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친의 능멸을 당한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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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친의 능멸을 당한 그 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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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 지 10년째 되어가던 어느 날, 한때 절친이었던 성수지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녀의 딸과 내 아들이 각자 그녀와 내 남편 품에 안겨 단란하...

Chương (1)

第1章

결혼한 지 10년째 되어가던 어느 날, 한때 절친이었던 성수지가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그녀의 딸과 내 아들이 각자 그녀와 내 남편 품에 안겨 단란하게 찍은 사진이었다. 오붓한 사진과 함께 달린 문구 한 줄이 유독 눈에 띄었다. [이런 게 바로 아들, 딸 다 가진 행복 아니겠어요?] 나는 그 아래에 댓글을 남겼다. [잘 어울리네.] 곧이어 피드가 삭제됐고 그다음 날... 남편이 다짜고짜 집에 돌아와 내게 질문을 쏘아붙였다. “수지가 간만에 컨디션이 좋아졌는데 꼭 그렇게 자극해야겠어?” 아들도 나를 밀치면서 원망을 늘려놓았다. “다 엄마 때문이에요. 엄마가 서아까지 울렸잖아요.” 나는 이혼합의서를 그들 얼굴에 내던졌다. “그래, 다 내 탓이니까 이만 빠져줄게. 넷이 오붓하게 잘살아 봐!” 제1화 이혼합의서는 내가 30분 전에 금방 프린트해놓았다. 그전엔 거실 소파에서 밤새 앉아 있었고... 식탁 위엔 내가 정성껏 차려놓은 열몇 개의 음식이 그대로 놓여 있었다. 울트라맨 케이크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크림이 녹아버렸다. 실은 어제가 아들 이유준의 생일이었다. 남편 이건우는 친히 나더러 집에서 잘 준비하고 있으라고 당부했다. 유준이를 데려와서 함께 생일을 보낼 거라면서... 다만 종일 기다린 결과 성수지의 SNS에 넷이 찍은 가족사진이 떡하니 올라왔다.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가. 이건우는 내 입에서 이혼 얘기가 나올 줄 몰랐던지 미간을 찌푸리고 이혼합의서를 갈기갈기 찢었다. “강하은! 또 무슨 수작이야? 유준이 데리고 수지네 집에 간 걸 까먹고 말하지 못했을 뿐이잖아.” 말을 마친 후 한 상 가득 차린 음식과 케이크를 보더니 눈가에 죄책감이 살짝 스쳤다. 그의 말투가 조금은 느슨해졌다. “그래, 알았어. 어젠 내가 까먹고 얘기하지 못했어. 앞으론 주의할게.” “여긴 내가 치울 테니 가서 좀 자. 점심에 유준이랑 셋이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그는 늘 이런 식이다. 병 주고 약 주는 한심한 인간이다. 본인이 도가 지나친 걸 뻔히 알면서도 사과는 안 하고 그저 조금만 자세를 낮추는 척한다. 이때 내가 얌전히 순응하지 않으면 바로 냉전에 돌입하고 그 결말은 늘 내가 먼저 찾아가서 고개를 숙이는 식이었다. 전에는 늘 그래왔겠지만 이번엔 아니었다. 나는 탁자 밑에서 이혼합의서를 한 부 더 꺼내 그에게 밀어붙였다. “몇십 부 준비했으니까 찢고 싶으면 실컷 찢어.” 화가 난 이건우는 그릇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그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내게 쏘아붙였다. “까놓고 말해서 넌 그냥 유준이가 수지를 더 좋아해서 질투 난 거잖아?!” “강하은, 잊지 마! 이건 네가 수지한테 빚진 거야.” “나랑 유준이가 수지 모녀를 챙겨주는 건 너 대신 속죄하는 것뿐이라고!” ‘속죄? 