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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친 그날 밤
결혼 직전에 도망친 남편, 신랑 없이 혼자 한 결혼...대망의 신혼 첫날밤, 송연아는 홧김에 낯선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다.남자의 집착에 슬슬 귀찮아지...
Chương (1)
第1章
제1화
송연아는 결혼했다. 그것도 듣도 보도 못한 신랑 없는 나 홀로 결혼 말이다.
부모님의 취향대로 장식된 신혼 방은 이 어이없는 상황을 반복적으로 일깨워 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제아무리 달갑지 않다고 해서 뭐 어쩌겠는가, 권력에 휘둘릴 수밖에 없는 게 그녀의 현실인 것을...
송연아는 오로지 아버지 송태범의 욕심으로 인해 강씨 집안으로 시집오게 되었다. 강씨 집안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할아버지는 우연한 사고로 회장 강의건의 목숨을 살리고 희생되었다.
때마침 송태범의 회사가 어마어마한 부채를 끌어안고 파산을 직면하게 되었는데, 그는 돈을 빌리는 것으로 강씨 집안을 신세 갚게 하는 것이 아닌 송연아와 강의건의 손자 강세헌의 혼사를 추진하기 시작했다. 결혼은 돈과 인맥을 동시에 가져다줄 수 있는 좋은 거래이기 때문이다.
강씨 집안에서는 갚아야 할 신세가 있어 결국 거절하지 못했다. 당사자인 강세헌은 결혼식에 참석하지 않는 것으로 불만을 표출했고, 송연아가 자신의 이름을 이용해 사모님 행세를 하지 말 것을 단호하게 경고했다.
이 모든 일이 일어나는 과정에 송연아의 의견을 물어본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래도 그녀는 자신의 운명이 비참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그 정도로 나약한 사람도 아니었고 말이다.
지루한 신혼 첫날밤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병원 동료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왔다. 대신 당직을 서줄 수 있는지 묻는 문자였다.
송연아는 빠르게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왔다. 순백의 드레스는 순백의 가운으로 바뀌었다. 그렇게 일에 집중하기 시작하려는 찰나, 예고 없이 벌컥 열린 문과 함께 당직실의 불이 전부 꺼져버렸다.
송연아는 순간 소름이 돋아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세...?”
송연아는 말을 채 끝나기도 전에 힘 있는 손에 눌려 책상 위로 넘어졌다. 책상 위에 있던 책들이 혼잡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지는 것도 잠시, 곧 차가운 비수가 목에 닿았다.
“조용히 있어.”
먹구름에 가려진 어두운 달빛에 의해 남자의 피투성이가 된 얼굴과 차가운 눈빛이 희미하게 보였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를 통해 남자가 심하게 다쳤다는 것을 쉽게 판단할 수 있었다.
좋은 의미로 피를 보고 칼을 쓰는 직업에 종사해서인지 송연아는 아주 차분했다. 그녀는 다리를 들어 낭심을 공격해 볼 생각이었는데 바로 들켜서 결박당하고 말았다.
“분명히 이쪽으로 왔는데...”
이때 당직실 밖에서 말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문을 사이 두고 들려오는 말소리에 마음이 급했는지 남자는 머리를 숙여 송연아와 입술을 겹쳤다.
당황한 송연아는 당연히 그를 밀어내려고 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남자는 재빨리 비수를 거뒀다, 혹시라도 예상치 못한 사고가 생길까 봐서 말이다. 그는 애초부터 송연아에게 해를 가할 생각이 없었다.
끼익...
당직실 문이 천천히 열리는 것을 듣고 송연아는 본능적으로 남자의 목을 끌어안고 키스를 받아줬다. 그리고 둘만 들을 수 있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도와줄게요.”
남자는 뜨거운 숨결과 함께 더 적극적으로 반응했다. 그리고 매력적인 중저음으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당신을 꼭 책임질게요.”
송연아는 그저 단순한 연기라고 생각하는 반면 남자는 꽤 진지해 보였다.
곧이어 문이 열리고 시끄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송연아는 급한 대로 영화에서만 들어본 적 있는 신음을 냈다. 그러자 남자뿐만 아니라 문가에 서 있는 사람마저 가슴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이고, 역시 배운 사람이 더 놀 줄 아네.”
열린 문틈 사이로 복도의 불빛이 들어와 두 사람을 비췄다. 남자는 자세를 낮춰 송연아를 자신의 그림자 속에 가뒀고, 멀리서는 한데 엉킨 두 사람의 몸집만 흐릿하게 보일 뿐이었다.
“저 사람 강세헌은 아닐 거야. 강세헌 그 자식은 피투성이가 돼서 도망갈 힘이 있는 것만으로도 용하니까.”
“그나저나 여자 신음이 진짜 죽여주지 않아?”
“목숨이 간당간당한 상황에서 그런 소리가 나와?”
문이 닫히고 당직실에는 또다시 어둠이 깔렸다. 고요한 병원에는 점점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와 두 사람의 숨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남자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신을 쫓고 있는 사람이 멀어지고, 더 이상 연기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하지만 그는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욕망이 그의 이성을 삼키고 있었다.
점점 높아지는 온도와 끈적한 분위기에 송연아 마음속의 반항심이 갑자기 들끓기 시작했다. 그녀는 선택권을 빼앗긴 인생이 불 꺼진 당직실보다 더 어둡게 느껴졌다. 그래서 복수라도 하는 기분으로 남자의 손길을 전부 받아줬다.
...
얼마 후, 남자는 송연아의 볼에 짧게 뽀뽀하며 말했다.
“꼭 다시 만나러 올게요.”
남자는 빠른 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송연아는 책상에 누운 채로 한참이나 움직이지 못했다. 오랜 시간 동안 책상에 쓰린 허리는 아직도 화끈거리고 있었다.
이때 책상 변두리에서 애써 중심을 잡고 있는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락 버튼을 누르자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송닥, 응급실에 TA 환자가 왔는데 상태가 좋지 않아요. 빨리 와봐요.”
송연아는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네, 금방 갈게요.”
송연아는 전화를 끊은 다음에도 넋이 나간 채로 누워 있었다. 마구 풀어헤친 옷자락과 힘이 풀려버린 몸은 조금 전의 일이 꿈이 아닌 현실임을 알려주고 있었다. 그녀는 신혼 첫날밤에 낯선 남자와 살아생전 해본 일 중에서 가장 반항적인 일을 하고 만 것이다.
지금은 사적인 감정에 휩싸일 때가 아니기에, 송연아는 빠르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응급실로 갔다. 그렇게 하룻밤 꼬박 응급실에서 보내고 다시 당직실로 돌아오자, 처참하게 바닥에 떨어져 있는 책들이 그녀를 반겨줬다.
송연아는 어젯밤 일이 다시 생생하게 떠오르기 시작해 주먹을 꼭 쥐었다.
“송닥, 어제는 진짜 고마웠어요.”
최지현이 미소를 지으면서 인사하자, 송연아도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아니에요.”
“당직 시간은 끝났으니까, 얼른 돌아가서 쉬어요. 근데...”
최지현은 난장판이 된 당직실을 둘러보며 물었다.
“이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송연아는 복잡한 표정을 숨기기 위해 머리를 돌리며 말했다.
“응급 콜을 받고 급하게 나가다 보니 이렇게 된 줄도 몰랐네요. 그럼 저는 이만 가볼게요.”
최지현은 이해가 안 되는 눈빛이었지만 개의치 않고 떨어진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때 병원장이 강세헌의 비서 임지훈과 함께 당직실 문 앞에 나타났다.
제2화
병원장이 말했다.
“이쪽이 어제 당직을 선 최지현 선생이에요.”
임지훈은 성큼성큼 걸어가 최지현의 명패를 확인하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잠깐 같이 가주셔야겠습니다.”
최지현은 넋이 나간 얼굴로 물었다.
“어딜요...?”
“아이고, 최 선생. 일단 빨리 따라와, 대표님이 기다리실라.”
병원장은 최지현을 끌고 당직실에서 나왔다. 두 사람이 그녀를 데리고 간 곳은 다름 아닌 병원 원장실이었다.
강세헌은 깔끔한 정장을 입고 원장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의 창백한 안색은 자세히 관찰하지 않으면 그저 타고난 하얀 피부로 보였다. 병원 전체를 뒤덮은 소독수 냄새 덕분에 다행히 피비린내는 하나도 나지 않았다. 강세헌은 그렇게 차가운 아우라를 뿜어내며 소파에 앉아 기다리고 있었다.
