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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기 전엔 못 놔줘
박민정은 재벌가에 인정받지 못하는 난청 며느리이자 태어날 때부터 엄마에게 버림받은 딸이다. 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의 남편은 한순간도 그녀를 아...
Chương (1)
第1章
제1화
청명,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날, 병원 문 앞에서.
박민정은 가녀린 몸에 수척한 손으로 병원 임신 테스트 보고서를 들고 있었는데 보고서에는 임신이 아니라는 문구가 뚜렷하게 적혀 있었다!
“결혼한 지 3년인데 아직도 임신 못 했어? 왜 이렇게 쓸모가 없니? 너 계속 임신 안 되면 유씨 일가에서 쫓겨나는 수가 있어. 그땐 우리 집안더러 어떡하라는 거야?”
한수민은 하이힐을 신고 화려한 옷차림에 실망 가득한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삿대질했다.
박민정은 두 눈이 퀭하고 가슴에 꽉 막혔던 그 말들이 결국 한 마디로 함축되었다.
“미안해요.”
“엄마는 미안하단 말을 원하는 게 아니야. 얼른 남준의 아이를 낳으란 말이야. 알겠니?”
박민정은 목이 확 메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결혼한 3년 동안 남편 유남준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곁을 안 주는데 어떻게 아이가 생길까?
한수민은 약해빠진 딸의 모습을 바라보며 왜 저를 닮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차가운 이 한마디를 내뱉었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남준이한테 여자 한 명 찾아줘. 걔도 그럼 너한테 고마워할 거 아니야.”
박민정은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떠나가는 엄마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친엄마란 자가 딸에게 지금 남편을 위해 여자를 찾아주란 말이나 내뱉고 있다니.
그녀의 마음에 순간 찬바람이 휘몰아쳤다.
...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박민정의 머릿속엔 온통 엄마의 마지막 말만 감돌았다.
문득 귓가에 굉음이 한바탕 울렸다.
그녀는 자신의 병이 더 심해진 걸 알고 있다.
이때 문득 휴대폰 문자 벨 소리가 울렸다.
유남준의 3년을 하루 같이 보낸 문자였다.
“오늘 밤 집에 안 가.”
결혼한 이 3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집에서 밤을 지새운 적이 없다.
아내인 그녀를 터치한 적은 더더욱 없고.
3년 전 신혼 첫날밤에 유남준이 했던 말을 그녀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너희 집안에서 감히 사기 결혼을 감행했으니 넌 인제 평생 고독하게 살 각오해.”
평생 고독하게 살라고...
3년 전 박씨 일가와 유씨 일가에서 정략결혼을 맺었다.
분명 양가 집안의 이익을 위한 결혼이라고 약속했건만 결혼식 날 박씨 일가에서 갑자기 마음을 바꿨다. 유남준이 결혼 예물로 박민정에게 준 2천억 원을 포함해 모든 재산을 빼돌렸다.
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안색이 어두워지고 늘 그랬듯 남편에게 알겠다는 답장을 보냈다.
손에 쥔 임신 테스트 보고서는 어느새 꾸깃꾸깃한 종이 덩어리가 돼버렸다.
집에 도착한 후 그녀는 보고서를 휴지통에 바로 내던졌다.
매달 이맘때면 그녀는 심신이 지칠 대로 지친다.
저녁밥도 준비하지 않고 소파에 기댄 채 스르륵 잠들었는데 귓가엔 늘 우르릉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또한 유남준이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박민정은 난청이 있어 재벌가에서는 장애인에 해당한다.
유남준이 이런 그녀와 어떻게 아이를 가질 생각을 할까?
벽에 걸린 유럽식 벽시계가 둔탁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시계는 어느새 새벽 다섯 시를 가리켰다.
한 시간만 더 있으면 유남준이 돌아온다.
박민정은 소파에 누워 밤을 지새운 걸 알아채고 허둥지둥 일어나 남편의 아침상을 차렸다. 1초라도 늦으면 안 되니까 매우 조심스러웠다.
유남준은 매사에 철두철미하고 시간에 대한 요구도 엄청 까다로운 편이다. 전에 박민정이 아빠 장례식에 갔다가 제시간에 맞춰 집에 돌아와 그의 아침밥을 차리지 못했는데 그 일로 유남준은 한 달이나 그녀에게 문자 한 통 없고 대화조차 하지 않았다.
유남준은 6시 정각에 맞춰 돌아왔다.
훤칠한 키에 이태리 슈트를 차려입은 유남준은 고고한 기품이 저절로 흘러넘쳤으며 잘생긴 외모에 남성미가 뿜어져 나왔다.
다만 박민정의 눈가에 스친 그의 모습은 마냥 차갑고 소외감만 들 뿐이다.
유남준은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게 의자에 가서 앉으며 말했다.
“앞으론 아침밥 준비 안 해도 돼.”
박민정은 흠칫 놀랐다.
그녀는 본능적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저도 모르게 비천한 말투로 물었다.
“내가 뭐 잘못했나요?”
유남준은 고개 들어 3년 동안 변함없이 잔잔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원하는 건 아내이지 가정부가 아니야.”
3년 내내 박민정은 늘 똑같은 연회색 옷차림이었고 문자 답장도 항상 알겠다는 그 한마디뿐이었다.
솔직히 정략결혼만 아니었다면, 박씨 가문의 사기 결혼만 아니었다면 유남준은 절대 이런 여자와 결혼할 리가 없다!
박민정은 그에게 가당치도 않으니까!
‘내가 원하는 건 아내이지 가정부가 아니야!’
그녀의 귓가에 굉음이 더 크게 울렸다.
박민정은 침을 꼴깍 삼키고는 또다시 유남준이 제일 싫어하는 그 말을 내뱉었다.
“알았어요.”
순간 유남준은 기분이 확 잡쳐 평소 제일 즐겨 먹던 아침밥도 맛없게 느껴졌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며 짜증 섞인 얼굴로 의자를 빼고 밖에 나가려 했다.
이때 박민정이 어디서 나온 용기인지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남준 씨는 좋아하는 사람 있어요?”
갑작스러운 물음에 유남준의 눈빛이 살짝 변했다.
“무슨 뜻이야?”
박민정은 고개 들어 그를 빤히 쳐다봤다.
유남준은 그녀와 결혼한 지 3년 되는 남편일 뿐만 아니라 그녀가 무려 12년이나 쫓아다니며 좋아한 남자였다.
그런데 지금은...
박민정은 차오르는 씁쓸함을 꾹 짓누르고 엄마가 했던 말을 되새기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만약 좋아하는 사람 있으면 그분과 함께...”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유남준이 가로챘다.
“미친.”
...
인생은 결국 부단히 내려놓는 것이다.
유남준이 떠난 후 박민정은 홀로 베란다에 앉아 처량하게 흘러내리는 빗줄기를 넋 놓고 바라봤다.
그를 12년이나 좋아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그에 대해 아는 게 없다.
빗소리는 가끔 또렷하게 또 가끔은 어렴풋이 들렸다.
한 달 전, 의사 선생님이 이렇게 말씀하셨다.
“박민정 씨는 청신경과 중추에 병변이 생겨 현재 청력이 다시 감퇴했습니다.”
“다른 치료 방법은 없는 건가요 선생님?”
의사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장기간의 신경성 청력 저하로 뚜렷한 약물치료 효과가 없어요. 청력 재활을 위해 보청기를 계속 착용하시길 제안합니다.”
박민정은 의사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 아무런 치료 방법도 없다는 뜻이었다.
보청기를 빼면 그녀의 세상은 온통 고요한 정적이다.
그녀는 이런 조용한 세계가 적응되지 않아 거실로 나와서 TV를 켰다.
볼륨을 최대치로 올리면 겨우 조금 들리는 수준이다.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TV를 켜자마자 세계적인 발라드 여왕 이지원의 인터뷰 장면이 나왔다.
리모컨을 들고 있던 박민정의 손이 움찔거렸다.
다름이 아니라 이지원은 한때 유남준의 첫사랑이다.
몇 년 만에 보는 데도 그녀는 여전히 예뻤다.
이지원은 이젠 카메라 앞에서 더할 나위 없이 자연스러웠다. 애초에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으려고 애쓰던 수줍고 열등감 넘치는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기자가 귀국 이유를 묻자 그녀는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대범하게 말했다.
“제 첫사랑을 다시 만나려고요.”
손에 쥐었던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졌고 박민정의 마음도 철썩 내려앉았다.
창밖의 빗소리도 점점 더 켜졌다.
그녀는 솔직히 두려웠다. 이지원이 유남준을 뺏어갈까 봐 너무 두려웠다.
그해 박씨 일가의 보배 따님이었을 때도 그녀는 아무 배경 없는 이지원을 제치지 못했다.
그런데 지금 이지원이 세계적인 발라드 여왕으로 거듭나서 밝고 자신감이 흘러넘치니 더더욱 비할 바가 못 된다.
박민정은 횡설수설 TV를 끄고 수저도 안 댄 아침밥을 치우러 갔다.
주방에 들어가 보니 유남준이 휴대폰을 놓고 나갔다.
그녀는 휴대폰을 챙기다가 부주의로 화면이 열렸는데 마침 읽지 않은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제2화
「남준 오빠, 그동안 잘 못 지냈죠? 그 여자 안 사랑하는 거 알아요. 우리 오늘 밤 만나요. 오빠 너무 보고 싶어요.」
휴대폰 화면이 어두워질 때까지 박민정은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택시 타고 유남준의 회사로 가는 길에서 박민정은 창밖을 물끄러미 내다봤다. 비는 그칠 새도 없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유남준은 그녀가 회사로 찾아오는 걸 별로 반기지 않는다. 올 때마다 박민정은 뒷문에 있는 화물 엘리베이터를 이용하니까.
유남준의 전담 비서 서다희도 그녀를 보더니 차갑게 말했다.
“오셨어요, 민정 씨.”
유남준의 주변 사람들은 아무도 그녀를 사모님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녀는 항상 떳떳하지 못한 존재니까.
박민정이 휴대폰 주러 회사까지 찾아오자 유남준은 미간이 확 구겨졌다.
그녀는 늘 이런 식이다. 점심 도시락, 서류, 옷, 우산까지 유남준이 놓친 걸 전부 회사로 보내온다.
“말했잖아, 일부러 내 물건 주러 회사 안 와도 된다고.”
박민정은 흠칫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미안해요, 깜빡했어요.”
언제 기억력이 이렇게 나빠졌지?
아마도 이지원이 보낸 문자를 보고 덜컥 겁이 나서 그랬나 보다.
유남준이 갑자기 사라지기라도 할까 봐...
떠나기 전 박민정은 고개 돌려 유남준을 바라보더니 끝내 참지 못하고 물었다.
“남준 씨, 아직도 이지원 씨 좋아해요?”
유남준은 요즘 들어 박민정이 참 이상했다.
자꾸 뭘 까먹지 않나, 이상한 질문만 해대질 않나, 그의 아내가 되기엔 턱없이 부족한 모습이었다.
유남준은 귀찮다는 듯이 대답했다.
“그렇게 심심하면 뭐라도 할 일 좀 찾아.”
