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했는데 전남편이 집착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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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했는데 전남편이 집착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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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 3년 차지만 남편의 생김새도 모르는 성혜인. 남편과의 첫 만남을 침대에서 갖게 된다. 얇은 한 장의 이혼 서류에 사인하고 다시는 안 봐도 될 줄 ...

Chương (1)

第1章

제1화 돈은 필요 없어요 남자는 이미 잠들었는지 예리한 눈빛을 숨긴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성혜인은 무기력한 자태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긴 생머리는 마침 예쁜 허리선을 보일 듯말듯 가렸다. 그녀가 바닥에 널브러진 옷을 주우려고 했을 때, 등 뒤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얼마면 돼?” 그의 말투에는 감정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어젯밤 술에 의한 열정은 이미 싸늘하게식어버렸다. 성혜인이 약간 멈칫하다가 다시 옷을 주워 들었다. 아내를 알아보지 못하는 남편이라니, 퍽 우습기는 했다. 3년 전, 성혜인은 BH그룹 회장인 반태승을 구하는 일이 있었다. 때는 마침 그녀 집안의 SY그룹에 자금난이 닥쳤을 때인데, 사건의 자초지종을 알게 된 반태승은 자신의 손자 반승제와 성혜인을 결혼시키고 SY 그룹에 600억이라는 거금을 투자했다. 당사자인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코빼기를 비춘 적 없었고 두 사람이 법적으로 부부가 된 후에야 성혜인은 자신의 남편이 외국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3년 동안 허울뿐인 BH그룹 며느리는 많은 사람의 우스갯거리가 되었다. 그런 두 사람이 첫 만남을 침대 위에서 가지게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돈은 필요 없어요.” 성혜인은 주섬주섬 옷을 입었다. 숙취 때문인지 머리는 터질 것처럼 아팠다. “돈이 필요 없다면 이번 일을 핑계로 들러붙을 작정인가?” 반승제는 피식 웃었고, 그 깊은 두 눈으로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뽀얗고 작은 얼굴에 적당히 좋은 몸매, 맑고 커다란 눈빛 덕에 얼굴도 예쁘장하기는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꼼수를 부리는 여자는 많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은 여자는 또 처음이라고 생각하며 반승제는 시선을 거뒀다. “네 몫의 돈은 섭섭지 않게 줄게. 하지만 네 몫이 아닌 것은 탐내지 마.” 반승제는 어젯밤 확실히 술에 취했다. 하지만 아무리 취했다고 해도 그는 여자의 몸에 이성을 잃을 위인이 아니었다. 문제는 분명 여자가 건넨 술에 있었다. 옷을 다 입고 난 성혜인은 자세를 바로 했다. 어젯밤, 반씨 저택에서는 성대한 연회가 열렸다. 업계의 수많은 재벌집 아가씨가 국내로 돌아오자마자 BH그룹을 물려받은 상업 귀재를 만나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성혜인도 물론 연회에 참석했다. 반태승이 꼭 참석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는지라 그녀는잠깐 얼굴만 비추고 갈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때 성혜인의 아버지 성휘가 술잔 두 개를 건네주며 오래간만에 돌아온 반승제와 얘기를 나눠보라고 했고 그렇게 두 사람은... 성혜인은 반승제가 두 사람의 혼인에 얼마나 반감을 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어젯밤 일이 그녀의 의지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도 믿어주지 않을 게 뻔했다. 성혜인은 이런 자신을 비웃는 듯 잠깐 침묵하다가 드디어 결심하고 입을 열었다. “사실...” 침대 머리에 있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리기 시작하며 성혜인의 말을 끊었다. 반승제는 자신의 개인 변호사에게 전화가 왔음을 확인했다. 그렇게 통화가 연결되고 휴대전화 건너편에서는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제가 성혜인 씨 댁 앞에 와 있는데 아무래도 계시지 않는 것 같습니다. 이혼서류는 성씨 집안으로 보낼까요?” 반승제는 몸을 일으켜 커다란 창문 앞으로 와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을 바라봤다. 그는 자신과 결혼한 지 3년이나 되는 아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전혀 없었다. 반태승에게서 성격이 순할 뿐만 아니라 제원대학을 나온 똑똑한 사람이라는 칭찬을 듣기는 했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SY그룹이 위기를 극복했으니, 반태승의 빚도 이미 다 갚은 셈이었다. 반승제는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일단은 본인과 계속 연락을 취해 봐요. 만약 이혼을 거절한다면 그때 다시 성씨 집안에 연락하죠.” 성혜인은 이제야 휴대전화를 들고 놓친 소식은 없는지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반승제의 입에서 나온 ‘이혼’ 두 글자에 잠깐 놀랐다가 다시 성휘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혜인아, 너 어제 먼저 나갔다면서? 네 이모가 반승제한테 술을 먹였는지 물어보라고 하네.’ 성혜인은 머리를 숙이고 메시지를 답장했다. ‘그거... 아빠가 준비한 술이 아니었어요?’ ‘술은 네 이모가 준 거야. 참, 오늘 시간 있으면 동생을 만나러 병원으로 가봐. 혜원이가 보고 싶대.’ 진정한 범인을 알고 난 성혜인은 속이 꽉 막히는 것 같았다. 성혜인이 답장 없자 성휘가 이어서 메시지를 보냈다. ‘혹시 술 도수가 너무 높아서 취했었어?’ 성휘는 성혜인이 취했는 줄 알고 숙취해소제는 필요 없는지 물어주며 걱정했다. 성혜인은 꽤 성깔이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어머니가 일찍 세상을 뜬 이후로, 성휘 혼자서 회사를 운영하랴 부모 역할을 해주랴 많은 고생을 했다. 그리고 재혼도 성혜인이 수능을 끝낸 다음에 했으니, 아버지로서의 최선은 다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런 일로 성휘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던 성혜인은 애써 화를 참으며 메시지를 보냈다. ‘아니요, 괜찮아요. 혜원을 만나러 곧 병원으로 갈게요. 그리고 이모한테 신경 써줘서 고맙다고 전해줘요.” 반승제의 통화 내용은 어느덧 회사 일로 넘어갔다. 성혜인은 샤워 가운을 대충 걸친 남자의 모습을 바라봤다. 그가 창밖의 빛을 등지고 있는 탓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다만 더욱 날카롭게 드러난 턱선이 낯선 이의 접근을금지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가방에 넣고 스위트 룸 밖으로 나갔다. 