 중 얼마나 더 앉아 있어야 마주 보고 앉아 얘기를 나눌 수 있을까.
약간 이현의 속내를 맞히기 어려웠다.
진호가 안으로 들어와서야 이현은 하던 일을 멈췄다.
이현이 걸어오자 승아가 웃으며 말했다.
“오빠, 나...”
“손은 아직도 아파?”
그녀의 상처를 발견했다는 건 그녀를 걱정한다는 걸까?
승아가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이제 안 아파요.”
“응.”
이현이 가볍게 대답하더니 진호의 손에서 한약을 받아왔다.
“귀국해서 계속 속이 안 좋다며, 목도 불편하고. 이 약 마셔. 성대에 좋은 약이야.”
승아는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약을 보며 기분이 다시 좋아졌다.
이현이 승아의 소식을 주목하고 있었으니 성대가 불편한 것도 알았겠지, 이현이 승아를 아직 신경 쓰고 있다는 뜻이었다.
승아는 얼른 약을 받으며 환하게 웃었다.
“오빠가 이렇게 걱정해 주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해요. 얼른 다 마실게요.”
코에 가까이 대지도 않았는데 맡기 힘든 냄새가 풍겨왔다.
한약을 싫어하는 승아였지만 이현이 준 것이었기에 승아는 꾹 참고 마셨다.
너무 써서 미간이 찌푸려졌고 목구멍이 메어왔지만 군말 없이 한 번에 끝냈다.
승아가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해치워서야 이현이 시선을 다른 데로 돌렸다.
“대표님, 회의 곧 시작합니다.”
진호가 옆에서 귀띔했다.
이현이 승아에게 말했다.
“나 이제 일하러 가야 해. 들어가 봐.”
승아가 입가를 닦으며 어쩔 수 없이 얌전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다음에 찾으러 올게요.”
이현이 바깥으로 나갔다.
승아는 그런 이현의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미련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기분이 좋아서 매니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내가 이겼어. 오빠는 아직 날 사랑해.]
사무실 밖.
회의실로 걸어가던 진호가 이현에게 물었다.
“대표님, 왜 탕약에 피임약을 넣으신 거예요?”
아무 표정이 없는 이현은 차가워 보이기까지 했다.
“승아 호텔에 갔었다면서요.”
진호는 그제야 알았다. 아마도 어젯밤 그와 잠자리에 든 여자가 승아라면 혹시나 임신할까 봐 두려워서 그러는 것 같았다.
피임약을 먹어야 안전하다.
하루 종일 지유는 회사로 나오지 않았고 전화로 휴가를 내지도 않았다.
평소 이현의 곁을 지키며 실수를 한 적도 자리를 비운 적도 없는 지유였다.
요새 지유는 점점 제멋대로 나갔다. 회사를 나오지 않으면서 연락 한 통이 없었다.
이현은 속에 화가 치밀어올라 하루 종일 얼굴을 굳히고 웃은 적이 없었다. 이에 직원들은 혹시 업무 실수라도 할까 봐 전전긍긍했다.
퇴근하고 이현은 바로 본가로 향했다.
그 시각 지유는 이미 풀려난 뒤였다.
방에 돌아와 누운 지유는 아직도 두손이 바들바들 떨렸고 빨갛게 부어오른 눈으로 무척 불안해했다.
손에 난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않아 어느새 수포가 올라와 있었다.
하지만 마음의 상처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이현이 현관으로 들어오자 도우미가 다가와 신발을 갈아주었다.
그는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지윤는?”
“위층에 계십니다.”
도우미가 말했다.
“사모님은 밖에서 들어오신 후 한 번도 내려온 적이 없습니다.”
대답을 들은 이현은 바로 위층으로 향했다.
방문을 열어보니 침대가 봉곳하게 올라와 있었다. 지유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누워 있었다.
지유의 이상행동에 이현은 의아한 표정으로 침대로 걸어가더니 이불을 살짝 건드렸다.
“건드리지 마요!”
지유가 이현의 손을 탁 쳐냈다.
사실 지유는 문 쪽에서 나는 기척을 이미 들었다. 다시 그녀를 깜깜한 방에 가두려는 줄 알고 지유는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이불을 푹 뒤집어쓴 지유는 깊이를 알 수 없는 두려움에 빠져들었다.
그러다 누군가 그녀의 이불을 건드리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그 손을 뿌리친 것이다.
이현은 이상할 정도로 큰 지유의 반응에 얼굴이 굳더니 차갑게 말했다.
“온지유, 호들갑 떨 필요 없어. 나도 너 건드리고 싶어서 이러는 줄 알아?”
이현의 목소리에 불안했던 지유의 마음이 천천히 차분해졌다.
하지만 그 말에 구멍 난 가슴이 아파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지유는 감정을 추스르며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이 온 줄은 몰랐어요.”
“이 집에 나 말고 너를 건드릴 사람이 어디 있어?”
이현이 이렇게 비아냥거렸다.
“너의 마음이 다른 데로 샜다면 몰라도.”
지유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머릿속엔 여진숙의 매정한 말들로 가득 찼다.
어쩌면 승아가 이현과 더 잘 어울릴 수도 있다.
때마침 승아도 귀국했으니 두 사람은 못 이룬 사랑을 이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지유는 필요 없는 존재가 되겠지.
“오늘은 몸이 안 좋아서요.”
지유는 자신의 입지를 잘 알고 있었다.
“승아 씨가 서류 가져다줬죠? 너무 늦지 않았길 바라요.”
오늘따라 제멋대로 행동한 지유에 이현은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온지유 비서, 사리가 이렇게 밝은 사람이 왜 이런 사달을 자꾸만 만들어내는 거지?”
