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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남편
낮에는 능력있고 지고지순한 수석비서로, 저녁에는 부드럽고 요염한 섹스파트너로 변신하는 조수아. 3년간의 동고동락 끝에 남자도 자신을 사랑하고 ...
Chương (1)
第1章
0001 화
격렬한 정사가 끝나고, 조수아는 옅게 배어나온 땀을 한 채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육문주는 그런 조수아를 품에 안은 채 마디가 분명한 손가락으로 그녀의 오관을 덧그렸다.
본인은 모르겠지만 깊고 매혹적인 눈매에 전에 없는 다정함을 담고 있었다.
조수아는 몸이 혹사될대로 되어 힘들었지만 그래도 이 순간 사랑을 받고 있다는 기분 때문에 마음만은 충만했다.
그러나 그녀의 정욕이 채 흩어지기도 전에 육문주의 휴대폰이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조수아는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육문주의 팔을 끌어안고 있는 손에 힘이 조금 더 실렸다. 고개를 든 그녀가 작게 물었다.
“안 받으면 안 돼?”
전화를 걸어온 송미진은 육문주가 마음에 품고 있는 여인으로, 귀국한지 한 달도 안 돼 벌써 여러 번이나 자살소동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 자살소동들이 사실은 송미진이 일부러 난리를 피운 거라는 걸 조수아는 모르지 않았다.
육문주는 그녀의 기분은 아랑곳 않은 채 제 팔에 감긴 손을 밀어내며 기다렸다는 듯이 통화버튼을 눌렀다. 마치 방금 전 서로 온도를 나눴던 적이 없었던 것처럼.
송미진이 전화에 대고 무슨 소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육문주의 눈동자 깊은 곳에 밀물이 세차게 밀려들어 오며 창밖의 밤보다 더 어두운 눈빛으로 변해갔다.
전화가 끊긴 후 육문주는 빠르게 옷을 챙겨입으며 입을 열었다.
“미진이가 또 자살하려나 봐. 그쪽에 가봐야겠어.”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조수아는 군데군데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는 키스마크를 달고 뜨거운 눈길로 남자를 바라봤다.
“오늘 내 생일이야. 나랑 같이 있기로 했으면서. 나 당신한테 중요한 얘기 할 거 있어.”
이미 반듯하게 옷을 갖춰입은 육문주가 예리한 눈썹뼈 아래에 위치한 서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언제부터 그렇게 일의 중요순서를 모르고 이기적이게 된 거야. 송미진이 언제든지 생명이 위험할 수 있다잖아.”
조수아가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방문이 굳게 닫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자동차에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수아는 베개 밑에 감춰둔 정교한 케이스를 꺼내 손바닥 위에 올렸다. 안에 든 두 개의 반지를 고개숙여 바라보는 그녀의 눈동자가 차츰 젖어갔다.
3년 전, 조수아가 질 나쁜 사람한테 몰려 골목길에서 오도가도 못할 때 육문주가 갑자기 나타나 그녀를 구해주었고, 이로 인해 허벅지까지 다치는 일이 있었다. 그때 조수아가 먼저 나서서 그의 병간호를 해주겠다 요청했었다.
그렇게 간간이 만남을 이어오다 어느날 술을 마신 뒤로 두 사람은 잠자리를 갖게 되었다. 그때 육문주가 이렇게 제안했었다. 나와 만나보지 않겠냐고. 전제는 자신이 결혼생활을 그녀에게 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조수아는 고민할 것도 없이 당연히 오케이했다. 그 시점에서 그녀는 이미 육문주를 4년이나 짝사랑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 조수아는 낮에 육문주의 예쁘고 능력있는 여비서로, 저녁에는 그의 말 잘 듣고 착한 잠자리 파트너가 되었다.
조수아는 순진하게도 육문주가 자신을 사랑하는 줄로만 알았다. 결혼을 하지 않으려 하는 것도 그저 집안 영향을 받아 그런 걸로 알았다.
그래서 조수아는 3년이 지난 지금, 하루를 꼬박 들여 프로포즈를 준비했고 오늘 원래 육문주한테 고백해서 그가 마음속 응어리를 풀 수 있게 도와주려 했다.
그러나 송미진의 전화는 그녀를 완전히 착각속에서 빠져나오게 만들었다.
육문주는 사실 결혼을 하고 싶어하지 않는 게 아니라, 그저 결혼하고 싶은 대상이 자신이 아니었던 것이다.
조수아는 쓰게 웃으며 반지를 다시 케이스에 넣었다. 그리고 손수 꾸민 베란다 장식도 쓸쓸히 다 치운 뒤 혼자 차를 몰고 나갔다.
그런데 차를 타고 나간지 얼마 안 돼 그녀의 아랫배 쪽에서 극심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뜨거운 온기가 허벅다리를 타고 밑으로 내려온다 싶더니, 고개를 숙이자 하얀색 가죽시트가 시뻘건 피로 잔뜩 물들어 버렸다.
예감이 좋지 못한 조수아는 그 자리에서 당장 육문주에게 전화를 걸엇다.
“문주 씨, 나 지금 배가 너무 아파서 그런데 데리러 와주면 안 돼?”
짜증 섞인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흘러왔다.
“조수아, 떼를 쓰고 싶어도 시간과 때를 가려서 해야지!”
가죽시트에 점점 더 퍼지기 시작하는 피를 보며 조수아는 겁에 질려 울음을 터뜨렸다.
“아니야, 나 거짓말 안 했어. 나 정말로 배가 지금 너무 아파. 그리고 지금…”
피도 엄청 많이 흘리고 있다는 말을 하기도 전에 남자의 매정한 말이 돌아왔다.
“미진이 지금 목숨이 왔다갔다 한다고, 알아? 그걸 듣고도 투정 부리고 싶어?”
조수아는 넋이 나갔다가 한참만에야 정신을 차렸다. 무력한 웃음이 입가에 지어졌다.
“당신 지금 내가 억지를 부리고 있다고 생각해?”
“그럼 아니야?”
육문주의 싸늘한 반응이 조수아의 마음을 쿡쿡 찔렀다. 입술을 힘껏 깨문 그녀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실으며 온힘을 다해 욕했다.
“육문주, 이 개자식아!”
전화를 끊은 조수아는 식은땀에 흠뻑 젖어 통증을 겨우 감내하고 있었다. 구급전화를 누르려던 손가락에 힘이 풀리며 툭 떨궈졌다. 마지막으로 눈앞이 깜깜해짐과 동시에 조수아는 정신을 잃고말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조수아는 이미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의 옆에 앉아있던 친구 한지혜가 조수아가 깨어난 걸 보고 가슴 아픈 얼굴로 일어나 다가왔다.
“수아야, 괜찮아? 아직도 많이 아파?”
조수아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나 어떻게 된 거야?”
잠깐 머뭇거리던 한지혜가 조심스레 말했다.
“너 임신했었어. 의사가 말하길 너 자궁 내벽이 원래도 얇았던 데다가 관계를 가질 때 상대방이 너무 거칠게 해서 충격을 못 이기고 유산이 됐대. 그리고 과다 출혈도 동반 되고.”
조수아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은 온통 임신을 했는데 아이가 없어졌다는 생각만이 뇌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건 그녀와 육문주의 아이였다.
비록 육문주와는 어디까지 함께 갈 수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조수아의 첫 아이였다. 손가락을 말아 저도 모르게 주먹을 쥔 그녀는 소리없이 눈물을 떨궜다.
친구가 괴로워하는 모습에 한지혜는 몸을 굽혀 조수아를 꼭 안아주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너 지금 수술한 지 얼마 안 돼서 울면 안 돼. 나중에 네가 다 나으면 내가 젊고 잘생긴 남자들을 소개시켜 줄 테니까 그 개 같은 자식 콧대 단단히 눌러주자. 쓰레기 같은 새끼! 네 목숨을 위험하게 만든 것도 모자라, 감히 네 앞에서 바람까지 피워? 아주 그냥 부랄을 터뜨려도 시원찮을 놈이야, 그 새끼는.”
조수아는 심장에 수만 개의 화살이 날아와 박힌 것보다도 더 가슴이 아팠다. 차가운 손이 한지혜의 몸을 꼭 끌어안았다. 꺽꺽거리는 목구멍에서 한참이나 아무런 소리도 나오지 못했다.
자신한테 찾아오자마자 목숨이 꺾여버린 아이와, 그녀가 7년이나 사랑했던 남자를 생각하니 조수아는 도무지 평정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이 흐른 후에야 조수아가 입을 열었다.
“너 그 사람 봤구나.”
한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 새끼 지금 여기 병원 4층에서 송미진과 함께 있어. 너 수술할 때 네 휴대폰으로 전화 했었거든. 내려와서 수술동의서에 사인하라고. 근데 그 개자식이 전화도 아예 안 받더라.”
조수아는 고통스레 눈을 감았다.
“나 거기에 데려다 줄 수 있어?”
“너 방금 수술해서 흥분하거나 그러면 안 된다니까?”
“어떤 건 직접 봐야지, 아니면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서 그래.”
한지혜는 조수아의 고집을 못 꺾고 휠체어에 그녀를 앉힌 채 4층으로 향했다.
송미진의 병실 밖, 조수아는 열린 문틈으로 마침 부드러운 음성으로 송미진에게 약을 먹이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부드럽게 풀린 눈매와 듣기 좋은 목소리, 그 모든 것들이 조수아의 심장을 쪼그라들게 만들었다.
육문주의 몸에서 시선을 떼어내 송미진의 얼굴로 옮겼을 때, 조수아는 자신과 꽤나 닮아있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순간 모든 걸 깨달은 것 같았다.
비참한 웃음이 흘렀다.
고개를 돌린 조수아가 한지혜에게 말했다.
“나 병실로 데려다 줘.”
다시 육문주를 보게 된 건 그로부터 이틀이 흐른 뒤였다.
조수아는 침대에 누워 자신이 마음 깊이 사랑했던 남자를 조용히 쳐다봤다. 이젠 정말로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음에도 그녀는 여전히 죽을 것처럼 마음이 힘들었다.
육문주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못하다는 걸 발견했는지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틀이나 됐는데 아직도 아파?”
그는 조수아가 생리 때문에 아픈 줄로만 알았다. 예전에는 하루만 아프고 말았던 것이 이번에는 조금 오래가는 정도라고만 그렇게 생각했다.
조수아는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애써 요동치는 정서를 억눌렀다.
아무런 대답도 돌아오지 않자 침대에서 일어나 앉은 남자가 뜨뜻한 손바닥으로 그녀의 이마를 매만져 주었다. 목소리도 살짝 톤다운 되었다.
“너 지난 번에 맘에 든다고 했던 가방, 내가 다른 사람한테 부탁해서 사왔어. 거실 소파에 지금 있으니까 일어나서 봐봐.”
조수아는 아무런 파문도 없는 눈동자로 육문주를 마주봤다.
“지금은 안 좋아해.”
“그럼 차 바꿔줄까? 페라리? 아니면 포르쉐?”
또 침묵이 이어지자 육문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네가 원하는 게 뭔데?”
그가 생각하기에 돈으로 해결 못할 게 없는가 보다.
조수아는 잠옷 자락을 꽉 쥔 채 맑고 투명한 눈동자로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약간은 핏기가 없어 보이는 입술이 서서히 열렸다.
“나 당신이랑 결혼하고 싶어.”
0002 화
육문주의 낯빛이 삽시간에 싸늘해졌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검은색 눈동자가 조수아에게 단단히 박혔다.
“내가 결혼은 안 된다고 했잖아. 그 정도도 받아들이지 못하면 애초에 내 제안을 거절했어야지.”
조수아의 눈가에 옅은 붉은 빛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때는 우리 둘만의 감정이었는데 지금은 세 사람이 엮였잖아.”
“걔는 너한테 위협이 안 돼.”
자조 섞인 웃음이 지어졌다.
“그녀의 전화 한 통에 당신이 내 생사는 상관도 안 하고 나를 내팽개치는데. 말해 봐, 문주 씨. 대체 어떻게 해야 그걸 위협이라고 쳐주는지.”
육문주의 눈밑에 선명한 노기가 피어올랐다.
“조수아, 고작 생리통 때문에 이렇게 예민하게 굴 일이야?”
“내가 임신해서 그렇다고 하면?”
“애기 갖고 트집 잡을 생각 마. 매번 안전조치는 제대로 다 했으니까!”