대체 내 죄가 뭔데?!’ 나랑 성수지는 한때 절친한 사이였다. 대학교 3학년 여름방학 때 그녀가 나랑 함께 놀러 가자고 했다. 실컷 놀고 저녁에 집에 돌아갈 때 나는 큰길로 가고 싶었지만 성수지가 길목에서 친구가 기다린다며 기어코 작은 길로 가겠다고 했다. 결국 우린 각자 제 갈 길로 갔다. 하지만 그다음 날 잠에서 깨자마자 이건우가 느닷없이 우리 집에 쳐들어오더니 내 멱살을 잡고 울부짖었다. 대체 왜 경찰에 신고하지 않았느냐고, 왜 성수지를 내팽개쳤냐고 말이다. 나는 어리둥절해 있다가 뒤늦게 알게 됐다. 성수지는 작은 길로 가다가 몇몇 건달들에게 겁탈을 당했다고 한다. 의외인 것은 그녀가 날 위해 건달들을 유인하다가 되레 나쁜 짓을 당했다고 거짓말을 해버렸다. 내가 아무리 해명해도 아무도 믿어주는 자가 없었다. 게다가 CCTV까지 고장 나버리니 이 죄명을 뒤집어쓰는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난 모든 이에게 죄인으로 낙인됐다. 부모님은 내가 매정하다고 구박했고 이건우는 날 냉혈인이라고 했다. 나를 향했던 모든 사랑이 보상이란 명목으로 성수지에게 돌아갔다. 그들은 심지어 내가 성품이 비열해서 유준이를 키울 자격이 없다면서 아이까지 뺏어갔다. 바로 그 때문에 나랑 이유준의 관계가 이토록 삭막해진 것이다. 다만 나는 유준이를 너무 사랑하고 어떻게든 아이와의 감정을 다시 쌓아가려고 최선을 다하고 있다. 문득 유준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원수를 쳐다보듯 혐오에 찬 눈빛으로 나를 쳐다봤다. “엄마가 아빠랑 수지 아줌마의 인생을 망쳤어요. 엄마가 없었으면 수지 아줌마가 우리 엄마였을 거잖아요!” 나는 찢어질 듯한 마음을 부여잡고 몸을 휘청거렸다. “누가 그래?” 아이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아니에요?” 곧이어 내 시선이 이건우에게 닿았다. 그 순간마저도 나는 멍청하게 그의 해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 남자는 끝내 내 눈길을 피했다. “유준이는 그때 그 일만 아니었다면 내가 수지랑 결혼할 줄로 알고 있어.” 예전의 나라면 대체 왜 아이에게 해명하지 않았냐고 그에게 따져 물었을 것이다. 명색이 나랑 이건우가 소꿉친구이고, 명색이 내가 이건우의 여자친구였고, 명색이 내가 두 사람을 소개해줬으니까. 하지만 이젠 다 부질없는 노릇이다. 아이가 날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 상관이 없다. 어차피 이제 곧 이 남자랑 남남이 될 테니까. 나는 짐을 싸고 문밖을 나섰다. “생각 마치거든 가정법원에서 만나.” 제2화 이건우는 내가 짐까지 다 싸놓을 줄은 몰랐던지 재빨리 달려와서 앞길을 가로챘다. 바로 이때 문밖에서 지문을 누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곧이어 성수지가 딸 서아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우리 집 도어락에 그녀의 지문이 등록되어 있다니. 내가 분명 이 집에 성수지를 들이지 말라고 했는데 이건우가 끝내... 성수지는 나를 능멸하고 내 모든 걸 뺏어갔다. 나는 그녀가 죽도록 원망스럽다. 아쉽게도 이건우는 내 말을 전혀 마음에 새겨두지 않았다. 나를 본 성수지가 표정이 살짝 변하더니 갖은 가여운 척을 떨었다. “하은아...” 이때 그녀 옆에 있던 서아가 뒤로 몸을 숨더니 마치 내가 미친 야수라도 된 듯 겁에 질린 표정으로 울음을 터트렸다. “아줌마, 우리 엄마 때리지 말아요!” 고작 열 살짜리 어린애가, 이토록 순진한 얼굴을 한 어린애가 어떻게 이런 마음을 품을 수가 있을까? 나는 한없이 차가운 눈길로 서아를 쳐다봤다. 바로 이 아이가 추석날 우리 부모님 댁에서 내가 성수지를 때렸다고 모함했다. 내가 수년을 바라온 추석인데, 한 가족이 오붓하게 모일 수 있는 명절인데 서아가 모든 걸 망쳐놨다. 그해 추석은 그 사고가 일어난 뒤 부모님이 처음으로 나를 집에 초대한 명절이었다. 