사달이라면 그의 어머니를 노엽게 한 것, 그가 사랑하는 여자를 다치게 한 것일 테지.
지유는 다친 손을 이불 속에 감췄다. 마음이 점점 차갑게 식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다음엔 유의할게요.”
이혼하면 자연스럽게 이런 일도 없어질 것이다.
지유는 그들 중 그 누구도 방해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젯밤 그 여자 누구였는지 조사해 봤어?”
지유가 멈칫하더니 대꾸했다.
“시시티브이가 고장 나서 아직이에요.”
이현은 미간을 찌푸리고 지유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오늘 하루 종일 도대체 뭐한 거야?”
지유는 그제야 창밖을 내다봤다. 창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 있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 나가지 않았으니 이현은 분명 그녀가 업무 태만에 게으름을 피운다고 생각할 것이다.
“지금 바로 조사해 볼게요.”
지유는 더 입씨름할 생각이 없었다. 여씨 가문에 빚진 돈까지 갚으면 둘 사이는 완전히 끝나게 된다.
그러면 7년 동안 지속된 짝사랑도 결말을 맺을 수 있겠지.
지유는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걸치더니 그를 지나쳐 밖으로 나가려 했다.
이 집에서 지유가 유일하게 미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이현이었다.
하지만 지유는 이제 지쳤다. 더는 이런 수모를 겪고 싶지 않았다.
이현은 그런 지유를 바라보다 그녀도 손을 다쳤음을 알게 되었다.
그 상처는 승아보다 훨씬 심각했다.
지유가 방에서 나가려는 찰나 이현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잠깐만.”
제5화
지유는 걸음을 멈췄다. 이현과는 부부 관계에서 오는 조화로움보다는 위계질서에서 오는 거리감이 더 컸다.
“대표님, 지시 사항 있으신가요?”
이현이 고개를 돌리더니 거리감이 느껴지는 지유의 얼굴을 보며 명령조로 말했다.
“앉아.”
지유는 이현이 무엇을 하려는지 몰랐다.
이현이 지유 쪽으로 걸어갔다.
지유는 자신과 가까워지는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순간 이현이 어딘가 달라 보였고 이에 지유는 숨이 가빠졌다.
긴장하기도 하면서 어딘가 이상했다.
그녀가 딱히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이현이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이현의 따듯한 손이 지유의 몸에 닿자 그녀는 마치 데이기라도 한 것처럼 얼른 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이현이 너무 꽉 잡고 있어 빼려고 해도 뺄 수가 없었다. 이현은 지유를 확 끌어당기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손 다쳤잖아, 몰랐어?”
이현의 관심이 지유는 퍽 의외였다.
“난... 괜찮아요.”
“수포까지 났어.”
이현이 물었다.
“왜 나한테 얘기하지 않은 거야?”
이현이 큰 손으로 그녀의 상처를 살폈다. 지유는 그런 이현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3년이라는 시간 동안 지유는 이현의 손을 잡고 그가 따듯함으로 그녀를 이끌어주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럴 기회가 없었다.
지유가 포기하려 할 때마다 이현은 다시 희망을 주었다.
“큰일 아니에요. 며칠이면 나아요.”
지유가 대답했다.
“연고 좀 가져오라고 할게.”
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지는 걸 느꼈다. 몇 년의 기다림 끝에 이제 좀 보상받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유는 이성적이었다. 이현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
이현은 연고를 가져와 그녀의 상처에 발라줬다. 지유는 그녀의 앞에 쪼그리고 앉은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이는 이현에 혹시 자신도 그가 아끼고 사랑하는 여자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상처가 나니 그래도 눈길을 주는 이현이었다.
7년이나 옆을 지키면서 극진하게 챙겨주기보다 차라리 조그마한 상처를 내는 게 그의 이목을 끄는 데에는 더 낫겠다는 우스운 생각까지 들었다.
다친 게 아깝지 않았다.
하염없이 흐르던 지유의 눈물이 마침 이현의 손등에 떨어졌다.
이현은 고개를 들어 촉촉해진 지유의 눈동자를 바라봤다. 그녀가 있는 감정을 그대로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왜 그래? 내가 아프게 했어?”
지유는 이런 모습이 자신답지 못하다는 생각에 이렇게 말했다.
“아니요. 그냥 눈이 좀 불편해서요. 앞으로 이런 일 없게 할게요.”
이현은 수도 없이 들은 인사치레에 싫증이 났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회사도 아니고 집이야. 내 앞에서 그렇게 맨날 경직되어 있을 필요 없어. 집에선 이름 불러도 돼.”
하지만 7년간 지유는 늘 이렇게 살아왔다.
회사에서는 일 잘하는 비서, 집에서는 사모님이라는 명분으로 비서가 해야 할 일들만 했다.
지유는 몇 년간 짝사랑했던 그 얼굴을 바라봤다. 호응이 없는 사랑은 사람을 지치게 한다. 지유가 잠깐 망설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이현 씨, 우리 언제 이혼...”
이현이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에 지유는 온몸이 딱딱하게 굳었고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오늘은 피곤하니까 내일 다시 얘기하자.”
지유는 하려던 말을 도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침대에 누운 지유는 이현이 어딘가 달라졌음을 느꼈다. 지유와 꼭 붙어 누운 이현의 뜨거운 체온이 느껴졌다.
이현은 지유의 허리를 감쌌다. 약간은 시원한 세달향에 지유는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살살 만졌다. 이에 지유가 몸을 움츠리자 이현이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간지러움 많이 타?”
지유가 시선을 아래로 늘어트린 채 이렇게 답했다.
“나는 습관이 없어요.”
