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이 머무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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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움이 머무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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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엄마, 저 유학 가기로 했어요.” 설아가 어렵게 결정을 내리자, 멀리 떨어진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아...

Chương (1)

第1章

“아빠, 엄마, 저 유학 가기로 했어요.” 설아가 어렵게 결정을 내리자, 멀리 떨어진 부모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기쁜 목소리로 대답했다. “설아야, 드디어 결심했구나! 엄마랑 아빠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몰라. 이제야 한시름 놨어. 준비는 차근차근 하자. 아마 한 달 후면 우리 다시 만날 수 있을 거야.” 부모님은 밝게 말했지만 설아는 차가운 목소리로 짧게 대답했다. “네, 알겠어요.” 몇 마디 대화가 오간 뒤, 전화는 끊겼다. 민설아의 눈가는 촉촉해졌고 걱정 가득한 표정으로 불도 켜지 않은 채 창가에 앉아 있었다. 마치 창밖의 새까만 밤처럼 설아의 마음도 깊은 어둠 속에 잠긴 듯했다. 제1화 30분쯤 지났을 때 현관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민설아는 예전처럼 반갑게 일어나 마중 나가지 않았다. 대신 천장에 켜진 눈부신 백열등을 가만히 바라볼 뿐이었다. 윤지훈은 신발을 벗고 거실로 들어와 소파에 앉아 있는 민설아를 보고 고개를 살짝 들며 물었다. “왜 아직 안 자고 있어?” “기다렸어. 내가 메시지 보낸 거 못 봤어?” 민설아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윤지훈은 별다른 반응 없이 무심히 말했다. “오늘 하루 종일 실험실에 있었어. 핸드폰 볼 시간이 없었거든.” 그는 그렇게 말하고 그녀가 믿건 말건 상관없다는 듯 외투를 벗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장실에서 샤워기 물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윤지훈이 거실 테이블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은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낮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오르며 민설아는 손이 살짝 떨렸다. 그녀는 천천히 몸을 숙여 계속 울리는 핸드폰을 집어 들고 익숙한 손놀림으로 비밀번호를 입력해 잠금을 풀었다. 메시지를 보낸 사람은 분홍색 토끼 프로필 사진을 사용한 ‘예슬’이라는 이름의 여자였다. “지훈아, 오늘 정말 고마웠어!” “집에 잘 도착했어!” 친근하고 다정한 메시지를 본 민설아는 손가락을 움직여 대화 명세를 위로 넘겼다. 어젯밤 9시에 기록된 메시지가 눈에 들어왔다. “나 오늘 귀국했어. 너 마중 나올 거야?” 그리고 바로 이어진 짧고 간단한 답장이 보였다. “주소.” 윤지훈은 어젯밤 8시 50분쯤 집에 들어왔고 곧바로 화장실로 들어갔다.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아서 민설아는 그가 샤워 중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지금 보니 그는 그 시간 동안 서예슬과 메시지를 주고받고 있었다. 민설아의 속눈썹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녀는 입술을 꾹 깨물며 대화창을 닫고 이번에는 자신의 이름으로 저장된 대화창을 열었다. “오늘 비 온대. 우산 챙겨.” “점심엔 좀 쉬어.” “이거 봐. 내가 고른 장바구니 사진이야!” “길에서 본 강아지야. 너무 귀엽지?” 그녀가 보낸 메시지들로 하얀 말풍선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수십 개의 메시지 중 윤지훈은 단 한 번도 답장을 보내지 않았다. 서예슬과의 대화창과 민설아와의 대화창은 너무도 대조적이었다. 그녀는 공식적으로 윤지훈의 여자 친구였지만 그 이름이 얼마나 초라하고 무의미한지를 깨닫게 됐다. 놀랍게도 이런 사실을 직면한 민설아는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 그동안의 시간 속에서 이미 익숙해졌는지 아니면 정말로 마음이 식어버린 것인지 그녀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았다. 민설아는 핸드폰을 조용히 제자리에 내려놓았고 머릿속은 복잡한 생각들로 가득했다. 그녀는 윤지훈을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대학 입학식에서 신입생 대표로 연단에 오른 윤지훈은 단숨에 많은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잘생긴 얼굴과 무심한 분위기는 금세 화제가 되었고 그는 곧 캠퍼스의 인기남이 되었다. 수많은 여학생이 그를 차지하려 했지만 윤지훈은 누구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았다. 민설아 역시 처음에는 거절당했다. 그러나 그녀는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1년 동안 끈질기게 고백을 반복했고 결국 수십 번의 시도 끝에 그의 여자 친구가 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연인이 된 후에도 윤지훈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녀의 메시지에 답하지 않았고 전화도 받지 않았다. 감정 표현도 전혀 없었다. 민설아는 그의 이런 모습이 원래 성격 때문이라고 생각했고 자신이 더 노력하면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얼마 전에 그의 노트북을 빌려 사용하다 발견한 사진 폴더가 모든 것을 뒤집었다. 그곳에는 서예슬의 사진이 수백 장 저장되어 있었다. 서예슬은 윤지훈의 어린 시절 친구였다. 그는 예슬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고백할 계획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예슬은 그에게 “우린 그냥 친구로 지내자”라는 말로 선을 그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예슬은 유학을 떠났고 윤지훈은 홀로 남아 대학에 진학했다. 그 모든 사실을 알게 된 민설아는 비로소 깨달았다. 윤지훈이 차가운 성격인 것이 아니라 단지 그녀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던 것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민설아는 더 이상 그에게 매달리지 않기로 결심했다. 