이혼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를 밝혀봤자 더 어색해지기만 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그냥 쿨하게 헤어지는 게 맞았다. 통화를 끝낸 반승제는 아직 처리할 사람이 있다는 게 떠올라 고요한 호텔 룸을 쓱 둘러보고는 미간을 찌푸렸다. 침대 시트는 절반이나 드리워져 있었고 쭈글쭈글한 정장 셔츠는 술냄새와 함께 침대 밑에 구겨져 있었다. 반승제는 미간을 꾹꾹 눌렀다. 만약 침대 위의 흔적이 이토록 선명하지 않았더라면 그는자신이 꿈을 꿨을 줄 알 것이다. 이때 노크 소리가 들려오고 그의 비서 심인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저 심 비서입니다.” “들어와요.” 심인우는 깨끗한 정장을 들고 스위트 룸의 침실로 들어왔다. 룸 안의 참상에 의아하기는했지만, 그는 별다른 말 없이 옷만 내려놓고 거실로 나갔다. 반승제는 샤워하고 옷까지 갈아입은 후에야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스위트 룸 밖으로 나갔을 때 반승제가 갑자기 우뚝 멈춰서면서 뒤에 있던 심인우에게 물었다. “혹시 방금 나간 여자 누군지 알아요?” 제2화 환자분, 신고 해드릴까요? 심인우는 방금 목격한 장면을 생각하고 있다가 번뜩 정신 차리고 대답했다. “바로 조사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반승제의 표정은 어두워졌다. 그는 성혜인이 저급한 밀당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만약 조사한다면 그녀의 덫에 걸리는 것일지도 몰랐다. “됐어요.” ‘어차피 알아서 다시 나타날 사람인데 조사는 무슨...’ 성혜인은 후다닥 자신의 집으로 돌아와서 구석구석 몇 번이나 씻은 다음에야 침대에 누웠다. 눈을 감으면 아직도 어젯밤의 일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생소한 느낌과 심장이 터질 것만같은 느낌은 아직도 생생했다. 솔직히 첫 경험 상대가 반승제라는 것은 그다지 나쁜 일도 아니었다. 그의 입에서 다른 여자의 이름이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단미, 윤단미...’ 어쩌면 이게 바로 반승제가 이혼하려는 이유일 지도 몰랐다. 정신이 극도로 피곤한 와중에도 신체적인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성혜인은 몸을 돌렸지만 여전히 불편했다. 그래서 아예 몸을 일으켜 서랍 속의 혼인증명서를 꺼냈다. 두 사람이 결혼할 때 반승제는 단 한 번도 오지 않았지만 반태승의 힘으로 성혜인 혼자서도 혼인증명서를 받아올 수 있었다. 성혜인은 처음으로 혼인증명서 속에 함께 적혀 있는 자신과 반승제를 이름을 찬찬히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는 금세 다시 서랍을 닫고 성혜원을 만나러 병원으로 출발했다. 성혜인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마침 점심 시간이었고 병실을 지키고 있던 간병인은 점심을 먹으러 나갔다. 혼자서 조용히 쉬고 있던 성혜원은 성혜인을 발견하자마자 기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언니가 어떻게 왔어?” 성혜원의 안색은 약간 창백했지만 눈빛만큼은 아주 똘망똘망했다. “아빠가 또 헛걱정하고 있지? 내가 괜찮다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믿지 않는다니까.” 성혜인은 침대 옆에 앉아 따듯한 물을 건네며 말했다. “그게 어떻게 헛걱정이야.” 성혜원은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해 자주 입원했었다. 그래서 성휘도 그녀를 유난히 아꼈다. “그래도 난 병원에 있기 싫어. 엄마가 감시하고 있지, 끼니도 죽으로 밖에 못 때우지...” 성혜원은 불쌍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간호사 언니들이 병원 식당의 순두부 얘기를 하는데 내가 군침이 막 돌더라니까.” 성혜원은 성혜인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언니, 나 오늘 퇴원인데 그 전에 순두부 좀 먹으면 안 돼?” 성혜원은 반짝거리는 눈을 크게 뜨고 성혜인을 바라봤다. 도무지 거절하지 못한 성혜인은 어쩔 수 없이 순두부를 사 왔다. “혹시 모르니까 그냥 맛만 보고 다시 뱉어.” 성혜인은 몇 번이나 더 잔소리하고 나서야 순두부를 떠서 성혜원의 입가에 갔다 댔다. 이때 문밖에서 소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소윤은 성큼성큼 걸어와서 숟가락과 그릇을 뺏앗아 들고는 쓰레기통에 버렸다. “내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네 동생을 죽여버릴 작정이야? 네가 그러면 그렇지!” 바닥에 넘어진 성혜인은 쓰레기통에 버려진 순두부를 바라보며 기분이 말이 아니었다. “너 또 뭘 먹었어?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소윤은 씩씩거리며 성휘에게 전화를 걸어 불평하려고 했다. 그러자 성혜원이 그녀를 말리면서 말했다. “엄마, 아니에요. 순두부는 제가 언니한테 부탁해서 사달라고 한 거예요.” 소윤은 약간 멈칫하기는 했지만 여전히 높은 언성으로 말했다. “그렇다고 해서 언니라는 애가 동생이랑 마찬가지로 철없이 행동해? 쟤만 아니었어도 네아버지가 우리 모녀를 뿌리치지 않았을 것이고, 네 건강도 이 정도로 악화하지 않았을 거야.” “엄마, 그만 해요. 저 오늘 오래간만에 언니랑 만났단 말이에요.” 소윤은 콧방귀를 뀌며 곁에 조용히 서 있는 성혜인을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이 전 부인과 낳은 딸아이에게 도무지 정이 가지 않았다. 하지만 완전히 뿌리치기에는 또 집안에 쓸모가 있었다. 이렇게 생각하며 소윤은 성혜인의 흔적 하나 없이 깨끗한 목을 바라봤다. 그녀는 자신의계획이 도대체 어떻게 됐는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BH그룹의 도움이 간절하지만 않았어도 그녀는 반승제처럼 우수한 사람을 성혜인에게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딸이 결혼할 수 없으니, 이것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기분이 언짢았던 소윤은 더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반승제가 돌아왔으니, 이제는 네 생각만 하지 말고 BH그룹의 도움을 받을 생각이나 해.” 자신의 희생이 당연하다는 듯한 소윤의 말투에 성혜인은 피식 웃었다. “이모는 제가 집안을 한 번도 도운 적 없다는 듯이 말하네요. 혹시 아빠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어요?” 소윤은 말문이 막혔다. 이때 성혜원이 분위기를 풀기 위해 말했다. “그러고 보니 나 약 받을 때가 됐는데 언니가 대신 받아주면 안 돼?” 성혜원이 밖으로 나오자마자 소윤이 핀잔 놓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성휘 씨가 자기한테 얼마나 잘해주는지 몰라서 저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테고, 그냥 우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뜻이겠지. 성휘 씨가 한창 일로 바쁠 때 제 어미가 과로사로 죽었다더니 그 탓을 우리한테로 돌리려는 모양이야. 흥, 탓을 해도 복 없는 제 어미를 탓해야지.” 성혜인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젯밤 일 덕분에 몸이 불편했던 그녀는 그래도 가까스로 소윤에게 들키지 않았다. 성혜원의 약을 받고 난 성혜인은 산부인과로 갔다. 상처투성이가 된 성혜인을 보고 의사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환자분, 신고 해드릴까요?” “...” 