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표님의 달달한 아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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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의 달달한 아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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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콤한로맨스따뜻한

소희와 임구택은 결혼한 지 3년이 지났지만 서로에 대해 전혀 애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저녁이 되면 소희는 총재의 부인으로써 임구택의 별장에 있는 ...

Chương (1)

第1章

제1화 수요일 저녁 7시 정각 소희는 전위 호텔 앞에 나타났다. 핸드폰 알림 소리가 울리자 소희는 카카오톡을 확인했다. 아빠 소정인이었다. [소희야, 아빠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차가 좀 막히네. 먼저 들어가있어.] 소희는 발걸음을 늦추며 이따 임구택을 만나면 어떻게 인사할까 생각하고 있었다. 결혼 3년 동안 그들은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임구택이 이 결혼을 동의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심지어 거부한다는 것은 안 봐도 뻔했다. 그렇다고 임구택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과거 소씨 가문의 회사가 위기를 맞자 뻔뻔하게 임씨 가문을 찾아가 혼인 약속을 이행하라고 요구하였고, 당시 임씨 가문의 장남은 이미 결혼을 한 터라 자연스레 그 약속은 차남 임구택이 이행하게 되었다. 그가 내키지 않아 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임씨 가문은 당연히 소씨 가문에 좌지우지 당하지만은 않았다. 예물로 50억 원을 건네어 소씨 가문이 난관을 이겨내게 도우면서도 조건을 제시했다. 3년 뒤에 이 혼사가 자동 해지되는 것으로. 3년 전, 그녀는 아직 법정 결혼 연령이 되지 않아, 두 사람은 라스베가스에 가서 혼인신고를 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 두 사람이 아니라 각자의 대리인이 가서 혼인신고를 마쳤다. 결혼하자마자 임구택은 미국으로 건너가서 결혼 해지를 석 달 앞두고 돌아왔다. 결혼을 거부한다는 태도가 너무나도 뚜렷했다. 하필이면 오늘, 그녀의 아버지가 회사 때문에 그녀를 앞세워 다시 한번 그를 찾아가 부탁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소희는 스스로를 비웃으며 자신을 어떻게 소개할지 생각하였다. “임 선생님 안녕하세요, 저는 당신 아내에요!” 그가 그녀를 거들떠보기나 할까? 듣건대 임구택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 강성의 유명한 악질이었다고 한다. 강성의 흑과 백을 모두 통솔하며 일을 처리함에 있어서 매섭고 결단력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하지만 며칠 전 TV의 경제 채널에서 임구택을 본 적이 있는데 그녀가 생각했던 이미지와는 많이 달랐다. 명품 양복을 입고, 거만하면서도 우아하고 듬직해 보였다. 그녀는 임구택이 오늘도 TV에서처럼 기개가 있고 교양있게 행동하여 자신을 너무 난처하게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천위 호텔은 전체가 전통 양식으로 꾸며져 있는데 고풍스럽고 품위있는 것이 마치 고대 왕실의 휴가 별장지 같았다. 소희는 소정인이 알려준 방 번호대로 연풍관 3층으로 갔다. 3층은 모두 스위트룸이고, 마루에는 카펫이 깔려 있었는데 조명이 은은하고 유난히 조용했다. 스위트룸 앞에 도착한 소희는 심호흡을 하고 나서 손을 들어 문을 두드렸다. 문은 잠겨 있지 않았다. 그녀의 손이 닿자 문이 저절로 빼꼼 열렸다. 이에 소희는 살짝 당황했다. 설마 임구택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가? 소희는 예의상 몇 번 더 두드렸다. 응답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소희는 눈썹을 가볍게 치켜세우고 문을 밀고 안으로 두 걸음 걸어갔다. 현관에만 어두운 조명이 켜져 있고 안은 어두워서 보이질 않았다. 아무도 없나? 스위트룸은 넓고 가운데는 거실, 양옆은 휴식공간과 침실이었다. 그녀는 거실로 갔다가 느낌이 좋지 않아 막 돌아서려는데, 갑자기 침실 쪽에서 물소리와 함께 고통스러운 듯 내리깐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소희의 머릿속은 뒤도 돌아보지 말고 나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어둠 속에서 3초 동안 서서 고민하다가 그녀는 결국 침실 쪽으로 걸어갔다. “임 선생님이십니까? 왜 그러세요?” 소희는 침실 문을 밀어 열면서 나직이 물었다. 갑자기 한쪽 팔이 그녀를 욕실로 불쑥 끌고 들어갔다. 남자는 한 손으로 벽을 짚고 한 손으로는 그녀의 목을 조르면서 고통을 간신히 참으면서도 분노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내게 약을 먹여? 죽고 싶어?” 거실에서는 그나마 창밖의 불빛이 비쳐 들지만 욕실 안은 캄캄해서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소희는 꾹 참고 반항하지 않았다. 목이 조여와 쉰 목소리로 침착하게 말했다. “저 아니에요!” “그럼 너는 누구야?” 남자는 찬물을 한참 맞았는지 온몸은 얼음장처럼 차가웠지만 내뿜는 호흡은 뜨거웠다. 차가웠다 뜨거웠다를 반복하면서 소희는 멍때리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두 사람은 소리 없이 마주보고 있었다. 남자의 숨결은 점점 거칠어져 갔고 이미 참을 만큼 참아 한계에 도달한 듯 했다. 그녀의 목을 조르고 있던 손이 갑자기 스르르 뒷쪽으로 미끄러져 목덜미를 감싸안더니 급기야 고개를 숙여 거칠게 키스를 했다. 그의 입술은 차갑고 난폭했다. 소희는 순간 눈을 부릅뜨고 다리를 들어 남자를 밀쳐내려 했다. 하지만 남자의 힘과 속도는 모두 그녀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는 긴 다리로 그녀의 무릎을 누르며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도와줘, 네가 뭘 원하든, 사후에 다 보상해 줄게.” 소희는 심호흡을 하며 생각했다. 이런 상황이 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설마 다른 사람이 임구택에게 약을 먹인건가? 어둠 속에서 남자의 숨결이 그녀의 모든 감각을 감싸고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그를 도울지, 그더러 다른 여자를 찾으라고 할지 고민하는 사이에 남자의 키스는 이미 시작되고 있었다. ...... 소희는 두 사람이 어떻게 욕실에서 침실로 들어갔는지도 잊은 채 저항과 순종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을 때, 남자는 이미 그녀를 안고 거침없이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두 사람이 결혼하면 이런 일도 발생할 수 있다는 생각을 안 한건 아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녀는 하늘위로 붕 날아올랐다 바닥으로 떨어졌다를 반복한 이 시간이 지난 3년보다 더 길게 느껴졌다. ...... 막 끝냈는데 마침 누군가가 들어와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임 대표님?” “들어오지 마!” 남자의 목소리는 낮으면서도 만족스러운 나른함을 띠고 있었다. 바깥의 소리가 사라졌다. 잠시 후 임구택은 일어나서 가운을 입고 침대 위의 여자를 보지도 않은 채 방을 나갔다. 소희가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겼다. 밖에 불이 켜지고 문틈으로 한 줄기 빛이 들어왔다. 임구택은 거실로 나와 소파에 기대었다. 조각상같은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았고, 눈빛에 만족 후의 나태함만이 남아있었다. 비서가 다가와서 물었다. “임 대표님, 괜찮으십니까?” 비서는 임구택이 술자리에서 갑자기 일어서더니 따라오지도 못하게 하고 두 시간이 넘어도 나오지 않자 불안해서 올라와 본 것이었다. 그는 방금 무슨 소리를 들은 것 같았는데 두 사람의 숨소리인 듯했다. 임구택은 미간을 주무르며 말했다. “괜찮아!” 비서는 방금전 상황에 대한 상상을 그만두고 말하였다. “소정인 씨가 1009번 방을 예약하고 9시에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다 됐습니다.” 임구택이 되물었다. “소정인이 누구지?” 그는 말끝을 흐리더니 다시 생각난 듯 덤덤하게 물었다. “아직 3년 안됐지?” 비서가 답하였다. “몇 개월 남았습니다.” 임구택은 비웃으며 말하였다. “얼마나 차이 난다고.” 비서가 말했다. “소정인 씨가 이미 몇 차례 전화를 걸어 만나뵙고 싶으시답니다. 아마 대표님께 부탁할 일이 있는 것 같습니다.” 임구택은 방 안의 여자가 생각난 듯 말을 아끼는 듯한 어조를 보였다. “이미 한번 팔았으면서 또 팔려고 해? 뻔뻔한 인간. 내가 계속 받아줄 것 같아? 아님 도대체 얼마나 값진 딸이길래 다시 팔 생각을 하는거야? 안 만나!” 마지막 세 글자는 무정하고 차가웠다. 소희는 침실에서 밖의 대화를 똑똑히 듣고 있었다. 방금전까지 홍조를 띤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버렸다. 만약 임구택이 침실에 누워있는 여자가 소정인의 딸이라는 것을 알고 ‘판다’고 말했으면 더 아이러니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온몸이 쑤시는 것을 참고 침대에서 내려와 자신의 옷을 찾아 입고 닥치는 대로 주머니 속의 물건을 꺼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곧장 베란다로 가서 창문을 열고 뛰어내렸다. 소녀는 땅에 떨어지고 몇 바퀴 굴렀다. 그러고는 순식간에 몇 미터밖의 청석로에 나타났다. 가녀린 그녀의 모습은 곧 어둑어둑한 불빛 속으로 사라졌다. 임구택은 비서와 거실에서 한참 다른 이야기도 나누다가 나중에 비서에게 분부했다. “오늘 술자리에서 누가 손버릇이 나쁜지 알아봐.” 비서는 어안이 벙벙했지만 방금 들은 소리가 떠올라 재빨리 알아차리고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하였다. “네!” 임구택은 일어나 침실로 돌아가 어둠 속에서 킹사이즈의 침대를 힐끗 보고는 담담하게 말했다. “일어나. 돈 가지고 여기서 나가. 앞으로 내 앞에 얼씬거리지 말고!” 아무 대답이 없었다. 임구택은 눈썹을 찡그리며 불을 켰다. 은은한 불빛 아래에 어수선한 침대만 보일 뿐 아까의 그 여자는 온데간데 없었다. 그는 돌아서서 욕실에 가보았지만 욕실 안도 텅 비어 있었다. 그의 가늘고 긴 눈동자에 의아함이 내비쳤다. 설마 방금 그가 침대에서 품었던 여자가 귀신이란 말인가. 그러나 그는 분명히 침대 시트에 묻은 빨간 자국을 보았다. 눈살을 찌푸린 채 고개를 돌려 침대 맞은편 캐비닛을 본 임구택은 천천히 다가가 꽃병 밑에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제2화 그의 손에는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이 쥐어져 있었다. 일을 마친 후 돈을 지불하다니. 그녀는 그를 무엇으로 생각하는 걸까? 남자가 냉담한 얼굴을 하고 발코니로 성큼성큼 걸어가니 과연 창문이 열려 있었다. 여기는 층고가 높아서 3층이 4층 높이일 텐데 그녀는 어떻게 뛰어내렸을까? 그가 그렇게 무서웠나? 죽음을 무릅쓰고 도망칠 만큼? 창문으로 바람이 불어 들어왔다. 