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처럼 스러지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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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처럼 스러지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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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겸과 함께한 지 5년째 되던 해, 그는 강채이와의 결혼식을 미뤘다. 어느 날, 한 클럽에서 채이는 유겸이 다른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모...

Chương (1)

第1章

신유겸과 함께한 지 5년째 되던 해, 그는 강채이와의 결혼식을 미뤘다. 어느 날, 한 클럽에서 채이는 유겸이 다른 여자에게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했다. 누군가가 유겸에게 물었다. “채이랑 5년이나 사귀고 갑자기 루나랑 결혼한다니, 채이가 열 받지 않을까?” 유겸은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루나가 아파. 그게 루나의 마지막 소원이야. 채이는 나를 너무 사랑하니까 절대 날 떠나지 않을 거야.” 모두가 알았다. 강채이가 신유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녀에게 신유겸은 전부였다는 걸. 하지만 이번엔 유겸이 틀렸다. 결혼식 날, 유겸은 친구들에게 말했다. “채이를 잘 주시해. 내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 걸 절대 모르게 해.” 친구가 놀라며 대답했다. “너 몰랐어? 채이도 오늘 결혼해.” 그 순간, 유겸은 무너졌다. 제1화 “아빠, 전에 저에게 정혼자가 있다고 하셨죠? 그 사람한테 연락해서 다음 달 초하루에 결혼할 건데 신랑 자리가 비었으니 오고 싶으면 오라고 전해주세요.” 딸의 갑작스러운 연락에 전화기 너머로 아버지 강정빈이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딸아, 지금 유겸이랑 결혼 준비하느라 정신없다며? 혹시 걔가 너한테 뭐 잘못했니?] “아빠, 그냥 물어봐 주세요!” [알겠어. 우리 딸만 좋다면 아빤 그걸로 됐다. 아빤 우리 딸만 행복하면 그걸로 됐다.] 채이는 눈가가 붉어진 채로 대답했다. “그럴게요!” ... 강채이는 진심으로 신유겸을 사랑했다. 너무도 깊이, 뜨겁게... 그리고 신유겸이 자신의 운명이라 믿었다. 결혼 날짜까지 잡고 난 후, 채이는 행복한 신부가 될 날만 기다렸다. 그런데 조금 전, 그녀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되었다. 1시간 전. 채이는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드레스 덕분에 그녀의 우아한 몸매가 더욱 돋보였다. “채이 씨, 신랑분이 특별히 주문 제작한 드레스라니 정말 아름다워요. 신랑 신부 두 분 꼭 행복하실 거예요.” 직원의 칭찬을 들었지만, 채이는 도무지 웃을 수 없었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둘러보다 창가 구석에서 자신의 예비 신랑, 신유겸을 발견했다. 유겸은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었고, 얼굴에는 다정한 미소가 가득했다. 그 순간, 직원이 채이의 시야를 가로막으며 핸드폰을 건넸다. “채이 씨, 전화 왔어요.” 웨딩 플래너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채이 씨... 신랑 측에서 실수로 신부 이름을 잘못 기재했다고 연락이 왔는데요. 신부 이름을 ‘서루나’로 바꿔야 한다고 하시네요. 혹시 알고 계셨나요?] 말로 다할 수 없는 슬픔이 채이의 마음을 순식간에 덮쳤다. 채이의 눈에서 눈물이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았다. 유겸의 배신을 이미 눈치챘던 채이였지만, 남자의 뻔뻔함은 예상 밖이었다. 한 달 전. 해외에 있던 신유겸의 첫사랑 서루나가 귀국했을 때부터 강채이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그리고 어제, 채이는 유겸에게 줄 넥타이를 챙겨 그를 따라 모임 장소까지 갔다가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했다. 채이는 유겸이 루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청혼하는 모습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유겸의 친구 중 하나가 물었다. “유겸아, 너 곧 채이랑 결혼한다며? 그런데 루나랑 이렇게 공개적으로 지내면 채이는 어쩌라고?” 유겸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루나가 많이 아파잖아. 이건 루나의 마지막 소원이야. 채이는 아무것도 모를 거야. 설령 알게 된다고 해도, 채이는 나를 너무 사랑해서 아마 날 이해해 줄 거야. 날 떠날 리 없지.” 루나는 유겸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유겸아.미안해.널 곤란하게 만들었네. 하지만 내가 오래 살지 못하니까... 이게 마지막 소원이고. 착한 채이 씨라면 이해해 줄 것 같아.” 유겸과 루나의 친구들이 환호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뜨겁게 키스했다. 문 밖에 서 있던 채이는 그 길로 도망쳤다. [여보세요, 채이 씨, 아직 통화 중이신가요? 신부 이름 정말 변경하실까요?] 한때 채이는 유겸을 목숨처럼 사랑했다. 그가 없으면 살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과거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네, 바꿔주세요. 그리고 옆 홀도 제가 예약할게요. 금액은 바로 보내드리겠습니다. 준비는 똑같이 해주시면 됩니다.” [아, 그리고 새로운 신랑 이름도 바꿔주세요. 이름은 잠시 후에 보내드릴게요.] 상대방은 잠시 말을 멈추더니 물었다. [그러면 날짜는 그대로 진행하는 건가요?] “네, 그대로요.”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 채이는 전화를 끊었다. 바로 그때 유겸이 다가와 그녀의 허리를 뒤에서 감쌌다. “자기야, 오늘 정말 예쁘네.” “그래?” 채이는 거울 속의 자신을 바라봤다. ‘그래. 분명 예쁘지. 