Đang tải thông tin quảng bá...
보스의 품격
5년 전, 약혼자와 이복동생에게 속아, 일면식도 없는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고다정. 이로 인해 어머니는 자살하고, 아버지는 치욕스럽다고 생각하여 그...
Chương (1)
第1章
제1화 패가망신
눈 앞에 안개가 낀 듯 고다정의 시야가 흐릿했다.
손을 뻗었지만 다섯 손가락이 잘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다른 감각들은 더 선명해졌다.
마치 한 덩어리의 화염이 온몸을 감싸고 뜨거운 파도가 이따금 엄습하는 것 같았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고, 격정적인 움직임이 그녀를 뒤흔들었다. 여자를 반드시 소유하겠다는 의미를 가진 듯한 몸짓이었다.
다정은 눈을 힘껏 떠 상대방을 똑똑히 보려고 했지만 눈꺼풀이 천근만근이라 뜰 수가 없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거센 폭풍이 멈췄다. 마침내 그 남자의 단단하고 섹시한 가슴을 볼 수 있었다. 왼쪽 가슴에 날개를 펴고 비상하는 검은 매가 있었다. 날카로운 맹금류 특유의 눈길로, 흉흉하게 그녀를 노려보고 있었다.
사신의 눈길과 마주한 것처럼, 고다정은 온 몸에 소름이 쫙 끼쳤다
“으아아악…….”
다정은 비명을 지르며 꿈에서 놀라 깨어났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되어 침대에서 일어난 다정, 9개월 된 만삭의 배로 동작이 서툴고 힘겨웠다.
옆에서 자고 있던 강말숙이 외손녀의 인기척을 느끼고 벌떡 일어났다.
“왜 그래? 다정아, 또 악몽을 꾼 거야?”
다정은 기운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말숙은 핼쑥한 외손녀의 얼굴을 안쓰러운 눈길로 바라보며 달랬다.
“그때 그 일…… 절대 네 잘못이 아니야.”
“그럴까요? 그런데 다들 저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하고…… 자업자득이라고 해요.”
다정은 초점 잃은 눈빛으로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9개월 전, 그녀는 고 씨 가문의 금지옥엽으로, 소꿉친구인 진시목과 약혼을 앞두고 있었다.
하지만, 순조롭게 진행되던 결혼 준비가 약혼 전날 와장창 박살 났다.
그날 밤, 예비신부 고다정이 모르는 남자한테 정조를 잃은 것.
그 다음날 스캔들은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었다.
[파격 일탈! 운산시 명문가 장녀의 약혼 전날 원나잇!!]
다정은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을 잃었다.
어머니 강수지는 이 일로 충격을 받아 번개탄을 피워 자살했다.
아버지 고경영은 고 씨 집안 망신이라며, 인연을 끊겠다는 불호령과 함께 그녀를 집에서 쫓아냈다.
약혼남인 진시목은 사건 발생 일주일 후, 다정과의 혼약을 취소하고, 그녀의 의붓동생인 고다빈과 약혼을 발표했다.
다정은 순식간에 모두의 지탄을 받는 세기의 불륜녀, 불효녀가 되었다. 9개월이 지난 지금도, 그녀를 비난하는 네티즌들의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그녀는 밤마다 악몽을 꾼다.
꿈속에서는 어머니의 죽음, 아버지의 비난과 욕설…… 그리고 정체불명의 남자가 나타나 오늘처럼 자신을 괴롭힌다.
심신이 고달프고 고통스럽다.
다정은 9개월 전 그날 밤, 자신이 왜 그 낯선 남자의 방에 있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파티 때 약혼자 진시목도 분명 같이 있었는데…… 어떻게 된 걸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시목은 왜 자신을 지켜주지 않았을까?
그리고 어떻게 일주일 만에 다른 사람과 약혼하지?
가장 석연치 않은 점은, 늘 독립적이고 강인하던 어머니의 자살이었다.
아버지와 이혼한 후에도 소탈함을 잃지 않고 당당한 분이었는데… 갑자기 자살이라니.
수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자, 다정은 머리가 깨질 듯 아프기 시작했다.
강말숙은 다정의 안색이 여전히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물을 따라주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위로했다.
“다른 사람이 뭐라고 하든 상관하지 마라. 할머니는 네가 그런 사람이 아니라고 믿는다. 자, 물 좀 마셔.”
다정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컵을 받으려 손을 뻗었다.
이때, 갑자기 다리 사이로 뜨거운 뭔가가 흘러나왔다.
살펴보니 붉은 피가 조금씩 치맛자락을 적시고 있었다.
……
두 시간 후.
고다정은 극심한 고통에 휩싸였다.
뱃속 태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았다
그날 교외의 낡고 오래된 병원에서, 다정은 이란성 쌍둥이를 조산했다.
제2화 우발사고
5년 후.
운산시의 고색창연한 한약방.
다정은 방금 약재를 팔아 좋은 수입을 얻었다.
기분이 좋은 그녀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주차장을 향했다. 이따 차 안에 있는 두 꼬맹이 녀석을 데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갈 생각하니 신이 났다.
5년 전, 아들딸 쌍둥이를 낳은 다정은 외할머니와 함께 두 아이를 데리고 교외에서 살고 있다. 우연히 그곳에서 연세 많으신 한의사에게 의학이론과 여러 가지 약재를 판별하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다. 그 중에는 약재 재배 등도 포함되었다.
다정은 5년 동안 줄곧 약재 판매로 집안의 생계를 유지했다.
두 아이도 건강하게 자랐고, 생활이 돛 단 듯 순조로웠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센텀 광장을 지날 무렵.