물을 끼얹은 듯 청량한 바람이지만 남자의 마음속에서 타오르는 화는 식히지 못하였다. 이 여인은 만 원으로 그를 모욕했을 뿐만 아니라, 일이 끝난 후에 창문으로 뛰어내려 도망쳤다... 잡히기만 해봐! ...... 택시에 앉은 소희가 재채기를 하자 운전기사가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이렇게 예쁘게 생겨서 홀딱 젖어있다니, 딱 봐도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았다. 소희는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아요.” 기사는 웃으며 말했다. “아직 학생이죠? 밖에 혼자 다닐 때 각별히 조심해야 되요.” “네, 감사합니다. 기사님.” 소희는 대답하고 휴대폰을 꺼내 재빨리 문자를 보냈다. “천위 호텔의 7시와 9시경에 내가 찍힌 CCTV 기록은 모두 없애!” “ok!” 상대방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지시에 따랐다. 남자의 귀에 거슬리는 말이 다시 귓가에 울려 퍼졌다. 소희는 오늘 임구택과 만나야 할지 말아야 할지 그따위 고민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다만 임구택이 그녀가 왔었다는 사실을 모르게만 하고 싶었다. 운해로에서 내리면서 소희는 뒷좌석을 적신 대가로 택시비를 두 배로 지불했다. 별장으로 돌아오자 하인은 소희의 젖은 옷을 보고 깜짝 놀라 물었다. “작은 아가씨, 무슨 일이에요?” “일이 좀 있었어요, 일단 올라가서 샤워부터 할게요.” 소희는 위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목욕물 준비해 드릴게요.” 하녀는 더 묻지 못한 채 위층으로 올라가 준비했다. 몇 분 후 소희는 따뜻한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긴장했던 몸이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머릿속이 복잡해서 머리까지 물속에 파묻고 오늘 밤에 있었던 일을 잊으려 했다. 목욕을 마치고 깨끗한 잠옷으로 갈아입은 뒤 하녀가 머리를 말려주고 있을 때 소정인에게서 전화가 왔다. 소희는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하녀를 내보내고 베란다로 나가 전화를 받았다. 전화가 연결되자 소정인이 다급하게 물었다. “소희야, 어디야? 임 대표님 만났어?” 소희의 말투에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아버지, 제가 임 대표와 어색할까 봐 흥을 약을 타신 거예요?” 소정인은 어리둥절하였다. “무슨 말이야, 약을? 내가 누구한테 약을 줘? 나 아니야!” “아니라고요?” 소희는 계속해서 말하였다. “그럼 왜 아버지는 분명 임구택의 비서와 아홉 시에 약속을 잡아놓고 저한테는 일곱 시라고 하셨어요?” 전화기에선 침묵이 흘렀다. 소희는 고개를 떨구고 전화를 끊으려고 하였다. “소희야!” 전화기에서 다시 소리가 들려왔다. 소정인은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잘못했다. 나는 네가 임 대표를 일찍 만나서 단둘이 얘기를 나누다보면 결혼에 대해 생각이 달라질 거 같아서 그랬다.” 그러고는 대뜸 물었다. “무슨 일 있었니? 왜 그래?” 소희는 소정인의 말투에서 진심으로 자신을 관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진짜 아버지가 아니에요?” 소정인은 즉시 대답했다. “당연히 아니지, 내가 아무리 어려워도 이런 상스러운 수단으로 내 딸을 이용하지는 않아!” 소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정인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소희야, 괜찮지?” 소희는 담담하게 말했다. “괜찮아요, 저 임구택을 못 만났어요.” 소정인도 자초지종에 대해 더 이상 묻지 않고 가볍게 탄식하듯 소희에게 사과했다. “어쨌 됐든 이번 일은 아빠가 미안해, 다시는 그사람 만나라고 하지 않을게. 산속 별장에 있고 싶지 않으면 지금 당장 아빠가 데리러 갈게.” 소희는 목소리가 한결 온화해졌다. “이미 2년 넘게 살았어요. 몇 달 더 지내도 상관없어요. 아버지, 걱정하지 않으셔도돼요, 저 여기 꽤 마음에 들어요.” 이 별장은 임구택의 개인 재산이다, 결혼하자마자 이사 와서 거의 3년 동안 살고 있다. 소정인은 흐뭇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그럼 몇 달만 더 참아. 3년이 되자마자 내가 직접 우리 딸 데리러 갈게. 아 참...” 그는 잠간 멈추더니 다시 말했다. “이번 주 토요일 네 엄마 생일이니 집으로 와. 지난번에 네가 왔을 때 한 말은 진심이 아니야, 너도 마음에 담아두지 말거라. 엄마도 많이 후회하고 있다. 다만 자존심 때문에 사과하지 않는 것뿐이야.” “이번 주 토요일 오전에 수업이 있으니 수업을 마치고 제가 알아서 갈게요.” “그래, 무슨 일 있으면 아빠한테 전화하렴.” 전화를 끊고 소희는 잠시 생각한 뒤 다시 번호를 눌러 전화를 걸었다. “봄 시즌에 나온 최신상 목걸이와 귀걸이 세트로 준비해 주세요, 이틀 뒤에 찾으러 갈게요.” 상대 편의 대답을 듣고 소희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오늘 일을 생각하니 어둠 속의 장면이 저절로 머릿속에 떠올랐다. 남자의 거친 숨소리가 바로 귓가에 들리는 듯 했다... 그녀는 머리를 두 팔 사이로 파묻고 마음속엔 화난 건지 미워하는 건지 알 수 없는 듯한 감정이 피어났다. 밤 11시에 임구택이 천위 호텔을 떠날 때 비서가 그의 뒤를 따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대표님, 찾았습니다. 천거의 부사장 이해창입니다. 원래 오늘 자신이 데리고 온 여자 파트너에게 약을 먹이려고 했는데, 어떻게 된 건지 술잔이 대표님께 전달되었답니다. 이해창이 기겁을 하고 야반도주해서 해성으로 갔답니다.” 임구택의 새까만 눈동자가 매섭게 빛났다. “이미 도망쳤으면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해!” 비서는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임씨 가문 고택에 돌아온 지금은 이미 새벽이었다. 임씨 가문 첫째네 부부는 딸과 아들만 남겨둔 채 부모님과 함께 런던 경제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다. 아이들은 이미 잠들어 있었다. 임구택은 곧바로 3층으로 올라가 샤워를 한 뒤 가운을 두른 채 베란다의 등나무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탁자 위에서 담배 한 대를 꺼내 불을 붙혔다. 담뱃불이 달밤의 베란다에서 깜박거렸다. 임구택의 젖은 머리카락이 이마에 드리워졌다. 희미한 불빛에 비친 그의 얼굴은 유난히 윤곽이 두드러지고 준수해 보였다. 저도 모르게 또 오늘 밤 그 여자가 생각났다. 그는 그녀의 불안을 눈치채고 너무 성급했다가 그녀가 다치기라도 할까 봐 길게 키스했다. 그녀가 응낙한 후에야 그는 그 다음 동작을 이어갔다. 그녀는 그의 팔을 잡고 불안에 떨며 그의 이름을 불렀다. 당시 그는 정신이 혼미해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녀가 그의 이름을 불렀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임구택은 그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었다. 이미 물에 젖어 있었다. 요즘은 거의 휴대폰 결제가 상용화되어있는데 누가 현금을 들고 다닐까? 그녀는 왜 그의 방에 나타난 거지? 그녀는 도대체 누구일까? 임구택은 갑자기 궁금해졌다. 임구택은 핸드폰을 꺼내서 전화를 걸었다. “오늘 밤 3층에서 뛰어내린 여자를 찾아봐!” “네!” 비서 명우는 명령만 받을 뿐 종래로 쓸데없는 말은 하지 않는다. 다음날 오전 수업을 마친 소희는 장학금 신청 서류를 정리해서 사무실로 보내라는 조교의 전화를 받았다. 소희가 정리를 마치고 출발하기도 전에 다시 조교의 메시지를 받았다. [소희야, 나 급한 일이 있어서 9층 회의실에 가야 해, 여기로 가져와.] 소희는 답장한 뒤 사무동으로 향했다. 사무동 밖 도로에 검은색 벤틀리가 세워져 있었다. 소희가 막 지나가려는 찰나 키가 크고 반듯한 남자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다. 소희는 남자의 옆모습을 보고 가슴이 세차게 뛰기 시작했고 무의식적으로 몸을 돌렸다. 어젯밤에 불을 켜고 있지 않아서 임구택이 그녀를 모를 수도 있지만 그녀는 그를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차가 떠나고 남자도 방향을 틀어 사무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후에야 소희는 다시 길을 걸었다. 그런데 모퉁이를 돌아서자 남자가 멈춰서서 통화하고 있는 것이었다. 소희도 멈춰 서서 고개를 숙이고 핸드폰을 보는 척했다. 그녀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임구택은 이미 멀어졌다. 소희는 숨을 크게 들이 마시면서 임구택이 어떻게 여기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사무동 건물에 들어서자 남자는 엘리베이터로 들어가고 있었고 소희는 걸음을 늦추며 엘리베이터가 닫히기를 기다렸다. 그녀의 손이 엘리베이터 버튼에 닿자 이미 닫혔던 엘리베이터가 다시 열렸다. 소희가 고개를 들자 미처 대비도 못한 채 남자의 냉담한 두눈과 마주쳤다. 제3화 소희는 멍해졌다. 남자는 차갑게 입을 열었다. “왜 절 따라오시는 거예요? 강성대 학생이신가요?” 그는 오는 길에서부터 이 여자가 자신의 뒤를 따라오는 것을 발견했다. 그가 멈추면 그녀도 무슨 일이 있는 척 멈추더니 엘리베이터까지 따라왔다. 소희는 얼굴이 빨개졌지만 이내 다시 냉정을 되찾고 반문했다. “여기가 당신 집으로 가는 길인가요? 모든 사람이 갈 수 있는 길을 왜 제가 따라다닌다고 하는 거죠?” 남자의 눈동자의 싸늘한 빛이 스치더니 뒤로 한 발짝 물러서며 소희에게 올라오라고 눈짓했다. 소희는 입술을 실룩거리며 비꼬듯 말했다. “됐어요, 오해받을 만한 행동 안할게요.” 말을 마치고 그녀는 돌아서서 계단으로 걸어갔다. 그녀 뒤로 엘리베이터 문이 천천히 닫히며 남자의 가늘게 뜬 눈을 가렸다. 소희는 임구택과 다시 마주칠까 봐 아예 계단으로 9층까지 올라갔다. 회의실에 도착하니 조교가 학과장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조교는 그녀를 보자 잠시 기다리라고 눈짓했다. 그 옆에는 몇몇 학생들도 자료를 제출하러 왔는데, 그중 한 명은 따가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소희는 못 본 척 휴대폰을 꺼내 스도쿠를 했다. 5분도 안 돼 한 판을 풀고 나니 밖에서 점점 가까워지는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돌아온 지 얼마 안 됐죠? 출국한지 오래됐으니 돌아올 때 됐구나 싶었는데” 교장선생님의 목소리와 함께 두 사람이 회의실로 들어왔다. 한 사람은 교장선생님이고, 다른 한 사람은... 소희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공교로운 일이...? 임구택도 소희를 보았다. 그의 눈빛은 그녀에게 머물지 않고 바로 지나갔다. 학과장은 급히 마중 나가 교장선생님과 인사를 나누었다. 방 교장은 그에게 소개하였다. “이 분은 LS그룹의 대표이사님이십니다. 예전에 우리 학교 학생이었지요. 참, 우리 학교 여러 항목의 장학금도 임 회장님이 후원한 것입니다.” 그러자 학과장은 냉큼 공손한 표정을 지으며 임구택과 악수를 나누었다. “오늘 마침 학생들에게 장학금 신청 서류를 제출하라고 했습니다. 이 학생들은 모두 임 대표님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들입니다.” 임구택은 학생들 쪽으로 눈길을 돌리더니 이번에는 소희를 눈여겨보는 듯 했다. 그는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강성대엔 항상 인재가 넘치는군요!” 소희는 남자의 준수한 옆모습을 보며 눈동자를 살짝 굴렸다. 