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짝사랑은 10년이면 충분해
“저 이혼할게요.” 결혼한 지 3년 되는 유지민은 오늘에서야 이혼을 결심했다.
Chương (1)
第1章
“저 이혼할게요.”
결혼한 지 3년 되는 유지민은 오늘에서야 이혼을 결심했다.
제1화
하지만 남편은 모르게 온 로펌이었다.
상대편에 앉은 변호사는 형식적인 질문부터 했다.
“이혼을 원하시면 이혼 합의서에 사인부터 하시고 한 달 숙려기간 거치시면 이혼하실 수 있어요. 남편분은 같이 안 오셨나요?”
변호사의 질문에 유지민은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말했다.
“사인하라고 할게요.”
“그럼 일단 이혼서류부터 작성해드릴게요.”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혼서류를 받아든 유지민은 요즘 있었던 일들을 되새기며 고개를 숙인 채 계단을 내려갔다.
그런데 유지민이 프런트 데스크에 도착하자마자 익숙한 음성이 그녀를 불러세웠다.
“지민아, 네가 로펌엔 웬일이야?”
그녀를 불러세운 건 다름 아닌 오늘 상담의 대상이었던 유지민이 이혼하고자 하는 그녀의 남편 강유진이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볼 듯한 남자의 두 눈을 마주한 유지민은 순간 심장이 철렁했지만 어차피 자신에게는 관심이 없는 남자였기에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애써 긴장을 감추며 담담히 말했다.
“볼일이 있어서 왔어. 아, 어머님 아버님이 말씀하신 집 명의 건 서류 작성 다 했는데 사인해.”
유지민은 바로 들고 있던 이혼서류를 넘기며 마지막 장을 펼쳐놓고는 강유진에게 펜을 건네주었다.
마지막 장에는 서명란만 있었기에 변호사로서 사인은 꼼꼼히 해야 하는 직업병이 있던 강유진은 바로 앞의 내용을 확인하려 했지만 엘리베이터 문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얼굴에 한 1초 고민하다가 바로 펜을 받아들고 사인을 해버렸다.
“다했으니까 볼일 다 봤으면 이제 그만 가봐. 나 일해야 해.”
남자가 사인을 마치자 유지민은 안심하면서도 이 상황이 참 우습게 느껴졌다.
앞장을 펼쳐보기만 했어도 명의 이전이 아니라 이혼서류인걸 알았을 텐데 윤연서에게만 정신이 쏠려있던 강유진은 고작 그 정도의 시간도 낭비하고 싶어 하지 않아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혼서류에 사인을 해버린 것이다.
윤연서의 예쁘장한 얼굴을 본 유지민은 심경이 복잡해져 가방을 든 손에 힘을 준 채 로펌을 나섰다.
유지민이 나서고 유리문이 닫히기 전 그 찰나의 순간에 둘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었다.
“오빠, 방금 그분은 누구예요?”
“아, 이혼 자문하러 온 새 클라이언트야.”
강유진은 유지민에게는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로 윤연서를 달래듯 말했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조금만 기다려, 빨리 준비하고 같이 밥 먹으러 가자.”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들으며 손에 들린 이혼 합의서를 바라보던 유지민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이혼자문을 구하러 온 게 맞긴 하지, 다만 그 상대가 강유진일 뿐.
한 달만 있으면 이제 강유진과의 모든 관계도 끝날 것이기에 유지민은 빨리 그날이 오기만을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다.
사실 강유진과 유지민은 비밀 결혼인데 그 말인즉 양가 부모님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그들의 결혼사실에 대해 모른다는 것이었다, 물론 강유진이 죽고 못 사는 윤연서도 그가 유부남이라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비밀 결혼은 당연히 강유진이 제안한 일이었다.
사실 유지민은 대학 때 강유진을 처음 만난 뒤로 그에게 첫눈에 반해 그를 대학 시절 내내 쫓아다녔었는데 강유진은 꿈쩍도 하지 않고 그녀의 고백을 수도 없이 많이 거절했었다.
하지만 그때의 강유진은 모든 여자에게 동일하게 곁을 내주지 않았었기에 유지민은 별로 상처받지는 않았었다.
그렇게 졸업을 하고 유지민은 일을 하고 강유진은 공부를 계속하기로 했기에 둘 사이에는 그나마 있던 접점도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유지민은 단 한 번도 강유진을 잊은 적이 없었다.
영원히 평행을 유지할 것만 같았던 두 선은 그 둘의 맞선을 기점으로 맞닿아버렸다.
그날 맞선 상대가 유지민인 걸 발견한 강유진은 그녀를 보자마자 뭐가 그리 급한지 대뜸 결혼 생각이 있냐 물었고 강유진을 4년 내내 쫓아다녔던 유지민은 그 좋은 일을 마다할 인사가 아니었기에 둘은 그렇게 속전속결로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한 뒤에야 나는 점차 강유진의 비밀을 알아가게 되었다.
그에게는 사실 오랫동안 사랑했던 여자가 있었는데 그게 바로 가장 친한 친구의 여동생인 윤연서였다.
저보다 다섯 살 많은 오빠 친구를 오빠처럼 여기는 여자와 그녀를 바라보는 남자, 사실은 짝사랑이 예견된 사이였다.
하지만 강유진의 마음을 몰랐던 윤연서는 졸업하자마자 3년 동안이나 연애하던 남자친구와 결혼해버렸고 그에 충격받은 강유진은 그 상처를 무마시키고자 마침 결혼을 재촉하는 부모님의 뜻에 따라 결혼을 해버린 것이다.
