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겨울, 늦은 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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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희주 씨, 개인 신상정보를 전부 다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하면 안희주 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아무도 찾지 못할 겁니다.” 잠...

Chương (1)

第1章

“안희주 씨, 개인 신상정보를 전부 다 삭제하시겠습니까? 삭제하면 안희주 씨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아무도 찾지 못할 겁니다.” 잠깐 침묵하던 안희주가 확신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네. 아무도 절 찾지 못했으면 좋겠어요.” 전화기 너머의 상대는 의아하게 여겼지만 이내 대답한다. “알겠습니다. 절차가 마무리되려면 보름 정도 걸리니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제1화 전화를 끊은 후 안희주는 휴대전화로 보름 뒤 F국으로 떠나는 항공편 티켓을 구매했다. 그 시각 TV에 주성 그룹 발표회가 재방송되고 있었다. 일주일 전, 주성 그룹 대표 성서진이 주얼리를 발표했다. 전 세계 최고급 다이아몬드와 보석으로 만들어졌고 아내를 위해 제작한 단 하나뿐인 주얼리였으며 이름을 ‘러브 주’라고 지었다. 안희주의 ‘주’를 따서 지은 이름이었는데 성서진이 안희주만을 사랑한다고 전 세계에 공개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러브 주’가 공개되자마자 각 포털사이트의 실검에 올랐고 SNS에서도 열기가 어찌나 뜨거운지 온통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사랑 얘기뿐이었다. 발표회가 끝난 후 TV에 길거리 인터뷰가 이어졌다. “안녕하세요. 성서진 대표님과 사모님의 러브 스토리에 관해서 알고 계신가요?”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한 여자가 부러워하며 대답했다.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전에 대표님이 책 한 권을 쓰셨는데 거기에 전부 사모님에 관한 내용이었어요. 사모님이 체리를 좋아해서 마당에 체리 나무를 심었대요. 우리 남편한테 좀 따라 배우라고 하니까 불가능하대요. 그때 어찌나 화가 나던지.” 기자는 다른 사람에게도 질문했다. 그러자 한 젊은 여대생이 두 손으로 마이크를 잡고 흥분한 얼굴로 말했다. “두 분은 정말 드라마 속 남녀 주인공의 현실 버전이라니까요? 대표님은 사모님밖에 몰라요. 4년 전에 사모님이 신부전증에 걸려서 신장 이식을 받아야 했잖아요. 그때 대표님은 누구보다 마음을 졸였고 자기 신장이 사모님과 매치한다는 결과를 받자마자 사람들의 반대도 무릅쓰고 신장을 이식해주었어요. 사모님이 대표님의 목숨과도 같다면서 사모님이 없으면 살지 못한다고 했어요.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좋은 남자가 있을 수 있죠?” ... 기자들이 여러 명을 인터뷰했는데 다들 하나같이 성서진과 안희주의 사랑을 부러워했다. 여러 번이나 재방송되는 뉴스를 보면서 안희주는 자신을 비웃듯 피식 웃었다. 어릴 적부터 얼굴이 예뻐서 그녀에게 대시하는 남자가 매우 많았다. 하지만 부모님의 이혼으로 사랑에 그 어떤 기대도 없었고 누가 고백하든 전부 거절했다. “미안한데 난 남자 친구 만날 생각도 없고 연애는 더더욱 관심이 없어요.” 성서진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러했다. 다른 남자와 달리 성서진은 그녀에게 3년이나 대시했다. 여러 번의 거절을 당하고도 포기하지 않았고 심지어 안희주가 좋아하는 목걸이를 따내려고 목숨까지 걸고 레이싱 경기에 참여했다가 하마터면 죽을 뻔하기도 했다. 그의 이런 모습에 안희주도 결국 마음이 흔들렸다. 함께한 후에도 성서진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고 오히려 최선을 다해 잘해주면서 얼어붙은 그녀의 마음을 녹여주었다. 프러포즈도 52번째 만에 드디어 받아줬고 새로운 발걸음을 내딛기 위해 용기를 냈다. 프러포즈하던 그날 안희주는 약지에 낀 반지를 보면서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성서진에게 말했다. “서진 씨, 앞으로 좋은 아내가 되려고 노력할게요. 서진 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이 손 놓지 않을게요. 근데 이것만은 꼭 기억해요. 무슨 이유든지 날 속이는 건 용납 못 해요. 만약 날 속인다면 서진 씨의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질 겁니다.” 예전의 아름다웠던 기억들이 잔인한 현실에 산산이 부서져 덧없는 것이 돼버렸다. 3개월 전, 안희주는 성서진이 밖에서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낮에는 그녀 옆에, 밤에는 그 여자 옆에 있어 줬다. 그의 마음은 진작 두 여자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처음에 먼저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은 식어버렸고 나중에 사랑하게 된 사람의 마음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안희주는 씁쓸하게 웃으면서 TV를 끄고는 미리 준비한 이혼 합의서를 꺼내 사인했다. 이젠 말이 씨가 돼버렸다. 그때 했던 말대로 그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사인을 마친 그녀는 이혼 합의서를 예쁜 선물 박스에 담아 포장했다. 한 시간 후 성서진이 집으로 들어왔다. 슬리퍼도 갈아신을 새 없이 안희주를 끌어안고 달래면서 사과했다. “미안해, 희주야. 오늘 주얼리를 가지러 가느라 우리 결혼기념일을 놓치고 말았어. 화내지 않으면 안 돼?” 성서진은 ‘러브 주’ 케이스를 꺼내 그녀를 달랬다. 