이에 이현이 더 적극적으로 두 팔을 벌려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그럼 천천히 적응해. 언젠간 습관 하겠지.”
지유는 그의 품에 기댔다. 귓가로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에 얼굴이 그녀는 후끈 달아올랐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 이렇게 생각했다.
혹시 다른 엔딩을 맞이할 수도 있지 않을까?
지유는 신분을 바꿀 수 있기를 갈망했다.
“이현 씨, 혹시 나...”
그때 이현의 핸드폰이 울렸고 그의 시선이 핸드폰으로 쏠렸다.
지유는 결국 말을 잇지 못했다.
아내의 신분으로...
그럴 수만 있다만 더는 비서의 신분으로 이현의 곁에 남을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환상도 단 1초, 지유는 이현의 핸드폰 화면에 뜬 글자를 보게 되었다.
[노승아]
이에 잠깐 품었던 환상이 와르르 무너졌다.
이현은 다시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가 그녀를 놓아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마무리 짓지 못한 말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여보세요.”
이현은 어두운 표정으로 침대에서 일어나 그녀가 보는 앞에서 승아의 전화를 받으러 나갔다.
지유는 마음이 다시 철렁 내려앉았다. 그러고는 허황한 꿈을 품었던 자신을 비웃었다.
‘온지유, 어쩌다 그런 환상을 한 거야. 그의 마음은 온통 승아에게 가 있으니 너에게 감정 따윈 있을 수 없다는 걸 이미 3년 전 결혼식 날 들었잖아.’
지유는 고개를 들었다. 씁쓸한 마음에 눈동자에 눈물이 자꾸만 차올랐다.
지유는 두눈을 질끈 감았다. 더는 이현 때문에 눈물을 흘리고 싶지 않았다.
사실 이현은 모르고 있다. 그의 마음속에 다른 사람을 품고 있다는 걸 안 그날부터 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몰래 울고 있었다는 걸 말이다.
지유는 자신의 신분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냥 보잘것없는 비서일 뿐이었다.
전화를 마치고 돌아온 이현은 아직 잠에 들지 않은 지유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
“회사에 일이 생겨서 잠깐 나갔다 와야 할 거 같아. 일찍 쉬어.”
지유는 자신의 나약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아 그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알았어요. 가봐요. 내일 제때 출근할게요.”
“응.”
이현은 이렇게 말하더니 외투를 들고 나갔다.
엔진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걸 듣고 있노라니 지유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았다.
밤새 지유는 별로 자지 못했다.
이튿날, 출근도 해야 하는데 말이다.
지유는 출근을 일찍 하는 편이라 회사엔 사람이 별로 없었다. 그녀는 도착하자마자 비서라는 직책에 맞게 이현이 봐야 할 업무를 조리있게 정리했다.
하지만 이현은 오늘 회사로 나오지 않았다.
지유가 전화를 여러통 걸어봐도 핸도폰은 꺼져 있었다.
윤정이 다급하게 물었다.
“온 비서님, 대표님이 안 계시니 공사장 순찰은 혼자 진행하셔야겠어요.”
지유는 이현의 비서로서 회사의 대부분 업무에 참여하고 있었기에 그 프로젝트도 익숙히 잘 알고 있었다.
마지막 한통의 전화를 끝으로 지유는 이현을 찾는 걸 포기했다.
문득 어젯밤 승아의 전화를 받고 나갔다는게 생각났다.
회사도 나오지 않고 밤새 귀가도 하지 않았으니 아마 그녀를 만나러 간게 아닐까 싶었다.
지유는 애써 씁쓸한 마음을 쓸어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그럼 일단 대표님 없이 먼저 가요.”
밖은 햇빛이 쨍쨍했고 온도가 높았지만 지유는 아랑곳하지 않고 공사 현장으로 나왔다.
현재 시공하고 있는 건물은 틀만 잡았을뿐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아 겉보기에 조잡해 보였다.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는 먼지와 철근이 가득했고 기계에서는 굉음이 들려왔다.
몇번이나 와본 지유는 이곳이 꽤 익숙했기에 빠른 속도로 순찰을 마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크게 소리를 질렀다.
“조심해요!”
지유가 고개를 들어보니 커다란 유리 한장이 그녀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제6화
지유는 눈앞이 까매지며 어지러웠다. 그때 누군가 다그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런 실수를 하면 어떡해요? 온 비서님, 온 비서님...”
그 목소리가 점점 가물가물해졌고 지유는 그대로 쓰러졌다.
다시 깨어나 보니 병원이었다. 하얀 천정을 보고 있노라니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고 깨질 듯이 아팠다.
“온 비서님, 깨셨어요?”
윤정이 눈시울을 붉히며 의자에서 일어나 다급하게 그녀의 상황을 확인했다.
“어디 불편한 데 없어요? 의사 부를까요?”
지유는 아직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윤정을 보며 몸을 일으켰다.
“저는 괜찮아요. 공사장은 어떻게 됐어요? 다른 부상자는 없어요?”
윤정이 말했다.
“일단 공사장 일은 상관하지 마세요. 떨어진 유리에 뇌진탕이 왔대요. 어찌나 놀랐는지. 저는 온 비서님 못 깨어나는 줄 알았어요.”
윤정은 다시 눈물을 훔치기 시작했다.
윤정은 지유를 따라다니며 일을 돕는 비서와도 같은 존재였기에 평소에 지유는 윤정을 많이 아꼈다.
아직 젊은 윤정은 이런 상황을 맞닥트려본 적이 없어 많이 놀란 것 같았다.
“저 이제 깼잖아요. 걱정하지 마요.”
지유가 그런 윤정을 다독였다.