윤지훈을 떠나기로 그리고 자신을 위한 새출발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를 위한 도구로 남기 싫었고 마음이 다른 곳에 있는 사람을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떠날 준비를 시작했다. 제2화 밤 11시, 알람 소리가 울릴 때쯤 윤지훈이 욕실에서 나왔다. 그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핸드폰을 들고 책방으로 들어갔다. 그가 아직도 잘 생각이 없는 모습을 보고 민설아는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윤지훈은 항상 규칙적인 생활 패턴을 유지했다. 이 알람은 자야 할 시간을 알리는 신호였다. 민설아는 망설이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조심스레 물었다. “이미 늦었는데... 안 잘 거야?” 윤지훈은 핸드폰 화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손가락으로 빠르게 화면을 누르며 대답했다. “아직 끝내야 할 과제가 좀 있어서. 조금 있다 잘게.” 3년간 함께한 시간 동안 민설아는 이렇게 다른 윤지훈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서예슬을 데리러 가느라 밤 10시 반이 돼서야 집에 들어온 것도 모자라 이제는 잘 시간마저 핑계를 대며 미루고 있었다. 민설아는 윤지훈의 뻔한 거짓말을 들춰내지 않았다. 대신 조용히 돌아서 방으로 들어갔다. 침실 맞은편 책방 문은 활짝 열려 있었고 그녀는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대로 볼 수 있었다. 과제가 있다고 하던 윤지훈은 핸드폰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렇게 행복한 표정의 윤지훈은 민설아도 낯설었다. 그동안 함께한 시간 동안 그녀는 그의 이런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아무리 차가운 사람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거구나.’ 민설아는 속으로 씁쓸하게 생각했다. 윤지훈은 사랑할 줄 모르는 게 아니었다. 단지 민설아 자신이 그의 마음을 얻을 사람이 아니었을 뿐이다. 민설아는 문을 닫으며 조용히 웃음을 흘렸다. ‘어차피 30일 후면 내가 떠나고 나면 윤지훈은 더 이상 숨길 필요 없이 진정 사랑하는 여자랑 함께 보낼 수 있겠지. 이미 결심한 건데 왜 스스로 괴로워해야 하지?’ 다음 날 아침, 화창한 날씨 속에서 민설아는 일찍 집을 나서 아침밥을 사가지고 왔다. 집에 도착했을 때 윤지훈도 막 일어나 있었다.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조용히 아침을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 윤지훈은 외투를 집어 들며 나갈 준비를 했다. 민설아는 지난주에 했던 약속이 떠올라 그를 불러 세웠다. “오늘 토요일인데 쉬잖아. 지난번에 치월산 가서 저녁노을 보기로 했던 거 기억 안 나?” 윤지훈은 서두르던 걸음을 잠시 멈추더니 대답했다. “교수님이 갑자기 과제를 내주셔서 오늘은 힘들 것 같아.” 민설아는 말없이 입안의 빵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반응이 평소와 달랐는지 윤지훈은 어색한 듯 말을 덧붙였다. “다음번엔 꼭 데려갈게. 아마 다음 달쯤에는 시간이 좀 날 거야.” 예전 같았으면 윤지훈이 이런 말을 해주는 것만으로도 민설아는 기뻐서 어쩔 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그녀는 별다른 감정도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응.” 너무 달라진 반응에 윤지훈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는 식탁 위에 놓인 달력을 스치듯 보며 대화 주제를 바꿨다. “이거 언제 산 거야? 30일 남은 건 뭐 중요한 일이라도 있어?” 민설아는 달력 위 빨갛게 표시된 숫자 30을 바라보다 조용히 한 장을 뜯었다. 숫자가 29로 바뀌었다. “오늘 아침에 샀어. 한 달 후에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매일 기억하려고.” 민설아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윤지훈은 더 묻지 않고 현관으로 향했다. 신발을 신고 문을 열며 짧게 말했다. “저녁에 타르트 사 올게. 푹 쉬어.” 그의 마지막 말은 닫히는 문소리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민설아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가가 살짝 붉어졌다. 아침 식사를 마친 후, 민설아는 큰 가방을 꺼내 집 안의 불필요한 물건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꺼낸 물건들에는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커플 머그잔, 여러 디자인의 면도기, 함께 찍은 사진을 걸려고 샀던 빈 액자 등이 있었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정성껏 골랐던 물건들이었지만 윤지훈은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다. 이 집도 그녀가 애정을 담아 꾸몄지만 윤지훈에게는 그저 잠시 머무는 숙소에 불과했다. ‘괜찮아. 어차피 이건 다 버리면 돼. 내가 떠난 뒤 윤지훈은 이곳에 살지도 않을 거니 말이야. 곧 이곳도 다시 비워지고 우리와 관련된 모든 흔적도 사라지겠지.’ 민설아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하나하나 물건을 정리해 나갔다. 제3화 시간은 흘러 어느새 밤이 찾아왔다. 민설아는 쓰레기봉투를 가득 채워 집 밖으로 나가 쓰레기통에 버렸다. 집으로 돌아와 소파에 기대어 쉬며 핸드폰을 열어 SNS를 확인했다. 가장 최근 게시물은 분홍색 토끼 프로필 사진을 가진 여자가 올린 일몰 사진이었다. 사진 중 한 장에는 남자의 옆모습이 담겨 있었는데 그의 손에는 타르트 상자가 들려 있었다. 화면 속의 아름다운 저녁노을을 보니 민설아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서예슬의 개인 계정은 민설아가 윤지훈 몰래 여러 사람에게 부탁해 어렵게 추가한 것이었다. 어느 날, 그녀는 서예슬이 “외국에서 먹었던 타르트가 너무 먹고 싶어~”라는 게시글을 올린 것을 보고 윤지훈이 왜 그토록 자주 타르트를 사 오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조금씩 민설아는 윤지훈과 서예슬의 연결고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윤지훈이 고집스럽게 사용하는 세제, 그녀에게 선물했던 꽃다발, 집에 들여놓은 장식품들까지. 모두 서예슬의 SNS에 올라온 것과 똑같았다. 윤지훈은 민설아와 함께하면서도 서예슬을 잊으려 했지만 결국 그녀를 깊이 그리워하며 민설아를 대체물처럼 여겼다. 