하지만 왜 내가 이렇게 사랑했던 이 남자는 나를 속이고 다른 여자를 선택하려는 거지?’ “예뻐. 우리 자기가 세상에서 가장 예뻐.” 유겸은 그렇게 말하며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사실... 자기야, 내가 네게 부탁하고 싶은 게 하나 있어. 다음 달 1일은 내가 중요한 일이 있어서 말이야. 우리 결혼식을 조금만 미룰 수 있을까?” “중요한 일?” 채이는 속으로 비웃었다. ‘그 중요한 일이란... 다른 여자와 결혼하니까.’ ‘게다가 내 손으로 고른 예식장에서, 내가 예약한 날짜에...’ “그래, 미루자.” 뜻밖의 대답에 유겸은 순간 당황한 듯 보이며,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갑자기 엄습했다. “자기야, 내가 자기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나는 반드시 자기랑 결혼할 거야. 조금만 기다려줘. 내가 평생 자기를 사랑하겠다고 맹세할게.” “근데... 지금 회사에 일이 있어서 먼저 가야 할 것 같아. 집에 잘 있어.” 유겸은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채이는 유겸이가 남긴 사랑의 맹세가 우스워 견딜 수 없었다. ‘신유겸,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알겠지. 그래서 아무리 네가 다른 여자를 선택해도 내가 끝까지 네 옆에 있을 거라고 믿고 있었지.’ ‘하지만 난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이번엔 내가 떠날 거야. 그리고 네가 결혼하는 바로 그날, 같은 시간, 그리고 바로 옆에서 결혼도 할 거고...’ 제2화 집에 돌아온 채이는 곧바로 자신의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고, 짐을 절반쯤 정리했을 때, 유겸이 집으로 돌아왔다. “자기야, 회사 일이 끝나자마자 바로 왔어. 나 보고 싶었어?” 그는 붉은 장미꽃 한 다발을 내밀며 말했다. “이거 내가 자기 주려고 일부러 샀어. 아까 웨딩숍에서 끝까지 함께 있어 주지 못해서 미안해. 우리 공주님, 이걸로 용서해줄래?” 물을 제대로 주지 않아 시들기 시작한 장미를 보며 채이는 너무 화가 나서 도리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건 분명 서루나한테 프러포즈할 때 썼던 걸 그대로 가져온 거잖아.’ ‘이 사람의 마음속에서 나는 그저 쓰고 버리는 소품 같은 존재야?’ “뭘 웃어?” 채이가 웃자 유겸은 어딘가 불안한 표정을 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녀는 꽃다발을 받아들며 눈가에 비친 남자의 셔츠 카라를 힐끗 보았는데, 거기에 선명한 립스틱 자국이 있었다. ‘선명한 빨간색 립스틱 자국... 너무도 뻔뻔하네.’ 채이는 손을 들어 유겸의 셔츠 카라를 가리켰다. “옷 더러워졌네.” 유겸은 고개를 숙여 보더니, 루나가 입을 맞출 때 묻은 자국을 발견하고 순간적으로 긴장했다. “아... 아마 어딘가에서 실수로 묻었나 봐.” “그래.” 채이는 굳이 드러내지 않고 대답했다. “벗어, 내가 빨아줄게.” “집에 가사도우미 있잖아. 내가 어떻게 자기한테 이런 걸 시켜?” “가사도우미 손이 너무 거칠어. 내가 직접 할게.” 유겸은 또 한 번 위기를 모면했다고 생각하며 그녀의 볼에 입을 맞췄다. “우리 자기 정말 최고야.” 채이는 그의 셔츠를 받아 들고, 립스틱 자국을 보며 피식 웃었다. ‘최고라... 그래, 네가 가장 속이기 쉬운 상대가 나라는 뜻이겠지.’ 채이가 셔츠를 세탁할 때 얼룩을 지우는 데에 너무 힘을 줬던지 유겸의 셔츠는 결국 찢어졌다. 하지만 유겸은 개의치 않았고, 오히려 채이를 안으며 다정히 말했다. “괜찮아. 찢어진 건 버리면 되지. 새로 하나 사면 되잖아.” 그는 다른 옷으로 갈아입었지만, 남자의 몸에 배어 있는 익숙한 여자 향수 냄새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채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근데... 어떤 것들은 오래된 게 더 좋은 거 아니야?” “그건 맞는 말이네.” 유겸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이 셔츠 진짜 잘 입었는데, 자기가 망가뜨리지 않았으면 몇 번은 더 입었을 거야. 자기도 알잖아, 나 한 가지에 오래 정붙이는 스타일이란 거.” ‘정붙이는 스타일이라... 5년 전 좋아했던 여자를, 5년이 지나 다시 돌아온 그 여자를 여전히 좋아하고 있잖아.’ ‘그럼 나는 뭐였는데? 너와 함께했던 지난 5년은 대체 뭐였던 거지?’ ... 어릴 때부터 채이는 항상 주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 속에서 자라왔다. 대학을 졸업한 후, 채이는 유겸의 회사에 취업을 지원했다. 유겸을 처음 본 순간부터 채이의 마음은 속절없이 유겸에게 빠져들었지만, 자존심 강한 그녀는 절대로 먼저 다가가지 않았다.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유겸이 먼저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고, 이후 적극적으로 채이에게 호감을 표현하며 다가왔다. 처음에 채이는 일부러 도도하게 굴며 유겸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았다. 그러다 어느 날, 회사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화재 경보가 울려 퍼지자 모두들 겁에 질린 채 건물 밖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채이는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일 수 없었다. 그때 유겸이 뒤를 돌아보더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안아 들고 불길 속에서 뛰쳐나왔다. 그 순간, 채이는 마음속 깊이 결심했다. ‘난 이 사람과 영원히 함께할 거야.’ 5년... 정말 긴 5년이었다. 채이는 유겸과 처음 연인이 되었던 날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그날, 유겸은 하늘을 향해 맹세했다. “채이야, 내가 약속할게. 이생에서 난 너만 사랑할 거야.” 유겸의 진지한 얼굴을 보며 채이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신유겸 씨, 본인이 오늘 한 말 꼭 기억해. 만약 언젠가 날 배신한다면, 난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네가 평생 후회하게 할 거니까.” 