머리를 만져보니 머리엔 붕대가 감겨 있었고 아직 통증이 느껴졌다. 지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렇게 물었다.
“공사장은 괜찮아요?”
갑자기 일어난 사고로 시공에 영향줄까 봐 무서운 지유였다.
“괜찮아요. 온 비서님, 이렇게 심하게 다쳤는데 그깟 공사장이 무슨 대수에요? 평소에도 힘들게 일하시면서 저까지 신경 써 주시는데 이참에 얼른 누워서 쉬세요.”
윤정은 너무 죄책감이 들었다. 자신이 재촉하지만 않았더라면 지유가 이런 사고를 당할 일도 없다고 생각했기에 업무와 관련된 일은 아무것도 보고하고 싶지 않았다.
지유는 이미 습관된 것 같았다.
몇 년간 업무를 수행하는 기계처럼 다른 사람을 먼저 생각하고 이현의 기분을 생각해 업무 전반을 다 챙겼다.
그러니 자기도 모르게 업무부터 걱정했다.
게다가 여씨 집안에 빚진 20억도 있으니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밖에서 누군가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치 팬이 좋아하는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말이다.
“세상에, 그 가수도 이 병원에 있다고?”
“그래, 오다가 봤다니까. 톱스타 노승아를 이렇게 가까이서 본 건 처음이야.”
“다쳤대? 심각하대?”
걱정어린 둘의 대화가 들려왔다.
“비켜주세요, 다들 비켜주세요.”
누군가 알아보고 사진이라도 찍을까 봐 보디가드 몇 명이 앞에서 길을 트며 관계자가 아닌 이들을 완벽히 차단했다. 시끄러운 소리가 그렇게 지유의 귓가에서 멀어졌다.
하지만 지유의 신경은 그쪽으로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현이 커다란 몸집으로 옆에 있는 승아를 지키는 게 보였기 때문이다.
작고 가녀린 승아는 이현의 옆에 선 채 머리를 살짝 숙이고 있었다. 눈시울이 조금 빨갰고 안색도 약간 창백한 게 어딘가 허약해 보였다. 갑자기 나타난 승아에 병원이 술렁였지만 보디가드가 길을 터주니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고요해졌다.
두 사람은 바로 지유의 병실 옆으로 향했다.
옆은 응급실이었다.
“대표님 아니에요?”
이현을 본 윤정은 그 누구보다 경악을 금치 못했다.
오전 내내 이현을 찾아다녔지만 그림자도 볼 수 없었는데 이렇게 병원에서 마주쳤고 옆엔 연예인 노승아도 같이 있었다.
이에 윤정은 가십 본능이 되살아났다.
“대표님 평소에 중요한 일 있을 때는 절대 자리를 비운 적이 없었는데 노승아 씨와 같이 있느라 전화도 안 받네요. 혹시 사귀는 건가? 왠지 대표님을 만나러 올 때마다 예약을 하지 않아도 프리패스다 했더니 대표님이 주신 특권이었군요. 온 비서님, 설마 기사에서 말한 노승아 씨를 묵묵히 응원해 주고 있다는 그 약혼자가 대표님은 아니겠죠?”
주먹을 불끈 움켜쥔 지유의 손마디가 하얘졌다. 마음이 갈기갈기 찢기는 것 같았다.
이런 정서를 윤정에게 들킬까 봐 지유는 애써 덤덤한 말투로 말했다.
“먼저 나가줄래요? 쉬고 싶어요.”
“앗, 그럼 온 비서님 잘 쉬세요.’
윤정은 더는 함부로 추측할 엄두를 못 내고 병실에서 나갔다.
지유는 침대에 누워 그녀가 입원했을 때 이현이 병문안을 온 적이 있는지 떠올려봤다.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승아가 별것도 아닌 일로 병원에 오는데 이현은 이 정도로 걱정했다.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신경 쓰지 않고 바로 그녀를 병원으로 데리고 온 것도 모자라 그렇게 많은 보디가드를 불러 길을 터주고 있었다. 승아를 얼마나 중히 여기는지 알 수 있는 행보였다.
지유는 이에 비하면 참 비참했다.
핸드폰을 보며 한참을 망설이다가 익숙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화가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이현의 목소리는 마치 바로 귓가에서 들리는 것 같았다.
지유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할 말 있으면 해. 지금 좀 바빠.”
이현의 언짢은 듯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지유는 창문으로 이현의 미간이 구겨지는 걸 바라봤다. 마치 그녀가 건 전화가 매우 중요한 일을 그르치는 것처럼 말이다.
하긴 다친 사람은 그가 제일 아끼는 승아였다.
갑자기 이 전화를 건 게 후회되는 지유였지만 그래도 끝내는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했다
“나 몸이 아파요.”
이현은 마이크 족을 부여잡고 차가운 눈빛으로 의사를 노려보고 있었다. 아마도 약을 바를 때 너무 힘을 준 의사를 뭐라 하는 것 같았다.
그러더니 다시 몸을 돌려 이렇게 말했다.
“아까 뭐라고?”
지유는 입을 벌렸다. 많은 말을 하고 싶었다. 왜 다른 사람을 사랑하면서 그녀와 결혼했는지 말이다.
그녀와 결혼했으면서 왜 아직도 다른 여자와 그러고 있는지도 알고 싶었다.
하지만 차분하게 생각해 보니 물어본다 해도 듣고 싶은 답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지유야, 나 지금 바빠. 중요한 일 아니면 귀찮게 하지 마.”
뚝.
이현은 이 말을 뒤로 전화를 끊고는 승아를 관심했다.
지유는 눈시울이 붉어졌다. 심장이 저리는 듯한 고통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 같았다.
분노, 슬픔, 억울함...