검은색 셔츠의 옷깃이 살짝 벌어져 있었는데 맨 위에 단추를 잠그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순간 셔츠 속의 키스 자국과 긁힌 자국이 너무도 눈에 거슬렸다. ‘주얼리를 가지러 간 거야? 임유리랑 자러 간 거야? 임유리의 침대에서 금방 내려온 거겠지.’ 성서진은 안희주의 달라진 눈빛을 알아채지 못하고 다정하게 목걸이를 해주었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반짝이는 주얼리가 그녀의 예쁜 얼굴을 더욱 돋보이게 했다. “너무 예뻐, 희주야.” 성서진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두 눈에 놀라움이 가득했다. 하지만 안희주는 기쁜 기색 하나 없이 이혼 합의서를 넣은 선물 박스를 그에게 건넸다. “자, 받아요.” 성서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게 뭐야?” 안희주가 피식 웃었다. “선물. 서진 씨도 결혼기념일 선물 준비했는데 나도 당연히 준비해야죠.” 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나더니 소중한 보물인 것처럼 열어보려 했다. 그러자 안희주가 그를 말렸다. “보름 뒤에 열어봐요.” “왜?” 성서진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짓자 안희주가 또박또박 말했다. “이 선물 보름 후에 열어봐야 더 의미가 있거든요.” 성서진은 잠깐 흠칫하더니 더는 묻지 않고 그녀의 손에 다정하게 입맞춤했다. “자기 말을 들어야지, 그럼. 무슨 선물인지 기대할게.” 그러고는 아주 말을 잘 듣는 강아지처럼 포스트잇을 찢어 뭐라 끄적인 다음 선물 박스에 붙였다. [보름 후에 열어보기.] 안희주는 그의 행동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성서진, 그때 가서 많이 놀랄 테니까 기대해.’ 제2화 이튿날 아침, 성서진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안희주에게 모닝 키스를 해주었다. “희주야, 어제 결혼기념일을 놓쳤으니까 오늘 보충해줄게. 놀이공원 갈까? 전에 가고 싶다고 했잖아.” 별로 관심이 없었던 안희주가 거절하려는데 성서진은 이미 제멋대로 외출할 물건을 챙기더니 옷까지 준비해주었다. 놀이공원에 도착해서도 안희주를 챙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녀가 입술을 적시는 걸 보고는 바로 물을 먹여주었고 인형을 힐끗거려도 망설임 없이 사다 주었다. 회전목마, 범퍼카, 대관람차까지 전부 다 탔다. 아무리 유치한 놀이기구라도 안희주가 좋아하는 거라면 무조건 함께했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놓은 적이 없었다. 안희주가 놓으려고 해도 절대 놓지 않았다. 심지어 풍선까지 사서 그녀의 가방에 걸어주며 웃으면서 말했다. “희주야, 이러면 평생 널 잃어버릴 일이 없어.” ‘잃어버릴 일이 없다고? 근데 내가 이번에 가려는 곳은 아마 평생 찾지 못할 거야. 넌 날 진작 잃어버렸어.’ 선남선녀의 알콩달콩한 모습은 놀이공원의 수많은 여행객들의 이목을 끓었고 두 사람을 알아본 사람도 있었다. “성서진 대표님이랑 사모님 아니야? 여기서 실물을 영접하다니. 두 분 사이가 너무 좋아 보여.” 한 여자가 흥분한 얼굴로 폴짝폴짝 뛰면서 남자 친구를 끌고 안희주의 앞으로 다가왔다. “저기... 사진 같이 찍어도 될까요? 저희 두 분 팬이거든요. 엄청 응원하고 있어요.” 안희주는 신나서 어쩔 줄을 몰라 하는 여자에게 실망을 줄 수 없어 알겠다고 했다. 성서진은 사진 찍기 싫어했지만 안희주의 뜻을 따랐다. 찰칵. 사진을 다 찍은 후 커플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분 사이가 참 좋은 것 같아서 너무 부러워요. 계속 이대로 쭉 행복하셔야 해요.” 성서진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옆에 서 있는 안희주가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건 알아차리지 못했다. 왜냐하면 두 사람에게 앞날이 없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으니까. 점심을 먹는 사이에 성서진은 자꾸 휴대전화를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안희주의 눈빛을 알아채고는 재빨리 미안해하며 달랬다. “미안해, 희주야. 급하게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어서 그래. 먼저 먹고 있어. 이것만 처리하고 다시 놀아줄게.” 하지만 그의 휴대전화 화면에 라이브 방송의 별풍선이 스치는 걸 보았다. 분명 라이브 방송을 보면서 일을 처리하고 있다고 거짓말했다. 안희주는 코웃음을 치고는 임유리의 라이브 방송에 들어갔다. 임유리는 존재감이 없는 인플루언서다. 얼마 전에 성서진은 그녀와 계약하고 ‘러브 주’의 홍보모델까지 시켜주었다. 모든 사람들이 임유리의 뒤에 스폰서가 있는 건 아닌지 추측하긴 했지만 그 스폰서가 바로 성서진이라는 건 아무도 몰랐다. 그 시각 임유리는 놀이공원 대문 앞에서 라이브 방송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휴대전화를 들고 시청자들에게 우쭐거리며 자랑했다. “봐요. 여긴 제 남자 친구가 저한테 선물한 놀이공원인데 와서 저의 이름을 대면 할인해주니까 많이 놀러 오세요.” 그녀의 말에 안희주는 휴대전화를 꽉 쥐었고 손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날 데리고 온 이 놀이공원이 임유리한테 선물한 놀이공원이라고?’ 댓글 창에 의심의 목소리가 커졌다. [허세 부리지 말아요. 이름도 없는 인플루언서가 무슨 재주로 재벌을 만나요?] [사람들의 이목을 끌려고 이러는 거겠죠. 증거도 없으면서. 나도 놀이공원 문 앞에 서서 놀이공원이 내 거라고 큰소리칠 수 있어요.] [뜨고 싶어서 제정신이 아닌가 봐요. 놀이공원이 몇백억인지 알기나 알아요?] ... 임유리는 억울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거짓말 아니에요. 봐봐요. 여기 저의 이름이 적혀있잖아요.” 그러더니 가방에서 등기등본을 꺼내 보여주었다. 위에 임유리의 이름이 정확하게 적혀있었다. 그 순간 라이브 방송이 난리가 났고 사람들도 매우 부러워했다. [무식한 건 나였네요. 