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섭정왕의 왕비로 환생하다
비참한 죽음을 맞은 대제사장은 멍청하고 추하며 갖은 모욕을 겪고 자결한 섭정왕비의 몸에서 깨어났다. 사람들은 그녀를 모욕하고 조롱했고 그녀의 ...
Chương (1)
第1章
제1화
섭정왕부(攝政王府).
동상방(東廂房) 내 꽃무늬가 새겨진 침상 주위에 옷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낙청연(洛清淵)은 몸을 일으켜 앉더니 침상 위의 난잡한 흔적을 확인하고는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햇빛이 빨간색의 흔적을 또렷이 비추고 있었다. 어젯밤 신방(新房)에 대여섯 명의 남자들이 쳐들어왔던 기억을 떠올리니 다시 한번 수치심과 모욕감이 울컥 치밀어올라 돌연 그녀를 견딜 수 없었고 굴욕으로 인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왜 우는 것이냐? 드디어 네 바람대로 섭정왕부에 시집왔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서늘하고 낮은 목소리가 들려오자 낙청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놀란 얼굴로 고개를 돌려보니 의자 위에 정좌로 앉은 남자가 보였다.
그는 위엄 있으면서도 싸늘한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의 차가우면서도 냉담한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을 때 낙청연은 그의 시선이 칼이 되어 살을 에이는 것 같았고 온몸이 피 칠갑이 된 것 같았다.
낙청연은 순간 머릿속에서 무언가 폭발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이내 가슴 부근이 꽉 막힌 것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왕야(王爺)… 줄곧 여기 계셨습니까?”
남자는 덤덤한 어투로 말했다.
“너와 내가 혼인을 올린 날인데 본왕이 여기 있지 않으면 어디에 있어야 하느냐?”
그 순간, 낙청연은 마치 벼락을 맞은 것 같았고 온몸의 피가 얼어붙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젯밤 신방에 쳐들어왔던 남자들과 도처에 남겨진 어지러운 흔적들에 그녀는 수치스러웠고 분했는데 그녀와 함께 첫날밤을 보내야 했던 남자는 그 방 안에서 밤사이 그 남자들이 어떻게 그녀의 옷을 찢어발겼는지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왜입니까? 제가 그렇게나 미우십니까?”
정신이 완전히 무너져버린 낙청연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그녀가 가장 사랑하는 남자는 첫날밤 하인들더러 그녀의 순결을 빼앗게 했고 그녀의 몸과 마음을 더럽혔다.
낙청연은 심장이 갈가리 찢기는 고통 때문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그를 경모했었고 당시 태황태후(太皇太后)는 두 사람이 금동옥녀(金童玉女)이고 천생연분이라면서 그들의 혼인을 맺어주겠다고 말했었다.
장난삼아 한 말이었을지는 몰라도 낙청연은 그 말을 단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열세 살 때 크게 앓아눕게 되면서 낙청연은 살이 오르고 용모가 추해졌다. 그 뒤로부터 만나는 사람마다 그녀를 차가운 눈초리로 보거나 그녀를 비웃었다. 그러나 그의 시선만큼은 예전과 다를 바 없었고 그래서 낙청연은 더더욱 그가 아니면 평생 혼인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하지만 그녀를 기다리는 건 그와 그녀의 서매(庶妹) 간의 혼약이었다.
낙청연은 그와 생판 모르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그래서 동생이 자신을 대신해 혼인을 치러달라는 제의를 해왔을 때 전혀 망설이지 않았다. 그에게 시집올 수만 있다면 언젠가는 그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첫날밤을 기다렸는데 돌아온 건 죽을 정도로 괴로운 치욕이었다.
낙청연의 말에 부진환(傅尘寰)은 코웃음을 쳤다. 그는 몸을 일으키더니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가서는 고고한 자태로 그녀를 내려다보면서 말했다.
“미워한다고? 넌 너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 하는구나. 난 그냥 너를 혐오하고 역겨워하는 것뿐이다.”
첩자 따위가 공공연히 다른 사람을 대신해 그의 왕비가 되려 하다니? 게다가 그녀는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했다.
그의 말을 들은 낙청연은 목이 메어 말했다.
“그래서 사람을 시켜서 저의 순결과 정절을 더럽히신 겁니까?”
낙청연은 체념하지 못하고 그의 소맷자락을 잡으며 힘겹게 물었다.
“만약… 제가 이렇게 못생기지 않았더라면, 그랬더라면 절 조금이나마 좋아하셨을 것입니까?”
정신이 반쯤 나간 듯한 그녀의 모습에 부진환은 그녀가 더욱 역겨워졌고 그 기색이 그의 눈빛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부진환의 깊은 눈동자에 서늘한 빛이 감돌았고 뒤이어 그는 뼈를 부술 듯이 어마어마한 힘으로 그녀의 턱을 잡았다.
“설령 네 외양이 선녀처럼 아름다웠다고 할지라도 본왕은 네가 역겨울 것이다.”
말을 마친 그는 턱을 잡고 있던 손을 힘차게 뿌리쳤고 그 바람에 낙청연은 침상 위로 내쳐져서 쓰러졌다. 이불이 미끄러져 내려가 그녀의 몸에 남은 파란색 멍자국들이 드러났지만 남자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 모습을 덤덤히 쳐다봤고 낙청연은 더욱더 심한 치욕을 느꼈다.
부진환은 혐오스럽다는 듯이 옷자락을 휘날리며 떠났다.
그가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며 낙청연은 절망했다. 그녀는 멍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면서 울컥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제가 잘못했습니다…”
문 입구에 다다른 남자의 발걸음이 순간 멈췄지만 그건 단지 찰나에 불과했고 그는 곧장 옷소매를 휘날리며 방 안에서 나갔다.
낙월영(洛月盈)과 혼인하기 위해 황제에게 청을 올려 어렵게 얻어낸 혼인이었다. 그런데 저 역겨운 여자가 산통을 깬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부진환의 눈빛은 더욱더 어두워졌고 그는 남몰래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잠시 뒤, 두 계집종이 물을 받아서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낙청연은 침상 구석 쪽으로 향하면서 이불을 손에 꼭 쥔 채로 몸을 가렸지만 난잡하게 어질러진 방안 곳곳을 전부 가릴 수는 없었다.
이상한 걸 보는 듯한 그들의 시선에 그녀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계집종들이 처마 밑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얘기만 들었었는데 이렇게 확인해보니까 진짜 돼지처럼 뚱뚱하던데? 어젯밤에는 어떻게 남을 대신해서 혼인을 치렀대? 둘째 아씨는 저보다 훨씬 날씬하던데 신부를 맞이하러 갔던 사람들이 왜 눈치를 못 챘을까?”
계집종은 불쾌하다는 듯이 설명했다.
“어젯밤 어떻게 이 저택에 어떻게 섞여 들어왔는지 모르겠어. 둘째 아씨를 때려서 기절시키고는 자신이 신방 안에 들어왔잖아? 어제 왕야께서 술을 하도 많이 드셔서 하마터면 신방 안으로 들어갈 뻔했다니까. 저 여자 좋은 일을 할 뻔했어. 다행히도 왕야께서 술을 빨리 깨셨으니 망정이지, 자칫하면 저 돼지 때문에 더럽혀질 뻔했잖아.”
“세상에나! 정말 낯짝 두꺼운 사람이네. 자기 분수도 알지 못하고 우리 왕야를 넘보다니!”
그 소리는 날카롭기 그지없었고 벽을 사이에 두고 있음에도 그들의 경멸과 혐오가 선명히 느껴졌다.
저들도 그러한데 부진환은 아마도 자신을 죽도록 미워할 터였다.
아니, 밉다는 단어조차 그녀에게는 사치였다.
낙청연은 얼굴이 희게 질려서는 이불을 손에 꼭 쥐었다. 굴욕적이면서도 슬프고 비통해서 낙청연은 결국 눈물을 터뜨리며 목이 메어 말했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절대 당신의 미움을 사지 않을 것입니다…”
…
아직 정원을 채 나서지 못한 두 계집종은 방 안에서 궤가 ‘쿵’ 하고 넘어지는 소리를 듣고는 깜짝 놀라서 곧바로 방 안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 이내 방 안에서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 없습니까? 왕비 마마께서 자결하셨습니다!”
제2화
촤악.
차가운 물이 얼굴을 향해 날아왔고 낙청연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었다.
‘난 죽었는데? 왜 아픔이 느껴지는 것이지?’
어멈처럼 보이는 하인이 대야를 바닥에 내동댕이치면서 화가 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며 말했다.
“울고불고 소란 피울 생각은 마시옵소서. 왕야께서는 그런 수작에 넘어가시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제 주제를 알아야지, 감히 동생을 대신해서 혼인을 치르러 하다니요? 섭정왕부는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이 아닙니다!”
등 어멈(邓嬤嬤)은 얼굴에는 노여움이 가득했다. 그녀는 원래 집으로 돌아가 늙은 어미를 모시려 했으나 염치를 모르는 왕비가 자결 시도를 하는 바람에 다시 돌아와 그녀의 시중을 들게 되었다.
“승상부의 아씨로서 살 것이지 이런 추접한 일이나 벌리다니, 차라리 죽어버리지.”
머리 위로 욕설과 불평이 끊임없이 쏟아졌고 낙청연은 이 모든 게 낯설었다. 그녀의 것이 아닌 기억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어젯밤은 섭정왕과 낙월영의 혼인날이었다. 그러나 낙청원은 사랑을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신부로 위장하고는 방 안에 미정향(迷情香)을 피워놓고 섭정왕의 아이를 가질 생각이었다.
그런데 부진환이 결정적인 시각에 정신을 되찾았고 화가 나서 사람들을 대여섯 명 불러들였으며 낙청연은 깨어난 뒤 굴욕을 참지 못하고 절망스러운 마음으로 벽에 머리를 찧어 죽으려 했다.
몸의 원래 주인은 그를 미치도록 사랑했었고 그녀의 몸에서 그녀의 괴로움과 마지못한 심정을 느낄 수 있었다.
여국(黎國)의 대제사장(大祭司)으로서 그녀는 죽을 운명이었지만 영혼이 흩어지지 않았고 천궐국(天闕國) 승상의 딸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
그렇게 고민에 빠져 있는데 난폭한 하인이 그녀를 바닥으로 밀어서 넘어뜨렸고 그 바람에 그녀는 침대 가장자리에 머리를 찧게 되었다. 뒤이어 극심한 고통이 느껴지자 낙청연은 저도 모르게 헛숨을 들이키면서 손을 뻗어 머리를 만져봤고 피가 흥건했다.
“돼지처럼 무거운데 누가 아씨를 옮기겠습니까? 눈치 좀 챙기세요. 섭정왕부로 시집왔다고 해서 정말 안주인이라도 된 줄 아십니까?”
욕설을 퍼붓는 등 어멈의 언성이 점점 더 커졌다.
낙청연은 아픈 머리를 부여잡았고 통증과 함께 머리가 어지러웠다.
몸의 원래 주인은 정말 죽으려 작정하고 벽에 머리를 찧은 것인지 정말 너무 아팠다.
등 어멈은 그녀가 꼼짝하지 않고 있자 다시 한번 손을 들더니 그녀의 팔뚝을 세게 꼬집으며 말했다.
“제 말이 들리시지 않는 것입니까?”
낙청연은 고통으로 인해 미간을 잔뜩 구기더니 고개를 들어 어멈을 혼냈다.
“설령 내가 안주인이 아니더라도 너 같은 몸종이 내 몸에 손을 대서는 안 된다. 게다가 왕야께서 나를 내치시지 않았으니 난 명목상으로는 아직 왕비이다. 왕부의 노비 따위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것이냐!”
등 어멈은 그녀의 매서운 눈빛에 순간 소름이 돋았고 두려움이 생겼다.
