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회라는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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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회라는 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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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이주원과 다툰 날,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고 나는 너무 화난 나머지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 인간은 바람을 쐬인다는 핑계로 첫사랑 그...

Chương (1)

第1章

마지막으로 이주원과 다툰 날, 그는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고 나는 너무 화난 나머지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 인간은 바람을 쐬인다는 핑계로 첫사랑 그녀와 그녀 아들까지 데리고 여행을 떠났다. 한편 우리의 어린 딸 아윤이는 홀로 집에서 꼬박 7일이나 내 시신 옆에 있어 주었다. 이주원이 드디어 우리 두 모녀가 생각나 집에 돌아왔지만 그때 나는 이미 차가운 시신으로 변해버린 지 오래였다. 딸 아윤이는 몸이 아파서 안색이 누렇게 변하고 거의 실신할 지경이 되었다. 뒤늦게 정신 차린 이주원은 딸을 부둥켜안고 나의 무덤 앞에서 대성통곡했다. 하지만 아윤이는 아등바등하면서 그의 품에서 벗어나 나의 묘비 뒤로 몸을 숨겼다. 아이는 두 눈을 반짝거리며 이주원에게 물었다. “그쪽 누구예요? 우리 엄마 귀찮게 굴지 말아줄래요?” 제1화 그날은 이주원과 가장 크게 싸운 날이었다. 그는 탁자 위의 물건들을 모조리 바닥에 내던지고는 나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강하리, 제발 의심병 좀 고쳐. 나 신나은이랑 진짜 아무 일도 없었단 말이야.” 나는 그저 묵묵히 그의 옷 속에서 립스틱을 하나 건졌다. 구하기도 힘든 한정판 브랜드 립스틱, 아쉽게도 사용 흔적을 남긴 립스틱이었다. 나는 괴로운 마음을 달래고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애 앞에서 좀 자제해주면 안 돼?” 이때 이주원이 내 손에 쥔 립스틱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힘이 너무 세다 보니 내 손등에 빨간 손자국이 났다. “이런 날들 이제 정말 지긋지긋해. 앞으론 너 꼴리는 대로 살아.” 말을 마친 후 그는 소파 위의 외투를 챙기더니 문을 박차고 나가버렸다. 문 닫히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나는 바닥에 축 늘어져 이주원이 벌이고 간 난장판을 하나둘씩 치웠다. 이때 5살 된 딸 아윤이가 침실에서 달려 나왔다. 아윤이는 내 목을 가볍게 끌어안고 손등에 난 빨간 자국을 어루만졌다. “엄마, 아파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아이의 두 눈을 보고 있자니 가슴이 찢어질 것만 같아 품에 꼭 안았다. “아윤이 착하지. 엄마 하나도 안 아파. 그저... 조금 피곤하네.” 나는 7년 동안 이주원을 철석같이 믿어왔다. 하지만 그는 신나은과 함께 몇 번이고 내 마지노선을 건드리고 있었다. 일이 이 지경에 다다른 이상 나도 더는 이 결혼을 유지할 수가 없었다. 아윤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앙증맞은 손으로 나의 큰손을 꼭 잡아주었다. “아윤이가 엄마 침대 데리고 갈게요. 우리 선생님이 한잠 푹 자면 피곤이 금방 풀린댔어요.” 