오늘 드디어 진짜 재벌이 어떤지 알았어요.] [놀이공원을 선물하다니, 스케일이 장난이 아닌데요? 아내를 목숨보다 더 사랑하는 성서진 대표님과 막상막하예요.] [남자는 사랑하는 여자한테 돈을 아끼지 않는다던데. 난 왜 이런 좋은 남자를 만나지 못했을까요?] [왜냐하면 이 세상에 좋은 남자는 딱 두 사람뿐이니까요. 한 사람은 성서진 대표님이고 한 사람은 임유리 씨의 남자 친구예요. 자, 사모님에 대한 성 대표님의 사랑이 더 큰지, 임유리 씨에 대한 임유리 씨 남자 친구의 사랑이 더 큰지 투표해볼까요? 전자라면 1, 후자라면 2를 써주세요.] 댓글 창에 온통 숫자 1뿐이었다. 어쨌거나 성서진이 와이프를 끔찍이도 아끼는 거로 소문이 자자하니까. 돈은 물론이고 하마터면 목숨까지 잃을 뻔했다. 그때 ‘유리 사랑’이라는 아이디가 갑자기 나타나더니 한꺼번에 많은 별풍선을 쐈다. 화면 가득한 별풍선에 사람들은 입을 떡 벌렸다. 별풍선 덕에 임유리의 라이브 방송 시청자 수가 십여만 명에서 순식간에 수천만 명으로 늘어났다. 그리고 화면에 이런 글이 반짝였다. [당연히 유리에 대한 나의 사랑이 더 크죠.] 라이브 방송이 발칵 뒤집혔고 댓글 창이 폭발했다. [남자 친구가 나타났어요. 대박!] 임유리는 그의 사랑에 우쭐거리면서 웃었다. “봐요. 남자 친구가 날 엄청 사랑한다고 했죠?” 안희주는 휴대전화를 꽉 잡고 손을 부들부들 떨었다. 고개를 들자마자 성서진의 입가에 새어 나온 미소와 사랑 가득한 눈빛을 보게 되었다. ‘유리 사랑’이라는 사람이 바로 성서진이었다. 누군가가 심장을 꽉 조인 것처럼 아팠고 그 고통은 한동안 가시지 않았다. 제3화 안희주는 심장이 너무 아파 오른손으로 가슴을 움켜쥐었고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성서진은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채고 그녀에게 다가왔다. “희주야, 왜 그래?” 그의 두 눈에 담긴 걱정은 거짓말 같지 않았다. 안희주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그도 당장 따라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녀를 이렇게나 사랑하면서도 그녀에게 숨긴 게 너무도 많았다. 안희주는 마음을 가라앉히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갑자기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아서요.” 성서진은 그녀의 가슴팍을 어루만지다가 아무 문제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성서진은 그녀를 웃게 해주려고 재미난 이야기를 계속했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고 노력해도 안희주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안희주는 유리창에 기댄 채 창밖의 풍경을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희주야, 혹시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성서진이 조심스럽게 떠보았다. “없어요.” 안희주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오늘 내가 봤던 드라마를 생각하고 있었어요.” 성서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웃으면서 말을 이었다. “무슨 드라마인데?”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성서진을 쳐다보았다. “남자 주인공이 예전에는 여자 주인공을 엄청 사랑했었는데 나중에 마음이 변했고 여자 주인공한테 숨기는 것도 많더라고요...” 안희주는 그의 미세한 표정 변화도 놓치지 않으려고 빤히 쳐다보았다. “서진 씨, 나중에 서진 씨도 마음이 변하면...” “절대 그럴 일이 없어.”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성서진은 이 가능성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듯 다급하게 가로챘다. “희주야, 내가 평생 사랑하는 여자는 너뿐이야. 이 세상 남자들이 다 배신한다고 해도 난 배신하지 않아. 난 네가 없으면 안 돼.” 안희주는 가슴이 아팠다. 그녀가 없으면 안 된다고 했지만 밖에서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었다... 그녀가 뭐라 말하려던 그때 성서진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그가 망설이다가 끊으려 하자 안희주가 말했다. “받아요.” 성서진은 그제야 전화를 받았다. 상대가 무슨 말을 했는지 늘 차분하던 그의 표정이 갑자기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부자연스럽게 변해버렸다. 그러고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전화를 끊고 안희주를 쳐다보았다. “희주야,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지금 가봐야 할 것 같은데 집에 택시 타고 가면 안 될까?” 안희주는 따지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고는 차에서 내렸다. 성서진의 마이바흐가 멀리 떠난 후 그녀는 택시를 탔다. 그런데 별장으로 돌아가지 않고 택시 운전기사에게 이렇게 말했다. “저 앞차 좀 따라가 주세요.” 운전기사는 아무 말 없이 차에 시동을 걸고 따라갔다. 마이바흐가 한 별장 앞에 멈춰 섰다. 멀지 않은 곳에서 토끼 하녀복 차림의 여자가 문을 열었는데 남자가 차에서 내리자마자 웃으면서 달려가 안겼다. 여자는 임유리였고 남자는 성서진이었다. 두 사람은 끌어안자마자 키스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한참 동안 키스를 퍼붓고 나서야 임유리는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 입술을 떼더니 그의 넥타이를 잡아당겼다. “주인님, 토끼가 놀랄 만한 선물을 준비했는데 볼래요?” 그러고는 손가락 끝으로 성서진의 목젖을 슬쩍 터치했다. 성서진은 침을 꿀꺽 삼키고 임유리의 손을 꽉 잡으면서 욕망을 드러냈다. “평소에 30분 걸리는 길을 15분 만에 달려왔는데 당연히 봐야지.” 