성혜인은 약간 멈칫하다가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사실 제 남편이 금방 출장을 끝내고 돌아와서 약간 과격해진 모양이에요...” 의사는 성혜인의 말에 약간 시름을 놓은 듯 말했다. “오늘부터 연고를 꼭 바르고 당분간은 자제해야 할 거예요. 그리고 남편분한테도 조심하라고 말씀하세요. 어린 나이일수록 건강을 조심해야죠.” 의사가 신고를 권할 정도라니... 성혜인은 얼굴이 후끈후끈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드디어 산부인과에서 나온 그녀는 우연히 성혜원의 친오빠인 성한과 마주쳤다. 성한의 눈빛은 성혜인이 들고 있는 연고에 고정되었다. 그는 의아한 눈빛으로 물었다. “혜인아, 난 혜원을 보러 왔는데... 너 어디 아파?” 제3화 억울하면 네 부모를 탓해 정장을 차려입은 성한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왠지 모르게 그가 불편했던 성혜인은 차가운 표정으로 성혜원의 약을 건넸다. “저는 이미 혜원을 만나고 왔어요. 이 약은 저 대신 이모한테 전해줘요.” 성한은 눈썹을 찡긋하며 말했다. “같이 가자. 우리도 오래간만에 만났잖아.” “아니에요. 저는 아직 할 일이 있어서...” 성혜인은 약만 건네주고 바로 병원에서 나왔다. 성한은 제자리에 멈춰선 채 성혜인의 멀어져가는 뒷모습을 바라봤다. 그는 저도 모르게 성혜인이 들고 있던 약을 코에 갖다 대고 냄새를 맡았다. 예쁘게 생긴 젊은 여자가 연고를 들고 산부인과에서 나왔다라... 이 장면을 보고서도 상상의 나래를 펼치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성한은 입꼬리를 쓱 올렸다. 그는 차가운 인상의 성혜인이 이토록 문란한 사생활을 즐길줄은 몰랐다. 남편이 3년 동안이나 자리를 비웠으니, 독수공방에 지친 그녀가 당연히 그럴 만도 했다. ‘급할 것 없어. 혜인이 집으로 돌아온 순간 나에게도 기회가 생길 테니까.’ 성혜인은 차에 올라타고 나서고 기분이 약간 언짢았다. 소윤이 자식 둘을 데리고 성씨 저택에 와서부터는 매일 성한과 마주쳐야 했는데 성혜인은 그가 상당히 불편했다. 성휘는 성한을 내보내도 된다고 말했지만, 그의 난감한 표정에 도무지 그렇게 하자고 말할 수가 없었다. 소윤과 성혜원에게 미안했던 성휘는 성한에게도 아주 잘해줬고, 그 속에 껴서 불편하게 지내기 싫었던 성혜인은 단호히 집을 나왔다. 이제 와서 보니 그녀야말로 성씨 집안의 제삼자 같았다. 운전을 해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성혜인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했다. 전화 온 사람의이름을 확인하고 나자 안 그래도 언짢았던 기분이 더 나빠졌다. 상대가 먼저 전화를 끊을 기미가 보이지 않아 성혜인은 한숨을 쉬며 수락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어머니.” 전화를 건 사람은 반승제의 어머니인 백연서였다. 두 사람이 결혼하기 전부터 재벌 집 출신인 ‘시어머니’는 성혜인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성혜인도 반태승 앞에서만 손자며느리 역할을 했지, 다른 사람들은 최대한 멀리했다. “조망한 집으로 오려무나. 이제 슬슬 이혼 얘기를 해야지.” 백연서는 아주 직설적이었다. 그녀는 성혜인의 거절을 미리 거절하기까지 했다. “예전에는 회장님의 뜻이라 그냥 말없이 따랐지만 이제는 아니야. 앞으로의 일은 BH그룹의 새 주인인 승제의 몫이란다.” 구구절절 말이 길어지기는 했지만, 어찌 됐든 이혼하라는 말이었다. 백연서는 성혜인이 울고불고 난리를 하면 어쩌나 걱정했다. 자신의 아들처럼 훌륭한 남자를 쉽게 놔주려는 여자는 없을 테니까. 상대가 반승제라면 평생 사랑을 받지 못한다고 해도 말 몇 마디 나눠볼 수 있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성혜인은 백연서의 예상과 다르게 덤덤히 대답했다. “네, 지금 바로 갈게요.” 의문 하나 없는 깔끔한 대답. 성혜인은 마치 이날만을 기다린 듯 빠르게 대답했다. 백연서는 기분이 찝찝했다. 버림을 당한 사람은 분명 성혜인인데, 그녀의 태도 덕분에 전세 역전을 당한 것만 같았다. 찝찝한 기분을 풀기 위해 백연서는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래. 너는 애초부터 승제한테 어울리지 않았어. 승제는 더 좋은 사람이랑 결혼할 거야. 그리고 승제는 이미 오고 있는 길이니 너도 빨리 오도록 해.” 성혜인은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그녀는 반승제도 함께 만날 줄은 몰랐다. 어제 하룻밤을 보낸 여자가 자신의 부인이었다는 걸 알게 된다면 그는 과연 어떤 반응을보일까? 반승제처럼 오만한 사람이라면 구역질을 할지도 몰랐다. 성혜인 피식 웃으며 반씨 저택으로 출발했다. 백연서는 역시 성혜인을 만나자마자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가 흔쾌히이혼을 허락한 걸 봐서 과하게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너도 나를 너무 미워하지는 마. SY그룹의 상황이 어떤지 너도 잘 알고 있잖아. 그리고 네 아버지는 사업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야. 언제까지 BH그룹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으니 얼른 접으라고 전해. 그리고 네 새어머니도 우리 집안의 돈을 호시탐탐 얼마나 노리는지 알아? 아무튼 우리는 너 같은 며느리를 남겨둘 이유가 없어. 정 억울하면 너를 이런집안에서 낳아준 네 부모를 탓해.” 성혜인은 소파에 앉아서 작게 머리를 끄덕였다. “맞아요, 어머니 말씀이 다 맞아요.” 사실상 두 사람은 혼인증명서만 갖고 있는 남과 다를 바 없었다. 그러니 이혼은 성혜인에게도 일종의 해방이었다. 백연서는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솜뭉치를 향해 분풀이한 것만 같았고 성혜인의 반응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이 가지 않았다. 이때 저택 밖에서 주차하는 소리가 들려왔고 도우미가 달려와서 말을 전했다. “사모님, 도련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백연서는 기쁜 표정으로 문 앞으로 걸어갔다. 성혜인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문 쪽을 바라봤다. 방금전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마음이 갑자기 긴장되기 시작했다. 제4화 안녕하세요, 반승제 씨 드디어 문이 열리고 반승제가 아닌 젊은 남자가 들어왔다. 그는 반승제의 비서인 심인우였다. “사모님, 대표님께서는 오늘 급한 일이 있어서 돌아오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이건 사모님께 전해달라고 하신 선물입니다.” 백연서는 반승제에게 돌아와서 저녁밥이나 먹으라고 했지 성혜인이 있다는 얘기는 꺼내지 않았다. 왜냐하면 괜히 얘기를 꺼냈다가 그의 성격으로 원래 오려고 했던 것도 안 올수 있기 때문이다. 그녀는 심인우가 건네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실망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래, 승제가 바쁜 건 나도 알고 있으니... 대신 몸조리 잘하라고 전해주렴.” 심인우는 머리를 끄덕이고 밖으로 나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백연서는 성혜인을 쳐다보지도 않으며 손을 휘적였다. “너도 이만 돌아가. 승제가 시간 있을 때 다시 부를 테니까.” “네.” 성혜인은 애초부터 남아서 밥 먹을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심인우의 얼굴을 보지 못했지만 흐릿한 뒷모습 만으로도 반승제가 아님을 알아차렸다. 