이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뒤 유지민도 당연히 놀라고 가슴이 아팠지만 그래도 그녀는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강유진도 언젠가는 저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헛된 희망을 품으며 하루하루를 버텨왔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는 달리 유지민과 강유진의 사이는 3년 동안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지쳐가던 찰나에 유지민은 또 하필 남편의 핸드폰에 있는 갤러리를 들춰보게 되었는데 안에는 한 여자의 6살부터 25살까지의 사진들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결혼 전부터 사랑하던 여자의 사진을 결혼 후에도 모아왔다는 사실에 유지민은 도무지 침착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튿날, 술이라곤 입에도 대지 않던 강유진이 술을 잔뜩 마신 채 아주 기뻐하며 집에 들어섰다.
그 이유가 윤연서의 이혼 때문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을 때 유지민은 그동안 퍼부었던 자신의 노력이 무용지물이었음을 마침내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유지민은 이혼을 결심하게 된 것이다.
이혼서류를 받아든 그녀는 자신이 3년 동안 살았던 집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제 손으로 하나하나 가꾸어 나갔던 집을 둘러보니 만감이 교차하는 것 같았다.
고개를 돌리다 벽에 걸려있는 결혼사진을 본 유지민은 그 안에서 좋다고 웃고 있는 제가 바보같이 느껴져 바로 사진을 떼어내어 아래층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버렸다.
그날 밤, 유지민은 이혼 후 재산분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온 강유진은 사라진 결혼사진과 무언가를 열심히 쓰고 있는 아내를 보더니 웬일인지 말을 걸어왔다.
“결혼사진은 왜 없어졌어?”
“나사가 헐렁해서 사람 다칠까 봐 빼뒀어.”
유지민의 대답에 강유진은 더 묻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야식을 유지민의 곁에 놓아두고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들어있는 빨간 국물을 보던 유지민은 순간 코끝이 찡해졌다.
3년 내내 위가 아파서 담백한 음식만 먹고 있었는데 강유진은 그것도 몰라주고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강유진을 기쁘게 하려고 아무리 매운 음식이라도 다 먹어치웠을 테지만 더는 참지 않기로 한 유지민은 그것을 그릇째 내다 버렸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어떤 서러움도 참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이 불행했던 결혼생활도, 그 불행을 만든 장본인인 강유진도 모조리 다 버릴 생각이었다.
제2화
밤이 깊어감에도 잠에 들지 못했던 유지민은 고개를 베개에 파묻고 있었는데 그때 허리에서 누군가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리고 등 뒤에서 전해지는 뜨거운 숨결에 유지민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돌리며 강유진의 입맞춤을 피했다.
결혼 3년 내내 항상 먼저 관계를 요구하던 유지민이 자신이 처음 내민 손을 뿌리쳤다는 게 의아했던 강유진은 그녀를 보며 물었다.
“기분 안 좋아?”
“그날이라서 피곤해.”
유지민이 핑계를 대자 강유진도 더는 묻지 않고 이불을 여며주었다.
자기 전에 늘 낮에 있었던 일을 되새기는 강유진은 오후에 사인했던 부동산 서류를 떠올리고는 입을 열었다.
“부동산 서류 어딨어? 뭐 문제없나 한번 봐야겠어.”
그 말에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한 유지민은 그를 빤히 보며 물었다.
“진짜 볼 거야?”
어딘가 긴장한 듯한 그녀의 표정에 미간을 찌푸리던 강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유지민은 서랍에서 서류를 가져오며 그에게 건네주려 했는데 그 순간 울리는 핸드폰에 강유진은 먼저 전화부터 받았다.
“오빠, 고정우가 또 와서 문 두드리면서 욕하는데 나 너무 무서워요! 빨리 좀 와줘요...”
난폭하기 그지없는 윤연서의 전남편을 떠올린 강유진은 서둘러 옷을 걸치며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유지민이 그런 그를 불러세웠다.
“이혼한 그 동생이 또 찾는 거야?”
사실대로 말하려던 강유진은 밤에 또 혼자 이상한 생각을 할까 봐 일부러 상황을 더 심각하게 말했다.
“응, 전남편이 칼 들고 문 앞에서 소리 지른대. 혹시라도 안전에 이상이 생길 수 있으니까 가보려고.”
유지민은 그냥 조심하라는 말만 하고는 강유진을 보내주었다.
그가 떠난 뒤에도 잠에 들수 없었던 유지민은 시간을 보려고 핸드폰을 들었다가 우연히 윤연서가 올린 인스타를 보게 되었다.
며칠 전에 몰래 추가했던 그녀가 올린 인스타는 일출을 담고 있었는데 감탄을 하며 카메라를 돌리던 그 장면에 강유진의 모습도 언뜻 보였다.
[어두웠던 과거는 이제 지나갔으니까 새로운 미래를 맞아야지.]
영상 마지막에 나오는 그 문장을 본 유지민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아파 났다.
윤연서는 에이스 변호사인 강유진 덕에 성공적으로 이혼을 마치고 이미 새로운 미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이혼한다니까 강유진이 더 신나서 열정적으로 도와줘서 이렇게 빨리 끝날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이제 그녀가 솔로로 돌아왔으니 얼마 지나지 않아 강유진도 그녀에게 청혼할 것 같았다.
굳이 묻지 않아도 연상이 되는 장면에 헛웃음을 흘린 유지민은 자신의 처지가 더욱 처량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예견된 이혼이니 유지민은 버림받기 전 자신이 먼저 손을 놓는 것으로 일말의 체면이라도 지키고 싶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유지민은 전에 사 모았던 커플 용품을 들을 다 정리해내고 그것들을 담은 박스를 버리러 내려가고 있었는데 마침 들어오면서 그 모습을 본 강유진이 빠르게 유지민의 손에 들린 걸 받아들며 물었다.