그날의 맹세가 아직도 채이의 귀에 쟁쟁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유겸의 마음은 이미 변해 있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유겸의 마음은 채이를 향해 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콧등이 시큰거리던 채이는 남자의 셔츠를 쥔 채 눈물을 참으려 했지만 결국 눈가를 적시고 말았다. “왜 그래? 왜 울어?” 그녀의 눈물을 본 유겸은 당황해서 재빨리 휴지를 꺼내 들고 그녀의 눈물을 닦아주려 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채이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네가 먼저 날 저버린 거야, 신유겸.’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약속을 지키기로 결심했다. ‘내가 꼭 다른 남자와 결혼해서, 너를 후회하게 할 거니까 기대해.’ 제3화 간신히 눈물을 멈춘 채이를 본 유겸은 평소처럼 그녀의 입에 키스하려고 다가갔지만, 채이는 그를 밀어냈다. 유겸은 어색하게 헛기침하며 채이를 놓아주고는 손을 내밀며 물었다. “아 맞다, 내 선물은? 약속한 거 있잖아.” 채이는 잠깐 기다리라며 방으로 올라갔다. 방 안에서 유겸과 함께 골랐던 결혼식 청첩장을 꺼내더니, 펜을 들어 신랑과 신부 이름을 고쳐 썼다. [신부: 강채이, 신랑: 고성준.] 그렇게 수정된 청첩장을 상자에 넣고 다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채이는 상자를 유겸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유겸은 호기심에 상자를 열어보려 했지만, 채이가 손으로 막아섰다. “다음 달 1일에 열어봐.” 그 말을 듣는 순간, 유겸의 손이 잠시 떨렸다. ‘다음 달 1일...?’ 그건 바로 그가 서루나와 결혼식을 올릴 날이었다. “왜?” 유겸은 애써 태연하게 물었다. “우리 원래 그날 결혼하려고 했던 날이잖아. 좋은 날인데 그냥 넘어갈 수 없지.” 채이는 미소를 지으며 상자에 테이프를 붙였다. “결혼이 미뤄진 김에, 내가 너한테 특별한 선물을 준비했어. 그날 열어보면 깜짝 놀랄 거야.” “좋아! 나 깜짝선물 진짜 좋아하잖아.” 유겸은 채이의 코끝을 살짝 건드리며 웃더니, 그녀를 품에 꼭 안았다. “자기야, 나 오늘 정말 행복해.” ‘행복?’ 채이의 눈빛은 점점 어두워졌다. 마치 창가에 놓인 장미처럼, 채이는 조용히 시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유겸은 그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 ‘행복하다니... 대체 뭐가 그렇게 행복한 걸까?’ ‘이 사람이 행복한 이유는 분명하지... 다른 여자에게 프러포즈를 성공적으로 마치고도, 내가 아무것도 모를 거라고 생각하니까.’ ... 밤이 되자 유겸은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채이는 소파에 앉아 핸드폰을 보다가 우연히 유겸의 친구가 올린 SNS 게시물을 발견했다. 그 내용은 바로 유겸이 무릎을 꿇고 프러포즈를 하는 영상이었다. 영상과 함께 적힌 문구는 이랬다. [남부러울 것 없던 사랑이 드디어 열매를 맺는다. 오늘 밤, 늘 가던 곳에서 축하 파티합시다!] 채이는 순간 멍해져서, 영상을 눌러 보려던 찰나, 아래에 달린 댓글이 눈에 들어왔다. [야, 너 그걸 SNS에 올리면 어떡하냐? 채이 차단했지?] [내가 그렇게 멍청해 보이냐? 당연히 차단했지.] 댓글을 본 채이는 비웃음 섞인 미소를 지었다. ‘정말 가소롭네.’ 처음 유겸과 사귀었을 때, 그는 채이를 친구들에게 소개시켜 주었다. 특히 유겸과 친한 동생들은 채이를 보자마자 친하게 말을 건넸다. “형수님, 유겸 형님이 잘못하면 꼭 저희한테 말씀하세요! 저희가 혼내 드릴게요!” “맞아요, 형수님. 걱정하지 마세요. 저희가 유겸 형님 지켜볼 테니까 바람 같은 거 절대 못 피울 겁니다. 만약 다른 여자가 생기면 바로 알려드릴게요!” 하지만 지금은 어떤가? 모두 유겸과 한패가 되어, 그가 다른 여자와 결혼하려는 사실을 채이에게 숨기려 하고 있었다. 잠깐 사이, 유겸이 등장하는 그 SNS 게시물은 곧바로 삭제되었다. 그 타이밍에 맞춰 욕실에서 유겸이 나왔다. “자기야...” 그는 머리카락에 물기도 제대로 닦지 않은 채 급하게 나왔다. “왜 그래?” 채이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치 아무 일도 모르는 듯한 표정이었다. 채이가 아무런 반응도 없자, 유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내가 다 씻었다고 말해주려고.” “그래.” 채이는 무표정하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 밖으로 나가려던 그녀는 우연히 유겸이 친구에게 전화를 거는 소리를 들었다. “너 미쳤냐? 그걸 SNS에 올리면 어떡해? 빨리 삭제했지? 강채이가 보면 어쩌려고! 내가 말했잖아. 절대 채이한테 들키면 안 된다고. 너희 진짜 죽을래?” [이미 삭제했어요. 형수님은 분명 못 봤을 거예요. 근데 형은 오늘 파티에 안 오면 어떡해요? 루나 씨는 벌써 와 있다고요!] 제4화 유겸이 채이에게 어떤 핑계를 대고 나가나 고민하고 있을 때, 채이가 갑자기 방으로 들어왔다. “누구랑 통화 중이야?” “어...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진호랑 애들. 오늘 밤에 한잔하자고 해서.” “그래? 나도 진호랑 진짜 오랜만이다. 나도 같이 갈게. 나도 술 한잔하고 싶네.” 채이는 일부러 유겸과 친한 동생들의 만남에 동석하기로 했다. ‘내가 같이 가면, 얼마나 잘 숨기는지 한 번 봐야겠어.’ 유겸은 계속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끝내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그는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친한 동생들에게 서둘러 상황을 알리기 시작했다. 술집의 VIP 룸에 도착했을 때, 채이는 유겸과 친한 동생들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 사람들은 마치 대기라도 하고 있었던 듯 모두 정자세로 앉아 있었다. 다들 조용히 술잔만 기울이고 있었고, 심지어 분위기를 돋우는 노래도 부르지 않고 직원도 없었다. 채이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다들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말했다. “형수님, 안녕하세요! 오늘은 아무도 없어요. 그냥 우리 남자들끼리만 모이는 모임입니다.” 채이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며 말했다. “그럼, 내가 여자라서 오면 안 되는 자리라는 뜻이네?” 