게다가 오늘 만나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혼 서류가 준비되지 않았으니 말이다. 다시 차에 올라타서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성혜인은 빨간불을 기다리며 회사 단톡방을열어 봤다. 퇴근 시간이 지났음에도 단톡방은 아주 시끄러웠다. ‘반승제가 이번에 결혼하러 돌아왔다면서요? 네이처 빌리지에 비싼 값을 주고 펜션을 샀다고 하던데 곧 인테리어도 하겠죠?’ ‘사장님이 반승제랑 같은 고등학교를 나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혹시 실내 디자인 일을 저희 쪽에서 할 수 있을까요?” “만약 가능하다면 저희가 엄청 덕을 보겠는데요? 반승제 정도의 재벌이라면 일은 둘째 치고 말이라도 섞어보고 싶어요...” 반승제가 결혼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이는 뉴스에도 전혀 나온 적이 없는 일이었다. 이 화제에 관심 없었던 성혜인은 휴대전화를 끄려고 했는데 마침 사장 양한겸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지금 잠깐 문라이트로 올 수 있어? 네가 디자인했던 펜션에 관심 있는 고객이 있는데 직접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대.’ 성혜인은 사실 아주 우연히 실내 디자이너가 되었다. 미술 전공이었던 그녀는 우연히 같은 반 친구에게 펜션 디자인을 해준 적 있는데, 또 우연히 한 부자의 눈에 들어서 원래보다 10배나 높은 가격으로 팔렸다. 이 덕분에 성혜인도 유명세를 얻기 시작했다. 졸업을 한 후, 성혜인은 양한겸의 제안에 응해 그의 회사에서 실내 디자이너로 아르바이트를 하기 시작했다. 왜 정직원이 아닌 아르바이트인지는 또 아주 복잡한 이야기다. 성혜인은 문자를 보자마자 핸들을 돌려 문라이트로 향했다. 그녀가 문라이트 앞에 도착했을 때, 양한겸이 또 메시지 한 통을 보냈다. ‘나는 너를 데리러 못 갈 것 같아. 하지만 임 사장님의 친구가 곧 도착한다고 했으니 잠깐만 기다려 줘.’ 문라이트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곳이었다. 만약 이곳의 회원이 없다면 지인이 데리러 오기를 기다리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시각, 반승제가 임경헌의 전화를 받았다. “형, 제가 소개해 주겠다고 했던 사람이 문라이트 앞에 도착했대요. 그러니까 올 때 꼭 데리고 와요. 이참에 서로 인사도 하고요.” 임경헌은 성혜인의 설계도를 바라보며 반승제가 무조건 마음에 들어 하리라 생각했다. 마침 네이처 빌리지의 펜션도 인테리어할 때가 되었으니 모자란 게 없는 반승제에게 선물을 줄 좋은 기회이기도 했다. “제가 형이 무조건 마음에 들어 할 만한 선물로 준비했거든요.” 반승제가 대답할 새도 없이 휴대전화 건너편의 음악 소리가 갑자기 커져서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리지 않았다. 반승제는 자신의 사촌 동생이 제원에 둘도 없을 최고의 플레이보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선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문라이트에 도착하고 차에서 내려오자마자 그는 멀지 않은 곳에 서 있는 한 여자를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저 여자라고?’ 가까이 가보니 틀림없이 오늘 아침 호텔에서 만났던 여자였다. 성혜인이 양한겸에게 전화를 해보려고 할 때, 반승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특유의 아우라도 부자들의 세상으로 불리는 문라이트에서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반승제는 검은색 정장에 차가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는 성혜인이 일찍 떠난 이유가 틀림없이 임경헌에게서 돈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임경헌이 소개해 주겠다고 한 사람이 너야?” 성혜인은 반승제가 먼저 말을 걸어 올 줄 몰랐다. 그가 말한 임경헌이라는 사람은 아무래도 양한겸이 말했던 임 사장님인 듯했다. ‘임 사장님의 친구가 반승제이고, 내가 디자인하게 될지도 모를 펜션도 반승제의 것이라고?’ 성혜인은 자신의 처지가 약간 우스웠다. 아직 이혼을 하지도 못했는데 전 남편의 신혼집을 디자인하게 되다니... 세상이 좁다는 말이 아무래도 사실인 듯했다. 어찌 됐든 제 발로 굴러들어 온 일을 거절할 리 없었던 그녀는 덤덤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네요. 안녕하세요, 반승제 씨.” 제5화 일을 시작한 지 3년이나 됐어요 반승제 근처의 아우라는 마치 여름이란 겪어본 적 없는 것처럼 차가웠다. 그는 어두운 눈빛으로 성혜인을 바라보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가지.” 성혜인은 반승제를 따라 문라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그를 알아본 사람들은 저마다 단정한 태도로 허리 굽혀 인사했다. 그렇게 조용히 걷고 있던 반제승가 갑자기 멈춰서서 몸을 돌렸다. 성혜인도 따라 멈춰서서는 덤덤하게 자본주의 미소를 지었다. “너 임경헌한테서 얼마나 받았어?” 성혜인은 임경헌과 반승제가 어떤 사이인지 몰랐다. 반씨 일가의 상황에 대해 전혀 모르니 이것도 당연하였다. 반승제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으로서 그녀는 그냥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이겠거니 했다. “사장님 말로는 2억 정도 한다고 했어요.” “이 짓거리를 하는데 사장도 있어?” 반승제는 진심으로 의아한 말투로 물었다. 문라이트에서 비밀스러운 거래가 이뤄진다는 것을 임경헌에게 들어본 적은 있지만 자신이 당사자가 될 줄은 또 몰랐다. 어찌 됐든 일이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이제 와서 고민하기에는 늦었다. 반승제는 다시 몸을 돌려 룸으로 걸어갔고 성혜인도 묵묵히 따라갔다. “임경헌 말로 너희가 부르는 값은 높지만, 서비스는 확실하다고 했지?” 성혜인은 그동안 많은 고객을 만나왔다. 대부분 사람이 다 부자라서 가격만큼은 충분하게 줬지만 물론 아닌 사람도 있었다. 성혜인은 반승제의 말을 듣자마자 기계처럼 대답했다. “반승제 씨, 가격에 관해서는 충분히 서비스와 정비례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서비스와 정비례 한다라...’ 반승제는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래? 만약 내가 네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했다면?” 어색한 반응에 가만히 있을 줄밖에 모르던 성혜인에게는 서비스고 뭐고 할 것도 없었다.게다가 반승제는 그녀의 얼굴과 몸매가 수억 원을 주고 살 정도의 가치도 없다고 생각했다. ‘돈 벌기 참 쉬운 직종이군.’ 성혜인은 ‘고객이 왕이다’라는 생각 하나로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럼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려줄 수 있을까요? 제가 최대한 맞춰줄게요.” 성혜인의 얼굴에는 단정한 미소가 걸렸다. 그녀의 미소는 은은한 불빛 아래에서 아주 청아하게 보였다. 반승제는 문뜻 새벽이 거의 끝나갈 때, 그녀가 더 이상 버티기 힘든 듯 초점을 잃고 자신을 끌어안던 모습이 떠올랐다. 약간 물기 돌던 그녀의 눈빛은 아주 아름다웠다. 성혜인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이어서 말했다. “제 고객 중에 단골도 아주 많아요. 다들 꽤 만족스러운 것 같던데요.” 