그 사실을 곱씹으며 민설아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복잡한 감정이 스쳤지만 이제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가슴이 먹먹한 기분을 달래기 위해 설아는 냉장고에서 오이를 꺼내 씻어 천천히 먹었다. 시간이 흘러 벽시계의 시침이 몇 바퀴를 더 돌았다. 자정이 가까워졌을 때, 윤지훈이 집에 돌아왔다. 윤지훈은 손에 아무것도 들지 않고 들어왔다. 아까 떠날 때 약속했던 타르트는 까맣게 잊은 듯했다. 그는 집안을 둘러보다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집에 뭔가 빠진 것 같아.” “오후에 안 쓰는 물건들 좀 치웠어.” 민설아의 말을 들은 윤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소매 단추를 풀었다.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다. 윤지훈의 늘 곧은 뒷모습을 보며 민설아는 시선을 내렸다. 사실 그가 조금만 신경 썼다면 사라진 물건들 대부분이 그녀가 평소에 사용하던 것들이라는 걸 눈치챌 수도 있었다. 그렇게 똑똑한 그가 민설아가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는 건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시선과 마음은 서예슬에게만 고정되어 있었다. 이런 작은 변화에 신경 쓰지 않는 게 오히려 자연스럽지 않은가? 결국 그는 자신에게 친구 같은 존재로 여겨지는 여자 친구의 미묘한 행동을 관심 있게 보지 않았다. 민설아는 속으로 자신을 비웃으며 생각하던 그때 윤지훈이 갑자기 물었다. “‘유마’라는 건 어디서 맞춤 제작할 수 있을까? 그런 유행하는 건 잘 몰라서.” 어제 서예슬이 SNS에 올렸던 게시글이 떠올랐다. 윤지훈은 그녀를 위해 그것을 준비하려고 했다. 민설아는 잠시 멈칫했다가 대답했다. “‘유마’는 최근 유행하는 거라 쉽게 만들 사람을 찾기 어려워. 그런데 내가 할 줄 알아. 내가 만들어줄게.” 민설아의 대답에 윤지훈은 잠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여자 친구에게 좋아하는 여자를 위한 선물을 부탁하는 게 부적절하다고 느낀 듯했다. 하지만 서예슬을 기쁘게 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커서인지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구체적인 디자인과 요구사항은 내가 보내줄게.” 민설아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섰다. 그녀의 눈가가 붉어진 것을 윤지훈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날 밤, 민설아는 서예슬의 SNS 게시물을 참고하며 밤새워 선물을 만들었다. 다음 날 아침, 윤지훈이 집을 나서기 전, 그녀는 ‘유마’를 그의 손에 건넸다. 윤지훈은 그녀의 부은 눈가를 보며 드물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고마워.” 그의 목소리는 낮고 조심스러웠다. 민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피곤한 목소리로 답했다. “괜찮아. 네가 좋아하면 됐어.” 윤지훈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고 돌아서서 방을 나갔다. 그의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을 보며 민설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입술을 움직였다. “이건 내가 떠나기 전에 너희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이야.” 그날 이후, 윤지훈은 밤새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민설아의 행동도 방 안에서 사라져가는 물건들도. 그는 여전히 서예슬과 시간을 보내며 하루하루를 바쁘게 보냈다. 민설아도 그를 더 이상 방해하지 않았다. 묵묵히 짐을 정리하면서 방은 점점 텅 비어갔다. 며칠 후, 겨울옷을 정리하던 중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다. “설아야? 지훈 오빠가 취했어. 노래방에 와서 좀 데려가 줄래?” ‘지훈이가 술에 취했다고? 그가 술을 마시는 걸 본 적이 없었는데.’ 민설아는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별다른 생각 없이 핸드폰을 들고 택시를 잡았다. 노래방은 집에서 그리 멀지 않아 20분쯤 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주소를 따라 찾아간 방 앞, 문은 살짝 열려 있었다. 그녀가 문을 천천히 밀고 들어가자 윤지훈은 한 여자의 품에 기대 속삭이고 있었다. 두 사람의 모습은 마치 사랑에 빠진 연인 같았다. 제4화 방 안에 가득 찬 묘한 분위기를 보며 민설아는 순간 심장이 멎는 듯했다. 그녀는 잠시 깊게 숨을 들이쉬고 천천히 걸어가 서예슬에게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윤지훈의 여자 친구 민설아입니다.” 그 말을 들은 서예슬은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그러면서도 곁에 기댄 윤지훈을 밀어내며 그를 깨우려 애썼다. “지훈아, 네 여자 친구가 왔어. 얼른 정신 차려!” 하지만 술에 취해 얼굴이 붉어진 윤지훈은 다시 서예슬 쪽으로 몸을 기대더니 그녀의 손을 붙잡고 희미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여자 친구는 너잖아...” 그 순간 방 안은 순식간에 정적에 휩싸였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난처한 표정을 지었지만 정작 민설아는 놀라지도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가방에서 숙취 해소제를 꺼내 서예슬에게 건넸다. “술에 많이 취했네. 이거 먹어. 약 먹고 좀 깨면 제가 데리고 갈게요.” 서예슬이 숙취 해소제를 먹이자 윤지훈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들어 민설아와 눈이 마주친 그는 황급히 서예슬의 품에서 빠져나와 변명했다. “방금 실수했어. 너를 다른 사람으로 착각했어.” 민설아는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이제 집에 가자.” 윤지훈은 민설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외투를 챙겼다. 그러나 몇몇 남자들이 그의 앞길을 막아섰다. “왜 벌써 가려고? 지훈아, 평소에 넌 실험실 일이 아니면 과제 하느라 우리랑 놀 시간도 없잖아. 이번엔 예슬이 덕분에 간신히 널 불렀는데 이렇게 가버리면 섭섭하지 않냐?” “맞아! 게다가 이제 막 게임 시작하려던 참인데 네가 빠지면 재미없지!” 그들은 윤지훈의 의사를 묻지도 않고 그를 다시 자리에 앉히며 게임을 준비했다. “오늘은 제대로 놀아보자고! 러시안룰렛이야. 룰은 간단해. 지목된 사람은 하나의 비밀을 공개하면 돼.” 윤지훈은 잠시 망설이는 듯했지만 고개를 돌려 민설아를 바라봤다. 