박민정은 결국 정확한 대답을 듣지 못했다.
그녀도 전에 일자리를 구해봤지만 유씨 일가 어르신들이 그녀가 얼굴을 내비치면 가문의 체면만 깎는다고 단호하게 차단해 버렸다.
유남준의 어머니 고영란은 그녀에게 거리낌 없이 쏘아붙였다.
“너 정녕 온 세상에 알릴 생각이니? 우리 남준이가 청력에 문제 있는 장애인 아내를 찾았다고?”
장애인 아내라...
집에 돌아온 후 박민정은 최대한 바삐 돌아쳤다.
먼지 하나 안 날릴 정도로 집 청소를 깨끗이 해놨지만 여전히 쉬지 않고 구석구석 닦았다.
이렇게 해야만 마지막 남은 일말의 가치라도 느낄 수 있으니까.
오늘 오후엔 유남준의 문자가 없었다.
보통 이런 상황이라면 화났거나 매우 바쁘거나 둘 중 하나이다...
밤이 깊어졌지만 박민정은 잠이 오지 않았다.
침대 머리맡에 놔두었던 휴대폰이 갑자기 요란스럽게 울려댔다.
그녀는 휴대폰 화면을 쳐다봤는데 낯선 번호로 걸려 온 전화였다.
전화를 받자 달콤하면서도 늘 그녀를 불안감에 떨게 한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는 바로 이지원이다.
“민정 씨? 남준 오빠 취했어요. 지금 데리러 올 수 있나요?”
...
수호 클럽.
유남준은 메인 석에 앉아 넋 놓고 술을 퍼마셨다.
그의 옆엔 이지원이 앉아 있었고 한 무리 재벌가 도련님들이 그녀에게 노래 한 곡 불러 달라며 유난을 떨었다.
“지원 씨 이번에 우리 유 대표님이랑 잘해보려고 돌아온 거잖아요.”
“노래 한 소절로 우리 유 대표님한테 고백해 봐요.”
이지원은 예쁘고 개방적인 데다 유남준의 첫사랑이니 재벌가 도련님들은 모두 그녀와 유남준을 맺어주려고 한다.
이지원도 우물쭈물하지 않고 흔쾌히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을 불렀다.
“아직도... 너의 소리를 듣고 아직도 너의 손길을 느껴...”
그녀의 감미로운 목소리에 다들 조용히 노래를 감상했다.
박민정이 룸 문 앞에 도착했을 때 이지원이 막 한 곡을 다 불렀고 룸 안의 사람들은 유남준을 부추기기 바빴다. 그중에서도 절친 김인우의 목소리가 제일 컸다.
“남준아, 너 지원이 3년이나 기다렸잖아. 인제 드디어 돌아왔는데 무슨 말이라도 해야지. 여자인 지원이가 먼저 고백까지 했잖아.”
박민정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주먹을 꽉 쥐었다.
이때 마침 화장실로 가려던 한 남자가 룸 문을 열어젖혔다.
박민정이 넋 놓고 서 있는 모습에 그 남자도 화들짝 놀랐다.
“민정 씨.”
파티에 참석한 사람들이 전부 문 앞으로 시선이 쏠렸다.
순간 룸 안에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박민정은 메인 석에 앉은 유남준을 쳐다봤는데 맑은 눈빛은 전혀 취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지원에게 농락당한 걸 알아챘다.
유남준은 박민정을 보자 눈동자가 살짝 떨렸고 한창 유남준과 이지원을 엮어주려던 김인우를 비롯해 룸 안의 모든 이가 난처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자리는 박민정이 찾아오지 말았어야 했다.
“민정 씨, 오해하지 말아요. 인우 씨가 장난 좀 친 거예요. 저랑 남준 오빠는 그냥 친구 사이에요.”
이지원이 정적을 깨고 그녀에게 해명했다.
박민정이 대답하기도 전에 유남준이 짜증 섞인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명할 거 없어.”
그는 곧게 박민정 앞으로 다가왔다.
“여긴 왜 왔어?”
“취한 줄 알고 데리러 왔어요.”
그녀는 솔직하게 대답했고 이에 유남준은 차갑게 쏘아붙였다.
“오늘 내가 한 말은 한마디도 귀에 안 들어갔나 보네.”
그는 목소리를 내리깔고 오직 둘만 들을 수 있게 나지막이 되물었다.
“3년 전에 내가 감쪽같이 속은 걸 이 사람들이 모를까 봐 일부러 찾아와서 되새겨주는 거야?”
박민정은 흠칫 놀랐다.
유남준은 차가운 눈빛으로 계속 말을 이었다.
“실없이 존재감 드러내지 마. 너 이러는 거 점점 더 가증스러울 뿐이야!”
말을 마친 유남준은 그녀에게 등 돌리고 자리를 떠났다.
박민정은 그의 커다란 뒷모습을 한참 동안 넋 놓고 바라봤다.
오늘은 어쩌면 유남준이 그녀에게 말을 제일 많이 한 날이고 또한 그녀를 제일 아프게 한 날이기도 하다.
룸 안의 재벌가 도련님들은 버림받은 박민정을 전혀 안쓰러워하지 않았다.
김인우도 거리낌 없이 저쪽에서 불쌍한 표정을 짓는 이지원에게 말했다.
“지원아, 너는 너무 착해서 탈이야. 뭘 더 해명할 게 있다고... 박민정이 사기 결혼만 강행하지 않았어도 남준이는 너랑 결혼했어. 그럼 너도 굳이 머나먼 해외로 가서 그 고생을 하지 않았을 거고.”
박민정은 귓속이 윙윙거렸지만 그들이 한 말은 또박또박 다 들렸다.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
유남준이 자신과 결혼하든 안 하든, 그는 절대 아무런 집안 배경도 없는 이지원과 결혼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점은 이지원도 잘 알고 있기에 단호하게 이별을 택하고 머나먼 해외로 떠나갔다.
그런데 왜 인제 와서 모든 게 박민정의 잘못으로 전락한 걸까?
그녀는 두원 별장으로 돌아갔다.
늘 그렇듯 칠흑 같은 어둠이 드리워지고 그녀가 외출할 때 모습과 돌아왔을 때의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유남준은 아직이다.
박민정은 우산을 들고 문 앞에 서 있었는데 마치 암흑 속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그녀는 문득 영원히 홀로 있는 이 집안에 들어가고 싶지 않아 바깥 정자에 앉아서 찬바람과 스산한 빗줄기를 맞이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아름다운 실루엣이 그녀 앞에 나타났는데 바로 이지원이었다!
그녀는 화려하게 차려입고 하이힐 소리를 내며 박민정 옆에 와서 앉았다.
“밤이 참 춥네요. 한밤중에 남준 오빠 찾아갔다가 한바탕 농락당한 기분이 어때요?”
박민정은 묵묵히 들을 뿐 아무 대답이 없었다.
이지원은 신경 쓰지 않은 채 계속 제 말만 했다.
“그거 알아요? 처음에 나 민정 씨 엄청 부러워했어요. 집안 좋지, 자상하고 딸 아껴주는 아빠가 있어서 평생 아무 걱정 없이 살 수 있지. 근데 이젠 민정 씨가 너무 가엽네요. 남준 오빠 10여 년간 묵묵히 좋아했는데 정작 오빠는 민정 씨한테 곁을 아예 안 주잖아요.”
제3화
“아직 제대로 된 사랑도 못 해봤죠? 남준 오빠는 나랑 있을 때 밥도 직접 차리고 또 내가 아플 땐 제일 먼저 달려왔어요. 나한테 했던 가장 달콤한 말은 바로 ‘지원아, 난 네가 영원히 행복하길 바라’ 이 말이었어요... 오빠가 민정 씨한테는 사랑한다는 말 한 적 있어요? 전에 나한테 엄청 자주 했는데 그때마다 내가 오빠 유치하다고 항상 틱틱거렸거든요...”
박민정은 묵묵히 들으며 이 3년 동안 유남준과 함께한 나날들을 되새겨보았다.
그는 단 한 번도 음식을 차려본 적이 없다.
그녀가 아플 때 관심의 말 한마디조차 없다.
사랑한다는 말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박민정은 그녀를 바라보며 담담하게 물었다.
“할 얘기 다 했어요?”
이지원은 흠칫 놀랐다. 그녀가 너무 차분해서인지 아니면 그녀의 맑은 눈동자가 사람 마음을 훤히 꿰뚫어 볼 것만 같아서인지 이유는 알지 못했다.
그렇게 박민정이 떠난 후에야 정신을 가다듬었다.
왠지 모르게 이지원은 지금 이 순간 꼭 마치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던 가난한 고아 때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박씨 일가의 귀한 따님 뒤에서 이지원은 영원히 웃음 팔이 피에로 역할이었다.
...
박민정이라고 그녀의 말을 듣고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을까?
12년이나 좋아했던 남자인데, 한때 그녀도 아이처럼 누군가를 좋아했었는데, 순수한 마음으로 뜨겁게 사랑했었는데...
박민정은 문득 또다시 두 귀가 아파서 보청기를 빼내더니 그제야 선홍빛 핏물이 고인 걸 발견했다.
그녀는 습관처럼 보청기에 묻은 핏자국을 깨끗이 닦고는 옆에 내려놓았다.
잠이 오질 않아 휴대폰을 가져와 인스타그램을 열었는데 상단 스토리에 이지원 계정이 보란 듯이 초록색 테두리로 되어 있었다.
클릭해 보니 박민정을 ‘친한 친구 리스트’에 넣어 오직 그녀에게만 보여주는 사진들이었다.
첫 장은 대학교 때 이지원과 유남준이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둘은 나란히 서 있었고 유남준의 눈빛은 한없이 부드러웠다.
두 번째 장은 둘의 카톡 대화 내용을 캡처한 사진이었다. 유남준은 너무나도 상냥한 말투로 이렇게 말했다.
「지원아, 생일 축하해. 널 꼭 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여자로 만들어줄게.」
세 번째 장은 유남준과 이지원이 손잡고 나란히 모래사장을 걷는 뒷모습이었다...
네 번째, 다섯 번째, 여섯 번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사진들에 박민정은 숨이 꽉 막힐 지경이었다.
그녀는 감히 더는 뒤로 넘기지 못하고 얼른 휴대폰을 껐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 이젠 포기해야 해. 놓아줄 때가 됐어.’
이날, 박민정은 일기장에 이런 말을 적었다.
「난 원래 어둠을 견딜 수 있었어. 하지만 그건 빛을 보지 못한 전제하에서야.」
다음날 그녀는 습관적으로 일어나 아침밥을 차렸다.
하지만 6시가 다 돼도 유남준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제야 기억났다. 앞으로 집에 돌아와 아침을 먹지 않겠다고 했던 말.
유남준이 안 돌아올 줄 알고 그녀는 홀로 소파에 누워 스르륵 잠들었다.
“아침 안 차려도 된다고 했잖아.”
짜증 섞인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고 박민정은 화들짝 놀라서 눈을 떴다.
유남준은 시큰둥한 얼굴로 그녀에게 다가왔다. 그녀는 얼른 습관처럼 사과했다.