임지훈은 강세헌의 뒤로 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병원의 CCTV는 어젯밤 범인들이 일부러 고장 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어제 당직을 선 최지현 선생님입니다. 제가 직접 병원장님과 당직 기록을 확인했습니다.”
강세헌은 머리를 들어 최지현을 바라봤다. 최지현은 몸을 흠칫 떨며 생각했다.
‘이 사람은 천주그룹 대표잖아?!’
“어젯밤 저를 도와준 사람이 당신이에요?”
강세헌은 최지현을 훑어보며 물었다. 감히 그를 직시할 용기가 없었던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답했다.
“네... 맞아요.”
어젯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강세헌과 아는 사이가 되면 많은 편리를 얻을 수 있었기에 그녀는 큰 고민 없이 머리를 끄덕였다.
병원에서는 요즘 군병원으로 보낼 인턴을 선출하고 있었다. 인턴이라고 말하기는 하지만, 정작 가면 계속 남아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므로 경쟁력이 아주 높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권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군병원에 가는 것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뭐든 다 들어줄 수 있으니까. 물론 결혼도 포함해서요.”
최지현을 마주하니 어젯밤 일이 다시 떠올랐던지, 강세헌의 표정은 훨씬 부드러워졌다.
“아... 그게...”
갑작스레 찾아온 행운에 최지현은 멍한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생각 정리가 끝나면 다시 연락해요.”
강세헌은 이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임지훈이 그녀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줬다.
“대표님, 제가 주차장까지 모실게요.”
“됐어요.”
강세헌은 차가운 표정으로 병원장의 호의를 거절했다. 그러다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 발걸음을 멈췄다.
“최지현 씨라고 했던가요? 앞으로 잘 부탁드릴게요.”
“그럼요. 걱정하지 마세요.”
병원장이 웃으며 답했다.
임지훈은 아무도 듣지 못할 타이밍에 다가가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은 어제 이미 결혼하셨어요...”
최지현과의 결혼은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짐짝처럼 떠맡게 된 여자가 떠오르자, 강세헌의 표정은 무섭게 식어갔다.
“죽고 싶어서 환장했군.”
임지훈은 몸을 흠칫 떨었다. 그가 말하는 상대가 겁도 없이 시집온 여자인지, 일을 이렇게 만든 배후인지 알 수가 없었다.
...
송연아는 별장으로 돌아왔다, 바로 남편과의 신혼집 말이다.
“사모님, 어젯밤에는 어디로 가셨어요?”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도우미 오은화가 마중했다.
“당직 날이라 병원에 있었어요.”
송연아는 피곤한 기색으로 말했다. 오은화는 더 이상 묻지 않고 그녀를 위층으로 안내했다. 오은화가 준비한 따듯한 물에 몸을 담그자, 피곤이 풀리는 동시에 어젯밤 일이 다시 떠올라 그녀의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송연아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었다. 상대가 누구인지도 모르고 몸을 줘버렸다는 생각에 마음이 복잡했다. 게다가 그녀는 유부녀였으니 말이다. 그녀는 남편 강세헌에게 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다.
샤워를 끝낸 송연아는 옷을 입고 다시 나가려고 했다. 오은화가 보더니 후다닥 걸어오며 물었다.
“사모님, 또 어딜 가세요? 아침은 안 드세요?”
송연아는 시계를 힐끗 보며 말했다.
“네, 이제는 출근해야 해서요.”
오은화는 송연아가 의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가 바쁜 것도 충분히 이해되었다. 자신이 모시는 사모님이 의사라는 생각에 약간 뿌듯해진 그녀는 주방에서 우유를 들고 왔다.
“따듯한 우유예요. 이거라도 마시고 가세요.”
오은화의 친절에 마음이 따듯했던 송연아는 머리를 숙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오은화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그러고는 빈 컵을 받아 들고 다시 주방으로 들어갔다.
병원에 도착한 송연아는 바로 출근하는 것이 아닌 입원 병동으로 갔다. 중환자실에 있는 어머니의 상태를 보기 위해서다.
어머니의 상태는 전과 마찬가지로 엉망진창이었다. 심부전이 너무 심해서 이제는 심장이식만이 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다. 심장이식은 어마어마한 수술비가 필요했다. 이게 바로 송연아가 강씨 집안으로 시집간 이유이기도 하다. 송태범이 시집을 가지 않으면 수술비를 대지 않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는 어머니와 맞는 기증자만 나타나면 수술을 할 수 있었다. 송연아는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걱정하지 마요. 제가 꼭 낫게 해드릴게요.”
송연아는 이 세상에서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해 주는 사람은 어머니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이때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연아야, 지금 나 좀 도와줄 수 있어?”
제3화
전화를 건 사람은 송연아와 친하게 지내는 의대 선배 심재경이었다. 심재경은 그녀보다 두 학번 높았는데, 해외 연수를 다녀온 덕분에 꽤 높은 명성을 갖고 있었다. 두 사람은 대학 시절부터 좋은 관계를 유지해 지금껏 친구로 지내고 있었다.
“그럼요. 무슨 일인데요?”
“아주 중요한 환자가 갑자기 불러서 그러는데, 네가 대신 가줄 수 있을까? 내가 지금 도무지 시간을 낼 수 없어서 말이야.”
송연아는 시계를 힐끗 봤다. 오늘은 외래 없이 오후 수술만 있었기 때문에, 오전에 잠깐 나갔다 오는 것은 충분히 가능했다.
“네, 저 시간 돼요.”
“주소는 로즈가든 A동 306호야. 가서 임지훈 씨를 만나러 왔다고 하면 돼, 그럼 경비가 문을 열어줄 거야.”
“알겠어요.”
“오늘 일은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알겠지? 치료할 때도 최대한 말을 아끼는 게 좋을 거야.”
“명심할게요.”
전화를 끊은 송연아는 택시를 타고 로즈가든으로 향했다.
로즈가든은 고급 주택구로 주민의 프라이버시가 완벽하게 보장되었다. 입구에 도착하자 역시 경비가 막아서서 방문목적을 물었다. 임지훈 씨를 만나러 왔다고 하니, 그는 짧은 통화로 확인을 하고 그녀를 들여보냈다.
송연아는 306호 앞으로 와서 초인종을 눌렀다. 문을 열어주러 나온 임지훈은 심재경이 아닌 다른 사람이 온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누구...?”
송연아는 심재경의 말을 통해 환자가 프라이버시를 중요시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녀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마스크를 꼈다.
“심재경 선생님의 소개로 왔습니다.”
임지훈은 송연아가 들고 있는 약품 상자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고 있죠?”
“그럼요. 심 선생님한테서 다 들었어요. 비밀 유지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임지훈은 심재경이 보낸 사람이면 실력은 보증할 거라고 생각하고 집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는 송연아를 데리고 2층에 있는 한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은 커튼이 굳게 닫혀 있는 데다가 불을 켜지 않아서 낮인데도 불구하고 밤처럼 어두컴컴했다.
“이렇게 어두운 곳에서 어떻게 진찰하죠?”
강세헌은 여자의 목소리를 듣고 한쪽에 벗어뒀던 외투를 끌어와 얼굴을 가리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불 켜.”
임지훈은 전등 스위치를 눌렀다. 침실은 순식간에 눈부실 정도로 밝아졌다.
송연아는 얼굴을 가린 남자의 목소리가 왠지 모르게 익숙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다가갔다. 남자의 셔츠에는 반쯤 마른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그녀는 오래 관찰하지 않고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특별한 환자는 관찰 시간이 길어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송연아는 약품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가위를 꺼냈다. 그리고 상처 부위의 옷을 잘라내기 시작했다. 상처 부위에는 대충 처치를 한 것으로 보이는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를 잘라내자, 선명한 칼자국 두 개가 드러났다.
송연아는 가위를 내려놓고 상처 소독과 함께 봉합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빠르게 마취제를 준비하며 물었다.
“혹시 마취제 알레르기 있으세요?”
비록 수술이 필요할 정도로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봉합을 하기 위해서는 꼭 마취제가 필요했다.
송연아의 차분한 목소리는 어젯밤과 완전히 달랐다. 그래서 강세헌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짧고 차갑게 답했다.