나도 어떻게든 부모님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노력하고 싶었지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성수지가 글쎄 나를 위층 계단으로 질질 끌고 가더니 뜬금없이 아래로 밀어버리는 것이다. 나는 다리까지 부러졌지만 아무도 내 안부를 안 물었다. 모두가 성수지의 편을 들고 있었다. 다들 그녀에게 둘러싸여 괜찮냐고 물었고 나는 눈물로 호소했다. “수지가 날 밀쳤다고요.” 한편 성수지는 딱히 변명하지 않고 빨개진 눈시울에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하은이가 그렇다면 그런 거죠 뭐.” 이때 서아가 느닷없이 울음을 터트리더니 계단을 내려오며 내게 쏘아붙였다. “아줌마! 대체 왜 우리 엄마를 밀쳤어요?” “엄마도 굳이 아줌마네 가족 모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다고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한사코 초대하시니 마지못해 온 거잖아요.” “우리가 여기 있는 게 싫으면 갈게요.” “하지만 대체 왜 우리 엄마를 밀친 거예요?” 아이의 말이 떨어지기 바쁘게 엄마가 성큼성큼 다가오더니 내 뺨을 가차 없이 후려쳤다. 그러고는 혐오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이 몇 년간 진심으로 뉘우친 줄 알았는데 어쩜 그전보다 더 지독해졌어?!” 그 순간 나는 눈물이 앞을 가렸다. 성수지를 밀치지 않았다고 눈물로 호소했건만 아무도 날 믿어주는 자가 없었다. 아빠는 실망 어린 표정으로 내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설마 서아 저 어린 게 거짓말이라도 했다는 거니?” 이건우도 주먹을 불끈 쥐고 싸늘한 어투로 말했다. “하은아, 너 진짜 답 없다.” 유준이까지 다가와 부러진 내 다리를 힘껏 걷어찼다. 나는 너무 아픈 나머지 나지막이 신음했다. 그럼에도 나를 걱정해주는 자는 없었다. 다들 괴로워하는 날 보며 분이 풀린 듯 거만한 표정을 지었다. 이 모든 게 자업자득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았다. 이때 유준이가 입을 열었다. “엄만 정말 나쁜 사람이야. 난 엄마가 너무 싫어.” ... 그날 나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눈물을 머금고 그 집을 나섰다. 그리고 여태껏 그날의 고통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갈기갈기 찢어질 듯한 이 마음을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때부터 이건우와 이혼할 생각을 했지만 이 남자가 무덤덤하게 이혼합의서를 찢어버리면서 말했다. “하은아, 아직도 모르겠어? 이젠 나 말고 널 사랑해주는 사람은 없어.” 멍청한 나는 그에게 가스라이팅을 당했다. 이 남자가 정말 나를 사랑하는 걸까? 그는 이런 내 생각을 바로 캐치하고 야유를 날렸다. “널 사랑하지 않는데 그동안 네가 저지른 만행들을 어떻게 줄곧 참아왔겠어?” “하은아, 너희 부모님은 이젠 널 버렸어. 수지를 양딸로 들인 거야.” “넌 그냥 얌전히 내 옆에만 있어. 나랑 함께 수지한테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아. 알겠지?” 그날 밤 사랑이 부족했던 나는 끝내 이건우의 설득에 넘어갔다. 이 세상에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을까 봐 두려웠고, 이 가정마저 깨지면 갈 곳 잃은 고아가 될까 봐 두려웠다. 그땐 정말 길바닥에 나앉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사랑받지 못하는 느낌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결국 참고 양보하는 걸 배웠다. 더 이상 날 위한 변명은 없었다. 부자가 보상이란 명목으로 날 외롭게 내팽개치고 성수지 모녀를 편들어줘도 묵묵히 받아들이기만 했다. 