그의 음성은 얼음처럼 차가웠고 답변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아이가 아직 살아있었어도 육문주는 아마 자신을 끌고 가서 아이를 떼어냈겠지? 조수아는 마지막 남은 일말의 환상마저도 완전히 파멸되는 걸 느꼈다.
꽉 움켜쥔 손바닥에 손톱이 깊게 박히는데도 조수아는 전혀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턱을 작게 치켜들고 버석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신이 예전에 그랬지. 우리 서로 감정만 나누고 결혼얘기는 하지 말자고. 그러다가 어느날 누구 한쪽이 싫증 나면 서로 좋게 헤어지는 걸로 하자고.”
“문주 씨, 나 이제 질렸어. 우리 헤어지자.”
질질 끄는 게 없이 깔끔한 이별통보였다. 다만 그녀의 가슴이 지금 피를 뚝뚝 흘리고 있다는 걸 아무도 몰랐다.
육문주의 손등에 핏줄이 불거졌다. 살벌한 눈빛이 조수아를 향했다.
“너 지금 그 말을 내뱉은 후과가 뭔지 알아?”
“내 입에서 이런 말이 먼저 나와서 당신 자존심이 상할 거라는 걸 알아. 그래도 문주 씨, 나 이제 힘들어. 세 사람이라서 나누는 사랑따위 난 싫어.”
예전의 그녀가 너무 헛된 꿈을 꾸고 있었다. 그저 두 사람이 서로 사랑한다면 굳이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이 그녀가 틀렸음을 일깨워 주었다. 육문주의 마음은 한 번도 그녀에게 있은 적이 없었다.
육문주가 손을 뻗어 조수아의 턱을 단번에 붙잡았다.
“그런 방법으로 너랑 결혼하게 협박하려고? 내가 널 너무 얕본 걸까, 아니면 네가 너무 스스로를 믿는 걸까?”
조수아는 실망스럽다는 듯 그를 마주봤다.
“마음대로 생각해. 아무튼 나 오늘 이 집에서 나갈 거야.”
침대에서 일어나 땅에 발을 딛으려는데 육문주가 우악스레 그녀를 낚아채 품에 안았다. 그리고 축축한 입술이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물어버렸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서늘함이 섞였다.
“지금 나한테서 떠나면 조 씨 가문이 예전으로 돌아갈까 봐 걱정 안 돼? 네가 3년이라는 청춘으로 바꿔온 거잖아.”
조수아는 대뇌가 펑하고 터지는 기분이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제대로 얘기해. 3년의 청춘이라니?”
육문주의 손끝이 그녀의 입술에 난 치흔을 아무렇게나 문지르며 입가를 비틀었다.
“계략을 꾸며서 내가 널 구하게 만들고, 결혼은 안 된다는 데도 나랑 같이 있겠다 하고, 네 아버지를 도와 조 씨 가문을 일으키기 위한 게 아니었으면 날 납득하게 할만한 다른 이유가 있어?”
그의 말대로 3년 전에 조 씨 가문에 전례 없는 경제위기를 맞은 적이 있었다. 그리고 육문주와 사귀게 된 후로 그녀의 가문을 사업적으로 많이 도와줘서 위기를 벗어날 수 있게 된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의 조수아는 육문주가 자신을 좋아해서 기꺼이 도움의 손길을 건네줬다 생각했었다. 입술이 열리고 떨리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당신 뜻은 여태까지 나한테 잘해 준 게 그저 어쩌다 보니 적당히 분위기 맞춰줬을 뿐, 나한테 아무런 감정도 없었다 이 말이야?”
육문주의 이마에 세워진 핏대가 툭툭 튀었다. 꽉 깨문 이 틈새로 말이 짓이겨져 나왔다.
“그럼 내가 짜고 치는 게임에서 진심으로 임할 줄 알았어?”
짧은 한 마디에 조수아는 칼에 찔린 것처럼 피가 철철 흘렀다. 3년이나 진심을 다해 사랑을 주었지만 그게 육문주한테는 적나라한 거래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조수아는 멍청하게도 그가 자신을 사랑한다고 생각했다.
온몸의 피부가 사냥개한테 물려 찢기듯 고통스러웠다. 눈밑에 서린 비통함도 이제는 서늘함으로 변해갔다.
“3년의 청춘으로 육 대표님의 은정을 충분히 다 갚았으니, 그럼 저희는 이제 서로 빚진 게 없겠네요. 앞으로 제 갈 길을 각자 가도록 하죠.”
고집스런 조수아의 얼굴을 바라보며 육문주는 화가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을 느꼈다.
“조수아, 하루만 더 줄 테니까 잘 생각하고 다시 얘기해!”
윽박지르는 한 마디만 남겨놓고 남자는 그렇게 떠나갔다.
혼자 남은 조수아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7년을 사랑해왔고 3년을 아낌없이 챙겨주었는데 육문주의 눈에는 남들한테 보여줄 면목조차 없는 거래로 느껴졌다는 게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두 사람의 감정에 있어 누가 먼저 마음이 흔들리게 되면 그 사람이 지게 되어 있다. 더군다나 육문주보다도 4년이나 먼저 더 그를 사랑하게 된 조수아였으니, 여지없이 패배하게 되리란 건 어찌보면 정해진 결과였을 지도 모른다.
다 울고 난 뒤 슬픔을 추스른 조수아는 간단히 짐을 챙긴 후 뒤도 돌아보지 않고 육문주의 집을 나섰다.
검은색 컬리넌이 번개처럼 적막한 거리를 가로질렀다.
육문주의 머리속에는 온통 조수아가 헤어지자는 말을 내뱉던 결연한 모습으로 가득찼다. 고작 생일을 같이 안 보내줬다고, 그깟 질투 때문에 헤어지자니. 아무래도 그녀의 투정을 조만간 혼내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속이 답답해져서 타이를 풀어 한쪽으로 던지는데 휴대폰이 울렸다. 벨소리가 한참을 울린 뒤에야 그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왜.”
전화너머로 방탕한 목소리가 흘러왔다.
“뭐 하느라 이렇게 늦게 받아.”
“운전.”
그의 친구 허연후가 음흉하게 웃으며 물었다.
“어떤 차, 조 비서님 꺼? 내가 두 사람 방해한 거 아닌가 몰라.”
“그렇게 한가해?”
“아니. 그게 아니라 나이트바 올 건지 물어보려고. 학진이가 쏜대.”
10분 후, 나이트바.
허연후가 술잔을 건네며 능글맞은 웃음을 지었다.
“왜 그렇게 죽상이야? 조수아 씨랑 헤어졌어?”
육문주가 무슨 소리냐는 듯 차갑게 대꾸했다.
“연인끼리는 조금씩 다퉈야 감정도 깊어진다는 거 못 들어봤어?”
“어라라? 너 그래도 같이 잔 시간이 오래됐다고 그 사람 좋아졌나 보다?”
장난스런 물음에 발길질이 날아왔다.
“꺼져.”
“오키오키, 꺼질게. 근데 너 만약 조수아 씨 진짜 좋아하면 송미진이랑은 선을 긋는 게 좋을 거야. 난 분명 미리 경고했어. 그렇게 계속 전화 한 통에 송미진한테 달려가면 나중에 마누라 잃고 나한테 와서 질질 짜지 말고.”
육문주가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송미진은 전혀 위협이 되지 않을 거라는데도 안 믿어.”
“여자라면 다 못 믿지. 송미진이 너랑 어려서부터 같이 자라기도 했고, 일찌감치 서로 혼약도 오갔는데 어떤 여자가 자기 남자가 툭하면 다른 여자한테 달려가는 거 참을 수 있겠어.”
담배갑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 문 육문주가 깊게 연기를 빨며 어두운 눈빛을 했다.
“나랑 걔는…”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룸의 문이 열리며 송학진과 송미진이 같이 들어섰다.
“미안, 오늘 미진이가 좀 우울해하는 것 같아서 같이 데리고 왔어. 괜찮지?”
허연후는 그늘이 내려앉은 육문주를 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당연하지. 네 동생이 내 동생이고 그런 거지 뭐. 미진아, 여기 와서 앉아.”
제 옆을 툭툭 치며 말하는데 송미진이 고의성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 얼굴로 순진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연후 오빠. 그쪽 자리가 마침 에어컨 바람을 정통으로 맞는 자리라 제가 좀 추위를 많이 타서 이쪽에 앉을게요.”
말을 마친 그녀는 자연스럽게 육문주의 곁에 가서 앉았다. 그리고 가방에서 곱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꺼내놓으며 말했다.
“문주 오빠, 지난번에 저 때문에 오빠 여자친구분 생일도 못 챙겼는데 그분 화나신 거 아니죠?”
“아니야.”
“다행이다. 이거 제가 너무 죄송해서 사과의 의미로 산 립스틱이에요. 혹시라도 아직까지 오해하고 있으면 제가 직접 가서 해명할게요.”
육문주는 상자를 거들떠도 보지 않고 거절했다.
“필요없어.”
송미진이 불쑥 눈시울을 붉히며 말했다.
“문주 오빠, 제가 자꾸 오빠한테 전화 해서 저 밉죠? 저도 안 그러고 싶은데 병이 발작할 때면 저도 모르게 오빠한테 전화하게 돼요.”
콩알 같은 눈물이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본 육문주는 미간을 모으더니 립스틱을 주머니에 넣으며 말했다.
“내가 대신 받을게 일단.”
곧 울음을 그치고 다시 환하게 웃기 시작한 송미진이 잔에 술을 따르며 말했다.
“문주 오빠, 이거 마셔 봐요. 우리 오빠가 외국에 나갔다가 경매로 사온 건데 82년산 술이거든요.”
술잔을 육문주에게 건네며 송미진은 손끝으로 몰래 그의 손목을 쓸었다.
육문주는 즉시 피하며 입에 문 담배를 재떨이에 털었다.
“거기에 놔 둬.”
상대가 자신을 무척이나 배척하자 송미진의 눈밑에 서늘함이 배어나왔다. 그리고 다시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 얌전한 얼굴로 돌아갔다.
송학진은 잔을 든 손을 육문주를 향해 건배 동작을 하며 말했다.
“나 아직 네 여자친구 본 적도 없어. 언제 한 번 데려와서 같이 밥이나 먹자.”
허연후가 느물거리며 웃었다.
“요즘은 안 될걸? 두 사람 싸웠거든.”
아직도 얼굴이 펴지지 않은 육문주를 보며 송학진이 웃었다.
“다퉜으면 잘 달래주면 되지. 나 얼마 전에 어떤 여자를 구해준 적 있었는데 글쎄 그 여자 남편이 마누라가 지금 유산해서 피를 철철 흘리는데 전화 하니까 아예 받지도 않더라고. 들어 보니까 다른 여자한테 가 있느라 그랬다던데, 그런 것만 아니면 되지.”
0003 화
술잔을 쥔 육문주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심장이 그 순간 쿡하고 찔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날 송미진이 자살시도를 했을 때 조수아가 생리통 때문에 여러번이나 전화한 걸 처음에는 받았다가 나중에는 짜증이 나서 그냥 끊어버렸던 게 생각이 났다. 설마 그것 때문에 조수아가 헤어지자고 한 건 아니겠지?
눈매를 드리운 육문주는 송학진과 허연후가 그 쓰레기 남편 흉을 보는 소리를 묵묵히 듣고 있었다.
끝까지 타들어간 담배가 손가락을 뜨겁게 하는데도 그는 요지부동이었다. 온밤을 육문주는 마음이 뒤숭숭했다.
보통 이맘때쯤 되면 조수아가 걱정스레 전화를 걸어왔었는데, 지금은 새벽 한 시가 됐는데도 그녀한테서 문자 하나 와있지 않았다.
문득 불안한 예감이 든 그는 담배를 비벼끈 뒤 휴대폰을 챙기고 룸을 나왔다.
술집을 나서는데 밖에서 마침 생화가 든 바구니를 들고 그를 향해 걸어오고 있는 어린 여자아이가 보였다. 아이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아저씨, 여자친구분께 꽃선물 어때요?”
탐스럽게 열린 샴페인 로즈를 보며 육문주는 순간 방금전에 송학진이 ‘잘 달래주면 되지’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그거 다 포장해 주세요.”