“왜 갑자기 이렇게 많이 버려?”
“평소에 쓰지도 않는 거니까 이제 버리려고. 자리 차지하잖아.”
유지민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자를 들고 가는 강유진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가 저 상자를 열어보기만 한다면 안에 들어있던 것이 유지민이 그렇게 애지중지하던 물건 들이었음을 알아볼 텐데.
그런다면 유지민의 이상한 행동에서 현실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그녀의 마음도 알아차릴 수 있었을 텐데.
그럼 이혼 말고 다른 미래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애석하게도 강유진은 상자를 열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버려두었다.
상자를 내려놓고 등을 돌리는 행동에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제3화
밥을 먹고 유지민은 아직 처리해야 할 자료들이 있는데 작동이 되지 않는 노트북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강유진의 노트북을 빌려 쓰고 있었다.
그런데 문건을 보내는 사이에 강유진의 카카오톡으로 문자가 오자 유지민은 저도 모르게 그것을 클릭해보았다.
[유진아, 저녁에 회식 있는데 여자친구도 좀 데려와.]
그 문자를 본 유지민은 순간 손이 떨려왔다.
3년 동안 결혼 사실을 숨기고 있어 다들 강유진이 솔로인 줄로만 알고 있었고 그래서 유지민이 로펌에 이혼하겠다고 찾아갔을 때도 그녀를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랬던 강유진이 이번에는 과연 데려갈까?
유지민은 확신할 수도 없었고 감히 그러길 바랄 수도 없었다.
문자를 받은 강유진은 자연스레 유지민을 쳐다보았는데 미묘하게 변한 그녀의 표정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강유진의 시선을 느낀 유지민은 그를 돌아보며 물었다.
“나 데려갈 거야?”
3년이나 됐는데 이제는 공개할 때고 되지 않았냐라는 뜻의 질문이었지만 강유진은 입술만 달싹일 뿐 뭐라 말을 하지 못했다.
그 모습이 또 비수가 되어 가슴에 꽂혀버렸지만 유지민은 그 고통을 애써 참으며 또 아무렇지 않다는 듯 말했다.
“나 저녁에 약속 있어서 당신이 나 데려간다 해도 내가 못 가줘.”
강유진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다시 느슨해진 말투로 답을 했다.
“그럼 나중에 너 시간 될 때 같이 가자.”
그 말에 유지민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속으로 묵묵히 되뇌고만 있었다, 우리에게 다음은 없다고.
저녁에 혼자 회식 자리에 나간 강유진은 바로 술 취한 동료들에게 붙잡혀버렸다.
“너는 3년 동안 어떻게 여자친구를 한 번도 안 데리고 나와?”
“우리한테 제수씨도 안 보여주고, 대체 언제까지 숨기고 있을 거야?”
동료들의 재촉에 강유진은 어쩔 수 없이 연락처를 키고는 고민했다.
윤연서와 유지민 둘 중 누구에게 문자를 보내야 할지.
결국 그는 윤연서를 선택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윤연서가 회식 자리에 도착하자 다들 강유진의 안목을 칭찬하며 분위기도 금세 화기애애해졌다.
그렇게 다들 신나게 술을 마시다가 화장실이 급해진 엄 변호사는 강유진에게 서류를 하나 맡기며 아래층에서 기다리는 여자분에게 전해달라는 말을 남기고는 자리를 떴다.
어차피 가까운 거리가 서류를 얼핏 보던 강유진은 선심 쓰듯 연락처와 서류를 받아들고 아래로 내려갔는데 한참을 기다려봐도 보이지 않는 의뢰인에 전화라도 걸어보려고 전화번호를 입력했다.
그런데 그 번호는 이미 강유진의 핸드폰에 “지민”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있었다.
그 이름이 눈에 보이자 온몸이 굳어버린 강유진이 서둘러 서류를 찬찬히 훑어보려고 했는데 그 순간 눈부신 헤드 라이터가 강유진을 비춰오더니 유지민이 차에서 내려 그에게로 다가왔다.
당사자를 만난 강유진은 바로 서류를 들어 보이며 따지기 시작했다.
“이혼 재산분할 합의서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강유진이 서류를 보았음에도 유지민은 당황하지 않고 대꾸했다.
“서연이가 이혼한대서 엄 변호사님 불러준 거야.”
본능적으로 유지민의 말이 사실이 아님을 알아챈 강유진은 서류를 뜯어보려 했는데 그 순간 뒤에서 누군가가 강유진의 팔짱을 껴왔다.
“오빠, 의뢰인 만나러 간다면서 왜 이렇게 오래 걸려요?”
자신에게로 다가오는 윤연서에 망부석이 되어버린 강유진은 감히 제 아내의 얼굴도 보지 못했고 이 상황을 어떻게 해명해야 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먼저 이리 다가와 주는 윤연서를 내치기는 더 싫었기에 강유진은 그저 가만히 있기만 했는데 유지민은 생각보다 더 차분하게 말을 내뱉었다.
“고마워요 변호사님, 저랑 친구는 이혼 얘기 좀 더 해봐야 해서 이만 가볼게요.”
앞으로 두 발 다가오며 서류를 받아들고 허리를 살짝 숙이며 인사까지 하는 유지민은 너무 예의가 넘쳤다, 마치 모르는 사람 대하듯이.