남들은 임구택이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했다. 확실히 어젯밤 그의 모습은 난폭하고 날이 잔뜩 서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또 고상하고 온화한 기운을 가지고 있는 모습이 텔레비전에 나왔던 그 사람 같았다. 도대체 어느 쪽이 그의 진짜 모습일까? 갑자기 학과장의 지명을 받자 몇몇 학생들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곧게 펴고 숭배의 눈빛 혹은 쑥스러운 눈빛으로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방금 소희를 노려보았던 여학생이 눈알을 굴리더니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학금을 후원하시는 임 대표님께서 오신 기회에 제가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지 모르겠네요.” 조교가 눈살을 찌푸렸다. 주경 쟤가 또 무슨 난리를 피우려는 건지 모르겠다는 눈치였다. 방 교장은 온화하게 웃으며 말했다. “이 친구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은데 얼마든지 하세요.” 주경은 소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말했다. “임 대표님께서 설립한 장학금은 강성대학교의 우수한 학생을 장려하는 것입니다. 저는 한 사람이 우수하다는 것은 공부뿐만 아니라 품행도 포함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럼요!” 방 교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경은 핸드폰을 꺼내 카페의 게시물을 열어 모두에게 보여주었다. “며칠 전에 소희가 방과 후에 명품차에 타는 것을 본 사람이 있습니다. 소희네 평범한 가정형편에 이런 차를 샀을 리는 없을 겁니다. 그녀가 무엇을 하러 가는지 다들 생각해 보면 알겠지요. 이런 학생도 우수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임구택을 제외한 모두가 안색이 흐려졌다. 조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주경, 임 대표님 앞에서 뭐 하러 그런 말을 해?” 주경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임 대표님께 장학금이 어떤 학생에게 지급되는지, 제대로 쓰이고 있는지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학과장이 표정이 굳어진 채 핸드폰을 받아 들여다보니 며칠 전의 그 게시물에는 흐릿한 사진 몇 장뿐이었고, 소희는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중년 남자와 함께 벤츠 S600을 타고 있었다. “소희야, 어떻게 설명할래?” 주경은 소희를 도발적으로 바라보았다. 소희의 정교한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 변화가 없었고 차분한 눈동자는 깊은 호수 같았다. “네가 뭔데, 내가 왜 너한테 설명해야하는 데?” 주경이 막 말을 하려 할 때 임구택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지금이 어떤 시대인데, 게다가 명문대 학생들이 근거도 없이 시시콜콜한 소문으로 한 사람을 모함하나요?” 주경은 이를 악물고 변명했다. “사진이 있잖아요, 임 대표님. 왜 근거가 없다고 하세요?” 임구택은 피식 웃고 말했다. “학생은 사진에서 뭘 봤어요? 지금 내가 저 학생을 두둔했으니 우리 사이에도 무슨 떳떳하지 못한 일이 있었다고 말할 건가요?” 이 말을 듣고 소희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임구택이 자신을 못 알아봐서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덕분에 이런 말도 당당하게 할 수 있으니 말이다. 임구택은 한마디 덧붙였다. “이것이 명문대 우수학생의 소양인가요?” 그가 지금 ‘우수’라는 두 글자를 강조한 것은 주경이 방금 ‘우수하다’고 말한 것을 반박한 것이 분명했다. 주경은 임구택의 기세에 눌려 말을 잇지 못하였다. 사람들은 다 안색이 변해 있었다. 주경의 얼굴엔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 다른 사람들도 별로 좋지 않았다. 소희만이 의외의 상황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임구택이 그녀를 두둔해 나설 줄은 몰랐다. 방 교장도 눈살을 찌푸렸다. “임 대표님의 말이 맞아요. 아무것도 말할 수 없는 사진 몇 장으로 소문을 만드는 군요. 이런 게시물이 강성대학교 게시판에 올라와서는 안됩니다.” 조교는 즉시 응답했다. “바로 삭제시키겠습니다.” 주경은 내키지 않는 듯 무슨 말을 하려다가 조교의 눈총을 받고 입을 다물었다. 교장선생님은 고개를 돌려 임구택을 바라보며 온화하게 웃어 보였다. “학과장이 회의실에서 할 일이 있는 것 같으니 제 사무실로 가서 얘기하시죠.” 임구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괜찮네요!” “이리로 오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교장과 임구택이 나가자 조교는 주경을 돌아보며 화를 냈다. “주경, 너 정말 철이 없구나!” 주경은 이를 악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소희를 노려보다가 몸을 돌려 회의실을 나갔다. 조교가 소희에게 몇 마디 위로의 말을 했지만 소희는 별말 없이 서류를 제출하고 자리를 떴다. 주경은 복도 모퉁이에 서서 소희를 차갑게 노려보았다. 소희는 곁눈질도 하지 않고 걸어가다가 스쳐 지나가는 찰나에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고석이 좋으면 걔한테 사귀자고 해. 이런 구린 수단을 쓰다니...” 그녀는 눈길을 돌렸다. 분명 순하고 부드러운 얼굴인데 눈빛은 차갑게 살기를 띠고 있었다. “넌 정말 수준 이하야!” 주경은 순간 몸을 꼿꼿이 세우고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너 방금 뭐라고 했어?” 소희는 그녀를 힐끗 쳐다보고는 유유히 가버렸다. 주경은 화가 나서 쫓아가려 했지만 옆에 있던 친구가 그녀를 붙잡았다. “경아, 일단 진정해, 여기 학교야!” 주경은 멈춰 서서 음흉한 눈빛으로 소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젠가는 죽여버릴 거야!” ...... 오후에는 수업이 없었다. 점심시간에 소희는 버스를 타고 별장으로 돌아갔다. 차에 앉아 있으니 자신도 모르게 임구택이 생각났다. 첫 만남은 알아가는 과정도 없이 잠자리를 갖고, 두 번째 만남은 미행하는 이상한 사람으로 오해받더니 또 사람들 앞에서 내연녀라고 지적질 당하고... 소희는 이마를 차창에 기대고 눈썹을 찡그렸다. 그는 틀림없이 그녀와 상극일 것이다. 한 시간 후 임구택은 교장의 연회를 완곡히 거절하고 강성대를 떠났다. 운전기사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임 대표님, 골드레이 별장 개발 회의가 오후 3시에 잡혀있습니다. 중간에 시간이 비어 잠깐 쉬셔도 되는데 어디로 모실까요?” 손에 든 서류를 뒤적거리던 임구택은 ‘별장 ’이라는 두 글자를 듣고 문득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청원별장으로 가죠.” “네!” 기사는 길 어귀에서 차를 돌렸다. 임구택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통화가 연결되자 명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임 대표님, 어젯밤 여자를 찾았습니다!” 제4화 임구택은 그날 창문에서 뛰어내린 여자를 조사하라고 지시했고, 명우는 제일 먼저 천위 호텔의 CCTV를 조사했다. 이상하게도 7시와 9시 두 시간대 모두 공백 상태였고 천위 호텔의 보안요원조차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하지 못하고 당시 인터넷이 끊겼을 것이라고 추측만 하고 있었다. 그래도 명우는 한 사람을 찾았다. 서이연. 서이연은 B급 배우로 청순하고 러블리한 이미지의 노선을 걷고 있으나 줄곧 뜨지 못했다. 어제 저녁 6시 50분쯤 그녀가 천위 호텔에 들어가 연풍관 쪽으로 걸어가는 것을 CCTV에서 볼 수 있었다. 이후 CCTV 기록에는 공백이 있어 그녀가 어느 방으로 갔는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었다. 9시 5분경 서이연의 매니저가 그녀를 부축하고 연풍관 밖에 나타났는데, 그녀는 한쪽 다리를 구부린 채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것으로 보아 부상을 입은 것이 분명했다. 그 뒤로 기록이 사라졌기 때문에 명우는 서이연이 어떤 차를 타고 떠났는지 몰라 어느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알아내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젯밤 그녀는 왼쪽 다리를 수술했다. 명우는 이미 차트를 확인했는데 낙상이었다. 그날 밤, 강성의대 부속병원. VIP706호. 병상에 누워있는 여인은 두 손을 맞잡고 불안한 표정으로 맞은 켠 소파에 앉은 임구택을 바라보았다. “임 대표님 무슨 일이에요?” “다리 어떻게 다쳤어요?” 임구택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서이연은 한쪽 다리에 깁스를 하고 반쯤 늘어뜨린 눈꺼풀 아래 눈물을 반짝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임 대표님과 관련이 있나요?” “숨길 필요 없어요, 사람을 시켜 이미 CCTV를 확인했으니까. 어젯밤 9시쯤 매니저가 당신을 부축해서 차를 타고 떠날 때 다리는 이미 부러져 있었죠. 그날 밤 제 방에서 뛰어내린 사람은 바로 당신이었습니다, 맞나요?” 임구택의 어조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담담했다. 손님의 사생활 보호 차원에서 천위 호텔은 카메라가 객실 창문을 향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서이연이 어디서 뛰어내렸는지는 볼 수 없지만, 그녀의 행적은 분명히 그날 밤의 일과 일치했다. 서이연이 멍해 있다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는 아직도 망연함이 남아있지만 머릿속은 생각들이 급속히 돌고 있었다. 옆에 있던 매니저는 대화에 끼지 못하고 숨소리마저 죽여가며 듣고 있었다. 임구택은 다리를 꼬고 담담하게 말했다. “무서워하지 마세요. 제가 약속했잖아요. 날 도와줬으니 꼭 보상해 드릴게요!” 명우는 카드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카드 안에 20억 원이 있으니 그날 밤의 일을 다시는 꺼내지 않겠다고 약속해줬으면 좋겠네요.” 서이연은 아랫입술을 깨물다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전 돈은 필요없어요. 당시에도 제가 좋아서 한 일이고요. 임 대표님 안심하세요, 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 약속은 꼭 지키는 사람입니다. 돈을 원하지 않으면 다른 걸 요구해도 좋습니다.” 임구택이 말했다. 서이연은 매니저가 눈치를 주자 손을 꼭 쥔 채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전 원하는 것 없어요. 만약 임 대표님께 실례가 안된다면 저를 친구로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요.” 임구택은 냉담한 어조로 그녀의 말을 끊었다. “제 생각에는 실리적인 요구를 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아요!” 서이연은 갑자기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불안하고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저 지금 회사에서 나가고 싶은데 방법이 있을까요?” 