광장 위쪽의 대형 스크린에서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연예계 떠오르는 샛별, 부잣집 아씨 고다빈 곧 JS그룹 도련님 진시목과 결혼, 5년간의 연애 드디어 마침표…….]
다정은 삽시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스크린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남녀의 웨딩촬영 비하인드 씬들이 보였다.
다정하게 서로 껴안고, 마주보며 눈빛으로 사랑을 나누는 두 사람.
그 모습이 다정의 눈을 아프게 찔렀다.
강펀치를 맞은 듯 숨이 턱 막혀왔다.
한때 진시목도 그녀를 아끼고 사랑하며 평생 함께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신에게 그런 불행이 닥쳤을 때, 진시목은 기다렸다는 듯 바로 혼약을 취소하고 고다빈과 함께 했다.
다정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혹시…… 그날 밤, 그 일은, 혼약을 깨기 위한 모략이 아니었는지…….
온갖 생각들이 얼기설기 뒤섞여 복잡한 마음은 한참을 애써 달래고서야 비로소 진정되었다.
아이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 총기가 넘치는 두 꼬마녀석들에게는 자신의 이런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마음을 다잡은 다정은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곧 주차된 곳에 도착했다.
차에 올라 운전석에 앉은 다정은 백미러를 통해 뒷좌석을 바라보았다. 두 귀염둥이가 얌전히 뒤에 앉아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작은 얼굴, 총기 가득한 두 눈, 위엄 한 가닥이 깃든, 꼭 다문 작은 입. 여자 아이는 사슴 같은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자신을 보며 긴 속눈썹을 깜빡거리고 있다.
둘은 성격은 다르지만, 이목구비는 70~80% 닮았다. 귀엽고 예쁜 외모는 마치 쇼윈도에 있는 바비인형 같았다. 그들은 품속에 새하얀 새끼 고양이를 한 마리씩 안고 있었다.
뒷좌석에 앉아 있는 네 귀염둥이는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다정을 보면서 해맑은 미소를 지었다.
“엄마, 돌아오셨어요?”
“엄마, 우리가 엄마를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린 줄 알아요?”
새끼 고양이도 야옹야옹 소리를 보탰다.
다정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것 같았다.
“엄마, 오늘 수입 어때요?”
첫째 고하준의 관심 어린 목소리가 들렸다.
다정은 안전벨트를 매며 웃었다.
“응, 괜찮았지. 약재를 모두 넘겼어. 오늘 엄마가 맛난 거 사줄게!”
“와!”
둘째 고하윤이 환호하며 물었다.
“엄마, 우리 해산물 먹으러 가면 안 돼요? 나 그거 먹고 싶어요.”
“그럼…… 그럴까?”
기대에 찬 아이들의 눈빛을 본 다정은 흔쾌히 그러자 했다.
“해산물 먹으러 출발!”
“출발!” 귀요미 둘째 하윤이가 작은 손을 들어 맞장구를 쳤다.
“…….”
다정은 차에 시동을 걸고 출발했다.
저렴한 가격으로 구매한 이 낡은 중고차는 주로 물건을 배달하는 데 쓰인다.
카카칵…….
도로 한 가운데서 달리던 차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움직이질 않는다.
쾅!
갑자기 뒤에서 차가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아!”
깜짝 놀란 다정은 무의식중에 소리를 질렀다. 타고 있던 차가 관성에 따라 앞으로 일정 거리 밀려났다. 차체가 부서질 듯 흔들렸다.
“하준, 하윤아!”
그녀는 가장 먼저 고개를 돌려 뒷좌석 카시트에 앉아있는 두 꼬맹이를 살펴봤다.
제3화 전적 책임
“엄마, 우리 괜찮아요.”
하준이 침착하게 대답했다.
다정은 마음속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꼬맹이들이 다치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상대방이 브레이크를 제때에 밟았기 때문일 것이다.
“얘들아, 엄마 어떻게 된 일인지 좀 보고 올게. 너희들은 얌전히 차에 있어.”
그녀는 한 마디 당부하고 곧바로 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렸다.
뒤 차에서 내린 운전기사가 차 상태를 확인하고는, 화난 얼굴로 다정을 보며 다그쳤다.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한 겁니까? 갑자기 도로에서 이렇게 차를 멈추면 어떡합니까?”
“정말 죄송합니다. 제 차가 고장 난 것 같습니다.”
다정은 자기 쪽 문제라는 것을 알고 진심으로 사과했다. 그리고는 고개를 돌려 자신의 차를 보았다. 뒤 범퍼가 움푹 들어간 걸 확인하고 다시 상대방의 차를 보았다.
순간 그녀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상대방의 차는 억 소리가 절로 나오는 글로벌 한정판 마이바흐였다.
이번 사고의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으며, 배상도 본인이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 많은 돈을 배상해야 한다는 생각에 그녀는 심장이 툭, 발치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최근 2년 동안 외할머니가 편찮으셔서, 워낙 변변찮던 살림이 더 쪼들린 터였다. 차 배상금은 적어도 수천만원 될 텐데.
‘대물보험도 가입되어 있지 않은 상황에서 어디에 가서 이렇게 많은 돈을 구하지?’
이마의 땀을 닦으며 다정은 다시 몸을 굽혀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으로서는 덮어놓고 사과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다.
운전기사는 화가 난 듯 두 손을 허리에 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리고 찌푸린 눈살로 그녀를 힐끗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봐요, 아가씨, 사과만 하면 무슨 소용 있어요? 우리 쪽은 정상적으로 운행하고 있었다구요. 이번 일은 당신 쪽에서 전적으로 책임져야 할 겁니다. 교통경찰과 보험회사가 오면 어떻게 배상해야 할지 다시 이야기해 봅시다.”
