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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날밤의 안대
첫날밤, 아내는 내게 안대를 써야 한다고 요구했다. 자신의 몸은 오직 첫사랑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내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려 날카...
Chương (1)
第1章
첫날밤, 아내는 내게 안대를 써야 한다고 요구했다. 자신의 몸은 오직 첫사랑에게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순간 내 마음은 완전히 식어버려 날카롭게 말했다.
“넌 내 마누라야, 아니면 그놈 마누라야?!”
아내는 나보다 더 큰 소리로 외쳤다.
“내가 너와 결혼했다고 해서 너에게 모든 걸 보여줘야 해? 부부 사이에도 강요는 안 돼. 난 내 몸을 오직 도훈 오빠에게만 보여줄 거야. 넌 자격 없어.”
나중에 그녀가 내 아내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나는 그녀가 자격이 없다고 생각했다.
제1화
“쓸 거냐고, 안 쓸 거냐고!”
성하연은 온몸을 꽁꽁 싸매고는 검은 안대를 내 눈앞에 들이밀었다. 마치 장렬히 전사할 준비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에 잠시 멍하니 있자, 성하연은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직접 안대를 내 머리에 씌우려 했다.
“빨리 써.”
나는 눈앞의 여자를 빤히 쳐다봤다.
목까지 올라오는 터틀넥을 입고 목덜미는 물론 피부 한 점 보이지 않게 가린 모습에 수치심이 끓어올랐다.
더 이상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를 수 없어 나는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넌 내 마누라야, 아니면 그놈 마누라야?!”
안대를 쥔 그녀의 손을 탁 쳐내자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그녀에게 오랫동안 좋아한 남자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첫날밤에 이런 식으로 나를 모욕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녀는 이런 식으로 비록 결혼한다 해도 나는 그녀를 가질 자격이 없고 그녀의 몸과 마음은 다른 남자의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를 너무 얕본 것이다.
성하연은 조롱하는 말투로 말했다.
“나는 원래 그의 아내가 돼야 했었어!”
내가 놀라움과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그녀는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나는 오직 그에게만 내 몸을 보여주고 내 온몸 구석구석을 만지게 할 거야. 나는 몸부터 마음까지 온전히 도훈 오빠 거라고!”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옷을 입고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그녀는 어떻게 이런 식으로 나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단 말인가? 오랜 소꿉친구였던 우리의 정이 그 남자의 달콤한 몇 마디에 못 미치다니, 난 모든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나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결혼은 그녀의 아버지 성권휘가 먼저 제안한 거였다.
그녀의 집안 회사는 경영난에 빠져 돌파구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녀는 그동안 아무 걱정 없이 살아왔고 사업에는 문외한이라 성권휘는 회사 일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았다. 문제 해결은커녕 괜히 그녀에게 부담만 줄까 봐 걱정했던 것이다.
성권휘는 나를 찾아와 성씨 가문과 결혼해 성하연을 아내로 맞아달라고 간곡히 부탁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 마음이었다.
그는 내가 성하연에게 품은 마음을 알고 있었고 결혼 후 내가 그녀를 평생 아껴줄 거라고 믿었다.
게다가 우리 두 집안이 결혼으로 맺어지면 내가 성씨 가문의 일에 어떻게든 관여하게 될 거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오랫동안 좋아했기에 성권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부모님이 나를 회사에서 내쫓고 다시는 나를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하더라도 나는 그녀와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회사 경영에 참여하면서 필요한 인맥과 자원들을 확보해 뒀기 때문에 성씨 가문을 돕는 데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
성하연의 부모님도 이 점을 잘 알고 있었지만 성하연은 분명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 부모님의 행동에 분개했고 나를 더욱 멸시했다.
그리고 나같이 작은 작업실에 틀어박혀 있는 사람은 그녀의 남자친구이자 하급 관리직인 이도훈만도 못하다고 생각했다.
붉은색 스포츠카가 굉음을 내며 주택가를 빠져나갔다. 마침내 결판이 났다는 생각에 내 마음은 오히려 후련했다. 그녀는 이도훈에게 달려가고 싶어 안달이 났겠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제 나와 그녀는 각자 다른 길을 가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제2화
내가 세수를 마치고 잠자리에 들려는 순간, 이도훈의 문자가 왔다.