“아니요.”
송연아는 이미 만들어 놓은 마취제를 봉합 부위에 놓았다. 약 2분 후, 약효가 나타나기 시작하고 그녀는 빠르게 상처를 봉합하기 시작했다. 모든 과정은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았다.
상처 처지를 끝낸 송연아는 피범벅이 된 손을 들며 말했다.
“잠시 화장실을 쓸 수 있을까요?”
“화장실은 아래층에 있어요.”
임지훈이 답했다. 그리고 송연아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것을 확인하고 방문을 닫았다.
“대표님, 조사 끝났습니다. 범인은 역시 장진희 씨가 보낸 것이었습니다. 천주그룹에 심어놓은 스파이가 적발되자 급한 마음에 대표님의 목숨을 노린 것 같습니다.”
강세헌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엉망진창이라고 할 수도 있는 옷차림은 그를 병약하게 만들기는커녕 예리한 기운만 더해줬다.
강세헌은 심연과 같은 눈으로 임지훈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그 여자랑 연관 되어 있는 건가?”
임지훈은 잠깐 멈칫하더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장진희 씨가 송태범 씨와 만난 적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이건 저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기는 한데, 송태범 씨는 도대체 왜 강세욱 씨가 아닌 대표님을 선택한 걸까요? 혹시 이것 또한 장진희 씨의 계략은 아닐까요?”
“이렇게 많은 선물을 한꺼번에 보내줬으니 나도 답례를 해야겠어. 이기적인 사람이라는 말은 듣기 싫으니까.”
강세헌은 자신이 잠깐 해외로 출장 간 사이에 이렇게 많은 일이 생길 줄은 몰랐다. 그는 싸늘한 눈빛으로 느긋하게 말했다.
“강세욱이 중앙로에서 ‘트랜스’라는 클럽을 운영한다고 했던가?”
임지훈은 바로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답했다.
“네, 천주그룹에서 설 자리를 잃고 클럽 수익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 같습니다. 만약 클럽이 사라진다면 꽤 난감한 처지에 놓일 것입니다.”
“그래, 이만 가봐.”
강세헌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지훈이 계단을 내려가고 있을 때, 송연아는 마침 올라가고 있었다. 임지훈은 심재경이 이미 당부했을 것으로 여기고 그저 짧게 말했다.
“만약 오늘 일을 외부에 발설한다면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강세헌이 다쳤다는 사실이 장진희, 강세욱 모자의 귀에 들어간다면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게 뻔했다.
“그 점이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저는 약품 상자만 찾아들고 바로 떠날게요.”
송연아는 머리를 숙인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침실 안의 남자는 문을 등진 채 앉아 있었다. 피 묻은 셔츠를 벗어 던지자 넓고 단단한 등이 드러났다. 군살 하나 없는 남자의 등에서 근육들이 강렬하게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다.
“언제까지 가만히 서 있을 거예요?”
남자는 등진 상태에서도 송연아의 시선을 느낀 듯 비웃음 섞인 말투로 말했다. 자신이 잠깐 넋이 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린 송연아는 부랴부랴 시선을 피했다.
제4화
송연아는 머리를 숙인 채로 약품 상자를 정리했다. 동시에 의사로서의 본분을 잊지 않고 당부를 남기기도 했다.
“상처 부위에 당분간은 물이 닿으면 안 돼요. 소독은 하루에 한 번 하시고, 옷은 넓게 입으세요.”
송연아는 또 약을 내려놓으며 이어서 말했다.
“이건 먹는 약이고, 이건 바르는 약이에요.”
“네.”
강세헌은 머리도 돌리지 않고 짧게 답했다.
송연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밖으로 나섰다. 병원으로 돌아갔을 때는 이미 점심 11시가 되었다. 점심밥은 식당에서 대충 때우고 사무실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병원장의 호출을 받고 원장실에 먼저 가게 되었다.
“군병원 인턴은 최지현 선생으로 결정됐어.”
병원장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송연아는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건 제가 가기로 한 거잖아요.”
“송 선생도 알다시피 우리 병원의 대부분 시설이 다 천주그룹에서 기증한 거야. 천주그룹의 강세헌 대표가 최 선생을 잘 부탁한다고 말했는데, 나도 무언가 보여줘야 하지 않겠어?”
강세헌의 이름을 들은 송연아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얼마 전 강세헌의 법적 아내가 되었다. 비록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신문과 TV에서는 익히 본 적 있는 얼굴이다. 그런데 강세헌과 최지현은 도대체 무슨 사이란 말인가?
송연아는 애써 마음속의 당황함을 참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그래요?”
“너무 실망하지 마. 송 선생 실력 좋은 건 우리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니까.”
병원장이 위로를 건넸다. 송연아는 젊은 의사 중에서 가장 실력이 좋았기 때문에, 그도 듣기 좋은 소리를 하는 것이 아닌 진심으로 하는 말이었다.
송연아는 머리를 숙이며 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강세헌은 다른 여자를 도와줄지언정, 갑자기 생긴 아내에게 관심이 없는 듯했다.
“저는 수술이 있어서 이만 가보겠습니다.”
송연아는 더 이상 만회할 수 없는 일이라고 판단하고 순순히 물러났다. 병원장도 한숨을 쉬며 그녀를 잡지 않았다.
오후에 잡힌 수술 일정을 전부 끝낸 송연아는 기진맥진한 채로 의자에 앉아 휴식하고 있었다. 이때 최지현이 들어오며 말했다.
“송닥. 가요, 제가 밥 살게요.”
“미안해요. 저 오늘은 다른 할 일이 있어요.”
송연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실 두 사람은 그다지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같은 대학을 나오기는 했지만 병원에 와서 알게 된 경우라 말도 놓지 않았다. 최지현은 억센 성격에 나서기 좋아한다. 반대로 송연아는 내성적인 성격에 혼자 있는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두 사람에게는 친해질 기회조차 없었다.
“그래요? 사실 저 할 말이 있는데...”
최지현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송연아는 가운을 벗어서 옷걸이에 걸며 머리도 돌리지 않고 말했다.
“말해요.”
왠지는 모르겠지만 최지현이 강세헌과 아는 사이라는 것을 알게 되자 더욱 반감이 생겼고 멀리해야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송닥도 들었죠? 진짜 미안해요. 저도 원장님이 그런 결정을 할 줄은 몰랐어요.”
“괜찮아요.”
송연아의 단호한 태도에 최지현은 눈을 데굴데굴 굴리다가 말했다.
“그리고 어제 저 대신 당직 선 일은 비밀로 해줄 수 있어요? 군병원으로 가기 전에 구설수를 만들고 싶지 않아서요.”
약간 억지스러운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그래도 송연아는 계속 말하기 귀찮아서 머리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어요.”
누구나 급한 일이 있기 마련이기에 대신 당직을 서는 것은 자주 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송연아는 개의치 않게 여겼다.
병원 밖.
해가 저물고 가로등이 켜졌다.
병원 밖에는 검은색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심재경은 차 안에서 자랑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내 후배 실력 좋지?”
강세헌은 등받이에 기대서 송연아의 빠릿빠릿한 손놀림을 떠올렸다. 차분하고 깔끔한 손놀림으로 볼 때 확실히 실력 좋은 사람이었다.
“대표님, 최지현 씨가 왔습니다.”
운전석에 있던 임지훈이 말했다. 그러자 강세헌은 차 창문을 내렸다.
그들을 향해 걸어오는 최지현을 발견한 심재경은 미간을 찌푸렸다.
“최지현?”
“아는 사이입니까?”
임지훈이 물었다.
“아, 네. 대학 후배예요.”
심재경의 말에 강세헌은 무언가 떠오른 듯 반짝이는 눈으로 머리를 들었다.
‘어젯밤 나를 살려준 사람과 오늘 상처를 처치해 준 사람이 같은 사람이라고?’
임지훈도 놀란 표정으로 혼잣말했다.
“이건 연애하라는 신의 계시인가...”
“뭐라고요?”
심재경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대표님.”
이때 최지현이 걸어와서 그들의 대화를 끊었다.
제5화
심재경은 송연아를 만나러 오는 길에 우연히 강세헌의 차를 얻어 타게 되었다. 최지현이 다가온 것을 보고 그는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난 먼저 갈게.”