임구택은 잠시 침묵하더니 물었다. “LS엔터테인먼트로 오실래요?” 매니저의 눈동자가 갑자기 반짝거렸다. LS는 국내에서 손꼽히는 엔터테인먼트 회사로, 수많은 A급 연예인을 양성해냈다. LS에 들어가면 전문적인 지원이 부족할 리 없었다. 서이연은 나긋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감사합니다, 대표님!” 임구택이 말했다. “회사에 연락해서 계약 준비하라 할게요. 현재 회사의 위약금도 저희 쪽에서 해결해 줄 거예요.” 서이연은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녀의 가냘픈 목소리와 부상으로 인해 창백한 얼굴은 그야말로 청순가련 그 자체였다. 임구택은 나가려다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물었다. “어젯밤에 왜 제 방에 오신 거예요?” 서이연은 잠시 멍해져 있다가 재빨리 답했다. “원래 옆방에 오디션 보러 가려다 방을 잘못 들어갔어요.” ...... 임구택이 떠난 지 한참 되었는데도 서이연은 정신 차리지 못했다. 그녀는 어젯밤 일을 당연히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녀는 새로운 연극 오디션을 보려 했고, 조감독이 그녀에게 천위 호텔로 가서 자세히 이야기하자고 했다. 방에 들어갔을 때 웨이터가 옆방이 임구택의 전용 스위트룸이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그녀는 주의 깊게 보았었다. 조감독은 그녀가 방에서 거의 한 시간을 기다린 후에야 곤드레만드레 취해서 들어왔다. 연극 얘기는 무슨... 연극 핑계로 뭐 어떻게 해보려는 거였다. 그녀는 죽을 힘을 다해 한참을 반항하다가 결국 창문 밑에 숨었다가 눈을 감고 뛰어내렸다. 임구택이 오기 전 병실에서 매니저는 이 업계에서 성공하려면 고상한 척 해서는 안 된다고 그녀를 한창 혼내고 있었다. 매니저는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 “임 대표가 사람을 잘못 찾은 거지? 우리 거짓말 한 거 문제 없겠지?” 서이연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불을 콱 움켜쥐었다. “아니면 그 돼지 같은 조감독이랑 자라고요?” LS와 계약을 맺다니, 정말 좋은 기회다. 이보다 더 그녀를 설레게 하는 것은 임구택과 연이 닿았다는 것이다. 임씨 가문은 강성, 심지어 이 나라 전체의 경제를 좌우지하고 있다. 위로는 정부, 아래로는 산업에 이르기까지 어느 것 하나 임씨 가문의 손길이 닿지 않는 것이 없었다. 임구택의 호감을 얻을 수 있다면 그녀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늘이 이렇게 도와주는데 왜 이 기회를 걷어차겠는가? 예전에 그녀를 무시했던 사람들을 모두 밟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높은 사람들이 자신에게 아부할 생각을 하니 이런 도박 한 번 쯤은 괜찮지 않은가. 그녀는 조감독이 폭로할까 두렵지도 않았다. 그날 밤 조감독도 그녀가 갑자기 뛰어내리는 바람에 놀랐을 것이다. 그는 지금 자신과 그녀가 아무런 연관이 없기를 바랄 것이다. 임구택은 병원에서 나와 어두운 표정으로 차에 앉았다. 상대가 배우일 줄은 몰랐다. 외모도 꽤 괜찮았지만 왠지 모르게 짜증이 나고 실망스러웠다. 이 갑작스러운 짜증으로 인해 그는 그녀가 만 원짜리 한 장으로 자신을 모욕했던 일도 재미가 없어졌다. 따지고 싶지도 않았고 그냥 빨리 끝내고 싶을 뿐이었다. ...... 토요일, 오전 마지막 수업을 마치고 소희는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소희네 집이 있는 완화 별장은 버스가 없어서 소희는 택시를 타야만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11시었는데 날이 흐리고 비가 오려고 했다. 하녀 아주머니가 문을 열고 소희를 웃음을 지으며 반겨주었다. “아가씨, 오셨군요!” 소희는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 신발을 갈아 신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장 씨 아주머니는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다. “선생님은 사모님과 외출하셨어요. 좀 지나야 돌아올 테니 먼저 앉아 계세요.” “언니 왔어?” 위층에서 깜짝 놀라는 소리가 들렸고 곧 계단에서 예쁜 소녀가 미소를 머금고 뛰어내리더니 금방 소희 앞에 나타났다. “언니 왜 이제 왔어, 나 오전 내내 기다리고 있었어.” 소희도 웃으며 인사했다. “소연아.” 장씨 아주머니는 소연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가씨, 디저트 다 됐는데 블루베리 무스 드릴까요, 초콜릿 맛 드릴까요?” “좀 이따 먹을게요. 먼저 일 보세요. 언니랑 얘기 좀 할래요.” 소연은 얼굴에 환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네!” 장 씨 아주머니는 공손히 대답하고 나가면서 소희를 다시 한 눈 보고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방금 머리를 한 소연은 뾰족한 가위를 손에 들고 옆으로 돌아보며 말했다. “엄마가 아침부터 머리 하러 가자고 해서 같이 갔었어. 기어코 나도 헤어스타일 바꿔보라고 해서 해봤는데 언니 보기엔 어때? 예뻐?"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뻐.” 소연은 귀밑의 머리카락을 만져보았다. “내가 한참 동안 거울 봤는데 아무래도 여기 잘 못 자른 것 같아, 내가 다시 잘랐는데도 맘에 안 들어, 언니가 좀 잘라줘.” 소희는 소연이 건네주는 가위를 힐끗 보고는 말했다. “어디?” “귀 밑 여기. 내가 잡고 있을 테니 언니가 좀 잘라줘.” 소연은 몸을 돌리고 머리를 한쪽으로 젖히며 귀 밑 머리 한 가닥을 가리켰다. 소희가 가위를 들고 소연이 말한 곳을 막 자르려는데 문쪽에서 겁에 질린 소리가 들렸다. “소희 너 뭐하는거야?” 제5화 여인이 달려들며 손에 들고 있던 꽃들은 소희의 몸에 던져졌다. 힘껏 소희를 뒤로 밀치고는 소연을 품에 끌어안았다. 진원은 긴장한 채 소연의 몸을 살펴보며 물었다. “다친 거야? 혹시 피났어? 어디 아프니?” 이슬을 머금은 꽃잎이 온 바닥에 흩어지고 꽃의 가시가 소희의 목덜미를 찔러 따끔거렸다. 그녀는 여인의 긴장된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소정인은 이내 다가와 소희에게 물었다. “안 다쳤니?” 진원은 갑자기 고개를 돌려 무서운 눈빛으로 소희를 노려보았다. “뭐 하는 거야, 소연이를 죽이려는 거니?” 소희는 여인의 눈에 비친 혐오와 원한을 보고 가슴이 쿵하고 내려앉았다. 소연은 소희를 한 번 쳐다보고는 급히 진원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엄마, 오해예요. 제가 언니한테 머리 좀 잘라달라고 했어요. 언니는 절 다치게 하지 않았어요.” “그렇구나!”소정인은 ‘하하’하고 웃으며 진원을 원망했다. “당신은 항상 너무 급해서 문제야. 무슨 일인지 알아보지도 않고 화부터 낸단 말이야. 당신 때문에 소희 옷이 다 더러워졌잖아.” 진원은 자신이 소희를 오해했다는 것을 깨닫고 무안해하며 변명했다. “들어오자마자 소희가 가위를 소연이의 목에 대고 있길래... 머리를 자르는 건줄도 모르고...” “그만 해!”소정인은 진원에게 눈짓을 하고는 소연에게 말했다. “언니 데려고 가서 옷 좀 갈아입혀. 옷이 다 더러워졌네.” “언니, 이리 와!” 소연은 그녀의 손을 잡았다. 소희는 어깨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쓸어내리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2층 침실로 들어가자 소연이 사과했다. “언니, 정말 미안해, 엄마가 이 시간에 돌아올 줄 몰랐어. 나 때문에 언니가 다쳤네.” “너 때문이 아니야!” 소희의 순수한 얼굴에는 한 줄기 미소를 띠고 있었다. 소연은 옷방에 가서 흰색 티셔츠를 가져와 소파에 놓았다. “언니, 이건 새거야, 한 번도 안 입었어. 옷 갈아입어, 난 내려가서 기다릴게.” “응.” 소연이 문을 닫자 소희는 소파 위의 옷을 보며 안색이 흐려졌다. 한쪽에서는 머리를 잘라달라 하고 한쪽에서는 마침 돌아왔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다 있을까. 옷을 갈아입고 나온 소희는 복도를 따라 밖으로 걸러가는 중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은 방으로부터 소정인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떻게 꽃으로 소희를 때릴 수 있어, 정말 너무한 거 아니야?” 소희는 걸음을 늦추었다. 진원은 여전히 목소리를 높였다. “머리 자르려는 건줄 난들 알았겠어? 걔가 가위 들고 소연이 목에 댔을 때 난 정말 놀랐다고!” 소정인은 한숨을 쉬었다. “당신이 소희를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어? 잊지 마, 소희야말로 우리의 친딸이라는 것을!” 진원은 변명했다. “나도 알아, 3년 전에 걔가 집에 왔을 때 나도 잘해보려 했어. 걔가 기어코 나가 살겠다는 걸 나더러 어떻게 하라고?” “걔가 이사 가려 할 때 가지 말라고 만류라도 했어?” 소정인은 계속해서 말했다. “나도 당신이 소연이를 아끼는 건 아는데 소희는 태어나자마자 신분이 바뀌어 밖에서 온갖 고생을 했는데, 좀 잘해줄 수 없어?” 진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나도 소희에게 잘해주고 싶어. 그런데 난 20년 동안 소연이를 친딸로 아꼈는데 갑자기 어떻게 바뀌겠어? 게다가 소연이는 피아노, 그림, 바이올린 못하는 게 없고 싹싹하고 똑똑한데 소희는, 잘난 게 아무것도 없어, 예뻐하려고 해도 그렇게 안돼.” “당신 어떻게 우리 딸을 그렇게 말할 수 있어?” “걔 없는 곳에서 말하는 거잖아.” 진원은 그를 원망했다. “당신도 그래, 왜 오라고 한거야? 생일날에 오히려 분위기만 흐렸잖아!” 소희의 눈동자에서 빛이 사라졌다. 그녀는 더 이상 듣지 않고 자신의 가방을 열어 옅은 회색 장신구 상자를 문밖의 화분대에 놓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아래층에서 소연은 랙돌 고양이를 안고 있다가 소희가 내려오자 웃으며 물었다. “언니 옷 몸에 맞아?” “딱 맞아, 고마워!” “우린 자매잖아. 왜 그렇게 예의를 갖춰?” 소연은 얼굴에 순진한 미소를 띠었다. 소희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금 전화받았는데 학교에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아빠한테 대신 말해줘.” “이렇게 급하게? 아직 케이크도 안 먹었는데!” 소연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한테는 생일에 폐를 끼쳐서 죄송하다고 전해줘.” 소희는 한마디 하고는 문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새 밖에는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렸고 바닥은 흠뻑 젖어 있었다. 소연은 고개를 돌려 외쳤다. “장 씨 아주머니 진 씨 삼촌은요? 진 씨 삼촌에게 차로 언니 데려다주라고 말 좀 해주세요.” 장 씨 아주머니는 달려와 바깥의 비를 보고는 탄식했다. “아이고, 공교롭게도 아저씨가 사모님 케이크 가지러 갔는데 아직 안 오셨네요.” “제가 알아서 갈게요. 아주머니 우산 하나만 부탁해요.” “아, 네!” 장 씨 아주머니는 돌아서서 들어가더니 다시 우산을 들고 나와서 소희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이 우산도 몇십만 원 짜리니까 조심해서 쓰셔야 할 거예요.” 소희의 눈에는 경멸이 흘렀고 얼굴에는 아무런 기색도 없이 우산을 펴고 가랑비 속으로 걸어갔다. 소희가 대문을 나서자마자 소연은 마당에서 진 씨 아저씨가 우산을 쓰고 걸어가는 것을 보았다. 장 씨 아주머니는 멋쩍은 듯 말했다. “내 정신 좀 봐, 아저씨가 30분 전에 돌아왔는데 깜빡했네요, 이 날씨에 아가씨를 걸어가게 하다니...” 