“미안해요, 깜빡했어요.”
또 깜빡했다는 말, 또 미안하다는 말...
유남준은 고개 돌려 싸늘한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오늘도 늘 똑같은 그레이 톤의 수수한 옷차림이었다.
마치 그가 돈 없어서 와이프를 막 대하는 것처럼 말이다.
“왜 집에 돌아오는 건 깜빡 안 해? 왜 나랑 결혼한 건 깜빡 안 해? 이참에 그냥 너 자신도 깜빡하지 그랬어? 아쉽겠지? 우리 집안 재산이 욕심나겠지! 돈 버는 기계인 날 놓치기가 싫겠지!”
그의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처럼 그녀 마음을 정처 없이 난도질했다.
박민정은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남준 씨, 난 한 번도 남준 씨 돈을 노린 적 없어요.”
그녀가 소중히 여기는 건 오직 유남준이란 사람 그 자체이다.
유남준은 야유 섞인 미소를 날렸다.
“그런데 너희 엄마가 오늘 아침 회사로 찾아와서 나한테 애 낳아달라고 부탁하는 거야? 앞뒤가 안 맞잖아.”
박민정은 어안이 벙벙했다.
한없이 싸늘하고 어두운 그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그제야 알아챘다. 유남준은 어젯밤 일로 그녀에게 화낸 게 아니었다.
유남준은 그녀와 쓸데없는 말을 떠벌리지 않았다.
“박민정, 너 우리 집에 무사히 있고 싶거든, 너희 집안 무너지지 않게 하고 싶거든! 너희 어머니더러 분수 지키라고 해.”
말을 마친 유남준은 서재로 가서 물건을 챙기고 옷을 갈아입고는 바로 집을 나섰다.
...
박민정이 한수민을 찾아가기도 전에 그녀가 불쑥 집으로 오더니 쌀쌀맞았던 이전 모습과는 달리 딸의 손을 잡고 다정하게 말했다.
“민정아, 남준이 찾아가서 아이 낳자고 빌어! 의학적인 수단을 빌려서라도 꼭 낳자고 해, 응?”
의학적인 수단이라!
박민정은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며 말을 계속 들었다.
“지원이가 이미 알려줬어. 이 3년 동안 남준인 널 단 한 번도 다친 적 없다며.”
참고 또 참았던 분노가 이 한마디에 전부 폭발해 버렸다.
이 세상에 절대적인 공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각자의 이익뿐!
유남준은 대체 왜 이런 말을 이지원에게 한 걸까?
그녀를 정말 너무 사랑해서?
여기까지 생각한 박민정은 해탈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엄마, 인제 그만 해요.”
한수민은 흠칫 놀라더니 미간을 구기고 그녀에게 물었다.
“뭐라고?”
“나 너무 지쳤어요. 남준 씨랑 이혼하고 싶어요...”
“찰싹!”
말을 채 끝내기도 전에 한수민이 그녀의 뺨을 가차 없이 내리쳤다.
자애로운 어머니상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두 눈을 부릅뜨며 딸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혼을 논해? 유씨 가문을 떠나면 너같이 온전하지 못한 이혼녀가 재혼할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너같이 쓸모없는 딸을 낳은 거야?! 넌 정말 하나도 나 안 닮았어. 이럴 줄 알았으면 널 데려오는 게 아닌데!”
박민정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어려서부터 한수민은 그녀를 싫어했다.
한수민은 유명한 무용가인데 난청인 딸 박민정을 낳은 게 평생의 한이 되었다.
그녀는 모질게 딸아이를 가정부에게 맡겼다가 학교 갈 나이가 돼서야 박씨 일가로 데려왔다.
박민정은 전에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이 세상에 제 자식을 싫어하는 엄마는 없다는 그 말.
그때부터 그녀는 더 우수해지려고 노력했고 엄마에게도 최대한 잘 보이려고 애썼다.
난청이지만 무용, 음악, 서예, 언어 등 장르마다 손꼽히는 성적을 거두었다.
그러다 결국 이제야 알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엄마의 마음속엔 영원히 좋은 딸이 못 된다는 걸.
엄마 말대로 그녀는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몸뿐만 아니라 가족도 사랑도 전부 다...
한수민이 떠난 후.
박민정은 파운데이션으로 얼굴에 난 선명한 손자국을 커버한 후 홀로 차 타고 로펌으로 갔다.
사무실 안.
박민정의 아버지가 생전에 고용했던 법무 장명철은 그녀가 건네준 위임장을 다 훑어본 후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너희 아빠가 몰래 네게 남겨주신 일부 유산을 정말 유남준에게 다 줄 거야? 잘 생각해 봐, 그 사람은 이까짓 돈이 부족하지 않아.”
박민정은 머리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이건 내가 빚진 거니까 갚아야죠 무조건.”
3년 전 박민정의 아빠 박형식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생전에 이미 세 개의 유언장을 작성했는데 한수민이 딸 민정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지 이 마지막 유언장은 사석에서 딸에게 전해주라고 장 변호사에게 당부했다.
마지막 유언장엔 박민정이 결혼한 3년 후, 만약 불행하다고 느껴지거나 본인만의 사업을 차려 남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을 때 이 유언장을 쓸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제4화
인제 보니 아빠는 유남준이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 걸 진작 알아챘나 보다.
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 유씨 일가와 계약을 체결했고 박민정도 소원대로 유남준에게 시집갈 수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두 사람이 결혼식도 올리기 전에 아빠가 갑작스럽게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만약 아빠가 돌아가시지 않았다면 남동생과 엄마도 계약을 위반하지 않을 텐데...
박민정은 재산 양도 수속을 전부 장 변호사에게 건넨 후 집에 돌아가는 길에 길옆에서 이지원의 홍보 포스터들을 보게 됐다.
포스터 속 그녀는 더없이 눈부시고 아름답고 해맑은 모습이었다.
‘이젠 놓아줄 때가 됐어. 남준 씨도 나도 자유를 되찾아야지.’
두원 별장에 도착한 그녀는 짐 정리를 마쳤다.
결혼한 3년 동안 그녀의 짐이라곤 고작 캐리어 하나에 다 들어갔다.
이혼합의서는 작년에 이미 장 변호사에게 부탁해 작성해달라고 했다.
유남준 앞에만 서면 한없이 작아지고 자괴감이 들고 마음이 약해진다.
그녀는 진작 알아챘다. 둘 사이의 감정은 조만간 끝이 닿는다는 걸, 그래서 일찌감치 떠날 채비를 했다...
저녁 시간, 유남준의 문자는 없었다.
박민정은 용기 내어 그에게 먼저 문자를 보냈다.
「오늘 밤 시간 돼요? 당신한테 할 얘기 있어요.」
상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답장이 없었다.
박민정은 어두운 얼굴로 생각했다.
‘이젠 문자로 답장하는 것조차 싫은가 보네. 내일 아침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지 어쩌겠어.’
그 시각 유앤케이 그룹 대표이사 사무실 안.
유남준은 문자를 확인하곤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았다.
절친 김인우가 소파에 앉아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끝내 못 참고 물었다.
“민정 씨 문자야?”
유남준이 묵인했고 김인우는 거리낌 없이 비난해 댔다.
“이 귀머거리가 진짜! 제가 정말 유씨 가문의 사모님이라도 된 줄 아나? 어딜 감히 남편을 감시해? 남준아, 너 설마 걔랑 평생 시간 끌려는 건 아니지? 박씨 일가는 인제 아무것도 아니야. 걔 남동생 박민호는 회사도 운영할 줄 모르는 바보 멍청이라고. 얼마 안 가 박씨 가문이 그대로 망할걸. 걔네 엄마는 또 밑 빠진 독이지!!”
유남준은 담담한 얼굴로 그의 말을 들었다.
“알아 나도.”
“근데 왜 이혼 안 해? 지원이는 여태껏 너만 기다렸어.”
김인우가 초조하게 물었다.
단순하고 또 항상 노력하는 이지원은 약아빠진 박민정보다 몇 배는 더 나은데, 김인우는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이혼 얘기에 유남준은 침묵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김인우가 못 참고 물었다.
“너 설마 박민정한테 정든 건 아니지?”
정든다고?
유남준은 경멸의 미소를 날렸다.
“걔가 그럴 자격이나 돼?”
그는 인수합병 계약서 한 부를 김인우에게 건넸다.
이를 본 김인우는 입이 쩍 벌어졌다.
‘유남준, 너 진짜 독하다 독해!’
그는 단지 유남준과 박민정이 이혼하길 바랐지만 절친 남준이가 바움 그룹을 단번에 인수할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그리고 그 순간, 뜻밖에도 박민정이 살짝 안쓰럽게 느껴졌다.
부부로 3년을 지내오며 박민정이 유남준에게 얼마나 잘해주는지는 눈이 달린 사람이라면 다 안다.
유남준은 무자비하기 그지없고 박민정을 전혀 사랑하지 않는 것도 팩트이다!
...
그가 안 돌아올 줄 알았는데 새벽 12시에 두원 별장으로 돌아왔다.
박민정은 아직 안 자서 재빨리 그를 마중 갔다. 그녀는 숙련된 솜씨로 그의 외투와 서류 가방을 넘겨받았다.
일련의 행동은 보통 부부들과 별다를 게 없었다.
“앞으론 함부로 문자 보내지 마.”
유남준의 쌀쌀맞은 목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트렸다.
그녀는 일도 안 하고 종일 집에 있으면서 굳이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박민정은 외투를 옷장에 걸다가 손이 파르르 떨렸다.
“네, 앞으론 더는 그런 일 없어요.”
유남준은 그녀의 말뜻을 알아채지 못하고 곧게 서재로 향했다.
몇 해 동안 그는 돌아오면 대부분 시간을 서재에서 보낸다.
두 사람은 분명 한 지붕 아래에 있지만 박민정은 늘 혼자였다.
어쩌면 유남준은 청각장애인의 세계가 늘 조용하다고 생각할지도, 또 혹은 아예 그녀를 신경 쓰지 않거나 둘 중 하나일 듯싶다.
서재로 들어간 후 유남준은 하던 대로 비즈니스 업무를 상의했고 그 내용은 바움 그룹 인수합병 건이었다...
박민정도 늘 그랬듯 위를 따뜻하게 해주는 차 한 잔 타왔고 그가 부하 직원에게 명령하는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이 들었다.
동생 박민호가 무능해서 바움 그룹은 조만간 이날을 맞이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바움에 제일 빨리 손 쓴 자가 남편일 줄이야.
“남준 씨.”
그녀의 부름에 유남준은 하던 말을 멈췄다.
그는 가슴이 찔렸는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지 흠칫 놀라더니 재빨리 온라인 통화를 마치고 노트북도 접었다.
박민정은 일부러 그의 동작을 못 본 듯 가까이 다가와 케모마일 차 한 잔을 그의 앞에 내려놓았다.
“남준 씨, 차 마시고 일찍 쉬어요.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에요.”
왠지 모르게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유남준의 긴장했던 마음을 조금 풀어주었다.
그녀는 듣지 못했겠지. 만약 들었다면 분명 한바탕 소란을 피웠을 테니까!