아이의 착한 행동에 서글픈 내 마음이 엄청난 치유를 받았다. 나는 딸아이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옆에 살포시 누웠다. 우리만의 이야깃거리를 쉴 새 없이 재잘거리며 그렇게 밤이 흘러갔다. 깊은 밤, 아윤의 숨소리가 점점 고르게 들려왔다. 이때 침대 옆에 놓아둔 휴대폰이 울려서 열어보았더니 신나은이 내게 사진 한 장을 보내왔다. 사진 속에서 이주원은 윗몸에 아무것도 안 걸친 채 호텔 침대에 덩그러니 누워 있었다. 그 어떤 문구도 없지만 그 무엇보다 파격적인 내용이었다. 나는 순간 울화가 치밀어올라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끝내 몸을 휘청거리며 거실에 약 찾으러 나갔는데 평상시에 철석같이 놓여있던 약병이 오늘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고통이 극에 치달을 때야 나는 깨달았다. ‘이주원!!’ 그는 낮에 대판 싸우면서 모든 물건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흰색 약병이 창문 밖으로 튕겨 나갔고 그 안에는 내 목숨과도 같은 심장약이 들어있었다. 심박이 멎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의 일이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난 이미 허공을 맴도는 영혼이 돼버렸다. 괴롭고 씁쓸한 마음을 안고서 고이 잠든 딸아이만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이렇게 죽는 건 내게 나름 해탈이지만 아윤이가 아직 이렇게 어린데 나중에 어떡하지? 다음날 단잠에서 깨난 아윤이는 비몽사몽하게 눈을 뜨고 습관처럼 옆자리에 누운 나를 찾느라 더듬거렸지만 정작 나는 감쪽같이 사라져버렸다. 현실을 감지한 아이는 살짝 속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윤이는 맨발로 이 방 저 방 돌아다니면서 나를 찾다가 마침내 소파 옆에 드러누운 나를 발견했다. “엄마, 왜 여기서 자요? 아윤이랑 같이 침대에서 자야죠.” 아이는 내 몸에 한참 동안 기대있었지만 나는 평소처럼 상냥하게 달래줄 수가 없었다. 아윤이는 기분이 언짢은 듯 입을 삐죽거리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괜찮아요. 엄마 피곤할 테니 좀 더 자요.” 내 불쌍한 아가야, 이토록 어린 너를 어쩌면 좋을까? 나는 너에게 생과 사에 대해서도 제대로 가르쳐준 적이 없는데... 아이는 그저 내가 잠든 줄로만, 조만간 깨날 거라고 믿을 뿐이었다. 제2화 이주원이 홧김에 문을 박차고 나간 그 순간, 나는 그가 배짱 있으면 평생 돌아오지 말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젠 이 남자의 외도 여부 따위 관심 없고 신나은 모자가 나를 겨냥한 욕설과 치욕 따위 관심이 없었다. 심지어 이주원이 나를 한 줌의 재로 만들어버려도 괜찮으니 제발 좀 빨리 집에 돌아오기만을 바랐다. 우리의 딸 아윤이가 고작 5살이라 스스로 챙길 수가 없으니 홀로 집에 오랫동안 내버려 두면 안 된다. 다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줄곧 아윤의 옆에 있어도 이주원은 그림자조차 안 보였다. 아이는 배가 고픈지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결국 또다시 맨발로 내 몸 위에 기어올랐다. “엄마, 이제 일어나요. 아윤이 배고파요. 엄마가 해주는 김밥 먹고 싶다고요.” 전에 아이가 불량 식품만 즐겨 먹는 버릇을 고치려고 집에 있던 즉석식품들을 죄다 버렸었다. 이제 주방에 남은 건 오직 식자재뿐이다. 아윤이와 함께할 시간이 이렇게 짧은 걸 진작 알았더라면 밀키트는 최대한 많이 쟁여놓는 건데... 나는 후회가 마구 밀려왔다. 한낱 어린애한테 무슨 요구가 그렇게 높았을까. 