그녀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담담히 말했다. “왔으니 한 판 정도는 해보지 뭐.”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신이 나서 게임을 시작했다. 첫 라운드부터 윤지훈이 걸리자 모두가 큰 소리로 웃으며 들떴다. “드디어 너 걸렸다. 지훈아! 첫 번째니까 간단하게 하자. 통화 기록이나 카카오톡 상단 고정된 사람을 보여줘 봐.” 가벼운 벌칙처럼 보였지만 윤지훈은 입을 굳게 다물었다. 그러자 몇몇 여자들이 대신 나섰다. “그게 뭐가 어려워? 지훈 오빠는 여자 친구가 있으니까 당연히 고정된 사람이 여자 친구분이겠지!” 그 말에 윤지훈은 냉정하게 대꾸했다. “이미 답을 알면서 굳이 보여줄 필요 있나? 다른 걸로 하자.” 그러나 남자들은 고집을 부리며 윤지훈의 핸드폰을 빼앗아 열었다. 고정된 대화창에 떠 있는 ‘서예슬’ 이름 세글자를 본 순간 방 안은 얼어붙었다. 윤지훈은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고 핸드폰을 되찾아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희들끼리 놀아. 난 화장실 좀 갔다 올게.” 그는 화장실로 들어가 한참 동안 나오지 않았다. 걱정이 된 민설아는 그를 찾으러 나갔다. 화장실 근처에서 들려오는 그의 목소리에 걸음을 멈췄다. “내가 취했지 죽은 건 아니야. 근데 왜 굳이 룰렛을 나한테 돌린 거야? 다들 난처하게 만들려고?” 그러자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지훈아, 네가 예슬을 얼마나 오래 좋아했는지 다들 알잖아. 근데 네가 고백도 못 하고 속으로만 삭히는 건 우리가 보기에도 안쓰럽다고. 그래서 이렇게라도 도와준 거야. 네 마음 제대로 정리되게 하려고. 네 여자 친구도 이젠 알아야지. 그래야 너도 원하는 걸 위해 나아갈 수 있지 않겠어?” 그러나 윤지훈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가득했다.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앞으로 이런 식으로 나서지 마.” 그들의 대화를 들은 민설아는 조용히 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눈가에는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그녀는 천천히 심호흡하고 여자 화장실로 들어가 찬물을 얼굴에 적셨다. 그리고 얼굴을 닦은 뒤 윤지훈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가자. 밖에서 기다릴게.” 그녀는 가방을 메고 천천히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문을 나서려던 찰나, 핸드폰이 울렸다. 전화는 어머니에게서 온 것이었다. 어머니는 잔소리를 늘어놓더니 준비는 다 됐는지 물었다. 민설아는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여긴 다 준비됐어요. 언제든 떠날 수 있어요.” 그 순간, 뒤에서 윤지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떠난다고? 어디로 가려는 거야?” 제5화 민설아가 뒤를 돌아보니 윤지훈이 차가운 얼굴로 서 있었다. 민설아는 본능적으로 시선을 피하며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며칠 뒤에 대회가 있어서 나가봐야 해.” 대충 둘러댄 핑계였지만 그녀 자신도 이런 거짓말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윤지훈의 무심한 표정을 보자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민설아는 3년간의 길고 힘든 사랑도 이제 깔끔하게 끝내고 싶었다. 그녀는 버림받아 초라한 모습으로 남는 패배자가 되기 싫었다. 물론 서예슬이 귀국했기에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었지만 그 사실만큼은 윤지훈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그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니 이별의 인사를 하든 말든 그는 아무렇지도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윤지훈은 그녀의 속내를 전혀 모른 채 택시를 잡았다. 두 사람이 차에 오르려는 순간 서예슬이 건물에서 뛰어나왔다. “지훈아, 핸드폰 두고 갔어!” 그녀는 윤지훈에게 핸드폰을 건네며 민설아에게 밝게 웃어 보였다. “설아 씨, 우리 연락처 교환할래요?” 민설아는 순간 당황했다. 윤지훈을 쳐다봤지만 그는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결국 그녀는 자기 아이디를 보여줬다. 서예슬은 핸드폰으로 친구 신청을 한 뒤 민설아를 흘끗 보았다. 하지만 무언가 말하려는 듯했으나 결국 입술을 다물고 대신 웃으며 말했다. “안녕히 가세요.” 택시에 오른 뒤, 밤바람이 불어오며 윤지훈의 취기가 조금 가셨는지 그는 낮은 목소리로 설명을 시작했다. “설아야, 예슬이랑 나는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랐어. 고등학교 때부터 대화창 고정을 해뒀는데 바꾸는 걸 잊었었나 봐.” 그의 말은 변명처럼 들렸지만 표정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민설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긴 침묵 끝에 윤지훈은 그녀를 슬쩍 돌아봤다. 그러나 마주한 것은 그녀의 얼굴을 타고 흐르는 눈물 자국이었다. 3년간의 연애 동안 민설아가 우는 모습을 처음 본 윤지훈은 순간 당황했다. “너... 왜 울어?” 민설아는 손으로 눈물을 닦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바람이 불어서 눈에 먼지가 들어갔나 봐.” 그녀는 힘겹게 웃으며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머릿속은 아까 서예슬이 보였던 놀란 표정으로 가득했다. ‘서예슬은 내가 몰래 자기의SNS를 봤다는 걸 눈치챘어. 그 순간부터 난 완전히 진거네.’ 민설아는 속으로 조용히 인정했다. 이 삼각관계에서 자신은 늘 그림자 같은 존재였다. 밝은 곳에서는 드러날 수 없는 사람, 뭔가를 구걸하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윤지훈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더라면... 그렇게 좋아하지 않았다면... 내가 이런 초라한 모습으로 끝나진 않았겠지.’ 그러나 그런 가정은 의미가 없었다. 이 길은 그녀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고 이제 그 끝에 다다랐을 뿐이었다. 집에 도착한 민설아는 들어오자마자 식탁 위의 달력을 한 장 뜯었다. ‘21’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드러나자 윤지훈은 그 숫자가 왠지 모르게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그녀를 바라봤지만 민설아는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방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샤워를 마친 윤지훈은 머리를 빗고 있는 민설아에게 다가갔다. 