소연은 고양이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장 씨 아주머니가 요즘 너무 고생이 많네요. 시간 나면 엄마한테 월급 올려드리라 말씀 드릴게요.” 장 씨 아주머니는 대뜸 얼굴이 활짝 피었다. “고마워요 아가씨, 앞으로 아가씨 시키는대로 할게요.” 소연은 위층으로 올라가 화분대에 있는 장신구 상자를 들었다. 막 열려는데 소정인과 진원이 방에서 나왔다. 소희가 간 것을 알고 진원은 오히려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정인은 진원의 생일날까지 싸우기는 싫어서 화제를 돌렸다. 소연이 들고 있는 함을 보고는 웃으며 말했다. “엄마 선물이야?” 진원은 웃으며 받아서 열어보더니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거 GK가 갓 출시한 신상이잖아? 디자인 별로 한 세트뿐이라 쉽게 구할 수 없는 건데. 소연이가 엄마 생일에 선물하려고 준비한 거야?” 소연의 눈에 놀란 기색이 스쳐지났다. 그녀는 웃기만 할뿐 부정하지 않았다. “엄마가 마음에 들어하니 다행이에요!” “우리 소연이 사랑해!” 진원은 감동하며 소연을 끌어안았다. 앞서 소희를 때린 것에 대한 미안함도 한순간에 사라졌다. 소희는 집을 나와 길을 걸었다. 이쪽은 별장 구역이라 버스가 다니지 않았고 택시도 거의 없었다. 비가 우산을 때리는 소리가 귀로 들어와 마음을 어지럽혔다. 소희는 빗물을 밟으며 유유히 걸었다. 봄비 내리는 싸늘한 기온은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았다. 거리에는 자가용차들이 쌩쌩 지나다니고 있었다. 그중 한 벤틀리의 조수석에 앉은 소녀가 갑자기 차창밖을 내다보더니 뒷좌석의 남자를 보며 말했다. “삼촌, 제가 학교 친구를 봤어요. 여긴 버스가 없는데 좀 태워도 되죠?” 임구택은 손에 든 서류를 보며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임유림은 기사에게 후진하라고 한 뒤 창문을 내려 소희를 향해 소리쳤다. “소희야, 타!” 소희는 깜짝 놀랐다. “임유림?” 둘은 같은 과지만 친하지는 않았다. 임유림이 웃으며 말했다. “빨리 타, 타고 나서 얘기해.” “고마워!” 소희는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차 문을 열어 우산을 접고 앉았다. 소희는 곁눈질로 뒷자석에 사람이 있는 것을 보고 고개를 돌려보고는 굳어버렸다. 제 6 화 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손에든 서류를 보고 있었다. 임유림은 고개를 돌려 웃으며 물었다. “소희야, 과외하러 온 거야?” 그녀는 소희의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이곳이 부자동네여서 당연히 과외 하려 온 줄 알았다. 소희는 웃어 보였다. “널 만나서 정말 다행이야.” 그녀는 임유림이 임구택 형의 딸, 즉 그의 조카라는 걸 어떻게 잊었단 말인가? 거의 3년 동안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데 최근에만 일주일에 3번을 만났다. 그들을 주선해 준 중매쟁이가 드디어 깨어난 건가요? 임유림은 돌아보며 소희에게 소개해 주었다. “이분은 내 둘째 삼촌이야!” 소희는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안녕하세요!” 임구택은 목소리가 익숙한 것 같아 고개를 들어보니 그녀가 또 있어 눈을 가늘게 떴다. 소희는 손에 들고 있는 우산 손잡이를 꽉 쥔 채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임유림은 열정적으로 소희와 대화를 나눴다. “주경이가 고석 좋아하는 거 아니야?” 소희는 어제의 일을 떠올리며 답하였다. “그런 것 같아!” 소희는 무의식적으로 임구택을 바라보며 미소를 띠며 답했다. “나와 고석은 그냥 친구야, 그가 누구와 함께 있는 나랑 상관없어. 임유림이 계속해서 그녀에게 눈치를 보내니 소희의 마음속이 불안해졌다. 그녀가 결혼을 합의 때문에 하긴 했지만 어쨌든 지금 그녀는 결혼한 신분이다. 시내로 들어서자 앞쪽에 사고가 나 차가 막혔다. 임유림은 고픈 배를 움켜쥐며 말했다. “길 언제 뚫리지, 배고픈데 먼저 밥 먹으러 갈까?” 소희는 답혔다. “나 여기서 내릴게 나 학교 가야 해.” “학교는 무슨, 점심인데 같이 밥 먹으러 가자.” 임유림은 이미 스스로 결정을 내린 듯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임구택은 시계를 보고 명우에게 차를 세우라고 지시했다. 세 사람은 프렌치 레스토랑에 들어가 앉았다. 임유림은 소희가 이런 고급 레스토랑에 와본 적이 없을까 봐 소희에게 물어본 뒤 대신 주문해 주었다. 임유림이 음식을 주문하고 화장실에 가자 자리에는 임구택과 소희 둘만 남았다. 소파에 기대어 나른한 자세로 핸드폰을 보는 임구택의 이목구비는 눈을 뗄 수 없게 만들었다. 소희는 잘생긴 남자에게 시선을 두자 어렴풋이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남자는 다정하면서 열정적이었고 몸짓은 지금의 우아함과 전혀 달리 아주 사나웠다. 그날 밤 그녀가 왜 화가 났고 만 원짜리 한 장을 남겼는지 그녀는 모두 잊은 듯했다. 지금 여기 앉아서 맞은편 남자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때의 일은 전혀 억울하지 않았다. 맞은편의 시선을 느낀 임구택은 이마를 찡그리며 눈을 들어 올려다보았다. 소희는 아무렇지 않은 듯 눈을 떼 창밖을 내다보았으나, 귀밑이 이미 붉어져있었고 죄를 지은 듯이 보였다. 임구택은 얇은 입술로 가볍게 입을 열었다. “이름이 뭐예요?” 소희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소희입니다.” 남자는 놀라지 않은 듯 보였고 이름 또한 낯설게 느껴지는 듯했다. 기억을 못하는 것 같았다. 소희는 속으로 자신과 결혼한 사람의 이름조차 신경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마침 웨이터가 디저트를 가져오고 소희의 핸드폰에도 메시지가 오면서 두 사람의 대화는 끊겼다. 휴대폰을 열었다. 연희 ‘소희야 내가 누굴 봤는지 알아? 임구택! 어떤 여자랑 같이 밥 먹고 있어, 나랑 등지고 있어서 어떻게 생겼는지는 안보이네, 귀국하자마자 어떤 여우랑 데이트하는 거야, 자기가 결혼한 것도 잊은 건가?’ 소희는 핸드폰을 쳐다보며 여러가지 생각이 뒤섞여 한참 만에야 답장을 보냈다. ‘미안해, 그 여우가 바로 나야.” 성연희는 소희의 오랜 친구이자 절친한 친구였고, 아버지인 소정인을 제외하면 소희가 임구택과 결혼했다는 걸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연희는 놀란 표정을 짓다가 곧 답장을 보냈다. ‘네가 어떻게 임구택이랑 같이 있어? 서로 알아보긴 했어?’ 부부가 서로 알아봤냐고? 소희는 이 메시지를 보고 말문이 막혀 눈을 들어 남자를 힐끗 바라보였다. ‘아니, 우연히 만난 거야, 이따 다시 얘기하자.’ 성연희는 이미 흥분한 상태인데 어찌 멈출 수 있겠는가? ‘나 3층에 있어, 내가 너한테 로 갈게.’ 소희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거기 가만히 있어!’ 연희가 다시 한번 애처로운 이모티콘을 보냈지만 소희는 아랑곳하지 않고 핸드폰을 껐다. 어디선가 갑자기 우아하고 상큼한 향수 냄새가 났다. GK 베이지 슈트를 입은 여자가 다가와 임구택의 옆에 앉아 임구택에게 화를 냈다. “오전에 전화해서 밥 먹자니까 시간 없다며, 다른 사람이랑 약속 있던 거야?” 임구택은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선약이 있었어.” 여자는 가볍게 웃었지만 소희를 보는 시선은 날카로웠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소율이라고 해요, 이름이 뭐예요?” 여자의 적의를 눈치챈 소희가 입을 열려고 하자 임구택은 갑자기 디저트를 그녀 앞으로 밀었다.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지만 알 듯 말 듯한 다정함이 묻어났다. “레드베리 무스 좋아하잖아, 먹어.” 소희는 레드베리 무스를 좋아하지 않았지만 순순히 숟가락을 들었다. 한소율의 얼굴은 못생겼지만 여전히 웃음을 유지하며 입꼬리를 찡그렸다. “이름만 물었을 뿐인데, 왜 이렇게 감싸는 거야, 내가 잡아먹기라도 할까 봐?” 임구택의 얼굴에는 표정 변화가 없었다. “겁이 많고 낯을 많이 가려서.” 소희는 입에 있는 무스를 힘껏 삼켰다. 한소율은 비꼬듯 웃었다. “겁이 많다고? 난 지금까지 자기 외모 믿고 까부는 애들 다 내쫓았어, 임구택 너도 조심해.” 그는 대수롭지 않은 듯 여겼다. “예쁘면 됐지, 난 다른 거 바라지 않아.” 소희의 숟가락 잡은 손이 떨렸다. 케이크를 먹을 수가 없었다. 한소율은 임구택이 앞에 있는 여자를 보호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마음만 답답할 뿐 감히 임구택 앞에서 화풀이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한소율은 이럴 때일수록 매너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자각하고 일어나 우아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식사 방해 그만하고 이만 일어날게, 나중에 집에 어머님 뵈러 갈 때 다시 보자.” 임구택의 미적지근한 대답과 함께 한소율은 씁씁한 마음을 뒤로하고 떠났다. 소희는 접시에 담긴 케이크를 반쯤 먹고 여자가 떠나자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임구택이 말했다. “아까 한 말은 오해하지 않으셨으면 해요.” 소희도 담담하게 말했다. “알겠어요, 대신 밥 사주세요, 저도 한 번 도와드렸으니 비긴 걸로 하죠.” 제 7 화 임구택은 의아한 듯 그녀를 한 번 더 보았다. 때마침 임유림이 돌아오자 그녀는 소희 옆에 앉아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고등학교 동창 만나서 잠시 얘기하다 왔어.” 웨이터가 음식을 가져오고 나서 세 사람은 밥을 먹기 시작했다. 임유림은 소희와 함께 학교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다. 식사를 마치고 세 사람이 출발할 때 성연희 일행을 만났다. 성연희도 손님에게 식사를 대접하고 나오다가 문 앞에서 마주쳤지만 두 사람은 모르는 척하며 스쳐 지나갔다. 두 명의 사장님은 임구택을 알아보고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밖은 이미 비가 그치고 길도 뚫린 상태였다. 명우가 차를 몰고 세 사람을 태웠다. “소희야, 어디로 가?” 조수석에 앉아 있던 임유림이 물었다. “가는 길이면 강성대 앞에 세워주면 돼.” “가는 길이라 문제없을 거예요.” “우리 삼촌은 말도 참 예쁘게 하네.” 임유림이 의미심장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소희는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전에 했던 독설을 듣지 않았다면 아마 단순하게 믿었을 것이다. 학교에서 잠시 떨어진 곳에서 임유림과 소희는 잡담을 나누고 임구택은 옆에 앉아 서류를 살펴보고 있었다. 오늘 두 명의 부부는 같은 차에 동승했고 소희는 묘한 느낌을 받았다. 차는 학교 입구 앞에서 멈추었고 소희는 차에서 내리기 전에 유림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 유림아.” “뭘, 다음에 밀크티 한잔 사줘.” 임유림은 눈매가 날렵하면서 귀여웠다. 소희는 웃으며 동의했고 자신의 우산과 가방을 들고 내렸다. “감사합니다, 임 선생님.” 임구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네.” 소희는 차에서 내려 손을 흔들며 임유림에게 작별 인사를 했다. 소희는 버스정류장으로 가 버스를 기다렸다. 차에서 유림은 갑자기 생각나는 것이 있는지 돌아서며 임구택에게 말했다. “삼촌, 저 소희에게 유민이의 가정교사를 맡기고 싶어요.” 그녀의 부모님은 자주 집을 비우셨다. 며칠 전에는 런던 경제 세미나에 참석하러 갔고, 이번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모시고 가셨다. 