미안함 때문인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유남준은 떠나가는 그녀를 불러세웠다.
“할 얘기가 뭐야?”
박민정은 더없이 익숙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말했다.
“오늘 오전에 시간 돼요? 우리 함께 가정법원 가서 이혼 신청해요.”
그녀의 목소리는 잔잔한 바람처럼 차분하게 울려 퍼졌다.
마치 평상시 흔하디흔한, 아주 사소한 일을 말하듯 이혼을 언급했다.
유남준의 눈빛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박민정에게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어?”
결혼생활 3년 동안 그가 아무리 도가 지나친 일을 해도 박민정은 이혼을 언급한 적이 없다.
사실 유남준도 알고 있다. 그녀는 유남준을 정말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이전에 두 집안이 이웃으로 지낼 때부터 이 어린 소녀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가 무려 십여 년 동안 자신만 좋아한 것도 잘 안다.
그런데 그녀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박민정의 퀭했던 두 눈이 지금 이 순간 더할 나위 없이 영롱하게 빛났다.
“남준 씨, 그동안 당신 시간을 너무 지체했어요. 우리 이만 이혼해요.”
유남준은 양옆에 내려놓았던 손이 저도 몰래 움찔거렸다.
회사에서 김인우가 이혼하라고 다그칠 때도 그는 아무 말 없었는데 박민정이 먼저 얘기를 꺼내다니, 대체 그녀가 무슨 자격으로?
“방금 너도 들었지? 바움은 이젠 말로에 세워졌어. 내가 따오거나 딴 사람이 따가거나 뭐가 다른데? 이혼 얘기는 대체 왜 꺼내는 거야? 아이 때문이야 아니면 돈 때문이야? 그것도 아니면 지금 나더러 바움에서 손 떼라고?”
유남준이 차갑게 쏘아붙였다.
“잊지 마. 난 널 사랑한 적 없어. 이런 협박 따위 나한테 안 통해.”
박민정은 이혼으로 협박할 뿐 절대 이혼할 엄두가 안 날 것이다. 그는 그렇게 굳게 믿었다.
박씨 일가가 감히 이혼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녀는 더더욱 못하겠지!
박민정은 순간 눈앞의 유남준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녀는 목이 뻣뻣함과 동시에 귀가 아프기 시작했다. 보청기를 착용했지만 그가 뭐라 말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제멋대로 이해하고 방금 그의 질문에 대답했다.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유남준이 이상한 낌새라도 눈치챌까 봐 그녀는 얼른 서재를 나섰다.
떠나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유남준은 전례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딴 사람 때문에 감정 조절을 못 하고 책상을 뒤집는 일이 없는데...
그녀가 방금 따라온 케모마일 차가 바닥에 쏟아져 흥건해지고 책상 위에 놓였던 서류들도 바닥에 널브러졌다.
...
제5화
박민정은 제 방으로 돌아가 약을 한 움큼씩 퍼먹었다.
귓등을 만져보니 손끝에 피가 잔뜩 묻어나왔다.
순간 의사의 당부가 뇌리를 스쳤다.
“박민정 씨, 사실 많은 질병의 악화는 환자의 기분과 관련이 있어요. 반드시 정서적 안정을 유지하고 낙관적인 태도로 치료에 적극 협조해야 합니다.”
낙관적이라, 말이 쉽지.
박민정은 최대한 유남준의 말을 되새기지 않으려고 베개에 머리를 파묻고 두 눈도 질끈 감았다.
날이 어렴풋이 밝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잠들지 못했다.
약이 작용했는지 청력도 조금은 회복됐다.
그녀는 창밖에 쏟아지는 햇빛을 넋 놓고 한참 바라봤다.
“비 그쳤네.”
한 사람을 포기하게 만드는 원인은 단 한 가지만이 아니다.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많이 쌓이다가 결국 사소한 일로 폭발하게 된다. 그건 차가운 말 한마디가 될 수도 있고 아주 사소한 일이 될 수도 있다.
오늘 유남준은 외출하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소파에 앉아 박민정이 사과하고 후회하길 기다렸다.
결혼생활 3년 동안 그녀도 종종 화낼 때가 있었다.
하지만 매번 울고 난 후 얼마 가지 않아 바로 사과했다.
이번에도 별다를 것 없다고 굳게 믿는 유남준이다.
박민정은 세안을 마치고 평소처럼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나왔는데 캐리어와 서류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가 서류를 건넨 순간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라는 몇 글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남준 씨 시간 될 때 연락해요.”
그녀는 담담하게 이 한마디만 내뱉고는 캐리어를 끌고 문밖을 나섰다.
비가 그치고 하늘이 맑게 갰다.
박민정은 그 순간 마치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유남준은 이혼합의서를 손에 쥐고 소파에 앉은 채 온몸이 돌처럼 굳었다.
그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
박민정의 뒷모습까지 눈앞에서 사라진 후에야 그녀가 떠났다는 걸 알아챘다.
다만 그 답답함도 한순간일 뿐, 그는 곧장 차가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가 집 나간 걸 아예 신경 쓰지 않는 듯싶다.
어차피 그의 전화 한 통, 말 한마디이면 박민정은 얌전히 옆에 돌아와 여느 때보다 살갑게 대할 테니까.
이번에도 분명 그런 거겠지.
오늘은 청명절 이후의 주말이다.
왕년 이맘때면 유남준은 그녀를 데리고 본가에 돌아가 조상님께 제사를 지냈다.
유씨 일가의 친척들은 항상 이상한 눈길로 두 사람을 쳐다봤는데 올해는 홀로 가게 되어 신난 마음으로 운전하며 본가로 향했다.
봄바람을 맞으면서 집으로 가니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다.
유씨 가문은 대가족이다. 매년 이맘때면 많은 친척들이 본가에 돌아와 제사를 지낸다. 방계 친척까지 합치면 적어도 5, 6백 명 남짓이다.
유남준과 동년배인 젊은이만 해도 7, 80명 되는데 그중에는 뛰어난 인재도 많다.
유남준은 그들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유씨 일가의 조타자가 되었으니 당연히 평범한 사람일 리는 없다.
강압적인 기세와 압도적인 카리스마, 무자비한 수단까지, 동년배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모두 그를 두려워하고 있다.
두려운 건 두려운 거고 사석에서 쉬쉬거리는 것도 면할 순 없다.
한때 신에게 선택받은 자라고 불린 유남준이 사기 결혼으로 난청의 장애인 아내와 결혼했으니까...
옛 저택에서.
유남준의 엄마 고영란은 일찌감치 사용인들에게 분부했다.
“잘 들어, 민정이 오면 절대 객실로 들이지 마.”
제사를 지낼 때 장손의 아내가 반드시 참석해야 한다는 유씨 가문의 규정만 아니면 그녀는 박민정이 모습을 드러내는 걸 허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박민정이 아예 안 왔다.
제사를 지내는 뭇사람들도 의아할 따름이었다. 왕년 이맘때면 장손 며느리 박민정이 항상 제일 먼저 왔다가 마지막에 나가며 모든 이에게 살갑게 대했는데 오늘은 아예 안 온 건가?
고영란과 몇몇 사모님들은 즐겁게 수다를 떨다가 박민정이 안 왔단 얘기에 예쁜 눈썹이 확 구겨졌다.
유씨 가문 조상님께 제사를 지내는 큰 행사에 그녀가 오고 싶으면 오고 안 오고 싶으면 안 오는 걸까?
고영란은 아들 곁에 다가가 다정하게 물었다.
“남준아, 민정이는?”
유남준이 몇몇 소꿉친구들과 담소를 나누다가 순간 두 눈이 싸늘해졌다.
“이혼하겠다며 집 나갔어요.”
말이 떨어진 순간 주위에 있던 모든 이가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장내에 싸늘한 정적이 흘렀고 그중에서 가장 충격받은 사람은 고영란이었다.
이 세상에서 유남준을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부모님을 제외하곤 박민정뿐이다.
7년 전 누군가가 유남준을 칼로 찌르려 했고 그때 박민정이 목숨을 내걸고 그를 구해줬다.
4년 전 두 사람이 약혼을 마친 후 유남준은 사업차 두바이로 떠났는데 불의의 사고를 당했다.
모두가 그를 죽었을 거로 여길 때 오직 박민정만이 포기하지 않고 두말없이 그를 찾아 나섰다.
낯선 도시에서 그녀는 무려 3일 동안 헤매다 끝내 그를 찾았는데 돌아온 건 유남준의 질책뿐이었다. 왜 오지랖 넓게 여기까지 찾아오냐고 잔소리만 해댔었다...
결혼 후에도 몸이 아파 병원에 입원하거나 평소 의식주행 또 혹은 유남준 주변의 모든 사람들에게 조심스러웠다. 그의 비서에게도 혹여나 심기를 건드릴까 봐 전전긍긍했었다.
이토록 유남준 없이는 못 사는 박민정이 글쎄 아빠가 돌아가신 후 이혼서류를 건네며 그의 곁을 떠나려 한다.
아니 대체 왜?
고영란은 이해되지 않지만 그녀가 제 아들을 놓아주니 참 다행이었다.
“그런 애는 어디 내놓기도 부끄러워. 이혼도 좋은 선택이야. 우리 남준이한테 가당키나 해?”
고영란이 입을 열자 다른 사람들도 한마디씩 덧붙였다.
“맞아요, 남준 오빠처럼 유능한 인재가 이제 한창 승승장구할 때인데 민정이 때문에 얼마나 지체됐는지 몰라요.”
“난 민정이 볼 때마다 부잣집 따님이긴커녕 수양도 없고 기품도 없고 거기에 귀머거리이니 남준 씨가 여태껏 데리고 산 것만으로도 만족해야죠.”
“...”
제사는 어느덧 박민정 험담 파티로 변했다.
그녀가 대역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고영란을 비롯한 모두가 잊었나 보다. 애초에 박형식이 살아계실 때, 유남준이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던 시절, 얼마나 많은 재벌가 도련님들이 박민정과 결혼하지 못해 안달이었던가.
게다가 두 집안의 정략결혼도 유씨 일가에서 먼저 꺼냈었다.
전에는 유남준이 있어서 다들 뒤에 숨어 박민정을 험담했는데 이번엔 대놓고 맹비난이다.
유남준은 응당 기뻐해야 하는데 왠지 모르게 이 목소리들이 귀에 거슬렸다.
제사를 마친 후 그는 서둘러 차를 몰고 옛 저택을 떠났다.
두원 별장으로 돌아오니 날이 어둑해졌다.
유남준은 문을 열고 들어와 습관처럼 외투를 벗어 현관에 내던졌는데 한참이 지나도 그를 맞이하는 사람이 없었다.
고개 들어 칠흑같이 어두운 거실을 보고 나서야 박민정이 떠난 게 생각났다...
그는 귀찮은 표정으로 외투를 다시 집어 들고 슬리퍼로 갈아신은 후 또다시 외투를 세탁기에 버렸다.
오늘은 왠지 유독 피곤한 하루였다.
유남준은 술 저장실에 가서 술 한 병 꺼내 박민정이 집 나간 걸 축하하려 했는데 저장실 문 앞에 도착하니 문이 굳게 닫혔다.