상황을 살피고 말을 듣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초조해졌다.
다정은 두 손을 비비며 궁색한 표정으로 낮은 소리로 말했다.
“저…… 저…… 돈 없어요.”
미간을 모은 기사는 형형한 눈빛으로 눈앞의 여자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설마 돈을 떼먹으려는 건 아니지요?”
다정은 손을 흔들며 아니라고 표시했다.
“아니에요, 전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이때 두 아이도 차에서 내렸다. 집안 상황을 잘 알고 있는 두 꼬맹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이구동성 다정을 불렀다.
“엄마!”
꼬마들은 짧은 다리를 내디디며 다정의 곁으로 다가와서는 그녀의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들의 눈에는 불안이 배어 있었다.
다정은 아이들의 작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운전기사를 쳐다보고는 작은 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저 돈을 떼먹지 않습니다. 이번 사고는 제 불찰 맞습니다. 다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안 될까요? 저…… 정말로 한번에 그렇게 많은 돈을 내놓을 형편이 안 됩니다.”
그녀는 입술을 오므리고, 먼저 태도를 표명했다. 그리고 자신의 어려움을 설명한 다음, 다시 해결 방법을 이야기하였다.
“아니면…… 연락처를 남겨주시겠어요? 할부로는 안 될까요?”
이 말을 들은 기사는 눈살을 찌푸렸다.
두 아이는 상황을 보고 얼른 엄마를 도와 사정했다.
“아저씨, 우리 집은 정말 그렇게 많은 돈이 없어요. 한번만 봐주세요. 좀 봐주세요. 우리…… 돈 떼먹지 않아요.”
하윤은 두 손을 모으고 앳된 목소리로 애원했다.
“제발, 제발요…….”
운전기사는 두 꼬마의 귀여운 모습을 보고 화가 약간 풀어진 듯했다. 더 이상 난폭하지 않았다. 하지만, 운전기사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잠깐만 기다려봐요.”
말을 마치고 뒷좌석으로 몸을 돌려 허리를 굽혀 차창을 두드렸다.
차창이 천천히 내려갔다.
기사는 공손한 태도로 물었다.
“도련님……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까요?”
제4화 눈빛 속에 스며든 남자
운전기사의 모양을 보니 차 뒷좌석에 결정권자가 있는 듯했다.
‘차 주인이 뒤에 계시나 보다…….’
다정은 무의식중에 뒷좌석을 쳐다보았다. 차 뒷좌석에 고급스러운 검은색 양복을 입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비현실적 외모를 가진 남자가 앉아있었다. 몸에선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가 넘쳤다.
하지만 하얀 입술 색으로 보아 어디 아파 보이는 것이, 눈을 감고 쉬고 있는 듯했다.
남자의 옆에는 금테 안경을 쓴 세련되고 듬직해 보이는 젊은 남자가 앉아있었다. 그의 미간에는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가 입을 열었다.
“이 기사님, 이분에게 명함을 한 장 남겨 주시고, 배상 문제는 다음에 이야기합니다. 먼저 신수 어르신께 갑시다. 여기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그들이 대화를 나눌 때, 차로 다가간 다정은 차 안에서 풍기는 피비린내를 맡았다.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차 안의 남자는 어딘가 다친 것 같았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상대방을 다시 쳐다보았다. 보통 인물은 아닌 듯했다.
차 안에 있던 여준재는 느껴지는 시선에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천천히 눈을 떴다. 차가운 심연과도 같은 눈동자가 흘깃 다정을 향했다.
그 눈길은 날카롭고 차가워, 감정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다.
다정은 인간이 이런 눈을 가진 걸 본 적이 없었다. 삽시에 온 몸이 오싹해나 황급히 눈길을 돌렸다.
‘이 사람…… 낯이 좀 익은 것 같은데…….’
자세히 생각할 겨를도 없이 다정은 기사의 대답을 들었다.
“네.”
운전기사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이름이 뭐예요? 연락처 좀 남겨주세요.”
“고다정이라고 합니다. 제 핸드폰입니다.”
다정은 솔직하게 얘기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내 운전기사에게 건네어 주었다.
“저는 이 번호만 씁니다. 걱정 마세요. 절대 도망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만 일시금으로 많은 돈을 낼 능력이 안 됩니다. 제가 차 수리비를 낼 테니까 혹시 할부로 지급해도 되는지 물어봐 주실 수 있을까요? 아니면 지급 기한을 좀 더 늘려주시든가요. 제가 돈을 마련하는 데도 시간이 필요합니다.”
운전기사는 전화를 걸어 그녀의 핸드폰 번호가 맞는지 확인한 후에야 얼굴에 만족스러운 기색을 보였다.
“오늘은 운이 좋은 줄 아세요. 가세요. 곧 우리 쪽에서 배상 관련 문제로 연락드릴 겁니다. 어떻게 배상할 것인가, 얼마를 배상할 것인가,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죠.”
“네, 전화를 24시간 동안 켜 놓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정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기사는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은 지, 그녀를 가리키며 경고하듯 말했다.
“경고하는데…… 당신 핸드폰 번호를 바꾸거나 돈 떼먹을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거요. 당신의 신분과 주소 정도 알아내는 건, 우리한테 식은 죽 먹기니까…… 만약 속임수를 쓴다면, 지금처럼 이렇게 쉽게 끝나지 않을 거요.”
“걱정 마세요, 제가 말했잖아요. 이 일은 제 책임이에요. 인정합니다. 떼먹지 않을 거예요.”
다정은 거듭 말했다.