다만 나의 희생은 그리 좋은 결말을 맞이하지 못했다. 처참한 과거에 빠져있을 때 유준이가 덥석 앞으로 뛰쳐나오며 나를 사색에서 빠져나오게 했다. 아이는 나를 밀치고 서아에게 달려가 손을 꼭 잡아주었다. “괜찮아, 서아야. 나랑 아빠가 있는 한 아무도 감히 너랑 수지 아줌마 못 건드려.” 곧이어 내게 경고장을 날리는 아들이었다. “감히 아줌마랑 서아 건드리기만 해봐요. 그땐 영원히 엄마 안 봐!” 이를 지켜보던 서아가 착한 척하며 말했다. “오빠, 하은 아줌마한테 너무 무섭게 굴지 말아요...” 아이는 나를 쳐다보며 아양 떨듯 미소를 지었다. “아줌마가 나랑 엄마 싫어하는 거 알아요.” “하지만 우린 이젠 아무것도 없어요. 제발 내쫓지 않으면 안 돼요?” 역시 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가여운 척 수작 부리는 꼴은 쏙 빼닮았다. 나는 씩 웃으면서 아이에게 말했다. “왜 아무것도 없어? 앞으로 이 집이 다 너희 건데.” 제3화 서아는 아직 어린아이였던지라 나의 숨긴 감정을 온전히 읽어내지 못했다. 이 집이 곧 본인들 집이라고 하자 아이가 대뜸 흥분하며 되물었다. “정말요?” 이때 성수지가 아이의 팔을 잡아당기며 당황한 기색을 드러냈다. “서아야, 그만!” “여긴 하은 아줌마네 집이야.” 곧이어 빨개진 눈시울에 속상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하은아, 난 단 한 번도 너랑 건우 오빠 감정을 깨트리려고 한 적 없어.” “지금 바로 갈게. 그만 화 풀어, 응?” 이 말을 들은 이건우가 앞으로 나서며 성수지의 팔을 붙잡았다. 성수지도 못 이기는 척 그의 품에 기울었다. 이건우는 그녀를 품에 안은 채 나와 눈이 마주치더니 황급히 손을 내려놓았다. 성수지의 눈가에 아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곧장 서러움으로 바뀌었다. “오빠, 나 말리지 말아요. 원래 우리가 방해한 거잖아요.” 그녀는 말하면서 꼭 마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눈물을 흩날렸다. 서아도 그녀 품에 안겨 엉엉 울었다. “엄마, 울지 말아요. 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짐 덩어리가 돼서 엄마를 힘들게 했잖아요.” 나는 싸늘한 시선으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이들 모녀가 연기자로 데뷔하지 않는 것은 그야말로 연예계의 막대한 손실이었다. 한편 이건우는 안쓰러운 눈길로 두 모녀를 바라봤다. 그들이 안쓰러울수록 울화가 더 차오르는 모양이다. 그는 불쑥 나를 째려보며 말했다. “내가 두 사람 이사 오라고 했어. 수지네 집 천장에 물이 새서 며칠 수리해야 해. 어차피 우리 집 별장이라 방이 많으니 이리로 오라고 한 거야.” “너희 두 사람 이 기회에 서로 오해도 풀고 좋잖아. 근데 넌 어떻게 아직도 수지랑 서아한테 이토록 적대적이야? 서아 저 어린애를 꼭 그렇게 속상하게 해야만 만족하겠어?” 비록 이젠 이건우의 그 어떤 말도 타격이 없다고는 하지만 무식한 저 발언을 도저히 들어줄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 “건우야, 눈이 멀었으면 병원을 가. 쟤네가 와서부터 지금까지 나 딱 한 마디밖에 안 했어.” “너희들이 온갖 스토리를 짜낸 거잖아. 이 정도면 노벨문학상 감인데, 아쉽다 아쉬워. 그리고 나 이제 이 집 떠나. 네가 누굴 데려오든 신경 쓸 것 같아?!” 이건우는 망연자실한 눈길로 나를 쳐다봤다. 정말 내가 체념한 건지 아니면 일부러 밀당하는 건지 갈피를 못 잡은 모양이다. 나는 그런 그를 밀치고 캐리어를 챙겨서 집 밖을 나섰다. 그제야 이건우도 정신을 차렸다. 내가 정말 이혼할 각오가 되어있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내가 지금 이 집을 나섰으니까. 그는 저도 몰래 반년 전 성수지의 교통사고가 떠올랐다. 그녀가 퇴원한 후 서아는 집에 엄마랑 단둘이 있어서 너무 무섭다고 했다. 