환하게 웃은 여자아이는 꽃을 곱게 포장하여 건네며 끝으로 축복의 말도 몇 마디 보탰다.
내내 가라앉아 있던 육문주의 얼굴이 드디어 조금씩 풀리기 시작했다. 지갑에서 5만원 권 여러장을 꺼내 아이에게 건넨 뒤 집에 돌아와 보니 그를 맞이한 건 익숙한 작은 인영이 아니라 집안일을 도와주고 있는 아주머니였다.
“대표님 오셨네요. 해장국 끓여왔는데 한 그릇 드릴까요?”
미간을 찡그린 육문주가 윗층을 노려보며 말했다.
“조수아는 자는 겁니까?”
아주머니는 멈칫하더니 답했다.
“조수아 씨는 갔습니다. 가기 전에 이거 전해달라고 하시더라고요.”
편지봉투를 건네받고 열자 종이에 조수아가 적은 옷 리스트가 적혀있는 게 보였다. 단번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육문주는 편지를 구겨서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리고 당장에 휴대폰을 꺼내 조수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스피커를 타고 들려왔다.
“왜.”
마디가 분명한 큰 손이 휴대폰을 으스러트릴 듯 꽉 쥐었다.
“너 진심이야?”
“응.”
“너 후회하지 마.”
씩씩거리며 전화를 끊은 육문주는 그대로 윗층으로 향했다. 그러자 뒤에서 아주머니가 경직되어 묻는 소리가 들렸다.
“대표님, 이 꽃은…”
“버리세요!”
그렇게 한 마디를 툭 던지고 안방으로 들어서는데 사모예드 한 마리가 목에 노란색 부적을 걸고 멀뚱멀뚱 서있는 게 보였다.
조수아의 SNS를 봐서 육문주는 그 부적이 조수아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절에 가서 직접 빌어온 부적이라는 걸 알았다.
‘그래. 네가 제일 사랑하는 게 이 개란 말이지?’
이를 바득 간 육문주는 밀크의 목에서 부적을 홱하고 떼어내 제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자 밀크가 그를 향해 크게 짖기 시작했다. 육문주는 개를 노려보며 맞받아쳤다.
“뭐가 좋다고 짖어! 네 엄마 널 버리고 갔거든!”
밀크를 밖으로 내쫓은 육문주는 쾅하고 방문을 세게 닫아버렸다.
이튿날 아침, 습관적으로 팔을 뻗어 옆을 더듬던 육문주는 아무것도 만져지는 게 없자 눈을 번쩍 떴다. 그제야 조수아가 어제 떠나고 없다는 것을 떠올린 그는 문득 마음이 답답해지는 것을 느꼈다.
평소의 두 사람은 아침마다 작게 스킨십을 하거나 자주 관계를 가졌었다. 그럴 때마다 제 밑에서 풀어진 얼굴을 하고 있는 조수아를 보며 육문주는 형언 못할 기분을 느끼고는 했다.
그런 감각이 마치 독약처럼 그의 골수로 천천히 스며들었다. 그래서 그런지 육문주는 지금 조수아를 당장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불쑥 치밀고는 했다.
그러나 그녀가 한 마디도 없이 집을 나갔다는 것을 떠올리기만 하면 육문주는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내가 먼저 찾아가서 빌기를 바라나 본데, 어림도 없지.
옷을 갈아입고 계단을 내려오는데 진영택이 거실에 서서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 받는 게 보였다. 그에게 잠깐 시선을 줬다가 돌린 육문주가 입을 열었다.
“바빠 보이네.”
진영택은 타자하던 손을 멈추더니 걱정스레 물어왔다.
“대표님, 조 비서님 많이 아프신가요? 병원에 가 보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육문주가 무슨 소리냐는듯 물었다.
“조 비서가 그래?”
“네. 방금 전에 저한테 일주일 휴가를 신청하더라고요. 그래서 대표님한테 직접 얘기하면 되지 왜 저한테 얘기한 건지 의아해하던 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러라고 했어?”
“네. 조 비서님한테 집에서 푹 쉬시라고 하세요. 일은 제가 알아서 다 안배하겠습니다.”
진영택은 일처리를 잘한다는 칭찬이 들려오길 기대했지만 돌아온 건 대표님의 싸늘한 음성이었다.
“분기별 인센티브 이번에 없다.”
수술로 너무 많은 피를 흘린 조수아는 일주일이나 휴식한 뒤에야 겨우 출근할 수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서는데 동료 직원들이 지난 일주일이 얼마나 금찍했는지, 매일 밤마다 야근도 계속 해야 했었다며 한 마디씩 보탰다.
그리고 육문주의 남비서 진영택이 조수아한테 일주일 휴가를 줬다고 몇천만이나 되는 분기별 인센티브를 깎였다는 소식도 듣게 되었다.
그 돈이 진영택이 장가 가기 위해 열심히 모으고 있는 밑천이라는 걸 아는 조수아는 간단히 업무를 어레인지 한 뒤 대표님 사무실로 걸어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육문주가 올블랙 정장을 입고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날카로운 눈매에 곧게 뻗은 콧날, 끝이 보이지 않는 듯한 눈동자에 여유로움이 묻어나며 금욕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들어온 자에게 잠시 시선을 준 그는 다시 담담한 표정으로 모니터를 주시했다.
다시 남자를 마주한 상황에서 마음이 아무렇지도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었다.
7년 전에도 육문주의 이러한 매혹적인 분위기에 홀려 그가 만남을 제기해왔을 때 서슴없이 받아들였던 조수아였다.
그러나 자신의 일방적인 구애였음을 다시금 떠올린 그녀는 애써 제 감정을 숨기며 사무적인 어투로 말문을 뗐다.
“대표님, 회사 내 인사팀 휴가 프로세스 규칙에 따르면 10일 이내의 휴가는 직속 상사의 허가만 있으면 되는 걸로 압니다. 진영택 팀장님은 제 직속 상사로 제 휴가 신청을 승인한 게 아무 문제도 없을 텐데요? 왜 팀장님 인센티브를 깎으신 겁니까?”
한쪽 눈썹을 들어올린 육문주가 그녀의 생각을 다 꿰뚫어 보고 있다는 듯이 뚫어져라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글쎄, 왜일 것 같아?”
말끝이 살짝 올라가고 약간의 조롱이 섞인 말투였다.
조수아는 심장이 욱신거리는 것을 느꼈다.
“제가 헤어지자고 해서 불쾌해서 그런 건가요? 저한테 불만 있으시면 저한테 푸세요. 괜히 무고한 사람한테 화풀이하지 마시고.”
육문주는 느긋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내가 무고한 사람한테 화풀이하는 게 싫으면 집으로 얌전히 다시 들어와. 그럼 지금까지 일은 없었던 걸로 하지.”
조수아의 얼굴에 형언할 수 없는 씁쓸함이 떠올랐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두었던 사직서를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육문주의 앞으로 밀었다.
“대표님, 저 그곳으로 다시 들어가지 않을 뿐더러 이렇게 사직을 신청하는 바입니다. 여기 제 사직서니까 빨리 새로 사람을 구해서 인수인계할 수 있게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검은 책상 위에 대조적인 하얀색의 사직서를 보며 육문주는 주먹을 쥔 손에 더 힘을 주었다. 칠흑같은 눈동자가 한치의 흔들림도 없이 눈앞의 여자를 노려봤다.
“내가 허락 안 한다면?”
조수아의 입꼬리가 보기 좋은 호도를 그렸다.
“대표님께서 애초에 서로 질리면 헤어지자고 그러셨잖아요. 이렇게 저 안 놔주시면 대표님께서 저한테 미련이 있는 걸로 오해하면 어쩌려고 그러세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육문주는 조수아의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턱을 단번에 붙잡았다. 엄지로 고운 피부를 연신 훑던 남자의 입에서 드센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련이 남은 게 아니라 아직 다 즐기지 못해서 그래!”
0004 화
육문주의 키스는 언제나 뿌리침을 불허할 정도로 강압적이었다.
조수아를 테이블로 밀고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잡은 그는 다른 한 손으로 허리를 제 쪽으로 바짝 당겼다.
부드럽게 휘어지는 향긋한 몸이 육문주의 모든 신경줄을 예민하게 자극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 갇힌 맹수가 나오고 싶다면서 울타리에 쉴 새없이 몸을 부딪쳤다.
조수아와 함께 한 시간 동안 육문주는 잠자리 쪽으로 아주 만족스러웠었다.
그가 얼마나 원하든 조수아는 힘들어서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의 수요에 다 맞춰줬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의 조수아는 뻣뻣하다 못해 계속해서 발버둥 칠 뿐이었다. 눈가에 눈물까지 매단 채로 말이다.
육문주는 계속하던 행동을 멈추었다. 시원하게 뻗은 손가락으로 그녀의 눈꼬리에 맺힌 눈물을 훑음과 동시에 욕구불만인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조수아, 우리 사이의 게임은 내가 끝났다고 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알겠어?”
뜨거운 눈물을 머금은 조수아가 피가 배어나온 입술을 열어 말했다.
“나 절대 다시 안 돌아갈 거야. 네가 날 모욕하게 가만 있지 않아.”
그녀의 입술에 맺힌 피를 할짝이며 남자가 거짓웃음을 지었다.
“조 씨 가문을 걸고서라도 그러고 싶으면 어디 한 번 해 봐.”
몸을 떼어난 육문주는 저도 모르게 조수아의 흐트러진 치마와, 그리고 치마 아래로 매끈하게 뻗은 두 다리를 훑어봤다.
조수아는 치욕스러움을 느끼며 얼른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문을 향해 걸어갔다. 문고리를 잡고 열자마자 밖에 하얀색 원피스를 입은 송미진이 서 있는 게 보였다.
송미진은 무해한 얼굴로 웃으며 목소리를 냈다.
“문주 오빠, 저 오빠가 먹을 아침 챙겨왔어요.”
이렇게 가까이서 송미진의 얼굴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수아는 그녀와 자신의 얼굴이 확실히 닮은 점이 많다고 생각했다. 특히 눈과 코과 그랬다.
이로써 그녀의 추측이 증명된 셈이었다. 자신이 불순한 목적으로 그한테 다가온 것이라 생각했음에도 그녀를 곁에 둔 이유 말이다.
육문주는 분명 자신을 송미진의 대역이라고 생각한 게 틀림없었다.
3년간의 세월이 대역이라는 참혹한 결과로 막을 내렸다.
조수아는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듯 아팠지만 애써 침착한 척 가장했다. 그리고 송미진을 향해 작게 고개를 끄덕여 인사한 뒤 그대로 대표님 사무실을 나갔다.
문이 닫히고 육문주가 싸늘한 눈빛으로 송미진을 쳐다봤다.
“여긴 어쩐 일이야?”
송미진은 꾸중 들은 아이처럼 눈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미안해요, 문주 오빠. 오빠가 요즘에 아침도 잘 못 챙겨먹고 그래서 위가 아프다길래 제가 주제넘게 아침을 챙겨왔어요.”
미간을 구긴 육문주가 아무런 온도도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 둬.”
다시 활짝 웃은 송미진이 사뿐사뿐 걸어와 도시락을 책상 위에 놓으며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오빠 참치 김밥 엄청 좋아했던 게 기억나서 제가 직접 싸와 봤어요. 얼른 먹어 봐요.”
도시락에 알록달록하고 정갈하게 놓인 김밥을 보면서도 육문주는 식욕이 하나도 돌지 않았다. 도시락을 한쪽으로 민 그가 매정하게 답했다.
“이따가 회의에 들어가야 해. 끝나고 돌아와서 먹을게.”
송미진은 실망했지만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요. 그럼 회의하러 갔다 와요. 저는 방해 안 되게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옆에 손님 대기실이 있어. 거기에서 기다려.”
진영택에게 내선으로 전화를 건 육문주가 말했다.
“송미진 씨를 옆의 손님 대기실로 안내하고 적당한 사람으로 붙여놔.”
1분도 안 돼 나타난 진영택은 빠릿빠릿한 동작으로 송미진을 향해 손동작으로 안내하며 말했다.
“송미진 씨, 옆의 손님 대기실에 다과와 차를 준비해 놓았습니다. 기다리시는 동안 이 비서가 옆에서 함께할 겁니다.”
송미진은 진실함을 담아 진영택에게 말했다.
“저 조 비서님께서 사람이 엄청 나이스하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조 비서님이랑 같이 있으면 안 되나요?”