무수한 감정이 그녀의 마음속을 가득 메꿨고 이에 지유는 핸드폰을 꽉 움켜쥐었다.
이제 끊어내야 할 때다.
이현에게도 자유를 찾아줄 때가 된 것 같았다.
제7화
지유는 병실에 조금 더 누워 있다가 슬픔을 안은 채 병원을 나섰다.
“지유야!”
지희는 창백한 지유의 얼굴과 머리에 난 상처를 보며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헐, 어쩌다 이렇게 된 거야.”
지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출근 중이었을 텐데 이거 산재 아니야?”
지희가 물었다.
“여이현은?”
“몰라.”
지희는 어딘가 이상한 지유의 표정에 그녀가 머리만 다친 게 아니라는 걸 눈치채고 코웃음을 쳤다.
“그 사람을 위해 이렇게 열심히 일하면서 다치기까지 했는데 남편이라는 사람이 코빼기도 안 보이는 게 말이 돼? 죽은 거나 다름없는 남편이네.”
“곧 남편도 아니야.”
“뭐? 이혼하재?”
지희의 표정이 삭 변했다.
“내가 이혼하고 싶은 거야.”
이에 지희의 태도가 또 한 번 변했다.
“그래, 지금 당장 해!”
지희가 경고했다.
“재산 절반 나눠 가지는 거 잊지 말고. 총명한 여자라면 사람을 가질 수 없으면 돈이라도 가져야지. 돈이 있는데 좋은 남자를 못 찾겠어? 위자료 받으면 찾을 수 있는 만큼 찾는 거야. 착한 놈, 잘 챙겨주는 놈 찾아서 맨날 대접받고 사는 거지.”
사실 처음부터 계약뿐인 결혼이라 이혼한다 해도 아무것도 차례지는 게 없었다.
“지유야.”
지희가 갑자기 지유의 이름을 부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근데 왜 갑자기 이혼을 결정한 거야? 오랫동안 좋아했잖아. 여이현이 바람을 피우지 않는 이상 쉽게 포기하지 않았을 텐데.”
지유는 안색이 좋지 않았다. 그러더니 이내 씁쓸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기사 못 봤어? 노승아 씨 귀국했잖아.”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붙어먹은 거야?”
지유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이현을 계속 헐뜯었다.
“혼내 외도라, 그럼 죄가 더 무거워지는 거지. 위자료 더 받을 수 있겠다. 지유야, 진짜 경고하는데 마음 약해지면 안 된다. 아무것도 따지지 마. 결혼이 유효한 이상 여이현의 재산 중 절반은 네 거야. 그래 뭐 절반은 아니더라도 3분의 1 정도는 있겠지. 게다가 외도라니, 못 들어주겠다고 하면 모든 사람이 알게 판을 키워. 사람들 눈을 신경 쓰지 않을 만큼 파렴치하지는 않겠지.”
“나 이미 결정했어.”
지유의 반응은 매우 차분했다.
그녀는 종래로 결정하지 않은 일을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도 말을 꺼냈다는 건 그녀도 정말 지쳤다는 것이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결혼을 계속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오늘 너희 집으로 갈게. 그 사람 마주치고 싶지 않아.”
이현이 승아와 밤새 같이 있었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지금 다시 마주치면 무조건 부자연스러울 것이고 그러다 또 싸우게 될 것이다.
이혼하기 전 불필요한 신경전을 벌이기 싫었다.
그리고 그녀의 자리라고는 없는 그 집에 돌아갈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래, 우리 집으로 가자. 가서 삼계탕 푹 고아줄게. 진짜 여씨 집안은 생지옥이 따로 없는 것 같아. 우리 지유가 고새 이렇게 야위었다니 정말 그 사람들은 인간도 아니야.”
지희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지유를 부축해 걸었다. 정말 조상님까지 하나하나 꺼내 읊어줄 심산인 것 같았다.
이현이 돌아왔을 땐 이미 이튿날 아침이었다.
침실로 돌아와 보니 아무도 없었고 이불도 잘 개어져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때 지유는 잠을 자고 있어야 맞았다.
이현이 물었다.
“지유 어디 갔어요?”
도우미가 멈칫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사모님 어제 안 들어오셨습니다.”
이현은 분명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제 전화할 때까지만 해도 아무 일 없던 지유가 왜 갑자기 집에 돌아오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모든 정신을 지유에게 팔기 싫었던 이현은 더는 묻지 않았다. 그는 샤워를 하고는 출근하러 갔다.
회사에 도착해서야 이현은 어제 공사장에서 사고가 났다는 걸 알았다.
그가 없으니 책임은 지유에게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기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듯 실종이라,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서유는 확실히 요 며칠 업무 상태가 약간 붕 떠 있긴 했다.
이현이 얼른 지유에게 전화를 걸었다.
샤워하고 나온 지유가 핸드폰이 울리자 그쪽으로 달려갔다. 화면에 뜬 이현의 이름에 지유는 생각이 많아졌다.
“무슨 일이에요?”
“너 어젯밤 어디 갔었어”
이현의 목소리가 어딘가 차가웠다.
“친구 집에 있었어요.”
이현이 엄숙하게 물었다.
“공사장에서 그렇게 큰일이 벌어졌는데 왜 내게 알리지 않는 거야?”
제8화
이현은 일에 대해서는 매우 철저했기에 실수는 용납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유를 탓해서는 안 된다. 이현은 어제 병원에서 승아를 지켰다.
“대표님이 먼저 바쁘다고 전화를 끊었잖아요.”
이현이 멈칫하더니 입을 앙다물었다.
“어떻게 처리한 거죠?”
그때 지유는 이미 병원에 있었다.