그러나 다시 한번 생각해보면 보통 집안의 딸이 이토록 유별난 짓을 벌였으면 생매장을 당했을지도 몰랐다.
그녀가 아직 살아있는 건 그녀가 승상부의 아씨이기 때문이었는데 스스로를 왕비라 칭하다니?
“퉤!”
등 어멈은 두 팔을 걷어붙이며 말했다.
“제가 사람이 좋아서 시중을 드는 것인데 감히 저한테 소리를 지르시다니요? 오늘 섭정왕부의 규칙을 제대로 깨닫게 해주겠습니다!”
등 어멈은 그 말을 하면서 낙청연의 어깨를 붙잡더니 그녀의 뺨을 때리려 했다.
그러나 손바닥이 얼굴에 닿기도 전에 낙청연이 그녀의 팔목을 붙잡고 사나운 눈초리로 그녀를 보면서 말했다.
“늙어빠진 노비 따위가 나를 가르치려 들다니. 눈동자에 핏발이 서 있고 눈가가 검은빛을 띠는 걸 보니 죽을 운명이 보이는구나. 집에 크게 앓는 사람이 있을 텐데 돌아가서 그 사람을 돌보지 않고 여기서 나에게 규칙을 가르치려 들다니. 이제 3일 내로 검은 기운이 미간으로 모이게 될 것이다. 장례 치를 준비나 하거나.”
등 어멈은 그녀의 말에 안색이 급변했다. 낙청연이 어떻게 그녀의 집안에 아픈 사람이 있다는 걸 안 걸까?
그녀의 밤처럼 새까맣고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자 등 어멈은 등허리가 오싹했고 낙청연에게 신기라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음험하고 교활한 낙청연이 일부러 자신을 겁먹게 하려고 수작을 부리는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게다가 자신이 저택을 나가지 못한 것도 낙청연 때문이었기에 등 어멈은 표정을 굳히며 말했다.
“퉤! 왕비야말로 곧 뒈질상이십니다.”
그러고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러 낙청연의 뺨을 때렸다.
낙청연은 그녀의 팔목을 잡았고 어지러움을 참으면서 몸을 일으키더니 그녀의 뺨을 내리쳤다.
짝!
온 힘을 다해 팔을 휘둘러서인지 등 어멈은 순간 앞이 캄캄해졌고 탁자 모서리 부분에 세게 부딪히더니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극심한 고통에 등 어멈은 얼굴을 사정없이 구겼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 손을 덜덜 떨면서 낙청연을 손가락질했다.
“너, 너, 너! 감히 날 때려?”
낙청연은 뜻밖에도 힘이 엄청나게 셌다.
“한 번이면 몰라도 계속해서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는구나. 내가 그렇게도 만만해 보이더냐?”
낙청연은 호통을 치면서 말했다.
“설사 왕야께서 진짜 날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난 여전히 승상부의 아씨다. 너 같은 노비 따위가 나에게 손찌검을 해? 지금 당장 너를 죽이더라도 그건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다.”
낙청연은 곧바로 의자를 들었고 그녀의 행동에 등 어멈은 겁에 질린 채로 허겁지겁 방 안에서 나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낙청연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 아니었나? 낙청연은 분명 겁 많은 쥐새끼처럼 설설 기던 인간이었다. 게다가 남을 대신해 혼인을 치르는 어마어마한 일을 저지르고 그날 밤 바로 발각됐다. 제 도끼에 제 발등을 찍은 멍청한 인간이 갑자기 다른 사람을 때리다니.
낙청연의 눈동자에는 서늘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등 어멈은 자신보다 약한 사람에게는 한없이 잔인해지는 인간이었다.
낙청연이 의자를 들고 방 밖으로 그녀를 쫓아 나갔을 때 돌연 여린 몸을 가진 인영이 나타났다. 등 어멈은 얼른 그녀의 뒤로 숨으며 말했다.
“둘째 아씨, 저 좀 구해주시옵소서!”
“언니, 왜 이렇게 화를 내십니까?”
낙청연은 상대가 누군지 제대로 확인하기도 전에 눈앞이 어질했다.
“언니!”
낙월영은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얼른 언니를 방 안으로 모셔라!”
낙월영은 본래 왕야와 혼인을 치러야 했던 진짜 왕비로서 왕야가 무척 아끼는 사람이었기에 그녀의 눈 밖에 나서는 안 됐다. 등 어멈은 얼른 대답했다.
“네, 네.”
낙청연은 다시 침상 위에 앉게 됐다. 머리가 무거웠고 온몸이 흠뻑 젖어있었는데 밖에서 불어오는 미풍에 그녀는 크게 재채기를 했다.
몸의 원래 주인은 세게 부딪쳐서 죽은 것이기 때문에 몸이 크게 나빠졌고 몸조리를 제대로 하지 않으면 고질병이 생길지도 몰랐다.
“언니, 얼른 약 드세요.”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낙월영은 그릇을 들고 그녀에게 약을 먹이려 했다.
약이 입가에 닿자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던 낙청연은 저도 모르게 약을 받아먹었고 한 모금 삼키자 곧바로 이상한 낌새를 눈치챘다.
검은색 눈동자가 순간 싸늘해졌고 낙청연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이를 바라보았다.
눈앞의 그녀는 낙청연의 서매인 낙월영이었고 어젯밤 섭정왕과 혼인을 치렀어야 할 사람이었다.
낙월영은 갑자기 눈가를 붉히며 눈물을 떨구었다. 그녀는 마음 아픈 듯이 말했다.
“언니, 다음번에는 절대 이런 짓 하지 마세요. 이건 섭정왕을 기만하는 일입니다. 제가 왕야께 한참 동안 부탁해서 겨우 허락을 받아냈어요. 앞으로 언니는 섭정왕부의 왕비로 남아있을 수 있어요.”
낙청연은 머리를 빠르게 굴렸고 곧바로 기억을 떠올렸다. 몸의 원래 주인이 위험을 무릅쓰면서 낙월영을 대신해 시집온 것은 모두 그녀의 동생이 사주한 것이었다.
진짜 부인이 될 뻔했던 낙월영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낙청연은 감히 이런 짓을 저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낙청연은 죽기 전까지 자신의 동생이 정말로 자길 위해서 혼사를 양보해주었다고 생각했다.
낙청연은 낙월영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눈물을 머금은 요염한 눈매는 매혹적이었고 입술이 얇은 걸 보니 박명할 운명이었다. 그리고 수문(守門)에 점이 있는 걸 보니 질투가 많은 사람이었고 눈빛이 바르지 않은 것이 간교함을 숨기고 있었다. 절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맑고 투명해 보이는 아름다운 눈을 가졌으니 사람을 속이기 쉬웠을 것이다.
낙청연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자 낙월영은 그 시선이 불편했다. 예전의 낙청연은 감히 고개를 들어 사람을 쳐다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니, 왜 그러십니까? 얼른 약을 드세요.”
“안 먹으련다.”
낙청연이 거절했지만 낙월영은 포기하지 않고 여전히 애타는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고집부리지 마세요. 여기가 우리 집이었으면 당연히 언니 마음대로 하라 했겠지만 여기는 섭정왕부입니다. 여기서는 조용히 지내면서 왕야께 폐를 끼쳐서는 안 되지요.”
그녀는 다시 한번 숟가락을 들더니 그것을 강제로 낙청연의 입에 넣으려 들었고 낙청연은 미간을 구기면서 손을 들어 그녀를 밀어냈다.
분명 크게 힘을 쓰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낙월영은 아주 세게 밀쳐진 듯이 바닥에 풀썩 쓰러졌고 그 바람에 약이 담긴 그릇도 깨졌다.
바로 그때,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낙월영은 깨진 그릇 조각을 손으로 눌렀고 그녀의 손은 피범벅이 되었다.
제3화
등 어멈은 화들짝 놀라면서 말했다.
“아이고, 둘째 아씨 손이!”
그러면서 등 어멈은 얼른 낙월영을 부축하면서 화가 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악독하기 그지없군요. 둘째 아씨의 혼사를 빼앗은 것으로도 모자라 둘째 아씨가 약을 먹여주는데 밀어서 넘어뜨리다니요!”
바로 다음 순간, 한 인영이 빠른 걸음으로 방 안으로 들어오더니 잔뜩 긴장한 얼굴로 낙월영의 옆에 섰다.
“월영아!”
낙월영은 미간을 좁히더니 피로 얼룩진 손바닥을 들어 보았는데 그 모습은 못내 애처로워 보였다.
부진환은 낙월영의 손에서 흐르는 피를 보더니 살기 어린 눈빛으로 낙청연을 쏘아보았고 낙청연은 곧바로 입을 열려고 했다.
“전…”
그러나 해명을 하기도 전에 그녀의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부진환이 억센 힘으로 그녀를 침상 위에서 끌어 내렸다. 바닥에 쓰러져서 몸의 중심을 잡기도 전에 부진환이 매섭게 따귀를 때렸다.
그 순간 귓가에서 윙윙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뺨이 덴 것처럼 뜨거웠고 아렸다.
낙청연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낙월영은 부진환의 옷소매를 잡으면서 간청했다.
“왕야, 제가 부주의해서 넘어진 것입니다. 언니 잘못이 아닙니다.”
등 어멈이 섭정왕에게 고자질했다.
“왕야, 제가 똑똑히 보았습니다. 둘째 아씨께서 좋은 마음으로 약을 먹이는데 그 마음을 헤아리지는 못할망정 둘째 아씨를 밀쳤습니다. 둘째 아씨께서 선량하셔서 그냥 넘어가 주려고 하는 것이지,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괴롭힘을 당해서야 되겠습니까?”
“둘째 아씨를 데리고 가서 약을 발라주거라.”
부진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명령했다.
“예.”
등 어멈은 낙월영을 부축하면서 떠났다.
방 안에는 낙청연과 부진환 두 사람만이 남았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눈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그는 자신의 서늘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힘주어 잡았다. 만약 그가 잡은 것이 낙청연의 목이었다면 그녀는 아마도 숨이 끊어졌을 것이다.
“진짜 네가 왕비라도 된 것 같으냐? 월영이가 부탁하지만 않았다면 난 널 죽였을 것이다. 또 한 번 이딴 짓을 한다면 월영이를 다치게 한 네 손을 잘라버릴 것이다.”
부진환의 목소리에는 노여움이 가득했고 말투는 포악하기 그지없었기에 듣고 있으면 머리털이 쭈뼛 설 정도였다.
맞아서 얼얼한 뺨을 부여잡고 있던 낙청연은 그를 쏘아보면서 냉소를 흘렸다.
“제가 다치게 한 장면을 보셨습니까?”
“등 어멈이 증언하지 않았더냐? 그런데도 감히 변명을 한단 말이냐?”
부진환은 낙청연이 변명까지 하려 하자 놀라우면서도 화가 났다. 그러나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낙청연은 본디 악랄한 인간이며 단지 오늘에야 그 본모습이 전부 드러난 것뿐이니 말이다.
낙청연은 무척 분했다. 분명 자신은 잘못한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맞았기 때문이다.
그녀는 부진환의 관상을 살폈다. 이목구비는 선명하고 눈은 길고 가늘며 청초하고 준수했다. 콧대는 높으면서 쭉 뻗어 있는 것이 크게 될 상이었고 미간에는 양기가 가득한 것이 군주가 될 상이었지만 오래지 않으면 죽을 운명이었다.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니 마음의 눈이 먼 것이지요. 왕야는 눈이 붉게 충혈되었고 양미간에는 붉은빛이 감도는 걸 보니 쉽게 화를 내는 성격이시군요. 눈빛이 깨끗하지 못하고 탁한 것을 보니 최근에 피를 보게 될 것입니다. 여자 때문에 눈이 멀어 여자의 손에 죽을 수 있으니 조심하십시오.”’