“죄송하지만 조 비서님은 대표님의 수석비서라 회의에 같이 참석하셔야 합니다.”
진영택은 머리가 나쁘지 않았다. 대표님이 최근에 조 비서랑 사이가 틀어진 게 뻔히 보이는데 이런 타이밍에 송미진을 끼어들게 했다가 두 사람의 화해시기가 늦어질 게 뻔한 일이었다.
“그렇군요. 그럼 조 비서님 커피 타는 솜씨가 엄청 좋다고 들었는데 커피 한 잔 부탁드린다고 전해주세요.”
육문주의 잘생긴 눈매가 설풋 찌푸려졌다. 조수아는 그의 사람이었다. 누가 부리고 싶다고 부릴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었다.
그러나 방금 전 기를 쓰고 자신을 떠나겠다고 고집 부리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린 그는 이참에 그녀의 기를 한 번 꺾어놓는 것도 괜찮겠다 생각하고 진영택을 향해 말했다.
“송미진 씨가 말한대로 해.”
진영택은 놀란 얼굴로 육문주를 한참이나 바라보다 결국 속으로 한숨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지금의 여자친구한테 전 파트너 심부름을 시키다니. 그렇게 하면 지금의 여자친구를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걸 대표님은 정녕 모르는 것일까?
어이가 없었지만 진영택은 일단 송미진을 데리고 옆의 손님 대기실로 안내했다.
한창 자리에 앉아 회의에 필요한 자료를 정리하고 있는데 진영택이 문을 두드리고 들어와 말했다.
“조 비서님, 대표님께서 커피 한 잔 타서 2번 손님 대기실에 있는 송미진 씨한테 가져다 주라고 하십니다.”
고개를 든 조수아는 담담하게 답했다.
“알겠습니다. 지금 바로 가겠습니다.”
자료정리를 마친 뒤 조수아는 탕비실로 향했다. 커피머신에 커피콩을 먼저 넣고 간 뒤 다시 커피를 내리려는데 어느새 그녀의 옆에 송미진이 나타나 있었다. 조수아는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송미진 씨, 죄송하지만 아직 5분은 더 있어야 커피가 준비됩니다.”
청순하고 귀여운 얼굴이 스산한 미소를 지었다.
“조수아 씨는 절 보고도 이상한 느낌이 들지 않던가요?”
조수아는 커피를 타는 동작을 멈추지 않으며 조용조용 답했다.
“매일 대표님한테 기꺼이 안겨오는 분들이 워낙에 많아서 딱히 이상한 점을 모르겠네요.”
“어떻게 전혀 모르시죠? 문주 오빠가 당신이랑 같이 있는 게, 그게 다 그쪽이 저랑 닮아서 그런 거잖아요. 문주 오빠는 조수아 씨를 안 좋아해요. 그저 저의 대역이라고 생각해서 여태까지 같이 있었던 거예요. 그러니 이제 제가 왔으니까 대역은 이만 떠나줬으면 좋겠는데.”
커피머신에 뜨거운 물이 흘러들어가고 곧 고소한 커피냄새가 탕비실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조수아는 향기에 취한 듯한 얼굴로 웃으며 물었다.
“이탈리아에서 직접 공수한 커피콩이랍니다. 목넘김이 아주 부드럽죠. 송미진 씨는 얼마나 달게 드실 건가요?”
송미진은 스펀지에 대고 주먹을 휘두른 것 같은 기분에 이가 갈렸다.
“조수아 씨, 우리 이제 연기는 그만합시다. 당신 문주 오빠한테 붙어있는 거 다 돈 때문에 그러잖아요. 여기 20억짜리 수표 줄 테니까 이제 문주 오빠 옆에서 꺼지세요.”
조수아는 복잡한 심경을 감추며 각설탕 하나를 꺼내 커피에 넣고 느릿느릿 저으며 말했다.
“듣자하니 송미진 씨 건강이 그리 좋지 못하다던데 그 돈 뒀다가 본인 치료에나 쓰세요. 괜히 대표님한테 시집 가기도 전에 뒤지면 안타깝잖아요.”
“너 이…”
송미진은 화가 나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조수아가 이렇게 상대하기 어려운 사람일 줄 몰랐던 그녀는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아직 뜨거운 커피잔의 손잡이를 쥔 채 조수아에게로 뿌렸다.
김이 펄펄 나는 커피가 공중에서 아름다운 호도를 그리며 조수아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0005 화
조수아는 민첩하게 옆으로 몸을 비켜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피 조금이 그녀의 발등을 덮치고 말았다. 발등이 얼얼해지는 통증에 저도 모르게 헛숨이 들이켜졌다.
고개를 들어 송미진에게 따지려던 조수아는 등 뒤에 있는 유리 선반을 향해 몸이 기우뚱거리고 있는 송미진을 발견하고 본능적으로 그녀를 잡으려 손을 뻗었다. 그러나 송미진은 그것을 뿌리치며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와장창!
깨진 유리에 팔뚝이 그인 송미진이 피를 주르륵 흘렸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지는 선혈을 뒤로하고 육문주의 싸늘한 음성이 날아왔다.
“조수아, 이게 뭐하는 짓이야!”
육문주는 커다란 몸짓을 날래게 움직여 송미진의 곁으로 튀어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창백하게 질린 송미진의 얼굴에 어느샌가 눈물로 흥건했고 두려운 듯 입술이 움칠움칠거렸다.
“문주 오빠, 조 비서님한테 뭐라고 하지 마요. 다 제 탓이에요. 제가 실수로 커피를 조 비서님한테 흘렸는데, 조 비서님이 제가 고의로 그런 줄 알고 저를 살짝 민다는 게 힘이 생각보다 많이 실려서 그런 거예요.”
조수아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자신을 모함하기 위해 본인의 몸마저 스스럼없이 자해하는 모습에 깜짝 놀란 조수아가 얼른 해명했다.
“제가 민 게 아니라 송미진 씨가 스스로 넘어진 거예요!”
육문주의 차갑게 식은 눈빛이 조수아의 몸을 아래위로 훑었다가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발등으로 향했다가 곧바로 떨어졌다.
“이따가 돌아와서 다시 두고 보자!”
송미진을 가뿐하게 들어올린 그는 빠른 걸음으로 탕비실을 나갔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조수아는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느꼈다.
그녀가 7년이나 사랑한 남자는 송미진과 자신을 두고 언제나 송미진의 편이었지 그녀의 말을 믿어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는 게 이제 기억났다.
노련하게 제 감정을 정리한 조수아는 절대 송미진의 꾀에 넘어가지 않겠다 다짐했다. 이미 육문주와 헤어진 마당에 이제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다만, 이런 식의 모함은 조수아는 절대 참을 생각이 없었다.
조수아는 동료 직원인 이 비서를 찾아가 기술부에 있는 그녀의 남자친구에게 부탁해 방금 전 CCTV 녹화 영상을 복제해 줄 수 없냐며 부탁했다. 그것으로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하기 위해서였다.
일련의 조치를 마친 뒤 조수아는 곧바로 이번 사건에서 벗어나 다시 긴장된 회의준비로 바삐 돌아쳤다.
육문주와 진영택이 모두 자리에 없었고 나머지 회의 참석 인원들은 이미 회의실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의 정기회의는 할 수 없이 그녀가 직접 주관해야 했다.
조리 정연하게 각 부서에서 제기한 문제들을 기록하고 이번주에 해결해야 될 문제점들을 꺼내 각자 토론하는 자리가 육문주의 부재로 인해 비교적 경쾌한 분위기에서 마무리 되었다.
회의가 끝나고 몇몇 사람들이 남아 조수아의 유능함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대표님과 찰떡 궁합을 자랑하는 그녀에게 앞으로 자신들의 사모님이 될 수도 있지 않겠냐며 유쾌하게 장난을 걸어왔다.
사람들의 아첨에 조수아는 시종일관 담담한 미소를 지었다.
“저희는 그저 일적으로 함께 협력하는 관계이지 여러분들이 생각하는 그런 게 아닙니다. 그리고 저 곧…”
퇴사를 한다는 말이 나오기도 전에 회의실 문이 쾅! 하고 누군가의 발길질에 열렸다.
검은색 정장을 입은 육문주가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무시무시한 기운을 내뿜으며 조수아를 향해 걸어왔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웃음 소리로 가득했던 회의실이 순식간에 숨도 쉬어지지 않을 정도로 무겁게 내려앉았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사람들이 육문주를 향해 인사를 해왔다.
그러나 육문주는 그런 사람들이 눈에도 안 들어오는 듯 커다란 손으로 조수아의 손목을 붙잡고 살벌한 얼굴로 명령했다.
“따라와!”
조수아를 끌고 회의실을 나온 그는 그녀를 질질 끌고 가는 와중에도 아직 울긋불긋하게 달아올라 있는 조수아의 발등을 내려다 보더니 좋지 못한 말투로 으르렁거렸다.
“멍청하기는.”
곧바로 조수아를 안아든 육문주는 성큼성큼 주차장으로 향한 뒤 조수석에 그녀를 앉혔다. 그리고 앞쪽 글로브박스를 열어 아직 개봉조차 않은 화상 전용 연고를 꺼내 들었다.
뚜껑을 연 육문주는 연고를 짜내 손에 덜은 후 조수아의 발등에 조심스레 발라주기 시작했다. 딱딱하게 굳은 미간에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만들었다.
조수아는 많이 아픈지 고운 눈썹을 찡그리며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손가락마저 움칠움칠 굽어드는 모습에 육문주는 손끝에 힘을 더 빼고 빠진 데 없이 꼼꼼히 데인 상처에 연고를 발랐다. 그러고는 한쪽 눈썹을 들어 웃을 듯 말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렇게 둔해서야 정말 날 떠나서 잘 살 수 있겠어?”
무릎을 펴고 선 그는 연고를 조수아의 품에 던지며 말했다.
“아침 저녁으로 한 번씩 발라주고 물 묻히지 마. 제대로 안 발랐다가 흉져서 울면서 나한테 찾아오지 말고.”
눈매를 드리운 조수아가 아무런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목소리로 답했다.
“살 수 있는지 없는지 시험해보면 알지.”
육문주는 고집스레 앙다문 입술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투정 부리는 건 뭐라고 안 하는데 왜 송미진까지 괜히 끌어들여. 걔 우울증 있는 거 몰라서 그래? 너한테 위협되지 않을 거라고 했는데도 왜 내 말 못 믿어.”
고마운 마음이 조금이나마 생겼던 게 그의 한 마디에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문주 씨,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나 송미진 씨 민 적 없어. 그 여자 일부러 넘어지고 나한테 죄를 뒤집어 씌운 거야. 못 믿겠으면 감시카메라 돌려보던지.”
“나 그렇지 멍청하지 않아. 하지만 송미진은 혈액응고장애도 있고 또 Rh식 혈액형이라서 피를 많이 흘리면 안 돼. 아까 병원에서 연락 왔는데 지금 혈액 창고에 재고도 없어서 네가 가서 헌혈해야 돼. 그러면 송 씨 가문에서 너한테 피해 주지 않게 내가 조치하고 이 일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걸로 해.”
원래는 쿡쿡 찌르는 정도로만 아팠던 가슴이 이제는 생으로 찢어질 것처럼 아팠다. 너무 아프다 못해 숨까지 쉬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육문주가 지금 자신을 끌고 송미진한테 헌혈하러 가려고 한다. 지난주에 방금 유산 수술을 마치고, 수술 도중에 과다 출혈로 인해 아직까지도 한약을 먹으며 몸조리를 하고 있는 자신을 말이다.
조수아는 육문주를 쳐다보며 얼굴을 흐렸다.
“내가 만약 지금 피를 헌혈할 몸이 못 된다고 하면? 그래도 나 억지로 끌고 갈 거야?”
“너 신체검사 결과보고서 아무 문제 없잖아. 그리고 고작 400CC 헌혈하는 걸로 몸에 별로 영향도 없어. 너한테 책임이 있든 없든 송미진의 아버지가 이번 일로 대노해 조 씨 가문에 손을 쓰게 되면 나도 그걸 못 막아.”