제4화
밤바람을 맞으며 운전하던 유지민은 아까부터 계속 윤연서와 나란히 서 있던 강유진의 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미 너무 많이 상처받고 아팠던 터라 더 이상의 고통은 없었지만 그저 숙려기간인 30일이 너무 긴 것 같아 지쳐가고 있었다.
정신을 놓고 운전을 하다가 불법 후진을 하는 차를 보지 못한 유지민은 그대로 차를 들이 받아버렸고 찌그러진 문에 다리가 끼인 그녀는 피가 철철 나는 다리를 보며 식은땀이 흘렀고 의식도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그래도 정신력으로 버티며 간신히 119에 신고한 덕에 유지민은 바로 병원으로 이송되어 수술을 진행할 수 있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어 그저 작은 수술만 하고 병실에 온 유지민은 가족들에게 연락해야 한다는 간호사의 말에 먼 곳에 있는 부모님 대신 강유진에게 연락을 해보았다.
하지만 몇 통이나 걸었는데 강유진은 단 한 통의 전화도 받지 않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과 술을 마시며 짝사랑하던 상대도 옆에 끼고 있는데 원하는 걸 다 가져서 신난 그가 이 상황에 자신의 전화를 받을 리가 없을 것 같아 유지민은 결국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그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간호사는 할 수 없이 물었다.
“남편분은 진짜 못 오시는 거예요?”
그 질문에 유지민은 고개를 저으며 태연하게 답했다.
“이혼했어요, 이제 얼마 안 있으면 정말 남남이에요.”
이런 대답이 나올 거라고는 전혀 예상 못했던 간호사는 잠시 당황하다 다시 물었다.
“그래도 아직은 숙려기간이잖아요, 와서 사인하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간호사의 말에 자신의 지난 3년을 떠올린 유지민은 순간 감개가 무량해지는 것 같았다.
저녁 한 끼를 같이 먹기 위해 몇 날 며칠을 기다렸는데 그녀에게 돌아오는 건 야근 때문에 못 들어온다는 문자 하나였고 강유진과 조금의 접점이라도 만들기 위해 법을 공부했건만 돌아오는 건 아마추어라는 자신감을 꺾어버리는 말뿐이었으며 그를 기쁘게 하려고 준비했던 생일파티마저도 힘들다는 강유진의 한마디에 빛도 못 보고 접어야만 했다.
...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유지민 혼자서만 이 관계를 이어나가고 있었던 것 같다.
결혼생활 기간에 있었던 그 수많은 일들이 다 강유진이 유지민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 유지민은 어차피 오지 않을 강유진에게 괜한 기대를 품고 싶지도 않았다.
“아내 교통사고를 당했다가 연락하는데도 안 받는 남편을 굳이 기다릴 필요가 있을까요?”
유지민의 말에 그녀를 동정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던 간호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럼 친구라도 부르세요.”
그로부터 며칠 동안은 지서연이 유지민을 돌봐주었고 강유진은 사나흘 뒤에야 소식을 전해 듣고 병원을 찾아왔다.
유지민 다리에 감긴 붕대를 본 강유진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사고가 났는데 왜 연락을 안 해?”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던 유지민은 그의 얼굴을 보자마자 지난날에 걸었던 열몇 통의 전화가 떠올랐지만 그녀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당신 바쁜데 이런 작은 일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어.”
그 말을 들은 강유진은 죄책감이 밀려와 이참에 그날 일을 해명하고자 입을 열었다.
“지민아, 나랑 연서는 그냥 우연히 만난 거야. 괜히 오해할까 봐.”
“연서 씨 이혼은 끝난 거야?”
갑작스러운 질문에 의아했지만서도 강유진은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응, 이제 다 끝났어.”
그 말을 들은 유지민은 짙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축하해.”
“나도 그렇게 잘 끝났으면 좋겠다.”
강지한은 그게 무슨 말이냐고 묻고 싶었지만 갑자기 걸려오는 전화의 발신자를 보더니 복도로 나가 전화부터 받았다.
삼십 분 뒤에야 돌아온 강유진은 살짝 열린 병실 문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그래, 이혼 숙려기간이 아직 보름 정도 남았는데 그때까지만 버티면 완전히 해방이야.”
그 말에 전에 보았던 이혼 재산분할 합의서가 떠오른 강유진은 주어 없는 그 말의 대상을 알고 싶어 바로 문을 열어젖히며 물었다.
“이혼 숙려기간이라니, 누가 이혼해?”
제5화
강유진이 돌아올 줄은 몰랐어서 놀라긴 했지만 유지민은 마침 곁에 있는 지서연을 가리키며 말했다.
“서연이가 이혼한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지서연은 바로 무슨 상황인지 알아채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네. 저 이혼하려고요, 이미 절차 밟고 있어요.”
평소 유지민과 그리 가까운 사이가 아니었던 강유진은 당연히 지서연과도 얼굴 몇 번 본 게 전부였기에 그녀의 가정사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서 저 말을 쉽사리 믿을 수 없었다.
“그럼 바로 저한테 오시지 그러셨어요.”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는 강유진의 말에 할 대답이 떠오르지 않았던 지서연이 당황해하자 유지민이 바로 말을 이었다.
“그때 당신이 연서 씨 이혼 건으로 바빴어서 그냥 다른 분한테 부탁했어.”
윤연서를 언급하자 마찬가지로 당황한 강유진은 더 캐묻지 않고 말했다.
“그럼 앞으로 혹시라도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와.”
어떻게 잘 속이긴 했지만 유지민은 전혀 다행스럽게 느껴지지 않았다.