그녀는 당당한 여국의 대제사장으로서 관상을 보고 점을 치면서 지금껏 단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리고 부진환이 낙월영을 감싸고 도는 것을 보니 부진환이 낙월영 때문에 해를 입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낙월영은 그와 혼인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낙청연을 꼬드겨서 그녀 대신에 혼인을 치르게 했을 리도 없었다.
낙월영이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낙청연 혼자 어떻게 경비가 삼엄한 섭정왕부에 들어올 수 있었겠는가? 게다가 낙청연이 공공연히 신방에 있는 낙월영을 기절시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부진환은 낙월영을 가리키는 것 같은 낙청연의 말에 순간 표정을 굳히더니 그녀의 목을 조르면서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내가 네 혀를 잘라줬으면 좋겠나 보구나.”
그 음산한 말투에 낙청연은 등골이 오싹했다.
바로 그때 낙청연은 순간 가슴이 칼로 후비듯이 아팠고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감돌더니 돌연 선혈을 뿜었다.
새빨간 피가 부진환의 옷에 흩뿌려졌다.
갑자기 피를 뿜는 낙청연의 모습에 부진환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자신은 아직 그녀에게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부진환은 얼어붙을 듯 차가운 말투로 물었다.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이냐!”
그녀는 이미 자결하려는 척한 전적이 있기 때문에 불쌍한 척해 보이면서 그의 동정을 사려는 걸지도 몰랐고 또 어떤 짓을 꾸미려는 걸지도 몰랐다. 그는 삐뚤어진 마음을 가진 여인을 가장 싫어했다.
그의 질타하는 듯한 어조에 낙청연은 자조적인 냉소를 지으며 고개를 들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수작이라니요? 그건 낙월영에게 물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저에게 무엇을 먹였는지 물어보면 알 수 있으실 텐데요.”
낙청연의 가시 돋은 말투에는 화가 가득했고 부진환은 그녀의 말에서 억울함을 느낄 수 있었다. 그의 깊은 눈동자가 어두워졌고 그는 바닥에 남아있는 깨진 약 그릇을 무감하게 쳐다보았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낙청연은 그가 낙월영이 자신을 해하려 했다는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는 줄로 알았다.
그러나 그는 잠시 침묵하더니 무덤덤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 애가 너에게 뭘 먹였던 그건 모두 네가 자초한 일이다.”
그 한마디에 낙청연은 또다시 나락으로 빠졌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네가 먼저 그 애를 해하려 했으니 월영이가 너에게 화를 푼다고 하더라도 그냥 참고 있어.”
부진환은 두 손을 등 뒤로 가져가며 말했다.
큰 키를 가진 그는 마치 신이 강림한 것처럼 조용히 그곳에 서 있었는데 낙청연의 눈에는 그가 마치 그녀의 피와 살을 먹으러 온 식인귀 나찰(羅剎) 같아 보였다.
“그럼 월영이가 제 목숨을 빼앗으려 한다면요?”
낙청연은 여전히 체념하지 못한 듯 물었고 부진환의 대답은 역시나 그녀의 예상을 전혀 빗나가지 않았다.
“그럼 난 그 애에게 칼을 넘겨줄 것이다.”
순간 낙청연은 가슴이 쥐어짜듯 아팠다. 몸의 원래 주인의 원한이 아직 다 가시지 않은 상태였기에 그녀의 씁쓸하고 내키지 않는 듯한 기분이 그녀를 아프게 했다. 그녀의 몸은 아주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려보내려고 했지만, 그녀는 입술을 꽉 깨물면서 죽을힘을 다해 눈물을 참으려 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남자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는 것만큼 가치 없는 일은 없었다.
부진환은 그녀의 소리 없이 눈물을 꾹 참는 표정을 무심결에 보았다. 눈물을 참고 있었으나 여전히 빨간 눈가와 굴하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러운 모습에 그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몸을 돌려 자리를 뜨면서 차갑게 말 한마디를 남겼다.
“낙청연, 기억하거라. 그 애를 대신해서 시집온 것이니 네 목숨은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다.”
낙청연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고개를 들었지만 남자는 이미 사라진 뒤였다.
개소리!
진짜 낙청연은 이미 죽었다. 그녀가 설사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었다고 해도 이미 목숨으로 그 대가를 치렀고 낙요(洛嬈), 자신의 목숨은 그녀 자신의 것이다.
제4화
낙요는 눈가가 빨갰지만 눈빛만은 의연하고 차가웠다.
방문을 닫은 뒤 그녀는 아직도 쑤시듯 아픈 가슴을 부여잡고 침상으로 돌아와 휴식을 취했다.
이 몸으로 환생해서인지 무력을 전혀 쓸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여국에서 모두가 우러러보는 대제사장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풍수와 관상을 보고 점을 치는 능력이 출중한 것도 있지만 혼자서 백여 명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의 대단한 무공 실력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니 그녀는 자기 몸이 못내 그리워졌다. 어릴 때부터 무공을 배워서 경맥이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강인했으니 다른 사람들이 그녀를 괴롭힐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녀의 몸은 이미 좌골양회(挫骨揚灰: 원한이 깊거나 중죄를 저지른 사람이 죽은 후 그 뼈를 갈아서 뿌리는 것)를 당했다.
서방(書房)으로 돌아온 부진환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고 마음도 심란했다.
소유(蘇游)가 그의 방으로 찾아와 문을 두드렸다.
“왕야, 오늘 밤도 그 사람들을 불러 큰아씨께 겁을 줄까요?”
그의 말에 부진환의 미간이 더욱 좁혀졌다.
“아니, 오늘은 됐다.”
어젯밤 그녀를 단단히 혼냈으니 다시 한번 그런 일을 겪는다면 또 자결하겠다고 난리를 칠 게 뻔했고, 혹시라도 진짜 죽기라도 한다면 승상부 쪽에 얘기하기가 껄끄러워진다.
소유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뻐걱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고 희미한 광선이 방 안으로 쏟아졌다. 어느덧 해가 저물어 있었다.
젊고 예쁘장한 계집종이 방 안으로 들어오면서 오만한 태도로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는 신선이라도 되려고 그러십니까?”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낙청연이 눈을 떴다. 그녀의 눈빛은 싸늘하고 날카로웠고 그 눈빛에 맹금우(孟錦雨)는 순간 겁을 먹었다.
그녀는 손을 휘저으며 밖에 있는 사람을 불러들이더니 일부러 거드름을 피우면서 느긋하게 얘기했다.
“왕비 마마께서 온종일 음식을 드시지 않았으니 배가 많이 고플 것이라 하여 왕야께서 자비를 베풀어 이것들을 하사해주셨습니다.”
계집종들이 손에 접시를 들고 하나둘 들어왔는데 접시 안에 든 것은 전부 찐빵이었다.
“드세요. 배부르게 드셨으면 저녁엔 일을 해야 합니다.”
맹금우는 의미심장하게 그녀를 바라봤고 그 눈빛에는 원망이 가득했다.
맹금우는 말을 마치고 발걸음을 옮겨 방에서 나갔고 문밖으로 나와서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안쪽을 흘겨봤다.
맹금우는 왕야의 통방(通房:하녀로서 첩을 겸한 여인)이 되는 것을 꿈꿨다. 만약 낙월영이 순조롭게 왕비가 되었다면 오늘 밤 왕야의 밤 시중을 드는 사람은 자신이었을 터였다.
오래도록 바랐던 꿈이 곧 이뤄질 거로 생각했는데 낙청연 때문에 모두 허사가 된 것이다.
저렇게 못생긴 여인은 왕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맹금우는 생각했다.
갓 쪄서 나온 찐빵의 냄새를 맡자 배속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확실히 배가 고팠던 낙청연은 찐빵이라도 먹을 생각이었다. 찐빵을 몇 개 먹는다고 해서 목이 메어 죽거나 하지는 않을 테니 말이다.
낙청연은 몸을 일으켜 앉고는 찐빵을 손에 들고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렇게 입에 넣고 두어 번 씹었는데 낙청연은 돌연 표정을 굳히더니 곧바로 찐빵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옆에 놓인 그릇에 담긴 찐빵들의 냄새도 하나하나 다 맡아봤는데 전부 약이 발라져 있었다.
극락산(極樂散)은 복용하면 아주 강한 환각을 일으키고 그 효과가 네 시진(時辰 옛날 두 시간을 세던 단위)까지 지속되면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을 자신이 마음에 둔 사람이라고 착각하게 된다. 눈앞에 있는 자의 용모가 어떻든, 설사 눈앞에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라 짐승이라고 해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였다.
어제는 향을 피웠고 오늘은 아예 극락산을 사용한 것이다.
아마도 그녀가 오늘 낙월영을 다치게 해서 부진환의 미움을 더 사게 되는 바람에 이토록 악랄한 방법으로 복수를 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천궐국의 섭정왕은 역시나 소문대로 지독한 사람이었다.
찐빵에는 전부 약이 발라져 있었기에 낙청연은 그것을 먹지 못했고 그저 허기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낙청연의 눈동자에 서늘함이 감돌았다. 그녀는 우선 상대의 계략을 역이용할 생각이었다. 부진환은 자신을 괴롭히려 했고, 낙요는 낙청연과 달리 순순히 감내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는 찐빵 세 개를 침상 아래에 숨겨두고는 찐빵을 먹은 척했다.
조용하던 마당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고 윽박지르는 소리와 사람을 패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 어멈의 목소리도 은은히 들리는 것 같아 호기심이 생긴 낙청연은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등 어멈이 계집종 몇 명에게 둘러싸여 발길질을 당하고 있었는데 등 어멈은 앓는 소리를 내면서도 연신 애달픈 목소리로 애원하고 있었다.
“금우양, 우리 어머니는 병세가 심각하셔서 아마 곧 돌아가실 것 같소. 그래서 집에 가 봐야 하오. 날 때려서 분을 푼 다음, 날 저택에서 나가게 해주면 안 되겠소?”
옆에 있던 맹금우는 팔짱을 낀 채로 교만하게 말했다.
“아직 살아있지 않습니까? 죽은 다음에 얘기하시지요.”
등 어멈은 급한 마음에 맹금우의 옷자락을 잡으면서 빌었다.
“금우양, 제발 부탁이오. 제발…”
“이거 놓으시지요!”
혼란스러운 와중에 맹금우의 소맷자락이 찢어졌고 그녀는 등 어멈에게 발길질하면서 씨근거리며 욕을 했다.
“망할 노인네 같으니라고! 이 옷이 얼마나 비싼 것인 줄 아느냐? 널 팔아도 사지 못한다. 퉤. 너 같은 건 늙고 못생겨서 청루(青樓)에 팔아도 돈이 안 된다는 말이다!”
낙청연은 그 모습에 울컥 화가 났다. 맹금우는 조금 전 자신에게 찐빵을 가져다준 사람이었는데 지금은 등 어멈을 무자비하게 때리고 있었다. 도대체 뭐 하는 인간인지 알 수 없었다.
등 어멈은 어머니가 병중에 계셔서 저택을 나가고 싶은 것뿐이었는데 그걸 막는 걸로도 모자라 나이 드신 분을 이렇게나 모욕하다니.
낙청연은 부처는 아니었지만 자신의 앞에서 사람이 맞아 죽는 꼴을 보고 싶지는 않았다.
“그만!”
낙청연은 차가운 목소리로 호통을 치더니 빠른 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등 어멈을 때리는 계집종들을 힘껏 밀쳤다.
맹금우는 그녀를 보고는 바로 턱을 쳐들면서 거만한 태도로 차갑게 말했다.