임유리는 가볍게 웃으며 깍지를 끼고 차 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차 안에서 봐요.” 두 사람이 차에 올라탄 후 차가 미세하게 흔들리다가 점점 심해졌다... 안희주가 멀지 않은 차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는 걸 아무도 알지 못했다. 성서진에 대한 환상이 진작 깨졌지만 직접 목격하니 그래도 칼로 심장을 도려내듯 아팠다. 그것도 날카롭고 뾰족한 칼로 말이다. 그녀는 가슴팍을 부여잡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고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연애할 때부터 성서진은 그녀를 아주 소중히 다뤘다. 사랑이 절정에 달했을 때도 참고 건드리지 않았다. 그는 여자에게 처음이 중요하다면서 신혼 첫날밤까지 남겨둬야 완벽하다고 했다. 그렇게 3년의 대시와 3년의 연애 끝에 겨우 신혼 첫날밤까지 버텼다. 그날 밤, 상업계를 주름잡던 성서진은 긴장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안희주가 옷을 벗자마자 얼굴은 물론이고 귀까지 다 빨개졌다. 성서진은 항상 그녀의 기분을 고려했고 그녀를 소유한 순간 감격하여 눈물까지 흘릴 뻔했다. 그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희주 너 드디어 내 여자가 됐어. 사랑해. 평생 사랑할게.” 그 순간 안희주는 자신이 그에게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느꼈고 성서진보다 그녀를 더 사랑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성서진은 안희주만을 사랑할 것이라고 직접 얘기했었다. 그런데 지금 그 맹세를 직접 깨버렸다. 여자 운전기사는 안희주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 한숨을 길게 내쉬면서 휴지를 건넸다. “남자는 다 똑같아요. 바람피우지 않는 남자는 없다니까요. 나도 그쪽이랑 같은 처지예요. 근데 아이 때문에 이혼하고 싶어도 못 해요...” 자신의 속상한 얘기를 꺼내던 운전기사마저도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여러 번 말을 잇지 못하다가 계속 말했다. “속상해하지 말아요. 이미 결혼한 이상 참고 살아야죠. 이번에는 용서하고 못 본 거로 해요.” 안희주는 휴지를 꽉 잡고 갈라진 목소리로 확고하게 말했다. “아니요. 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겁니다.” ‘성서진, 평생 용서하지 않아.’ 그녀는 집으로 돌아와 성서진이 전에 줬던 선물을 전부 다 꺼냈다. 값어치가 어마어마한 ‘러브 주’까지 다 꺼내고는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재산관리인이죠? 이것들을 전부 다 팔아서 여성 협회에 기부하려고요. 이혼하고 싶지만 아이 때문에 못 하거나 경제적으로 어려운 여성들을 도와주고 싶어요.” 한 시간 만에 물건들을 싹 다 보내고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절반 정도 정리했을 무렵 성서진이 갑자기 돌아왔다. 비가 쏟아지는데 우산도 쓰지 않아 옷이 흠뻑 젖었다. 그는 옷을 갈아입을 새도 없이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녀에게 달려와 물었다. “희주야, 러브 주를 왜 팔았어?” 제4화 ‘러브 주’의 가치가 어마어마하여 팔려면 경매장에 내놓는 방법뿐이었다. 그렇다면 ‘러브 주’가 경매장에 나왔다는 걸 봤단 말인가? 안희주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경매장에 갔었어요?” 성서진은 잠깐 멈칫하면서 그녀의 시선을 피하는가 싶더니 잠시 후 대답했다. “너한테 주얼리 좀 사주려고 갔지.” ‘나한테? 아니면 임유리한테? 임유리가 엄청난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줬는데 당연히 보답해줘야지.’ 안희주는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분하게 말했다. “판 게 아니라 기부했어요.” 성서진이 달리 방법이 없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희주 네가 착한 건 알겠는데 다른 건 다 기부해도 이것만은 기부하지 말았어야지.” 그러고는 품 안에서 케이스 하나를 꺼내 안희주에게 건넸다. 검은색 벨벳 케이스 안에 ‘러브 주’가 담겨있었다. 주얼리의 빛깔은 여전히 남달랐다. “내가 다시 사 왔어. 러브 주는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걸 뜻하는 거니까 절대 빼선 안 돼.” 성서진은 다시 그녀의 목에 걸어주었다. 안희주는 원래의 주인에게 돌아온 목걸이를 보면서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 ‘성서진, 원래 연기를 이렇게 잘했어? 다른 여자한테서 달려오자마자 닭살이 돋는 애정 표현이 그렇게 쉽게 나와?’ 그날 저녁 안희주가 자려고 누웠는데 성서진의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렸다. 그는 재빨리 끊어버리고 그녀의 등을 토닥였다. 그런데 몇 초 지나지 않아 또 울렸다.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에 성서진은 얼굴을 찌푸렸다. 안희주가 시끄러워할까 봐 전화를 받는 수밖에 없었다. 주변이 조용하여 상대의 목소리가 더욱 정확하게 들렸다. “서진아, 나와 놀자. 우리 다 모였는데 너만 없어.” 성서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했다. “희주 재워야 해. 끊어.” “끊지 마. 아내 바보 그만하고 나와. 우리 엄청 오랜만에 모이는 거란 말이야.” “그래. 남들은 아내가 생기면 친구를 잊는다던데 넌 아예 친구를 버려버렸어. 너무한 거 아니야?” 소리가 너무 복잡한 탓에 성서진은 휴대전화를 움켜쥐었다. “됐어. 조용히 좀 해. 이 세상에 우리 와이프보다 중요한 사람은 없어. 난 와이프랑 있을 거야.” 성서진이 이렇게까지 얘기했는데도 상대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몇몇이 전화를 바꿔가며 성서진을 설득했다. 