조수아는 자조적인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유산으로 피를 그렇게나 많이 흘렸을 때는 전화도 받지 않다가, 송미진이 고작 팔을 베었다고 저렇게 호들갑을 떨며 조 씨 가문까지 들먹이는 육문주의 꼴을 보니 조수아는 더 이상 실망할 게 없다 생각했는데도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400CC는 몸에 크게 무리가 없겠지. 그럼 2000CC는 어떨 것 같아?”
0006 화
육문주는 잠시 의문이 담긴 눈빛을 했다가 차갑게 답했다.
“목숨 안 아까우면 직접 실험해 보든지.”
조수아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내가 왜 못해봤을 거라 생각하는데? 만일 내가 얼마 전에 방금 2000CC의 피를 흘렸다고 하면, 그래도 나더러 헌혈하라고 강요할 거야?”
“조수아, 억지부리지 마. 생리를 해봤자 고작 60CC의 피를 잃는 게 다야. 핑계를 대도 말이 되는 핑계를 대야지.”
조수아는 쓴웃음밖에는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대놓고 힌트를 줬는데도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남자의 모습에 한숨만 나왔다.
만약 육문주가 자신한테 조금의 관심이라도 더 있었으면 분명 이상함을 눈치채고 캐물어 왔을 것이다.
조금이라도 그녀의 성정이 어떠한지 알고 있었더라면 자신이 위험에 빠진 사람들 못 본 체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대하는 태도 차이겠지.
송미진의 작은 상처에는 그렇게나 허둥지둥 대면서, 자신은 유산해서 수술까지 받아야 했던 위험천만한 상황에 놓였었는데도 그걸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다니. 가슴이 아파 고개를 떨구었던 조수아가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병실 문가에서 그 사람의 인영을 보게 되었다.
순간 멍해진 조수아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그날 정신이 혼미해져 가던 와중에 조수아의 시선 안으로 한 사람이 들어왔었다. 그리고 귓가에 한 남성이 부드러우면서도 낮은 음성으로 자신을 부르던 소리가 들렸었다. 겨우 눈을 뜬 조수아가 보게 된 사람이 바로, 지금 저 문가에 서 있는 남자였다.
조수아는 그날의 일을 똑똑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낸 그녀는 두 손으로 남자의 팔을 꼭 붙잡은 채 거의 꺼져가는 목소리로 애원했었다.
“제발,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조수아가 깨어났을 때 한지혜가 말하길 안경 낀 잘생긴 남자가 그녀를 병원에 데려왔다고 알려줬다.
조수아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송학진의 곁으로 걸어간 그녀는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안녕하세요. 송미진 씨 오빠 되시죠?”
송학진이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부드러운 음성으로 답했다.
“안녕하세요. 저기, 조수아 씨 혹시 몸이 편찮으시면 저...”
세상도 참 무심하지. 조수아는 체념한 듯 눈을 감았다.
은혜를 보답하고 싶었던 생명의 은인이 송미진의 오빠였다니. 조수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송학진 씨, 혹시 잠깐 자리 옮겨서 얘기 가능할까요?”
고개를 끄덕인 송학진을 데리고 옆에 있는 비상구로 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느새 다가온 육문주가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학진이한테는 무슨 일로? 할 얘기 있으면 내 앞에서 해.”
조수아는 차가운 웃음을 흘리며 대꾸했다.
“문주 씨 앞에서 얘기하라고? 당신한테 그럴 자격이나 있어?”
“조수아, 너 언제부터 그렇게 막무가내가 됐어.”
“내가 막무가내인 거야, 아니면 당신이 인정이 없는 거야?”
육문주의 반응을 기다리기도 전에 조수아는 그의 손을 뿌리치고 송학진과 함께 비상구 안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막만한 얼굴에 핏기가 하나도 없어 하얗게 질렸다. 고개를 든 조수아는 맞은편의 남자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날 저 구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고맙다는 말을 전할 기회가 없었는데 이렇게 빨리 보답할 기회가 찾아왔네요. 걱정 마세요. 송학진 씨 동생분께 헌혈하겠습니다. 대신 조건이 있어요. 그날 일은 다른 사람한테 비밀로 해주셨으면 해요.”
미간을 구긴 송학진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그 아이, 문주 거 맞죠?”
“누구 아이인지는 이제 중요하지 않아요. 어차피 이제 없어졌으니까. 다만 이 일이 저의 결정에 영향을 주지 않았으면 해서 그래요.”
육문주가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수아도 알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조용히 육문주의 곁을 한시라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송학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조수아의 담담한 미간에서 그는 마치 어머니의 모습을 본 듯했다.
멈칫한 송학진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날 피도 많이 흘린 걸로 알고 있고, 이제 그일이 지난지 며칠도 안 됐는데 정말 괜찮겠어요?”
조수아의 입꼬리가 자조 섞인 웃음을 그려냈다.
“그건 제가 알아서 할 일입니다. 지금은 저 그냥 송학진 씨한테 보답하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커요. 이제 이 일만 끝나면 저희는 서로 빚진 게 없게 되겠네요.”
“저 그런 사람 아닙니다. 무리해서 그렇게 하실 필요 없어요. 아직 몸이 편찮으신 거면 조수아 씨한테 헌혈을 강요하지는 않을 겁니다.”
“아니요. 제가 원체 남한테 빚지는 걸 싫어해서요. 특히 송미진 씨와 관련된 사람한테는 더욱이요. 송학진 씨, 부디 저와 한 약속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말을 마친 조수아는 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자 비상구 문을 열고 나가 마침 그녀를 부르기 위해 나온 간호사를 보며 말했다.
“이제 헌혈하러 가죠.”
“조수아!”
육문주가 그녀를 잡아세우며 흉흉한 눈빛으로 다그쳤다.
“너 학진이한테 뭐라고 했어? 나한테 뭐 숨기는 거 있지?”
조수아는 차가운 눈빛을 돌려주며 옅게 웃었다.
“왜, 내가 벌써 다른 물주를 물었을까 봐서 그래? 걱정 마. 아무리 굶었어도 나 당신 친구들한테는 손 안 대.”
매몰차게 그의 손을 뿌리친 조수아는 어깨를 당당하게 편 채 간호사를 따라 채혈실로 들어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보며 육문주는 누군가가 심장에 대고 주먹을 친 것처럼 묵직하게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20분 후, 채혈실에서 나오는 조수아의 조막만한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새하얗게 질려있었다. 탐스럽게 촉촉했던 입술마저도 혈색을 잃은 채 버석하게 말라 있었다.
빛을 잃은 눈동자로 벽을 더듬으며 비틀거린 조수아는 간신히 문틀을 짚으며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를 발견한 육문주가 성큼성큼 다가와 그녀를 안아들며 복잡한 눈빛으로 말했다.
“저쪽에 병실을 잡아놨어. 거기 가서 잠시 좀 쉬자.”
그러나 그가 발걸음을 떼기도 전에 송미진의 병실에서 나온 간호사 하나가 그를 향해 말을 걸었다.
“송미진 씨 보호자분, 환자분께서 지금 정서가 매우 불안정하고, 보호자분을 계속 찾고 계세요. 지금 계속 울고 계시니까 빨리 와보셔야 될 것 같아요.”
조수아의 덤덤한 눈동자가 육문주에게로 향했다. 굳게 다문 입가에 조소가 얼핏 떠올랐다.
방금 전 채혈을 마치고 간호사가 혈액팩을 챙길 때부터 조수아는 이미 눈앞이 까매지며 그대로 쓰러질 것처럼 정신이 아득해졌었다.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채혈실을 나서던 그녀는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육문주를 발견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자그마한 기대를 품었었다.
조수아는 당장이라도 그에게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고, 이곳에서 자신을 데리고 떠나달라고 애원하고 싶었다.
그러나 간호사의 말을 들은 순간, 그녀는 헛된 망상속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송미진과 자신을 두고 육문주가 선택할 사람이 누구인지 잘 알 것 같았으니까.
역시나 잠시 망설인 육문주는 조수아를 바닥에 다시 내려놓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조수아는 차분하게 남자가 자신을 내려놓고 바삐 조수아의 병실로 향하는 뒷모습을 묵묵히 바라봤다. 그리고 잠시 뒤 고개를 숙여 젖어든 눈가를 감췄다.
“조수아 씨,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송학진이 다가와 그녀를 부축하려고 하자 조수아는 이를 거부하며 싸늘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송학진 씨, 앞으로 저희 누구도 서로한테 빚진 게 없는 겁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벽을 짚으며 천천히 복도를 걸어갔다. 겨우겨우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눈앞이 점점 어두워지고 온몸에 힘이 다 빠진 것처럼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지만 조수아는 끝까지 악으로 깡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병원 로비로 내려왔다.
송학진의 시선에서 벗어나 육문주가 없는 곳에 도착하자 안심이 된 모양인지, 조수아는 얼마 못 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앞이 까매지며 바닥으로 몸이 고꾸라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 얼굴부터 먼저 바닥에 부딪치겠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뻗어나온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으며 한 남성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수아!”
0007 화
힘겹게 뜬 시야 안으로 익숙한 얼굴이 비쳤다.
조수아는 구명줄을 잡은 사람처럼 남자의 옷깃을 꽉 붙잡으며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선배, 저 여기서 데리고 나가주세요.”
그녀는 육문주에게 이렇게 초라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불쌍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싫었다. 다른 건 다 싫고 그저 한시라도 빨리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연성빈이 긴장한 얼굴로 물었다.
“지금 이 상태로 어떻게 나가겠다는 거야? 안 되겠다. 일단은 의사선생님한테 가자.”
“안 돼요, 선배! 저 아까 현혈하고 나와서 잠시 어지럼증 때문에 그런 거예요. 저 집에 데려다 주세요. 푹 쉬고나면 괜찮아질 거예요.”
연성빈이 안타까운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안아들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작게 위로했다.
“알겠어. 무서워하지 마. 지금 당장 여기에서 데리고 나가줄게.”
육문주가 볼일을 마치고 병원문을 나섰을 땐 마침 연성빈이 조수아를 안고 차에 오르기 직전이었다. 그녀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눈에 가득한 걱정과 연민이 담겨 있었다.
주먹을 꽉 그러쥔 육문주는 살벌한 시선으로 두 사람을 태운 차가 멀리 사라지는 것을 노려봤다.
조수아는 이튿날 오전이 돼서야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다.
어제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피까지 뽑았더니 위가 텅텅 빈 것처럼 느껴졌다.
침실에서 나와 거실로 들어서는데 맛있는 냄새가 주방에서 풍겨왔다. 의아한 얼굴로 주방을 바라보는데 커다란 인영이 그녀를 향해 걸어왔다.
손에 죽그릇을 들고 귀여운 핑크돼지가 그려진 앞치마를 한 연성빈이 환한 웃음을 지으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
“너 어제 피 뽑았다면서. 그럴땐 돼지간으로 만든 죽을 먹으면 좋다고 해서 한 번 해봤거든? 빨리 와서 먹어봐.”
조수아는 미안한 얼굴로 작게 웃었다.
“미안해요, 선배. 어제 선배한테 신세진 걸로도 모자라서 요리까지 하고. 나중에 제가 밥 한 번 살게요.”
연성빈과 조수아는 R대학교 법학과 동문생으로 연성빈은 그녀보다 2학번 더 위였다. 두 사람은 모두 법학계 최고 권위자인 백태웅의 제자였는데, 3년전 석사 졸업한 연성빈이 외국에 나가 발전하고 조수아가 육문주의 비서로 취직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다른 길을 걷게 되었다.
연성빈이 웃으며 답했다.
“좋지. 스승님도 너 보고싶다 그러더라. 나중에 너 건강해지면 셋이서 같이 밥 먹자.”
멋적은 듯 머리를 넘긴 조수아가 어설프게 웃으며 말했다.
“스승님이 저한테 진짜 잘해주셨는데 제가 스승님의 길을 걷지 않아서 너무 미안해요. 그래서 사실 스승님 얼굴 보기도 부끄러워요.”
조수아는 백태웅이 제일 아끼는 제자였다. 그녀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던 백태웅은 지인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의 제자가 법정계에 발을 들이게 되면 분명 큰 파란을 일으킬 것이라며 호언장담하고 다녔었다.
그러다 조수아가 졸업하고 육문주와 함께 있기 위하여 과감히 변호사라는 직업을 포기하조 비서가 되기로 했을 때, 백태웅은 꽤나 오랜 시간을 그녀 대신 안타까워 했었다.
연성빈은 죽그릇을 식탁 위에 내려놓은 뒤 신사답게 의자를 빼내주며 웃었다.