성혜인이 디자인한 펜션과 별장은 중고로 다시 팔아도 비싼 값을 부를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녀의 디자인에 불만을 표시했던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단골이라...’ “너한테 다른 고객도 있다고?” 반승제는 약간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이 아니었어?” “그럴 리가요. 저 일을 시작한 지 3년이나 됐어요.” 성혜인은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그녀는 임경헌과 반승제 사이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도무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말을 끝내자마자 반승제의 표정은 싸늘하게 식어갔다. 이 감정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숨이 잘 올라오지 않는 것만 같았다. “됐어. 그냥 조용히 따라와. 돈은 문제없이 계산해 줄 테니까 다른 건 바라지도 마.” 성혜인은 그가 왜 갑자기 화를 내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은 임 사장님한테 가는 건가요?” 성혜인의 질문이 반제승에게는 그저 교태로 보였다. “걔도 네 고객이야?” “그런 셈이죠.” 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미래의 고객도 고객인 셈이니까. 그러자 반제승은 갑자기 안색이 확 어두워지더니 몸을 돌려 가버렸다. 성혜인은 제자리에 멈춰서서 자신이 도대체 무슨 말을 잘못했기에 남자의 예민한 신경을건드렸는지 곰곰이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짧은 대화에 잘못된 것이란없었다. 더구나 반제승은 성혜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을 리도 없었다. 이때 마침 양한겸에게서 전화가 왔다. “들어왔어?” “사장님, 저 아무래도 망친 것 같아요.” 양한겸은 약간 멈칫했다. 그는 성혜인을 완전히 믿고 있었다. 디자인에 탁월한 재능을 갖고 있는 그녀는 단 한 번도 일을 망친 적이 없기도 했다. “1402 룸이야. 일단 이쪽으로 와서 얘기하자.” “네.” 전화를 끊고 난 성혜인은 직원에게 1402 룸의 위치를 물었다. 양한겸은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임경헌을 바라보며 말했다. “디자이너가 곧 도착한다고 하네요.” 아직 젊은 티가 나는 임경헌은 미소를 머금고 말했다. “급할 것 없어요. 제 형도 곧 도착할 거예요. 두 사람이 만나기만 한다면 이번 일도 틀림없이 잘 진행될 거예요.” 임경헌의 말을 듣고 나서야 양한겸은 약간 시름이 놓인 듯 미소를 지었다. “저는 승제랑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혹시 기억나나요?” 반승제의 능력으로 그와 어떻게든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주 많았다. 양한겸이진짜 그와 동창 사이라고 해도, 사실 반승제는 학교를 다닌 지 반년도 채 되지 않았다. 양한겸이 말을 끝내자마자 문이 열리고 성혜인이 걸어들어왔다. 성혜인은 오늘 정장이 아닌 편안한 옷을 입었고 머리도 깔끔하게 묶었다. 덕분에 평소 출근할 때와는 다른 청순한 느낌이 있었다. 성혜인은 임경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임경헌은 약간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디자이너님께서 능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얼굴도 이리 아름다우신 줄은 몰랐네요.” 성혜인이 혼자 들어 온 것을 보고 그는 바로 이어서 물었다. “제 사촌 형은요? 같이 들어오지 않았어요?” 성혜인은 약간 멈칫하며 생각했다. ‘반승제 씨가 이 사람의 사촌 형이라고?” 제6화 좋아하는 여자 잠깐 놀란 건 사실이지만 성혜인은 상대가 자신을 알아볼 걱정은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명절에도 반태승만 따로 만났기에 반씨 집안의 다른 가족들은 만나본 적이 없었다. 더구나 반제승 본인도 자신의 아내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데 다른 사람은 더 알 턱이 없었다. 어두운 표정으로 떠난 반제승을 떠올리며 성혜인은 약간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 “반승제 씨는 아무래도 제가 마음에 안 드는 것 같아요.” 예쁜 여자라면 직업이고 뭐고를 떠나 사족을 못 쓰는 임경헌은 물씬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럴 리가요. 혜인 씨의 디자인은 제가 본 것 중 최고였어요. 저희 사촌 형이 경영을 배우는 동시에 예술도 배웠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보아냈을 거예요. 오늘은 그냥 이혼때문에 기분이 나쁜 것 같아요.” 성혜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때 양한겸이 깜짝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반승제 씨가 결혼했다고요?” 임경헌이 머리를 끄덕이며 말했다. “진작에 했어요. 하지만 요즘은 이혼하느라 변호사랑 골머리를 앓는 모양이에요.” 임경헌은 성인이 되고 나서 흥청망청 노느라 집으로 돌아간 적이 별로 없었다. 그도 그저 반승제에게 할아버지가 찾아준 아내가 있다는 것만 알았다. 결혼 얘기를 처음 들은 양한겸은 궁금한 듯 계속해서 물었다. “저는 네이처 빌리지의 펜션이 신혼집인 줄 알았어요. 만약 신혼집이 아니라면 혼자 사시는 집인가요?” 임경헌은 성혜인에게 와서 앉으라고 손짓하며 말했다. “신혼집이기는 해요. 저희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는데 할아버지 때문에 억지로 지금의 형수랑 결혼했거든요. 그래서 이 집은 좋아하는 여자랑 결혼하면 같이 살려고 준비하는 것 같아요.” 임경헌은 이렇게 말하면서 성혜인에게 주스를 건네줬다. “형이 곧 다시 온다고 했으니, 그때 다시 혜인 씨의 설계도를 보여주자고요. 형도 무조건좋아할 거예요.” 성혜인은 주스를 받아 들면서 미소를 지었다. “고마워요. 제가 후에 꼭 밥 살게요.” 임경헌은 성혜인의 당당한 태도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 제 형이랑 같이 일하면 돈은 둘째 치고 혜인 씨의 명성에도 아주 도움이 될 거예요.” 임경헌의 말이 맞았다. 이번 일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성혜인의 고객층은 상류 사회로 진급할 수 있었고 양한겸의 회사도 일 없을 걱정을 안 해도 되었다. 복도의 다른 한쪽에서 문이 열리고 반승제가 차가운 아우라를 풍기며 안으로 들어섰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울리는 휴대폰에 반승제는 머리 숙여 확인했다. 전화를 건 사람이 임경헌인 것을 보고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무시했다. 곁에 있던 남자는 반승제의 표정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왜 그래? 네가 이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누가 감히 가까이하겠어?” 룸은 아주 컸고 사람도 꽤 많았다. 하지만 반승제의 주변에 있는 사람은 전부 권세의 중심에 있는 최상층이었다. 다른 사람은 반승제를 보고서도 멀리 떨어져 앉았다. 온시환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술 한 잔을 건네줬다. 그는 아주 다정하고 부드러운 인상을갖고 있었다. “왜 그래? 혹시 와이프가 사인을 안 해줘?” 반승제가 이혼을 준비하고 있는 것은 비밀이 아니었다. 아마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반태승의 귀에도 들어가게 될 것이다. 