‘열쇠가 없네!’
유남준은 외부인이 집에 들어오는 걸 꺼려 별장엔 시간제 알바 외엔 고정된 가정부나 사용인을 안 둔다.
박민정이 시집온 후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방으로 돌아가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술 저장실 열쇠가 안 보였다.
그는 짜증 섞인 얼굴로 휴대폰을 열었다.
제6화
업무상의 문자 말곤 지금까지 꼬박 하루가 지났는데 박민정은 그에게 사과의 전화나 문자 한 통도 없다.
“언제까지 참는지 두고 봐!”
유남준은 휴대폰을 옆에 내던지고 자리에서 일어나 주방으로 걸어갔다.
냉장고 문을 연 순간 그는 어안이 벙벙했다.
음식 외에 갖가지 한약들이 들어 있었는데 대충 하나 꺼내 보니 ‘불임 치료, 1일 5팩’이란 문구가 적혀 있었다.
불임 치료...
유남준은 고약한 한약 냄새를 맡으며 전에 박민정의 몸에서 났던 약 냄새가 이 한약이란 걸 깨달았다.
그는 속으로 차갑게 웃었다.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제아무리 약을 먹는다고 임신이 될까?
유남준은 가차 없이 약을 내던지고 인제야 그녀가 화난 연유를 알 것만 같아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침실로 들어간 그는 푹 휴식을 취했다.
박민정이 없으니 앞으론 돌아오고 싶을 때 마음껏 돌아와도 된다, 일부러 그녀를 피하지 않아도 된다.
그날 밤 유남준은 아주 잘 잤다.
오늘은 절친 김인우와 함께 골프 치러 가는 날이다.
하여 아침 댓바람부터 옷방에서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거실에 나왔는데 습관처럼 오늘 집에 안 온다는 말이 튀어나왔다.
“나 오늘...”
박민정은 이젠 집에 없다. 앞으론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할 필요도 없다.
골프장.
유남준은 한껏 들뜬 마음으로 흰색 운동복을 입고 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오늘따라 더 자상해 보였다.
훤칠한 체구에 골프장에 서 있으니 영화배우를 방불케 했다.
스윙 한 번에 홀인원이다.
절친 인우가 옆에서 칭찬을 남발했다.
“남준이 오늘 컨디션 좋은데. 너 무슨 좋은 일 있어?”
박민정이 유남준과 이혼하려는 일은 어제에 걸쳐 주변 사람들이 거의 다 아는데 김인우가 모를 리 있을까?
그저 유남준의 입으로 한 말을 직접 들어야 진작 밖에서 기다린 이지원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있으니 슬쩍 떠본 것이다.
유남준은 물 한 모금 마시고 넌지시 대답했다.
“별거 없어. 그냥 민정이랑 이혼하려고.”
두 귀로 직접 들었지만 김인우는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유남준의 절친으로서 그는 박민정을 너무 잘 안다. 가녀린 척, 착한 척만 해대면서 남준이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천한 년!
이혼할 수 있다면 진작 했겠지, 뭣 하러 3년이나 버텼을까?
“그 귀머거리가 해주겠대?”
김인우의 물음에 유남준의 두 눈이 확 어두워졌다.
“걔가 먼저 하자고 했어.”
김인우가 하찮다는 듯이 웃었다.
“홀리는 수작이네. 이런 여자들 나 너무 많이 봐왔어.”
그는 또다시 배시시 웃으며 유남준에게 말했다.
“그래서 말인데 남준아, 오늘 내가 이벤트 하나 준비했는데.”
유남준이 의아해할 때 김인우가 이지원에게 문자를 보냈다.
곧이어 멀지 않은 곳에서 연핑크 색 운동복 차림에 예쁘게 치장한 이지원이 유남준을 향해 손짓했다.
그녀는 곧장 두 사람 앞으로 걸어왔고 김인우가 눈치껏 자리를 피했다.
“두 사람 얘기 나누고 있어. 난 이만 빠질게.”
그가 떠난 후 이지원은 유남준에게 함께 좀 걷자고 제안했다.
골프장을 나서니 한때 다녔던 두 사람의 대학교가 저 앞에 보였다.
남자를 잘 아는 이지원이기에 박민정 얘기를 꺼내지 않고 둘만의 추억을 되새겼다.
“오빠 이 길 기억나요? 전에 우리 사귈 때 자주 걸었었잖아요. 그때 오빠가 내 손 꼭 잡고 영원히 걸어가자고 했는데.”
여기까지 말한 이지원은 문득 걸음을 멈추고 유남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오빠, 계속 내 손 잡고 걸어갈 수 있어요?”
손이 닿은 순간 유남준이 본능적으로 피했고 이지원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유남준은 담담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지나간 일은 이젠 기억 안 나.”
공부하고 연애하고 결혼하고 일하기까지...
유남준에겐 그저 인생에 반드시 거쳐야 할 일일 뿐 미션 수행과 별다를 게 없었다.
첫사랑도 마찬가지였다!
이지원의 눈시울이 빨개졌다.
“아직도 나 원망해요? 그땐 나도 어쩔 수가 없었어요. 오빠 떠날 생각 없었다고요. 나 오빠 사랑해요, 아주 많이... 이 몇 년 동안 내가 어떻게 견뎌왔는지 알아요? 우리의 추억을 회상하며 더 우수해져야지, 더 나아진 모습으로 돌아와서 오빠에게 어울리는 여자가 되어야지 하면서 수없이 되뇌었다고요.”
유남준의 정교한 눈썹이 문득 일그러졌다.
“난 이미 결혼했어.”
“알아요, 민정 씨가 오빠랑 이혼할 거잖아요.”
이지원이 계속 말을 이었다.
“오빠를 내게 돌려줘서 민정 씨한테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눈물이 또르르 흘러내렸고 저도 몰래 팔을 벌려 유남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그거 알아요? 나 민정 씨 너무 미워. 진짜예요. 민정 씨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갈라져 있은 거잖아요.”
사람들은 흔히들 지난 일을 잊는 듯싶다.
이지원이 애초에 먼저 유남준과 헤어지고 박민정이 그 후에 유남준과 약혼했다. 이지원은 이 일을 깜빡하고 있었다.
박민정, 박민정...
유남준의 머릿속에 그녀의 온화한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녀는 아빠가 돌아가신 후 울먹이며 유남준에게 물었다.
“남준 오빠, 나 안아줄 수 있어요?”
하지만 바로 그때 박민정의 남동생 박민호가 두 사람의 정략결혼 조건을 전부 무너뜨리고 유남준이 박씨 일가에 준 돈과 박씨 일가가 유씨 일가에 준 모든 것까지 본인이 통째로 삼켰다.
하여 유남준은 매정하게 돌아서며 위로의 말조차 건네지 않았다.
머릿속을 맴도는 박민정의 가여운 모습에 유남준은 저도 몰래 이지원을 뿌리쳤다.
이지원이 뭐라 더 말하려 했지만 김인우가 재빨리 달려왔고 그녀도 그제야 눈물을 멈췄다.
김인우는 뭔가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지만 여전히 수중의 서류를 유남준에게 건넸다.
“남준아, 이거 봐.”
펼쳐보니 재산양도 협의서였다.
“민정 씨가 변호사 통해서 보내온 거야. 너희 두 사람 3년 동안 결혼생활에 대한 보상이래.”
보상?!
김인우는 본인이 말하고도 믿기지 않았다. 박민정이 유남준에게 위자료를 얻어내려고 급하게 집 나간 줄 알았는데 이게 대체 웬일인가?
유남준도 서류를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박민정이 재산을 전부 그에게 양도한다는 내용이었다.
이럴 수가!
맨 마지막에 적힌 재산양도 금액 100억을 본 순간 실소가 새어 나왔다.
‘박민정, 너 대체 날 뭐로 본 거야?’
“고작 100억으로 박씨 가문을 내 손에서 빼내려고? 이 돈이면 내가 용서해 줄 거라고 여긴 거야?”
유남준은 김인우와 이지원 앞에서 대놓고 맹비난을 해댔다.
김인우도 그제야 알아채고 따라서 피식 웃었다.
“귀머거리가 종일 무고한 척하더니 몰래 100억이나 숨겨뒀네. 걔 남동생이랑 밑 빠진 독 같은 걔네 엄마는 이 사실 알아?”
옆에 있던 이지원은 김인우와 유남준이 박민정을 능멸하는 걸 빤히 지켜봤다.
남준 오빠가 민정이를 좋아할까 봐 걱정했는데, 어쨌거나 그 둘은 결혼한 지 3년이나 되었으니... 하지만 인제 보니 결혼 3년이 아니라 평생을 가도 유남준처럼 우수한 남자는 잔잔한 호수 같은 박민정에게 마음을 줄 리가 없다.
박민정은 아예 그녀의 라이벌로 될 자격이 없다.
...
그 시각 어두컴컴한 모텔 안.
박민정이 비몽사몽 눈을 떴는데 머리가 엄청 아프고 주위가 유난히 조용했다.
병세가 악화하였다는 걸 그녀는 바로 알아챘다.
제7화
이전 같으면 보청기를 착용하지 않아도 미세한 소리가 들렸으니까.
박민정은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 머리맡에 둔 쓰디쓴 약을 입에 물었다.
어제는 3년 동안 지낸 두원 별장에서 나와 먼저 본가로 돌아갔는데 문 앞에서부터 엄마와 동생 박민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왜 저런 쓸모도 없는 딸을 낳았지? 3년 동안 남준이가 글쎄 걔를 건드리지도 않았대! 온전한 여자도 아닌 주제에 이혼할 생각까지 해?”
분노에 찬 한수민의 말이 예리한 칼날처럼 박민정의 심장을 난도질했다.
엄마 눈엔 대체 어떤 여자만이 온전한 사람일까? 박민정은 알지 못했다.
남편에게 사랑받는 여자? 혹은 아이를 낳아 키우는 여자?
동생 박민호의 말이 더 한심했다.
“누나는 우리 집안 사람 같지 않다니까요. 다들 그러는데 유남준 첫사랑이 돌아왔대요. 누나가 이혼 안 해도 조만간 그 집에서 내쫓길 거라고요. 그럴 바엔 차라리 뒷일을 고려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얼마 전에 최명길 대표의 아내분이 돌아가셨잖아요. 우리 누나가 비록 청력에 문제 있긴 하지만 80이 넘은 영감탱이에겐 횡재나 다름없죠...”
박민정은 그 말들을 되새기며 두 눈이 퀭해졌다.
그녀는 애써 단념하려고 휴대폰을 꺼냈는데 문자가 한 통 와 있었다.
유남준인 줄 알았는데 열어보니 장 변호사님이라고 적혀 있었다.
「민정아, 양도협의서를 유남준 씨한테 보내줬는데 태도가 썩 친절치 못했어. 앞으로 더 조심하는 게 좋을 거다.」
박민정은 장명철에게 답장을 보냈다.
「수고하셨어요, 명심할게요.」
문자를 보낸 후 그녀는 한참 넋 놓고 있었다.
자신에게 남은 얼마 안 되는 재산을 전부 유남준에게 준 건 얼마나 고상해서가 아니다.