[하연이는 내가 잘 챙길게. 오늘 밤은 내 신부니까.]
도발적인 문자와 함께 사진 한 장이 전송되었다.
사진 속 키 큰 남자는 한 손으로 여자 주인공의 머리카락을 잡고 세면대에 밀어붙인 채, 다른 한 손에는 휴대폰을 들고 세면대 거울을 통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의 각도 때문에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있었지만 중요 부위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여자의 얼굴은 매우 선명했다.
성하연의 쾌락에 젖은 표정과 몽롱한 눈빛에 마음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곧 가슴을 쓰다듬으며 씁쓸하게 웃었다. 더 이상 그녀에게 기대할 것도 없었으니까.
이도훈은 그녀와 결혼해서 신분 상승을 꿈꾸는 속물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녀가 좋다니 나는 기꺼이 도와줄 생각이었다.
나는 그에게 답장하지 않고 머리를 말리고 자려고 했다.
그런데 내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다시 인스타를 확인해 보니 그가 올린 게시물이 있었다.
글:
[여자는 마음을 준 남자의 곁에서 잠을 잔다. 비록 가문의 이익을 위해 일시적으로 타협해 사랑 없는 사람과 결혼한다 해도 그녀를 속박할 수는 없다. 첫날밤, 그녀는 모든 걸 무릅쓰고 내 곁으로 올 것이다. 그녀의 몸은 결코 다른 남자에게 보여주지 않을 것이니까. 그런 그녀가 내 아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사진이 무려 아홉 장이나 올라왔다.
여자가 행복하게 남자의 가슴에 기대어 있는 옆모습,
두 사람이 하얀 침대 시트 위에서 손가락을 깍지 낀 모습,
여자의 쇄골에 가득한 키스 마크를 클로즈업한 사진까지...
솔직히 마음이 아팠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내게 더 이상 마음 약해지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게 했다.
나는 이도훈이 올린 사진을 캡처하여 내 인스타에 글과 함께 올렸다.
[첫날밤, 아내가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고백하여 평화롭게 헤어지기로 결정했습니다.】
그리고 휴대폰 전원을 끄고 잠자리에 들었다.
밤새 잠 못 이룰 줄 알았는데, 의외로 깊은 잠에 빠졌다.
다음 날 아침, 전원을 켜자마자 집에서 전화가 걸려 왔다.
나는 호되게 꾸중을 들을 각오를 했다. 하지만 5초 동안 침묵이 흐른 후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이제 그만 포기하고 앞으로 잘 살아라.”
단 한마디의 비난도 없었다.
예상치 못한 아버지의 말씀에 코끝이 찡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네.”
나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속의 쓰라림을 억누르고 부모님께 사과드렸다.
“죄송해요. 엄마 아빠께 면목 없어요. 다시는 안 그럴게요.”
나는 얼마나 철이 없었을까. 내 자존심만 생각하고 부모님까지 다른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받게 만들었으니.
아버지는 무겁게 한숨을 쉬며 한마디만 남기셨다.
“너만 괜찮으면 됐다.”
부모님께서는 이미 오래전부터 억지로 하는 결혼은 좋을 게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나는 성하연과 그녀의 첫사랑은 단지 일시적인 감정일 뿐이고 결국 그녀는 현실적으로 적합한 사람과 결혼할 것이며 그 사람이 바로 나라고 확신했다.
심지어 성권휘가 찾아왔을 때도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었다.
‘역시 그렇지. 나만큼 하연에게 적합한 사람은 없어.'
정말 부모님께 죄송했다. 결혼은 두 사람만의 사랑이 아니라 집안끼리의 문제이기도 했으니까.
전화를 끊자, 수백 개의 읽지 않은 문자와 부재중 전화 알림이 떴다.
장인 장모와 성하연이 각각 여러 번 전화를 걸었고 친척들의 전화도 있었다.
친한 친구들도 문자를 보내 안부를 물었고 심지어 사업 파트너들까지도 의례적인 안부 인사를 건넸다.
성하연은 전화가 연결되지 않자 나에게 카톡 문자를 보냈다.
제3화
[무슨 뜻이야? 나를 인스타에 올려서 공개적으로 망신 주겠다는 거지? 내 마음을 돌리려고 이러는 거야?!]
[어떻게 수법이 갈수록 더러워지니! 난 너 같은 사람은 절대 안 좋아해. 난 도훈 오빠만 좋아한다고!]