운전기사는 그제야 차에 올라 자리를 떠났다.
차가 출발하고서야 다정은 자기 손에 닿은 보들보들한 살갗이 느껴졌다. 고개를 숙여 아이들을 보았다.
한 손에 한 명씩, 양손을 꼭 잡은 두 꼬마의 작은 눈썹이 걱정으로 찡그려졌다.
하윤은 작은 고개를 들어 엄마를 바라보며 물었다.
“엄마, 우리 어떡해요? 돈을 많이 물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괜찮아, 엄마가 해결할 방법을 찾을 거야!”
다정은 미소를 지으며 두 녀석을 위로했다.
그녀는 이 두 꼬맹이가 돈 때문에 걱정하는 게 싫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자신은 없었다.
‘이 짧은 기간에 어디에 가서 그 많은 돈을 구하지?’
제5화 그를 살려야 한다
다정은 속으로 한숨을 쉬며 무거운 마음을 안고, 견인회사에 전화를 걸어 주소를 알려준 뒤 교통경찰에게 연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고 장소에 도착한 교통경찰은 대략적인 상황을 간단히 확인하고 이미 쌍방이 서로 합의하였음을 알고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견인 기사가 차를 끌고 가는 것을 빤히 보면서 아쉬워했다.
“고다정 씨, 경찰서에 함께 가셔서 조서를 작성해 주셔야 합니다.”
교통경찰이 다가와 말했다.
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곧 두 꼬맹이와 함께 경찰차에 올랐다.
모든 것을 정리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한편, 여준재의 차도 신의약방에 도착했다.
비서 구남준은 먼저 내려 차 문을 열었고, 곧 운전기사와 함께 여준재를 부축하여 안으로 들어갔다.
문에 들어서자마자, 구남준은 프런트의 여직원을 바라보며 다급하게 물었다.
“신수 어르신은?”
프런트 데스크의 여직원은 얼른 걸어 나와 안으로 안내했다.
“신수 어르신은 지금 대기 중입니다. 얼른 안으로 들어가시죠.”
곧 여준재를 방으로 모셨다.
집 안에는 고풍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났다. 공기 중에 퍼져 있는 은은한 단향목 냄새가 정신을 맑게 해주는 듯했다.
티테이블 한쪽에 개량한복을 입은 70, 80세로 보이는 노인이 손에 찻잔을 들고 차를 음미하고 있다. 빛나는 두 눈과 꼿꼿한 허리가, 그 연세의 노인 것이 아닌 것 같았다.
구남준은 노인을 바라보며 말했다.
“신수 어르신, 도련님이 오늘 부상을 입어 지병이 도진 거 같은데…… 도와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여준재는 거의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오는 내내 고통을 꾹 참느라 미간이 찌푸려졌다. 꼭 감은 눈꺼풀 밑에서 눈동자가 마구 요동쳤다.
“빨리 눕혀라, 내가 좀 보마!”
신수 노인은 얼른 손에 든 찻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여준재를 침대에 눕히자, 신수 노인이 앞으로 다가와 자세히 살폈다.
잠시 후에야 낮은 소리로 일갈했다.
“내가 뭐랬어? 진작에 몸뚱이 함부로 쓰지 하지 말라고 충고했거늘…… 어쩌다 이렇게 되었느냐? 요즘 젊은 놈들은 목숨 귀한 줄 모르지……, 그렇지?”
“어르신, 심각한가요?”
구남준이 걱정하며 물었다.
신수 노인은 그를 한 번 힐끗 쳐다보곤,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심각하다고 얘기한들, 믿을 게냐?”
구남준은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잠시 후, 애원하듯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르신! 제발 도련님 좀 도와주세요…… 어떻게든 도련님을 살려야 합니다!”
신수 노인은 담담하게 그를 힐끗 보고는 콧방귀를 뀌었다.
“내가 무슨 하느님이나 약사여래라도 되는 줄 아는가 보구나. 자신이 죽고 싶어 환장했는데, 내가 무슨 방법이 있겠나?”
비록 이렇게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손은 멈추지 않았다. 먼저 지혈한 후, 가슴에 침을 놓기 시작했다.
한참 후.
신수 노인은 침을 빼고 처방전을 써서 프런트의 여직원에게 건네주었다.
“이 처방에 따라 약을 달여. 물 세 그릇을 넣고 중불로, 한 그릇 될 때까지 달여라.”
한 시간 후, 여준재가 깨어났다.
눈을 뜨자마자 신수 노인이 보였다. 여준재는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잘 알 수가 있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의술이 정말 점점 더 정교해진 듯합니다. 오늘은 바로 깨어난 것 같아요.”
여준재는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수 노인이 입을 열었다.
“너 이 녀석, 운이 좋은 줄 알아. 오늘 마침 네 체내의 지병을 억제할 수 있는 희귀한 약재를 몇 뿌리 구했으니 망정이지…… 아니면 이렇게 빨리 못 깨어났을걸? 고생 좀 되게 했을 거야!”
여준재는 멍하니 말했다.
“그래요? 희귀 약재? 어떤 희귀 약재이길래 이런 신비한 효과가 있을까요?”
이전에 발병했을 때도 신수 어른께 치료받았었지만, 이런 효과를 보지는 못했다.
제6화 구세주
한쪽의 구남준도 의아해하며 얼른 되물었다.
“어르신, 혹시 그 약초 더 있나요? 있으면 저희에게 넘겨주세요. 있는 만큼 저희가 다 구입하겠습니다.”
이 약초만 있다면 도련님은 아마 그렇게 고통스럽지는 않을 것이다.
신수 노인은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을 터트렸다.