직업 특성상 여러 번 생각하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습관이 되어있는 강유진이 이 모든 일이 짜고 친 것처럼 어색하다는 걸 모를 리가 없는데 윤연서 얘기만 나오면 그는 고장 난 장난감처럼 삐걱대고 있었다.
그리고 윤연서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하면 강유진은 모든 걸 뒤로 제쳐두고 그녀에게로 달려가곤 했다.
윤연서를 대하는 강유진의 모습을 보니 사랑에 눈이 먼다는 말이 무엇인지 유지민은 점점 알 것 같았다.
지금도 강유진은 유지민의 병실에 앉아 핸드폰을 든 채 초조하게 타자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유지민은 그가 언제 일어날지 속으로 세고 있었는데 그 수가 열에 다다를 때 강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핑계를 대고는 병실을 빠져나갔다.
“지민아, 로펌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아. 언제 퇴원해? 그때 데리러 올게.”
어차피 거짓말인 걸 알았지만 유지민은 그저 날짜를 알려주었다.
“5일 뒤에 퇴원해.”
퇴원 당일,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역시나 나타나지 않는 강유진에 유지민은 인스타에 들어가 봤는데 마침 윤연서가 올린 바닷가 사진이 눈에 들어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강유진에게 전화를 걸어봤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파도 소리에 유지민은 둘이 같이 있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강유진은 태연하게 아무렇게나 둘러대고 있었다.
“해외 출장 왔는데, 무슨 일 있어?”
역시나 그는 유지민의 퇴원일도 잊고 있었다.
그에게 최우선은 언제나 윤연서였고 유지민은 그저 어쩔 수 없이 주어진 두 번째 선택지에 불과했다.
유지민은 자신이 이제라도 정신 차리고 이 관계를 끝내기로 마음먹은 게 참 다행이라고 느껴졌다.
이번에도 유지민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그저 형식적인 안부만 전했다.
“언제 간 거야? 집에는 언제 와?”
“이틀 전에 왔어. 집엔 내일이면 갈 거야.”
알겠다는 대답을 마친 유지민은 택시를 잡고 길가에 서서 달력을 펼쳐보았다.
이혼 숙려기간이 끝나기까지 이제 열흘밖에 남지 않았다.
그때가 되면 정말 자유의 몸이 되는 것이기에 유지민은 퇴원할 때 마중 나오는 사람이 없는 이 쓸쓸함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이제 강유진은 그녀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제6화
집으로 돌아온 유지민은 이사를 서두르려 했지만 다리가 아직 다 낫지 않아 거동이 불편했기에 아예 기사님들을 집으로 불러 짐을 나르고 있었다.
드나드는 인원이 많고 물건도 많다 보니 집 문도 다 열려 있었는데 마침 집에 들어온 강유진이 그 혼란스러운 장면을 보며 놀라서 묻자 유지민은 진작에 준비해두었던 멘트를 그대로 내뱉었다.
“성운동 집 인테리어 끝나서 아예 거기로 옮기려고. 여기 일하는 데랑 멀잖아.”
전에 사인했던 부동산 서류를 떠올린 강유진은 소파에 앉으며 새로 이사 갈 집에 베란다가 있는 걸 기억해내고는 시답잖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너 꽃 좋아하잖아, 이사가면 베란다에서 꽃 기르는 거 어때?”
그 말을 들은 유지민은 잠시 멈칫하다가 대답했다.
“나 이제 그거 안 좋아해.”
테이블 위에 놓인 생기 가득한 백합을 보던 강유진은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아 다시 권해보려 했지만 기사님들이 싸고 있는 택배 상자에 담긴 게 다 지기 물건인 걸 보고 나서 자연스레 화제를 바꿨다.
“그런데 왜 다 내 물건이야? 네 짐은?”
“이미 다 옮겼어.”
빠르게 대답하는 유지민에 강유진은 짐을 새집에 옮겼다는 말인 줄 알고 고개를 끄덕이며 주방으로 가 물을 마시더니 기사들을 보며 한마디 했다.
“짐 옮길 때 라벨 잘 붙여주세요. 다른 방에 잘못 두지 마시고요.”
그 말을 들은 유지민은 강유진을 바라보며 하고 싶었던 말을 또 삼켜냈다.
틀릴 리가 없지, 새집에는 강유진 짐만 있을 테니까.
짐 정리가 다 끝나자 강유진은 유지민을 부축하며 아래로 내려갔는데 때마침 올라오는 윤상우, 윤연서 남매를 마주치게 되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강유진은 빠르게 유지민의 손을 놓고 앞으로 나아가며 그녀를 막아섰다.
“네가 여긴 어쩐 일이야?”
“연서가 너희 집 와보고 싶대서, 나도 못 와봤잖아. 그래서 어머님한테 주소 받아서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왔지.”
윤상우는 눈썹을 꿈틀거리며 신나서 떠들었지만 윤연서의 정신은 온통 유지민에게로 쏠려있었다.
저번에 술집 앞에서 한 번, 로펌에서 한 번, 이미 두 번은 본 적 있는 얼굴을 여기서 또 보니 여자의 직감이 발동한 윤연서는 강유진을 보며 물었다.
“오빠, 이분은 누구세요?”
그 질문에 강유진이 어떻게 소개했으면 좋을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 유지민이 차분하게 손을 내밀며 인사를 건넸다.
“유지민이라고 합니다. 대학 동긴데 요즘 이혼을 하고 있어서 동창 도움 좀 받으려고 온 거예요. 그런데 하필 이사 중일 줄은 몰랐네요.”