유민이의 가정교사는 핑계를 대고 사직했고, 이제 그녀가 유민이를 가르쳐야 하니 그녀는 서둘러 그녀를 대신해서 분담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 임구택은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었다. “전문 가정교사는 필요 없다 그러더니, 학생이 뭘 할 수 있는데?” 임유림은 지지 않고 대답했다. “전문적인 거랑 무슨 상관이죠, 게다가 소희는 과외를 해서 학비를 벌고 있는데 제가 그녀를 도와주고 싶어요 불쌍해요.” 임구택은 아직 졸업도 하지 않은 학생을 불신했다. “네가 직접 돈을 주면 되잖아.” “걔도 자존심이 있잖아요. 삼촌 허락해 주세요. 아니면 소희 보고 먼저 해보라고 하는 건 어때요? 유민이가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알아서 그만두겠죠.” 임구택은 유민이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면 먼저 해보라고 해봐!” 임유림은 흥분하여 고개를 끄덕였다. “좀 이따 제가 전화 해볼게요!” 소희는 버스에서 내려 디저트 가게에 가서 잠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눈 뒤 날이 저물 무렵에야 별장으로 돌아왔다. 문을 들어서자 설희가 그녀에게 애교를 부렸다. 설희는 사모예드로 임구택의 애완견이다. 소희가 별장에 처음 왔을 때 설희는 겨우 3개월이 지날 무렵이었고, 그녀는 설희를 3살까지 정성스럽게 키워주었다. 그녀는 항상 다른 사람의 아들을 대신 키워주는 느낌을 받았다. 별장에는 그녀를 돌보는 하녀, 나이 많은 집사까지 3명의 사람과 한 마리의 강아지가 3년 동안 같이 살고 있었고 이미 가족처럼 친근했다. 설희와 잠시 놀고 난 후 그녀는 올라가 샤워를 하였다. 샤워를 마치자마자 임유림의 전화를 받았다. 임유림은 전화로 소희에게 자기 집에서 동생의 가정교사를 해줄 수 있는지 물었다. 임구택의 집에서 가정교사를? 소희는 상상을 해보았지만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전문적인 가정교사가 아니야, 유민이한테 방해만 될 것 같아, 다른 구인 회사에서 구해봐.” “그동안 전문적인 가정교사 써봤는데 유민이가 다 싫어했어. 소희야 나 좀 도와줘. 우리 가족들도 집에 없고 삼촌도 바쁘니까 나 좀 도와준다고 생각하면 안돼?”임유림은 낙천적인 웃음과 애교를 섞어서 부탁하였다. 소희는 한참 동안 유림에게 시달리다가 결국 한번 해보겠다고 약속할 수밖에 없었다. “내일 우리 집으로 와, 집에서 기다릴게.” 임유림은 말을 마친 뒤 소희가 거절할까 봐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소희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핸드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곧 유림에게 메시지가 왔다. “소희야 너희 집 어디야? 내일 기사님 보고 데리러 가라고 할게.” 소희는 답장했다. “아침 9시까지 강성대 입구에서 기다릴게.” “그럼 약속한 거다!” 전화를 끊은 소희는 잠시 멍하니 있었고 설희가 소파에 뛰어올라 소희의 잠옷을 물어뜯었다. 소희는 설희 뭄에 가볍게 기대며 웃어 보였다. “내일 너희 주인님 보러 갈 건데 할 말 있으면 전해줄까?” 설희는 고개를 들어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두드렸다. “바보, 바보!” ...... 저녁에 성연희와 전화로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희는 임씨 집안의 집으로 가서 임구택의 조카에게 과해를 해준다는 얘기를 했다. 성연희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결국 흥분하며 말했다. “드디어 당당하게 집으로 들어갈 기회가 왔으니 그를 공략해서 덮친 다음에 계약이 끝나기 전에 그와 잠을 자고 이혼서류를 그의 얼굴에 던져버려! 정말 짜릿할 거야!” 소희는 2초간 침묵한 채 단호하게 전화를 끊었다. 그녀는 더 이상 듣다가는 연희에게 세뇌당할까 봐 두려웠다. 그녀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만약 앞으로 임구택을 자주 마주치게 된다면 그에게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지? ...... 다음날, 8시 50분에 소희는 강성대 입구에 도착하여 5분을 기다렸고, 벤츠 한 대가 소희 앞에 멈추었다. 운전기사가 차에서 내려 예의 바르게 물었다. “소희 아가씨 맞나요?” 소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운전기사는 부드럽게 말하였다. “유림 아가씨의 부탁으로 왔습니다” 소희는 고맙다는 표시를 한 뒤 차에 올라탔다. 임씨 집안의 집은 성남에 위치해 있고 외벽은 검은색의 철책, 덩굴로 뒤덮여 있었다. 자동차는 벽을 따라 10분 동안 다라려 문 앞에 이르렀고 검은 철문을 통과하면 단톡주택의 별장과 정원이 보였다. 입구를 지키던 하인이 문을 열고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에게 들어오라고 하였다. 소희가 신발을 갈아 신고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검은 그림자가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소희는 순간 당황하며 다리를 들고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누군가 계단에서 내려오는 것을 보고 판단할 틈도 없이 남자에게 안겼다. 그녀는 설희를 제외하고는 모든 개를 무서워했다. “데이비드!” 남자는 옅은 목소리로 경고했다. 달려들던 개는 갑자기 임구택의 발치에 멈춰 서더니 고개를 젖히고 소희를 살펴보았다. 임구택은 고개를 돌려 안긴 여자를 쳐다보았다. “떨어지지 않으면 성추행으로 신고합니다!” 소희는 눈을 깜빡이며 남자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 뒤엔 흉터가 있었는데 몇 년이 지나 흉터가 희미해지긴 했지만 여전히 남자의 몸에 자리 잡고 있었다. 임구택은 눈썹을 찌푸리며 손을 뿌리쳤다. 소희는 여전히 그를 끌어안은 채 속삭였다. “개보고 먼저 가라고 해주세요!” 제 8 화 임구택은 그녀의 얼굴을 힐끗 보았다. 희고 부드러우며, 붉은빛이 돌았다. 마치 구름이 노을빛을 머금은 것 같았고 붉은빛은 그녀를 더욱 앳되게 보이게 해 대학생이 아니라 고등학생처럼 보였다. 그는 데이비드를 물러나게 한 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이제 떨어져도 좋아요.” 소희는 일단 한 번 돌아보고 나서야 그에게서 떨어졌고 바로 남자 뒤에 숨어서 강아지에 눈을 떼지 못했다. 남자는 가볍게 웃은 뒤 데이비드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남자의 뒷모습을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남자의 몸에서 은은한 향기가 나는 게 마치 봄에 내리는 가랑비의 냄새 같았다. 남자는 데이비드에게 다가가 목을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데이비드는 보통 사람을 공격하지 않습니다.” 소희는 남자의 말에 속뜻을 헤아렸다. 무슨 뜻이야? 내가 사람이 아니라는 거야? 그녀는 그 개를 보고나니 그제야 셰퍼드라는 것을 깨달았다. 보통 셰퍼드보다 더 커서 사람을 놀래키기엔 충분해 보였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그의 담담한 태도를 흉내 내며 말했다. “익숙한 말이네요, 애꿎은 행인이 개한테 물렸다는 소식은 뉴스에서 많이 접했어요.” 임구택은 가볍게 코웃음을 쳤다. “나이가 어릴 땐 이가 아주 날카롭죠!” 소희가 막 말을 하려고 할 때 임유림이 웃음을 띠며 내려왔다. “소희야 너 왔구나!” 그녀는 연한 화장을 한 채 내려와 소희에게 인사를 건넸다. “부모님은 안 계시고 평소엔 집에 거의 사람이 없어. 여긴 우리 삼촌 어제 봤지? 삼촌이라고 부르면 돼!” 소희는 임구택을 바라보며 파리를 먹은 듯한 표정으로 입을 오므렸다. 임구택은 아까의 일을 복수하듯 담담하게 쳐다보며 말했다. “어른을 만났는데 인사도 안하나요? 인사예의도 모르면서 가정교사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있을지 의문이군요.” 임유림은 임구택이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른 채 임구택에게 눈치를 줬고 임구택은 못 본 척했다. 소희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이빨 사이로 두 글자를 짜내는 듯했다. “삼...촌!” 임구택은 폼을 잡으며 데이비드를 데리고 소파에 앉았다. “네, 좋아요.” 이렇게 날뛰는 임구택을 보고 있자니 소희는 그제야 그가 예전에 강성의 악질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유민이는 위층에 있어, 나랑 같이 올라가자.” 임유림은 소희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소희는 나무 마루를 밟고 올라가면서 아래를 보았다. 셰퍼드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는 모습이 아주 조화로워 보였다. 소희는 갑자기 설희를 떠올렸다. 설희는 사실 줄곧 임구택을 잊지 않았다. 그의 예전 서재 밖에 엎드려서 안에 소리를 들으려 하는 모습이 주인이 아직 안에 있는 줄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임구택은 이미 새로운 애완견이 있었고 설희는 잊은지 오래다. 유림은 계단을 돌며 사과했다. “처음부턴 널 곤란하게 해서 미안해, 아직 삼촌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 약점을 숨기려는 단점이 있어. 오늘 삼촌께 너의 가정교사 일을 승낙해달라고 얘기했으니 앞으로 네가 그를 찾을 일이 있으면, 삼촌은 반드시 널 도와줄 거야.” 소희는 마음속으로 그에게 도움을 청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하자, 그녀는 다시 미소를 찾았다. “고마워, 유림아.” “아니야, 우리가 친하진 않았어도 난 항상 널 존경하고 너와 친구하고 싶었어.” 소희는 싱긋 웃었다. “우리 이미 친구야!” 임유림은 상큼하게 웃으며 소희의 손을 잡았고 소희는 순간적으로 긴장했지만 피하지는 않았다. 유민의 방문 앞까지 온 뒤 유림은 방문을 두드렸다. “유민아, 나 들어간다!” 안에서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고 유림은 직접 문을 열고 들어갔다. 작은 거실에는 오른쪽엔 화장실, 왼쪽엔 침실이 있었고 인테리어는 모두 남자아이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열 살쯤 된 남자아이가 소파에 틀어박혀 태블릿을 안은 채 게임을 하고 있었고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를 들었지만 고개를 들지 않았다. “임유민, 새로 오신 가정교사 선생님이야. 내 학교 친구니까 괴롭히지마!” 임유림은 일부러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알았어, 몰랐어!” 임유민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지만 “응”한마디 하고 다시 게임에 열중했다. 임유림은 심호흡을 하고 화를 억누른 채 소희에게 말했다. “내 동생이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포기하지 마!” “걱정하지 마!”소희는 유림에게 안심의 눈빛을 보냈다. 승낙한 이상 열심히 잘해야지, 임구택은 싫지만 유림이는 나한테 잘해주잖아. 유림은 임구택의 전화번호를 소희의 핸드폰에 저장해놨다. “난 약속이 있어 먼저 가볼게. 유민이가 괴롭히려 하면 삼촌 불러!” 소희는 그녀가 유민에게 맞는다고 한들 임구택은 신경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유림이 떠나고 나서 소희는 방을 한 바퀴 돌고 책상으로 갔다. 