그는 갑자기 그녀를 잡아당겨 키스를 시도했다. 윤지훈은 평소 이런 친밀한 행동을 즐기지 않았다. 항상 민설아가 먼저 다가가야 겨우 입술을 살짝 맞추는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은 처음으로 그가 먼저 다가왔다. 민설아는 순간 놀라며 그를 밀어냈다. “너 오늘 술 많이 마셨잖아. 얼른 자.” 그녀가 등을 돌려 걸어가려 하자, 윤지훈은 갑작스럽게 그녀를 끌어안았다. 그의 품에서 느껴지는 심장의 빠른 고동이 점점 안정되기 시작했다. 이번만큼은 민설아가 그를 밀어내지 않았다. 제6화 눈을 뜨자 윤지훈이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가 여기 있을 줄 몰랐던 민설아는 잠시 당황했지만 윤지훈은 그녀가 깨어난 걸 보자마자 책을 내려놓으며 일어섰다. “전에 저녁노을 보러 가자고 했었지? 요즘 날씨가 안 좋아서 오늘은 유니버설 스튜디오에 먼저 가자. 날씨가 좋아지면 치월산에 데려갈게.” 뜻밖의 제안이었다. 민설아는 윤지훈을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3년간의 연애 동안 늘 그녀가 윤지훈을 끌어내 데이트를 계획했었다. 그가 먼저 데이트를 제안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설마, 무언가 눈치챈 걸까? 하지만 이미 마음을 내려놓은 그녀에게 그의 제안은 설레지도 기쁘지도 않았다. 두 사람은 오후까지 놀이공원을 돌아다니며 놀이기구를 몇 번 탔다. 그러나 민설아는 여전히 담담했다. 그런 그녀를 본 윤지훈이 참지 못하고 물었다. “재미없어?” 민설아는 옅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 재밌어.” 그때 사진사가 다가와 두 사람에게 물었다. “두 분 사진 찍으실래요?” 윤지훈은 잠시 망설였다. 3년 동안 함께 있으면서 한 번도 같이 사진을 찍어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가 대답하려는 순간 핸드폰이 울렸다. 윤지훈은 민설아에게 기다리라는 손짓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통화를 마친 그의 표정이 어딘가 달라졌다. 그는 갑자기 고개를 돌려 뒤를 바라봤고 민설아도 자연스럽게 따라 돌아섰다. 토끼 머리띠를 쓴 서예슬이 그들의 시야에 들어왔다. 서예슬을 본 윤지훈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예슬아, 네가 여기 웬일이야?” 그의 얼굴 가득한 밝은 미소를 보며 민설아는 고개를 숙였다. 나는 카메라맨을 향해 완곡하게 거절하고 천천히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떠나기 전에 함께 찍는 마지막 사진도 결국 물거품이구나.’ “오늘 선배랑 같이 왔어. 근데 선배가 일이 생겨서 먼저 갔거든. 혼자 심심해서 걷다가 너랑 닮은 뒷모습이 보여서 혹시나 했는데 진짜 너였네! 진짜 우연이네. 지훈아!” 서예슬의 웃음은 밝고 경쾌했다. 그러나 윤지훈의 표정은 금세 차갑게 변했다. “선배? 무슨 선배? 이름이 뭐야? 나도 아는 사람이야? 너랑 무슨 사이인데 귀국하자마자 너랑 놀러 나와?” 그의 다급한 질문에 민설아는 걸음을 멈췄다. 손은 무의식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네가 아는 사람이야.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임요한 선배 있잖아. 2년 전에 유학 갔었어. 내가 교수님 소개해 줬던 일이 있어서 고맙다고 잠깐 보자고 한 것뿐이야.” 서예슬은 담담히 설명했지만 윤지훈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앞으로는 어디 갈 때 나랑 가. 이상한 사람이랑 다니지 마. 네가 안전하지 않을까 봐 걱정되잖아.” 윤지훈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민설아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3년 동안 윤지훈은 한 번도 그녀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었다. 그녀가 다른 남자와 밤늦게까지 있어도 그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것이다. 윤지훈은 서예슬이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린다며 세 사람이 함께 다니자고 제안했다. 서예슬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고 민설아도 고개를 끄덕이며 따라갔다. 그들은 커플 테마로 꾸며진 귀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어두컴컴한 방은 미로처럼 얽혀 있었고 곳곳에서 괴상한 소리와 함께 괴물이 튀어나왔다. 서예슬은 문에 들어서자마자 비명을 질렀다. 벽에 몸을 붙이고 떨며 걸어가는 그녀 옆에는 윤지훈이 바짝 붙어 그녀를 보호하듯 따라다녔다. 멀찍이 그들을 바라보던 민설아는 조용히 한쪽 문을 열고 홀로 들어갔다. 문 안에는 커플 미션이 적힌 종이가 놓여 있었다. [남녀가 키스를 해야 열쇠를 받을 수 있습니다.] 미션을 본 서예슬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손을 잡고 다니는 커플들뿐이었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옆에 있던 남자에게 도움을 청하려 했다. “저기, 저랑 이 미션 좀...”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지훈이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녀의 입술에 가볍게 닿았다. 서예슬은 놀란 눈으로 윤지훈을 쳐다봤다. 윤지훈은 열쇠를 건네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서우면 먼저 나가.” 그제야 민설아와 눈이 마주친 윤지훈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변명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예슬이가 겁이 많아서... 그냥 내가...” 그러나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서예슬이 비명을 지르며 뛰쳐나왔다. 그 뒤로 귀신 분장을 한 NPC들이 줄지어 따라 나왔다. 윤지훈은 서예슬을 감싸 안고 출구로 향했다. 좁은 통로는 순식간에 엉망이 되었고 민설아는 사람들 사이에 갇혀 움직일 수 없었다.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는 속으로 조용히 말했다. ‘결국 버려지는 건 항상 나구나. 그렇지?’ 제7화 귀신의 집에서 나왔지만 서예슬은 여전히 가슴을 쓸어내리며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고 있었다. 아까 그 미션을 떠올리자 얼굴이 금세 빨갛게 물들었고, 그녀는 윤지훈을 향해 귀엽게 째려보며 말했다. “지훈아, 아까 너 너무 당돌했어. 