“왕비 마마는 정말 한가하신가 봅니다. 신부를 기절시켜서 대신 혼례를 치르시더니 이제는 여기까지 오셔서 저희 아랫사람들을 혼내시다니. 그렇게 마음씨가 좋으시면 저택의 뒷간 청소나 해주시지요. 그럼 저희도 좀 쉴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낙청연은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들어 맹금우의 뺨을 내리쳤다. 그녀는 싸늘한 어조로 말했다.
“노비 따위가 감히 상전에게 일을 시킨다는 말이냐? 간덩이가 단단히 부었구나!”
체형 상의 우세 때문인지 낙청연은 힘이 꽤 셌고 맹금우는 하마터면 바닥에 나뒹굴 뻔했다. 맹금우는 몸을 비틀거리면서 겨우 중심을 잡았고 옆에 있던 계집종들은 기함하면서 얼른 그녀를 부축했다.
낙청연의 행동에 계집종들은 전부 얼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고 등 어멈 또한 경악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맹금우는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듯한 표정으로 몸의 중심을 잡고 고개를 들었는데 그녀의 뺨에는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찍혀있었고 입가에서는 붉은 피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감히 날 때리다니? 빌어먹을 년! 왕야께서도 차마 날 때리지 않는데 너 따위가 뭐라고 내게 손찌검을 한단 말이냐?”
맹금우는 분한 얼굴로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낙청연을 노려봤고 대놓고 낙청연의 면전에 대고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낙청연은 눈썹을 까딱이며 말했다.
“왜? 네가 어느 대단한 집안의 여식이라도 되느냐? 그래서 왕야께서 무서워서 널 때리지 못한다고 하시더냐?”
낙청연에게 말꼬리가 잡힌 맹금우는 안색이 돌변해서 말했다.
“그건…”
다시금 정신을 차린 맹금우는 다시 그녀를 쏘아보며 말했다.
“망할 년. 왕비라고 한 번 불러줬더니만 네가 진짜 왕비라도 된 줄 아느냐? 이 저택에서 너는 짐승만도 못한 미천한 존재다. 감히 날 때리다니, 죽을 각오나 해두거라.”
맹금우는 뺨을 부여잡고 낙청연을 노려보더니 씩씩거리며 자리를 떴다. 맹금우는 감히 자신을 때린 낙청연에게 오늘 밤 제대로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맹금우와 계집종들이 떠나고 등 어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낙청연은 본디 곧바로 몸을 돌려 떠나려 했으나 등 어멈의 달랑거리는 팔을 보니 팔이 빠진 게 분명해 보였다.
낙청연은 곧바로 등 어멈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오른쪽 어깨를 잡았고 등 어멈은 낙청연의 행동에 기겁하면서 두려운 얼굴로 버둥거렸다.
“뭐 하는 짓입니까? 놔주시옵소서!”
“움직이지 말거라. 팔이 빠져서 그런다.”
낙청연이 호통을 쳤고 등 어멈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낙청연이 자신을 해하려 하는 게 아니라니, 믿을 수가 없었다.
등 어멈이 잠시 넋을 빼놓고 있는 틈을 타서 낙청연은 제대로 된 위치를 찾고는 재빨리 뼈를 맞췄다.
낭랑한 소리가 들렸고 등 어멈은 창백한 얼굴로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됐다.”
그녀의 말에 등 어멈은 적지 않게 놀랐다. 팔을 움직여보니 그녀의 말대로 멀쩡했다. 등 어멈은 의문 가득한 얼굴로 낙청연을 바라보며 말했다.
“왜… 왜 절 구해주신 것입니까?”
제5화
“구했으면 구한 거지 이유가 필요하더냐?”
낙청연은 담담하게 대꾸하고는 몸을 돌려 떠나려 했다.
그녀가 저 멀리 걸어가자 등 어멈은 오늘 오전에 있었던 일이 떠올라 죄책감이 들었고, 결국 참지 못하고 낙청연을 불러 세웠다.
“왕비 마마!”
낙청연이 발걸음을 멈추자 등 어멈은 재빨리 그녀에게 다가갔다.
“오늘 아침 일은 정말 죄송합니다. 왕비 마마의 시중을 드는 일만 아니었다면 전 이미 저택에서 나갔을 것입니다. 그래서 왕비 마마를 원망하고 분풀이하였습니다.”
등 어멈은 고개를 숙인 채로 미안한 듯 얘기했다.
그녀는 왕비가 자신을 도와줄 줄 몰랐다. 그녀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자신은 아마도 맹금우에게 맞아 죽었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낙청연은 그녀의 빠진 팔을 치료해주었고 소문처럼 그렇게 독살스러운 사람이 아니었다.
등 어멈의 말에 낙청연은 그제야 연유를 깨달았고 등 어멈은 그녀에게 충고를 해주었다.
“왕비 마마, 이 섭정왕부에서 계속 지내고 싶으시다면 맹금우와는 척을 지지 마셔야 합니다. 맹금우는 저택의 일등 계집종입니다. 내원 관사(內院管事)의 친딸이거든요.”
“이미 척을 지지 않았더냐.”
이제 와서 얘기해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
등 어멈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낙청연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가서는 목소리를 낮추며 얘기했다.
“제가 무심코 들은 얘기가 있는데, 둘째 아씨께서 맹금우에게 한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합니다. 둘째 아씨께서 왕비 마마가 되면 건강이 좋지 않아 왕야의 시중을 들 수 없으니 맹금우를 통방으로 삼아 그녀더러 왕야의 시중을 들게 할 것이라 했습니다. 그런데 둘째 아씨와 왕야의 혼례가 성사되지 않았으니 왕비 마마께서 맹금우를 구슬리시려면 맹금우더러 왕야의 시중을 들게 하면 됩니다. 그러면 왕비 마마께 그렇게 적대적이지는 않겠지요.”
등 어멈은 낙청연의 도움에 감사했고 그래서 자신도 그녀를 도와주고 싶었기에 그녀 대신에 방도를 생각했다.
등 어멈의 말에 낙청연은 등골이 서늘해졌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낙월영은 맹금우와 통방을 조건으로 거래를 한 것이었고, 맹금우가 그토록 자신에게 적대적인 것은 낙월영의 혼례가 성사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자세히 생각해보면 이 또한 낙월영의 계략이었을 것이다. 낙월영은 몹시 악랄했다. 낙청연이 섭정왕부에 시집와서 부진환의 괴롭힘을 받는 것도 모자라 티 나지 않게 이렇게 많은 적을 두게 했으니, 낙청연의 살길을 모조리 차단해버린 셈이었다.
낙청연이 낙월영을 대신해서 섭정왕부로 시집온 건 낙월영의 음모였다.
독이 들어있는 찐빵과 극락산도 어쩌면 맹금우나 낙월영이 한 짓일지도 몰랐다.
낙청연은 등 어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등 어멈은 꽤 쓸모 있는 사람이었고 그녀가 오늘 아침에 한 짓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었다.
“난 네 어미를 구할 수 있다. 날 믿을 것이냐?”
등 어멈은 그녀의 말에 안색이 달라졌다. 그녀는 오늘 아침 3일 내로 장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낙청연의 말을 되짚어 보았다.
낙청연의 새까만 눈동자는 그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고 등 어멈은 또 한 번 등골이 오싹했다. 그녀의 표정과 눈빛은 그녀의 건장한 풍채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믿습니다.”
등 어멈은 귀신에 씌기라도 한 건지 저도 모르게 대답했다.
“그럼 몰래 먹을 것 좀 구해오너라. 방 안에서 기다리마.”
말을 마친 뒤 낙청연은 발걸음을 돌려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고 등 어멈은 넋이 나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등 어멈은 남들의 눈을 피해 낙청연의 처소에 들어왔다. 그녀는 품 안에 기름종이에 쌓인 닭구이를 안고 있었는데 그것을 낙청연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얼른 드세요. 냄새가 강하다 보니 조금 이따가 냄새를 맡고 찾아오면 큰일입니다.”
등 어멈은 문가에서 망을 보았고 낙청연은 통닭 하나를 그 자리에서 완벽히 해치우고는 배가 부른 건지 트림을 했다.
등 어멈은 그제야 침상 쪽으로 다가갔고 주저하며 물었다.
“정말… 정말 방도가 있습니까?”
배가 부른 낙청연은 힘이 나서 곧바로 물었다.
“너의 어미는 무슨 병을 앓고 있는 것이냐? 의원에게는 보였느냐? 무슨 약을 지어주더냐?”
“처음에는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났기에 의원이 고뿔을 치료하는 약을 지어줬습니다. 그런데 좋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최근 보름 동안 병세가 더욱 심해져서 의원도 어찌할 방도가 없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살이 낀 걸지도 모른다면서 옆에서 돌봐줄 사람이 필요하다고 했지요.”
살이 끼다니? 낙청연의 눈빛이 반짝였다.
“머리 아픈 것 말고도 다른 증상이 있느냐?”
“제가 며칠 돌봐줬을 때 한밤중에 뜬금없이 문가에 대고 머리를 조아렸습니다. 열이 많이 올랐는지 헛소리하고 있었는데 뭐라고 했는지는 잘 들리지 않았습니다.”
얘기를 들어보니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낙청연이 계속해 물었다.
“그럼 아프기 전에 괴이한 일이 있거나 하지는 않았느냐?”
그 말에 등 어멈은 무언가 생각난 듯 눈을 빛내며 말을 이어갔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병이 나기 이틀 전 그런 말씀을 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큰 집안에서 죽은 이를 기리기 위해 은표(銀票)를 태웠는데 그게 아까워서 남의 무덤에 가서 다 태워지지 않은 은표를 주웠다고 합니다.”
낙청연은 경악했다.
“죽은 이의 돈을 욕심내다니?”
등 어멈도 놀란 얼굴로 물었다.
“설마 진짜 살이 낀 것입니까?”
낙청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종이와 붓으로 처방을 쓰고는 그것을 등 어멈에게 건네줬다.
“가서 약을 짓거라. 이걸로 당분간은 네 어미의 목숨을 보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네 어미가 주워왔다던 그 은표를 그 집 무덤 앞에서 전부 깨끗이 태우도록 하거라. 좋기는 노잣돈을 더 보태서 태우려무나.”
등 어멈은 약 처방을 보더니 잠깐 뜸을 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녀는 낙청연의 처방이 꼭 효과가 있으리라고 확신하지는 못했지만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그러나 등 어멈은 다시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하지만 저는… 나갈 수가 없사온데…”
낙청연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오늘 밤 저택의 일에 귀 기울이고 있으려무나. 저택에 사고가 생긴다면 그것을 핑계로 저택을 나가거라. 맹금우의 동의가 없어도 된다. 그저 최대한 빨리 일을 마치고 저택으로 돌아오너라.”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보는 듯한 낙청연의 눈빛은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없었다. 왕비는 자결 시도를 한 다음부터는 사람이 달라진 듯했고 그녀의 눈빛을 보면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맹금우가 고자질한다면…”
등 어멈은 여전히 걱정됐고 낙청연은 그녀의 말에 경멸이 담긴 미소를 지으며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맹금우 말이냐? 그자는 오늘 밤 제 몸도 지키기 어려울 것이다.”
낙월영과 협력해 자신을 괴롭히려 했던 자였다. 낙요는 절대 호락호락하게 당하고 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어둠의 장막이 드리워지고 낙청연은 조용히 의자에 앉아 사람이 오기를 기다렸다.
달도 별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구름이 짙게 깔려 칠흑같이 어두운 밤이었다. 아마도 비가 내릴 듯했다.
해시(亥時: 밤 9시부터 밤 11시까지의 시간)가 되자 밖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고 곧이어 검은 인영 하나가 방문에 붙어서 방 안의 기척을 감지했다. 뒤이어 맹금우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찐빵 세 개를 먹었으니 양은 충분할 것이옵니다. 지금쯤이면 하늘과 땅도 구분하지 못하겠지요. 낙청연은 깨어나는 순간 목숨을 잃을 것이옵니다.”