그 말에 정신을 차린 강유진은 유지민에게는 미안했지만 별다른 수가 없었기에 그저 그 말에 따라 서로를 소개시켜주었다.
모든 게 아귀가 딱딱 들어맞았지만 어딘가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더 물을 수 없었던 윤연서는 강유진에게 자신도 이사를 돕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유지민의 옆에 다가온 윤연서는 그녀를 보며 물었다.
“언니는 왜 이혼하려고 하는 거예요?”
처음 통성명한 사이에 이렇게 친한 척을 하는 게 놀랍긴 했지만 유지민은 이내 웃으며 대꾸했다.
“남편이 다른 여자를 좋아하거든요.”
제7화
자신과 비슷한 처지인 유지민에게 연민의 감정이 생겨버린 윤연서가 말했다.
“나도 그랬는데 이혼하니까 다 괜찮아졌어요. 유진 오빠가 꼭 언니 도와줄 거예요.”
이혼의 가장 큰 난관인 사인을 강유진이 이미 해줬으니 큰 도움을 준 건 사실이었다.
유지민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연서 씨 일도 유진이가 맡았다던데, 일을 아주 잘하나 봐요.”
그 말을 들은 윤연서는 살짝 부끄러워하며 아까보다 한층 들뜬 말투로 답을 했다.
“네, 유진 오빠가 저를 엄청 많이 도와줬었어요. 전남편의 외도증거도 같이 찾아주고 또 제가 다치지 않게 보호까지 해줬거든요. 오빠 아니었으면 저는 진작에 전남편 칼에 맞아 죽었을 거예요.”
추억에 잠긴 듯한 표정으로 강유진과 있었던 일들을 나열하는 윤연서에 유지민은 상황에 맞지 않은 질문을 저도 모르게 해버렸다.
“유진이 좋아해요?”
내 질문에 잠시 당황하던 윤연서는 한참 만에 천천히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그냥 오빠로만 대해왔었는데 이렇게 저를 잘 챙겨주고 선물도 해주고 나 데리고 놀아주기도 하니까 조금 마음이 이상해요. 학교 다닐 때는 나 괴롭히는 사람들 혼내주면서 본인은 상처를 가득 달고 왔고 이번에도 이혼한다니까 가장 먼저 나서서 날 도와준 사람이에요 오빠는. 그리고 얼마 전에 저희 오빠 말 듣고 나서야 저는 오빠가 오랫동안 날 좋아했다는 걸 알게 된 거예요.”
“그렇게 차가워 보이기만 했던 사람이 나를 오랫동안 짝사랑했다는 게 너무 의외였어요. 도대체 내가 왜 그렇게 좋았는지도 모르겠고요.”
과거 이야기를 하는 윤연서에 유지민은 점점 마음이 복잡해졌다.
그녀의 입을 통해 듣는 강유진은 자신이 알던 강유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강유진은 차가운 게 아니라 그저 유지민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었고 주동적이지 않은 게 아니라 유지민이 그의 흥미를 불러일으키지 못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강유진에게 흠뻑 빠져 있었던 유지민인 이제서야 그 사실을 알아챈 것이다.
추억에 잠겨 있던 윤연서는 그런 유지민의 씁쓸한 표정을 보지 못하고 그를 진짜 친구로 생각하며 고작 몇 번 얼굴 보고 오늘 대화를 나눈 게 전부인 사람한테 그 누구에게도 하지 못했던 질문을 던졌다.
“언니는 유진 오빠 어떻게 생각해요?”
윤연서가 이런 질문을 하는 의도를 알아차린 유지민은 거의 다 비워진 집을 바라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나랑 유진이는 10년 동안 알던 사이었는데 요새 얼굴 보면서 내가 강유진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강유진이 어떻냐는 질문에는 답을 못하겠지만 유진이가 누군가를 이렇게 좋아하는 건 처음 봤어요 정말.”
유지민의 말을 들은 윤연서는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해도 지고 있었고 저녁이 다가오자 윤연서는 유지민의 팔을 끌며 같이 밥을 먹으러 가자고 했지만 마침 내려오다가 그 말을 들어버린 강유진은 제자리에 굳어버리며 밥은 같이 먹고 싶지 않다는 걸 표정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그에 유지민은 입꼬리를 올리며 담담히 말했다.
“저는 저녁에 일이 있어서요, 식사 맛있게 해요.”
유지민이 말이 끝나자마자 강유진은 조금의 틈도 주지 않고 유지민을 차에 태워버렸다.
“먼저 가 있어. 얘 데려다주고 금방 갈게.”
그들이 찬 타와 이삿짐센터에서 온 차가 같이 단지를 빠져나가자 강유진은 빠르게 바뀌는 신호등 불빛처럼 세차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적당한 핑곗거리를 찾으려고 머리를 굴렸다.
그 이상한 분위기를 보아낸 유지민은 이번에도 먼저 입을 열었다.
“긴장하지 마, 결혼 전에 약속했잖아. 양가 부모님 빼고는 아무도 모르게 살기로. 서로가 다 준비됐을 때 공개하기로 했는데 당신이 아직 준비가 안 된 것 같으니까 내가 좀 더 기다릴게. 난 다 이해해.”
유지민의 차분한 말을 들으니 긴장이 많이 가라앉은 강유진은 그녀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고마워, 나 이해해줘서. 사실 나도 이 결혼 천천히 받아들이는 중이야. 조금만 더 시간을 주면 꼭 공개할게.”
그 말에 유지민은 알겠다는 대답을 하며 창밖으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3년이나 기다렸는데 또 기다려달라니, 이제 지쳐버린 유지민은 더는 기다리고 싶지가 않았다.