아무리 내가 걱정된다고 해도 네 여자 친구가 보는 앞에서 그러는 건 좀 아니지 않아? 그녀가 오해하면 어쩌려고.” 윤지훈은 민설아가 아까 그 장면을 봤는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 알 수 없어 잠시 고민하는 듯했다. 결국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닫힌 문을 바라보는 사이 서예슬은 계속해서 혼잣말을 이어갔다. “근데 저런 미션을 혼자 어떻게 해? 설마 설아도 아무나 붙잡고 그냥 했을까?” 윤지훈은 고개를 저으며 단호히 말했다. “그럴 리 없어.” 그의 확신에 찬 목소리에 서예슬은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그렇게 잘라 말할 정도로 확실해?” 윤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설아는 나를 정말 좋아하거든. 설아는 나 말고 다른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거야.” 마침 문을 열고 나온 민설아는 그의 말을 듣고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다 알고 있었구나. 내가 얼마나 자신을 좋아하는지 그래서 나를 이렇게 함부로 대할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겠네.’ 그녀는 식은땀에 젖은 머리칼을 정리하며 문을 밀고 나왔다. 서예슬은 그녀를 보자마자 달려와 손을 잡으며 물었다. “설아 씨, 어떻게 나왔어요?” 민설아는 살짝 몸을 옆으로 돌리며 거리를 두고 담담히 대답했다. “간단해요. 게임을 포기하면 NPC가 문을 열어줘요.” 그녀의 가벼운 대답에 서예슬은 눈을 크게 뜨고 윤지훈을 돌아보며 말했다. “포기할 수도 있었어? 그럼 우리는 아까 왜 그렇게 고생을 한 거야...” 서예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윤지훈이 말을 끊었다. “예슬아, 내가 너무 걱정돼서 그랬어. 미안.” 서예슬은 여전히 얼굴이 붉은 채로 민설아를 바라보며 살짝 미소를 띠고 말했다. “난 괜찮아. 설아 씨만 괜찮다면 됐어.” “사실 저랑 지훈이는 어릴 때 소꿉놀이하면서 장난으로 뽀뽀도 여러 번 했어요. 그런 건 진지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요.” 둘이 주고받는 대화를 들으며 민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조용히 출구를 향해 걸었다. 오늘 하루의 모든 일이 더는 그녀에게 아무 의미도 없는 것 같았다. 귀신의 집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서예슬은 먼저 헤어지자고 인사한 뒤 혼자 차를 타고 돌아갔다. 그녀가 떠나는 모습을 본 윤지훈은 이제야 민설아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늘 고생했으니까 저녁 먹으러 갈까? 서양 요리 어때?” 그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민설아는 그가 아까의 일에 대해 약간의 죄책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걸로 자신을 위로하려 한다는 걸 알았지만 이제는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척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두 사람은 근처의 프랑스 레스토랑으로 갔다. 윤지훈은 특별히 2층의 프라이빗 룸을 예약했다. 창가에 앉아 도시의 아름다운 야경과 앞에 놓인 로맨틱한 촛불 저녁을 마주했지만 민설아의 표정은 여전히 담담했다. 그녀는 식탁 위 꽃병에 꽂힌 노란 장미를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윤지훈은 대화를 꺼낼 생각으로 말을 준비하던 중 핸드폰에 메시지가 도착했다. 그는 메시지를 확인하더니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어. 설아야, 혼자 먹어도 괜찮지?” 민설아는 그를 슬쩍 바라보더니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윤지훈은 외투를 집어 들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잠시 후, 서비스 직원이 방으로 들어와 주문한 음식을 내왔다. 직원은 혼자 있는 그녀를 의아해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민설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차분히 나이프와 포크를 집어 들고 혼자 저녁을 즐겼다. 저녁을 마친 뒤, 민설아는 핸드폰을 꺼내 택시를 부르며 심심풀이로 SNS를 열었다. 핸드폰 화면에는 서예슬이 방금 올린 최신 게시물이 나타났다. 사진 속 병원에서 서예슬의 다리는 여러 겹의 붕대로 감싸여 있었고 그 사이로 피가 배어 나온 흔적이 보였다. 그녀는 스토리를 올렸다. [아이고, 재수도 없지. 놀러 나왔다가 연쇄 추돌 사고에 휘말려서 병원 신세라니. 귀국하자마자 이게 웬 날벼락인지.] 제8화 집에 도착한 민설아는 윤지훈의 후배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선배, 지훈 형이 갑자기 며칠째 학교에 안 나오네요. 제가 메시지도 보냈는데 답이 없어요. 무슨 일 있나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민설아는 윤지훈이 왜 학교에 나오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하지만 후배에게는 그저 대충 둘러댔다. “집에 일이 좀 생겼대.”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그녀는 식탁으로 가 달력의 한 장을 뜯어냈다. 숫자 ‘21’은 ‘20’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곧 숫자는 ‘1’로 시작되는 날들로 접어들 것이다. 출국이 다가오고 있다는 생각에 민설아는 한숨을 깊이 내쉬며 지친 몸을 이끌고 욕실로 들어갔다. 하루 종일 돌아다녔던 탓인지 그날 밤은 유독 깊이 잠들었고 그녀는 다음 날 정오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집 안은 고요했고 모든 물건은 어제와 똑같이 제자리에 있었다. 윤지훈은 또다시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익숙한 일이었다. 민설아는 조용히 주방으로 가 우유를 한 잔 따라 마시며 혼자만의 하루를 시작했다. 시간은 흘러 달력의 숫자는 ‘20’에서 어느덧 ‘15’로 바뀌었다. 윤지훈은 여전히 아무 소식도 없었다. 마치 그녀의 세계에서 사라진 사람 같았다. 민설아는 떠날 준비로 짐을 꾸리고 필요한 서류를 정리하며 시간을 보냈다. 문득 생각이 멈추는 순간에만 윤지훈이 떠오르곤 했다. 아마도 그는 서예슬을 돌보느라 그녀를 잊었을 것이다. 주말이 지나 월요일, 윤지훈의 후배에게 또 메시지가 왔다. “지훈 형이 아직도 학교에 안 나왔어요. 무슨 일 있는 거 맞죠?” 민설아는 이번엔 직접 윤지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훈아, 어디야?”