심재경이 떠난 후, 최지현은 그의 자리로 와서 앉았다. 강세헌이 사람을 잘못 봤다는 것을 눈치 챈 그녀는 속으로 약간 불안하기는 했지만 강세헌이 줄 수 있는 도움을 생각했을 때 도무지 그를 놓칠 수 없었다.
병원장은 송연아의 능력을 오래전부터 인정해 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군병원의 인턴 기회를 그녀에게 넘겨준 건 당연히 강세헌 덕분일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최선을 다해 강세헌을 구워삶아 보기로 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그냥 날려 보낼 멍청이는 없을 것이다.
“저 생각 정리 끝났어요.”
최지현은 강세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강세헌은 그녀가 이렇게 빨리 결정할 줄 모른 듯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답을 기다렸다.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강세헌이 결혼 얘기까지 꺼낸 걸 보면 어젯밤 큰일이 일어난 게 분명했다. 최지현이 가장 원하는 것이 결혼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욕심쟁이로 보이지 않기 위해 약간의 밀당을 하기로 했다.
“그저 대표님이랑 평범한 친구가 되고 싶어요.”
강세헌은 입술을 깨물며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고는 차분한 말투로 물었다.
“확실해요?”
최지현은 머리를 끄덕였다. 어젯밤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르기에 아직은 소극적으로 움직여야 했다.
“알겠어요. 지현 씨의 선택을 존중하죠.”
...
병원 안.
송연아는 휴게실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는 오늘따라 집으로 돌아가기 너무 싫었다. 왜냐하면 그곳은 강세헌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병원에서 시간을 때울 수밖에 없었다. 이참에 공부를 더 할 수 있어서 나름 좋기도 했다.
똑똑.
누군가가 노크하고 휴게실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다름 아닌 심재경이었다.
심재경은 책을 읽고 있는 송연아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 숨어서 뭐 해?”
“안 숨었거든요.”
손연아는 책을 덮어 책상 위에 내려놓고는 몸을 일으켰다.
“선배는 휴게실에 무슨 일이에요?”
“당연히 너 찾으러 왔지. 도움을 받았으면 감사 인사를 해야 할 거 아니야. 가자, 내가 비싼 거 사줄게.”
“됐어요.”
“왜? 혹시... 무슨 안 좋은 일 있었어?”
심재경은 송연아의 울적한 표정을 발견하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아니에요.”
“아니긴.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그냥...”
송연아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선배랑 같은 병원 못 갈 것 같아요.”
심재경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화난 말투로 말했다.
“병원장이 그래? 그럼 너 대신 누가 오는데? 아니다, 내가 직접 찾아가서 물어봐야겠어.”
송연아는 심재경의 팔을 잡으며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너 군의관이 되는 게 꿈이라며? 군병원으로 못 오면 꿈은 어떻게 이루자고 그래?”
심재경은 답답하게 구는 송연아가 이해되지 않았다. 지금껏 군의관이 되기 위해 피 타는 노력을 해왔으니 말이다.
송연아는 머리를 숙였다. 그녀도 가능하다면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현실이 따라주지 않는 것을 어떡하겠는가. 게다가 그녀는 심재경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심재경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알겠어, 안 가면 되잖아.”
“그럼 우리 비싼 거 먹으러 가요.”
“다음에 먹자. 다음에 꼭 사줄게.”
심재경은 분명히 누군가가 뒤에서 수를 썼으리라 생각했다. 이토록 불공평한 대우에 송연아는 순순히 물러날 수 있을지 몰라도 그는 절대 두고 볼 수 없었다.
“난 다른 할 일이 있어서 먼저 갈게.”
심재경은 분노 섞인 발걸음으로 원장실을 향해 걸어갔다. 그는 실력 좋은 의사로 평가받는 한편, 재벌 2세이기도 하기에 권세를 상대하는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다.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던 병원장은 갑자기 쳐들어온 심재경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통화를 끊었다.
“심 선생,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군병원 인턴 송연아로 결정 났잖아요. 근데 왜 바뀐 거예요? 어디서 무슨 말을 들었길래 갑자기 바뀐 거냐고요?”
병원장은 난감한 표정으로 설명했다.
“이번 일은 나도 어쩔 수 없었어. 강세헌 대표가 직접 최지현 선생을 잘 부탁한다고 하는 걸 무시할 수는 없잖아.”
강세헌의 이름을 들은 심재경의 얼굴은 보기 좋게 구겨졌다.
“혹시 불만이 있으면 강 대표한테 말해.”
어차피 강세헌과 심재경 둘 다 병원장의 위치에서는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책임을 전가했다.
심재경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 상태에서 강세헌의 차가 세워져 있는 대문으로 향했다. 최지현은 마침 그의 차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가자, 최지현은 손을 들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어.”
심재경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몰라 먼 곳을 바라보며 짧게 답했다. 최지현이 기분 좋게 떠나는 것을 보고 심재경은 화가 치밀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잘 아는 사람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 더욱 답답했다.
강세헌은 단 한 번도 여자에게 관심을 보인 적 없었다. 그런 그가 최지현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는 친구로서 당연히 일을 망칠 수 없었다. 어쩌면 이는 강세헌의 혼사가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나 진짜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데, 왜 하필 최지현이야?”
제6화
강세헌은 눈썹을 치켜들며 압도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뭐라고?”
“됐어. 네 행복을 위해서라면 화를 참는 것쯤은 당연히 해줘야지.”
강세헌은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심재경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만 가지.”
임지훈이 차를 몰고 멀어져갔다.
심재경은 송연아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그가 마침 휴게실로 돌아가 송연아를 찾으려고 할 때, 그녀가 병원 안에서 걸어 나왔다.
“연아야.”
“선배, 저 이제 돌아가려고요.”
미소를 짓는 송연아의 모습에 심재경은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네 어머니 심장 기증자 말이야, 내가 최선을 다해 찾아볼게.”
어머니 얘기가 나오자 송연아는 몸이 흠칫 떨렸지만, 그래도 애써 차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파르르 떨리는 목소리는 숨길 수 없었다.
“정말요?”
심장이식은 기증자를 찾기 어렵기로 유명했다. 어떤 환자는 사망할 때까지도 기증자를 찾지 못하기도 한다.
“감사해요, 선배.”
송연아는 감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눈가가 점점 붉어졌다.
“우리 사이에 감사는 무슨...”
심재경은 약간 미안한 감이 들었다. 만약 강세헌이 없었더라면 그녀는 꿈과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아니에요.”
송연아는 송씨 저택으로 돌아가는 것이 아니었기에 어쩔 수 없이 거절했다. 심재경도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
심재경과 헤어진 후, 송연아는 택시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왔다. 강세헌이 영원히 오지 않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조금 편해졌다.
오은화는 처음보다 표정이 훨씬 풀린 송연아를 보고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세요? 기분 좋아 보이네요.”
“그냥 문득 아주머니랑 둘이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요.”
오은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때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저는 뭐죠?”
송연아는 신발을 갈아 신다가 말고 거실에 서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남자는 혐오 섞인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문과 TV에서 자주 본 익숙한 얼굴에 그가 자신의 ‘남편’이라는 것을 알아보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당신이... 어떻게 왔어요?”
송연아는 강세헌이 그토록 끔찍하게 여기는 신혼집에 올 줄은 몰랐다. 결혼식도 참석하지 않은 사람이 아니던가.
강세헌은 어두운 안색으로 물었다.
“내가 내 집에 오는데 허락 맡을 건 없지 않나요?”
송연아는 머리를 숙였다. 따지고 보면 확실히 그녀가 ‘강세헌의 집’에 침입한 것이었다.
“사인해요.”
강세헌은 이혼협의서를 테이블 위로 던졌다. 송연아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덤덤하게 협의서를 바라봤다. 그래도 그녀는 어머니의 수술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싶었다.
“강...”
송연아는 강세헌을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호칭을 빼고 말했다.
“혹시...”
“이혼하기 싫어요?”
강세헌은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딱 잘라 말했다. 이혼협의서에 순순히 사인하지 않을 줄은 알았다. 순순히 사인할 여자면 이토록 비겁한 방식으로 결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 결정 후회하게 될 거예요.”
강세헌은 성큼성큼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가 오해한 것을 보고 송연아는 거실 안으로 들어가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문턱에 발이 걸려 핸드백과 함께 넘어지고 말았다.