이에 이건우는 두 모녀를 별장으로 이사 오라고 했다. 그때 난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집안의 모든 물건을 부수며 성수지를 이 집에 한 발짝만 들이면 위층에서 떨어져 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건우는 하는 수 없이 성수지 모녀가 이사 오는 걸 포기했지만 이 때문에 무려 나랑 3개월이나 냉전을 벌였다. 3개월 뒤 유준이가 알레르기로 병원에 입원했고 나는 아이를 돌보러 병원에 가겠다고 했다. 이때 이건우가 대뜸 못 가게 가로챘다. 궁지에 몰린 나는 하는 수 없이 그에게 머리 숙여 사과했고 그제야 우리의 냉전이 끝났다. 다만 그 뒤로 이건우를 향한 내 마음이 예전처럼 뜨거워지지 못했다. 내 태도가 얌전해지다 못해 계단에서 굴러떨어졌을 때보다 더 고분고분해졌다. 이건우는 이런 나의 변화에 은근히 거만을 떨기도 했다. 드디어 제멋대로이고 고집스러운 나를 제압했다고 으쓱해 하는 것 같은데 정작 나는 그때부터 이건우를 향한 감정이 조금씩 고갈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다 결국 일말의 미련도 안 남게 되었다. 이건우가 문밖을 뛰쳐나와 나를 붙잡고 싶었지만 성수지가 갑자기 불러세웠다. 그가 뒤돌아보니 성수지의 품에 안겨 있던 서아가 언제부터인지 기절해 있었다. “오빠, 서아 왜 이래요?” 유준이도 초조해서 이건우의 옷소매를 잡아당겼다. “아빠, 얼른 서아 병원에 데려가야죠!” 아이는 이 집을 떠난 엄마가 전혀 안중에도 없었다. 이건우도 망설임 없이 서아를 안고 별장을 뛰쳐나갔다. 문밖을 나선 후에야 밖에 큰 눈이 내리는 걸 알아챘다. 갑작스러운 폭설에 나는 바로 택시를 잡지 못했다. 또한 이곳은 교외의 별장 구역이라 하는 수 없이 시리도록 차가운 눈을 맞으면서 앞으로 걸어 나가야만 했다. 이건우의 차가 대뜸 앞에 세워지고 차창이 내려졌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째려봤다. “타.” 내가 거들떠보지 않자 이건우가 짜증 내며 핸들 대를 두드렸다. “적당히 하라고!” 이때 그의 휴대폰에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은이 너 계속 소란 피우면 엄마가 연 끊을 줄 알아!” 나는 씩 웃고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나 원래 당신 딸 아니잖아요. 안 그래요 아줌마?” 제4화 이건우가 씩씩거리며 그냥 가버렸다. 물론 엄마의 목청이 터질 듯한 욕설도 차와 함께 멀어져갔다. 차가 내 앞을 쌩하고 지나갈 때 성수지의 오만한 표정을 나는 똑똑히 지켜보았다. 분명 자기가 이겼다고 여기겠지. 나는 또 한 번 가족에게 버림받은 외롭고 가여운 애벌레가 되었다. 다만 이젠 진짜 신경이 안 쓰였다. 부모든 남편이든 아들이든 다 필요가 없다. 성수지가 원한다면 넙죽 건네지 뭐. 생각은 이토록 쿨하게 했지만 너무 열악한 환경 탓인지 자꾸만 안 좋은 추억들이 떠오르고 그 가증스러운 화면들이 하나둘씩 내 머릿속을 꽉 채웠다. 나는 무척 울고 싶었다. 슬퍼서가 아니라 단순히 스트레스를 풀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감히 울 수가 없었다. 눈물 때문에 얼굴이 따가워지면 설상가상인 격이 돼버리니까. 결국 나는 터벅터벅 앞으로 걸어갔다. 두 다리가 뻣뻣해지고 머리가 눈에 꽁꽁 얼어붙어 아무 생각도 안 날 때까지 쉴 새 없이 걸었다. 드디어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을 찾게 됐고 또 마침 운이 좋아서 택시까지 잡았다. 하지만 그 택시가 내 앞에 멈춰서면서 길이 미끄러워진 바람에 그만 나를 들이받고 말았다. 사실 그리 심하게 부딪힌 것도 아니지만 눈밭에 털썩 드러눕고 또 너무 오래 눈을 맞고 다니다 보니 몸에 체온이 떨어져 정신을 잃고 말았다. 다시 깨났을 때 온몸이 차에 한 번 짓눌린 것처럼 너무 고통스러웠다. 머리가 어지럽고 눈꺼풀은 천근만근 무거웠으며 온몸이 불구덩이처럼 활활 타올랐다. 목구멍엔 또 불덩이를 쑤셔 넣은 듯 꽉 막혀버렸다. 