“사람마다 다 자신만의 생각이 있는데 뭐. 스승님께서 한 번도 너 원망한 적 없었어.”
조수아는 마음속이 시큰해나는 것을 느꼈다.
자리에 앉으며 조수아는 연성빈한테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그나저나 선배 북유럽에서 벌써 골든변호사로 명성이 자자하던데. 연봉도 벌써 어마어마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갑자기 한국으로 들어온 거예요?”
눈밑에 잠시 반짝하고 떠오른 빛이 곧장 사라졌다. 연성빈은 다정한 음성으로 그녀의 물음에 답했다.
“거기 밥이 내 입에 안 맞더라고. 그래서 돌아왔어.”
숟가락을 건네던 연성빈이 무심한 듯 지나가는 말투로 물었다.
“너 그분이랑은 어때?”
조수아는 억지 웃음을 지으며 덤덤하게 말했다.
“헤어졌어요.”
연성빈의 뜨거운 시선이 그녀의 얼굴에 몇 초간 머물렀다가 떨어졌다.
“걱정 마. 그 사람이 너 못 괴롭히게 내가 지켜줄게.”
손을 뻗은 연성빈이 다정하게 조수아의 머리에 얹고 위로하듯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가 육문주와의 관계에서 얼마나 큰 상처를 입었는지 연성빈은 모르지 않았다. 어젯밤에도 잠에 든 조수아는 얼마나 서글픈지 한참이나 울먹이며 훌쩍거렸었다.
조수아의 머리에 얹은 손을 떼어내기도 전에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와 함께 문이 띠리릭 열리며 육문주가 문가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늘한 눈매가 조수아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손으로 옮겨가 고정되었다.
두 사람이 미처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육문주가 기다란 다리를 성큼거리며 걸어와 조수아의 손에서 숟가락을 뺏어 내려놨다.
그러고는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은 채 침실로 다급하게 걸어가더니 발로 쿵하고 문을 거세게 닫았다. 곧바로 철컥하고 문이 잠기는 소리가 울렸다.
조수아가 무슨 일인지 상황파악을 마쳤을 땐 이미 육문주의 몸에 깔려 침대에 눕혀진 뒤였다.
문밖에서 연성빈이 쾅쾅대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온몸으로 한기를 내뿜고 있는 육문주 때문에 조수아는 입술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 같았다.
“당신 미쳤어?”
핏발이 선 육문주가 갈라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이보다 더 미칠 수도 있어.”
말을 마친 그는 고개를 숙여 눈앞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육문주의 뇌리속에는 지금 온통 조수아를 애틋하게 바라보고 있던 낯선 남자의 눈빛으로 가득했다.
그걸 생각하니 육문주는 도무지 이성을 유지할 수 없었다. 단연코 그는 어떤 여자 때문에 이 정도로 이성을 잃은 적이 없었다.
미친 듯이 조수아의 입술을 씹어대던 육문주는 새하얀 목을 타고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조수아는 한쪽으로 발버둥치며 한쪽으로 욕을 퍼부었다.
“이 나쁜놈아! 우린 이제 끝났어. 그러니까 더 이상 당신을 경멸하게 만들지 마!”
육문주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더 미친 듯이 키스를 이어갔다. 새하얀 살결을 한입 가득 깨물은 그가 입을 떼며 물었다.
“그새 벌써 새 남자 찾았어?”
“이미 헤어진 마당에 내가 누구랑 같이 있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야!”
“그래? 그럼 내가 저 사람의 앞길을 다 막아도 괜찮은 거지?”
“그러기만 해 봐!”
“내 여자한테 감히 손 댔는데 내가 못할 것 같아?”
“그냥 나랑 같은 학교를 다녔던 선배일 뿐이야. 우리 아무 사이도 아니니까 선배한테 해코지 하지 마.”
조수아는 육문주가 본인한테 불리한 사람한테는 언제나 손속에 여지를 두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연성빈은 이제 귀국한지 얼마 안 돼서 제대로 터를 못 잡았을 게 분명했다. 육문주에게는 손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의 앞길을 망쳐버릴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잔뜩 긴장한 그녀의 모습을 보며 육문주는 코웃음을 쳤다.
“나랑 같이 돌아가. 안 그러면 저 사람 무사할 거란 보장 못해.”
그때 침실문이 외력에 의해 쾅하고 열리며 연성빈이 안으로 튀어들어왔다. 그리고 조수아가 미처 말릴 새도 없이 육문주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우당탕탕!
방안에 두 남자가 서로 뒤엉키는 소리가 들려오고 조수아의 무력한 비명소리가 섞여들었다.
얼마나 흘렀는지 모를 시간이 지난 후에야 침실이 평정을 되찾았다.
옷이 잔뜩 흐트러진 채 피를 묻힌 연성빈이 안에서 걸어나오며 바닥에 주저앉은 조수아를 안타까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수아야, 나 절대 네가 다른 사람한테 굴복해야 되는 짐짝이 안 될 거야. 일어나서 밥 먹어.”
손을 뻗은 연성빈이 아직까지도 바들바들 떨고 있는 조수아를 바닥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그녀를 부축해 식탁 앞에 앉혔다.
조수아가 뜨거운 눈물을 머금고 그를 마주보며 말했다.
“미안해요, 선배.”
“미안해할 필요 없어. 우린 동문 선후배잖아. 당연히 너를 보호해야지. 죽이 식었네. 가서 덥혀올 테니가 잠깐만 기다려.”
죽그릇을 들고 주방으로 향하는 연성빈의 뒤로 육문주가 안방에서 걸어나왔다. 연성빈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얼굴에 멍을 달고 있었다. 입술을 훔치던 그가 흐린 눈빛으로 말을 걸어왔다.
“나랑 지금 같이 가. 아니면 여기에 남아서 죽이나 먹든지. 네가 알아서 선택해.”
조수아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빛났다.
“우린 끝났어. 당신이랑 안 돌아갈 거야.”
“이게 네 선택이라 이거지? 그래. 나중에 가서 후회하지 마!”
육문주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주머니에 있던 그의 휴대폰이 울렸다. 발신 상대가 송미진임을 확인한 그는 짜증스레 전화를 받았다.
“문주 오빠, 탕비실에 있던 CCTV 영상을 조 비서님이 지웠대요. 우리 부모님이 그걸 알고는 조 비서님을 고의상해죄로 고소한다고 지금 난리예요. 그러니까 빨리 와서 우리 부모님 좀 말려줘요.”
휴대폰을 귓가에 댄 채 육문주는 조수아를 감정없이 내려다보며 망설임없이 말했다.
“그냥 감옥 가게 냅둬!”
0008 화
송미진의 목소리가 너무 커서 조수아는 그녀의 말을 모두 듣게 되었다. 육문주의 대답은 한순간에 그녀의 7년이나 이어온 감정을 엉망으로 짓밟았다.
“나 이 비서한테 그 영상을 복제해달라고 했지 삭제하라고 한 적 없어.”
육문주는 표정 변화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증언이랑 물증이 완벽한데 그래도 변명할 생각이야?”
변명이라니, 그건 육문주가 자신을 믿어줄 가능성이 있을 때나 의미 있는 단어였다. 그리고 무릇 송미진이 연관되어 있는 일이라면 육문주는 무조건 송미진의 편이었다.
조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침착함을 가장했다.
“그럼 경찰에 신고해서 조사를 맡기든지. 내가 한 적도 없는 일인데 나한테 죄를 뒤집어 씌울 생각하지 마. 조 씨 가문을 다 걸어서라도 난 내 결백을 되찾아야겠으니까!”
언제나 얌전하고 자신의 말이라면 무조건적으로 따르던 그녀였다. 지금처럼 제 주장을 굽히지 않는 조수아의 모습을 육문주는 처음 겪었다.
“입만 살아서는.”
“나 법학과 출신이라는 걸 잊지 마. 애당초 당신의 돈이 탐난 게 아니었으면 지금쯤 난 뛰어난 변호가 되어 있었을 거야.”
조수아는 일부러 ‘돈이 탐났다’는 단어에 힘을 실어 말했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웃었다. 남들의 눈에 자신이 그렇게 비춰진다는 걸 이미 습관 됐다는 듯 말이다.
육문주는 작게 이를 바득 갈았다.
“그럼 행운을 빌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조수아의 집을 나온 육문주는 차가 세워진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서 대기하고 있던 진영택이 다가오던 육문주를 발견하고 튀어내리며 말했다.
“대표님, 조 비서님한테 주려고 사신 선물 두고 가셨더라고요. 지금 다시 가져다 주실래요, 아니면 제가 가서…”
진영택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육문주의 호통이 날아왔다.
“갖다 버려!”
입가에 커다란 멍을 달고온 육문주에 진영택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대충 알겠다는 듯 좋게좋게 그를 타이르기 시작했다.
“대표님, 그래도 대표님께서 직접 신경 써서 고른 선물들인데 버리면 어떡합니까. 조 비서님도 그냥 잠시 삐져서 그런 거지 잘 달래주시면 괜찮을 거예요. 제가 만약 제 여자친구를 데리고 전여자친구한테 헌혈하라고 데리고 갔다가 나중에 챙겨주지도 않고 그러면은 제 가죽을 벗기려고 들걸요? 그거에 비하면 대표님 얼굴에 멍은 별 거 아니에요. 이제 조 비서님 화가 좀 풀리면 제가 나중에 다시 가져다 드릴게요.”
육문주는 생각에 빠진 듯 미동도 없었다. 그의 뇌리에는 지금 온통 방금 전에 봤던 핏기 하나 없어 보이던 조수아의 얼굴로 가득했다.
‘고작 피를 400CC 뽑았다고 비실비실거리다니, 전에 온갖 산해진미를 먹인 게 다 어디로 간 거야.’
미간을 찡그린 육문주가 낮은 소리로 말했다.
“마음대로 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문 후 라이터로 불을 붙였다.
“감시카메라 영상 어떻게 된 건지 가서 조사해 봐.”
“알겠습니다. 대표님도 조 비서님이 그랬을 거라고 안 믿으시는 거죠? 원래 처음부터 일도 잘하고 대표님한테 인정 받는 조 비서님들을 질투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이번 사건도 아마 조 비서님을 쫓아내고 본인이 그 자리를 꿰차려고 꾸민 일일 수도 있어요.”
깊게 담배를 빨아들인 육문주가 천천히 담배를 연기를 뱉었다. 하얀 연기가 그의 잘생긴 얼굴을 흐릿하게 감쌌다.
“그런 사람이 정말 있으면 절대 가만 안 둬.”
담배를 다 태운 뒤 차에 탄 육문주는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에 도착해 문을 열고 들어가는데 자애로운 목소리가 사무실 안쪽에서 갑자기 들려왔다.
“우리 장손, 갑자기 할머니 보니까 반갑지?”
단아한 복장을 갖춰입은 육문주의 할머니 황애자 여사가 천천히 다가오며 웃었다. 70을 넘긴 나이에도 관리를 잘한 황애자 여사는 백발의 파마 머리에 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본인의 나이보다 족히 열몇 살은 어려보이는 정정한 모습이었다.
잔뜩 굳어있던 육문주의 표정도 할머니를 본 순간 부드럽게 풀렸다.
“할머니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집에서 편하게 화분이나 가꾸고 계시지.”
“그런걸 가꾸는 것보다 네가 하루빨리 나한테 증손을 안겨주는 게 더 재밌지 않겠니?”
사무실을 둘러보던 황애자가 눈을 휘며 말했다.
“네 수석비서가 얼굴도 예쁘고 일도 잘한다고 그러던데, 왜 안 보여?”
“사직했어요.”
별다른 해명없이 덤덤한 답변이 들려왔다.
황애자가 혀를 끌끌 차며 손주를 나무랐다.
“그렇게 참하고 예쁜 아가씨를 붙잡지 못해 떠나보낸 거야? 으이그, 쯧쯧! 내 손주며느리로 삼으려고 했더니만.”
내가 직접 나서지 않으면 다 굴러들어온 손주며느리도 이대로 도망가겠네?
황애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육문주는 쓰게 웃었다.
참한 아가씨라고?
그것도 다 옛말이지, 지금의 조수아는 가시 돋친 장미 그 자체였다.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면 가시로 사람을 찔러버리는 그런 장미 말이다.