송연아는 황급히 물건을 주워 담기 시작했다. 그러다 주변에서 찾을 수 없는 한 가지 물건을 찾기 위해 머리를 들었는데. 절대 들켜서는 안 될 물건이 강세헌의 발끝에 떨어진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황급히 손을 뻗어 물건을 감추려 했다.
이때 강세헌이 발을 뻗어 약을 밟았다. 송연아는 머리를 들었다. 강세헌은 그녀의 긴장을 보아낸 듯 허리를 숙여 약을 주워 들었다. 두 알씩 포장된 약은 한 알을 먹고 한 알이 남아 있었다. 낯선 이름이기는 하지만 명확한 설명이 적혀 있었다.
72시간 긴급 피임약.
바보도 이걸 보고 무슨 영문인지 알아차릴 것이다. 강세헌은 당황한 표정의 송연아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씩 올렸다.
“신혼 첫날 밤에 다른 남자를 만난 건가요?”
강세헌이 송연아에 대한 혐오는 더욱 깊어지기만 했다.
송연아는 주먹을 꼭 쥐며 손 떨림을 숨겼다. 그의 질문에 그녀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다른 남자를 만난 건 사실이기 때문이다.
“저도 이렇게 결혼할 생각 없었거든요.”
송연아의 모습을 보고 강세헌은 구역질이 나올 것만 같았다. 그는 약을 송연아의 얼굴을 향해 던졌다. 예리한 모서리에 스치면서 생긴 상처에서는 피가 흘러내렸다.
송연아는 눈을 꼭 감았다. 얼굴에 난 상처보다 강세헌의 모욕이 더욱 마음 아팠다.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며 약을 주워 들었다. 손에 힘이 너무 들어간 나머지 손바닥이 아프기 시작했다.
“남자를 그렇게 원해요? 좋아요, 그럼 원하는 만큼 만족하게 해줄게요.”
강세헌은 이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가 한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이튿날 바로 알 수 있었다.
제7화
이튿날.
송연아가 출근 준비를 할 때, 임지훈이 별장 앞에 나타났다.
“송연아 씨, 저는 강 대표님의 비서 임지훈입니다. 잠깐 따라와 주시죠.”
임지훈이 문밖에 있는 것을 본 송연아는 황급히 머리를 숙여 얼굴을 숨겼다. 지난번 심재경 대신 환자를 보러 갔을 때 본 적 있는 익숙한 얼굴이었다.
‘이 사람이 강세헌의 비서라고? 그럼 설마 다친 사람이 강세헌이었던 건가?’
“이쪽입니다.”
임지훈은 송연아가 가만히 있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말했다. 그녀는 잠깐 멈칫하다가 답했다.
“저 출근해야 해요.”
이는 명백한 거절이었다. 그녀는 강세헌을 만나러 가고 싶지 않았다.
“괜히 대표님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송연아 씨만 손해를 볼 거예요. 병원에서 잘리기도 어려운 일은 아니겠죠. 오늘 하루를 위해 앞길을 망치고 싶으세요?”
임지훈은 덤덤한 말투로 위협했다.
송연아는 주먹을 꼭 쥐었다. 아버지가 수술비만 내준다면 병원비와 간호인은 그녀의 월급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병원 일이 그만큼 그녀에게 중요했기에 결국 임지훈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그럼 잠깐 기다려 줄래요? 병원에 얘기는 해놔야 해서요.”
송연아는 위층으로 올라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혹시 몰라 연습용 메스를 가방 안에 넣었다.
송연아는 임지훈과 함께 클럽으로 왔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이런 곳에 와본 적 없었다. 이곳에는 끈적하게 붙어 있는 남녀가 도처에 널려 있었다. 이때 모퉁이에 서서 수다를 떨고 있는 여자들의 말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위층 VIP 룸에 강세헌 씨랑 장사하는 그 남자가 왔대. 소문으로는 완전 상또라이라고 하던데?”
“아~ 저번에 상미 씨를 죽일 뻔했다던 그 변태?”
“맞아 맞아, 그 사람이야.”
“쯧쯧, 이번에는 또 누가 걸리려나. 우리는 아니었으면 좋겠다. 상미 씨 말이야, 목숨을 겨우 건지기는 했지만 평생 임신을 못 하게 됐다고 하더라고. 도대체 무슨 짓을 했기에 그 지경이 된 거지?”
송연아는 몸이 저릿저릿해지는 것 같았다. 특히 여자들의 수다에서 강세헌의 이름을 들었을 때는 손바닥에서 식은땀까지 나기 시작했다.
얼마 후, 엘리베이터가 도착하고 임지훈은 창백한 안색의 송연아를 향해 말했다.
“이혼협의서에 사인만 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예요. 그러니 빨리 사인하세요.”
이번 혼사는 강씨 가문에서도 마지못해 허락한 것이었다. 그러니 송연아가 이혼협의서에 사인만 한다면 쉽게 해결될 일이다.
송연아는 몸을 파르르 떨었다. 만약 그녀에게 선택권이 있었다면 애초에 강씨 가문에 시집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강세헌에게 이런 협박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송연아는 심호흡 하며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섰다. 임지훈은 미간을 찌푸리기는 했지만 더 이상 말하지 않고 그녀를 화려한 VIP 룸에 데려다줬다. 어두운 조명의 프라이빗 룸에는 강세헌과 낯선 남자가 함께 앉아 있었다.
“아이고.”
남자는 적나라한 눈빛으로 송연아를 위아래로 훑어봤다.
“괜찮네. 피부가 하얗고 살결이 고운 것이 품에 안을 맛이 나겠어. 아가씨, 이쪽으로 와서 앉아요.”
송연아는 강세헌을 바라봤다. 그는 우아하게 다리를 꼬고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환경 탓에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다.
남자는 기다리다 못해 벌떡 일어나더니 송연아의 어깨를 잡으며 강세헌에게 말했다.
“이런 여자는 어디서 났어? 화장품 냄새가 고약하게 나는 여자보다 훨씬 났네. 깨 물면 물이 나올 것 같은 것이 딱 내 취향이야.”
강세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행동을 묵인이라도 하는 듯이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송연아는 식은땀이 나는 손으로 가방을 꼭 쥐었다.
“술 마실 줄 알아요?”
남자는 송연아의 허리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의 행동이 역겨웠던 송연아는 옆으로 피하면서 말했다.
“아니요.”
“마실 줄 몰라도 괜찮아요. 내가 가르쳐 주면 되지.”
남자는 술을 한가득 따라서 송연아의 입가에 갖다 댔다. 송연아는 당연히 피하려고 했지만, 남자가 강한 힘으로 누르고 있는 탓에 꼼짝할 수 없었다.
“이거 놔요...!”
“이건 당신이 응당 해야 하는 일이에요.”
강세헌은 몸을 앞으로 기울이며 말했다. 은은한 조명하에 그의 이목구비는 더욱 선명하게 보였다.
“못하겠으면 꺼지던가요.”
송연아는 강세헌이 기껏해야 자신을 쓰레기 취급할 줄 알았다. 그가 이토록 비열한 수까지 쓸 줄은 누가 알았겠는가.
“제가 마실게요.”
송연아는 남자가 건네는 술잔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잠깐 멈칫하다가 단번에 원샷 해버렸다. 이는 그녀의 첫술이었다. 목구멍부터 위까지 전부 타들어 가는 듯 한 느낌에 그녀는 미간을 찌푸렸다.
남자는 벌써 흥분했는지 송연아를 데려가려고 했다.
“세헌아, 이 여자는 내가 데려간다?”
송연아는 깜짝 놀란 표정으로 도망가려고 했다. 그렇게 머리를 드는 순간 칠흑같이 어두운 강세헌의 눈과 마주쳤다.
‘일부러 이런 일을 만들려고 나를 불러왔나?’
강세헌은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마음대로 해.”
남자는 헤벌쭉해서 송연아를 끌어안았다. 송연아도 반항하지 않고 그를 따라나섰다.
이때 임지훈이 다가와서 말했다.
“대표님, 이거 괜찮은 거 맞아요? 송연아 씨...”
임지훈은 아무리 송연아가 밉다고 해도 이런 방식으로 보복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강세헌은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술을 따르며 말했다.
“괜찮아. 애초에 깨끗한 여자가 아니니까.”