“시장에서 야채처럼 한 트럭씩 갖다 파는 줄 아나? 희귀 약초라고 했잖은가?”
“그…….”
모처럼 한 가닥의 희망을 잡은 구남준은 여전히 단념하지 않았다.
“우연의 일치였을 뿐이다. 그동안 약초를 공급해 온 사장이 우연히 몇 뿌리 구했다고 넘겼어. 나도 물었지…… 혹시 여분이 있냐고…… 없다더라.”
구남준의 얼굴에는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여준재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그저 눈빛이 한결 더 어두워졌을 뿐.
그의 지병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요 몇 년 동안 세계 명의를 두루 찾아다녔지만, 완치할 방법은 찾지 못했다. 지금 그냥 남은 목숨을 부지하며 구차하게 살아갈 뿐이었다. 다행히 신수 노인에게서 치료받은 뒤 약간의 차도가 있었다. 고통도 다소 완화되었다.
지금, 이렇게 기이한 효과가 있는 약이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더 많이 구매하여 약물 연구에 사용할 수 있기를 바랐다. 어쩌면 완치가능한 약품을 연구해 낼 수도 있을 테니.
하지만, 희망의 불꽃이 다시 꺼졌다. 여준재는 이미 이런 상황에 익숙해진 듯했다.
그들의 실망스러운 표정을 읽은 신수 노인이 큰 소리로 위로를 건넸다.
“자, 비록 약초가 몇 뿌리밖에 없지만, 몇 달은 충분히 버틸 수 있어. 적어도, 이 기간 에는 고통을 줄일 수 있을 테니……. 나중에 그 사장을 다시 만나면 꼭 물어봐 주마. 오늘 밤은 여기서 푹 쉬도록 해라…….”
노인은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준재를 향해 한 소리 했다.
“내가 아무리 네 병을 잘 치료하고 싶어도 내 의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워. 은둔 명의인 부윤솔을 찾을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말이야. 하지만 그 사람을 찾기 전에 먼저 네 건강 좀 챙겨! 넌 사람이지 신이 아니라고. 매일 이렇게 악착같이 일만 하다간 몸이 남아나지 않을 거야!”
준재는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일찌감치 사람을 파견하여 그 은둔 명의 부윤솔을 수소문했지만, 줄곧 감감무소식이었다. 이 세상에 이런 사람이 있는지 의심될 정도로 종적이 묘연했다.
시간이 지나다 보니, 이젠 가망이 없을 거로 생각해서 희망도 품지 않았다.
몸이 약해진 준재는 또다시 어렴풋이 잠들었다.
한편, 다정은 저녁을 먹은 후 그릇과 수저를 치우면서 말했다.
“하준, 하윤아, 너희들은 집에서 외증조할머니 말씀 잘 듣고 있어. 함부로 뛰어다니지 말고…… 알았지? 엄마는 약밭에 잠깐 다녀올게.”
두 꼬맹이가 고개를 끄덕이니 통통한 볼살이 흔들렸다.
“알았어요, 엄마.”
설거지를 마친 다정은 앞치마를 벗어 두고 나갔다.
약밭 안.
푸른 녹음이 짙어져 있는 약방에는 희귀한 약초들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모두 다정에게 의술을 가르쳤던 스승님께서 남긴 것들이었다.
최근 몇 년 동안 스승은 이런 희귀 약종을 재배하려고 시도했지만, 모두 성공하지 못했다. 결국 낙심한 나머지 훌훌 털고 유유자적 구름처럼 사라졌다.
지금쯤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른다.
다정도 올해 들어서야 겨우 일부 재배에 성공했다. 다 자라기도 전에 죽어버리는 것도 많지만.
그래서 신수 어른이 약재가 더 있냐고 물었을 때 없다고 둘러댔다.
눈앞의 이 약초 모종들을 보던 다정은 몸을 웅크리고 앉아 손끝으로 가볍게 어루만지며 저도 모르게 한숨을 쉬었다.
비가 새는 집, 연이어 며칠 비까지 내린 데다, 오는 길에 차 사고까지…… 이 약초들 외에는 딱히 돈을 마련할 길이 없었다.
마음속으로 내일 다시 신의약방에 들러 이 약초들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기로 다짐했다. 좋은 가격에 팔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제7화 절대 사고치면 안 돼
다정은 정성껏 약초에 물을 주며 가지치기와 곁순치기도 같이 했다. 어느덧 한 시간이나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날이 완전히 어두워져서야 크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 약초는 신수 어른에게 넘긴 것보다 훨씬 진귀한 약종으로, 가격도 몇십 배나 더 비쌌다.
‘낮에 그 뿌리들을 200여 만 원에 팔았는데, 이런 약초 모종들은 잘만 키운다면 만만치 않은 가격을 받을 수 있을 거야.’
가치를 매길 수 없는 진귀한 약종이니.
얼굴의 땀을 훔치던 다정은 약초들을 보며 마음이 훨씬 가벼워졌다. 특히 집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두 꼬맹이를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어느덧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다정은 공구를 정리하고 문을 잠근 뒤 집으로 걸어갔다.
집에 도착하여 문을 열고 들어서니, 두 꼬맹이가 목욕가운을 두르고 증조할머니와 바둑을 두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새끼 고양이 앙꼬와 크림이 흥분하여 옆에서 맴돌고 있는 모습이 참으로 따뜻하고 즐거웠다.
“외증조할머니가 또 졌어요.”
첫째 하준이 팔짱을 끼고 앉아있다. 귀엽고 작은 얼굴에 진지한 표정을 더하니 너무 귀여워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우리 하준이, 정말 갈수록 대단하네!”