안간힘을 쓰며 눈을 떠보니 침대 맡에 준수하고 깔끔한 외모의 젊은 남자가 앉아 있었다. 나는 잔뜩 잠긴 목소리로 겨우 물었다. “여기 어디예요?” 젊은 남자는 내 목소리를 듣고 얼굴에 화색을 띠었다. “깼어요? 정말 다행이네요! 여긴 병원이에요. 그쪽 고열로 무려 이틀이나 기절해 있었어요.” 그가 너무 가까이 들이댄 바람에 내 얼굴에 뜨거운 숨결이 닿아 두 볼이 간질거렸다. 이성과 이토록 가깝게 지내본 적이 너무 오래되었던지라 나는 저도 몰래 꺼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얼른 반듯하게 앉고 귓불이 빨개진 채 내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이름은 배선재이고 아빠의 병 치료 때문에 돈이 시급하여 출근하지 않을 땐 우버로 부수입을 벌어서 생활비를 보태고 있다고 한다. 그도 충분히 조심스럽게 운전했지만 길이 미끄러워진 바람에 차가 통제력을 잃었다고 했다. 다행히 나는 손목을 살짝 다친 것 말고 딱히 큰 부상을 안 입었다. 그밖에도 의사는 내가 빈혈이 심하고 혈당 수치가 너무 낮은 데다가 고열이 내리지 않아 폐렴이 우려된다고 했다. 결국 배선재가 이틀 꼬박 내 옆에 있어 줬다. 나는 그런 배선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얌전한 외모, 아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동안인 얼굴에 커다란 눈망울이 유독 촉촉하게 빛났다. 마치 속세에 때 묻지 않은 듯 눈부시게 빛났다. 그의 옷차림을 쭉 훑어봤는데 브랜드 로고는 없지만 섬세한 장인의 손길이 깃든 코트였다. ‘요 녀석, 눈 하나 깜짝 안 하고 거짓말 참 잘하네!’ 다만 나는 그를 까발린 게 아니라 오히려 이때 내 옆을 지켜줘서 정말 고마웠다. “고마워요. 이만 가보셔도 돼요. 보험사 부르면 되거든요.” 이에 배선재가 솔직하게 대답했다. “실은 저도 그럴 생각이었는데 경찰이든 의사든 전부 그쪽 가족들과 연락이 안 닿아서 마지못해 병원까지 따라왔어요.” 그런 거였구나. 그 사람들 전부 성수지 모녀의 잔꾀에 넘어가 날 거들떠보지 않았구나. 이때 나의 휴대폰이 울렸다. 배선재가 대신 갖다 줬는데 화면에 [남편]이란 두 글자가 떴다. 이 남자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남편이 있는데 병원에서 꼬박 이틀을 홀로 누워있었으니까. 세상에 이런 부부도 있나 싶은 얼굴이었다. 전화를 받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배선재가 이미 버튼을 눌러버렸다. 그리고 자상하게 스피커폰으로 전환했다... 전화기 너머로 이건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강하은, 너 대체 이틀 동안 어디 간 거야?” 나는 두 눈을 희번덕거릴 뿐 더는 이런 멍청이와 말 한마디 섞고 싶지 않았다. 이건우의 말투가 더욱 퉁명스러워졌다. “지금 어디 있든 당장 튀어와. 얼른 와서 수지랑 서아한테 사과하란 말이야. 의사 선생님께서 서아가 그해 그 일로 트라우마가 남았대. 일단 감정이 격해지면 바로 기절한다잖아.” “너 때문에 수지랑 서아 두 모녀가 무슨 죄야? 진짜 일말의 죄책감도 없는 거니?” 나는 그가 너무 혐오스러워서 미간을 찌푸렸다. 미처 말을 꺼내기도 전에 이건우가 계속 제멋대로 입을 나불거렸다. “어머님, 아버님도 오셨어. 네가 수지한테 무릎 꿇고 사과만 한다면 바로 용서하시겠대.” “어머님, 아버님이랑 줄곧 화해하고 싶었잖아? 이런 기회 놓치면 더는 없어.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당장 튀어와.”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이제 막 입을 열려고 하는데 배선재가 대뜸 가로챘다. “하은 씨 못 가요. 이미 죽어서 장례식장에 있어요. 궁금하면 가서 찾아보시든가요?!” “더 지체하면 유골도 못 챙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