어젯밤 왕야는 그저 사내 몇 명을 데려와서 그녀가 오해하도록 만들었을 뿐, 그녀의 정절을 빼앗지는 않았다.
그러나 오늘 밤 낙청연은 사내들과 몸을 섞을 것이고 정절을 잃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왕야는 절대 그녀를 살려두지 않을 터였다. 미천한 추녀의 결말은 생매장보다 더욱 비참할 것이다.
낙청연은 밖에 있는 맹금우의 인영은 보았지만 그녀의 맞은편에 서 있는 것이 누구인지는 알아보지 못했다.
맹금우는 누구와 얘기하는 것일까? 설마 낙월영인가?
“자, 이제 들어가거라.”
맹금우는 곧바로 사내들을 불렀다.
방문이 열리고 여러 사내들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불이 켜져 있지 않았기에 방 안은 캄캄했고 그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상태에서 조심스레 들어왔다.
방문이 닫히고 밖에는 맹금우 홀로 남아 상황을 엿듣고 있었다.
하지만 낙청연은 이미 창문을 넘어서 처마 밑으로 향했고 발소리를 죽이고 맹금우의 등 뒤에 섰다.
제6화
낙청연은 벽 구석 쪽에 놓인 몽둥이를 휘둘러 맹금우를 기절시켰다. 그리고는 소매 안에서 찐빵을 꺼내서 그녀의 입안에 쑤셔 넣어 그녀가 삼키게 만들었다.
사내들은 창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리자 낙청연이 창문 쪽으로 도망치려는 줄로 알았다.
“여기 있었군. 감히 도망칠 생각을 하다니.”
그중 한 명이 맹금우의 뺨을 내리쳤고 낙청연은 내친김에 맹금우를 붙잡고 있던 손을 놓았다.
사내들은 기절한 맹금우를 낙청연으로 여겼고 그녀를 침상 위로 옮겼다.
낙청연은 벽에 귀를 딱 붙이고 안쪽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일이 확실히 진행되고 있자 낙청연은 그제야 유유히 몸을 돌려 그곳을 떠났다.
밤이 깊어진 틈을 타 낙청연은 몰래 부엌으로 가서 먹을 것을 찾았지만 부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낙청연은 부엌 구석 쪽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했다.
공무를 마친 부진환은 서방 안에서 휴식을 취하려 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낙월영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다.
“왕야! 주무시고 계십니까?”
그녀의 황급한 목소리에 부진환은 얼른 문을 열었다.
“왜 그러느냐?”
낙월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조금 전 눈물을 흘린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으로 부진환을 바라보았다.
“왕야, 제가 아까… 사내 여럿이 언니의 방 안으로 들어가는 걸 목격했습니다. 왕야, 제발 언니를 용서해주세요.”
그녀의 말에 부진환의 안색이 돌변했다.
사내 여럿이 낙청연의 방으로 들어갔다니? 그는 소유에게 분명 그 짓을 그만하라고 분부했었다.
“왕야, 저한테 언니는 한 명뿐입니다. 언니가 무슨 짓을 저질렀든 언니가 제 언니인 건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낙월영은 울음을 터뜨리면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고 부진환은 미간을 좁히더니 얼른 그녀를 부축해서 일으켜 세웠다.
“나와 함께 가보자꾸나.”
“그…”
낙월영은 고개를 숙이면서 민망한 표정을 지어 보였고 부진환의 눈빛이 살벌하게 빛났다. 낙청연이 대체 무슨 짓을 꾸민 것인지, 왜 지금에 와서도 포기하지 않는지 의문이었다. 게다가 낙월영이 그가 무슨 짓을 했다고 오해까지 하게 만들었다.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낙월영은 부진환에게 이끌려 함께 낙청연의 처소로 향했고 낙월영은 훌쩍거리면서 말했다.
“왕야, 언니가 잘못을 저질렀으니 제가 대신 벌을 받겠습니다. 제발 저희 언니를 용서해주세요.”
야심한 밤, 저택 안은 조용했고 낙월영의 울음소리는 유독 크게 들렸기에 저택 안의 사람들이 너도나도 모여들었다.
“둘째 아씨도 참 마음이 고우셔. 큰아씨가 혼인을 망쳤는데도 큰아씨를 용서해 달라고 하시니.”
“그러니까. 둘째 아씨는 아량이 참 넓으시네.”
하인들은 수군덕거리고 있었고 다들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궁금해서 함께 그곳으로 갔다.
커다란 정자 안은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아 캄캄했다.
정적을 뚫고 방 안에서 야릇한 소리와 사내들의 상스럽고 저속한 말들이 들렸다.
“왕비 마마, 참으로 고우십니다!”
그 순간 부진환은 들끓는 화로 인해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그는 비록 낙청연을 혐오했으나 그녀는 아직 왕비라는 칭호를 달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감히 그의 저택에서 그의 노비들과 몸을 섞고 있었다.
낙월영은 얼굴이 희게 질려서는 털썩 무릎을 꿇으면서 부진환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왕야, 왕야. 제발 언니를 용서해주세요.”
낙월영의 행동은 불난 집에 부채질하는 격이었다. 부진환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올랐다. 자신이 시켜서 벌어진 일이라고 낙월영이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는 낙월영을 일으키면서 말했다.
“내가 지시한 일이 아니다.”
부진환은 노여움을 가득 담아 방문을 힘껏 걷어찼고 살기등등하게 고함을 질렀다.
“낙청연!”
방 안의 사내들은 혼비백산하더니 잽싸게 옷을 주워 입었고 허겁지겁 방문을 나서고는 무릎을 꿇었다.
정자 안에 있던 하인들은 그 모습에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혀를 찼다.
“세상에나, 왕비 마마께서는 부끄러움도 없으신가? 하인들과 몸을 섞다니…”
“승상부의 아씨가 이런 사람일 줄은 몰랐네.”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에 부진환은 안색이 어두워졌다. 섭정왕부가 이렇게 큰 망신을 당했던 적은 여태껏 없었다. 당장 날이 밝으면 그는 가장 큰 웃음거리가 될 터였다.
“여봐라, 왕비는 부끄러움도 모르고 저택에서 음란한 짓을 벌이고 저택의 질서를 어지럽혔으니 곤장형에 처한다. 죽을 때까지 매우 쳐라.”
그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낙월영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걸렸다. 몇 년의 노력 끝에 드디어 낙청연이 지위와 명예를 모두 잃게 했다. 이제 낙씨 가문의 큰아씨는 낙월영이 될 것이다.
낙월영은 너무 놀라서 넋을 놓은 듯이 멍한 얼굴로 옆에 서 있었다.
낙청연에게 곤장형을 벌하기 위해 하인 몇 명이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사람을 데리고 나와보니 옷가지가 흐트러진 여인이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부진환을 향해 달려들었다.
“왕야, 지난 몇 년 동안 제가 왕야를 얼마나 원했는지 아십니까? 제가 드디어 왕야의 여인이 되었습니다. 왕야…”
그녀는 야릇한 신음을 냈고 사람들은 머리털이 쭈뼛 섰다.
겉으로 드러난 팔이 부진환의 목을 감쌌고 그녀는 부진환에게 몸을 붙였다.
바로 그 순간, 부진환은 미간을 좁혔고 그것이 낙청연의 목소리가 아님을 판별해냈다.
“아!”
단정치 못한 차림을 한 여인은 정자의 돌바닥 위에 쓰러졌고 계집종은 불을 들고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환한 불빛 아래, 그 여인이 고개를 들었을 때 정원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그녀는 다름 아닌 맹금우였다.
그리고 그것을 확인한 낙월영은 순간 숨을 쉴 수가 없어 옷자락을 꽉 쥐었다.
낙청연이 아니라니? 그럴 리가 없었다. 낙청연은 어디 가고 맹금우가 여기 있는 것일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고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부진환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그는 화가 조금은 가라앉은 것 같았다. 만약 낙청연이 진짜 이런 일을 저질렀으면 그는 절대 그녀를 살려두지 않았을 것이다.
“여봐라, 다들 왕비를 찾거라.”
부진환은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섭정왕부 전체가 소란스러워졌고 하인들은 내원 곳곳을 샅샅이 둘러봤다.
낙청연은 이미 깊게 잠들어 있었는데 계집종의 놀란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려왔다.
“왕비 마마, 얼른 일어나시옵소서! 왕비 마마!”
낙청연은 힘겹게 눈꺼풀을 들어 올리더니 눈가를 비비며 말했다.
“무슨 일이냐?”
“저택에 큰일이 일어났사온데 여기서 주무시고 계셨습니까?”
계집종은 원망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들은 낙청연을 찾느라 한바탕 고생했다.
계집종 몇몇이 낙청연을 일으켜 세우고는 그녀를 데리고 정원으로 향했다.
정원의 등불이 환했다. 온몸에서 살기를 뿜어대고 있는 사내는 처마 밑에 서 있었고 그의 옆에는 여린 몸집에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낙월영이 서 있었다.
그리고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맹금우가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조금 전 계집종이 찬물을 뿌렸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깨어나지 못하고 바닥에서 몸을 꾸물거리며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너무도 명백한 사실이었고 다들 차마 그 모습을 눈 뜨고 보지 못했다.
임 어멈은 그 모습이 눈꼴이 셔서 방 안의 이불을 들고 와 맹금우의 몸을 가렸다.
“오늘 밤 어디 갔던 것이냐? 무엇을 했느냐? 똑바로 얘기하거라.”
부진환은 싸늘한 눈빛으로 낙청연을 보면서 다짜고짜 질문을 퍼부었다.
제7화
맹금우와 하인들은 본디 낙청연의 방에 있지 말아야 했는데 하필 오늘 밤 이 모든 사람이 낙청연의 방에 모여들었고 정작 그녀는 방 안에 없었기에 부진환은 낙청연이 일을 꾸민 것으로 생각했다.
낙청연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미간을 좁히면서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왕야, 지금 죄인을 문초하시는 겁니까?”
그 모습에 낙월영이 얼른 그녀에게로 다가가서 그녀의 팔뚝을 잡았다. 그녀는 작지만 모두가 들을 수 있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왕야께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됩니다. 오늘 밤 무엇을 하셨는지 솔직하게 왕야께 말씀드리세요. 제가 있으니 왕야께서는 언니를 난처하게 하지 않을 것입니다.”
낙월영의 행동을 보면 오늘 밤 일이 진짜 낙청연이 꾸민 일 같아 보였다.
낙청연의 눈동자에 티 나지 않게 서늘한 기운이 감돌았다. 그녀는 무언가 켕기는 게 있다는 듯이 시선을 아래로 내리뜨리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사실 오늘 내가 체면을 구기는 일을 하기는 했지…”
그 말에 낙월영은 일부러 놀란 표정을 해 보이면서 목청을 높였다.
“뭐라고요? 언니, 왜 이렇게 어리석습니까?”
낙월영은 낙청연을 끌고 앞으로 나서면서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 왕야께 잘못했다고 비세요. 제가 있으니 괜찮습니다.”
낙월영은 낙청연의 표정을 살피더니 예전과 똑같이 멍청해 보이는 그녀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이 기회를 틈타서 그녀가 자신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 다음 부진환이 화가 나서 그녀에게 곤장형을 내리기를 바랐다.
부진환은 미간을 좁혔고 표정을 굳혔다.
주위에는 침묵이 감돌았다. 모든 이의 이목이 낙청연에게로 집중되었고 모두 그녀가 자신의 죄를 털어놓기를 바랐다.
맹금우는 맹 관사의 친딸로 섭정왕부의 일등 계집종이었다. 어찌 보면 왕야의 측근이기도 했기 때문에 낙청연이 맹금우를 해친 것이면 절대 용서받지 못할 것이었다.