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윤지훈의 목소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여느 때처럼 뻔한 대답을 했다. “요즘 좀 바빠서. 아직 학교에 못 가고 있어.” 그의 모호한 답변에 민설아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었다. “혹시... 예슬 씨한테 무슨 일 생겼어?” 더는 숨길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윤지훈은 마침내 사실을 털어놨다. “예슬이가 며칠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어.” 민설아는 서예슬이 올렸던 SNS 게시글이 떠올랐다. “많이 다쳤어?” “아니, 심각하진 않아. 뼈에는 이상이 없는데... 예슬이가 주사도 못 맞고 약도 잘 못 먹잖아. 병원에 있으면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잠도 못 자. 내가 데려다주지 않아서 사고가 난 거라 내가 미안해서 계속 병원에 있어. 네가 신경 쓰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의 목소리에는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감정이 묻어 있었다. 민설아는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윤지훈은 그녀가 화난 줄 알고 서둘러 사과했다. “미안해, 설아야. 걱정 많이 했지? 예슬이 상태가 좋아지면 바로 돌아갈게.” 그의 말은 민설아의 마음을 전혀 흔들지 못했다. 그녀는 그저 휴가를 꼭 신청하라고 당부한 뒤 전화를 끊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갔다. 달력의 숫자는 ‘15’에서 ‘10’... 그리고 점점 한 자리로 줄어들었다. 출국까지 3일 남은 어느 날, 민설아는 유학 서류를 제출하러 학교를 찾았다. 그녀는 그곳에서 친구들과 마지막으로 식사하며 작별 인사를 나눴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출국 소식에 친구들은 놀라고 아쉬워했다. “설아야, 진짜 떠나는 거야? 몇 년 동안 못 보겠네. 너희 부모님도 해외에 계시잖아. 다시 안 돌아오는 거 아니야?” “이별이 늘 그렇지만 너도 알잖아. 우린 계속 널 생각할 거야. 꼭 잘 지내고 연락 끊지 마!” 친구들의 진심 어린 말에 민설아는 마음 깊이 감동했다. 그녀는 그 감정을 담아 술잔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같은 과 동기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근데 설아, 곧 떠난다면서. 윤지훈은 왜 안 왔어? 같이 안 왔어? 아직 얘기 안 한 거야?” 민설아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옅게 미소 지었다. “요즘 많이 바빠서 시간이 안 돼.” 그녀의 말에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화를 이어갔다. “멀리 떨어져 있어도 사랑만 있으면 괜찮아. 서로 잊지 않으면 아무 문제 없을 거야.” 민설아는 조용히 웃으며 술잔을 들었지만 그 미소는 속마음을 숨기기 위한 것이었다. 사람들은 사랑이란 거리를 넘어 지속될 수 있는 감정이라고들 말한다. 하지만 윤지훈은 그녀를 사랑하지 않았다. 제9화 파티는 새벽 3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집에 돌아온 민설아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시침은 이미 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녀는 달력에서 또 한 장을 뜯어냈다. 출국 2일 전. 민설아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그녀는 집 안 곳곳을 깨끗이 청소한 뒤 그동안 정리했던 물건들을 한꺼번에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연애 기간 썼던 일기와 몰래 찍어두었던 사진들을 서재로 가져가 한 장 한 장 파쇄기에 넣었다. 그렇게 잘게 부순 조각들은 음식물 쓰레기와 함께 처리했다. 이제 이 집에는 그녀의 흔적이 완전히 사라졌다. 출국 하루 전. 민설아는 오랜만에 푹 자고 일어났다. 길고 깊은 잠에서 깨어난 그녀는 커튼을 열었다. 맑고 화창한 하늘은 아주 눈부셨다. ‘떠나기에 딱 좋은 날이네.’ 그녀는 부엌으로 가 마지막 남은 음식을 전자레인지에 넣고 데우며 달력의 마지막 한 장을 뜯어냈다. 그러자 ‘0’이라는 숫자가 선명하게 드러났다. 전자레인지가 띵 소리를 내며 울릴 때쯤 현관문에서 열쇠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반달 넘게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윤지훈이 마침내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지훈은 들어오자마자 집 안의 변화를 눈치챘다. 텅 빈 공간들과 깨끗이 치워진 달력이 눈에 거슬렸는지 묻듯 물었다. “왜 이렇게 물건이 많이 없어졌어?” 민설아는 차분히 대답했다. “쓸데없는 건 다 버렸어. 네가 필요하면 새로 사면 돼.” 윤지훈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방금 사 온 채소를 들고 부엌으로 들어갔다. 식탁에 놓인 간소한 음식을 보고는 그녀의 접시를 집어 들며 말했다. “오늘 네 생일인데 이렇게 대충 먹으면 어떡해? 내가 밥 해줄게.” 그가 생일을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에 민설아는 잠시 놀랐다. 소파에 앉은 그녀는 부엌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으며 벽에 걸린 시계의 초침이 흐르는 것을 지켜봤다. 몇 가지 요리가 차려질 때쯤 윤지훈의 핸드폰이 울렸다. 그는 접시를 내려놓고 전화를 받았다. “지훈아? 지금 어디야? 예슬이가 또 약을 안 먹겠다고 해서 네가 좀 와서 설득해야겠어. 병원으로 빨리 와줘.”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목소리는 서예슬의 엄마인 듯했다. 윤지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민설아의 표정을 살폈다. 민설아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봐. 바쁘잖아.” 그녀의 말을 듣고 윤지훈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도 미안한 마음이 남은 것 같았다. “며칠 뒤에 꼭 다시 생일 챙겨줄게.” 민설아는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그럴 필요 없어.” 그녀의 미소에 윤지훈은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뭔가 묻고 싶어 했지만 초인종 소리가 그의 말을 끊었다. 그는 급히 문을 열어 주문해 둔 망고 케이크를 받아왔다. 민설아는 케이크를 받아 들며 최대한 그의 시간을 뺏지 않으려 했다. 