“처리할 겨를이 없었어요. 내가...”
“온지유 비서.”
이현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전에는 절대 이런 실수가 없었던 거 같은데요.”
이현은 일부러 온지유 비서라는 말에 힘을 주며 그녀의 신분은 비서이지 아내가 아니라고 각인시켰다.
지유는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깨물었다.
“시공은 영향받지 않았으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심각하게 대처할 필요 없을 것 같아요.”
“문제가 생기면 핑계를 찾기보다 해결해야죠. 전에 제가 한번 귀띔해 줬을 텐데.”
이현의 말투에서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금 당장 회사로 오세요.”
이 말을 뒤로 이현은 매정하게 전화를 끊었다.
지유는 마음이 씁쓸했다. 하지만 오래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어제 병원으로 실려 가면서 공사장의 상황을 신경 쓰지 못 했으니 상황이 어떤지는 알 수 없었다.
지유는 얼른 정리하고 회사 갈 준비했다.
그제야 잠에서 깬 지희는 지유가 분주하게 돌아치자 하품하며 물었다.
“왜 이렇게 일찍 깼어? 어디 가려고?”
“일이 좀 생겨서 회사에 가봐야 해.”
“지금 이 상황에 왜 아직도 그 사람 신경 쓰는 거야?”
지희가 노발대발하다가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말했다.
“하긴, 이혼 서류 이미 여진그룹에 보냈어.”
지유는 신발을 갈아신으며 대꾸했다.
“이미 보냈어?”
“응, 퀵으로 아침 일찍 보냈어. 아마 여이현도 봤을걸?”
지희의 속도는 생각보다 빨랐다.
지유가 이혼한다고 하자 속전속결로 바로 진행했다.
언젠가는 이혼할 텐데 빨리하든 늦게 하든 사실 달라질 게 없었다.
“그래, 어차피 할 이혼인데.”
지희가 미묘한 표정으로 지유의 팔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앞으로 네 덕 좀 봐서 잘사는 여자 좀 해보자. 지유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어떻게든 많이 뜯어내?”
지희는 어쩌면 이혼 당사자인 지유보다 더 흥분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는 지체할 엄두가 나지 않아 대충 대꾸했다.
“알았어.”
대표이사 사무실.
이현이 열심히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진호가 안으로 들어오더니 잘 밀봉된 서류봉투를 건네주었다.
“대표님, 퀵으로 온 긴급 서류입니다.”
“응.”
진호는 서류를 이현 앞에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이현이 그 서류를 힐끔 쳐다보더니 여유롭게 봉투를 뜯었다. 지유가 작성한 ‘이혼신고서’였다.
이현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이혼신고서를 꺼내 살펴봤다.
이혼신고서를 꼼꼼히 살펴본 이현은 얼굴이 어두워졌고 입가엔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생각도 좋아.”
그가 가진 재산의 60퍼센트를 주면 깔끔하게 이혼하고 그게 아니면 이현의 추문을 모두 터트릴 거라는 내용이었다.
이현의 얼굴은 그때부터 쭉 굳어 있었다.
회사 임원들은 살이 떨리는 상황에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다.
그들도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몰랐다. 이현은 아침부터 화약을 먹은 것처럼 화가 잔뜩 나 있었고 그 누구도 함부로 다가가지 못했다.
이현이 서류를 뒤적거리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사고가 났는데 왜 나한테 알리지 않은 거죠? 누가 다쳤나요? 환자를 만나서 잘 타이르긴 했나요?”
윤정이 전전긍긍해서 고개를 숙이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 대표님. 그날 상황이 너무 급한데 대표님은 전화를 안 받으셔서 저랑 온 비서님이...”
이현이 미간을 찌푸리고 윤정의 말을 잘랐다.
“온 비서님의 업무에 차질이 있었네요.”
죄책감에 휩싸인 윤정은 하마터면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온 비서님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에요. 사고가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제가 온 비서님을 잘 챙기지 못한 것도 있어요. 떨어진 유리가 마침 온 비서님의 머리를 명중했고 그렇게 온 비서님은 바로 병원에 실려 갔어요. 온 비서님이 다친 것도 시공이 하루 밀린 것도 다 제 잘못이에요.”
이를 들은 이현이 멈칫했다.
“방금 뭐라고요? 다친 사람이 온 비서라고요?”
윤정이 멍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불안한 말투로 물었다.
“대표님, 모르셨어요? 온 비서님 유리에 맞아 뇌진탕까지 왔는데도 깨어나자마자 바로 업무부터 챙기셨어요. 몸 상태는 일도 신경 쓰지 않으시고요. 아마 어제 대표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셔서 말씀드리지 않았나 보네요. 저는 온 비서님이 이미 보고드린 줄 알았어요.”
제9화
마침 이때 지유도 사무실에 도착했다. 사무실의 분위기는 전체적으로 무거웠다.
“온 비서님.”
지유가 나타나자 직원들이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온 비서님, 머리를 다쳤다고 들었는데 괜찮으신 거죠?”
지유는 그들이 너무 걱정하는 게 싫어 이렇게 말했다.
“큰일 아니에요. 어제 휴식했더니 많이 나아졌어요.”
“그래도 더 휴식해야 하는데. 대표님께 휴가 내면 되지 아픈 몸을 이끌고 회사에 나오시다니, 정말 업무에 너무 진심인 거 아니에요?”
그들은 그런 지유를 늘 존경했다. 생활보다 업무가 우선인 이런 비서를 어디서 또 찾겠는가.
지유는 이현과 몰래 결혼한 상태였기에 회사 사람들은 그들이 무슨 사이인지 잘 몰랐다. 하여 지유도 뭐라 더 말하기 그랬다.