낙청연은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자신의 납작해진 배를 어루만지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오늘 밤 부엌에 먹을 것을 훔치러 갔는데 찾아보니 쌀 한 톨 없더군요. 그래서 훔쳐 먹지도 못했습니다. 이게 그리 큰 죄입니까? 이렇게 많은 사람을 모아놓고 절 질책하실 정도로요?”
그녀는 고개를 들면서 불만스러운 듯이 부진환에게 반문했다.
그녀의 말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깜짝 놀라서 어리둥절한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고 낙월영은 아예 넋이 나가 있었다.
부진환은 미간을 잔뜩 구겼다. 그는 의뭉스러운 눈빛으로 낙청연을 아래위로 훑어보았다. 눈 깜짝하지 않고 이토록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한다니, 정말 거짓말에 능한 사람이었다.
때마침 낙청연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렸고 그 바람에 원래도 엄숙했던 분위기가 더욱더 심각해졌다.
부진환의 이마에 핏줄이 솟았다.
허기진 얼굴로 배고픔을 참는 낙청연의 모습을 보니 아마 저택의 하인들이 그녀를 괴롭히느라 그녀에게 밥조차 주지 않은 듯했다. 그렇다면 그녀로서는 아마 힘든 시간이었을 것이다.
“왕야, 왕야. 너무 덥습니다…”
바닥에서 이불을 덮고 있던 맹금우는 의식이 불분명하면서도 몸을 꾸물거리며 허리를 움직였고 야릇한 신음을 내면서 왕야를 불렀다. 그에 부진환의 표정이 더욱 암울하게 변했다.
“소소(蕭疏), 얼른 저자를 깨우거라.”
부진환이 싸늘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뒤이어 검은 인영 하나가 정원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 사람은 나타나기 전까지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고 있었고 어디서 나타난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는 온몸에서 어마어마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는데 그의 체형과 보법을 보니 고수가 확실했다.
소소는 앞으로 나서면서 자비라고는 없이 맹금우의 손목을 잡아채고는 맥을 짚어 보았다. 그러고는 이내 품 안에서 약을 꺼내 맹금우에게 먹였다.
아마도 극락산의 해독약일 것이다.
소소는 부진환의 호위무사인 듯했다. 극락산의 해독약을 몸에 지니고 있다니, 부진환은 낙청연이 다시 자신에게 약을 먹일까 봐 무척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맹금우는 곧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고 지금 같은 상황을 확인한 맹금우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자기 옷가지가 잔뜩 흐트러져 있는 걸 확인한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소리를 질렀다.
“내… 내… 내가 왜? 왜 이런 일이…”
맹금우는 자신한테 이런 일이 벌어졌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것은 분명 꿈이 아니었고 현실이었다. 그녀는 무척 당혹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고 부진환은 싸늘하게 굳은 얼굴로 차갑게 말했다.
“오늘 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솔직하게 얘기하거라.”
그는 여전히 이 모든 것들이 낙청연과 상관없는 일이라는 걸 믿지 못했다.
정말 그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면 왜 그녀의 방 안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맹금우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듯 보였다. 그녀는 얼빠진 얼굴로 낙월영을 쳐다보았고 그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왜 낙청연이 아니라 자신이 이곳에 누워있는 건지 묻고 싶었다.
낙월영은 남몰래 맹금우에게 눈짓을 해 보이며 이 모든 일을 낙청연의 탓으로 돌리라고 지시했다.
낙청연은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서 있었지만 두 사람이 눈빛을 교환하는 걸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그들이 어떻게 자신에게 잘못을 떠넘기려는지 지켜볼 생각이었다.
맹금우는 여전히 큰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정절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이토록 큰 망신을 당했으니 앞으로 살 의지가 없어졌다. 그러나 죽는다고 해도 낙청연과 함께 죽을 셈이었다.
그녀는 낙청연을 가리키더니 씩씩거리며 말했다.
“왕야, 전부 왕비 마마 때문이옵니다. 왕비 마마가 절 해쳤사옵니다! 저희 어머니께서는 저를 위해 혼사까지 정해주셨는데 이제 어떻게 시집을 가겠습니까? 차라리 죽는 게 낫지…”
맹금우는 통곡하기 시작했다.
맹금우가 말을 마치자 낙월영은 매우 놀란 얼굴로 낙청연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언니, 어찌 이렇게 잔인해지셨습니까?”
낙청연은 낙월영의 겁에 질린 얼굴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낙월영의 말에 대꾸하기 귀찮아서 맹금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널 해쳤다니, 증거는 있느냐?”
맹금우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있는 하인들을 쳐다보면서 물었다.
“말하거라. 누가 너희들을 여기에 보낸 것이냐?”
부진환도 그곳으로 시선을 던졌고 하인들은 덜덜 떨면서 대답했다.
“왕… 왕비 마마께서 시키신 일입니다.”
그 말에 맹금우는 대단한 증거를 찾아낸 사람처럼 부진환의 발치에 엎드리면서 통곡했다.
“왕야, 왕야. 들으셨습니까? 왕비 마마께서 절 해하셨습니다. 전 이제 어찌합니까? 제가 왕비 마마께 주제도 모르고 왕비의 자리를 탐했다고 해서 저한테 원한을 품은 것이 분명합니다! 이제 제 인생은 어찌합니까?”
정원에 있던 하인들은 전부 낙청연의 소문을 익히 알고 있었고 그녀가 동생을 대신해 혼인을 치렀다는 것도 알고 있었기에 모두 그녀를 업신여겼다. 그리고 맹금우가 이토록 비참해진 모습을 보니 다들 저도 모르게 그녀를 불쌍히 여겼다.
“왕비라는 사람이 이렇게나 포악하다니, 왕비의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야.”
“원래도 가짜 왕비가 아니었는가? 누가 그녀를 왕비로 인정하나? 세상에, 염치도 모르고 주제 파악도 못 하네.”
정원에 있던 나이 많은 몸종들이 이를 갈면서 말했다. 그녀들은 이때다 싶어 낙청연을 신명 나게 욕했다.
사람들이 낙청연을 손가락질해대자 낙월영은 무척 기뻤다. 섭정왕부 전체를 통틀어 놓고 봤을 때, 왕야를 포함해서 낙청연의 편을 들어줄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오늘 밤 낙청연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고 해도 그녀는 해명할 방법이 없었고 그저 죄를 뒤집어쓰고 죽어야 했다.
낙월영은 서늘한 눈빛으로 앞으로 이어질 상황을 지켜봤다.
제8화
낙청연은 사람들의 손가락질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곧바로 무릎을 꿇고 있는 하인들에게 다가가서 차분하고 느긋하게 물었다.
“내가 시킨 일이라고 했느냐? 그럼 말해보거라. 내가 언제 어디서 너희들더러 여기로 오라고 했느냐? 언제 내 처소로 들어오라 어떻게 얘기했느냐? 게다가 이건 왕비의 처소다. 감히 이곳에 들어갈 생각을 했느냐? 내가 무슨 조건을 약속했길래 죽음을 무릅쓰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냐?”
그녀의 연이은 질문에 무릎을 꿇고 있던 하인들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맹금우를 바라보면서 그녀의 도움을 바랐다.
부진환은 눈을 가늘게 뜬 채로 조용히 그 모습들을 전부 지켜보고 있었고 낙청연을 살피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홀로 이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하는데 그녀는 침착함을 유지하면서 조리 있게 얘기했다. 낙청연은 생각보다 똑똑한 사람이었다.
“말해보거라. 내가 시킨 일이라 하지 않았느냐? 내가 너희들에게 어떻게 얘기했는지 다시 말하는 것도 못 하겠느냐?”
낙청연은 코웃음을 치면서 말했다.
맹금우는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그 문제에 관해서 말을 맞춘 적이 없었기에 계획이 틀어지게 된 것이다. 맹금우는 무언가 기억난 듯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약입니다. 왕비 마마께서는 저에게 약을 쓰셨습니다. 왕야께서도 왕비 마마께 당한 적이 있으시지요. 왕비 마마께서 약을 쓴다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부진환의 눈빛이 차가워졌다.
낙청연은 부진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아채고는 얼른 먼저 입을 열었다.
“왕야, 제가 왕야께 이 약을 썼다면 혼인날 왕야께서 정신을 차릴 수 있었겠습니까? 게다가 제가 가져온 미정향은 그날 다 써버렸습니다. 전 이곳에 올 때 몸만 왔습니다. 제가 또 어디서 약을 구한다는 말입니까?”
낙청연이 그날 썼던 약은 미정향이었고 그 약은 극락산보다 효과가 훨씬 떨어졌다. 맹금우는 정원 바닥에 내쳐지고도 정신을 아예 못 차렸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었으니 약효가 몹시 강하다는 건 아주 명백한 사실이었다.
혼인날 밤 극락산을 썼으면 낙청연은 자신이 바라던 대로 부진환과 몸을 섞었을 것이다.
맹금우는 조바심이 났는지 끈덕지게 달라붙었다.
“왕야, 저 말은 이 약이 무슨 약인지 알고 있다는 얘기가 아니겠습니까? 왕비 마마께서는 이 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니 분명 왕비 마마께서 꾸미신 일일 것입니다!”
낙청연은 무덤덤한 얼굴로 맹금우를 쳐다보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왕부가 작은 건 아니지만 그렇게 큰 것도 아니니 누구한테 이 약이 있는지 찾아보면 될 것 아니냐? 난 대신 혼인을 치른 몸이니 아무것도 없이 왔다. 마음대로 찾아보거라.”
맹금우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더니 켕기는 게 있는지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극락산은 다 사용하지 못한 상태였고 남은 절반은 그녀의 침상 아래에 있으니 만약 제대로 수색한다면 들통날 게 뻔했다.
낙월영도 놀라긴 매한가지였다. 낙청연 같은 멍청한 사람이 갑자기 언변이 늘었으니 말이다.
예전이었다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손가락질받는 게 두려워 곧바로 방 안으로 숨어들었을 텐데, 오늘은 맹금우와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게다가 낙청연은 생트집을 잡는 것도 아니었고 말을 똑 부러지게 잘했다.
낙월영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부진환을 힐끗거렸다. 부진환이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는 걸 보니 낙청연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녀로서는 정말 큰 일이었다.
낙청연은 눈썹을 까딱이면서 일부러 부진환의 성질을 긁었다.
“왕야께서는 현명하고 슬기로운 분이시니 무고한 사람을 벌하시지는 않겠지요?”
부진환의 눈빛은 살벌했다. 그는 미간을 구기고 있었는데 당연하게도 어떻게 된 일인지 전부 알 수 있었다.
“여봐라, 맹금우를…”
낙월영은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신의 계획이 철저히 실패했음을 깨달은 낙월영은 곧장 입을 열어 그의 말허리를 잘랐다.
“왕야, 맹금우는 이미 큰일을 한 번 겪었습니다. 여자로서 평생 얼굴도 들고 다니기 어려운 치욕적인 일을 겪었는데 한 번만 용서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부진환은 그녀의 말에 잠깐 주저했고 맹금우를 살려두기로 마음먹었다.
“일단 맹금우를 후원에 가두거라.”
그의 매서운 눈빛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하인들에게로 향했다. 그는 냉기가 감도는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이것들은 전부 죽여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 하인들은 기겁하며 말했다.
“왕야, 살려주시옵소서! 왕야, 전부 사실대로 말하겠습니다. 전부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부진환은 그들을 살려둘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는 손을 휘저으면서 더없이 냉혹한 얼굴로 말했다.
“왕부 내에서 이딴 짓을 저지르다니, 전부 죽여라.”
몇몇 하인들은 아직도 손이 발이 되도록 빌고 있었고 소유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곧장 호위들을 불렀다.
“전부 끌어내거라.”
호위들은 앞으로 나서더니 그들을 전부 기절시키고는 정원 밖으로 끌고 나갔다.