강말숙이 웃자, 눈이 반달이 되었다. 자기 집 아이가 이렇게 총기가 넘치다니……. 어린 나이임에도 논리 정연하고 언어 표현 면에 있어서도 절대 어른에게 뒤지지 않았다.
둘째 하윤이는 엄마를 보고 기뻐하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엄마다!”
말과 함께 작은 몸이 날듯이 다정에게 달려왔다.
하준은 다가와 물을 한 잔 내밀었다.
“엄마, 피곤하죠? 물 한 잔 드세요.”
두 꼬맹이를 품에 안은 다정은, 모든 피곤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듯했다.
‘애들을 위해서라면 아무리 힘들어도 다 버텨낼 수 있어!’
다음 날 아침, 다정은 두 아이를 유치원에 보냈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신의약방으로 향했다.
컴퓨터에 환자 정보를 등록하고 있던 프런트 데스크의 여직원 소영은 다정이 문에 들어서는 걸 보고 다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정 씨, 오늘 새로운 약초 배달하기로 했나요?”
다정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셈이죠, 좀 특별한 약초들을 가지고 왔는데, 혹시 신수 어르신이랑 잠깐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요?”
소영은 유감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다정 씨, 어떡하죠? 오늘 신수 어르신께서 아침에 회의가 있으셔서…… 지금 약방에 안 계셔요. 오후에야 들어오실 거 같은데……. 아니면 오후에 다시 오세요.”
“아, 그래요?”
다정은 실망했지만, 겉으로 티 내지는 않도록 예의 바르게 소영을 향해 미소를 지었다.
“네. 그럼, 오후에 다시 올게요.”
곧 몸을 돌려 막 문을 나서려고 할 때, 휴게실 쪽의 문이 갑자기 쾅, 하고 열렸다.
소리에 깜짝 놀란 다정은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금테 안경을 낀 훤칠한 몸매의 남자가 황급히 프런트로 달려가는 것이 보였다. 목소리에는 다급함이 가득했다.
“소영 씨, 신수 어르신 어디 계세요? 도련님의 상황이 심상치 않으니, 빨리 좀 불러주세요!”
소영은 남자의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도…… 도련님이요? 상태가 많이 안 좋은 건가요? 어르신은 오늘 스케줄이 있어서 약국에 안 계시는데……. 빨라야 점심때나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금테 안경남의 안색이 돌변했다.
‘신수 어른이 안 계시면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바로 어르신께 연락 부탁해요. 상황이 급박하니, 부디 빨리 와달라고……!”
“네!”
소영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핸드폰을 꺼내 전화를 걸었다.
여준재는 여기 단골이다. 신분이 존귀한 데다 여기 주인인 신수 노인과 여준재 할아버지는 문경지교다. 따라서 여준재에게 절대 뭔 일이 생겨서는 안 된다.
그러나 전화에서는 뚜뚜, 통화 중 신호음만 들려왔다.
“구 비서님, 신수 어르신 핸드폰이 안 돼요! 어떡하죠?”
소영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구남준의 안색이 좋지 않다.
당장은 병원으로 데려갈 수밖에!
이때 휴게실에서 쨍그랑,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컵이 깨지는 소리였다.
놀란 남준과 소영은 급히 휴게실로 뛰어 들어갔다.
제8화 내가 살릴 수 있어
홀에는 오직 한 사람만 덩그러니 남았다.
다정은 잠자코 서서 자리를 떠야 할지, 계속 있어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금테 안경을 쓴 그 남자가 바로 어제 교통사고가 났던 차량의 뒷좌석에 앉아 있던 사람 중 한 명이었다.
기품이 고귀하고 오랫동안 높은 자리에 있는 사람들만의 특유한 카리스마가 몸에 넘쳐흘렀던 그 사람…… 그때 맡았던 피비린내와 현재 상황을 종합해 보면……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그 남자일 것이다.
보기만 해도 단순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자와 시비가 붙었으니, 이치대로라면 빨리 도망가는 게 맞다.
그러나 의술을 익힌 자로서, 눈앞에 목숨이 시급한 사람을 구하지 않고 모른 척 손 놓고 있을 수 없었다.
다정이 들어갈까 말까 망설이고 있을 때, 안에서 구남준의 소리가 들려왔다.
“도련님…….”
이것저것 따질 틈도 없이 다정은 빠른 걸음으로 휴게실에 들어갔다.
문에 들어서니, 진한 한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깨끗한 병상에 정교한 얼굴의 남자가 눈을 감고 침대에 누워 창백한 얼굴로 혼수상태에 빠져 있었다. 두 볼은 비정상적인 붉은색을 띠고 있었다.
다정은 한눈에, 그가 열이 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고열은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듯.
한쪽의 구남준과 소영은 어쩔 바를 몰라 허둥지둥했다.
어젯밤에 신의약방에 온 후 여준재는 줄곧 여기에 묵고 있었다.
그전까지는 멀쩡했다.
그런데 방금 구남준이 여준재를 불렀는데 미동이 없었다. 혼수상태였다. 숨결이 미약하고 이마는 손을 델만큼 뜨거웠다.
당황한 구남준이 바로 신수 어른을 부르러 나간 것이었다.
소영도 이런 상황은 처음이었다. 침착해야 했다. 그녀는 놀란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말했다.
“구 비서님, 지금 신수 어르신이 안 계십니다. 도련님의 상황이 급박하니 먼저 병원으로 모시는 건 어떨까요?”
“그럴 수밖에요…….”
구남준은 지체하지 않고 바로 휴대전화를 꺼내 들었다.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통화버튼을 누르고자 할 때, 얼핏 빨간 그림자가 침대 곁으로 다가와 여준재에게 손을 뻗으려 하는 것이 보였다.