숙제는 하나도 되어있지 않은 채 제자리에 놓여있었다. 그녀는 소파 앞으로 가 유민이 옆에 앉았다. “숙제도 안 하고 놀기만 하네. 부모님이 해주기를 바라는 거야?” 그의 부모님이 떠나자마자 가정교사는 그만두었다. 유민이 일부러 가정교사를 괴롭혔기 때문이다. 유민은 게임을 하던 손을 멈추고 한 번 힐끗 쳐다보더니 나이를 뛰어넘는 눈빛으로 그녀를 보았다. “쓸데없이 참견하지 마, 아니면 너도 금방 그만두게 만들 거야.” 소희는 동요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반항으로 부모님 관심을 끌려 하는 건 유치한 행동이야.” 유민은 손에 있는 태블릿을 꽉 쥐고 굳은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소희는 고개를 내밀고 말했다. “숙제 먼저 하고 나랑 같이 게임하는 건 어때?” 유민은 비웃었다. “아까는 나를 그렇게 비웃더니 이제와서 아이 다루는 것 마냥 달래려고 하는 거야? 너희 어른들은 항상 이런 식이야?” 소희는 눈살을 찌푸렸다. “누가 어른이야? 나도 아직 아이야!” 임유민은 그녀의 진지한 얼굴을 보다가 잠시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 피식 웃었다. 소희는 마지못해 미소를 지으며 휴대전화를 꺼내들었다. “됐어, 나도 게임할 거야, 너랑 게임이나 좀 하다가 가야겠다.” 임유민은 그녀를 의심스러운 듯이 바라보았다. 소희는 이미 게임을 켠 채 담담하게 말했다. “진짜야. 나도 원래 너 가르칠 생각 없었어. 너희 누나가 날 불쌍하다고 생각해서 여기 오게 했을 뿐이야.” 임유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뭐가 불쌍해?” 소희는 목소리를 낮췄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없이 할아버지가 키워주셨어. 나무 장사하시면서 힘들게 돈을 벌어 학교 보내주셨는데 며칠 전부터 할아버지가 아프셔, 돈 벌어서 할아버지 병원에 보내드려야 해.” 소희는 말하면서 글썽거리기까지 했다. 임유민은 눈썹을 찡그리며 잠시 망설이다가 태블릿을 내려놓았다. “네가 내 가정교사가 되면 네 할아버지 병 고칠 돈이 생기는 거야?” 소희는 속으로 도박이 성공했다며 기뻐했다. 유민은 부모님과 지내는 시간이 적어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정이 더 깊었다. 다른 사람의 할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을 듣고 나니 약간의 정이 들었다. 소희는 슬픔을 감추려는 듯 고개를 돌렸다. “맞아, 널 가르치는 게 돈을 훨씬 많이 벌어, 이게 할아버지 병원 보낼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이야.” 임유민은 마지못한 얼굴을 한 채 말했다. “그래, 내가 너 여기 있게 해줄게, 하지만 네가 아니라 네 할아버지 때문이야.” 소희는 웃고 싶었다. 그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그녀의 할아버지까지 신경을 썼다. 그녀는 내색을 하지 않고 약간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 것도 중요하지만 너도 나한테 협조해야 해. 숙제 빨리해줬으면 좋겠어. 만약 내가 여기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는 걸 너희 삼촌이 알게 되면 날 내쫓으려 할 거야.” “정말 귀찮게 하네!”유민은 태블릿을 버리고 책상으로 갔다. “그럼 빨리하자! 그리고 아까 숙제 끝나면 나랑 게임하기로 했던 거 잊지 마!” “Yes, sir!” 소희는 웃으며 일어났다. ...... 한 시간 동안 아래층에 머물던 임구택은 위층으로 올라가 유민의 방을 지나쳤다. 그는 문득 소희에게 유민을 훈육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궁금해졌다. 문이 반쯤 열려 있었고 임구택이 다가가기도 전에 안에서 소희가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죽겠다!” “어디야, 내가 금방 구하러 갈게!” 유민이 화내는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야 이 초보야! 누굴 때리는 거야! 그건 나야!” “어?” 임구택이 문을 밀고 들어서자 게임에 빠져있던 소희가 고개를 든 채 멍한 표정을 지었다. “뭐하고 계시는 거죠?” 남자가 침울한 표정으로 물었다. 제 9 화 소희는 손을 뒤로 숨기고 싶었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아 그러지 못했다. 게임에서는 그녀가 유민을 쏴 죽이고 그녀도 다른 사람 총에 맞아 죽었다. 소희를 발로 차고 싶은 충동을 참은 유민은 그녀를 옹호하였다. “둘째 삼촌, 숙제 다 했어요!” 임구택은 의외라는 듯 소희의 얼굴을 힐끔거리며 책상 앞으로 걸어갔다. “보자.” 유민은 숙제를 꺼내서 임구택에게 보여주었다. 과연 다했을 뿐만 아니라 채점도 다하고 틀린 문제도 고쳤다. 심지어 어떤 문제는 오답노트까지 써놓았다. 임구택은 의아해하며 고개를 돌려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태연하게 그를 마주 보며 말했다. “유민이가 숙제 다 하면 게임 같이 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임구택은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숙제를 내려놓고 유민에게 말했다. “숙제 잘했네, 계속 게임해!” 임구택은 말을 마친 뒤 걸음을 옮겨 방을 나갔다. 소희는 그제야 숨을 내쉬었고 유민과 눈을 마주쳤다. 유민이 비웃었다. “삼촌이 그렇게 무서워?” 소희는 입을 열었다. “설마 넌 안 무서워?” 유민은 눈썹을 치켜세웠다. “삼촌이 화나면 날 때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너는 때리지도 못할텐데 넌 뭐가 무서워?” 소희는 목이 메었다. “누... 누가 무섭대?” 유민은 야유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소희는 짜증이 나서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삼촌 얘기하지 말고 게임이나 하자.” 유림은 다시 태블릿을 집어 들고 위협했다. “또 나 쏘면 내가 너 먼저 죽인다!” 소희는 미소를 지었다. “안 그럴게!” ...... 소희가 집에 갈 땐 임구택을 마주치지 않았고 별장을 떠난 후 그제야 그녀는 마음이 탁 트였다. 어떤 사람은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받게 한다. 임구택은 오전 내내 외출하지 않았고, 점심에는 유민과 단둘이 10개의 반찬과 국을 곁들여 밥을 먹었다. 임구택은 먼저 국물을 몇 모금 마시고는 숟가락을 내려놓으며 물었다. “새로운 선생님 어때?” “좋아요!”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구택은 가볍게 비꼬았다. “너랑 게임 같이 해줘서?” 유민은 대수롭지 않은 듯 넘겼다. “나랑 게임 같이 했던 사람 많은데 그 사람들 보고 괜찮다고 한적 없어요!” 그는 무심한 듯 말했다. “사실 그녀가 불쌍해요!” “왜 그녀가 불쌍해?”임구택이 무심코 물었다. 유민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릴 때부터 엄마 아빠 없이 할아버지 한 분만 계셨고 할아버지가 지금 아프시대요.” 임구택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 “그녀가 말해준 거야?” “네!” “그렇다고 해도 그 이유 때문에 그녀를 좋다고 하면 안 돼. 난 가정교사를 고용하는 거지 빈곤을 구제해 주려는 게 아니야.”남자는 담담하게 말했다. 유민은 잠시 생각한 뒤 대답했다. “이것 때문만은 아니지만 어쨌든 난 이번 선생님과 같이 하고 싶어요.” “알겠어!”임구택은 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어쨌든 네가 좋다면 그걸로 된 거야.” 유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구택은 소희가 진짜 사연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정도의 능력은 있다고 생각했다. ...... 소희는 임씨 집안 운전기사의 차를 타고 강성대 입구에서 내린 뒤 버스를 타고 중산별장으로 들어갔다. 버스가 교외를 지나자 도로가 점점 넓어지고 양쪽에 푸른 나무가 그늘을 이루며 넓은 삼림공원이 나왔다. 그 뒤에는 강성의 유명한 호수와 호수 건너편의 산들이 펼쳐졌다. 도심에 비해 이곳은 그야말로 지상낙원이다. 스쿠터를 가지러 갈 때 밀크티 가게의 직원인 청아가 소리 그녀를 불렀다. “소희야, 잠시 앉았다 가!” “그래!”소희가 대답했다. 가게에 들어가니 손님은 많지 않았고 청아는 소희를 창가에 있는 나무의자에 앉혔다. “잠시만 기다려줘!” 통나무 탁자 위에는 유리 꽃병이 놓여 있었는데, 활짝 핀 노란 데이지 꽃이 오늘 상쾌한 날씨와 잘 어울렸다. 청아는 쟁반을 들고 와 쟁반 위의 디저트를 하나씩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황도 푸딩, 초콜릿 무스, 패션후르츠 밀크티 한 잔이 나왔다. 소희는 눈이 맑아졌다. 모두 그녀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먹어, 다 네 거야! 청아는 동그란 얼굴에 검은 뿔테를 쓰고 있었고 웃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가 매우 귀여웠다. 소희는 푸딩을 앞에 두고 숟가락을 들고 먹기 시작했다. 청아는 두 손으로 턱을 괴고 빙그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외출할 때마다 스쿠터를 밀크티 가게 밖에 두고 다녔는데, 한두 번 방문하다 보니 친구가 되었다. “소희야 이번 여름 방학 때 인턴직 어디로 갈거야?” 청아가 물었다. 소희는 숟가락을 든 채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 생각 못 했어.” “그럼 꿈 있어? 아니면 하고 싶은 거나?” 소희는 생각한 뒤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청원 별장 사고 싶어.” 그녀는 청원 별장을 좋아하지만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만약 그녀가 임구택과 이혼한다면 그녀는 이사를 가야 한다. 청아는 책상을 두드렸다. “좀 더 현실적인 걸 생각할 순 없어?” 소희는 말없이 푸딩을 다 먹은 뒤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참, 소희야, 청원 별장에서 일하다가 임구택 만난 적 있어?” 갑자기 청아가 화제를 돌렸다. 청아는 지금까지 소희가 청원 별장에서 하녀로 일하며 학비를 번다고 알고 있었다. 소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니.” “그렇구나!”청아는 턱을 괴었다. “정말 아쉽네.” 청아는 건축학을 전공했다. 청원의 중산별장은 임구택이 직접 설계 후 지은 것으로 알려져서 청아는 지금까지 임구택을 존경해왔다. 두 사람은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소희가 돌아가려 하자 청아는 그녀에게 케이크 한 조각을 더 갖다주었다. 소희는 케이크를 들고 스쿠터를 탄 채 청원으로 들어갔다. 청원은 개인이 소유한 작은 산이다. 산길을 따라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어 하늘을 가려 햇빛을 완전히 가리고 숲길에 들어서면 더욱 건조해져 정신이 맑아지고 더위를 쫓아낼 수 있었다. 별장은 산 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철문이 양옆으로 자동으로 열리고, 안에는 넓게 조성된 잔디밭, 백 년이 넘은 나무 한 그루... 오른쪽엔 넓은 창을 통해 설희가 카펫 위에 엎드려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녀가 오는 것을 보자 설희는 쏜살같이 뛰어나왔다. 소희는 설희를 끌어안으며 임구택이 키우고 있는 개를 떠올렸다. 