다들 잠시 멍해졌다. 그러자 유겸이 서둘러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아니야, 그런 뜻이 아니야. 그냥 너 지루할까 봐 그러는 거지.” 채이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농담이야. 오랜만에 봤으니, 나도 한 잔 마시고 갈게. 오늘은 남자들끼리 모이는 자리니까, 마시고 바로 나갈게.” 그녀는 테이블 위의 잔을 들고 가볍게 비워냈다. 그리고 이 자리에 있는 모두의 얼굴에 안도하는 미소가 스쳤지만, 채이는 애써 모르는 척하며 돌아섰다. 유겸은 아쉬운 척 채이를 끌어안으며 이마에 키스했다. “그래, 내가 빨리 들어갈게. 너 먼저 자고 있어. 늦을 거니까 기다리지 말고.” 채이는 방을 나와 복도의 모퉁이를 향해 내려갔다. 그녀는 조용히 그림자 속에 몸을 숨기고 잠시 상황을 지켜보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서루나가 하이힐을 신은 채 요란하게 걸어오더니 VIP 룸으로 들어갔다. 채이는 문 옆으로 와서 방 안을 몰래 훔쳐보고 있었다. 루나는 자연스럽게 유겸의 무릎에 앉았다. “진짜, 채이 씨를 왜 데리고 온 거야? 덕분에 나 숨느라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아? 오늘 보여준 그 가방, 나 그거 꼭 받아야겠어. 이건 보상으로 생각해.” 유겸은 루나의 허리를 감싸며 웃었다. “하나 더 사줄게.” 루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유겸의 허리를 끌어안고 입술에 가볍게 입 맞췄다. 그 모습을 본 한 유겸의 동생들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야야야, 진짜 우리 염장 지르려고 작정했어요? 형수님 덕분에 우리 다 솔로라는 게 팍팍 느껴지네요.” 유겸은 웃으며 말했다. “웃기지 마. 너희도 여자 많잖아. 전부 불러. 다 같이 놀자고!” 잠시 후, 자리에 있던 사람들은 룸 아가씨들을 불러들였다. 룸 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술을 따르는 사람들, 게임을 하는 사람들, 그리고 웃음소리가 가득했다. 채이는 그 장면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손끝에서부터 서늘한 냉기가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이게 네가 입버릇처럼 말하던 사랑이야, 신유겸? 정말 어처구니가 없네.’ ... 사람들은 시끌벅적하게 술잔을 기울이며 진실게임을 시작했다. 마침 첫 번째 벌칙 대상은 유겸이었다. 진호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형, 솔직히 말해봐요. 루나 형수님이랑 채이 형수님 중에서 누가 더 좋아요?” 그 질문을 들은 루나는 화를 내기는커녕 오히려 밝게 웃으며 유겸을 바라봤다. “진실게임이잖아. 진짜로 말해. 내가 환자라고 봐주지 말고.” 유겸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채이.” 루나의 표정이 순간 굳었지만, 애써 평정을 가장하며 말했다. “내가 여기 있는데도 그렇게 말할 수 있어?” 유겸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도 네가 좋았지. 하지만 그건 과거의 일이야. 네가 그때 그렇게 떠나지만 않았으면 상황은 달랐겠지.” “지금 네 소원을 들어주는 건 네 병 때문이고, 너와 결혼하는 이유도 그뿐이야. 너 나랑 약속했잖아. 넌 소원만 이루면 되는 거고, 나와 끝까지 함께할 사람은 채이라고.” 그는 덧붙였다. “다음부터 오늘 같은 상황 만들지 마. 채이가 알게 되면 큰일 난다고. 다들 확실히 비밀 지켜줘.” 유겸은 진지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채이는 정말 자존심 강하고, 매사에 똑 부러지는 애야. 만약 내가 다른 여자랑 엮여 있다는 걸 알게 되면 바로 헤어지자고 할 거야. 그건 절대 안 돼.” 그는 잠시 루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고 네 소원을 무시할 순 없어. 넌 병까지 걸려서 돌아왔고, 마지막 소원이 나와 결혼하는 거라며. 한때 널 사랑했던 건 사실이니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해. 대신 서루나, 너는 절대 채이한테 들키면 안 돼.” 루나는 남자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속으로 이를 악물며 최대한 태연한 척 말했다. “난 괜찮아. 내가 먼저 너를 떠났으니까. 네가 나에게 이 정도 시간만 허락해 주는 것도 난 충분해.” 그러면서 웃는 얼굴로 다른 사람들에게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유겸이 사랑해. 하지만 채이 씨에게 상처 주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너희가 유겸이를 위해 비밀 꼭 지켜줘야 해!” 그 순간, 문밖에서 이 모든 이야기를 듣고 있던 채이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멍하니 서 있었다. 그 사람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정말 칼처럼 그녀의 가슴 깊숙이 박혔다. ‘심장이 너무 아파,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 채이는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만큼 고통스러웠다. 유겸의 대답을 듣는 순간, 채이는 자기도 모르게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다. ‘어쩜 이렇게 역겨울 수 있지? 내가 그렇게 오랫동안 사랑했던 남자의 실체가 이 정도라니...’ 그녀는 벽에 기대어 온몸을 떨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채이는 고통에 힘이 빠지며 결국 천천히 바닥에 주저앉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를 정도로 하염없이 앉아있다가, 그녀는 천천히 일어섰다. 그녀는 텅 빈 눈빛으로 계단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가지 못해 다리에 힘이 풀린 채이는 그대로 정신을 잃고 계단에서 굴러떨어졌다. 제5화 “도와주세요! 사람이 계단에서 굴렀어요!” 채이의 귓가에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곧이어 많은 사람이 채이 주위로 몰려들었다. 눈을 감기 전, 그녀는 유겸 일행이 옆에서 지나가는 모습을 보았다. 