구남준의 눈빛은 순식간에 매서워졌다. 그는 경계하듯 한 걸음 성큼 다가가 빨간 그림자의 손목을 잡아채며 화난 목소리로 소리쳤다.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바로 고다정이었다.
다정은 구비서의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잠시 멍했다가 다시 침착한 표정으로 구남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악의 없어요. 다만 환자의 상황을 살펴보고 싶었어요. 내가 이 사람을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요…….”
구남준은 방금 홀에 있던 사람이 생각났다. 다정의 손을 놓고 훑어보며 경계하듯 물었다.
“누구세요? 아는 얼굴은 아닌 거 같은데……!”
“저는…….”
다정은 갑자기 어디서부터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구남준은 말 더듬는 다정을 보며,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잠시 보고 있자니…… 이 여자, 왠지 낯이 익었다.
머릿속에서 어제의 교통사고가 번뜩 떠올랐다.
“아, 생각났어요, 어제 도로에서 갑자기 정차한 그 도로 킬러……, 맞죠?”
‘하필 아픈 곳을 건드리다니!’
다정은 어색하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네, 저예요.”
구남준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정을 쳐다보았다.
“근데 왜 여기 있어요? 혹시 의술 알아요? 새로 온 의사입니까?”
옆에 있던 소영은 얼른 다가와 해명했다
“아니에요, 구 비서님. 이분은 고다정 씨라고…… 우리 약국의 약초 납품 업체 사장입니다. 우리 단골이고요, 신수 어르신과도 잘 아는 사이입니다. 의심스러운 사람은 아니에요.”
간단한 소개를 마친 소영은 다정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
“다정 씨, 저기 여 도련님을 구할 수 있다는 게 사실입니까? 의술 공부했어요? 전에 그런 얘기는…… 못 들은 거 같은데…….”
제9화 5년도 넘기지 못할 거야
고다정은 난처한 듯 답했다.
“묻는 사람이 없어서 굳이 말하지 않았어요. 의술이라고 하기엔 그렇고…… 진맥 정도는 조금 할 줄 알아요.”
의술을 안다고 하면, 오만방자하다고 생각할까 봐 얼버무려 얘기했다.
의술이 뛰어난 스승님 밑에서 많은 것들을 배웠으니, 일반적인 병을 진찰하는 데는 별문제가 없었다.
구남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이 사람을 믿어야 할지 고민 중인 듯했다.
“조금이라고 하면 어느 정도이죠? 고다정 씨, 저는 도련님 목숨으로 장난칠 수는 없는데…….”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고다정은 구비서의 말을 끊었다.
“지금 병원으로 옮기기엔 이미 늦었어요. 지금 이분은 기운이 약해져서 언제든지 목숨이 위험합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병원까지 꽤 멀어요.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간다고 해도 차로 30분은 족히 걸릴걸요. 그 난리를 피울 동안, 이분은 위험한 상황에 빠질 것 같습니다만…….”
다정의 말을 들은 소영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일리가 있긴 한데, 그럼 지금 어떻게 해야 하지?’
“고다정 씨, 그럼, 도련님의 병을 치료할 방법이 있습니까? 지금 상황이 매우 위험한 듯합니다.”
구남준은 아무 말없이 다정만 쳐다보았다. 눈빛에 그가 원하는 답이 뭔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다정은 한숨을 내쉬며 직설적으로 말했다.
“의학에는 한계가 있어요. 병을 100% 치료할 수 있다고 장담하는 의사는 없을 겁니다. 하물며 이분은 지금 목숨이 반밖에 남지 않았어요. 최선을 다하겠다는 얘기밖에 드릴 말씀이 없네요. 잘 생각해 보고 결정하세요.”
구남준은 마음속으로 저울질하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정은 이곳의 단골이다. 소영도 그녀를 여러 번 봤었다.’
‘성격이 침착하고 연구개발한 약초도 효과가 뛰어나, 신수 어르신도 평소에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했다.’
‘의술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상황이 급박하니, 그냥 속는 셈 치고 맡겨볼 수밖에…….’
“구 비서님, 다정 씨에게 한번 맡겨 봅시다. 차도가 있다면 좋고…… 만약 안 된다면 병원에 갈 수밖에요…….”
소영이 구남준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구남준은 몸을 돌려 다정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부탁드립니다.”
고다정은 곧 손을 들어 침대 위 남자의 맥을 짚었다.
맥이 떠 있고, 맥박이 미약했다. 심맥이 손상되었다는 뜻이다.
다정은 귀를 기울여 그의 호흡을 들었다. 미약한 기운이 그녀의 귓바퀴를 자극했고, 호흡의 빈도가 현저히 낮았다.
“최근에 크게 다친 적이 있습니까?”
“있어요, 왼쪽 어깨에……. 그리고 우리 도련님 지병이 재발한 듯합니다.”
구남준의 말투가 망설이는 걸 보니 분명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다정은 남자의 상의 옷자락을 젖혔다. 건장한 몸매, 가지런히 줄 서 있는 8개의 초콜릿 복근이 한눈에 들어왔다.
얼굴이 빨개질 겨를도 없이 다정은 거즈로 대충 싼 어깨 쪽 큰 칼자국에 검붉은 피가 스며든 것을 보았다.
거즈를 벗겨 보니 빨갛게 부은 상처에 고름이 찼다. 무슨 약을 발랐는지 분명 별 소용이 없는 듯했다. 이미 감염되었다.