임지훈은 놀란 표정으로 강세헌을 바라봤다. 송씨 가문에서 순결을 잃은 여자를 시집보낼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는 잠깐이나마 송연아를 동정했던 자신이 한심했다. 그녀는 애초에 동정할 가치조차 없는 여자였다.
“제가 이혼협의서에 사인하면 돌아갈 수 있다고 했는데도 협의서 얘기는 안 했나 보네요. 대표님, 혹시...”
“이만 돌아가지.”
강세헌이 임지훈의 말을 끊었다. 그는 송연아의 얘기는 더 이상 듣기 싫은 표정이었다. 임지훈은 말없이 앞장서서 문을 열었다.
강세헌은 차에 앉아 빠르게 지나가는 가로등을 바라봤다. 머릿속에서는 고훈의 품에 안겨 간 송연아로 가득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면서도 순순히 따라간다고? 무슨 여자가 이래...’
“차 돌려.”
임지훈은 잠깐 멈칫하더니 금방 그의 뜻을 알아차리고 클럽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클럽에는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강세헌의 안색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임지훈은 눈치껏 가장 빠른 속도로 별장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별장에도 역시 송연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임 비서, 지금 당장...”
강세헌이 마침 말하려고 할 때, 문을 여는 소리와 함께 송연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주머니...”
술을 마실 줄 몰랐던 송연아는 한 잔만으로도 잔뜩 취해 있었다. 만약 의사 공부까지 버텨낸 타고난 자제력이 없었더라면 집까지 돌아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아...”
송연아는 휘청거리며 오은화를 찾다가 거실에 서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제8화
조금 전 자신을 흔쾌히 변태에게 넘겨준 강세헌을 발견한 송연아는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강세헌?”
송연아는 강세헌을 손가락질하며 집 안으로 들어섰다. 술 덕분에 담이라도 커졌는지 지금만큼은 그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야! 이 개새끼야!”
강세헌의 표정은 완전히 굳었다. 임지훈과 오은화는 곁에서 숨소리도 내지 못하고 있었다. 송연아는 휘청휘청 안으로 들어와 강세헌의 멱살을 잡았다.
“나라고 너랑 결혼하고 싶은 줄 알아? 너 따위랑 결혼하고 싶은 줄 아냐고?!”
코를 찌르는 술 냄새에 강세헌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시선에는 약간의 분노가 담겨 있었다. 그는 송연아의 팔목을 잡으며 말했다.
“송연아 씨, 당신 미쳤어요?”
이는 송연아가 자신의 멱살을 잡은 것이 아닌 아무 남자나 따라간 것에 대한 질책이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송연아의 타협이었지 고집이 아니었다.
솔직히 송연아가 고훈을 따라 나갈 때, 그는 약간 후회되기도 했다. 어찌 됐든 송연아는 그의 서류상 아내였으니 말이다.
“미친 건 당신이지.”
송연아는 술김에 강세헌의 가슴을 내리치기 시작했다. 이로써 자신을 골탕 먹인 못된 남자에게 복수라도 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강세헌은 싸늘한 표정으로 송연아의 손목을 잡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송연아는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썼다.
“이거 놔. 이거 놔라고...!”
쾅당!
침실 문을 거칠게 걷어찬 강세헌은 송연아를 뿌리쳤다. 그러자 그녀는 중심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다가 맨바닥에 무릎을 찍었다.
“아!”
송연아는 무릎을 감싸 안고 신음을 냈다. 순간 강세헌의 머릿속에는 그날 밤 들었던 신음이 스쳐 지나갔다. 이는 최지현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한 목소리였다.
“강세헌 씨!”
송연아는 머리를 들어 강세헌을 노려봤다. 그가 폭력을 쓸 정도의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무릎에서는 피가 줄줄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아무 일도 없는 척 덤덤한 표정을 일관했다.
강세헌은 앞으로 몇 발짝 걸어가더니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바라봤다.
“송연아 씨, 취한 거 아니었어요?”
송연아는 확실히 취했다. 하지만 이성적인 사고가 안 될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고 했지만, 힘 풀린 다리는 또다시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아까와 같은 꼴을 당하지 않기 위해 손을 뻗어 아무 물건이나 잡고 중심을 잡았다.
따듯한 방 안에 갑자기 한기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천천히 머리를 든 송연아의 시야에는 감정 없이 차가운 눈빛이 들어왔다. 그녀는 이제야 자신이 강세헌의 바지를 잡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만약 벨트가 없었더라면 진작에 벗겨졌을 것이다. 깔끔하게 다려진 정장을 입은 강세헌은 유독 심란해 보였다.
송연아는 재빨리 손을 뗐다. 하지만 강세헌의 몸에는 이미 반응이 일어난 후였다. 그녀는 당황한 표정으로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죄송해요. 이,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강세헌은 피식 비웃으며 물었다.
“그래요?”
“네.”
‘잠깐...’
송연아는 잠깐 멈칫하다가 강세헌에게 물었다.
“그 말 무슨 뜻이에요?”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이미 다 들킨 마당에 연기할 필요가 있을까요?”
송연아는 몸이 파르르 떨렸지만 애써 침착한 표정을 유지했다. 아무래도 강세헌은 그날 밤의 약을 보고 단단히 오해한 것 같다. 아니, 과연 오해가 맞을까?
할 말이 없었던 송연아는 이 순간만큼은 너무 도망치고 싶었다.
“이제는 변명도 안 한다, 이건가요? 남자만 보면 덮치고 싶은 그 성정을 어떻게 참고 살았어요?”
강세헌은 싸늘한 눈빛으로 송연아의 목을 졸랐다.
“말해 봐요. 나랑 이혼도 하지 않고 다른 남자를 만나는 이유가 도대체 뭐예요? 혹시 바람 비우는 느낌을 즐기나?”
강세헌은 힘이 배어 있는 말투로 말했다. 그는 자기 아내가 누군가의 노리개라는 것을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이는 그가 한평생 겪어본 수모 중 가장 견딜 수 없는 것이었다.
송연아는 숨을 쉬기 위해 낑낑대면서 몸을 버둥거렸다. 그녀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고 산소를 원하는 듯 크게 헐떡였다. 그리고 겨우 한 글자를 뱉어냈다.
“놔...”
송연아의 버둥거림과 함께 셔츠 단추 두 개가 튕겨 나갔다. 강세헌의 시선은 벌려진 셔츠 사이로 드러난 쇄골과 검은색 레이스 속옷에 머물렀다. 강하게 숨을 헐떡이는 그녀의 모습은 시선을 떼려야 뗄 수가 없었다.
“끙...”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거친 숨소리는 말로 이루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매혹적이었다.
자신이 잠깐 넋이 나갔다는 것을 알아차린 강세헌은 미간을 찌푸리며 시선을 돌렸다. 목이 저절로 조여 드는 것 같았다. 그는 애써 자신의 충동을 억눌렀다. 이토록 방탕한 여자에게 충동이 생기다니 역겨울 따름이었다.
강세헌은 홧김에 송연아를 침대로 메쳤다. 그녀에 대한 분노가 아닌 자신에 대한 분노로 인해서 말이다.
‘이런 여자를 상대로 흥분하다니... 내가 미쳤나?’
강세헌은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갔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임지훈이 바로 마중했다.
“대표님.”
강세헌은 말없이 성큼성큼 밖으로 나갔다. 임지훈은 좁은 보폭으로 달려서 쫓아갔다. 그렇게 차에 올라타서 시동을 건 후, 임지훈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머리를 돌려 강세헌의 표정을 살폈다.
‘왜 갑자기 화가 나신 거지?’
별장 안.
드디어 숨을 쉴 수 있게 된 송연아는 크게 공기를 들이켰다. 이번에는 진짜 강세헌의 손에 죽는 줄 알았다.
“웁...!”
한숨 돌리고 나자, 안 그대로 위에서 파도치던 알코올이 밀려 나오려고 했다. 그녀는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가 미친 듯이 토하기 시작했다. 토하고 나니 다행히 속은 한결 편해졌다. 그렇게 샤워까지 하고 침대에 누운 그녀는 저도 모르는 새에 스르르 잠들어버렸다.
이튿날.
천주그룹.
강세헌이 회사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비서가 다가와서 말했다.
“대표님, 고 대표님이 오셨습니다.”
제9화
“돌려보내. 그리고 커피 한 잔 타 줘.”
강세헌은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그러고는 책상 앞으로 가서 앉았다.