그녀는 임구택의 개를 조금 안타까워하며 케이크 상자를 두드렸다. “좀 이따 반 나눠줄게!” 설희는 더욱 흥분하며 소희 주위를 계속 맴돌았다. 설희는 그녀가 신발 갈아 신는 것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 왜 이렇게 착하지?”소희의 웃는 모습이 마치 꽃처럼 예뻤다. 오 씨 아주머니가 나와 소희의 손에 든 케이크를 건네받으며 가볍게 웃어 보였다. “아가씨가 케이크 드시고 싶었으면 저한테 말씀만 해주시면 되는데, 밖에서 만든 건 맛없잖아요.” “청아가 준 거예요!” 소희는 오 씨 아주머니는 여러 가지 간식 만들어서 소희에게 주는 건 좋아하지만 소희가 밖의 음식을 먹는 건 싫어한다고 설명해주었다. 오씨 아주머니도 청아는 알고 있기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외출할 때 신선한 과일 챙겨서 청아님께 드릴게요.” “알아서 하세요!”소희는 웃으며 설희를 데리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샤워를 마치고 설희와 함께 케이크를 먹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울렸다. “아가씨.” “뭐 하고 계세요?”남자의 목소리는 매우 낮았다. “뭐 좀 먹고 있어요”소희는 대답하며 손가락에 묻은 크림을 닦았다. “방 씨 집안 셋째 부인에게 전화가 왔는데, King이 직접 디자인한 목걸이를 주문했습니다. 디자인 가격으로만 20억을 제시했습니다. 소희는 눈썹을 뽑으며 말했다. “방 씨 집안의 셋째 부인이라고요? 이번에는 통이 제법 큰데.” 이 셋째 부인은 GK쥬얼리샵에 VIP 고객으로 모델 출신이다. 비록 재벌과 결혼했지만 매너가 좋지 않아 몇천만 원짜리 보석을 사면서 십만 원짜리 포장박스 때문에 종업원과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이번에 성격이 달라진 거지? “다음 달이면 방 씨 집안의 어머님이 여든 살 생신이라 곧 재산을 나눌 때가 되어 노인네의 호감을 사려는 것 같습니다. 시간 있으신가요? 어떻게 할까요?” 소희는 가볍게 웃어 보였다. “당연히 받아야지 돈 준다는데 거절할 거에요? 한 달이면 충분해요.” “네, 그럼 내일 다시 전화드릴게요.”진석은 다시 물었다. “사무실엔 언제 오실 거죠?” 소희는 요구르트 빨대를 문 채 눈동자를 굴렸다. “주말에, 시간 다시 보고 말씀드릴게요.” “네, 기다리겠습니다!” 제 10 화 밤 10시가 넘은 시각 임유림은 그제야 집에 돌아왔다.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임구택을 힐끗 보고 무슨 말을 하려는 하인에게 눈치를 준 뒤 살금살금 위층으로 살금살금 올라가려 하였다. “이리 와!” 남자는 소파에 기대어 책을 손에 든 채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임유림은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아예 태연한 척 그에게 갔다. “삼촌, 아직 안 주무셨어요?” 임구택은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어쩐지 가정교사를 급하게 찾더라니 데이트하려고 그런 거였구나, 남자친구 있니?” “없어요!” 임유림은 고개를 즉각 고개를 저었다. “그냥 학교 친구랑 쇼핑하다 온 거예요!” “남자친구야 아니면 친구야?” 임구택은 취조하는 듯한 어조로 물었다. 임유림은 삼촌이 여우라는 것을 깨닫고 맞은편에 앉아 솔직하게 말했다. “저 남자친구 생겼어요. 우리 집이 특별한 집안이라고 해도 전 그냥 평범한 연애가 하고 싶어요. 그의 뒷조사와 우릴 감시하지 않았으면 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이고 저도 저희 집안 얘기를 한 적 없어요.” 임구택은 책을 내려놓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유림아, 연애하는 건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야, 뒷조사 안 할 테니까 네가 좀 더 조심했으면 좋겠어. 부모님이 집에 없을 땐 내가 널 책임져야 해.” 임유림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고마워요 삼촌, 둘째 삼촌이 최고예요!” “애교 부리지 말고 올라가 자.”임구택은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참, 유민이가 네 친구 괜찮다고 했으니까 다음 주부터 계속 나오라 그래.” 정말요.” 유림이의 미소가 더 환해졌다. 유림은 휴대폰을 꺼내며 위로 올라갔다. “지금 말해줘야겠다!” 임구택은 유림이 계단에 있는 것을 보고 한마디 외쳤다. “소희야, 자니?” 전화 너머로 상대방이 말하는 소리가 들리자 유림은 웃으며 답했다. “우리 삼촌이 너 잘 가르친다고 하시더라. 네가 유민이 가정교사하는 걸로 하기로 했어.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전에 수업하는 거 어때?”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그녀가 좋다고 한 적은 없었다. 임유림은 이미 계단을 올라갔고,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졌다. 그는 자신이 사소한 일까지 따질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며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마저 읽기 시작했다. ...... 월요일 오후 소희는 소정과 함께 수업 들으러 갔다. 인문대를 지날 때 갑자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몰려왔다. 맨 앞의 남학생은 키가 크고 잘생겼으며, 계속 소희를 쳐다보며 지나갔다. “고석이다!” 소정이는 흥분해서 소희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소희는 고석이 갖고 있는 장미꽃을 보자 자신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렸다. 그녀가 고개를 돌려 떠나려 할 때 앞에 있는 주경의 몇몇 친구들을 보았다. 그녀들의 안색은 좋지 않은 듯했다. 주경은 고석을 좋아하고 고석은 소희를 좋아하는 이 삼각관계는 강성대에서 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져 있었다. 잠시 후 고석은 소희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희야 난 네가 좋아, 나랑 사귀자!” 소정이는 소희보다 더 흥분한 채 계속 그녀의 팔을 꼬집고 눈치 주며 그녀가 고백을 받도록 부추겼다. 고석의 집안은 돈도 많고 잘생겼으며 학생회의 회장이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이 소희를 3년 동안 좋아했는데, 다른게 더 필요할까? 주변 사람들은 고석을 도와 더욱더 부추겼다. “사겨라! 사겨라!” 귀청이 터질 것 같은 목소리에 맞은편 본관 복도를 지나던 남자는 고함소리를 듣고 무심코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사람들 사이의 낯익은 모습이 보이자 발걸음이 저절로 느려졌다. 소희는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녀는 고석을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난 너 안 좋아해!” 고석은 얼굴이 굳어졌지만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곧 졸업이었기에 그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한 쪽 무릎을 꿇었다. “소희야 이제 밀당 그만해, 너 나 좋아하잖아, 난 이미 알고 있어!” 그는 소희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을 이유는 없다고 생각하며 그녀가 계속 밀당한다고 여기고 있었다. “난 밀당한 적 없어, 나 너 진짜로 안 좋아해!” 소희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고석은 고개를 꼿꼿이 들고 그녀를 바라보았고 다른 사람들 모두 조용해졌다. 고석이 사람들 앞에서 이렇게 고백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는데 소희가 이렇게 거절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그는 화가 났지만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소희야, 사람들 많아서 불편하면 조용한 곳 가서 얘기할까.” “난 분명히 말했어.” 소희는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으려면 싫 을땐 거절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고석의 안색이 점점 어두워졌다. “진짜 내가 싫어?” “싫어!” 소희의 말투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고석이 들고 있던 장미꽃이 떨어지고 그의 얼굴은 점점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소희를 한참 쳐다보다가 갑자기 고개를 돌려 주경을 바라보았다. “너 나랑 사귀고 싶어?” 주경은 이를 악물고 빠른 걸음으로 고석에게 다가와 물었다. “너 무슨 뜻이야?” 고석은 소희를 바라보다가 갑자기 손을 뻗어 주경의 어깨를 감싸며 그녀에게 키스했다. 주위엔 놀란 듯한 목소리로 가득했다. 소희는 지루함을 느끼며 빠르게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빠져나왔고 소정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소희를 따라갔다. “소희야!” 고석이 갑자기 목이 쉰 목소리로 소희를 불렀다. 소희는 발걸음을 멈추었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너 한 발자국 더 움직이면 정말 후회할 거야!” 고석은 눈이 충혈된 채 소희를 바라보았다. 소희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주경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고석의 팔을 밀쳤다. “넌 날 뭘로 보는 거야?” 말을 마친 뒤 소희를 한 번 노려보고 자리를 떠났다. 3층, 임구택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무표정한 얼굴로 한 편의 연극을 감상했다. “임 대표님!” 교장이 다가오며 우아한 미소를 지었다. “여기 계셨어요? 방으로 가서 차라도 한 잔 하시죠!” 임구택은 소희를 힐끗 쳐다보고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방은 답답하니 나와서 바람 좀 쐬죠.” “방금 일이 있어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네요, 방에 들어가서 얘기합시다.” 교장은 정중하게 임구택을 방으로 안내했다. 아래층에선 고석이 화를 내며 떠났고 다른 사람들도 곧 제 갈 길을 갔다. 소정은 아쉬운 듯 고석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고석도 맘에 안 들면 도대체 누가 맘에 드는 거야? 고석이 주경이랑 진짜 사귀기라도 하면 그땐 울어도 소용없는걸!” 소희는 무력한 표정을 지었다. “진짜 싫은 걸 받아줘야 해?” 소희는 잠시 뜸을 들였다. “아무도 안 좋아해!” 소정은 그녀를 힐끗 쳐다보았다. “난 네가 나 좋아한다고 말할 줄 알았어!” 소희는 의아해하며 물었다. “너 오늘 급하게 나오느라 뭐 잊은 거 아니야?” 소정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뭘 잊어?” “네 양심!” 소정은 소희의 말을 듣자마자 소희의 팔을 꼬집었다. “난 마음은 항상 널 향하고 있는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소희는 웃으며 도망쳤다. “그만해, 오늘 백 교수님 수업인데 늦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