단지 그에게 너무 많이 신세 지고 싶지 않았을 뿐이다...
결혼 전의 계약서대로 거액의 재산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하는 게 참 유감스러웠다. 아마 평생 결혼 사기죄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가야 할 듯싶다.
박민정은 이틀 동안 아무것도 안 먹어도 전혀 배고픈 줄 몰랐다.
그저 주위가 너무 조용하니 이런 정적이 두렵게 느껴졌다.
보청기도 꼈고 약도 먹었는데 왜 여전히 아무것도 안 들릴까?
유남준이 전화 와서 이혼하러 갈 날짜를 정할 때도 지금처럼 안 들릴까 봐 너무 걱정됐다.
박민정은 택시 타고 근처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았다.
의사가 기초적인 검사를 해봤는데 뜻밖에도 그녀의 외이도에 피가 말라붙어버렸다.
그날 재활 치료를 받고 나서야 청력이 겨우 회복됐다.
“어떻게 된 거죠? 병을 앓은 지는 얼마나 되셨어요?”
박민정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태어날 때부터 난청이었어요.”
의사는 이제 스무 남짓한 꽃다운 소녀를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안에 들어올 때 그녀가 이런 병에 걸렸다는 걸 전혀 알아보지 못했으니까.
의사는 애석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박민정 씨, 솔직하게 말씀드릴게요. 이 병 이대로 가다가 정말 청력을 잃을지도 모릅니다. 그땐 보청기를 쓰셔도 아무 소용 없어요.”
박민정의 눈가에 희망이라곤 찾아볼 수 없었고 목에도 큰 돌멩이가 낀 것처럼 아무 말도 안 나왔다.
그녀가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자 의사가 문 쪽을 바라봤다.
“혼자 오셨어요? 가족이나 친구는 함께 안 왔어요?”
가족?
그녀를 싫어하는 엄마와 다 늙은 영감에게 시집보내려는 남동생, 그리고 3년 동안 쭉 그녀를 증오해 온 남편 유남준까지, 한 사람씩 뇌리를 스치더니 결국 아빠가 돌아가시기 직전에 지었던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 떠올랐다.
“아빠 못 가겠어. 어떻게 우리 민정이 두고 떠나?”
그때 박형식은 교통사고를 당해 전신에 각종 의료기기를 꼽고 있었고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에 시달렸지만 한사코 눈 감으려 하지 않았다.
그가 떠나면 민정이에겐 더 이상 가족이 없으니까...
박민정은 쓰디쓴 마음을 뒤로한 채 결국 의사에게 말했다.
“돌아가셨어요.”
...
병원을 나서니 밖에 또다시 가랑비가 내렸다.
진주시는 올해 왕년보다 비가 더 잦았다.
병원 문 앞에 사람들이 삼삼오오 거닐었는데 유독 박민정만 혼자였다.
그녀는 빗속을 정처 없이 걸었다.
앞으로 청력을 잃을 수 있단 생각에 그녀는 시골로 내려가는 차표를 사서 줄곧 자신을 돌봐왔던 가정부 은정숙의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니 어느덧 밤 9시가 다 되어갔다.
박민정은 오래된 벽돌집 앞에 서서 한참 망설이며 문을 두드리지 못했다. 그동안 유남준을 챙기느라 매번 성급하게 은정숙을 뵙고 왔다.
노크할까 말까 머뭇거리고 있을 때 안에서 누군가가 문을 열었고 따뜻한 빛줄기가 쏟아져 나왔다.
은정숙은 그녀를 보자 온화한 얼굴에 웃음꽃이 만개했다.
“민정아...”
은정숙의 따스한 미소를 본 순간 박민정은 코끝이 찡해졌다. 그녀는 두 팔 벌려 은정숙을 꼭 끌어안았다.
“아줌마...”
은정숙은 건강상의 이유로 여태껏 결혼도 안 했고 아이도 없다.
박민정에게 그녀는 친엄마보다 더 가까운 존재이다.
은정숙은 마치 그녀의 아픔과 슬픔을 감지했는지 가볍게 어깨를 토닥였다.
“우리 민정이 무슨 일 있어?”
박민정은 나약한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다.
저번에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말고는 이번이 처음이다.
박민정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그냥 아줌마가 보고 싶어서, 너무 보고 싶어서 뵈러 왔어요...”
은정숙은 그녀가 말하길 꺼리니 더 캐묻지도 않았다.
“아줌마도 우리 민정이 많이 그리웠어.”
은정숙은 온몸이 흠뻑 젖은 그녀를 얼른 집안으로 데려와 따뜻한 물에 샤워시켰다.
그날 밤.
박민정은 은정숙의 품에 안겨 마치 어릴 때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은정숙은 그녀를 안고 보니 너무 말라서 뼈밖에 안 남았다는 걸 알아챘다.
뼈가 다 만져지는 민정의 등에 손을 올려놨다가 저도 몰래 파르르 떨려서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민정아, 남준이는 지금도 잘해줘?”
그녀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유남준 석 자를 듣는 순간 박민정은 목이 꽉 메었다. 늘 그랬듯 아줌마를 속이며 남준 씨가 엄청 잘해준다고 거짓말을 둘러대려 했지만...
아줌마도 결코 어리석지 않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다.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더는 저 자신을 속이고 또한 자신을 아껴주는 사람들을 속일 필요가 없다.
“남준 씨가 좋아하는 사람이 돌아왔어요. 그래서 이만 놓아주려고요. 남준 씨랑 이혼할 생각이에요.”
은정숙은 화들짝 놀라서 못 믿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때 박민정은 유남준과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오래오래 살겠다고 그녀에게 수없이 말했었다.
은정숙은 아무 말 없었고 박민정은 그녀를 꼭 껴안았다.
“아줌마, 나도 아줌마처럼 살 수 있을까요?”
영원히 결혼하지 않고 영원히 외롭게 지내는 것.
유남준 말로 평생 외롭게 늙어가는 것 말이다.
사랑받을 수 있다면 누가 영원한 고독을 택하겠는가?
은정숙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았다.
“바보야, 그게 무슨 말이야. 네 인생은 아직 길어. 남준이를 떠난대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서 널 엄청 사랑해주고 아껴주는 삶을 살 거야.”
박민정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귓속에 윙윙대는 소리가 아줌마의 다독임을 그대로 뒤덮어버렸다.
짝사랑만 십몇 년째, 그녀는 누구보다 잘 안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게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인지.
이런 그녀를 대체 누가 또 사랑해 줄까? 사랑받을 자격이나 있을까?
눈물이 흘러내려 이불을 축축이 적셨다.
다음날.
박민정은 비몽사몽으로 눈을 뜨더니 왜 여기 있는지 어리둥절해졌다.
제8화
문 앞에서 은정숙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정이 깼어? 아줌마가 우리 민정이 제일 좋아하는 만두 빚었어. 식기 전에 얼른 먹어.”
은정숙의 목소리에 박민정은 서서히 기억났다.
두원 별장에서 나오고 병원 가서 병 보인 후 마지막으로 아줌마 보러 왔었지.
그녀는 머리를 살짝 내리쳤다.
‘기억력은 왜 또 이렇게 나빠진 거야?’
이제 막 당혹스러워하며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잔꽃 무늬 침대 시트에 핏자국이 큼지막하게 나 있었다.
오른쪽 귀를 만졌더니 끈적끈적한 느낌이 들었고 손을 펼쳐보니 피로 흥건했다.
보청기도 빨갛게 물들었다...
박민정은 서둘러 티슈로 귀를 닦고 침대 시트도 전부 거둬냈다.
은정숙은 그녀가 내려올 기미가 없자 베란다로 올라갔다가 시트를 씻고 있는 박민정을 보았다.
“왜 그래?”
“생리 왔어요. 조심하지 않아 시트에 묻혔더라고.”
박민정이 웃으며 해명했다.
침대 시트를 다 씻고 아줌마와 함께 아침을 먹으며 잠시만의 평온함을 만끽했다.
은정숙의 목소리는 때론 똑똑히, 때론 어렴풋이 들렸다.
박민정은 너무 두려웠다. 앞으로 이 목소리도 못 들으면 어떡하지?
아줌마가 알고 나서 속상해하시면 어떡하지?
그녀는 이곳에서 반나절 더 있다가 저축한 돈 일부를 몰래 침대 머리맡에 숨겨두고 나서야 아줌마와 작별 인사를 했다.
떠나갈 때 은정숙은 그녀를 정거장까지 배웅하며 아쉬운 눈길로 손 흔들었다.
박민정이 떠나간 후에야 은정숙도 몸을 돌려 집으로 돌아갔다.
문득 앙상했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결국 유앤케이의 내선전화에 연락했다.
대표이사 사무실의 비서는 박민정 씨 가정부가 대표님을 찾으신다고 그대로 알려주었다.
오늘은 그녀가 집 나간 지 3일째 되는 날이고 유남준이 그녀에 관한 전화를 받은 첫날이다.
유남준은 사무실 의자에 앉아 기분이 째질 것만 같았다.
‘역시 3일을 못 버틴다니까.’
은정숙의 늙은 목소리가 전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유 대표님, 저는 민정이 어릴 때부터 보살펴온 가정부 은정숙이라고 해요. 제발 부탁드리는데 더는 우리 민정이 다치지 않도록 너그럽게 봐주실 수 없을까요? 걔가 보이는 것처럼 그렇게 강하지 않아요. 금방 태어났을 때 사모님께서 애가 난청이라며 저에게 대신 돌보라고 건넸다가 학교 갈 나이가 다 돼서야 집에 데려갔어요...”
“박씨 일가에서 박형식 어르신 말곤 다들 민정이를 사용인 취급했어요. 어릴 때 몰래 저에게 전화해 울며불며 이런 부잣집 따님 하기 싫다며 이리로 돌아와서 제 딸로 살고 싶다고 하소연한 게 몇 번인지 몰라요... ”
“대표님과 형식 어르신은 민정이가 진주에서 제일 사랑하는 사람들이에요. 제가 이렇게 빌 테니까 제발 우리 민정이 잘해주세요. 그 아이는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너무 비천하게 살아왔어요.”
유남준은 울먹이는 은정숙의 말을 듣더니 순간 가슴이 꽉 막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어제는 돈으로 날 모욕하더니 아무 소용 없자 인제 또 불쌍한 척 연기하는 거예요?”
유남준의 목소리가 차갑게 울려 퍼졌다.
“박민정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나랑 무슨 상관이죠?! 전부 걔가 자초한 일이에요!”
그는 전화를 툭 꺼버렸다.
박민정은 그녀에게 유남준이 아주 잘해준다고만 말했었는데 인제 보니 잘해주긴커녕 민정이에게 가당치도 않은 인간이었다. 은정숙은 이제야 알아챘다.
...
박민정은 시내로 돌아가는 버스를 탔다.
이때 문득 휴대폰이 진동했는데 열어보니 유남준이 보낸 문자였다.
「이혼하겠다고 했지? 내일 아침 10시에 봐.」
박민정은 한동안 넋 놓고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답장을 보냈다.