결국 참다못한 안희주가 입을 열었다. “그냥 나가서 만나고 와요. 오랜만에 모이는 건데.” 성서진이 싫은 기색을 내비쳤지만 안희주가 또 뭐라 하자 결국 한발 물러섰다. “그럼 너도 같이 가자. 네가 안 가면 나도 안 갈래.” 그의 친구들이 안희주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형수님, 서진이랑 같이 나와요. 가끔 나와서 노는 것도 좋아요.” “그래요. 형수님. 얼른 나와요. 형수님이 안 오면 서진이도 안 오겠다잖아요.” 결국 안희주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야 성서진도 집을 나섰다. 룸 문을 열자 안에 여자가 십여 명이 있었는데 그의 친구들 전부 양쪽에 여자를 껴안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성서진은 얼굴을 찌푸리면서 그냥 가려고 했다. 그러자 친구들이 바로 눈치채고 여자들을 내보냈다. “나가. 빨리 나가.” 룸 안의 여자들이 전부 나가고 나서야 친구들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 그와 어깨동무도 했다. “서진아, 넌 몇 년이 지났는데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어. 여전히 형수님 말고는 다른 여자는 쳐다보지도 않는다니까.” 성서진은 혐오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밀어내더니 보이지도 않는 먼지를 툭툭 털었다. “난 유부남이야. 당연히 희주한테 안전감을 줘야지. 결혼하지 않은 너희들이 뭘 알겠어?” 룸 안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뜨거워졌고 다들 안희주를 쳐다보았다. 말이 친구를 만나러 나온 거지, 처음부터 끝까지 성서진의 눈에는 안희주밖에 없었다. 한 친구가 담배를 피우면 바로 눈빛으로 협박하면서 피우지 못하게 했다. “희주 담배 냄새를 싫어해.” 누군가가 술을 권하면 체면 따위 봐주지도 않고 고개를 내저었다. “내 몸에서 술 냄새 나는 거 희주가 싫어해.” 또 누군가가 노래를 부르면 눈살을 찌푸렸다. “꺼. 희주는 조용한 걸 좋아해.” 성서진은 친구들이 뭘 하든 전부 하지 못하게 했다. 그는 화려한 칼 솜씨로 예쁘게 깎은 과일을 그녀에게 건넸다. “희주야, 과일 좀 먹어.” 그때 안희주가 입은 얇은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에어컨 바람이 쌀쌀한 걸 발견하고는 재빨리 외투를 벗어서 걸쳐주었다. “이러니까 좀 낫지? 아직도 추워?” 친구들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서진아, 너 같은 남자는 정말 어디에도 없어.” 제5화 안희주는 지금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더는 그와 연기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이 늦었으니까 이만 일어날게요.” 성서진도 함께 일어나려 하자 친구들이 말렸다. “형수님이야 몸이 안 좋아서 푹 쉬어야 하지만 우린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대로 가면 안 되지.” “그래. 형수님 혼자 집에 보내서 쉬게 하고 넌 우리랑 같이 놀자.” 안희주는 성서진이 잡고 있는 손을 빼면서 천천히 말했다. “기사님이 데려다주니까 걱정하지 말고 서진 씨는 그냥 여기 있어요.” 그러고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어찌나 빨리 나갔는지 성서진이 미처 잡을 새도 없었다. 차가 출발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안희주는 겉옷 주머니에 그녀의 휴대전화가 아닌 다른 사람의 휴대전화를 발견했다. 검은색 케이스인 걸 보니 성서진의 휴대전화였다.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면서 운전기사에게 차를 다시 돌리라고 했다. 그런데 차가 술집 문 앞에 멈춰선 순간 택시에서 내리는 임유리를 발견했다. 임유리는 휴대전화를 보면서 화장을 고치고는 곧장 술집으로 걸어갔다. 안희주는 휴대전화를 꽉 쥔 채 임유리를 따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예상대로 성서진의 룸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성서진의 품에 와락 안겼다. 성서진은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머리를 어루만졌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임유리는 성서진의 어깨에 기대어 애교 섞인 웃음을 지었다. “서진 씨가 보고 싶어서 전화 받자마자 바로 달려왔죠.” 성서진이 가볍게 웃었다. “상 줘야지, 그럼.” 그러고는 그녀의 입술에 뜨거운 키스를 퍼부었다. “됐어. 애정 행각 좀 그만해.” 친구들은 놀라기는커녕 오히려 재밌다는 듯이 장난을 쳤다. 문 앞에 서서 문틈 사이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안희주의 표정이 얼음장같이 차가워졌다. 다들 성서진과 임유리의 관계를 알고 있었고 그녀 앞에서 연기했던 것이었다. “서진아, 유리도 왔으니까 이젠 화끈하게 놀아도 되겠지?” 친구들이 손뼉을 치자 아까 나갔던 여자들이 다시 우르르 들어갔다. 모두 품에 여자 한 명씩 끌어안았다. 게임을 진행했는데 룰은 간단했다. 술병을 돌려서 입구가 가리키는 사람이 진실을 얘기하든 벌칙을 받든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여러 번 돌리고 나서야 드디어 성서진이 걸렸다. 친구들이 옆에서 환호했고 분위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서진아, 마지막으로 한 게 언제야?” 질문을 건넨 친구가 음흉하게 웃자 다들 단번에 알아들었다. 성서진은 눈썹을 치켜세우더니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어제. 차 안에서.” 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분위기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대박! 기분이 어땠어? 말해봐 봐.” 