[마누라가 바람피우는 게 자랑스러워? 누가 더 망신인지 두고 보자고!]
성하연은 계속해서 악담을 퍼부었다. 내가 아무 반응이 없자 아예 나처럼 인스타에 글을 올렸다. 정말이지, 그녀와 이도훈은 생각하는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똑같았다.
그녀의 인스타 글:
[사랑 없는 결혼은 감옥일 뿐. 비록 강제로 결혼했지만, 내 몸은 영원히 내 사랑에게 충실할 거야.]
우리는 공통 친구가 많았기에 누군가는 댓글에서 그녀를 비난했다. 하지만 성하연은 전혀 개의치 않고 모두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나는 아무에게도 답하지 않았다. 이 결혼 생활에서 나는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내가 인스타에 글을 올린 건 모든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더 이상 내 뒤를 쫓아다니며 애교를 부리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으니 나 역시 이 짝사랑을 정리해야 할 때였다.
조용히 그녀의 인스타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른 뒤, 나는 알림을 끄고 세수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나와 성하연은 어렸을 때 이웃이었다. 고급 주택 단지에서 비슷한 나이 또래 아이들이 모두 함께 어울려 놀았지만 나는 유독 귀엽고 사랑스러운 성하연에게 특별히 신경을 썼다.
숙제를 봐주고 등하교를 시켜주는 것은 물론 머리를 땋아주고 치마를 입혀주고 간식을 챙겨주는 것까지 다 해주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어느새 습관이 되어버린 것 같았다.
주변 사람들은 농담 삼아 내가 어린 신부를 키우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럴 때면 성하연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었다.
“커서 나는 지민 오빠랑 결혼할 거예요”
하지만 그녀는 이도훈을 만나자 그 말을 깔끔하게 잊어버렸고 나만 진심으로 받아들였었다.
쓴웃음이 나왔다. 진작에 포기했어야 했는데.
마음을 추스르고 출근 준비를 하는데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렸다.
장인어른이었다. 수화기 너머로 시끄러운 소리가 들렸고 장모님은 무언가 소리치고 있었다.
성권휘의 목소리는 약간 떨리고 있었고 기운이 없었다.
“지민아, 내가 부탁할게. 우리 지금 청운정에 있는데 한번 와주겠니?”
성하연의 날카로운 외침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저 이혼 안 시켜주면 엄마 아빠 보는 앞에서 죽어버릴 거예요!”
무언가 가구가 쓰러지는 소리와 장모의 울음소리가 함께 들렸다.
나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알겠어요.”
나는 이혼 서류를 챙겼다. 아마 그녀가 원하는 건 이것일 거라고 생각했다.
청운정 안은 엉망진창이었다. 머리를 풀어헤친 성하연은 내가 들어오자 사납게 노려보았다. 그녀는 과도를 손목에 꽉 대고 있었는데 손목에서는 피가 스며 나오고 있었다.
성권휘는 마치 갑자기 수십 년은 늙어버린 듯 관자놀이에 흰머리가 눈에 띄었다.
그는 성하연을 노려보며 몹시 지쳐 보였다.
장모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칼을 내려놓으라고 울며 애원하고 있었다.
원래 성권휘는 성하연을 찾아 나에게 사과시키려고 했다. 비록 이렇게까지 되었지만 그는 여전히 우리 둘이 잘살아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성하연은 격렬하게 반응하며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과도를 집어 들었다. 부모 말은 전혀 들리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성권휘는 나에게 전화를 걸어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보자고 했던 것이다.
아마 내가 성하연에 대한 마음 때문에 그녀를 용서하고 설득해서 결국 화해할 거라고 생각했었던 모양이었다.
나는 성하연의 행동이 어이없어 웃음이 나왔었다. 그렇게 결혼하기 싫었으면 왜 결혼 전에 이러지 않았는지 말이다. 지금은 결혼의 자유가 있는 시대인데 내가 그녀를 억지로 결혼시킬 수 있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그대로 물었다.
그런데 성하연은 진지하게 대답했다.
“오빠가 나랑 결혼하고 싶어 했잖아. 어때, 좋았어? 난 도훈 오빠에게도 내 사랑을 증명하고 싶었어. 비록 강제로 결혼했었지만 난 오직 도훈 오빠 한 사람 것이고 그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할 수 있다고 말이야.”