“먼저 대표님 찾으러 올라가 볼게요. 저는 걱정하지 마시고 일 보세요.”
문 앞까지 온 지유는 안에서 이현이 차갑게 지시하는 소리를 들었다.
“공사장에서 안전사고 낸 사람들 전부 나가라고 하세요.”
지유가 멈칫했다. 사실 지유는 이현이 자신을 탓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더니 사무실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빠져나왔다.
하나같이 머리를 푹 숙이고 죽상을 하고 있었다. 지유는 별다른 표정 없이 평소처럼 안으로 들어갔다.
이현이 지유에게로 시선을 돌리더니 이마에 난 상처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안색이 별로 좋지 않는 걸로 봐서는 조금 심하게 다친 것 같았다.
“대표님.”
지유가 그를 불렀다.
이현은 시선을 거뒀다. 공사장 얘기는 일절 하지 않고 서류봉투를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이건 뭐야?”
그 서류가 아마도 지희가 작성한 이혼신고서겠거니 생각한 지유가 덤덤하게 말했다.
“대표님이라면 그 서류가 이혼신고서라는 걸 알아채셨겠죠. 오늘 회사에 나온 건 업무 뿐만 아니라 이혼에 관해 토론하고 싶어서입니다.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온지유!”
이현은 언성이 높아졌고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난 네가 아이를 갖고 싶어 하는 줄 몰랐네?”
지유가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
이현이 서류를 던져주며 말했다.
“네가 직접 확인해.”
서류를 확인하고 나서야 서유는 이혼 사유에 이렇게 적혀 있는 걸 확인했다.
[여자 측은 아이를 좋아하나 남자 측은 생육 능력이 없어 감정이 깨짐.]
순간 지유는 얼굴이 화끈해졌다. 지희는 이혼신고서에 몰래 지유에게 유리한 조항 몇 가지를 더 집어넣은 것이다.
아까 왜 지희가 그렇게 신났는지 알 것 같았다. 이 이혼신고서대로만 간다면 정말 단번에 돈방석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현실성이 너무 떨어졌다.
지유는 고개를 들어 이현을 바라봤다. 아마도 지유가 단순하지 못하니 이렇게 무리한 요구를 한다고 생각해 화난 것 같았다.
“대표님, 이 서류는 제가 잘못 보낸 거예요.”
지유가 서류를 닫더니 말을 이어갔다.
“많이 급하시면 제가 한시라도 빨리 다시 가져다드릴게요.”
“내가 생육 능력이 없다고?”
이현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 어두운 표정으로 이 말을 검증해 보여주겠다는 기세로 지유를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두 걸음 물러섰다.
“대표님, 이거 저는 잘 몰라도 승아 씨는 잘 알 거예요,”
하지만 이현이 이내 지유의 손을 잡더니 그녀를 품 안에 꼭 끌어안았다.
지유는 반항할 힘이 없어 그렇게 안긴 채 그의 힘에 이끌려 테이블로 향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테이블을 짚었지만 척추뼈를 부딪쳐 조금 아팠다.
“아이가 그렇게 갖고 싶었으면서 왜 말을 안 했어?”
이현이 물었다.
지유가 입을 뻐끔거리며 뭐라 말하기도 전에 이현이 코웃음 쳤다.
“아니면 아이를 빌미로 나를 꽁꽁 묶어두려는 건가? 이혼은 내 마음을 약하게 할 수단이고 목적은 나와 아이를 가지는 거다?”
이현의 말에 지유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졌다. 지유는 이현의 손을 뿌리치더니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 너무하시는 거 아니에요?”
하지만 이현은 점점 더 차가워졌고 점점 더 거리감이 느껴졌다.
“지유야, 결혼하고 지금까지 잘 챙겨줬잖아. 그런 허황한 꿈은 버리라니까.”
이현은 그런 지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와 결혼하면 호의호식하고 ‘사모님’이라는 타이틀까지 달 수 있는데 이 얼마나 행운스럽고 자랑스러운 일인가.
하지만 그녀는 행복한 줄을 모르고 있다.
지유는 마음이 차분해졌다. 그와 더는 입씨름하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잊지 마요. 3년의 계약은 대표님이 정한 거예요. 저는 그냥 앞당기고 싶을 뿐이에요.”
“내가 정한 거니까 내 마음이야. 내 허락 없이 이혼은 안 돼.”
지유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루라도 빨리 이혼하면 그도 승아와 빨리 이어지고 좋은 거 아닌가?
제10화
이건 지유가 이현의 소원을 성취해 주는 것이니 이현도 기뻐해야 마땅했다.
아니면 이혼하자는 말을 그녀가 먼저 꺼내서 체면이 깎인다고 생각한 걸까?
이현은 시선을 돌리더니 차갑게 말했다.
“시간 됐어요. 그만 일하러 가보세요.”
시간을 확인해 보니 9시였다. 근무 시간이 시작되었다.
지유는 자기도 모르게 코웃음이 나갔다. 혹시나 지유가 1초라도 낭비할까 봐 이렇게 친절히 알람을 해주고 있다.
이현의 뒷모습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그들 사이에 남은 건 상사와 부하의 거리감뿐이었다.
지유도 더는 질척이지 않고 사무실에서 나왔다.
밖에서 기다리던 진호가 이렇게 말했다.
“온 비서님, 대표님이 처리하라고 주신 서류입니다.”
산처럼 쌓인 서류가 그녀의 손에 올려졌다.
먼지를 먹은 지유가 기침하며 말했다.
“먼지가 쌓일 정도면 얼마나 오래된 서류예요?”
진호도 말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대표님이 주신 거라.”
직원들이 동정의 눈빛으로 지유를 바라봤다.