유겸 일행은 웅성거리는 사람들을 힐끗 보기만 하고는 아무 일도 없는 듯 그대로 자리를 떴다. 사람들 틈에 쓰러져 있던 이가 바로 자신들과의 인연에서 이미 멀어진 채이인 것을 그들은 알지 못했다. ... 채이가 눈을 떴을 때, 그녀는 병원에 있었다. 한 간호사가 약을 발라주며 말했다. “환자분, 깨어나셨네요?” “제가 왜 여기 있죠?” “저혈당으로 쓰러지셨더라고요. 한 남자분이 병원까지 데려다주셨어요. 그분은 이미 가셨고요. 혹시 가족분 연락처 좀 알려주실래요? 제가 대신 연락해 드릴게요.” “괜찮아요, 필요 없어요.” 채이는 고개를 저었다. ‘신유겸이라는 이름은 듣기만 해도 역겨우니까...’ 그녀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실을 나와 병원비를 납부하러 가려고 했다. 몇 걸음 걷기도 전에 채이는 간호사들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야, 오늘 새벽에 실려 온 남녀 얘기 들었어? 술집에서 뭐 하다가 소파에서 굴러떨어졌다더라. 맥주병 깨져서 온몸이 난리였다던데.” “봤지! 와, 전투력이 엄청나던데? 요즘 젊은 애들 진짜 대단하다니까.” “근데 그 남자, 어디서 많이 본 얼굴 같더라? TV에도 나왔던 사람 같아.” “맞아, 익숙하더라. 이름이 뭐더라? 성이 신 씨였던 것 같긴 한데...” 채이의 발걸음이 멈췄다. 아직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기도 전에, 멀리서 다가오는 두 사람의 모습이 그녀의 시야에 들어왔다. 쩖은 간호사가 두 사람을 보자 고개를 푹 숙이고 황급히 자리를 떴다. “저 사람들이야! 생긴 건 말짱하던데, 도대체 뭘 어쨌길래 그렇게 난리가 난 거야?” 채이는 점점 가까워지는 두 사람을 보며, 마치 다리에 납덩이를 단 것처럼 몸이 움직여지지 않았다. 그 순간, 유겸도 채이를 발견했다. 채이를 보자마자 그는 급히 루나의 팔을 놓고 다가왔다. “자기야, 여긴 어쩐 일이야?” 그는 달려오며 채이를 위아래로 살피더니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얼굴이 왜 이렇게 안 좋아? 왜 나한테 연락 안 했어?” “너는? 이 여자는 누구야? 여기서 뭐 하는데?” 채이는 남자의 손길을 피하며 차분히 물었다. 루나는 자연스럽게 채이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서루나라고 해요. 유겸이랑...” 그녀는 일부러 말을 끌었지만, 끝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유겸이 급히 말을 덧붙였다. “그냥 친구야. 친한 친구...” 루나의 얼굴이 잠시 굳었지만, 곧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만나서 반가워요, 채이 씨. 저 다음 달 1일에 결혼해요. 꼭 와주셨으면 좋겠어요.” 그 말을 들은 유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루나를 쏘아보며 말했다. “루나야, 너는 채이와 초면이잖아. 결혼식에는 왜 초대해?” 루나는 뻔뻔한 미소를 띠며 대답했다. “처음이면 뭐 어때? 채이 씨는 너랑 가깝고, 너도 나랑 가깝잖아. 우리 셋 다 친한 거나 다름없지?” 루나의 대놓고 도발하는 말투에 채이는 억지 미소를 지으며 유겸을 바라봤다가 조용히 물었다. “자기야, 우리 원래 결혼식 날짜도 그날이었지? 그날 너 일이 있다고 했잖아. 설마 그 일이 루나 씨의 결혼식 참석하는 거야?” 유겸은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절대 아니야! 그날은 회사 일 때문에 해외에 나가야 해서 그런 거야. 그런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그래?” 유겸의 불안한 표정과 떨리는 목소리는 좀처럼 숨길 수 없었다. 채이는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미소를 지었다. “근데 미안해. 내가 그날은 못 갈 것 같아. 나도 일이 있어.” “그래? 뭐 하는데?” “정말 우연히도, 나도 그날 결혼하거든.” 채이의 말이 끝나자 유겸은 놀란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강채이, 무슨 말이야? 우리 결혼식 연기했잖아?” 제6화 유겸이 놀라서 긴장한 모습을 보며, 채이는 깊게 숨을 들이쉬고 차분히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몸이 안 좋아서 그런가 헛소리가 나오네. 그날 나 바쁠 것 같아.” 채이가 돌아서자, 유겸은 급히 따라가려는 듯 발을 옮겼지만, 채이가 그를 막아섰다. “친구 병원에 데려왔으면 끝까지 챙겨줘야지. 루나 씨를 혼자 두고 가면 안 되잖아. 난 먼저 갈게. 신경 쓰지 마.” 유겸은 채이가 뒤돌아 떠나는 모습을 바라보자 가슴이 무거워졌다. 남자의 불안한 마음을 눈치챈 루나는 억지로 유겸의 주의를 끌며 몸을 숙였다. “유겸아, 나 너무 아파... 온몸이 다 쑤셔. 나를 집에 데려다주면 안 돼?” 채이가 남긴 여운과 태도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유겸은 갑자기 짜증이 폭발했다. 그는 루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며 말했다. “네 입장 제대로 파악해. 그리고 더 이상 채이를 도발하지 마.” 집으로 돌아온 채이는 곧바로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곳에 더 이상 머무는 건 고통스러웠지만, 다행히 짐은 많지 않아, 금방 한 개의 캐리어에 자신의 물건들을 다 담을 수 있었다. 짐을 다 챙긴 후,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1층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전날 유겸이 건넸던 장미꽃을 보았다. ‘이게 네 방식의 사과야? 웃기지도 않아.’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장미꽃을 한 줌으로 뽑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그 모습을 본 가사도우미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사모님, 이 꽃은 대표님께서 주신 거잖아요. 왜 버리시는 거예요?” 채이는 무표정하게 대답했다. “다른 사람이 쓰다 남은 건 저도 필요 없어요. 역겹기만 해요.” “이 꽃 멀쩡해 보이는데, 왜 남이 쓴 거라고 하시는 건지...” 가사도우미는 의아해하며 그녀를 바라봤지만, 채이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채이는 2층으로 올라가 유겸이 그동안 선물했던 가방과 옷을 전부 큰 가방에 쑤셔 넣은 후, 가사도우미에게 그것을 건넸다. “이거 다 갖다 버려주세요.” “버리라고요?” 