육문주는 또 다시 가슴이 답답해졌다.
한편, 조수아는 자세히 알아본 후에야 이 비서가 중간에서 말을 바꾸는 바람에 상황이 역전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예전에 이 비서가 개인적인 일로 돈이 급하다고 해서 조수아가 2억 가까이 되는 돈을 빌려준 적이 있었다.
남자친구랑 결혼을 준비하는데 집 사고 인테리어 할 돈이 부족하다고 해서 조수아가 흔쾌히 빌려준 돈이었다.
이 비서는 바로 그 계좌이체 내역을 증거로 들며 자신은 조수아의 지시를 받아 감시카메라 영상을 지웠다고 증언했다.
그런데 좋은 마음에 빌려줬던 돈이 그녀가 범죄를 저지르기 위해 지불한 돈으로 탈바꿈 되었을 줄이야.
조수아는 차디찬 웃음이 비어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요즘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정말 말 그대로였다.
죽을 다시 덥혀서 나온 연성빈을 마주하고 조수아가 입을 열었다.
“선배, 도와주겠다고 한 건 고마운데 지금 모든 증거들이 다 나한테 너무 불리해. 괜히 이 사건을 맡았다가 선배 명성에 먹칠하게 될까 봐 걱정이야.”
연성빈은 별일이 아니라는 듯 웃었다.
“증거는 내가 알아서 찾아볼 테니까 걱정 마. 내가 그랬지. 아무도 너 괴롭히지 못하게 할 거라고. 넌 다른 생각은 말고 당분간은 건강 회복하는 데에만 신경 써. 알겠지?”
“저도 같이 찾을게요. 제가 생각하기에 이 비서가 아무 이유도 없이 말을 바꾸진 않았을 것 같아요.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손을 쓴 게 틀림없어요.”
열띤 토론을 이어가고 있는 와중에 조수아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화면에 떠오른 이름을 본 그녀의 미간이 작게 찌푸려졌다. 통화버튼을 누르자 곧장 날이 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수아, 너 지금 당장 본가로 들어와!”
전화를 건 사람은 조수아의 할머니 장현숙으로 매번 안 좋은 일이 있을 때마다 그녀를 호출하고는 했다.
잠시의 시간이 흐른 뒤, 본가 저택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조수아의 면전으로 찻잔이 날아들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그녀의 이마로 찻잔이 정확히 날아와 깨지면서 순식간에 살갗이 찢어져 피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다.
찌푸린 얼굴로 이마를 감싼 조수아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이 물었다.
“제가 뭘 잘못했다고 사람이 들어오자마자 이렇게 맞이하죠?”
“그걸 몰라서 물어? 지금 우리 조한 그룹이랑 육엔 그룹이 추진하고 있던 프로젝트가 스탑이 걸렸는데 그게 네가 저지른 짓이 아냐? 잘 하고 있던 비서직을 대체 왜 그만두는데! 이제 봐봐. 육 대표님이 우리 가문한테 손을 쓰기 시작했어. 이제 조한 그룹이 네 손에서 끝장나는 거라고!”
장현숙이 제 화를 이기지 못하고 탁자를 내리치며 호통쳤다. 손녀를 향한 애틋함이라고는 일말도 보이지 않는 모습이었다.
이마의 상처도 잊은 채 조수아는 방금 들은 말을 천천히 되새김했다.
육엔 그룹에서 프로젝트 종료를 선언해 왔다고? 역시 육문주는 한다면 하는 남자였다.
조수아가 쓰게 웃으며 답했다.
“그럼 할머니 뜻은 저한테 문주 씨 곁에서 명분 따위 신경쓰지 말고 계속 그의 욕구를 풀어주는 섹스파트너로 남아있어야 했다는 말인가요?”
“육 대표님 침대에 올라갔으면 됐지 너 따위가 명분을 요구할 자격이나 돼? 원래 애초부터 내가 널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너한테 이런 좋은 기회가 차려지기나 했을 것 같아?”
조수아는 방금 제가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커다랗게 떠진 눈이 장현숙에게로 고정됐다.
0009 화
“방금 뭐라고 그러셨어요? 할머니가 저를 문주 씨 옆에 붙여둔 거라고요?”
“당연하지. 아니면 육 대표님이 정말 백마 탄 왕자처럼 쨔잔하고 나타나서 널 구해준 줄 알았어? 생각해 봐. 육 대표님 같은 다망하신 분이 어떻게 난데없이 그렇게 구석진 곳에 갔겠어. 나랑 네 오빠가 미리 함정을 파서 육 대표님을 그곳으로 이끌지 않았다면 네가 3년이나 풍족한 생활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아? 그런 것도 모르고 괜히 육 대표님한테 시집가고 싶어서 욕심을 부리는 게 네 주제에 가당키나 해? 너처럼 낯 부끄러운 줄 모르는 엄마를 둔 사람을 B시에 있는 모든 재벌가문한테 물어봐. 누가 널 데려가겠다는 가문이 있는지. 너 당장 육 대표님한테 사과하고 다시 돌아가. 안 그러면 네 엄마가 저지른 그 동네 챙피한 짓들을 다 까발릴 줄 알아.”
씩씩거리며 따발총 쏘듯 장현숙이 쉬지 않고 조수아를 몰아붙였다. 마치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사람을 대하는 듯 매정한 태도였다.
이마를 타고 내려온 피가 입가에 흘러들어왔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입안 전체에 퍼졌다. 문득 구역질이 치밀었다. 조수아는 이런 가족을 뒀음에 역겨움이 밀려왔다.
장현숙의 말에서 조수아는 예전에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바로 장현숙이 자신의 큰 아버지의 아들인 사촌오빠와 함께 그녀를 상품처럼 육문주의 곁으로 보내버렸단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조수아는 자신이 드디어 짝사랑한 사람과 이어졌다는 생각에 그 후로 3년 동안이나 몸과 마음 바쳐 육문주를 사랑했다.
육문주를 위해 자신이 좋아하는 변호사 직업도 포기하고, 혼인에 대한 갈망도 포기하고, 아무런 원망도 없이 숨겨진 애인 노릇을 했던 게 남들 눈에는 몸으로 바꾼 거래로 보여졌다는 게 너무나도 충격이었다. 그것도 그녀의 제일 친한 존재였어야 할 가족들의 손에 의해 말이다.
조수아는 결연한 표정으로 피를 닦으며 고집스레 말했다.
“이제부터 저 다시는 누구한테도 지배당하지 않을 것이고 문주 씨 곁에도 안 돌아갈 거예요. 앞으로 조 씨 가문의 흥망은 저랑은 상관없는 일니까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할 말을 마치고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는데 몇 발자국도 안 돼 조수아는 문가에 서있던 아버지와 마주치게 됐다.
그녀의 아버지 조병윤이 눈가에 눈물을 매단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멍하니 넋을 놓고 있었다. 가슴에 한쪽 손을 얹은 채 그는 자신의 어머니를 쳐다봤다.
“어머니, 제가 효심이 부족했나요, 아니면 우리 가문을 위해 들인 노력이 부족했나요? 어떻게 제 딸한테 그렇게 대하실 수 있으세요?”
자신의 딸이 친할머니의 꾀에 넘어가 힘든 삶을 살았다는 생각에 조병윤은 가슴이 쿡쿡 쑤셔나며 이마에 식은땀이 배어났다.
조수아는 비틀거리기 시작하는 아버지를 보며 무언가 잘못됐다는 생각에 얼른 달려가 그를 부축했다.
“아빠, 나 괜찮아. 화내지 마. 아빠 얼마 전에 방금 심장수술 했어서 흥분하면 안 돼.”
조병윤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딸을 바라보며 손을 뻗어 딸의 이마에 난 상처를 조심스레 훑었다.
“미안하다. 아빠가 널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구나.”
“아빠, 그만 얘기하고 나가자. 내가 병원에 데려다줄게.”
조수아는 아버지를 부축한 채 저택을 나와 그를 차에 태웠다. 그리고 빠르게 시동을 걸어 병원으로 달렸다.
병원에 도착해 의사에게 병을 보이자, 의사가 환자분께서 수술 후 충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하고, 또 심적으로 너무 큰 자극을 받아서 수술 후 회복에 차질이 생긴 것 같다는 소식을 알려왔다.
그러면서 하는 얘기가 병원에 입원해서 며칠 두고 병세를 관찰하는 게 좋겠다는 제안도 했다.
조수아는 병실을 예약하고 아버지를 잘 안치한 뒤 혼자 복도로 나와 아버지 비서한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아버지의 비서한테서 회사의 자세한 내막을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최근에 조한 그룹에서 육엔 그룹이랑 크게 협업 프로젝트를 하나 추진하는 게 있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좋게 본 조병윤이 회사의 대부분 자금을 그 프로젝트에 투자를 했단다.
그런데 어제 육엔 그룹에서 갑자기 계약해지를 요구해 오면서 하는 말이, 조병윤이 동종 업계의 다른 기업들한테 이번 프로젝트에 관한 기밀사항을 누설했다는 것이다.
만약 정말로 육엔 그룹의 주장대로라면 조한 그룹은 투자금을 하나도 회수하지 못할 뿐더러 조병윤은 검찰의 조사를 받고 자칫 감옥에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휴대폰을 그러쥔 조수아의 손에 힘이 잔뜩 실렸다.
두 그룹이 새로 추진하고 있다던 프로젝트에 대해 조수아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 프로젝트는 육엔 그룹에서 새로 손을 대고 있는 영역으로 이번에 총력을 다해 개발하고 있다고 들었다.
이번 프로젝트의 전망은 아주 가관이었는데, 만약 프로젝트가 성공하게 된다면 투자금의 몇 배는 식은죽 먹기로 회수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예측이었다.
조수아는 자신의 아버지처럼 약속을 잘 지키는 사람이 이런 일을 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누군가가 뒤에서 일부러 손을 쓴 게 틀림없었다.
싸늘하게 식은 얼굴의 조수아가 이번에는 육문주의 번호를 눌러서 연결했다.
연달아 몇 번을 걸었는데도 상대방은 모두 무정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다섯 번째로 통화음이 들려오고 나서야 육문주의 차가운 음성이 들려왔다.
“이제 후회되는 거야?”
조수아는 입술을 깨물며 냉정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그녀의 음성이 피로감으로 인해 낮게 깔렸다.
“문주 씨, 우리 아빠 약속을 어기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복수하고 싶으면 나한테 해. 우리 아빠가 한평생 바쳐서 쌓은 명예를 망가뜨리지 말고. 우리 아빠는 신용을 목숨보다도 더 중요시하는 사람이야. 이제 수술 받은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그런 죄를 뒤집어 씌우면 우리 아빠 못 버텨.”
육문주의 몸이 흠칫 멈췄다가 곧바로 느릿하게 말했다.
“네 아빠 살리고 싶어?”
가볍게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당장 병원 주차장으로 내려와서 나를 찾아와.”
육문주가 이번 일을 벌였을 거라고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직접 그의 입에서 인정하는 말을 듣는다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조수아는 그가 정말로 3년이라는 세월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이런 짓을 했음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무릇 한 번이라도, 아니 한순간이라도 육문주가 자신한테 마음이 움직였던 적이 있었더라면 그가 이런 짓을 벌이진 못했을 것이다.
조수아는 고개를 쳐든 채 울먹이려는 목소리를 감췄다. 그리고 복도의 조명을 뚫어져라 노려보며 젖어들기 시작하는 눈가를 말렸다.
“두고 봐, 문주 씨. 나 꼭 우리 아빠의 결백을 증명할 테니까. 무고한 사람을 모함하는 걸 절대 용납 못해.”
“좋아. 네가 무슨 수로 결백을 증명할 건지 두고 볼게.”
5분 후, 조수아는 지하주차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육문주의 차를 찾아 다가가자 진영택이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조 비서님, 대표님께서 차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진영택은 그녀를 위해 차 문을 열어준 뒤, 조수아가 올라탄 후에 다시 문을 닫고 알아서 먼 곳으로 잠시 자리를 피했다.
육문주는 차에 올라탄 조수아를 쳐다봤다가 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로 단번에 시선을 옮겼다. 칠흑같은 눈동자에 순식간에 핏발이 섰다.
“누가 그랬어?”
턱을 꽉 붙잡아 오면서 엄격한 말투로 묻는 말에 조수아는 고개를 비틀며 쏘아붙였다.