제4화
“정말 미쳤군, 미쳤어!”
성권휘는 분노에 차 손가락으로 성하연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내가 말했잖아. 지민이가 너랑 결혼하고 싶어 안달 난 게 아니라 내가 그 애에게 너랑 결혼해달라고 부탁한 거라고!”
장모는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연아. 이제 지민이도 왔으니 앉아서 네 아빠랑 나랑 하는 말 좀 들어보렴.”
성하연은 격앙된 감정을 숨기지 못했다.
“윤지민, 네가 우리 부모님께 최면이라도 걸었어? 왜 이렇게까지 너에게 굽신거리는 건데? 이 지경이 됐는데도 이혼을 허락하지 않고 나보고 너한테 사과까지 하라잖아! 절대 어림도 없어!”
나는 화가 나서 성하연의 과도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를 때리려는 성권휘를 말리려고 달려들었다.
“아버님, 하연이가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는데 이 혼사는 없던 걸로 하죠.”
성권휘는 떨리는 손으로 나를 꽉 붙잡고 눈시울을 붉혔다.
“지민아, 부탁한다. 제발...”
성하연은 갑자기 과도를 내던지고 달려들어 나를 세게 밀쳤다.
“부탁하긴 뭘 부탁해요! 내가 싫다는데! 난 처음부터 이 사람 좋아한 적이 없었어요. 도훈 오빠가 없었어도 이 사람은 절대 좋아하지 않았을 거라고요!”
그녀는 증오에 찬 눈빛으로 마치 철천지원수를 보는 것처럼 나를 노려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우리는 점점 멀어졌고 그녀는 더 이상 내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녀는 더 이상 내 마음속에 모든 것을 의지하던 어린 소녀가 아니었다.
나는 마음속의 쓰라림을 억누르고 심호흡을 한 후, 정중하게 성권휘 부부에게 말했다.
“아저씨, 아줌마, 더 이상 하연을 억지로 설득하지 마세요. 우리 둘 좋게 헤어지는 게 모두에게 좋습니다.”
내가 호칭을 아저씨, 아줌마로 바꾸어 부르는 것을 듣고 성권휘는 잠시 멍해졌다.
“지민아, 이혼은 안 된다. 내가 평소에 하연을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버릇없게 만들었어. 내가 사과할게...”
그는 우리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성하연을 밀어내려 했지만 그녀는 성권휘의 손을 붙잡고 나에게 소리쳤다.
“윤지민, 빈말로 이혼하자고 해서 우리 아빠를 협박하지 마. 아무리 매달려도 소용없어. 넌 절대 날 가질 수 없으니까!”
“하연아, 너 어쩌다 이렇게 됐니?”
성하연의 엄마 한미림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울먹였다.
나는 가져온 이혼 합의서를 꺼내 차분하게 말했다.
“서명은 이미 했어. 하연아, 난 이혼에 동의해. 진심이야.”
성하연은 코웃음 치며 이혼 합의서를 받아 보려 했지만 성권휘는 다급하게 그것을 빼앗았다. 그는 성하연을 떨리는 손으로 가리키며 화를 내며 소리쳤다.
“하연아, 그만 좀 해. 너와의 결혼은 내가 지민에게 부탁한 거다. 내가 지난 세월의 정으로 지민을 압박한 거야. 다 너를 위해서였다! 우리 집이 파산한 후에도 네가 아무 걱정 없이 공주로 살게 해주고 싶어서!”
성하연은 전혀 믿지 않았다. 그녀는 코웃음을 치고는 차갑게 나를 보며 비꼬았다.
“봤지? 이혼이 되겠어? 정말 없는 얘기도 잘 지어내네. 너 진짜 너무 한심한 거 아니야? 대체 왜 나를 못 놔주는 건데!”
말을 마치자마자 그녀는 이혼 합의서를 빼앗아 내 얼굴에 던지고는 돌아서 달아났다.
성권휘는 반사적으로 그녀를 쫓아갔지만 계단에서 헛디뎌 굴러떨어졌고 머리가 계단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다.
성하연이 소리를 듣고 뒤돌아보니 성권휘가 미동도 없이 그곳에 누워 있었고 선홍색 피가 바닥에 번져 나가고 있었다. 그녀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한미림은 비명을 지르며 성권휘의 곁으로 달려가 겁에 질려 엉엉 울었다.