가사도우미는 순간 얼어붙었다. “이거 전부 예전에 대표님께서 선물해 주신 거잖아요. 사모님께서 그동안 정말 아끼셨잖아요. 아까워서 입지도 못할 만큼 소중하다고 하셨는데...” 채이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말 못 알아들었어요? 버리라고요.”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장식장에 놓인 보석함을 꺼내 보석과 귀걸이, 목걸이를 모두 꺼내며 말했다. “이건 가져다 기부해 주세요.” 가사도우미는 당황해하며 말했다. “이건 전부 대표님께서 준 귀한 것들이잖아요. 전부 비싼 보석들인데...” “기부하라고 했잖아요. 제가 꼭 다시 말해야겠어요?” 채이의 단호한 태도에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가사도우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내놓은 것들을 챙겨갔다. ‘신유겸은 내게서 모든 걸 앗아갔어. 나는 더 이상 이런 것들에 얽매이지 않을 거야.’ ... 모든 정리를 마친 후, 채이는 핸드폰을 꺼내 비행기 표를 예매했다. ‘내일이면 떠난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지.’ 예매를 마친 순간, 핸드폰 화면에 낯선 번호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채이는 무심코 메시지를 열어보았고, 그 안에는 충격적인 사진 한 장이 있었다. 유겸과 루나가 함께 찍힌 노골적으로 친밀한 사진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강채이, 너도 바보는 아니니까 알겠지? 유겸이와 내 사이가 단순하지 않다는걸. 네가 우리가 병원에 왜 있었는지 궁금할 거야. 그건 말이야, 우리가 어젯밤 술집에서 너무 뜨겁게 놀다가 다쳐서 그런 거야.] [참고로, 나 다음 달 1일에 결혼해. 신랑이 누구인지 알겠지? 바로 네 예비 신랑, 신유겸이야. 내가 유겸이 첫사랑이거든. 유겸이 마음속 진짜 사랑은 늘 나였어. 넌 그저 지난 5년 동안 나 대신 유겸이의 외로움을 채워준 대체품일 뿐이야.] 하나하나가 채이의 마음을 후벼파는 도발적인 말들이었다. 핸드폰 화면 속 사진과 글자를 바라보는 채이의 가슴 한구석이 아려왔다. ‘5년. 자그마치 5년이나 함께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어?!!’ 핸드폰을 쥔 채이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면서, 눈에서는 눈물이 주르르 흐르기 시작했다. 참으려 했지만, 결국 유겸에 대한 원망의 감정이 걷잡을 수 없이 터져 나왔다. 그 순간, 유겸이 집으로 돌아왔다. 그는 뒤에서 채이를 안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기야, 왜 또 울어? 나 돌아왔잖아. 나랑 루나 진짜 아무 사이도 아니야. 어젯밤은 그냥 친구들이랑 너무 취해서 집에 못 온 거야. 루나는 내 친구야, 그냥 외국에서 막 돌아온 거라고. 오늘 아침에 우연히 만난 거야. 너 제발 이상한 생각 좀 하지 마.” 유겸의 변명을 듣는 채이의 눈에는 더 이상 눈물이 흐르지 않았다. 그녀는 손으로 얼굴을 닦고 조용히 핸드폰을 껐다. “알겠어.” 채이는 남자의 손길을 밀쳐내고, 유심히 유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얼굴은 여전히 다정하고 선한데... 왜 마음만 이렇게 변했을까?’ 5년 전의 모습 그대로 깨끗하고 환히 웃고 있는 유겸의 얼굴을 보며 채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그렇게 굳게 맹세했던 마음이 이렇게 쉽게 변하다니.’ 제7화 채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유겸의 뺨을 올려붙였다. 유겸은 예상치 못한 채이의 손찌검에 놀랐지만, 오히려 긴장했던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마음이 풀리지 않으면 더 때려도 돼. 난 괜찮아. 네 화만 풀린다면 그걸로 돼.” ‘얼마나 다정한 척을 하는 거야. 정말 역겹네.’ 채이는 다시 한번 유겸의 뺨을 힘껏 쳤다. ‘네가 네 입으로 말했어. 나한테 때리라고.’ 채이는 차분히 말했다. “내가 예전에 말했던 거 기억나? 다른 건 다 참아도, 네가 날 배신하면 난 반드시 다른 남자와 결혼할 거라고.” 유겸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었다. “자기야,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선택한 사람은 자기야. 평생을 함께할 사람도 자기고. 내가 자길 사랑하지 않는다고? 그런 일은 절대 없어. 나는 변하지 않아, 절대로!”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면서, 다른 여자와 얽혀 병원에 실려 갔다고?!’ ‘가장 사랑하는 사람은 나라면서, 다른 여자의 마지막 소원을 위해 결혼식을 미루고, 나를 그저 ‘대체품’으로 만들었잖아?!’ 채이는 유겸의 위선적인 말을 들으며 고개를 들어 유겸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의 마음속엔 대체 무슨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걸까?!!’ 그녀는 한참 유겸을 응시하다가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유겸은 다시 채이를 꼭 끌어안았다. 하지만 채이는 남자의 품에서 벗어나며 유겸을 밀쳐냈다. 그 순간 유겸의 시선이 채이 옆에 놓인 커다란 캐리어에 닿았다. 아까 잠시 내려놓았던 그의 마음이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급히 채이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이 캐리어 누구 거야? 어디 가려고?” 채이는 무심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아, 우리 엄마가 결혼이 다가오니 한 번 집에 들러야 하지 않겠냐고 하셔서.” “정말 그거야?” 유겸은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알겠어. 결혼 전에 신랑과 신부가 서로 떨어져 지내는 게 전통인 집안도 있잖아. 비록 결혼식이 연기됐지만, 네가 집에 가서 편히 쉬었다가 오고 싶다면 그래도 돼. 며칠이 걸려도 상관없어.” “응.” 채이는 미소를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조용히 캐리어를 들고 집을 나섰다. 유겸은 채이의 캐리어를 대신 들어주며 아쉬운 듯 따라나섰다. “내가 데려다줄게. 