나 자신이 마냥 원망스러울 따름이었다. 시간은 일분일초 흐르고 나도 더는 아윤의 가여운 모습을 지켜볼 수만은 없었다. 아이의 옆을 떠나 한시라도 빨리 이주원을 찾아와야 한다. 나의 넋이 나갈지언정 이주원을 반드시 데려와서 아윤이를 구출해야만 하니까. 어제 이주원과 신나은이 어느 호텔에 묵었는지는 모르지만 신나은의 집 주소는 알고 있었다. 전에 이주원의 내비게이션에서 수없이 봐온 주소였으니 기억하지 못할 리가 없다. 한때 업무가 바쁘다면서 새벽까지 야근하기가 일쑤였던 그 남자는 정작 신나은의 집에서 그녀의 아들과 함께 게임이나 해대고 있었다. 이주원이 일부러 져주면서 게임 한 판이 또 막을 내렸다. 신난 신서빈은 폴짝 뛰면서 이주원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아저씨가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어요.” 이때 신나은도 자연스럽게 다 자른 수박 한 조각을 이주원의 입에 쏙 넣어주었다. 그녀는 일부러 이상야릇한 말투로 아들에게 말했다. “서빈이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서빈이는 아빠가 있어. 단지 엄마가 못나서 우릴 버린 것뿐이야.” 이주원은 신나은의 서글픈 표정을 보더니 속상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는 신서빈을 목마 태우고 다정하게 말했다. “괜찮아. 애들은 크면서 아빠 사랑도 필요한 법이지. 서빈이 아빠라고 부르고 싶으면 마음껏 불러. 어차피 나도 일찌감치 우리 서빈이를 친아들처럼 여기고 있으니까.” 이아윤이 태어난 뒤로 이주원은 나를 믿는다면서 아이를 전적으로 내게 맡겼다. 어린이집 학예회는 물론이고 운동회도 거의 참석해본 적이 없다. 나는 그런 남편을 이해해주면서 최대한 아윤이에게 잘 설명해주었다. “아빠는 우리 아윤이가 싫어서 안 오신 게 아니야. 업무가 너무 바빠서 못 왔을 뿐이야. 너무 아빠 탓하지 마.” 그러고는 묵묵히 자식에 대한 책임을 짊어지면서 부녀지간의 믿음을 끝까지 유지해주었다. 그런데 아빠의 사랑이 텅 비었던 수많은 나날을 정작 남의 아빠 노릇이나 해줬단 말인가? 신나은은 살짝 난감한 표정을 지으면서 간드러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다 강하리 씨 삐지면 어떡해?” 나의 이름 석 자를 언급한 순간 이주원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그는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걔는 신경 쓰지 마. 오늘도 집 나오기 전에 대판 싸웠지 뭐야. 전에는 멀쩡하기만 하더니 요즘엔 갱년기가 도졌는지 아주 미친년 같다니까.” 신나은은 그의 대답을 들으면서 더없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이주원의 팔을 꼭 껴안고 꿀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오늘 밤에 여기서 자면 안 돼? 와이프도 피할 겸 머리도 식히고 좋잖아.” 나는 허공에 붕 뜬 채 초조한 마음을 어쩔 수가 없었다. 입을 벌리고 큰소리로 외치고만 싶었다. ‘이주원, 당장 돌아가. 아윤이가 기다리고 있단 말이야. 제발 남의 집 애는 잠깐 내려놔. 아윤이야말로 당신 친딸이잖아.’ 다만 이 모든 건 아무 소용이 없었다. 나는 소리를 낼 수 없었고 그들도 내 외침을 들을 수가 없었으니... 이주원은 잠시 고민하다가 홀가분하게 소파에 기대면서 답했다. “그래, 그러지 뭐.” TV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고 신서빈은 편한 모습으로 이주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신나은은 이주원의 어깨에 기댄 채 그에게 과일을 먹여주곤 했다. 지금 이 순간, 이 세 사람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한 가족이 아닐까 싶었다. 