상처를 보고 나니 대충 감이 왔다. 어깨에 난 상처가 감염되면서 열이 났고, 게다가 지병이 재발하면서, 심맥이 손상되고 호흡과 맥박이 약해진 것이었다.
“다정 씨, 치료할 수 있겠어요?”
소영이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외상도 그렇고, 열도 그렇고, 상황이 위급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아직은 통제 가능한 범위라 치료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다만 골치 아픈 건 지병인데…….”
다정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대답했다.
곧 맥을 다시 짚어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이미 몸이 상한 데다 내상까지도 심각해. 양의로는 외상을 치료하고, 열을 내릴 수 있지만, 내상은 치료할 수 없어.’
‘고대의학의 약리로 치료하면 모를까나, 지금의 몸 상태로는 아마 앞으로 5년은 넘기지 못할 거야.’
제10화 다 벗겨
다정은 머릿속의 생각들을 다 말로 하지 않았다. 굳이 얘기해도 별 소용없으니, 말을 아끼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진맥하던 손을 거두고 다정은 고개를 돌려 소영에게 물었다.
“소영 씨, 혹시 침 있어요? 침술용 그런 침이요.”
소영은 눈이 맑아지며 얼굴에 희색을 띠었다.
“네. 있어요! 그 말인즉 치료 가능하다는 얘기인가요?”
다정은 고개를 끄덕이며 한마디 답했다.
“네.”
그녀의 의술이 미덥지 않았던 구남준은 근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고다정 씨, 정말 가능한 거죠?”
다정은 별말 없이 구 비서를 한 번 쳐다보았다.
‘이 사람 벌써 몇 번 확인하는 거야? 쓸데없는 말이 참 많군.’
다정은 퉁명스럽게 대답했다.
“제가 가능하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대체 제가 치료하는 겁니까? 아니면 그쪽이 치료하는 겁니까?”
구남준은 순순히 입을 다물고 더는 캐묻지 않았다.
위층으로 한걸음에 달려간 소영은 침이 들어있는 작은 케이스를 하나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사이즈의 다양한 침이 촘촘히 꽂혀 있었다.
“저 혼자 힘으로는 안 돼요. 두 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소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든지요. 말만 하세요.”
구남준도 캐묻지 않았다.
“그래요, 소영 씨, 수고스럽지만 이 침들 전부 소독해 줘요.”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구남준에게 말했다.
“비서님, 이분의 옷을 다 벗겨 주세요. 아…… 속옷은 빼고요…….”
“네?”
소독하러 가려던 소영이 놀라서 다정을 한 번 보고는 다시 마음을 다잡고 소독하러 갔다.
구남준은 꼼짝하지 않고 놀란 눈빛으로 다정을 바라보았다.
‘어찌 이 여자 앞에서 도련님의 옷을 반쯤 다 벗긴단 말인가? 모양 빠지게…….’
‘그리고 침술 하는데 바지를 벗기는 게 어딨어? 기껏해야 상의 정도지…….’
구남준은 자기도 모르게 다정의 초심을 의심하기 시작했다.
“바지 안 벗겨도 돼요, 대신 바짓가랑이는 걷어줘요, 말 안 따랐다가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쪽 책임인 겁니다…….”
다정은 눈썹을 치켜세우고 쳐다보았다. 구남준은 이를 악물고 그대로 했다.
‘지금 상황이 시급하니 이 여자 말을 따를 수밖에 없다. 도련님이 무사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혹시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자신의 목숨으로 사죄하는 길밖에 없다.’
옷을 벗기자, 잘생긴 남자의 건장한 몸이 보였다. 구남준은 여준재를 침대에 엎드려 눕혔다.
넓은 어깨와 좁은 치골, 차가운 피부에는 젊음의 광택이 묻어났다.
소영의 바늘을 건네받은 다정은 진지한 표정으로 침을 놓기 시작했다. 혈자리를 찾은 후 정확하고 안정적으로 시침하는 것이 나름 노련했다.
다정은 어깨에 한 침, 종아리에 한 침 놓았다.
‘이렇게 놓는 침술도 있나?’
의술을 모르는 구남준은 침을 놓는 모습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소영은 프런트 데스크의 여직원일 뿐만 아니라 신수 노인의 보조로서, 의술에 대해 좀 알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신체 각 부위의 혈자리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방금 시침한 혈자리는 자신이 전혀 모르던 곳이었다.
‘여태껏 듣도 보도 못한 시침 방식이네……. 설마 막 찌르는 건 아니겠지?’
‘설마…… 도련님한테 무슨 문제 생기지는 않겠지?’
여러 가지 생각에 가슴이 두근두근한 소영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다정 씨, 방금 시침한 이 혈자리…… 보통 의사샘들은 잘 쓰지 않는 것 같은데…… 치료 방법이 좀 다르네요?”
“인체에는 혈자리가 아주 많아요. 독학했어요. 아마 소영 씨가 아는 것과는 좀 다를 거예요.”
다정은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모호하게 설명했다. 분명히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다정이 시침하는 혈자리는 고대의학 세가의 후계자였던 스승님께서 가르쳐준 것이었다. 일반적인 한의학이 아닌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진 고대의학은 일반인이 접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다.
소영은 반신반의하며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시침하는데 방해될까 봐 말도 못하고 걱정스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침이 끝났다. 다정은 이마에 묻은 땀을 닦으며 한숨을 돌렸다.
“됐어요.”
앞으로 다가간 구남준은 여준재의 온몸이 바늘로 뒤덮여 있는 걸 보았다. 여전히 혼수상태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러운 어투로 물었다.
“어때요?”
“몸에 있는 침을 건드려서는 안 돼요. 10분 후에 뽑을 거예요. 침을 뽑고 나면 깨어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