자기 혼자 가기엔 너무 늦었어.” 채이는 남자를 바라보며 반쯤 웃는 표정으로 말했다. “됐어. 신랑은 결혼 전날까지 자유롭게 놀아야 한다고들 하잖아. 너도 그러고 싶지 않아?” 예전 같았으면 유겸의 말과 행동을 철석같이 믿었겠지만, 채이는 이제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의심이 먼저 들었다. ‘내가 떠난 뒤, 이 사람은 곧장 서루나를 이 집으로 데려오지 않을까?’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유겸은 진지한 얼굴로 그녀에게 약속했다. “난 절대 자기가 싫어할 만한 일은 안 해. 자기가 없는 동안 난 순결하게 지낼 거고, 우리의 결혼식 날만 기다릴 거야.” 하지만 채이는 그가 거짓말을 늘어놓고 있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채이는 계속 늘어가는 그의 거짓말에 이미 지쳤다. ‘이제 더 이상 기대할 것도 없고, 믿을 수도 없어.’ 그녀는 고개를 천천히 떨구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는 모든 기대와 희망을 놓아버린 무거운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래. 잘 지내. 난 갈게.” 채이는 유겸을 밀어내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문을 나섰다. ... 오랜만에 집에 도착하자, 부모님은 채이를 반갑게 맞이하며 이런저런 질문을 쏟아냈다. “드디어 우리 딸이 집에 오는구나! 고씨 집안에서 다음 달 초하루에 결혼하겠다고 했어. 근데 너 유겸이랑 결혼한다고 하지 않았니? 갑자기 신랑이 바뀌었다는 건 뭐야?” “그래, 얘야. 결혼은 장난이 아니야. 네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과 결혼하는 게 맞아. 엄마 아빠도 그 정도는 이해해.” 채이는 지쳐서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엄마, 아빠... 너무 피곤해요. 그냥 방에 가서 좀 쉴게요.” 채이는 피곤에 찌든 몸을 이끌고 계단을 올라갔다. 채이의 부모는 딸의 심정이 복잡하다는 것을 이해하고 더는 묻지 않았다. “그래, 푹 쉬어라. 그런데 결혼 전에 한 번이라도 고씨 집안 아들을 만나보는 게 좋지 않겠니?” 채이는 멈춰 서서 고개를 돌리지도 않은 채 대답했다. “아뇨. 결혼식 날 볼게요.” ‘어차피 결혼은 이미 정해졌으니까, 그 전에 만나는 건 아무 의미 없어.’ 제8화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던 채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함께 한 지 5년이나 됐는데, 신유겸이랑 헤어질 줄은 정말 몰랐어. 더군다나 내가 다른 남자랑 결혼하게 될 줄은 더더욱... 며칠 사이에 모든 게 달라져 버렸어...’ 채이의 옆에 놓인 핸드폰이 몇 번 울리더니 몇 개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강채이, 내가 어디 있는지 맞혀봐!] 루나가 보낸 메시지였다. 이 메시지와 함께 몇 장의 사진도 첨부되어 있었다. 그건 다름 아닌 채이와 유겸의 집이었다. 그리고 더 충격적인 건, 사진 속의 루나와 유겸이 침대 위에 둘이 엉켜 있었다. 그 침대는 바로 채이가 직접 골랐던 신혼 침대였다. [네가 떠나자마자 유겸이 날 여기로 데려와 살게 해줬어. 심지어 모든 가사도우미에게도 절대 너한테 말하지 말라고 지시했더라. 네가 직접 고른 침대, 진짜 편하더라. 네가 골라둔 이불, 우리 둘과 너무 잘 어울리지 않아?] 루나가 보낸 도발적인 말들과 사진들. 채이는 더 이상 그런 것들에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조용히 사진을 넘겨보다가 핸드폰을 꺼버렸다. ‘이제 상관없어. 어차피 나는 다시 돌아가지 않을 테니까.’ 그날 이후 며칠 동안 채이의 부모님은 딸의 결혼 준비로 바빴다. 채이 역시 하루하루가 정신없이 흘러갔다. 드레스 피팅에, 물건을 고르고 사느라 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유겸의 소식은 대부분 루나가 전해주는 것이었다. 루나는 매일 사진과 메시지를 보내왔다. 그녀는 자신과 유겸에게 있었던 일들을 일일이 전하며 자랑이라도 하듯 꾸준히 보내왔다. 채이는 그저 웃음거리로 생각하며 사진을 하나씩 저장하고, 메시지를 캡처해 두었다. 유겸도 매일 채이에게 연락을 시도했다.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고, 채이를 위한 선물을 보내기도 했지만 채이는 한 번도 그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선물은 열어보지도 않고 전부 버렸다. 그러던 중, 마침내 결혼식 전날이 되자 유겸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는 싱글 파티에서 친구들에게 하소연했다. “요즘 채이가 전혀 나를 상대도 안 해줘. 전화도 안 받는데, 혹시 뭔가 알아챈 건 아니겠지?” “에이, 말도 안 돼. 우리가 그렇게 철저히 꼭꼭 숨겼는데 알 리가 있겠어? 너 내일 루나랑 결혼이나 잘해.” “그래, 루나도 잘 챙겨야지. 루나에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한 달만 지나면 채이도 다시 너에게 돌아올 거야.” 유겸은 여전히 불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이미 루나와의 결혼식 날이 돌아왔다. 그는 더 이상 뭔가를 할 수도 없었다. ... 다음 날 아침, 채이는 침실의 거울 앞에 앉아 있었다. 어머니 한정희는 눈물을 훔치며 딸의 머리를 빗겨주고 있었다. “우리 딸, 오늘 시집가는구나.” “엄마, 시집가는 건 좋은 일이잖아. 왜 우세요?” ‘내가 결혼하는 게 그렇게 슬픈 일인가?’ “엄마가 어떻게 안 울어? 딸을 보내려니 마음이 안 좋지.” 한정희는 훌쩍이며 말했다. “그래도 다행히 고씨 집안은 우리가 잘 아는 사람들이고, 성준이 그 아이는 몇 번 봤는데 참 괜찮은 애더라. B 시에서 막 고향에 돌아왔다더니, 군인이잖니? 신유겸 못지않게 조건도 좋고, 잘생겼더라.” 한정희는 이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보여주려 했다. “됐어요, 엄마. 곧 직접 볼 건데 뭐 하러 사진을 봐요?” 채이는 고개를 저으며 시계를 보았다. 아침 7시. ‘출발할 시간이네. 호텔로 가야지. 신유겸도 아마 벌써 출발했겠지?’ 그녀는 잠시 멍하니 앉아 있다가,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이제는 모두한테 알려야 할 때야. 그래야 끝낼 수 있으니까.’ 그리고 SNS에 글을 올렸다. [결혼합니다. 축하해주세요.] 