제3화 신나은 모자의 의기양양한 꼴을 보고 있자니 나는 속이 다 울렁거렸다. 이 역겨운 광경을 더는 지켜볼 수가 없었고 집에 홀로 남겨둔 아윤이도 자꾸 눈에 밟혀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아윤이는 여전히 내 몸에 기댄 채 멍하니 넋 놓고 있었다. 좀 전에 울었는지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된 모습이었다. 아윤이는 가장 아끼는 토끼 인형을 가져왔다. 그 인형은 재질이 별로여서 위생 문제가 줄곧 마음에 걸려 평상시에 아윤이가 안고 자는 걸 허락하지 않았었다. 다만 아이를 달래야만 하니 나는 늘 이렇게 말했었다. “엄마도 보라 좋아해. 보라 엄마한테 남겨주면 안 될까?” 이 방법은 썩 원활치 못했다. 아윤이는 늘 대판 울고 난 뒤에야 인형을 내게 건네곤 했었다. 그랬던 아이가 오늘은 딱딱해진 내 손을 들어 올리더니 가장 아끼던 인형을 내 품에 쏙 넣어주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 보라 줄게요. 앞으로 계속 엄마 가져요. 그러니까 이제 그만 화 풀어요, 네?” 이아윤은 내 팔을 껴안고 나긋하게 말을 이어갔다. “보라 안고 푹 자요. 자고 깨나면 아윤이 용서해줄 거죠?” 내 눈물이 허공에 툭 떨어지다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어리석은 아이는 내가 본인 때문에 화나서 여태껏 안 깨나는 거라고 여기고 있었다. 엄마가 어떻게 아윤이한테 화낼 수가 있겠어? 집 떠나 멀리 이주원에게 시집온 것도 후회했고 번마다 그 인간을 용서해준 것도 후회했지만 내 생에 아윤이를 낳은 것만은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이아윤은 내 삶에 가장 빛나는 별이고 고달픈 내 인생을 치유해주는 소중한 선물이니까. 아윤이가 없었더라면 나도 진작 이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두 팔을 벌려 아이를 꼭 안아주고 싶었지만 내 팔은 아이의 작은 몸을 뚫고 지나갈 뿐 아무런 흔적도 남길 수가 없었다. 한때 손만 뻗으면 내게 와닿았던 따스함이 이젠 이토록 아득하게 멀어졌단 말인가? 아무리 애를 써도 닿을 수가 없단 말인가? 아윤이는 내 몸에 기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초가을의 밤 날씨는 여전히 조금 쌀쌀했다. 또다시 잠에서 깬 아윤이는 저도 몰래 재채기를 해댔다. 코가 빨개진 걸 보니 코도 불편한 것 같았다. 하지만 아이는 이런 것 따위 신경 쓰지 않고 눈을 뜨자마자 나부터 살펴봤다. 보라가 딱딱해진 내 손에서 그만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아윤이는 마찬가지로 생기가 없는 인형을 바라보며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아이는 코를 훌쩍거리며 내 몸을 마구 흔들었다. “엄마, 아윤이도 싫고 보라도 버리는 거예요?” 본인 몸에서 오는 이상 신호를 감지하기라도 한 듯 아윤이는 작은 손으로 이미 냉랭해진 내 이마를 어루만졌다. “엄마도 아윤이처럼 병 난 거죠? 일부러 외면하는 거 아니죠?” “아윤이 아플 때마다 엄마가 항상 옆에서 챙겨줬잖아요. 이제 아윤이가 엄마 챙겨줄 차례예요.” 아이는 나를 침실까지 옮겨가려고 했다. 그렇게 해야만 내가 좀 더 편히 쉴 수 있고 얼른 나아질 거라 믿었나 보다. 다만 아이의 힘은 나약했고 또 종일 굶다 보니 몇 번의 시도 끝에 포기하는 수밖에 없었다. 아윤의 두 볼이 이상하리만큼 빨개졌다. 슬슬 열이 올라오기 시작한 듯싶었다. 나는 착잡한 마음에 허공에서 뱅뱅 돌았다. ‘전화해. 아빠한테 얼른 전화해. 엄마가 가르쳐줬잖아.’ 내 외침이 전해지기라도 한 듯 아이는 방으로 달려가 휴대폰을 꺼내왔다. “아윤이가 못나서 엄마를 부축할 수가 없네요. 얼른 아빠한테 연락해서 도와달라고 해야겠어요.” 나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참 다행이었다. 