반승제는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기댔다. 그는 패왕의 기운을 뽐내며 말했다. “아니. 우리가 어떻게 결혼하게 됐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사인을 안 할 리가 없지.” 반승제는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은 듯 퉁명스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리고 반승제가 기분 나쁜 이유는 명의상의 아내가 아닌 방금 전의 여자 때문이었다. 그는 그토록 생소해 보이는 여자가 3년의 경력을 갖고 있을 줄은 몰랐다. 이때 옆 테이블에서 마침 여자 친구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남자들은 사석에서 이런 얘기를 서슴없이 했는데 평소에는 그다지 관심 없었던 반승제도 오늘따라 몇 마디 듣게 되었다. “결국에는 순진한 척한 거였다고? 그래서 넌 어떻게 했는데?” “어떡하긴, 당연히 헤어졌지. 병원을 얼마나 다녔으면 의사가 다 알아볼 지경인지... 내가 심지어 결혼까지 생각했잖아. 만약 진짜 결혼했더라면 누구의 자식인지도 모르는 애를 공짜로 키워줄 뻔했어.” 돈 많고 시간 많은 부잣집 도련님에게 가장 재미있는 화젯거리가 바로 여자였다. “요즘 여자 중에 단순한 여자가 어디 있어? 네가 어떤 유형의 여자를 좋아하든 다 찾을 수 있을 지경이라니까? 그리고 단순해 보이는 여자일수록 사석에서 더 문란하게 놀지도 몰라.” 반승제는 술잔을 들고 있는 손에 힘을 더했다. 그의 머릿속에는 성혜인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어젯밤 일어난 일들도 선명하게 떠오르면서 말 못 한 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이때 임경헌이 또 전화 와서 재촉하면서 자신의 룸에서 얼굴을 보고 얘기하자고 했다. 제7화 거래도 인연을 따져요 “무슨 얘기?” 반승제의 말투는 무서울 정도로 차가웠다. “앞으로 네 마음대로 이상한 여자 소개해 주지 마.” 자신의 사촌 동생이 고객 중 한 명이라니, 반승제는 도저지 무시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런 것을 더 즐기는 독특한 취향의 소유자는 어디에나 있었다. 금욕적인 생활을하는 반승제는 당연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임경헌이 밖에서 이상한 것을 배워왔다고 생각하며 그는 조만간 잔소리를 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형, 진짜 안 올 거예요? 제가 형이랑 맞는 사람을 찾느라 한참 헤맸단 말이에요.” 인테리어가 필요한 집이라면 임경헌에게도 몇 채 있었기에 그는 개의치 않는 듯 말했다. “형이 싫으면 제가 냉큼 데려갈 거예요. 저는 아주 마음에 들거든요.” 반승제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너 이제 이상한 사람들이랑 어울리지 말고 BH그룹으로 와서 인턴부터 시작해. 네 어머니가 이미 나한테 다 얘기했어. 그러니 넌 내일부터 출근해,” 반승제는 임경헌에게 반발할 시간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임경헌은 난감한 표정으로 성혜인을 바라봤다. 성혜인은 바로 자신이 거절당했음을 알아차리고 위로했다. “괜찮아요. 반승제 씨가 따로 마음에 드는 디자이너가 있나 보죠. 좋아하는 사람이랑 같이 사는 펜션이라면 신중하게 선택하는 게 당연한 거예요.” 임경헌은 한숨을 쉬면서 말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저는 아직도 디자이너를 찾고 있다고 들었거든요.” 성혜인은 덤덤한 표정으로 말했다. “거래도 인연을 따져요. 저랑 반승제 씨는 인연이 아닌가 보죠.” “제가 후에라도 다시 물어볼게요. 만약 형이 싫다고 하면 제집을 디자인해 줘요. 저는 혜인 씨의 스타일이 엄청 마음에 들었거든요.” 성혜인은 미소를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알아봐 주셔서 고마워요.” 임경헌은 또 전화 한 통을 받더니 두 사람을 향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저녁은 제가 낼게요. 저는 다른 일이 있어서 이만 가봐야 하는데 전화번호를 줄 수 있어요? 저희는 다음 날에 다시 만나요.” 성혜인은 주저 없이 자신의 번호를 적어 임경헌에게 건네줬다. 임경헌은 전화번호를 휴대전화에 저장한 다음에야 밖으로 나갔다. 고요한 룸 안에는 성혜인과 양한겸만 남았다. 양한겸은 2차까지 달리느라 약간 취한 모습이었다. 임경헌이 나가자마자 그는 편안한 자세로 소파에 기대앉았다. “제가 대리 불러줄게요.” 양한겸이 자신을 위해 지금까지 버티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성혜인은 그에게 꽤 고마웠다. 게다가 그녀는 양한겸 덕에 아주 편하게 일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 혜인아.” 시름을 놓은 양한겸은 바로 잠들어 버렸다. 성혜인은 그를 직접 집까지 바래다주고 싶었지만, 아직 신혼인 아내가 질투심이 많아 그냥 안전하게 대리를 부르기로 했다. 성혜인은 양한겸을 부축하며 룸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방금 올라온 곳과는 다른 방향의 엘리베이터를 탔다. 이쪽이 출구와 더 가깝기 때문이다. 양한겸은 헤롱헤롱해서 뭐라 중얼거렸다. “그런 게 아니라니까. 나도 피곤해... 나한테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다고...” 양한겸은 아무래도 꿈에서 아내와 싸우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성혜인은 힘이 더 들더라도 그와 거리를 유지하며 부축해 줬다.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성혜인은 양한겸을 부축한 채 느릿느릿 안으로 들어갔다. 이때 길고 힘 있는 손이 곧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을 잡아줬다. 손을 따라 머리를 드니 돌연 반승제의 얼굴이 보였다. 고맙다는 말은 성혜인의 목에 막힌 채 도무지 나가지 않았다. 3년 동안 보이지 않던 사람을 오늘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계속 마주쳤는데, 이걸 인연이 있다고 할지 없다고 할지 참 애매했다. 반승제는 성혜인과 양한겸을 번갈아 쳐다보며 말했다. “몇 층?” 반승제는 편안한 자태로 셔츠 단추 두 개를 풀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여전히 차갑기만 했다. 성혜인은 그의 눈빛 속에서 스쳐 지나간 무시와 비웃음을 보아냈다. 그렇게 이상한 분위기 속에 그녀는 딱딱한 말투로 말했다. “1층이요. 감사합니다.” 이때 양한겸이 또다시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돈돈돈, 넌 항상 돈 얘기밖에 모르지. 넌 나를 좋아하기나 해?” 성혜인은 회사에서 양한겸의 아내가 사치를 즐긴다는 말을 들은 적 있었다. 양한겸이 뼈빠지게 일해서 번 돈도 전부 아내에게 준다고 했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던 성혜인은 어딘가에서 찬 바람이 부는 것만 같아서 몸을 흠칫 떨었다. 반승제가 돌연 말을 걸어왔다. “이쪽도 고객?” 성혜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 왜냐하면 지금은 양한겸을 그에게 소개해 줄 타이밍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 그래도 그들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반승제가, 사장이라는 사람이 문라이트에서 이정도로 취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아예 블랙 리스트에 넣어버릴지도 몰랐다. “맞아요.” 