윤지훈은 케이크 상자를 열고 말했다. “네가 소원 빌 때까지만 기다릴게.” 민설아는 촛불을 붙이고 두 손을 모았다. 그리고 마음속으로 소원을 빌었다. “지훈이가 원하는 모든 일이 이루어지고 사랑하는 사람과 영원히 함께하길.” 그녀의 말을 들은 윤지훈은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게 무슨 소원이야? 우리 이미 함께하고 있잖아.” 그의 말에 민설아는 그저 옅게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시간에 대해 상기시켰다. 윤지훈은 시간을 확인하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흔들었다. “잘 있어. 금방 올게.” 문이 닫히려던 순간, 민설아는 무의식적으로 그를 불렀다. “지훈아, 사실은...” 그가 돌아보며 물었다. “뭐라고?” 그의 얼굴을 본 순간, 민설아는 다시 침묵했다. “아니야. 잘 가. 조심히 가.” 윤지훈은 고개를 끄덕이며 문을 닫고 떠났다. 그의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그녀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지훈아, 사실 나 망고 알레르기 있어. 그리고... 오늘이 우리가 함께하는 마지막 날이야.” 그녀의 말은 공기 중에 흩어져 사라졌다. 시계가 자정을 가리킬 때, 민설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식탁의 음식을 치웠다. 케이크도 말없이 쓰레기통에 버렸다. 그녀는 준비해 둔 캐리어를 들고 달력의 마지막 페이지에 글을 남겼다. “지훈아, 우리 헤어지자.” 민설아는 드디어 마음을 굳혔다. 그리고 문을 열고 나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을 나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그 집을... 제10화 병원을 나선 윤지훈은 시간이 아직 이른 것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가 민설아를 데리고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마음먹었다. 그동안 그녀를 너무 외면했다는 생각에 작은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그러나 집에 도착해 보니 평소 불이 켜져 있던 방은 캄캄했다. 시계를 보니 밤 9시 30분이었다. ‘이 시간에 벌써 자는 건가? 아니면 밖에 나가서 아직 안 돌아온 건가?’ 윤지훈은 뭔가 찜찜했지만 집 안은 조용했고 그녀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하루 종일 밖을 돌아다녀 땀이 범벅이 된 그는 일단 욕실로 들어갔다. 반 시간 후, 머리를 수건으로 털며 나온 그는 여전히 민설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늦게까지 밖에 있는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가 기억하기론 항상 제시간에 집에 돌아오는 그녀였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그는 그녀의 방 앞으로 다가갔다. 문이 살짝 열려 있었고 그는 조심스레 문을 밀어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벽에 걸려 있던 사진과 그림들이 모두 사라졌고 깔끔하게 정리된 침대는 텅 비어 있었다. 믿기지 않는 마음에 그는 눈을 비비며 몇 번이고 확인했지만 방은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수건을 내던지고 방 안으로 뛰어든 윤지훈은 사방을 둘러보았다. 그는 서랍과 옷장을 열어봤지만 그녀의 물건은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설마... 짐을 싸고 떠난 건가?” 그 생각이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그는 급히 다른 방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서재의 책장도 반쯤 비어 있었고 욕실에는 그의 물건만 남아 있었다. 거실에 있던 담요와 그녀가 좋아하던 인형도 사라졌고 주방의 컵마저 보이지 않았다. 하나씩 비어 있는 공간을 확인할수록 윤지훈의 마음은 깊은 어둠 속으로 가라앉았다. 마침내 그는 이 집 어디에도 민설아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 순간 그의 머릿속은 공허한 소음으로 가득 찼다. 그는 믿기지 않는 표정을 지었고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책상 모서리를 꽉 잡은 그의 손등에는 힘줄이 불끈 튀어나와 있었다. 불안한 눈빛으로 집 안을 두리번거리던 그의 시선이 식탁 위 달력에 멈췄다. 달력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0’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다. 그보다 더 눈에 띄는 것은 그 아래 굵은 검은색 마커로 적힌 문장이었다. “지훈아, 우리 헤어지자.” 윤지훈은 손을 떨며 달력을 잡아 들었다. 헤어지자는 말은 그의 눈을 무겁게 짓눌렀고 눈동자는 금세 붉게 물들었다. “설아가... 나랑 헤어지자고?” 이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치자마자 그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그는 황급히 핸드폰을 꺼내 그녀의 번호를 눌렀다. 그러나 들려오는 건 긴 신호음 뒤에 들리는 전원이 꺼져 있다는 차가운 음성 메시지였다. 그녀와 연결되지 않는 전화는 찬물을 끼얹은 듯 그의 온몸을 얼렸다. 그는 허둥지둥 외투를 걸치고 슬리퍼를 신은 채로 집을 뛰쳐나갔다.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학교로 향했다. 기숙사에 도착한 그는 문이 닫히기 전에 겨우 도착해 한 여학생을 붙잡고 부탁했다. “508호에 가서 민설아 좀 내려오라고 전해주세요.” 10분 뒤, 기숙사 문이 열리자 윤지훈의 심장은 한껏 긴장했다. 그러나 나온 사람은 민설아가 아니었다. 그녀의 룸메이트인 신채연이었다. 평소 깔끔하고 냉정하던 윤지훈이 흐트러진 모습으로 서 있는 것을 본 신채연은 깜짝 놀랐다. “지훈아? 여긴 왜 왔어?” “설아는 어디 있어? 당장 내려오라고 전해줘!” 서로 동시에 말이 겹쳤다. 신채연은 그의 말을 듣고 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설아? 오늘 출국하는 거 몰랐어? 내가 알기로는 오늘 비행기 탔을 텐데.” “출국...” 그 말이 들리자 윤지훈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교문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는 공항으로 가는 길에 그녀에게 다시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 이번에는 전화가 연결되었고 그는 겨우 진정되는 듯했지만 곧 다시 화가 치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