이주원이 돌아오기만 한다면 모든 게 해결될 테니까. 그는 나를 원망할 순 있어도 친딸 이아윤을 내팽개칠 리는 없다. 아윤이는 전에 기억했던 대로 번호를 누르고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결음만 두 번 울리고 전화가 대뜸 꺼졌다. 나는 그 순간 심장이 철렁 가라앉았다. 이전 같으면 버럭 화냈을 테지만 이제 이주원에게 애원하는 마음뿐이었다. ‘제발, 제발...’ 이아윤은 끈질기게 또다시 전화를 걸었다. 긴 연결음 끝에 마침내 통화가 연결됐다. 곧이어 이주원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다짜고짜 쏘아붙였다. “야, 강하리! 너 진짜 왜 이러냐? 나 바쁘다고! 엄청 바빠!!” “아빠, 저예요.” 제4화 아윤의 목소리를 들은 이주원은 금세 말투가 나긋해졌다. “아윤이구나. 엄마는 뭐하길래 우리 아윤이가 전화했을까?” 아이는 바짝 긴장해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엄마 자요. 아윤이 몸 아파서 기운이 하나도 없네요. 아빠가 와서 대신 좀 엄마를 침실까지 부축해주면 안 될까요?” 전화기 너머로 한참 침묵이 흘렀다. 이주원이 애써 화를 가라앉히고 담담한 어투로 아이에게 답했다. “엄마 바꿔줘 봐.” 아윤이는 휴대폰을 내 귀에 갖다 댔다. “엄마 듣고 있어요.” 드디어 내가 전화를 받았다는 생각에 이주원이 험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강하리, 넌 이게 재밌냐? 하다 하다 아윤이를 이용해서 내 동정심을 유발하려고 들어?” “그 어린 애를 우리 일에 끼어들게 하고 싶어? 나 요즘 안 돌아갈 거야. 그러니까 혼자 잘 반성해. 잘못 뉘우칠 때까지 절대 안 돌아가.” 그로써 전화가 꺼졌다. 이보다 더 절망적일 수가 있을까? 이주원은 심지어 내게 말할 기회도 안 주고 다짜고짜 욕설만 퍼붓고는 전화를 꺼버렸다. 아윤이는 슬슬 열이 오르기 시작했고 이를 지켜보는 나는 속이 재가 될 것만 같았다. 다시 살아나서 아이 대신 아파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해 이주원과 결혼했을 때, 이 인간은 신나은의 존재에 대하여 내게 단 한 마디도 말해준 적이 없었다. 나는 그의 달콤한 유혹에 빠져 부모의 반대도 무릅쓰고 집 떠나 이렇게 멀리 시집왔다. 이주원이 착한 사람이리라 굳게 믿으면서 내 모든 걸 걸었는데 신나은이 전남편과 이혼하고 아이와 함께 돌아온 순간 인생의 패배를 제대로 느꼈다. 나는 그렇게 유별난 사람도 아니고 결혼생활에서 일말의 서러움도 당해선 안 된다는 이기주의자도 아니다. 이 몇 년간 자질구레한 일 때문에 우린 수없이 부부싸움을 해왔지만 나름대로 잔잔하게 살아왔고 딱히 넘기지 못할 고비도 없었다. 이번에도 그럴 줄 알았다. 이주원을 믿기에 그에게 해명할 기회를 주고 싶었다. 다만 그는 유독 큰 반응을 보였고 나도 그만 참지 못한 채 푸념을 몇 마디 했다. 가족을 우선시하고 신나은 모자와 멀리 떨어져 지내라고 말했을 뿐인데 이주원이 버럭 화내는 것이었다. 내가 속 좁은 여자라고, 질투에 눈이 멀고 의부증이 심하다면서 삿대질을 해댔다. “강하리, 넌 나은이랑 비교가 안 돼. 모든 사람을 너처럼 비겁하고 옹졸하다고 여기진 마.” 그는 본인 잘못을 인정하긴커녕 모든 책임을 내게 뒤집어씌웠다. 내가 철없다는 이유로 갖은 질책을 해댔다. 남편으로서 본인이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는 것은 왜 감쪽같이 잊은 걸까? 아빠의 도리에 어긋났다는 것은 왜 잊었을까? 왜 그렇게 팔이 밖으로 굽는 걸까? 물론 나도 이혼을 언급했지만 그때마다 돌아오는 건 이주원의 변명과 외면뿐이었다. 애초에 나는 그저 이 인간이 철이 안 들고 마음이 성숙하지 못해서 그런 거라고 여겼었다. 이제 보니 이주원은 그 누구보다 욕심쟁이였다. 안정적인 가정도 원할뿐더러 첫사랑 그녀도 손에 넣으려는 욕망 덩어리... 인간이 어떻게 이렇게까지 이기적일 수가 있을까? 