나는 재빨리 119에 전화를 걸고 그들과 함께 성권휘를 병원으로 옮겼다.
응급실 밖에서 나는 조용히 흐느끼는 한미림을 위로했다.
성하연은 오랜 침묵 끝에 울면서 이도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도훈 오빠, 나 어떡해? 아빠가 계단에서 굴러떨어지셨어. 지금 응급실이야. 너무 무서워. 제일병원이야. 응, 빨리 와.”
제5화
그녀는 여전히 감당할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면 울기만 하는 어린 소녀였다. 다만 이제 그녀에게는 기댈 다른 사람이 생겼을 뿐이었다.
내 마음은 여전히 시큰거렸지만 난 내 감정을 접고 그녀가 행복을 찾기를 바라기로 했다.
내가 먼저 자리를 떠야 할지 고민하던 순간, 응급실 문이 열렸다.
한미림과 성하연은 황급히 의사에게 성권휘의 상태를 물었다.
의사는 일단 생명은 건졌지만 외상으로 인해 뇌에 돌이킬 수 없는 손상을 입었다고 했다. 다시 말해 식물인간 상태가 되었고 어쩌면 영원히 깨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한미림은 눈앞이 캄캄해지며 뒤로 쓰러졌고 나는 재빨리 그녀를 부축했다. 성하연 또한 믿을 수 없다는 듯 의사의 소매를 붙잡고 아버지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사람이 갑자기 식물인간이 되어버렸다니.
나 또한 너무 괴로웠다. 어릴 적부터 나를 키워주신 자애로운 어른이셨고 항상 나와 성하연이 잘되기를 바라시며 나를 사위처럼 대해주셨기 때문이다.
나는 성하연이 결혼은 역시 비슷한 집안끼리 해야 한다고 생각을 바꿔서 나와 잘살아 보려고 결혼한 줄 알았다. 나 역시 성하연에게 잘해주고 내 인맥과 집안의 힘을 이용해 성씨 가문이 위기를 극복하도록 도울 생각이었다.
그런데 어쩌다 지금 이 상황이 됐단 말인가.
성권휘는 병실로 옮겨졌고 이도훈도 도착했다. 성하연은 울면서 그의 품에 안겨 억울함과 두려움을 토로했다.
나는 조용히 그곳을 떠났다.
다음 날 한미림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녀는 이미 성권휘를 돌볼 간병인을 구했으니 회사를 며칠만이라도 안정시켜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별다른 고민 없이 동의했다.
나는 일단 성씨 가문 프로젝트라는 명목으로 내 인맥을 활용해 투자를 유치하고 자금 문제를 해결할 방법을 생각했다.
나는 아직 성씨 가문의 사위였기에 이런 상황에서 나서는 것은 적절하다고 판단했다.
나는 사업상 친분이 있고 투자 의향이 있을 만한 사장들에게 연락해 소규모 만찬회에 초대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성하연이 어디선가 소식을 듣고 달려왔다.
그녀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나에게 따져 물었다.
“네가 어떻게 감히! 우리 아빠가 아직 돌아가시지도 않았는데 우리 집 프로젝트를 가로채려고 해?”
나는 당황했지만 우선 그녀에게 설명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한미림이 뒤따라 들어와 자리에 있는 사람들에게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아이가 철이 없다고 말하면서 성하연을 말렸다.
한미림에게 성하연을 데리고 먼저 자리에 앉으라고 하고 나는 입구에서 계속 손님들을 맞이했다. 그때 익숙한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이도훈이었다.
성하연은 한미림의 손을 뿌리치고 작은 새처럼 이도훈에게 달려가 그의 팔짱을 꼈다.
그녀는 심지어 일부러 고개를 치켜들고 나를 노려보더니 이도훈을 데리고 만찬장 중앙으로 향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했다.
“윤지민, 넌 성씨 가문을 대표할 수 없어.”
그러고는 옆에 있는 이도훈을 가리키며 사람들에게 선언했다.
“이분, 이도훈이야말로 우리 성씨 가문의 사위이자 후계자입니다.”
말을 마친 그녀는 나를 경멸하는 눈빛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내가 말했지? 내 모든 것은 도훈 오빠 것이라고. 윤지민, 아직도 안 꺼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