쑥스러워 얼굴이 붉어진 임유리는 성서진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성서진이 입꼬리를 씩 올리면서 또박또박 말했다. “아주 대박이었고 요염했어.” “하하하. 내가 뭐라고 했어? 와이프보다 애인이 더 좋다고 했지?” “그래. 서진아. 우리 같은 사람들 중에 밖에 다른 여자가 없는 남자가 어디 있어?” “잘만 숨기면 평생 즐길 수 있어. 안희주 절대 눈치채지 못할 거야.” 친구들은 옆에 있는 파트너와 키스하고 몸을 더듬거리느라 난리도 아니었다. 성서진은 안희주의 이름을 듣더니 굳어진 얼굴로 진지하게 말했다. “희주 앞에서 절대 이러면 안 돼. 안 그러면... 결과가 어떨지 너희들도 알지?” “당연하지. 절대 들킬 일이 없어.” 안희주는 그들의 대화를 한마디도 놓치지 않고 전부 들었다. 룸 안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녀는 온몸이 다 차가워졌고 발도 저릿해진 바람에 산송장처럼 넋을 잃은 채 밖으로 걸어 나갔다. 운전기사는 그녀의 안색이 좋지 않은 걸 보고는 안으로 들어가 성서진에게 알리려 했지만 안희주가 말렸다. “혼자 좀 걷고 싶으니까 집까지 데려다줄 필요 없어요. 서진 씨한테 내가 다시 왔었다는 건 얘기하지 말아요.” 안희주는 운전기사를 돌려보낸 후 홀로 아무도 없는 거리를 걸었다. 그러다가 갑자기 폭우가 쏟아졌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한 것처럼 그대로 비를 쫄딱 맞았다. 차가운 비를 맞으니 정신이 더 또렷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그녀는 한참 동안을 걸었다. 17살 된 그해 눈이 펑펑 쏟아지던 그날 밤 안희주가 발을 삐끗하여 성서진이 그녀를 집까지 업고 왔을 때보다 더 많이 걸었다. ‘진심이라는 게 원래 쉽게 변하는 거구나.’ 제6화 집으로 돌아온 안희주는 고열에 시달렸고 열이 좀처럼 쉽게 내리지 않았다. 성서진이 술에 취한 채 집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얼굴도 빨갛게 달아오른 안희주를 보고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곧장 그녀를 들어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안희주는 눈꺼풀이 무거워 겨우 눈을 떴다. 주사를 갈아주러 들어왔던 간호사는 안희주가 깨어난 걸 보고 매우 기뻐했다. “사모님, 드디어 깨어나셨군요. 온 하루 열이 내리지 않아서 성 대표님이 얼마나 마음을 졸였는지 몰라요. 계속 옆에서 지키다가 방금 전화 받으러 나가셨어요. 대표님 불러올까요? 사모님이 깨어나신 거 알면 엄청 좋아하실 겁니다.” 안희주는 고개를 내저으며 갈라진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아니에요.” 간호사도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주사를 갈아준 후 나가버렸다. 커다란 병실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하여 밖에서 통화하는 성서진의 목소리마저 다 들릴 정도였다. 늘 차분하고 점잖은 성서진은 그녀 앞에서만 통제력을 잃었었다. 그런데 이젠 통화하는 목소리에 기쁨과 흥분이 담겨있었다. 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점점 멀어졌는데 성서진이 가버린 듯했다. 그녀는 온 힘을 다해 침대에서 내려와 그의 뒤를 천천히 따라갔다. 몇 층 내려가다가 성서진이 임유리를 부축하여 산부인과에서 나오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의 입이 귀에 걸릴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다. 임유리는 안희주를 발견하고 일부러 놀란 척 소리를 질렀다. “어머, 사모님도 병원에 계셨어요?” 그 소리에 성서진이 고개를 들었고 멀지 않은 곳의 안희주와 눈이 마주쳤다. 그는 순간 움찔하더니 재빨리 임유리의 손을 내려놓았다. “희주야, 약을 가지러 내려왔다가 실수로 유리랑 부딪혔어. 유리가 임신했는데 무슨 일이 있을까 봐 부축한 거야.” 성서진은 안희주가 오해할까 봐 다급하게 설명했다. 안희주의 시선이 임유리의 아랫배로 향했다.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것 같아 두 눈을 감고 마음을 가라앉힌 후에야 말했다. “유리 씨 언제 임신했어요? 아이 아빠는 왜 같이 안 온 거죠?” 임유리는 행복한 얼굴로 아랫배를 만지면서 웃었다. “방금 검사했는데 4주래요. 아이 아빠는 일이 있어서 못 왔지만 내가 임신했다는 소리를 듣고 엄청 기뻐하더라고요. 별장도 몇 채 사줬고 돈도 200억이나 줬어요. 오늘 저녁에 임신한 걸 축하해주겠다고 불꽃놀이까지 보여주겠다지, 뭐예요.” 그녀는 끝없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안희주는 그런 그녀를 한참 동안 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요?” 임유리는 점점 더 우쭐거리며 웃었다. “네, 사모님. 오늘 시간도 비는데 같이 식사나 할까요? 애 아빠도 오라고 할게요.” 그러자 성서진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지더니 임유리의 말을 가로챘다. “아니야. 희주 그럴 시간 없어.” 성서진은 안희주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희주 아직 몸이 안 좋아서 여기저기 다니면 안 돼.” “그냥 홍보모델이니까 신경 쓰지 마.” 그녀를 무시하는 성서진의 말투에 임유리의 표정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잠시 후 고개를 푹 숙이고 속상한 기색을 드러냈다. “네. 제가 너무 기쁜 나머지 주제 파악을 못 했네요. 제 주제에 무슨 자격으로 사모님과 식사를 한다고.” 그러고는 보란 듯이 눈물을 닦으면서 돌아섰다. 그녀의 모습에 성서진의 표정이 조금 흔들렸다. 쫓아가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옆에서 가만히 보고 있는 안희주를 보고는 그냥 포기했다. 여러 가지 약을 처방받은 후 안희주는 퇴원하여 집으로 돌아갔다. 조금 전 임유리에게 소리를 지른 탓인지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내내 성서진의 기분이 별로 좋지 않아 보였다. 