제8화
집으로 가는 동안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유지민에 강유진은 그녀를 힐끔힐끔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왜 그러냐고 묻지는 못한 채 요 며칠 있었던 일들을 되새겨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요즘 윤연서만 챙기느라 유지민에게 소홀해져서 그녀가 서운한 거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 강유진은 미안한 마음에 먼저 제안했다.
“곧 우리 3주년 결혼기념일인데 여행이나 갈까?”
숙려기간이 얼마 남지 않아 괜히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유지민은 상처가 채 낫지 않았다는 핑계로 그의 제안을 거절했지만 강유진은 또 다른 몇 가지를 제안하며 함께 기념일 보내자고 했다.
그 많은 제안을 각양각색의 핑계를 대며 거절하는 유지민은 데이트라는 단어만 들어도 좋아하던 제가 알던 아내와는 사뭇 달랐기에 강유진은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의 표정을 보아낸 유지민은 혹시 그가 무언가를 눈치채기라도 할까 봐 서둘러 말을 바꾸며 말했다.
“그럼 마침 주말이니까 나랑 학교나 같이 가줘.”
왜 갑자기 옛 추억을 떠올리는 건지 이해가 가지는 않았지만 그녀가 모처럼 한 제안이라 강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강유진의 대답을 끝으로 차 안은 다시 조용해졌고 유지민은 다시 9월 7일에 이혼이라고 표기되어있는 달력을 꺼내 보았다.
그 하루 전인 9월 6일은 그들의 결혼기념일이기도 했고 유지민이 강유진을 사랑한 지 10년째 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 있는 날에 유지민은 첫 만남 장소인 학교로 돌아가 자신의 고달팠던 짝사랑에 온전한 마침표를 찍어주고 싶었다.
곧 모든 게 끝날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홀가분해진 유지민은 가벼운 말투로 장난치듯 물었다.
“이번에는 나 바람 안 맞힐 거지?”
그 말에 강유진도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내가 또 언제 널 바람맞혔다고 그래. 나 모함하지마.”
유지민은 대답은 하지 않고 그저 웃으며 강유진을 기다리던 수많은 날들을 떠올려보았다.
윤연서와 바닷가에 가느라 유지민을 병원에 버려둔 일, 윤연서의 이혼증거를 모으느라 유지민의 생일도 그냥 지나쳐버린 일, 또 그전에는 윤연서를 위로하러 간다고 교외에 유지민을 버리고 가기까지 한 강유진이었다.
...
윤연서가 엮여있을 때마다 강유진은 유지민을 버려두곤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동안 강유진은 집에도 돌아오지 않았고 유지민도 그를 기다리지 않고 매일 아침 달력을 한 장씩 뜯어내며 텅 빈 집에 마지막으로 해야 할 일을 하고 있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 9월 6일이 되었고 아침 일찍 일어나 화장을 하고 복고풍의 원피스를 입은 유지민은 이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기 위해 카메라까지 챙겨 들고 아래로 내려갔다.
강유진이 웬일로 문까지 열어주자 안 그래도 곧 해방된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던 유지민은 그와 웃고 떠들며 학교 때 있었던 추억들을 회상하기 시작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덩달아 마음이 편안해진 강유진은 유지민에게 먼저 사진을 찍어주겠다고 제안도 했다.
그렇게 둘은 빠르게 서원대학교에 도착했고 유지민은 먼저 차에서 내려 강유진을 기다리고 있었다.
한편 안전벨트를 풀고 바로 따라 내리려던 강유진은 순간 핸드폰에 뜬 문자를 보더니 몸이 굳어버린 사람처럼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오빠, 지금 혹시 시간 돼요? 나 열나서 그러는데 나 병원에 좀 데려다줄 수 있어요?]
한참을 기다려도 나오지 않는 강유진에 유지민은 차 안을 들여다보았는데 마침 강유진의 곤란한 표정을 보게 되었다.
하지만 강유진은 이내 결정을 내린 듯 차 문을 열고 말했다.
“지민아, 회사에 일이 좀 생겨서 나 가봐야 할 것 같아.”
강유진의 말을 들은 유지민은 처음에는 놀랐지만 이내 그가 거짓말한다는 걸 눈치채고 물었다.
“한 시간만 있다가 가면 안 돼?”
“급한 일이라서 안될 것 같아.”
단호하게 말하는 강유진에 윤연서와 관련된 일이라는 걸 눈치챘지만 유지민은 굳이 아는 척하지 않고 그를 보내주었다.
강유진은 다시 안전벨트를 매면서도 미안하긴 했는지 또 새로운 약속을 내걸었다.
“너 먼저 택시 타고 집에 가 있어. 바쁜 것만 다 처리하면 다시 같이 오자, 그때는 교수님들이랑 식사도 할 수 있을 거야.”
어차피 다음은 없을 사이였기에 유지민은 대답을 하지 않고 멀어져가는 차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혼자 교문 안으로 들어섰다.
삼십 분 만에 청춘과 짝사랑의 풋풋함이 묻어나 있던 곳을 다 돌아보고 사진도 다 찍은 유지민은 바로 택시를 잡아 집으로 향했다.
택시에 앉은 그녀는 또 올라온 윤연서의 피드를 살펴봤는데 이번에는 병원에 있는 사진이었다.
제9화
강유진이 윤연서 때문에 또 자신을 버렸다는 걸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유지민은 자신만만하게 말하던 강유진이 떠올라 코웃음을 쳤다.