제8화 줄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성혜인의 표정이 너무도 태연한 나머지 반승제는 자신이 너무 단순해서 지금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는 건가 싶었다. 반승제는 마치 조각상이라도 된 것처럼 어두운 표정으로 꼼짝하지 않고 서 있었다. 성혜인은 엘리베이터가 내려가는 동안이라도 회사의 미래를 위해 쟁취를 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일을 시작하고 나서야 체면이란 얼마나 보잘것없는 것인지 깨달았다. 그리고 그깟 체면에 비해 반승제가 줄 수 있는 게 너무 많았다. “반승제 씨는 어떤 스타일을 좋아하는지 알려줄 수 있어요? 저도 한 번 도전해 보고 싶어요. 만약 마음에 안 든다면 돈을 받지 않고 포기할게요.” 반승제는 도대체 어떻게 이 여자를 형용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는 한참이나말문이 막혀서 가만히 있다가 겨우 한마디 했다. “고객이라면 이미 있잖아?” 성혜인은 약간 놀란 눈치였다. ‘혹시 본인의 일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까 봐 이러는 건가?’ 동시에 여러 고객의 일을 하는 디자이너도 물론 있지만 성혜인은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그래서 그녀는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 문제라면 걱정하지 마세요. 반승제 씨를 맡게 되면 다른 고객은 받지 않을 거예요. 만약 관심이 있으시다면 저한테 5분만 내어주실 수 있을까요?” “관심 없어.” 반승제는 먼저 엘리베이터 밖으로 나섰다. 양한겸을 부축하고 있는 성혜인은 어찌 따라갈 방법이 없었다. 그녀는 그저 양한겸을 데리고 대리 기사가 있는 곳으로 갔다. 양한겸은 술에 취했어도 성혜인과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성혜인이 문라이트 밖으로 나서자마자 멀지 않은 곳에 세워져 있던 차 안에서 예쁜 여자한 명이 내려왔다. 여자는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성혜인의 뺨을 때렸다. “너지?! 회사에서 물어볼 게 있다며 귀찮게 굴 뿐만 아니라 집으로 ‘사랑의 커피’를 보낸 사람이 너지?! 내가 진작에 발견했어. 너 오늘은 내 남편이랑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양한겸을 부축하고 있느라 미처 피하지 못한 성혜인은 뺨이 불타오르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화를 주체하지 못한 채 몸을 부들부들 떨었고 눈가도 빨개졌다. “내가 너 같은 년을 모를 것 같아? 남의 가정 파탄 내는 게 취미인가 본데, 네가 양한겸이랑 같이 있어봤자 얻는 게 없을 거야. 어차피 돈은 다 나한테 있거든!” 성혜인은 어이가 없었다. 양한겸에게 꼬리 치는 직원이 확실히 있기는 했지만, 회사에 자주 가지 않는 성혜인과는 별 상관이 없었다. 아내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양한겸은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잡았다. “재이야, 일단 진정해.” 장재이는 펄쩍 뛰면서 양한겸의 손을 뿌리쳤다. “내가 지금 진정하게 생겼어? 이 년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유부남한테 꼬리 치잖아. 커피랑 벨트를 사준 건 그렇다 쳐. 근데 이제는 자기 생일에도 불러내는 거야?” 분노에 휩싸인 장재인은 성혜인의 얼굴을 확 찢어버리고 싶었다. “넌 예쁜 얼굴을 그렇게밖에 못 써먹어?!” 양한겸은 머리가 아팠다. 그는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성혜인에게 말했다. “미안해, 혜인아. 오늘은 먼저 돌아가.” 성혜인은 그저 재수 없는 셈 치기로 했다. 아무리 화가 난다고 해도 선배의 아내와 치고받고 싸울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멀지 않은 곳의 차 안에서 반승제가 무표정한 얼굴로 창 밖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길 한복판에서는 ‘바람피운 남편 잡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반승제의 시선을 따라 심인우도 시끄러운 세 사람을 발견했다. 장재이는 언성을 높이며 욕설을 날리고 있었고 양한겸은 작은 목소리로 타이르고 있었다.한쪽에 서 있는 성혜인은 얼핏 보면 구경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렇게 젊은 여자가 유부남을 만나고 다니다니...’ 심인우는 속으로 감탄했다.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지, 만약 누군가가 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린다면 아주 시끄러워질 것이다. 반승제는 시선을 거두면서 심인우에게 말했다. “이만 가지.” 제9화 저는 대표님의 아내예요 이튿날 아침, 성혜인은 메이크업으로 간신히 뺨에 난 자국을 가리고 출근했다. 양한겸의 회사는 한 건물에서 2층만 사용하고 있었는데 성혜인은 아르바이트생으로서 굳이 출근하지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회의는 꼭 참가해야 했다. 예전 같으면 가장 먼저 도착해 있어야 할 양한겸이 오늘은 반 시간이나 늦게 도착했다. 그는 어제와 같은 정장을 입고 있었고 행색도 단정하지 못했다. 성혜인은 바로 양한겸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렸다. “늦어서 죄송해요.” 양한겸은 가장 앞으로 가서 앉았다. 성혜인의 걱정하는 눈빛을 보고 그는 멋쩍게 미소를지어 보였다. 직원들이 순서대로 보고를 끝내고 회의도 끝이 났다. 성혜인은 다른 직원과 함께 나가려고 하다가 가만히 앉아있는 양한겸을 발견하고 다가가서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요?” 양한겸은 피곤한 듯 미간을 누르며 말했다. “재이 친정에 문제가 생겼어.” 그는 밤새 골머리를 앓은 듯 목소리가 걸걸했다. 그리고 어떻게 말을 꺼내야할지 머뭇거렸다. “많이 심각해요?” 양한겸은 한참이나 말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곧 결심했는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지금 회사를 팔아야 하는 건 아닌지 고민하고 있는데... 어떻게 직원들한테 말해야 할지 모르겠어.” 성혜인은 약간 놀란 표정이었다. 회사가 승승장구하는 타이밍에 판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것이었다. 게다가 양한겸은 돈이 모자란 사람이 아니었다. 이 회사는 양한겸이 다년간 노력한 결과이기에 그도 마음 같아서는 팔고 싶지 않았다. “아직 얼마나 필요한데요?” “적어도 40억 정도.” 양한겸은 씁쓸한 표정으로 이어서 말했다. “반승제의 일이 성사됐으면 좋았을 것을... 아쉽게 됐네.” “제가 계속 얘기해 볼게요.” 성혜인은 자신의 물건을 정리하며 말했다. “그리고 이 일을 아직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마요.” 양한겸은 한숨을 쉬었다. “너도 반승제 때문에 너무 스트레스받지는 마. 그리고 어제는 내 아내가 전적으로 잘못했어. 내가 대신 사과할게.” 회의실에서 나온 성혜인은 혹시 몰라 BH그룹으로 가보려고 했다. 어찌 됐든 반승제를 만나야만 일 얘기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BH그룹은 제원 CBD 센터에 있었다. BH그룹은 이 지역에서 가장 높은 건물에 위치했는데, 위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모든 것이 BH그룹의 것이라는 말까지 있었다. BH그룹의 자산은 지금도 여전히 빠른 속도로 올라가고 있었다. 