그는 안희주를 집까지 데려다준 후 회사에 일이 있다는 핑계를 대고 서재로 들어갔다. 안희주가 방으로 들어온 그때 임유리가 사진 한 장을 보냈는데 임신 검사 결과서였다. 곧이어 도발적인 문자가 도착했다. [안희주 씨가 오늘에 이미 눈치챘다는 거 알고 있어요. 이 아이 서진 씨 아이 맞아요. 서진 씨가 희주 씨를 사랑하는 것 같아요? 사랑한다면 나의 존재는 뭐죠?] [그 사람이 나한테 얼마나 빠졌는지 알아요? 매년 희주 씨 생일, 두 사람 결혼기념일에도 희주 씨를 재우고 나면 나한테 왔어요. 성욕이 어찌나 넘치는지 하룻밤에 콘돔을 몇 통이나 써요. 이튿날에 걷기도 힘들다니까요?] [서진 씨 마이바흐에, 대표 사무실에, 심지어 두 사람의 신혼 방에도 우리가 사랑했던 흔적이 남아있어요. 나랑 얼마나 다양한 자세를 시도했는지 모르죠? 사랑과 잠자리는 갈라놓을 수 없다고 했어요. 서진 씨가 희주 씨랑 다양한 걸 해본 적이 있나요?] 안희주는 도발적인 문자를 보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으려고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휴대전화를 꺼버린 그때 성서진이 뒤에서 그녀를 안았다. “자기야, 뭘 보고 있었어?” 그는 턱을 그녀의 어깨에 댔다. 휴대전화 화면이 꺼져서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제7화 “아니에요, 아무것도.” 안희주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 창밖을 내다보았다. 밤하늘에 눈부신 불꽃놀이가 아름답게 펼쳐졌다. 낮에 임유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오늘 저녁에 성서진이 그녀를 위해 불꽃놀이를 준비했다고 했다. 안희주가 넋이 나간 표정으로 창밖의 불꽃놀이를 바라보자 성서진이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불꽃놀이 좋아해? 그럼 다음에 이것보다 더 성대한 불꽃놀이를 보여줄게. 어때?” 성서진은 안희주를 품 안에 꼭 껴안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안희주는 겉으로는 웃어 보였지만 그 웃음에 씁쓸함과 눈물이 섞여 있었다. “서진 씨, 난 다른 사람이 했던 건 싫어요.” 그게 불꽃놀이든 사람이든... “...” 분명히 불꽃놀이를 말하고 있었지만 성서진은 가슴이 움찔하여 저도 모르게 당황하기 시작했다. 잠깐 침묵하다가 그녀를 더욱 힘껏 끌어안았다. “그럼 다른 서프라이즈를 준비해줄게. 절대 다른 여자가 부럽지 않게 말이야.” 안희주는 아무 대답 없이 먼 곳만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 후 며칠 동안 성서진은 아침 일찍 나갔다가 저녁 늦게 들어왔는데 누가 봐도 수상했다. 도우미마저 이상함을 눈치채고 웃으면서 말했다. “사모님, 대표님께서 몰래 서프라이즈를 준비 중인가 봐요.” “그러게요. 대표님은 정말 사모님을 사랑하세요. 얼마 전에 주얼리를 제작하더니 이젠 또 새로운 걸 준비하고. 서프라이즈가 끊이질 않네요.” 하지만 안희주는 무표정한 얼굴로 듣기만 할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성서진은 안희주의 손을 잡고 외출했다. “희주야, 나랑 어디 다녀오자. 무조건 마음에 들 거야.” 안희주가 거절하려는데 휴대전화가 갑자기 진동했다. 임유리가 문자를 보냈다. [희주 씨, 서진 씨 마음속에 희주 씨가 중요한지 내가 중요한지 한번 맞혀봐요.] 곧이어 성서진의 휴대전화도 진동했다. 안희주가 대충 힐끗거렸는데도 휴대전화 화면을 보고 말았다. 임유리가 검은 스타킹을 신은 다리 사진 한 장을 보내면서 이런 문자도 덧붙였다. [시간 지나면 기다리지 않아요.] 성서진의 눈빛이 깊어지더니 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는 휴대전화를 넣으면서 말했다. “희주야, 프로젝트에 문제가 생겨서 지금 당장 가서 처리해야 할 것 같아. 서프라이즈는 다음에 보여줄게. 응?” 안희주는 그의 두 눈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그 순간 성서진의 얼굴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냥 차에서 내렸다. 성서진은 딱 3초 동안 머뭇거리더니 시동을 걸고 휙 가버렸다. 몇 시간 후, 임유리는 쓰레기통에 버린 콘돔 사진을 보냈다. [안희주 씨, 또 나한테 졌네요. 내가 임신까지 했는데도 가만히 두질 않아요. 대체 날 얼마나 사랑하는 걸까요?] 임유리는 무척이나 우쭐거렸다. 안희주는 그 사진을 보며 아무 답장도 하지 않았다. 이미 떠나기로 마음먹은 이상 이 정도는 상처도 아니었다. 연속 며칠 동안 성서진은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고 안희주도 따져 묻지 않았다. 그 대신 임유리가 끊임없이 문자를 보냈다. 예쁘게 깎은 과일, 진열장을 가득 채운 명품, 그리고 그가 직접 만든 반찬까지... 모든 게 성서진이 임유리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말해주고 있었다. 안희주는 답장하지 않았고 그녀와 연관된 모든 것을 지우기에 바빴다. 사라지기로 했으니 완벽하게 사라져야 했다. 제8화 첫날 임유리가 성서진이 직접 그녀에게 새우껍질을 까주는 사진을 보냈을 때 안희주는 화로를 준비하여 성서진과 함께 찍은 사진을 몽땅 태워버렸다. 두 번째 날에 성서진과 함께 오동나무 밑에서 키스하는 사진을 보냈다. 안희주는 일꾼들을 불러서 별장 뒷마당의 체리 나무를 밀어버렸다. 세 번째 날에는 성서진이 그녀의 라이브 방송에서 했던 고백 모음집이었다. 안희주는 그가 예전에 그녀에게 썼던 수백 통의 연애편지를 꺼냈다. 오랜 시간이 지나 누렇게 변했지만 글씨는 여전히 뚜렷하게 잘 보였다. 안희주는 필적을 어루만지고는 아무런 미련 없이 문서 세단기에 던졌다. ... 떠나는 당일 아침. 안희주가 눈을 떠보니 오랜만에 집으로 들어온 성서진이 침대 옆에 서 있었다. 그는 그녀의 휴대전화를 들고 있었는데 표정이 왠지 어두워 보였다. “희주야, 방금 문자가 한 통 왔는데 삭제 성공이라고 했어. 뭘 삭제한 거야?” 안희주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다급하게 휴대전화를 가져와 확인해보니 개인 신상정보를 성공적으로 삭제했다는 문자였다. 