유지민에게는 30분도 내어주지 못하는 사람이 윤연서에게만큼은 한없이 너그러웠다.
유지민은 만약 그 몇 시간이 둘의 마지막임을 알게 된다면 그때는 강유진이 과연 후회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그 질문에 답을 해주는 사람도 없었고 유지민 또한 이제 답 따위는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바로 인스타를 끄고 엄 변호사에게 연락을 했다.
[엄 변호사님, 오늘이 숙려기간 마지막 날인데 제가 따로 로펌 찾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나요?]
엄 변호사는 빠르게 답장을 보내왔다.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오늘만 지나면 이혼도 완전히 끝나게 됩니다.]
[새 인생 시작하시게 된 거 축하드려요.]
새 인생이라, 새 인생이긴 하지.
더는 강유진에게 얽매이지 않아도 되고 그의 심기를 건드릴까 노심초사하지 않아도 되니 유지민은 그저 인간 유지민으로서 더욱 빛나는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생각에 기분이 좋아진 유지민은 바로 집으로 향했다.
이혼까지 세 시간 남았을 때 그녀는 집에 조금 남아있던 자신의 물건들을 모조리 버렸다.
두 시간 남았을 때는 오늘 찍은 사진들을 묶어 영상을 만들었고 마지막 한 시간에는 카메라 화면을 자신에게로 돌리며 강유진에게 전해줄 작별 영상을 찍었다.
영상도 다 찍자 유지민은 메모리카드를 카메라에 꽂아 넣고 그것을 이혼 합의서와 함께 침대 머리맡 협탁에 올려두었다.
오늘부로 유지민과 강유진은 진정으로 남남이 된 것이다, 이건 유지민에게도 강유진에게도 다 축하할 일이었다.
짐을 다 정리한 유지민은 캐리어 하나만 달랑 든 채 집을 나서서 또 다른 도시로 향했다.
그녀는 누구에게도 자신의 목적지를 알리지 않은 채 미련 없이, 후회 없이 그곳을 떠났다.
한편 윤연서가 건강을 회복하자 그제야 유지민이 떠오른 강유진은 그녀와 했던 약속을 지키고자 연락을 수십 통이나 해봤지만 계속 핸드폰이 꺼져있다는 안내음만 들렸고 문자에도 답장이 없었다.
결혼한 지 3년 만에 처음으로 연락이 끊긴 유지민에 혹시 저번처럼 무슨 사고가 난 건가 싶었던 강유진은 빠르게 집으로 돌아갔다.
집안의 물건들은 언제 어지러웠냐는 듯 다 각기 제자리에 돌아가 있었는데 그것들을 유심히 보던 강유진은 집안 어디에도 없는 유지민의 물건에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당황한 그는 빠르게 원래 살던 집으로 가봤지만 그곳에서도 유지민은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안방에 들어간 강유진은 침대 협탁에 놓인 카메라와 서류를 발견하고는 자연스레 그쪽으로 걸어갔다.
며칠 전 카메라를 들고 신나하던 유지민을 떠올린 강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뭘 찍었나 싶어 전원을 켜보았다.
카메라를 켜니 바로 보이는 영상에 강유진은 그걸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었는데 서원대의 곳곳을 담은 영상에는 이따금씩 기다란 자막도 함께 나와서 강유진은 보면서도 자꾸만 일시 정지를 누르게 되었다.
[유진아, 여기 광장에 보드 타는 애들은 아직도 많은 것 같아. 여기서 내가 너한테 처음 고백했었는데, 그때 네가 나 거절해서 나 집 가서 혼자 엄청 울었었어.]
[도서관은 여전히 사람이 가장 많은 곳인 것 같아. 안에 들어가서 찍으면 방해될까 봐 그냥 여기서 찍었어. 저 자리 네가 전에 제일 좋아하던 자리였잖아.]
[강유진, 4년 동안 네가 여기서 농구 칠 때마다 나는 널 지켜봤었어.]
...
영상을 보며 6년 전 걱정 없이 뛰어놀던 그 시절을 추억하며 매일같이 자신을 쫓아다니던 유지민을 떠올린 강유진은 저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노래는 거의 끝나가는 데 영상은 아직 1분이나 남아있어 혹시 무슨 이벤트를 하는 건가 싶어 강유진은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유지민은 역시나 나타나지 않았다.
의아한 심정으로 재생 버튼을 누르자 검은 화면이 몇 초간 지속되다가 문득 유지민의 얼굴이 화면에 나왔다.
그런데 빨개진 눈시울과 피곤한 듯한 표정에 강유진은 이상하게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강유진, 올해는 우리가 안 지 10년 되는 해이고 또 내가 널 짝사랑한 지 10년 되는 해이기도 해. 너무 대단하지 않아? 내가 널 좋아한 시간을 10년을 단위로 헤아릴 수 있다니. 한 사람의 인생에서 10년이 몇 개나 되겠어.”
“7년의 짝사랑과 3년의 부부생활을 하면서 나는 늘 네 마음에 들고 싶어서 엄청 많이 노력했었어. 하지만 현실은 내 상상과는 전혀 다르더라. 앞으로 3년, 7년, 10년을 더 기다려봐도 네 마음은 변하지 않을 것 같아.”
“그래서 나한테 엄청 의미가 있는 오늘을 기점으로 나는 그만 내 집념을 좀 놓아주려고 해. 그리고 이제 너도 윤연서 씨한테 돌려주려고. 그래서 영상을 보는 너한테 꼭 해줄 말, 아니, 통보할 게 있어.”
“강유진, 우리 이제 이혼한 사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