「네.」
‘네’라는 이 한 글자가 유남준의 눈에 너무 거슬렸다.
“네가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그는 일할 기분이 안 나 사람을 불러서 술 마시러 갔다.
클럽 안.
이지원도 와 있었다.
“오늘은 끝까지 달리는 거다.”
절친 김인우가 유남준 옆에 앉아서 넌지시 박민정에 관해 물었다.
“그 귀머거리는 오늘 좀 어때?”
유남준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앞으로 걔 말 하지도 마. 내일 바로 이혼하러 갈 거야.”
이지원은 바로 그에게 술 한 잔 따랐다.
“오빠, 다시 태어난 걸 축하해요.”
다른 사람들도 아부해 댔다.
오늘따라 수호 클럽은 유난히 시끌벅적했다. 김인우가 술값을 전부 지급했기 때문이다. 그는 밖에서 몰래 이지원에게 말했다.
“남준이가 아직 너 좋아하는 것 같아. 지원이 꼭 행복해야 해.”
이지원이 머리를 끄덕였다.
“고마워요 인우 오빠. 오빠가 부추기지 않았으면 나 남준 오빠 만날 기회도 없었을 거예요.”
이건 실화이다.
애초에 이지원이 유남준을 알게 된 계기는 그녀가 박씨 일가의 후원을 받고 있어 감사의 뜻을 표하러 그 집에 찾아갔다가 마침 집에 방문한 유남준과 마주쳤다.
그 뒤로 4년 전 병원에 있을 때, 유남준의 엄마 고영란과 김인우가 같은 차를 탔다가 교통사고를 당했고 마침 박민정이 운 좋게 사고 현장을 목격했고 김인우와 고영란을 구해줬다.
이를 발견한 이지원은 박민정의 공로를 제 앞으로 돌리려고 모진 애를 썼다.
바로 이 때문에 김인우는 줄곧 그녀를 잘해줬고 맨 처음 생명의 은인에서부터 우정으로, 심지어 사랑으로 변해갔다.
또한 유남준도 바로 이 때문에 저 좋다는 수많은 여자를 제쳐두고 이지원과 사귀게 된 것이다.
이 일은 이지원 외엔 박민정마저 진실을 모른다.
그녀는 유남준이 이지원을 선택한 이유가 사랑 때문이라고 쭉 여겨왔다.
김인우는 이지원의 밝은 모습이 좋아서 잘해주는 거라고 생각했지 그녀가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에 좋아할 줄은 몰랐다.
“에이, 새삼스럽게 왜 그래? 우리가 어떤 사이인데.”
김인우는 꿀 떨어지는 눈빛으로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지원도 그 눈빛에 담긴 뜻을 모를 리가 없다.
오늘 유남준은 술을 엄청 많이 마셨고 이지원이 그를 집까지 데려다주려 했다.
집에 돌아간다고... 전에 그는 호텔에서 자거나 회사 혹은 개인 별장에서 밤을 지새웠는데 박민정은 늘 그에게 두원 별장이 바로 둘만의 집이라고 말했었다. 유남준은 그 말이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니야, 번거롭게 굴지 마.”
내일은 이혼하는 날이라 박민정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이지원은 거절당하고 썩 달갑지 않았다.
“왜요? 어차피 이혼할 건데 뭐가 불편해요. 설마 우리 일을 알까 봐서요?”
그 둘의 일이라면?
유남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괜한 생각 하지 마.”
그는 차에 타고 자상하게 이지원을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두원 별장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유남준은 자꾸만 휴대폰에 신경이 꽂혔다. 박민정한테 문자가 왔으려나,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
대문 입구에 도착해 칠흑같이 어두운 두원 별장을 바라보며 유남준의 눈빛이 한없이 짙어졌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선 후 불을 켰지만 박민정은 안 보였다.
‘안 돌아왔어...’
집안은 그녀가 떠나기 전과 똑같은 모습이다.
세탁기 위에 놓아둔 외투도 여전히 그대로인데 전과 다른 게 있다면 깨끗이 빨아서 말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남준은 귀찮은 듯이 걸어가 그 외투를 아예 휴지통에 버렸다.
술기운이 확 올라와 소파에 앉아서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았고 잠든 후에도 악몽에 시달렸다.
꿈에서 온몸이 피투성이인 박민정이 그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남준 씨, 나 인제 당신 안 사랑해요.”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니 날이 조금씩 밝아졌다.
유남준은 미간을 구기고 욕실에 들어가 샤워를 마친 후 정갈한 슈트로 갈아입고 시간을 맞춰 가정법원에 도착했다.
가정법원 입구.
제9화
시계를 들여다보니 마침 10시 정각이었다.
유남준은 그녀에게 전화해 도착했는지 물어보려 했는데 멀지 않은 곳의 나무 아래에 박민정이 어두운 톤의 옷을 입고 서 있었다.
주르륵 내리는 가랑비 속에 앙상하게 마른 그녀는 바람이 불면 쓰러질 것 같았다.
금방 유남준과 결혼했을 때, 박민정은 밝고 긍정적이었다. 지금처럼 어두운 표정과 뼈만 남은 초라한 모습이 아니라.
그는 우산을 들고 박민정에게 걸어갔다.
그녀는 뒤늦게 유남준을 발견했다.
3년 동안 유남준은 큰 변화가 없었다. 여전히 멋있고 카리스마 넘치며 전보다 조금 더 성숙해진 모습이었다.
3년이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갔고, 또 자신의 일생을 다 써버린 것만 같았다.
유남준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어서 사과하길 기다렸다.
이젠 그만할 때도 됐지!
하지만 정작 그녀의 말은 정반대였다.
“남준 씨 일하는 데 방해되겠어요. 얼른 들어가요.”
유남준은 안색이 확 어두워지고 표정이 얼어붙었다.
“너 후회하지 마.”
그는 이 한마디만 내던지고 가정법원으로 들어갔다.
박민정은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마음이 씁쓸했다.
후회?
그런 건 모르겠고 이젠 지쳐버렸다.
한 사람이 떠날 결심을 했을 땐 아마 일말의 희망도 얻지 못하고 마음속에 쌓인 실망이 너무 커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겠지.
이혼 절차가 진행되고 직원이 두 사람에게 정말 이혼하기로 결심했냐고 물었을 때 박민정은 아주 단호하게 대답했다.
“네.”
그녀의 확고한 눈빛에 유남준은 가슴이 움찔거렸다.
수속을 마치고 한 달이란 숙려기간이 있어 두 사람은 한 달 뒤에 또 이리로 와야 한다.
만약 이 한 달 동안 오지 않으면 이혼 신청도 자동으로 폐지된다.
가정법원을 나선 후 박민정이 유독 차분한 말투로 말했다.
“그럼 다음 달에 봐요. 잘 있어요.”
말을 마친 그녀는 곧게 빗속으로 뛰쳐들어가 택시를 잡고 떠나가 버렸다.
유남준은 멀어져가는 차를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이건 아마도 해탈이겠지.
더는 그녀와 얽힐 필요도 없고 장애인 아내와 산다는 사람들의 야유도 들을 필요가 없으니까.
이때 마침 김인우가 그에게 전화했다.
“남준아, 다 했어?”
“응.”
“이혼 숙려기간이 한 달이라며? 너 절대 그 귀머거리한테 마음 약해지면 안 돼. 걔 분명 꼼수 부릴 거야.”
일리 있는 말이다.
박민정이 십여 년을 유남준에게 집착하다가 갑자기 손을 놓는다는 게 말이 돼?
...
택시 안에서.
박민정은 차창에 기대 도어 너머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바라보며 멍하니 넋 놓았다.
택시기사가 백미러로 그녀를 힐긋 바라봤는데 귓가에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화들짝 놀란 기사는 재빨리 그녀를 불렀다.
“이봐요, 손님!!!”
그녀가 아무런 반응이 없자 기사는 냉큼 차를 세웠다.
‘아직 다 못 왔는데 왜 차 세웠지?’
박민정은 어리둥절한 눈길로 기사의 입 모양을 바라보다가 그제야 또 안 들린다는 걸 알아챘다.
“뭐라고요? 잘 안 들려요.”
기사는 휴대폰에 문자를 찍어서 그녀의 상황을 알려줬다.
천천히 귀를 만져보니 손끝에 따뜻한 촉감이 느껴졌다.
그녀는 이미 적응한 듯 대답했다.
“괜찮아요, 자주 이래요. 걱정해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녀는 난청 환자이지만 처음엔 이렇게 피를 흘리진 않았다.
계기는 바로 2년 전 한 파티 장소에서 유남준의 절친 김인우가 그녀를 수영장에 밀어 넣었고 수영할 줄 모르는 그녀는 고막이 부어올라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병원에 실어간 후 그녀는 이런 후유증이 남았다.
전에는 분명 치료가 잘 됐는데 요즘 들어 웬일인지 자꾸만 재발한다...
기사는 시름이 안 놓여 인근 병원으로 향했다.
박민정은 택시기사에게 고마움을 표하고 홀로 병 보이러 들어갔다.
오늘 의사는 마침 그녀가 쭉 보였던 담당 의사였다.
“의사 선생님, 제가 요즘 기억력도 나빠지고 가끔 뭘 하고 있는지도 깜빡해요.”
그녀는 오늘 아침 모텔에서 깨어났을 때 또 한 번 블랙아웃이 왔다. 한참 후에야 오늘 유남준과 이혼하는 날이라는 게 생각났다.
이어서 그녀는 아침 일찍 가정법원에 도착해 유남준을 기다렸다.
또 깜빡할까 봐 그가 보낸 문자도 몇 번이고 확인했다.
의사는 박민정의 최근 진단서를 훑어보더니 걱정스러운 눈길로 말했다.
“민정 씨, 다른 검사도 받아보시는 걸 추천합니다. 예를 들어 정신과 검사라던가.”
정신과라...
박민정은 의사의 건의대로 정신과 검사를 받았다.
진단서가 나왔는데 그녀는 우울증까지 있었다.
중증 우울증 환자의 경우 기억력도 어느 정도 저하된다고 한다.
모텔로 돌아온 그녀는 노트북과 펜을 꺼내 요즘 발생한 모든 일을 기록하기 시작했다. 이걸 머리맡에 두면 아침에 깨자마자 볼 수 있으니까.
침대에 누워 휴식할 때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우울증 치료를 검색해보았는데 그중 이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
「스스로 치유하도록 최선을 다하세요, 이 세상 그 누구도 당신을 구원할 수 없으니.」
박민정은 그 문장을 다 읽은 후 휴대폰을 끄고 눈을 감았다.
유남준과 이혼하는 일로 삶이 아주 시끌벅적해졌다.
그날 밤 한수민이 수없이 전화했지만 그녀는 한 통도 못 들었다.
다음날 깨고 보니 엄마의 문자가 수두룩했다.
「너 지금 어디야?」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니? 이혼을 해도 남준이가 먼저 말을 꺼내게 했어야지!」
「집안 말아먹는 년! 애초에 결혼할 때 네 아빠가 교통사고를 당했는데 인제 와서 이혼하면 우리 집안 망하라는 거야 뭐야?!」
그녀는 이런 문자들에 일찌감치 적응했다.