“고 대표님이 만나주실 때까지 기다린다고 하셨습니다.”
강세헌이 비서를 힐끗 노려보자, 그는 머리를 숙였다.
“데려와.”
강세헌은 셔츠 단추를 풀며 말했다.
비서는 금방 커피와 함께 고훈을 데리고 들어왔다. 고훈은 잔뜩 화난 표정으로 물었다.
“그 여자 어디에서 일해?”
강세헌은 커피를 들며 비서에게 나가라는 눈치를 줬다. 그러고는 무심한 눈빛으로 고훈을 바라봤다.
“내 꼴을 봐봐!”
고훈은 자기 목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의 목에는 선명한 상처가 있었고, 손목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나 어제 과다 출혈로 죽을 뻔했다고!”
강세헌은 고훈의 상처를 바라보며 왠지 모를 희열이 느껴졌다. 그래서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르는 척 물었다.
“어쩌다 다친 거야?”
“그 여자 칼을 갖고 있었어. 칼을 어찌나 잘 쓰는지 순간 킬러한테 걸린 줄 알았다니까? 병원에 가니 의사가 조금만 더 깊이 그었으면 대동맥이 파열됐을 거래. 예쁜 여자랑 좀 즐겨보려다가 목숨만 잃을 뻔했지, 뭐. 그래서 그 여자 어디서 일하는데?”
강세헌은 고훈이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는 것을 듣고 기분이 아주 좋았다. 그는 천천히 등받이에 기대며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 여자를 찾아서 뭐 하게?”
“당연히 복수해야지.”
고훈은 이런 일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송연아에 대해 잘 아는 것 같은 강세헌에게 물으러 온 것이었다.
“복수를 하고 싶다면 직접 찾아.”
“하아... 됐어. 내가 알아 할게. 나한테 걸리면 과장이 아니라 진짜 손목을 잘라버릴 거야.”
고훈은 표독한 표정으로 말했다.
병원.
검사실에서 나온 송연아는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는 어딘가에서 싸늘한 냉기가 전해지는 것 같았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를 저주라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송닥, 오늘 최닥 송별회 하는 거 잊지 않았죠? 저녁 8시, 성한호텔 B동. 잊지 마요.”
“네.”
동료 한 명이 송연아에게 말했다. 최지현이 주인공인 회식에 죽도록 가기 싫었지만 어쩔 수 없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짧게 답했다. 최지현과 강세헌의 사이를 떠올리자 그녀는 또 식은땀이 나는 것만 같았다.
저녁 8시, 송연아는 약속대로 송별회 장소에 도착했다. 그녀는 안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최지현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멈춰 섰다. 최지현 뒤로 강세헌도 차에서 내렸다.
송연아는 재빨리 기둥 뒤에 몸을 숨겼다. 그러고는 몰래 머리를 내밀어 두 사람을 관찰했다. 이렇게 보니 두 사람은 아주 잘 어울렸다. 강세헌이 최지현을 따라 이런 곳까지 오는 걸 보면 많이 좋아하는 듯하다.
‘오늘 송별회는 대부분 병원 사람이 다 참석하겠지?’
“와줘서 고마워요, 대표님.”
최지현은 깔끔한 메이크업에 우아한 원피스를 입었다. 그러고는 부끄러운 척 교태를 부리며 말했다.
“친구로서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그날 밤 그런 일이 있었기 때문에 강세헌은 송별회에 참석할 수밖에 없었다.
최지현은 강세헌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고 싶었지만, 자신이 했던 말이 있기에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만 들어가요.”
송연아는 두 사람이 들어간 다음에야 기둥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도무지 강세헌을 상대할 용기가 나지 않았던지라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최지현에게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있다고 말하려고 했다.
송연아가 휴대폰을 꺼내 최지현의 번호를 찾은 순간 동료가 걸어오며 그녀를 불렀다.
“송닥!”
최지현이 머리를 돌렸다. 송연아는 휴대폰을 들고 손을 흠칫 떨었다. 그녀가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최지현의 휴대폰은 이미 울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후다닥 연결을 끊으며 억지로 미소를 지었다.
“미안해요. 잘못 눌렀어요.”
익숙한 목소리에 강세헌은 머리를 돌렸다. 송연아가 멀지 않은 곳에 이상한 자세로 서서 휴대폰을 들고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눈썹을 찡긋했다.
‘이 여자도 하나 병원 의사였어?’
최지현은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괜찮아요.”
최지현은 강세헌의 존재를 각인이라도 하려는 듯 그의 곁으로 더욱 밀착했다. 송연아는 결혼 전의 약속대로 밖에서 그의 아내 노릇을 할 수 없었기에 그냥 모르는 척했다.
“곁에 있는 분은 남자친구예요?”
최지현은 맑고 반짝이는 눈으로 미소를 지으며 송연아의 질문을 묵인해 버렸다. 곁에 있는 강세헌도 부정하지 않았다. 그는 송연아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던 참이었다.
송연아는 똑같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 진짜 잘 어울려요. 멀리에서 봤을 때부터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어요.”
강세헌은 송연아의 미소 걸린 얼굴을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그가 얼마나 ‘독한’ 마음을 품고 있는지 알 리가 없는 송연아는 도망갈 생각만 했다.
“그럼 이만 들어갈까요?”
송연아는 자신을 불렀던 동료의 팔짱을 끼고 먼저 안으로 들어갔다. 동료는 거리를 좁히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사람 천주그룹 대표래요, 전설 속의 강세헌 대표 말이에요! 최닥이 너무 부럽네요. 저도 가능하다면 저런 남자를 만나고 싶어요.”
송연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동료가 이어서 말했다.
“세상에 어떻게 저 정도로 완벽한 남자가 있을까요? 돈 많지, 잘 생겼지, 몸매 좋지...”
“겉만 보고 완벽 여부를 어떻게 알겠어요? 겉으로 보기에만 멀쩡할 뿐, 속은 변태일 수도 있잖아요.”
송연아가 참지 못하고 말했다. 지난번 자칫 숨통이 끊어질 뻔 한 일을 생각하면, 그를 변태라고 말한 것도 순화한 것이었다. 송연아의 말을 장난으로 여긴 동료는 웃음을 터뜨렸다.
최지현의 영향력이 높아진 덕분에 오늘 병원장 등 임원마저 송별회에 참석했다. 성한호텔 B동의 식탁은 덕분에 꽉 차 있었다.
“송 선생, 이쪽으로 와서 앉아.”
송연아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으로 가서 앉으려고 했는데 병원장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머리를 돌리자 강세헌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역시 다른 식탁에 앉아야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거절하려고 했다.
“저는...”
“얼른 오라니까.”
병원장이 송연아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송연아는 가시방석에 앉은 것만 같았고, 강세헌의 따가운 시선에 머리도 들지 못했다.
“송 선생은 최 선생이랑 대학 동기라며? 최 선생이 군병원에 가기 전에 건배사에 원샷 한 번 해야 하지 않겠어?”
병원장이 송연아를 툭툭 치며 말했다.
“술을 마시지도 못하는 사람한테 원샷이라니요.”
강세헌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송연아의 주량을 잘 아는 듯한 말에 사람들은 놀란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송연아도 의아한 표정으로 머리를 들어 강세헌의 의미심장한 눈빛과 마주쳤다. 그녀는 식탁 아래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건 또 어쩌자는 거야?’
최지현은 약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착각으로 여겼다.
“맞아요, 의사들이 모인 자리에 과음은 맞지 않아요. 송닥, 그동안 고마웠어요. 군병원에 가서도 보고 싶을 거예요.”
최지현은 시종일관 덤덤한 미소를 지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이때 강세헌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리기 시작했다. 그는 수락 버튼을 누르고 상대가 하는 말을 유심히 듣고 있더니 알겠다는 대답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강세헌이 휴대폰을 내려놓자마자 송연아의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전 집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모님, 저택으로 잠깐 오셔야겠습니다. 회장님이 뵙기를 청하십니다. 지금 당장요.”
“네, 알겠어요.”
송연아는 짧게 답하고 휴대폰을 내려놨다. 그러고는 최지현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 급한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겠어요. 우리 술 대신 차로 건배할까요? 군병원에 가서도 무탈하길 바랄게요.”
송연아는 최지현과 함께 차를 한 잔 마셨다. 그리고 몸을 일으켰을 때, 강세헌이 장난스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이런, 마침 저도 볼 일이 있는데 같이 나갈까요?”