성혜인은 성큼성큼 BH그룹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 데스크 직원은 낯선 얼굴을 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저는 반승제 대표님을 만나러 왔어요.” 직원은 약간 멈칫하다가 성혜인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예약이 없으면 만나실 수 없어요.” 성혜인은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물었다. “혹시 일 얘기를 하는 거라면요?” “그건 상무팀에 연락하세요. 상무팀에서 대표님에게 결재받을 겁니다.” 성혜인이 침묵하는 것을 보고 직원은 무시하는 눈빛을 대놓고 드러냈다. 그녀는 또 주제모르는 여자가 문 앞에서 하루 종일 반승제가 퇴근하기만을 기다리고 있겠다고 생각했다.요즘 따라 이런 사람이 점점 많아지고 있었다. 반면 성혜인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런 상황에서 ‘저는 대표님의 아내예요’라고 할 수도 없고 말이다. 하지만 이렇게 기다리다가는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몰랐다. ‘반씨 저택으로 찾아가야 하나?’ 성혜인이 어찌할 바를 몰라 고민하고 있을 때 메시지 한 통이 왔다. ‘성혜인 씨, 안녕하십니까. 저는 반승제 씨의 변호사입니다. 제가 이혼 서류 건으로 두 번이나 방문했지만 댁에 계시지 않아 그러는데 혹시 지금 만나 뵐 수 있을까요?’ 제10화 이혼 서류를 성씨 저택으로 보내 창가의 의자에 앉아 있던 성혜인은 바로 답장했다. ‘제가 직접 반승제 씨와 얘기할 수는 없을까요?’ 이미 BH그룹까지 온 마당에 반승제만 원한다면 두 사람은 바로 만날 수 있었다. 변호사는 반승제와 상의해 본다고 답장하고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BH그룹의 가장 위층. 반승제는 검은색 대리석으로 장식된 사무실에서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이때 심인우가 안으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성혜인 씨가 대표님과 만나고 싶다고 합니다.” 반승제는 덤덤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며 말했다. “거절해요.” 반승제는 이것 또한 이혼하지 않을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나랑 만나면 뭐가 달라질 줄 아나? 퍽이나...’ 반승제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변호사더러 이혼 서류를 성씨 저택으로 보내서 직접 사인할 때까지 지켜보고 있으라고 해요.” 심인우는 반승제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 성혜인의 얘기를 그만하고 스케줄을 확인했다. “HD은행 이문호 대표님과의 골프 스케줄은 지금 출발해야 합니다.” 반승제는 자리에서 일어나 넥타이를 정리하며 말했다. “그래요.”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성혜인은 가만히 앉아서 분주하게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봤다.마치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이 말이다. 기다림은 아주 평화로웠다. 성씨 저택에서 전화가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혜인아,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승제가 왜 너랑 이혼해?” 성휘는 다급하게 말했다. “둘이 싸우기라도 했어? 일단 집으로 와서 잘 좀 얘기해 보자.” 성혜인은 약간 고민하다가 말을 꺼냈다. “아빠, 아무리 남편이라고 해도 저희는 남과 다를 바 없어요. 그리고 승제 씨가 귀국한 이상 저를 아내로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ㅂ 성휘는 급한 나머지 랩을 하는 것처럼 말했다. “혜인아, 이혼은 절대 안 된다. SY그룹에서 곧 투자 유치를 시작할 건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이혼한다면 주가가 무조건 하락할 거야.” 휴대전화 건너편에서는 소윤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내가 이럴 줄 알았어요. 혜인이 조금만 노력했더라면 일이 이렇게까지 되지 않았죠. 저희 집안은 아주 동네방네 비웃음당하게 생겼네요!” 성휘는 약간 침묵하다가 다시 말했다. “아빠도 네가 걱정돼서 이러는 거야. 여자는 재혼이 어렵다고 하잖아. 정 안되면 회장님을 찾아가. 회장님은 너를 아껴주잖아...” 성혜인은 이게 도대체 회사를 위한 일인지, 소윤을 위한 일인지 묻고 싶었다. 어찌 됐든 그녀 자신을 위한 일은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머니가 금방 돌아가셨을 때, 성휘가 자신에게 얼마나 잘해줬는지 기억났기 때문이다. 성혜인은 반태승이 해외 요양원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고 둘러대고는 전화를 끊었다. 반승제의 변호사가 이혼 서류를 성씨 저택으로 보낸 걸 봐서 아무래도 직접 만나기는 그른 것 같았다. ‘한 번 만나기도 이렇게 어려우니, 도대체 나를 얼마나 미워하는 거야.’ 반승제의 태도가 이렇게 명확한데도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것은 소용없었다. 성혜인은 넋이 나간 채로 차에 올라타다가 무릎을 찍고 말았다. 그녀는 혼자 끙끙거리다가 양한겸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HD은행 대표 아들 이승주가 너한테 연락한 적 있어?’ 성혜인은 문뜩 이승주라는 사람이 떠올랐다. 그녀는 다른 고객을 위해 재료를 준비하느라 미처 보고하는 것을 잊고 말았다. 양한겸의 말로는 이승주가 회사에 디자인을 맡겼는데 지금 골프장에서 성혜인과 만나고 싶다고 했단다. 골프장은 교외에 위치했는데 땅값 비싼 제원에서 엄청난 면적을 차지하고 있었다. 성혜인이 골프장에 주차하자마자 이승주의 비서라는 사람이 데리러 왔다. “페니 씨, 안녕하세요.” 비서는 미소를 지으면서 말했다. “이쪽으로 오세요.” 성혜인은 비서를 따라 탈의실로 왔다. 비서가 설명했다. “풀밭을 손상하지 않기 위해 외부인은 함부로 들어갈 수 없다는 규정이 있어서 필요한 물건을 제가 미리 준비했습니다. 골프는 칠 줄 아세요?” “조금은요, 잘은 못 쳐요.” “그럼 일단 제가 준비한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도련님은 이미 입장하셨어요.” 성혜인은 머리를 끄덕였다. 그녀는 일을 받기 위해 고객과 테니스도 치고 낚시도 한 적 있었다. 그에 비해 골프는 아주 양반이었다. 비서는 짧은 치마로 된 하얀색 골프복과 같은 하얀색의 머리띠를 준비했다. 성혜인은 깔끔하게 머리를 묶고 골프채를 챙겨 든 채 밖으로 나왔다. 로비로 내려온 성혜인은 창밖의 골프장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문뜩 남다른 기세의 남자가 차가운 기운을 뽐내며 수많은 사람과 함께 다가오는 것을 발견했다. 성혜인은 마치 행동 능력을 잃은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곳에서 반승제와 만나게 될 줄은 몰랐다. 게다가 그녀는 너무 눈에 띄는 곳에 서 있어서 모른 척 지나갈 수가 없었다. 맑은 눈빛에 깔끔하게 묶은 머리는 성혜인을 청순발랄하게 만들어줬다. 더구나 짧은 치마 덕에 하얀 다리가 완전히 드러났고 무릎의 빨간 자국도 유난히 눈에 띄었다. 반승제는 성혜인을 힐끔 보기만 하고 금방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