내가 선천성 심장병을 앓고 있어 부모님은 줄곧 나를 멀리 시집 보내길 원치 않으셨다. 결혼한 그해, 엄마, 아빠는 눈물을 훔치면서 이를 악물고 내게 후회하지 말라고 말했었다. 나 같은 불효녀는 없다면서, 나의 배신을 평생 용서치 않겠다고 하셨다. 다만 나는 자신감이 하늘을 치솟아 더는 돌아갈 수 없는 그 길에 올라섰다. 그러더니 결국 철저한 패배를 맛본 것이다. 침대에 움츠려 누운 딸아이를 보면서 나는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만 같았다. ‘불쌍한 아윤아, 그거 아니? 나도 우리 엄마, 아빠가 너무 그립단다. 아직 제대로 된 사과도 못 했는데... 그해 그런 으름장을 놓더니 결국 처참하게 무너지고 말았어. 난 역시 죽어서도 부모님의 용서는 바랄 수가 없나 봐...’ 제5화 아윤이의 열이 점점 더 올랐다. 아이는 내 팔을 껴안고 이제 곧 기절할 것만 같았다. “엄마, 아빠는 왜 우릴 버린 걸까요?” “아윤이도 싫고 엄마도 싫은 걸까요?” 이 문제에 대해서는 설사 내가 살아있다고 해도 대답해줄 수가 없다. 그저 딸아이에게 이 말만 해주고 싶었다. 이건 아윤의 잘못이 아니라고, 아빠가 매정한 건 엄마를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그 인간은 신나은을 사랑하기에 친자식도 아닌 신서빈을 예뻐해 주고 있다. 아이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내가 낳은 아이가 싫었을 뿐이다. 아윤이는 점점 힘이 빠져 배를 어루만지면서 몸을 움츠렸다. 그렇게 고통스러우면서도 끝까지 내 시체 옆에서 꼭 함께해주었다. 점심의 햇살이 창문을 뚫고 방안을 내비쳤다. 아윤의 이마에 맺힌 땀방울도 선명하게 보였다. 아이는 이미 차가워질 대로 차가워진 내 손을 꼭 잡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엄마, 나 너무 배고파요. 너무 괴로워요.” “엄마, 얼른 좀 일어나봐요. 아윤이 엄마 너무 보고 싶단 말이에요.” 온몸이 불덩이처럼 타오른 나머지 아이는 걸음을 휘청거리며 맨발로 겨우 화장실까지 걸어갔다. 이어서 찬물로 몸을 씻기 시작했다. 냉탕과 온탕을 넘나드는 순간, 아이는 화들짝 놀라서 몸을 움찔거렸다. 잠시 몸부림치더니 주방으로 달려가 식탁 위에 놓인 시금치를 마구 입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내가 까먹고 냉장고에 넣어두지 못한 시금치는 사흘이 지나니 잎이 다 노래지고 말았다. 평상시에 그토록 입이 짧던 아윤이는 다 시들어진 채소도 이젠 마다하지 않았다. 아이는 채소를 들고 소파 쪽으로 다가와 내 앞에서 보란 듯이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눈빛은 더할 나위 없이 고통스러운데 주먹만 한 얼굴은 여느 때보다 강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엄마, 봐요. 아윤이 스스로 잘 챙기고 있어요. 엄마 깨날 때까지 꼭 기다릴 거예요.” 나는 심장을 바늘로 콕콕 찌르듯 아팠다. 이게 어디 정상적으로 음식을 먹는 걸까? 그냥 살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집어삼키는 꼴이었다. 다만 이 어린아이가 또 무슨 잘못을 저질렀다고 이런 고통에 시달려야 할까? 단지 나와 이주원의 감정이 깨지고 아윤이만 희생양으로 됐을 뿐이니... 낮에 이주원이 했던 말은 다 홧김에 그랬을 거라고 믿었었다. 전에 아무리 크게 싸워도 이렇게 오랫동안 외박한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퇴근 시간이 다 돼도 이주원은 그림자조차 안 보였다. 내가 절망에 휩싸여 있을 때 테이블 위의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다. 화면을 보니 이주원한테서 걸려온 전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