스산한 분위기에 정원에 있던 사람들은 감히 숨도 크게 내쉬지 못했고 정원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맹금우 또한 그들과 마찬가지로 정원 밖으로 끌려 나갔다. 그녀는 감히 용서조차 구하지 못했으나 끌려 나갈 때 증오심을 가득 품은 눈빛으로 낙청연을 바라봤다.
그 순간 낙청연은 맹금우의 양미간에서 죽음의 기운을 발견했다. 그녀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자신을 노려본다고 해도 그녀의 눈동자에는 생기가 아예 없었고 얼마 가지 않아 죽을 운명이었다.
오늘 같은 일은 여인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부진환이 그녀를 죽이지 않는다고 해도 그녀는 살기 어려울 것이다.
소유는 곧장 모든 사람을 데리고 정원을 떠났다.
낙월영은 큰 충격을 받은 듯이 이마를 짚고 있었는데 몸이 허약해서 하마터면 쓰러질 뻔한 걸 부진환이 받아냈다. 그는 그녀를 부축하면서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괜찮느냐?”
낙월영은 온화하지만 쑥스러운 듯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습니다. 왕야께서도 피곤하실 터이니 먼저 돌아가 쉬세요.”
그 말은 부진환이 자신을 방까지 데려다줬으면 좋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부진환은 잠깐 고민하다가 말했다.
“소유, 네가 월영이를 방까지 모시거라. 그리고 의원을 불러 정신을 안정시키는 약을 처방 받거라.”
“왕야의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소유는 앞으로 나서면서 낙월영을 데리고 떠났다.
정원은 다시금 정적에 휩싸였고 그곳에는 낙청연과 부진환 두 사람만 남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서 있었는데 부진환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보면서 그녀에게 경고했다.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널 여기서 쫓아낼 것이다.”
낙청연은 그의 말에 참지 못하고 냉소를 흘렸다.
“다음 번이라니요? 왕야께서는 제가 이 모든 일들을 꾸몄다고 확신하시는 것 같은데 어찌 맹금우를 가두셨습니까? 저를 가두셔야지요.”
부진환은 도발하는 듯한 그녀의 시선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는 서늘한 음성으로 말했다.
“내가 진짜 모를 것 같으냐? 맹금우는 아마도 널 해치려 한 것이겠지. 하지만 결국 그 일을 당한 것은 맹금우다. 그런데도 네가 아무런 짓도 하지 않았다는 말이냐?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지만 다음번에 또 이런 일이 일어나면 그때는 절대 널 용서치 않을 것이다.”
부진환의 말에 낙청연은 속에서 열불이 났다. 그녀는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며 말했다.
“그러니까 왕야의 말씀은 다른 사람이 절 해치려고 해도 그저 참고 있으라, 그 뜻입니까? 왕야께서는 모든 걸 다 꿰뚫어 보시면서 낙월영과 맹금우의 관계는 미처 알아채지 못하셨나 봅니다. 오늘 밤 일이 정말 그렇게 간단한 일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왕야께서는 절 역겨워하시지요. 제가 낙월영 대신 혼례를 치렀다고 말입니다. 그런데 왕야께서는 생각해보신 적이 있습니까? 아무런 힘도 없는 제가 어떻게 이 삼엄한 경비를 뚫고 왕부로 왔는지를 말입니다.”
어쩌면 몸의 원래 주인의 억울한 마음이 남아서일지 몰랐다.
그녀는 낙청연의 억울한 사정에 측은지심이 생겨 저도 모르게 말을 덧붙였다.
낙청연은 그렇게 총명한 사람이 아니었고 대신 혼인을 치르라고 낙청연을 꼬드긴 것은 낙월영이었다.
그런데 부진환은 모든 잘못을 낙청연에게 돌렸고 지금도 그녀가 뭘 하든 전부 잘못됐다고 지적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에 부진환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날카롭게 낙청연을 쏘아보면서 그녀를 위협했다.
“마지막으로 경고하마. 살고 싶다면 그냥 쥐 죽은 듯이 있거라.”
제9화
부진환의 미간에 있던 불길한 기운이 더 강해졌고 눈가는 파란빛을 띠고 있었다. 낙청연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더니 참지 못하고 다시 한번 그에게 충고했다.
“왕야, 자꾸 그렇게 한쪽 말만 믿으시면 정말 큰일 나실 것입니다. 요 며칠간은 외출하지 마세요. 정말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부진환은 그녀의 말을 듣고도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건지 경고하며 말했다.
“저택 안에서 요사스러운 말로 사람들을 현혹하거나, 월영의 월자라도 꺼내는 날엔 네 혀를 잘라버릴 것이다.”
낙청연은 코웃음을 쳤다. 그를 걱정하는 마음에 한 말임에도 불구하고 부진환은 그녀가 낙월영을 모함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사람의 호의를 이렇게나 받아들이지 못하니, 낙월영은 그가 죽든 말든 상관하지 않기로 했다. 부진환이 죽으면 수세를 써달라고 할 필요도 없으니 더 좋았다.
낙청연은 더는 그와 말을 섞고 싶지 않았기에 곧바로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낙월영은 승상부의 큰아씨였으니 부진환은 그녀를 죽일 수 없지만, 그녀가 편히 살지 못하게 할 수는 있었다.
낙월영은 부진환이 이번 고비를 넘길 수 있을지 없을지를 지켜볼 생각이었다. 그의 몸에는 용의 기운이 있으므로 어쩌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몰랐고, 만약 그가 위기를 이겨낸다면 낙청연은 그때 가서 다시 방도를 생각해 볼 셈이었다.
처소로 돌아온 낙청연은 직접 이불을 새로 바꿨고 일을 마치니 이미 자시(子時:밤 11시부터 오전 1시까지의 사이)였다.
그녀는 벽에 몸을 붙인 채로 책상다리를 하고 앉았다. 예전에 배운 적이 있었던 내공 심법(內功心法)으로 기운을 다스리고 호흡을 가다듬을 생각이었다. 그녀의 몸은 살이 많아 묵직했고 다시 무예를 익히려면 우선은 경맥을 뚫어야 했다. 그래서 낙청연은 매일 밤 가부좌를 틀고 앉아 내공 심법을 수련했다. 이렇게 하면 앞으로 무예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될 터였다.
평소였다면 그녀의 정력으로는 날이 밝을 때까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을 수 있었지만, 이번에는 왜인지 모르게 두 시진 정도 지나니 스르르 잠이 들어 침대 위로 쓰러졌다.
그녀는 꿈을 꿨는데 꿈속에서 흐릿한 얼굴을 가진 이가 매섭게 그녀를 질책했다.
“천명 나침반(天命羅盤)을 내놓아라!”
“싫어!”
그녀는 죽을힘을 다해 가슴팍에 숨긴 물건을 손에 꼭 쥐고 있었다.
흐릿했던 얼굴은 어느새 악귀의 모습으로 변했고 그것은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녀의 뱃가죽을 찢었다.
“널 산채로 찢어발기더라도 천명 나침반을 손에 넣을 것이다!”
아프지는 않았지만 온몸을 죄어오는 두려움에 그녀는 밤새 악몽 속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내 것이다. 나침반은 내 것이야. 내 것이라고!”
낙청연은 식은땀을 줄줄 흘리면서 잠꼬대했다. 그녀는 두 손으로 가슴께를 붙잡고 있었는데 힘을 얼마나 준 건지 손이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다.
다음 날 아침, 날렵한 몸짓을 가진 자가 서방에 왔다.
“왕야.”
소서는 성큼성큼 걸어가서 더러워진 찐빵과 약 분말을 건넸다.
“이건 왕비 마마의 처소에서 발견한 찐빵입니다. 그리고 맹금우의 방 안에서 쓰다 남은 약을 발견했는데 극락산이었습니다. 이 약은 약효가 아주 강한 약입니다. 사람에게 환각을 보여주는데 사람과 짐승을 구분하지 못할 정도이고 약효는 대략 네 시진 정도 지속됩니다.”
그 말에 부진환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이렇게 고약한 약을 맹금우가 어찌 구한 것이냐? 부운주(傅雲州)와 관련이 있느냐?”
소서는 고개를 저었다.
“혼인날 왕비 마마께서 사용하신 미정향은 오황자가 제공한 것이었습니다. 오황자의 처소에 가서 조사해보았지만 극락산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제 추측이지만, 만약 오황자에게 극락산이 있었다면 왕비 마마께 미정향을 주지도 않았겠지요.”
그 말에 부진환의 고민이 깊어졌다. 그는 가라앉은 눈빛으로 낮게 말했다.
“부운주에게 극락산을 가져가서 한 번 시험해 보거라. 다섯째는 절대 보이는 것처럼 단순한 자가 아니다. 이미 내 옆에 첩자도 심어두지 않았더냐.”
소서는 명령을 받고 떠나려 했는데 갑자기 무언가 떠올라 얘기했다.
“조금 전 왕비 마마의 처소에 가봤었는데 왕비 마마께서 악몽을 꾸시는 듯했습니다. 계속 나침반 얘기를 하더군요.”
그 말에 부진환은 코웃음을 쳤다.
“잘못한 일이 하도 마느니 악몽을 꾸는 것이겠지. 하지만 그 나침반에 대해서는 잘 알아보거라. 어쩌면 그 둘의 사랑의 증표일지도 모르니.”
낙청연이 그저 잠시 귀신에게 홀려서 낙월영 대신에 혼인을 치른 것이면 괜찮았지만 그는 낙청연과 부운주가 밀회하는 모습을 몇 차례나 목격했었다. 자신에게 썼던 미정향마저 부운주가 준 것이니, 낙청연은 자신을 사랑하는 게 아니었고 그저 잠복해온 첩자에 불과하다고 부진환은 생각했다.
심지어 그녀가 했던 변명들마저도 전혀 믿음직스럽지 않았으니 자신을 속일 수는 없었다.
부진환은 다섯째 아우가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지 궁금했다. 자신에게 첩자까지 보냈으니 부진환은 부운주가 대체 뭘 하려는 건지 지켜볼 심산이었다.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낙청연은 여전히 침대 위에 누운 채로 악몽에 시달리고 있었다. 저택의 계집종은 그 모습을 봤음에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고, 물을 받은 대야를 방 안에 두고서는 냉담한 얼굴로 나갔다.
점심시간이 되고 등 어멈이 저택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총총걸음으로 급히 낙청연의 방문 앞에 섰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렸는데도 반응이 없어서 그대로 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등 어멈은 다소 기뻐 보였는데 침상 위에 누워있는 낙청연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왕비 마마. 왕비 마마! 얼른 일어나보시옵소서!”
등 어멈은 겁에 질린 얼굴로 낙청연을 마구 흔들었고 낙청연은 잠에서 깨어났다.
번쩍 눈을 뜬 낙청연은 마치 죽을 뻔했다가 살아 돌아온 사람처럼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낙청연은 얼굴이 창백했고 온몸에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으며 머리카락이 이마에 달라붙어 있었다.
“에구머니나, 왕비 마마. 어떻게 된 일입니까?”
등 어멈은 부랴부랴 손수건을 꺼내어 그녀의 이마를 가득 적신 땀을 닦아줬다.
낙청연은 고개를 내저었다. 몸을 일으켜 앉으려고 하는데 아직도 가슴팍을 꽉 붙잡고 있는 걸 그제야 발견했다. 손가락은 저렸고 손을 펴려고 하니 시큰거렸다. 낙청연은 결국 등 어멈의 부축을 받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그 순간 그녀의 품 안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졌다. 그녀의 품에서 떨어진 건 다름 아닌 그녀가 꿈속에서 안간힘을 다해 지켰던 천명 나침반이었다. 낙청연은 한참 동안 넋을 놓고 있더니 진짜 그것을 만지게 됐을 때는 더없이 기뻐하면서 흥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것을 손에 들었다.