“당신이 알 바 아냐.”
“이게 바로 네가 말한 날 떠나서 잘 살 수 있다는 거야? 고작 이따위로 지낼 거면서 그런 말을 한 거냐고!”
수납칸에서 연고를 꺼내든 육문주는 연고를 짜서 손끝에 덜은 뒤 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에 치덕치덕 발랐다.
그러고는 지난번 자신이 술을 너무 마셔서 넘어지는 바람에 얼굴이 다쳤을때, 조수아가 벌이라면서 사왔던 못생긴 데일밴드를 찾아내 그녀의 이마에 붙이려 했다.
조수아는 몸을 뒤로 물리며 기를 쓰고 거부했다.
“싫어. 안 붙일 거야.”
육문주는 어림도 없다는 듯 그녀를 홱 당긴 채 억지로 데일밴드를 이마에 붙였다. 그러고는 보복이라도 하듯 조수아의 입술을 훔쳤다가 뗐다.
“진짜 못생겼네.”
조수아는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누구 때문에 지금 우리 가문이 이렇게 됐는데, 눈치도 없이 장난을 치는 육문주가 조수아는 그저 밉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우리 아빠를 놓아줄 거야?”
육문주의 깊은 눈동자가 흔들림없이 그녀에게로 향했다.
“간단해. 얌전히 다시 내 곁으로 돌아와. 그러면 네 아빠도 무사하고, 조한 그룹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겠다고 약속하지.”
0010 화
조수아는 고민할 필요도 없다는 듯 대답했다.
“그거 빼고 다 들어줄 수 있어.”
“내가 필요한 건 이거 하나뿐인데?”
“문주 씨, 내가 불순한 목적이 있어서 당신한테 접근했다 쳐. 그래도 3년이나 당신 곁에서 그렇게 챙겨줬으면 나는 할 도리는 다 했다고 보는데, 아니야? 날 이렇게 놓아주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육문주는 고집스런 눈빛과 계속해서 열었다 닫혔다 하는 입술, 그리고 갸름한 턱라인을 보며 목울대를 꿀떡 움직였다.
단숨에 조수아를 안아 허벅지에 앉힌 그는 턱을 그녀의 어깨에 댄 채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어떻게 날 챙겼는데. 자세히 한 번 얘기해 봐.”
귀 바로 밑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울림있는 목소리에 조수아는 두피가 저릿해지는 것을 느꼈다.
남자의 큰 손이 가만있지 못하고 그녀의 옷속으로 슬금슬금 들어왔다.
조수아는 그의 손아귀를 벗어나고 싶었으나, 육문주가 하도 세게 자신을 안고있는 탓에 급한 나머지 눈앞의 어깨를 콱 물어버리고 말았다. 자신이 여태껏 받은 모든 억울함과 불만을 모두 실은 입질이었다.
조수아는 입에서 피비린내가 날 때까지 물었다가 입을 뗐다. 눈물이 맺힌 얼굴에서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거려. 그러니까 나 벼랑 끝까지 몰지 마.”
육문주가 행동을 멈춘 틈을 타 그를 세게 밀어낸 조수아는 원망이 가득 담긴 얼굴로 차에서 내려 그대로 떠나갔다.
차로 돌아온 진영택은 휴대폰을 들고 제 어깨를 찍고 있던 육문주를 발견했다. 백미러를 통해 보니 그의 어깨에 피가 배어나온 치흔이 있는 게 보였다.
‘쯧, 대표님께서 또 조 비서님 성질을 건드리셨나 보네.’
진영택이 동정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대표님, 연고 발라 드릴까요?”
“내가 그렇게 연약해 보여?”
“설마 그걸 증거로 남겨뒀다가 나중에 몰아서 조 비서님한테 따지려고 그러는 건 아니시죠?”
연달아 사진을 여러 장 찍은 육문주가 그제야 옷을 다시 매만지며 차갑게 대꾸했다.
“조한 그룹이랑 협업한 프로젝트, 누가 스탑 걸었어?”
고개를 숙인 진영택은 한참만에야 입을 열었다.
“대표님의 어머님께서요.”
“왜 나한테 얘기 안 했어?”
“사모님께서 절대 말하지 말라고 그래서…”
“진영택, 너 내 비서야, 아니면 우리 어머니 비서야.”
“대표님, 사모님께서 대표님이랑 조 비서님 관계를 아신 것 같습니다. 사모님께서 사람을 시켜서 조 비서님의 최근 3년간 모든 행적이랑, 그리고 조한 그룹과 육엔 그룹간의 모든 거래에 대해 조사를 시켰더라고요. 제가 보기에 사모님께서 이번에 안 좋은 일을 꾸미고 계신 것 같았어요.”
넥타이를 끌어내린 육문주는 차갑게 식은 눈동자로 휴대폰을 꺼내 그의 어머니인 안혜원한테 전화를 걸었다.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전화너머에서 중년 여성의 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한 그룹을 봐달라고 전화한 거라면 그 얘기는 더 이상 꺼내지 마. 절대 그만둘 생각 없으니까.”
육문주의 표정이 더는 나빠질 수 없을 정도로 찌푸려졌다.
“제 사람입니다. 어머니께서 조수아를 건드릴 권력이 없어요.”
안혜원이 차게 웃으며 답했다.
“네 사람이라니까 내가 건드린 거야. 그년의 엄마라는 작자가 예전에 네 아버지한테 꼬리쳤던 거 알아 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의 남자 침대에 기를 쓰고 올라간 년이 낳은 새끼가 뭘 얼마나 대단한 교육을 받았겠어!”
육문주는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웃으며 말했다.
“그건 조수아의 어머니 얘기이지, 조수아랑은 상관없는 얘기잖아요.”
“육문주, 우리 가문에 절대 그런 여자를 들일 수 없으니까 알아서 해! 너 걔랑 같이 있으면 절대 행복할 수 없어.”
“어머니는 아버지랑 결혼해서 뭐 행복했나요? 제가 어렸을 때부터 지금까지 몇십 년이나 다투고 이혼을 반복하면서, 저한테 혼인에 대한 공포감을 심어줬잖아요. 누나도 서른이 넘었는데 사랑을 믿지 못해 아직까지 혼자이고요. 그런데도 아직까지 반성은커녕 저희를 벼랑끝까지 내몰아야 직성이 풀리시겠어요?”
마지막에 가서 육문주의 음성이 떨려서 나왔다. 어렸을 적 그의 기억속에는 온통 부모님이 큰소리로 다투던 화면들로만 가득했다. 그때마다 그의 누나는 그를 안고 어두컴컴한 방에 숨어 함께 눈물을 흘리곤 했었다.
아마 할머니의 따뜻한 보살핌이 없었더라면 육문주와 그의 누나는 이렇게 건강하게 자라지 못했을 수도 있었다.
등받이에 몸을 묻은 그는 손끝으로 태양혈을 가볍게 문질렀다. 어렸을 때의 기억만 떠올리면 찌르는 듯한 두통이 밀려왔다.
안혜원은 아무런 동요도 없이 한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게 나 혼자만의 탓이야? 네 아버지가 밖에서 이 여자, 저 여자 건드리고 다니지만 않았어도 내가 네 아버지랑 싸웠겠니? 아무튼 조수아 그년은 내가 반드시 막아설 테니까 알아서 처신해. 애인도 안 되니까 헛된 생각 말고. 알았어?”
제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끊은 안혜원에, 육문주는 툭툭 튀는 미간을 문지르다 담배갑에서 담배 한대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등받이에 깊숙이 묻은 몸에서 깊은 한숨이 새어나왔다.
며칠 후, 병실에서 아버지와 함께 식사를 하던 조수아는 갑자기 병원 산부인과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지난번 유산한 뒤로 진행했던 전신 건강검진 결과가 나온 모양이었다.
전화를 받고 오겠다며 복도로 나온 그녀는 통화버튼을 눌렀다.
“조수아 씨, 지난번에 조수아 씨께서 진행하신 건강검진 결과가 나왔는데요. 그게… 약간의 문제가 생겨서 좋기는 직접 들러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조수아는 무언가 잘못 되었음을 인지하고 전화를 끊은 뒤 아버지한테 간단하게 몇 마디 당부한 뒤 핑계를 대고 병실을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곧장 산부인과 진료실로 발걸음을 바삐 옮겼다.
산부인과에 도착해 간호사의 안내를 받아 진료실로 들어간 조수아는 그녀의 건강검진 보고서를 든 의사와 마주보고 앉았다. 의사선생님이 무거운 얼굴로 물어왔다.
“혹시 남자친구분과 관계를 가지신 후 사후피임약을 자주 드셨었나요?”
조수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육문주는 시시때때로 발정했는데 어떨 때 콘돔을 살 겨를도 없이 달려드는 탓에, 체외사정을 했더라도 자주 사후피임약을 먹어야만 했다.
지난번 임신했을 때는 어느날, 유독 육문주가 끝도 없이 그녀를 괴롭히다가 몇 번은 체내사정을 했던 걸로 기억했다.
결국 끝에 가서 신체부담을 이기지 못한 조수아는 고열로 앓아누워 약을 챙겨먹지 못했고, 그렇게 덜컥 임신이 돼 버렸다.
의사가 안타까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환자분께서 지금 자궁 후방전위와 자궁 내벽이 많이 얇아져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합니다. 거기에다 환자분께서 장기적으로 사후피임약을 복용했다 보니 난소노화 증상이 살짝 있네요. 원래는 임신하기 엄청 어려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임신을 하셨는데, 이번에 유산을 하시고 과다 출혈까지 하게 되면서 환자분 몸에 굉장한 무리가 가해졌어요. 지금 건강검진 결과에 따르면 환자분께서 다시 임신할 수 있는 확률이 매우 적은 걸로 보여집니다. 아마 20프로도 간당한 것 같네요.”
마음의 준비없이 듣게 된 소식에 조수아는 심장이 칼로 도려내진 것처럼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숨이 쉬어지지 않고 턱하니 막혔다. 옷자락을 거머쥔 주먹에 힘이 가득 실렸다.
조수아의 친척 중에 임신 확률이 40프로도 안 되는 사람이 한 명 있었는데, 실제로 결혼생활이 5년을 넘어가는데도 그 부부 사이에는 아직까지도 자식 하나 없었다.
그렇다는 건 임신 확률 20프로도 안 되는 자신이 한평생 엄마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조수아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선생님, 다른 방법은 없는 건가요?”
의사가 난처한 얼굴로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일단은 한약을 처방해 드릴 테니 드셔보실 수 있으시긴 한데, 임신 가능성이 오를 수 있을지는 장담 드리지 못합니다. 그리고 한 가지, 앞으로 절대 사후피임약을 드시면 안 되세요. 여자란 엄마가 될 권리를 잃어버리게 되면 한평생을 후회하게 돼요. 만약 환자분 남자친구분께서 정말 환자분을 사랑하시면 충분히 다른 피임방법을 찾아보실 수 있으실 겁니다.”
조수아의 얼굴에 비참한 미소가 걸렸다.
육문주가 만약 정말로 자신을 사랑했다면, 그녀 혼자서 이 모든 것을 감당하게 두지도 않았겠지.
감사의 인사를 전한 뒤 조수아는 건강검진 보고서를 들고 비틀비틀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 사이에 다음 환자가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게 들렸다. 조수아는 상대방의 얼굴도 볼 겨를이 없이 몸을 비껴 지나치려고 했다.
그러나 몇 걸음 못 가 귓가에 들려오는 익숙한 목소리에 가던 걸음을 멈췄다.
“선생님, 저 임신 준비를 위한 검사 진행하려고 그러는데요. 결혼하고 바로 애기를 가질 거라서요.”
조수아의 몸이 흠칫하고 떨렸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행복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송미진의 얼굴이 시선에 들어왔다.
‘나랑은 결혼도 싫다, 아이 가지기도 싫다면서 사후피임약이나 먹게 하고. 그것 때문에 이제는 임신조차 하기 힘들어진 몸으로 만들어 놓은 주제에, 곧바로 태세전환하여 송미진이랑은 결혼까지 결심하고 아이까지 가지려고 한단 말이야?’
비교가 없으면 상처도 없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조수아는 온몸이 뻣뻣하게 굳은 채 진료실 문을 나서다가 얼마 못 가 익숙한 품에 안겨버렸다. 머리 위에서 육문주의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임신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