다행히 비밀번호를 설정해놓은 상태라 성서진은 삭제 성공이라는 내용밖에 보지 못했다. 안희주는 그제야 마음을 놓으면서 말했다. “아니에요. SNS 계정이 해킹당했는데 안전하지 않을 것 같아서 다시 복구한 다음에 삭제했어요.” 성서진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웃었다. “자기가 좋아하는 거 사 왔어. 뭘 사 왔는지 맞혀봐.” 안희주는 잠깐 멈칫했다가 나지막하게 말했다. “동쪽 구역에서 파는 찹쌀도넛요.” “어떻게 알았어?” 성서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 어떻게 모를 리가 있겠는가? 예전에 연애할 때 매번 그녀가 화를 내면 달래려고 머나먼 동쪽 구역의 그 가게까지 가서 찹쌀도넛을 사 오곤 했다.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스치면 순식간에 마음이 녹아내렸었다. 안희주는 주얼리도, 비싼 자동차도 아닌 딱 그 찹쌀도넛을 좋아했다. 그때 성서진이 웃으면서 이런 말도 했었다. “우리 희주 달래기 너무 쉬운 거 아니야?” 안희주는 그의 이마에 딱밤을 때렸다. “달래기 쉬운 게 아니라 서진 씨를 사랑해서 서진 씨가 뭘 하든 다 용서가 되는 거예요. 나중에 서진 씨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내 앞에서 자살해도 꿈쩍도 하지 않아요.” 추억을 잊고 있던 그때 성서진이 뒤에 숨긴 찹쌀도넛 박스를 꺼내면서 다정하게 웃었다. “역시 너한테는 아무것도 숨기지 못한다니까.” 안희주는 웃으며 또박또박 말했다. “맞아요. 아무것도 숨기지 못해요.” 성서진은 괜히 가슴이 움찔했다. “희주야...” 그녀는 더는 뭐라 하지 않고 씻으러 화장실로 들어갔다. 그런데 씻고 나오자마자 다급하게 나가는 성서진을 보았다. 잠깐 망설이다가 그를 따라갔다. 하지만 문 앞에 도착한 순간 발걸음을 멈췄다. 왜냐하면 멀지 않은 곳에 임유리가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안희주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했다. ‘별장까지 찾아왔어?’ 그녀보다 더욱 놀란 건 당연히 성서진이었다. 성서진은 재빨리 다가가 어두운 얼굴로 임유리의 손을 잡았다. “미쳤어? 여기 오면 어떡해? 희주가 있을 때 오지 말라고 했었지, 내가!” 성서진의 호통에 임유리는 화들짝 놀라더니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고 속상해하며 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서진 씨랑 한시도 떨어져 있기 싫어요. 우리 아이도 그렇대요.” 그러고는 그의 손을 잡고 아랫배를 어루만졌다. 그런데 성서진이 싸늘한 태도로 손을 빼버렸다. “억지 부리지 마. 비서한테 데려다주라고 할 테니까 얼른 가. 며칠 후에 너랑 아이 옆에 있어 줄게.” 임유리는 가지 않으려고 그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렸다. “싫어요. 비서랑 가기 싫어요. 내 옆에 있어 줘요, 서진 씨.”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녀는 발끝을 들어 성서진의 넥타이를 잡아당기더니 입술에 키스했다. 성서진은 그녀를 밀어내려다가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와락 끌어안고는 키스를 퍼붓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정원에서 뜨거운 키스를 나누었다. 그의 손이 저도 모르게 그녀의 옷 속으로 들어갔다. 더했다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 바로 멈추고 임유리를 밀어냈다. “그만 가봐.” 임유리는 그렁그렁한 두 눈으로 그의 품에 기댄 채 귓가에 뭐라 속삭였다. 성서진의 표정이 살짝 흔들렸고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오늘 옆에 있어 줄게. 일단 차에 타. 이따가 갈게.” 자기 뜻대로 되자 임유리는 그제야 환하게 웃더니 배를 만지면서 차에 올라탔다. 성서진이 다시 집 안으로 들어오려 하자 안희주는 재빨리 돌아섰다. 안으로 들어온 성서진의 첫마디는 이러했다. “희주야, 오늘 네 옆에 있어 주려 했는데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았어. 아무래도 회사에 나가봐야 할 것 같아. 집에 가만히 있어. 바쁜 일이 끝나면 종일 네 옆에 있어 줄게. 응?” 그는 긴장한 얼굴로 안희주의 답변을 기다렸다. 안희주는 고개를 들어 그를 슬쩍 쳐다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성서진은 마음이 움찔했다. 안희주의 눈빛에 더는 빛이라곤 없었다. 그는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희주야...” 성서진이 뭐라 말하려던 그때 안희주가 웃으면서 덤덤하게 말했다. “가서 일 봐요.” 말투는 여전히 평소처럼 다정했고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 성서진은 그제야 한시름을 놓았다. 그는 더는 괜한 생각을 하지 않고 그녀의 머리를 어루만지고는 휙 가버렸다. 곧이어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멀어지다가 결국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안희주의 얼굴에 지어졌던 미소가 굳어졌고 그 대신 눈물이 두 볼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조용히 눈물을 닦고는 상 위의 찹쌀도넛을 전부 쓰레기통에 버려버렸다. 그다음 미리 정리한 캐리어를 챙기고 마지막으로 집 안을 둘러본 후 성서진에게 마지막 문자를 보냈다. [보름이 됐어요. 전에 내가 선물했던 결혼기념일 선물 이젠 열어봐도 돼요.] 성서진은 거의 칼답을 보냈다. [금방 들어갈 테니까 나중에 같이 보자.] 안희주는 웃음을 터트렸다. ‘같이? 성서진, 그땐 너밖에 없어. 그리고 앞으로도 혼자일 거야.’ 그녀는 그동안 임유리가 보낸 문자를 전부 성서진에게 보낸 다음 SIM 카드를 빼서 던져버렸다. 그러고는 캐리어를 끌고 집을 나갔다. 바깥의 아침 햇살이 온 세상을 환하게 비추었다. 앞으로 아무도 안희주를 찾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