이현에게 밉보였으니 이렇게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을 시킨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지유가 이현의 눈 밖에 난 게 아닐까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다.
지유는 이현이 무슨 심술을 부리는지 몰랐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하지 않은 업무를 주는 걸 봐서는 확실히 이상했다.
한참 후.
“온 비서님, 중요한 서류들이니까 50부 프린트해요. 대표님께서 쓰실 자료니까 잘 준비해야 할 거예요.”
지유와 같이 이현의 비서로 있는 예림이 꾸깃꾸깃한 A4용지를 그녀에게 내밀며 하찮다는 표정으로 비아냥거렸다. 지유가 눈 밖에 났으니 바로 자기 차례가 올 거라고 생각해 벌써 으름장을 놓은 것이다.
서류를 처리하던 지유는 예림이 건넨 서류 한 다발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 서류는 프린트만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정리도 해야 하니 야근하지 않고서는 절대 완성할 수가 없었다.
지유가 고개를 들어 예림을 바라보자 예림이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온 비서님 업무 능력으로 이건 아무것도 아니죠?”
예림과 지유는 사실 경쟁 관계였다.
이현은 지유를 데리고 다니는 날이 많았기에 둘 사이의 케미는 다른 사람이 비길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예림은 늘 이를 질투했다. 자신의 업무 능력도 뛰어난데 지유에게 뒤처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이번 사고로 이현과 지유는 사이가 멀어진 것 같았고 이현은 지유에게 하급 비서가 할만한 일을 던져주기까지 했다.
예림은 지유가 예쁘게 생겨서 늘 자신보다 행운스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기회에 꼭 좋은 성과를 내어 지유를 못살게 굴고 싶었다.
지유는 예림이 자신을 못마땅해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평소엔 이현을 위하는 마음이 컸기에 예림이 어떻게 비아냥거리든 참았고 눈길도 주지 않았다.
하지만 예림은 지금 또 지유를 건드리고 있다.
지유는 더는 참고 싶지 않았다. 참으면 참을수록 그녀를 만만하게 보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 서류들 정말 대표님께서 확인할 중요한 서류가 맞아요? 맞다면 왜 잘 보관하지 않은 거죠?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도와주긴 어려울 것 같네요.”
예림은 지유가 걸려들지 않자 짜증 내며 말했다.
“지금 대표님을 거역하겠다는 건가요?”
지유가 그런 예림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저는 제 힘이 닿는 데까지만 합니다.”
“온 비서님,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니에요? 해고당해도 무섭지 않다는 거죠?”
지유가 그녀의 요구를 들어주려 하지 않자 예림은 바락바락 악을 쓰며 언성을 높였다.
이현의 동의가 없었다면 예림도 이렇게 그녀를 괴롭히지는 못했을 것이다.
지유와 그렇게 오래 일하면서 정말 봐주는 거라곤 일도 없었다.
지유는 바리에서 벌떡 일어나 하던 서류를 팽개치며 서늘한 말투로 쏘아붙였다.
“네, 이 직장이 뭔 대수라고. 진 비서님이 대표님께 좀 말해줄래요? 저 오늘 결근이라고. 나를 감시하면 뭐 회사 경영에 도움이라도 되나.
지유는 이렇게 말하더니 가방을 챙겨 회사를 빠져나왔다.
예림은 정말 화가 나 미칠 지경이었지만 지유의 끝장은 보고 싶어서 이렇게 소리쳤다.
“그래요. 지금 바로 대표님께 전해줄게요. 어떻게 되나 한번 보자고요.”
예림은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회사에 감히 이현을 이렇게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될까? 지유가 한 말을 그대로 전해주면 바로 잘리지 않을까?
예림은 지유가 잘리는 걸 정말 너무 보고 싶었다.
하여 사무실 문을 열고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
이현은 머리도 들지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무슨 일 있어요?”
예림은 공손하게 그 자리에 선 채 이렇게 말했다.
“대표님, 온 비서님이 근무 시간에 함부로 자리를 비웠습니다. 그것도 모자라 대표님이 사람을 보내 자신을 감시한다면서 그러지 않으면 회사가 망하는 거냐는 망언도 서슴지 않았어요. 이를 회사 사람 모두가 봤어요. 온 비서님 정말 가면 갈수록 점점 겁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어떻게 감히 대표님 머리 위로 기어오를 생각 하고 회사를 저주하는지. 저는 온 비서님의 이런 태도가 너무 막 나가는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차라리 해고하는 게 어떨까요...”
이현은 차갑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당장 나가.”
예림의 말을 듣는 것조차 싫었다.
이에 예림은 멍해졌다. 이현이 이 일을 알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무조건 지유를 해고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불똥이 자기에게 튈 줄은 몰랐다.
예림은 살짝 억울했지만 칠흑같이 어두운 이현의 표정을 보고 더는 말할 엄두가 나지 않아 뻘쭘하게 다시 나왔다.
지유가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했는데 마침 안에서 구급상자를 든 의사가 한명 나왔다.
큰 키에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 석훈이 지유를 보더니 활기 넘치는 얼굴로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형수님, 왜 회사에 있지 않고 여기 계세요? 가방까지 메고, 어디 가시게요? 형님이 말 안 했어요? 형수님 다친 거 알고 저한테 검사 좀 해주라고 하던데...”
이현이 진찰을 봐달라고 그를 부르는 건 매우 드문 일이었다.
그래도 그녀에게 무슨 문제가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긴 한 것 같다.
지유는 그런 석훈을 힐끔 쳐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일단 대표님부터 챙겨줘요. 전체적으로 자세히.”
지유는 이렇게 말하더니 어리둥절한 석훈의 표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