그리고 담담하게 답장을 보냈다.
「엄마, 우리 앞으로 자력갱생해요, 남에게 너무 의지하지 말고요.」
곧이어 한수민의 문자가 도착했다.
「양심도 없는 년! 애초에 널 낳지 말았어야 했어!」
박민정은 더이상 답장을 하지 않았다. 그녀는 휴대폰을 옆에 내려놓고 생각했다.
‘한 달 후에 남준 씨랑 이혼 절차 마무리하고 진주시를 떠나서 새 출발 해야지.’
...
그 뒤로 며칠 동안 그녀의 몸은 나날이 악화됐다.
종종 청력을 잃었고 가끔은 한참이 지나야 다시 청력을 회복한다.
기억력도 마찬가지로 쇠퇴해지고 있다.
어제 밖에서 밥 먹을 때 그녀는 심지어 모텔로 돌아오는 길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휴대폰을 챙겨서 내비게이션 앱으로 모텔까지 찾아갔다.
청력은 고칠 수 없지만 우울증은 가망이 있다.
최대한 즐거운 마음가짐으로, 분주하게 돌아치면 된다.
인터넷으로 자원봉사를 신청하여 독거노인과 고아들을 돌보는 일을 했는데 그들이 도움받는 모습에 그녀도 삶의 의미를 되찾은 것 같았다.
며칠 후 어느 날 아침.
박민정은 늘 하던 대로 깨자마자 옆에 놓아둔 노트북을 확인하더니 곧바로 보육원으로 갈 채비를 했다.
휴대폰을 챙겨 들었을 때 읽지 않은 문자가 수두룩했다.
엄마, 남동생, 그리고 이지원까지...
맨 처음엔 엄마 한수민의 문자였다.
「네 소원대로 우리 집안 망했어.」
그다음은 동생 박민호의 푸념이다.
「계속 피해 있어. 누나처럼 무자비하고 나약한 사람은 없다고.」
이지원의 비아냥대는 문자도 빠질 수 없다.
「민정 씨, 참 유감스럽네요. 하지만 바움 그룹은 남준 오빠 손에 있어야 더 잘 생존해나갈 수 있어요.」
「박씨 일가에서 한때 나를 서포트해준 걸 봐서 뭐 도울 거 있으면 도울게요.」
박민정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모른 채 바탕화면으로 돌아갔는데 상단에 자동으로 인기 기사가 떴다.
제10화
기사를 열어보니 유앤케이 그룹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바움 그룹을 성공적으로 인수했다고 발표하는 내용이었다.
이 세상에 더는 바움 그룹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사에는 유남준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잘생긴 옆모습과 카리스마 넘치는 눈빛이 인상적이었다.
사진 아래에 댓글도 아주 많이 달렸다.
「유남준 완전 잘생겼어, 젊은 나이에 그룹 총수라니.」
「아쉽게도 유부남이네. 결혼 상대가 박씨 일가의 따님이랬나?」
「정략결혼이지 뭐. 3년 전 그 기사 다 잊었어? 결혼식 때 유남준이 아예 신부 손을 뿌리치고 떠났었잖아...」
「...」
인터넷은 모든 걸 기록하고 있다.
박민정은 3년 전 결혼식 날 유남준이 자신을 버리고 분노하며 자리를 떠난 일을 거의 잊고 있었다.
그렇게 쭉 아래로 댓글을 읽어내려갔다.
이 3년간 그녀는 바움이 조만간 무너진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
유남준은 최근 흐뭇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바움을 인수하고 끝내 통쾌하게 복수했으니.
김인우가 웃으며 말했다.
“3년 전에 박씨 일가에서 사기 결혼을 강행하더니 인제 드디어 벌 받네.”
그는 문득 화제를 돌려 옆에서 일하는 유남준에게 물었다.
“남준아, 귀머거리 요즘 너한테 찾아와서 사정하지 않았어?”
서명하던 유남준의 손이 멈칫 흔들렸다.
왠지 모르지만 요즘 그의 주변에서 박민정 얘기가 끊이지 않는다.
거의 이혼하는 마당에 왜 아직도 그녀를 벗어나지 못하는 걸까?
“응, 없어.”
그가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김인우는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박씨 일가에 이렇게 큰일이 발생했는데 박민정이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니?
“걔 설마 진짜 해탈한 거 아니야? 누가 그러는데 걔네 엄마가 걔 찾느라고 사방으로 돌아다닌대. 대체 어디 숨었길래.”
김인우가 쉴 새 없이 떠들어대자 유남준은 짜증이 확 밀려와 눈썹을 찌푸렸다.
“나가!”
김인우는 화들짝 놀라더니 그제야 그의 심기를 건드린 걸 알아채고 감히 입도 뻥긋하지 못한 채 대표이사 사무실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유남준은 무심코 휴대폰을 들여다봤는데 박민정한테서 온 전화나 문자는 아예 없었다.
‘진짜 안 찾네.’
문밖에서 김인우는 살짝 걱정스러웠다. 정상적인 남자로서 유남준의 현재 반응이 실로 수상했으니까.
겉으론 늘 똑같은 모습이지만 박민정만 언급하면 버럭 화내기가 일쑤이다.
김인우는 밖에서 본인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박민정 찾았어?”
“네, 찾았습니다. 하성의 어느 한 모텔에 있습니다.”
김인우는 비서에게 주소 보내라고 한 뒤 곧장 모텔로 출발했다.
그녀 때문에 유남준과 이지원이 3년 넘게 이어지지 못했으니 제아무리 지금 먼저 이혼하겠다고 해도 이렇게 쉽게 놓아줄 순 없다.
밖에 부슬비가 내렸다.
박민정은 자원봉사를 마치고 병원 가서 약까지 챙긴 후 우산을 쓰고 모텔로 걸어갔다.
길에 행인들이 많지 않아 운전하던 김인우는 얄팍한 그녀의 뒷모습이 바로 눈에 띄었다.
이렇게 우연히 마주칠 줄은 몰랐다. 김인우는 일부러 속도를 높여 그녀 옆으로 스쳐 지나갔다.
순간 그녀 몸에 물이 잔뜩 튀었다.
박민정은 멍한 눈빛으로 차를 바라봤는데 백미러로 그녀의 두 눈을 마주한 순간 김인우는 저도 몰래 심장이 움찔거렸다.
박민정은 김인우의 수입차를 알고 있다. 화려한 다크 그레이 톤의 부가티였다.
그녀는 못 본 척 시선을 피했지만 이대로 멈출 김인우가 아니었다. 그는 차 속도를 늦추고 그녀를 바짝 따라붙었다.
“어이, 귀머거리, 너 다 컸다? 나 보고도 인사 안 해? 전에는 잘만 웃어댔잖아. 나한테 아양 떠는 거 네 주특기 아니야?”
박민정은 그의 모욕적인 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유남준을 좋아하기 때문에 가능한 한 유남준의 모든 주변인에게 잘해줬고 그 속엔 김인우도 포함됐다.
처음엔 김인우가 자신을 이토록 싫어하는 줄 몰라서 그를 친절하게 대했다.
그 언젠가 유남준의 가족, 친구들이 자신을 받아들이는 날이 올 거라 믿었다.
하지만 모든 게 그녀의 헛된 바람이었다.
어느 파티 장소에서 김인우는 그녀에게 본인이 이지원 친구라고 스스럼없이 얘기했다.
이지원의 뒷배가 되어주기 위해 부잣집 도련님의 매너 좋은 이미지도 마다한 채 박민정에게 천한 년, 파렴치한 년이라고 욕설을 퍼부었고 나중엔 그녀를 수영장에 내던져 자생 자멸하게 했다.
그 뒤로 박민정은 김인우를 피해 다녔다.
그녀가 아무 반응도 없고 묻는 말에 대답도 없자 김인우는 차를 세우고 안에서 내려 그녀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는 박민정의 팔을 꽉 조르고 정색하며 쏘아붙였다.
“이번엔 또 무슨 수작인데?”
박민정은 팔이 너무 아파 고개 들어 그를 쳐다봤다.
“지금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요.”
팔을 빼내려 했지만 김인우가 되레 매정하게 뿌리쳤다.
“더러운 손 치워!”
박민정은 연속 뒷걸음질 치다가 ‘콰당’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김인우는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이 자식이 하다 하다 트집 잡고 돈까지 뜯어내려고?!’
가볍게 밀친 것뿐인데 넘어졌으니 의심할 만도 했다.
주위에 사람들이 몰려들자 김인우는 켕기는 듯 차에 올라탔고 떠나기 전 경고장까지 날렸다.
“민정아, 너 장애인이라고 지원이 괴롭히면 안 돼. 걔는 너랑 달라. 어떻게 여기까지 왔는데, 걔랑 남준이 더이상 방해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차를 타고 떠난 후 그는 또 ‘인심 좋게’ 박씨 일가에 박민정의 모텔 주소를 알려주었다.
바닥에 넘어진 박민정은 손과 무릎이 까져서 한참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사실 그녀는 참 이해되지 않았다. 김인우는 대체 왜 이토록 시비를 가리지 못하는 인간일까?
4년 전에 위험을 무릅쓰고 거의 다 폭발하는 차 안에서 그를 구해줬는데, 그때만 해도 김인우는 얼굴이 피범벅이 돼서 눈도 뜨지 못한 채 아주 친절하게 말했었다.
“고마워, 이 은혜 꼭 갚을게.”
그 은혜를 이렇게 갚는다고? 박민정은 그에게 보답받는 걸 바라지도 않지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건 정말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다행히 길 가던 사람이 그녀를 부축해주었다.
“아가씨, 저 사람 누구예요? 경찰에 신고 안 해도 돼요?”
박민정은 이명 때문에 그들이 뭐라는지 안 들리지만 본능적으로 관심하는 말이라 짐작하며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저 괜찮아요. 고맙습니다...”
그녀는 심심한 경례를 하고서 다리를 절뚝거리며 모텔로 향했다.
뭇사람들은 동정 어린 눈길로 떠나가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 사람들의 말을 들었어도 박민정은 똑같이 거절했을 것이다.
김씨 일가는 유씨 일가 못지않아 의학 산업도 세계 곳곳에 널려 있으니까.
김씨 일가의 도련님 김인우는 유남준의 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의학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진작 가문의 산업을 이어받았을 것이다.
박민정은 그런 김인우를 감히 건드릴 수 없다.
그녀는 모텔로 돌아와 샤워하고 다친 곳에 연고를 바른 후 스르륵 잠들었다.
오늘 넘어지면서 유남준을 떠나야겠다는 결심이 더 확고해졌다.
다시 눈 떠 보니 날이 어렴풋이 밝았다.
거실로 나오자마자 원피스 차림에 소파에 앉아 있는 한수민과 눈이 마주쳤다.
“깼어? 너 찾기 참 쉽네.”
그녀는 음침한 눈빛으로 이상야릇하게 말했다.
“엄마...”
한수민은 핏기없이 창백한 딸의 얼굴을 보면서도 관심조차 없었다.
곧게 앞으로 다가오더니 손을 들어 딸의 오른쪽 얼굴을 가차 없이 내리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