“...”
강세헌은 송연아가 자신을 모르는 척하는 것이 아주 불만스러웠다. 다만 그녀가 언제까지 연기를 할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모두의 시선이 송연아에게로 집중되었다.
제10화
사람들 모두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냐며 의아했고 최지현도 뭔가 이상함을 깨달았다.
‘처음은 잘못 들었다고 해도 지금은?’
최지현은 뭔가를 알아내려고 송연아와 강세헌을 번갈아 보며 눈치를 살폈다.
“송닥, 무슨 일 있어요?”
최지현은 떠보듯 물었다.
송연아는 당장이라도 자신이 강세현의 와이프라고 밝힌 뒤 직접 해명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없었다.
그 남자는 함부로 건드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고 직장까지 잃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그녀는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반복했다.
“할아버지가 급한 일 있으시다고 연락이 왔는데, 하필 마침 강 대표님도 일이 있으시네요. 참 이런 우연이, 하하.”
헛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그녀의 모습에 강세헌은 한 방을 날렸다.
“저희 할아버지한테서도 마침 연락이 왔는데, 혹시 어느 쪽으로 가세요? 같은 방향이면 제가 모셔다 드릴까요?”
강한 정신력으로 억지웃음을 짓고 있던 얼굴은 점점 굳어져 갔고, 중간에 테이블만 없었더라면 당장이라도 찻잔을 그의 얼굴에 내려치고 싶은 송연아였다.
“대표님 정말 농담 잘하시네요. 저희가 어떻게 같은 길일 수가 있겠어요? 그럼 전 먼저 가볼게요. 안녕히 계세요.”
말을 마친 송연아는 도망치듯 자리에서 나왔고 최지현은 불안한 눈빛으로 강세헌을 바라보며 물었다.
“송닥이랑 아는 사이에요?”
“몰라요.”
강세헌은 싸늘한 말투로 그녀의 말에 답한 후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최지현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그를 이곳에 오라고 한 건 병원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일이 이렇게 될 줄은 몰랐고 그나마 다행인 건 이제 모두가 그녀와 강세헌의 관계를 알게 됐다는 것이다.
“데려다줄게요.”
행여나 밖에서 송연아와 이야기를 나누진 않을까 걱정이 된 그녀는 곧바로 뒤따라 나갔다. 어쨌든 그날 밤은 송연아였으니까.
호텔 밖으로 나온 강세헌은 주위를 둘러봤지만, 그곳에 송연아는 없었다.
도망치듯 나온 송연아가 이곳에서 그를 기다릴 리가 없었고 그녀는 일찌감치 차를 타고 떠났다.
임지훈이 차 문을 열며 말했다.
“대표님.”
“이제 들어가 봐요.”
그는 최지현을 힐끗 보며 말하고선 곧바로 차에 올라탔고 최지현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후회하고 있었다.
‘진작 알았다더라면 그때 바로 결혼했을 텐데, 언제쯤이면 날 바라보고 사랑해 줄까?’
그 시각 강씨 저택, 송연아는 일찌감치 도착했다.
강의건은 80여 세가 넘으셨고 세월의 흔적과 함께 동반된 주름은 깊고 차분해 보였다. 비록 두 눈은 젊었을 때만큼 밝게 빛나지 않았지만 그 속에서 온화함과 다정함을 느낄 수 있었다.
“힘든건 없어?”
송연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이제 적응됐어요.”
강세헌과의 결혼을 추진한 건 그녀의 아버지가 제안한 것이다. 모두 알다시피 강의건이 가장 아끼는 손자가 강세헌이다.
손자를 아끼는 만큼 그가 좋아하지 않는 여자랑 결혼하는 걸 당연히 막을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아니었다. 솔직히 친분으로도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아닐뿐더러 인맥을 동원해 강세헌 모르게 혼인신고까지 해버렸다.
강세헌 별장으로 들어오라고 한 것도 모두 강의건의 제안이었고 그녀는 아직도 강의건이 왜 이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세헌이가 힘들게 하는 건 없어?”
강의건은 자상하게 물었다.
솔직하게 너무 힘들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강의건이 아무리 잘해준다고 한들 강세헌은 그의 친손자였기에 쉽사리 입을 열지 못했다.
“없어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침 강세헌이 돌아왔고 그 모습을 본 강의건이 입을 열었다.
“연아는 온 지 한참이나 됐는데 넌 왜 이제야 오는 거니? 너랑 연아 이제는 부부인데 밤늦게 같이 다녀야지.”
강세헌은 송연아를 힐끗 보고선 아무런 답도 하지 않았다.
강의건도 그가 이번 결혼에 대한 불만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일부러 큰 소리로 말한 것이었다.
“연아는 오늘 밤 여기서 자고 가. 전 집사, 세헌이 방으로 데려가 줘.”
전 집사는 공손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말은 마친 전 집사는 송연아를 향해 손짓했다.
“사모님, 이쪽으로 가시죠.”
송연아는 조심스럽게 강세헌을 훔쳐봤다. 싸늘한 표정을 한 채 눈길조차 주지 않는 그의 모습에 송연아는 집사를 따라 자리를 떴다.
그렇게 방에는 강의건과 강세헌 단 둘뿐이었고 강의건은 간곡하고 무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마음속으로 원망하고 있다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시간도 꽤 지났고 이제는 내려놓을 때도 됐잖니.”
지난 일이 생각난 강의건은 순식간에 눈빛이 어두워졌다.
강세헌은 편안한 자세로 의자에 앉은 채 묵묵부답이었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결혼하라고 결정한 건 다 널 위해서 그런 거니까 너무 원망하지 마. 어린 나이도 아니고 너도 이젠 가정을 이뤄야지. 연아 아버지 때문에 네가 안 좋게 생각하는 건 알고 있는데 연아는 참 좋은 아이야.”
한숨을 쉬며 말하는 강의건의 모습에 강세헌을 미간을 찌푸렸다.
‘좋은 사람이 바람을 피우고 다녀?’
비록 강의건한테 말하진 않았지만, 그는 반드시 이혼할 거라고 결심했다.
그를 바라보던 있던 강의건은 저도 모르게 또 한숨을 내쉬었다. 어릴 적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부터 강세헌은 침묵하는 일이 많아졌고 집으로 돌아오는 걸 싫어했다. 그래도 할아버지의 말은 잘 들었기에 이런 상황에 더 몰아세울 수 없었던 강의건은 손사래를 치며 입을 열었다.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들어가 쉬어.”
강세헌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마침 전 집사도 돌아왔다.
“도련님.”
그는 눈길 한번 주고선 방을 나갔고 전 집사는 강의건한테 다가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렇게 해도 되는 겁니까?”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이라도 저렇게 예쁜 여자랑 같은 방을 쓰는데 아무런 감정이 안 생기겠어? 남자라면 당연히 반응하겠지.”
전 집사는 내심 걱정이 되었다.
“도련님이 어떤 성격인지는 회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일부러 같은 방 쓰게 했다는 걸 무조건 알 겁니다.”
“남녀가 서로 같이 있지 않으면 어떻게 감정이 생기겠어? 밖에서는 몰라도 이곳에서는 내 말을 들어야지.”
강의건도 마음속으론 강세헌에 대한 미안함이 더 컸고 낮은 목소리로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내가 앞으로 살날이 많이 남은 것도 아니고 세헌이를 돌봐줄 수 있는 좋은 사람 찾아줘야지.”
“도련님도 회장님의 노고를 알 겁니다.”
전 집사는 강의건을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그 시각 송연아는 집사의 안내로 옛 저택에 있는 세헌의 방으로 왔고 전 집사가 떠나기 전 했던 말이 생각났다.
“여긴 도련님이 어릴 때부터 쓰던 방입니다. 중간에 한번 새로 인테리어 한 적 있어요.”
이곳의 스타일은 별장과 사뭇 달랐다. 블랙과 그레이색으로 인테리어 된 방은 따뜻함보다는 싸늘함이 감돌았다.
그녀의 시선은 무심코 선반에 꽂혔고 그곳에 놓인 정교한 상자에 시선을 뺏겼다. 한눈에 봐도 여자들이 좋아할 만한 물건이었기에 이 방의 분위기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손을 뻗어 만지려던 찰나...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싸늘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