천명 나침반. 진짜 천명 나침반이었다.
꿈에서 본 물건이 진짜 그녀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조상님께서 대대로 물려주신 보물이었고 생전에 그것을 빼앗으려 했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지금쯤 이미 다른 사람의 손에 넘어갔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그녀에게로 다시 돌아온 것이다.
아마도 조상님들의 가호 덕분일지도 몰랐다.
“왕비 마마?”
등 어멈은 그녀의 모습에 몹시 놀랐다.
낙청연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서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나침반을 거두어들였다. 그러고는 선반 쪽으로 가서 세수하며 물었다.
“언제 돌아온 것이냐? 네 어미의 병은 어떻게 됐느냐?”
등 어멈은 잔뜩 들뜬 얼굴로 말했다.
“왕비 마마께서 말씀하신 대로 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약을 드시고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의원을 모셨는데 의원께서도 다 나았다고 하셨지요. 제가 귀인을 만났다고 하시더군요.”
등 어멈은 신난 기색을 감출 수가 없었고 열정적인 태도로 낙청연을 화장대 앞까지 모셨다.
“정말 너무 감사드립니다, 왕비 마마!”
낙청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았으면 됐다. 그리고 네 어미에게 항상 조심하라고 일러두거라.”
낙청연은 그 말을 하면서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는데 거울을 통해 등 어멈의 얼굴 반쪽이 청색의 비늘로 가득 뒤덮인 게 보였다.
낙청연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제10화
거울에 비친 등 어멈은 기쁨에 가득 차서 말했다.
“네, 네. 기억했습니다. 정말 어떻게 왕비 마마께 감사드려야 할지 모르겠사옵니다. 오늘부터는 제가 왕비 마마를 모시겠습니다. 부족한 점이 많겠지만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등 어멈은 그 말과 함께 비녀를 손에 들고 낙청연의 머리에 꽂아주려 했다.
바로 그 순간, 낙청연의 눈빛이 번뜩였고 그녀는 잽싸게 등 어멈의 손을 잡고서는 그녀와 마주 보고 섰다.
등 어멈은 깜짝 놀라더니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며 물었다.
“왕비 마마, 왜 그러십니까?”
낙청연이 손에 힘을 주자 등 어멈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손에 힘을 풀었고 비녀가 바닥에 떨어졌다.
상대는 낙청연의 뜻을 알아채고는 살벌한 눈빛을 하며 재빨리 탁자 위에 있는 다른 비녀를 들어 낙청연을 찌르려 했다.
등 어멈은 힘이 아주 셌고 낙청연은 버티지 못하고 그녀에게 밀쳐져 바닥에 쓰러졌다. 서늘한 빛이 감도는 비녀는 마치 예리한 칼날처럼 그녀의 눈동자 위에서 번쩍이고 있었다.
등 어멈은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비녀로 그녀의 눈알을 찌르려 했다.
액살을 구분해내는 것은 풍수사(風水師)가 반드시 갖춰야 할 덕목이었다. 낙청연은 등 어멈의 눈동자가 초록색으로 빛나는 걸 보고는 곧바로 상대가 무엇인지 알아챘다.
“몹쓸 놈, 죽어라!”
낙청연은 등 어멈의 손목을 잡고 있던 손에서 갑자기 힘을 풀었고, 그 바람에 뾰족한 비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낙청연은 날렵한 몸짓으로 고개를 한쪽으로 피했고 동시에 등 어멈의 복부를 주먹으로 치고 그녀를 걷어찼다.
그리고는 벌떡 몸을 일으켜 등 어멈의 몸 위로 올라타서는 손가락을 씹어서 피를 낸 뒤에 등 어멈의 이마에 부적을 적기 시작했다.
부적이 완성되는 순간 등 어멈의 이마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고 등 어멈은 고통스러운 듯 몸을 비틀었다. 등 어멈은 얼굴은 사정없이 찡그리면서 끊임없이 비명을 내질렀다.
정원에 있던 하인들은 그 처참한 비명에 등골이 오싹했다. 그들은 한데 모여서 수군덕거리기 시작했다.
“왕비 마마께서 학대하시는 건 아닐까?”
“저렇게 울부짖는 걸 보니 아마도 맞는 것 같네.”
…
검은 연기가 흩어져서 사라지는 순간, 청색의 그림자가 재빨리 탁자 밑으로 지나가더니 방문 밖으로 사라졌다.
낙청연은 미간을 구긴 채로 정신을 잃은 등 어멈을 바라봤다. 등 어멈의 집안에서 건드린 것은 예사 물건이 아니었다. 낙청연은 그저 작은 충돌이 있었던 줄로 알고 간단히 풀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었다.
생각해보면 죽은 이를 기리는데 은표를 태웠다는 것 자체가 이상한 일이었다.
등 어멈은 서서히 정신을 차리더니 바닥에서 일어나며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봤다.
“왕비 마마, 제가… 제가 어찌 여기 있는 것입니까?”
낙청연은 손수건으로 손가락에 묻은 피를 닦으며 질문했다.
“네 마지막 기억에서 너는 어디에 있었느냐?”
“어젯밤 저는 왕비 마마의 말씀대로 저택을 나섰고 먼저 약을 지어서 어머니께 드렸습니다. 하지만 너무 늦은 시각이라 감히 무덤에 갈 엄두가 나지 않아서 오늘 아침 일찍 가서 은표와 노잣돈을 태우고는 곧장 저택으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정신을 차려보니 바로 저택 안에 있다니…”
등 어멈은 곤혹스러웠다. 그녀는 이마가 축축한 기분이 들어서 손을 들어 이마를 만져봤는데 피가 흥건해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낙청연은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놀랄 것 없다. 너희 집안일은 끝나지 않았다. 어떤 것들은 사특한 방법을 통해 인간이 되려 하지. 이 세상에는 법칙이라는 게 있고 운명이라는 게 있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듯이 나쁜 일에는 나쁜 결과가 따르는 법이다.”
낙청연은 탁자 앞에 앉으면서 부적 두 장을 그렸다.
등 어멈은 그녀의 뜻 모를 말에 등허리가 서늘했다. 입을 열어 그녀에게 물으려는데 낙청연이 말을 이어갔다.
“정도(正道)를 걷고 싶다면 내가 도와주마. 날 만난 것 역시 네 운명이니 말이다.”
등 어멈은 얼떨떨했지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정도가 좋지요. 정도가 좋습니다.”
낙청연은 고개를 들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대들보 쪽을 쳐다봤고 청색의 무언가는 급히 몸을 숨기더니 이내 사라졌다.
이어서 그녀는 두 장의 부적을 등 어멈에게 건네주며 당부했다.
“하나는 너희 어미의 침상 머리맡에 붙이고 다른 하나는 네 침상 머리맡에 붙이거라. 그리고 편옥(偏屋)에 이름이 적히지 않은 위패를 모셔놓고 하루에 향을 세 개씩 피우거라. 그렇게 하면 집안에 별일 없을 것이다. 어쩌면 좋은 기회가 생길지도 모르지.”
등 어멈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면서 물건을 건네받았고 바로 옷 속에 집어넣었다.
“그럼 지금 당장 집으로 가서 일을 처리할까요?”
“그래. 맹 관사가 아직 돌아오지 않았으니 얼른 가서 일 보거라.”
맹금우의 어머니가 돌아온다면 등 어멈은 저택을 나가기 더욱 어려워질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당장 가보겠습니다.”
등 어멈은 곧바로 방을 나섰다. 그녀는 낙청연의 말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등 어멈이 떠나기 무섭게 낙청연은 고개를 들어 대들보를 바라보며 말했다.
“얼른 가지 않고 무엇하느냐?”
청색의 그것은 눈 깜짝할 사이에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등 어멈은 조금 전 겪었던 기이한 일로 머릿속이 가득 찼다. 오싹한 기분과 함께 온몸에 소름이 돋은 그녀는 자신이 머리에 피를 뒤집어쓰고 있다는 것을 깜빡했고 그렇게 대놓고 낙청연의 정원에서 나왔다. 그 바람에 적지 않은 하인들이 입방아를 찧어댔다.
“세상에나, 머리에 피가 흥건하네.”
“왕비 마마도 정말 잔인하시네. 정말 너무 무서워.”
얼마 지나지 않아 왕비가 하인을 학대했다는 소문이 왕부의 내원에 퍼졌다.
등 어멈은 낙청연이 말해 준 일을 곱씹는 데 여념이 없었기에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로 저택을 떠났다.
저택의 다른 이들이 보기에 등 어멈은 맞아서 멍청해진 건지 정신을 반쯤 놓은 채로 저택을 나서는 것으로 보였다.
“아, 참. 오늘 왕비 마마의 점심 식사를 책임진 자는 누구지? 왜 아직도 가져다주지 않은 거야?”
누군가 궁금한 듯 물었다.
“세상에, 잊고 있었네.”
장미(薔薇)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조금 전 등 어멈이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떠나는 모습을 떠올리니 너무 불안했다. 그래서 그녀는 옆에 있던 지초(芝草)를 밀면서 명령조로 말했다.
“네가 가.”
지초는 그녀에게 밀쳐져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고 입술을 꾹 깨물었다. 거절하고 싶었으나 그럴 용기가 없었기에 지초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
낙청연이 나침반을 꺼내 들었는데 갑자기 누군가 문을 두드렸고 뒤이어 덜덜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 왕비 마마, 점심 식사를 가져왔습니다.”
그 말을 들은 낙청연은 나침반을 다시 넣었고 조금 놀랐다. 이 저택에서 그녀를 왕비라 생각하는 계집종은 없었고 차와 물을 가져다줄 때 이렇게 태도가 공손한 이도 없었다.
“들어오려무나.”
뒤이어 계집종 한 명이 들어왔다. 열다섯, 열여섯 정도 돼 보였는데 몸이 말랐고 낙청연을 두려워하는 건지 시선이 아래를 향해 있었다. 계집종은 음식을 그녀의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왕비 마마, 소인이 점심 식사를 늦게 가져왔습니다. 소인을 벌해주시옵소서.”
지초는 등 어멈이 피를 뒤집어쓰고 있던 모습이 떠올라 두려움에 무릎을 털썩 꿇었다.
그리고 낙청연은 재밌다는 듯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 저택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나 보구나?”
지초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온 지 보름 정도 되었습니다. 그전에는 후원에서 잡일을 맡았었고 오늘부터 내원에서 청소하게 되었습니다.”
낙청연은 그녀의 목소리에 기력이 없음을 느끼고는 흥미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고개를 들어보아라.”
지초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들었고 감히 낙청연을 쳐다보지 못했다.
낙청연은 그녀의 눈동자에 흰 기운이 드리워져 있고 광대뼈에는 청자색이 감도는 걸 발견했다. 그녀는 병을 앓고 있었고 이제 수명이 1년 정도 남은 듯했다.
낙청연은 지초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는데 지초는 화들짝 놀라면서 몸을 굳히며 두려움에 떨었다.
맥을 짚어본 낙청연은 지초가 과로로 인해 병을 앓고 있다는 걸 알고는 깜짝 놀랐다.
바로 그때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려왔고 낙청연은 살짝 놀란 얼굴로 지초에게 그녀에 관한 몇 가지 질문을 했다.
지초는 고달픈 운명을 타고난 자였다.
낙청연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소매 안에서 나침반을 꺼내 들었다. 지초는 불운한 운명을 가진 자였고 낙청연은 다른 사람의 운명을 바꿔주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하늘의 뜻을 거역하는 일 같지만 지초가 자신을 만난 것 또한 지초의 운명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자신은 지초 인생에서의 변수였다.
“마침 내 곁에서 시중을 들 계집종이 필요하던 참이었다. 오늘부터 내 옆에서 시중을 들 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