채이가 올린 SNS 게시물에 곧바로 댓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축하해! 5년 동안의 사랑이 결실을 이루다니, 너무 부럽다.] [드디어 유겸이랑 결혼하는구나! 진짜 행복하게 잘 살아!] [유겸이랑 영원히 행복하길 빌어!] 채이는 댓글들을 보며 입가에 쓴웃음을 지었다. ‘봐, 다들 내가 신유겸이랑 결혼한다고 생각하잖아. 그런데 그 사람은 지금 자기 첫사랑이랑 결혼하러 가고 있고, 나는 한 번 본적도 없는 남자와 결혼하는 거야.’ ... 한편, 유겸은 아침부터 마음이 불안했다. ‘왜 이러지? 곧 무슨 일이 생길 것 같은데.’ 유겸의 친구들은 아무 문제 없을 거라며 그를 안심시켰다. 결국 유겸은 웨딩카를 몰고 루나를 데리러 간 뒤, 채이와 결혼하기로 했던 호텔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오랜만에 만난 몇몇 친구들이 웃으며 다가왔다. “축하해, 축하해! 드디어 결혼하는구나, 신 대표!” “맞아, 그런데 채이는? 채이는 왜 안 보여?” 유겸은 당황하며 대답했다. “채이? 오늘 나와 결혼하는 사람은 채이가 아니야.” “뭐라고? 농담하지 마!” 친구들은 순간 멈칫하며 말했다. “채이가 오늘 아침에 SNS에 결혼한다고 글 올렸어. 설마 그 상대가 너 아니었어?” 다른 친구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말도 안 돼. 호텔도 같은 곳인데, 어떻게 채이랑 결혼하는 게 아닐 수 있어? 야, 장난치지 마.” 제9화 유겸은 얼어붙은 듯 멍하니 중얼거렸다. “뭐라고? 채이가 오늘 결혼한다고 SNS에 올렸다고?” 그는 재빨리 친구의 핸드폰을 낚아채 확인했다. 채이의 게시물을 보는 순간, 유겸의 머릿속이 하얘졌다. ‘말도 안 돼. 채이가 결혼한다고? 대체 누구랑?’ 이와 동시에 도로 옆에 한 대의 차가 멈추더니, 누군가 차에서 내렸다. 순백의 웨딩드레스를 입은 채이였다. 유겸은 그녀를 보자 얼굴빛이 확 변했다. 그는 그대로 굳은 채,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채이... 너 여기 왜 온 거야?” 채이는 차에서 내려 유겸을 바라보며 입가에 비웃음을 띠었다. “그건 내가 묻고 싶네. 너야말로 여기 왜 있는 거야?” 그녀의 시선은 유겸 옆에 서 있는 루나에게로 향했다. 루나는 채이의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손에는 채이의 부케를 들고 있었다. 그리고 채이의 자리에서 서 있었다. 채이를 본 루나의 얼굴은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설마... 강채이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여기까지 올 줄 몰랐네!’ 루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채이 씨! 제가 오늘 유겸이랑 결혼하는 거 알고 이러는 거죠? 그래서 일부러 웨딩드레스를 입고 나타난 거죠? 유겸이 빼앗아 가려고요?” 여자의 눈에서는 금세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제 결혼식 망치지 말아줘요. 부탁할게요. 저... 저 얼마 못 살아요. 곧 죽을 거라고요. 제가 죽고 나면, 그때는 채이 씨가 유겸이 가져요. 그러니까 지금은 제 결혼식 좀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두라고요!” 루나는 울며 애원했지만, 채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결국, 루나는 감정이 폭발한 듯 무릎을 꿇으며 소리쳤다. “제발... 부탁이에요!!” 유겸은 루나와 채이를 번갈아 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거야? 왜 채이가 여기 온 거지? 이건 말도 안 돼...’ 구경꾼들이 점점 모여들었고, 사람들은 눈앞의 상황을 보며 채이를 ‘불청객’ 혹은 ‘세컨드’로 여기는 듯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채이는 이 모든 시선이 그저 우스울 뿐이었다. ‘참 웃기네. 내가 왜 여기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지?’ 그때, 루나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채이 씨, 제발 부탁이에요. 저 정말 유겸이 사랑해요. 그런데 제가 암에 걸렸다고요. 제 마지막 소원은 죽기 전에 그 사람과 결혼하는 거예요. 제발, 저를 좀 도와주세요.” 유겸은 결국 참지 못하고 옆에 있는 루나를 부축했다. “루나, 이러지 마. 채이는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야. 분명히 널 이해해 줄 거야.” 그는 채이를 바라보며 그녀에게 다가가 손을 잡았다. “미안해, 채이. 널 속이려던 게 아니야. 루나의 병이 점점 심해져서, 곧 죽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루나의 마지막 소원을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어. 넌 착하니까, 이해해 줄 수 있지? 우선 집으로 돌아가. 내가 루나랑 결혼식을 끝내고 나면, 곧바로 너에게 갈게.” 채이는 남자의 손을 냉정하게 뿌리치며 무표정하게 말했다. “신유겸, 너는 내가 널 만나러 온 거라고 생각해?” 유겸은 그녀의 단호한 태도에 당황한 듯 말했다. “이제 그만해. 오늘 일은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러니 이 정도로 끝내자. 내가 다시 돌아가면 너 원하는 대로 다 해 줄게. 알았지?” 그 순간, 유겸의 친구와 친한 동생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한마디씩 거들었다. “그래, 채이야. 일이 이미 이렇게 됐잖아. 그냥 유겸이랑 루나 이해해 줘.” “형수님, 유겸 형 마음속엔 여전히 형수님밖에 없어요. 형이 이렇게까지 하는 건 책임감 때문이잖아요. 형수님은 원래 대인배시니까 이쯤에서 물러나시는 게 어때요?” 채이는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차가운 웃음을 터뜨렸다. ‘참 대단하네. 너희는 정말 대단히 대인배구나. 자기 애인이 다른 여자랑 결혼하는데, 거기다 대고 박수쳐준다고? 나는 그런 짓 못 하겠어.’ 그녀는 냉정하게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내가 오늘 여기 온 건 널 위해서가 아니야.” 그 말을 끝으로 채이는 결혼식장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려 했다. 하지만 루나는 채이의 앞을 가로막으며 거의 미친 듯이 울기 시작했다. “채이 씨, 정말 끝까지 나를 괴롭히겠다는 거예요? 나를 도와줄 수는 없는 거예요? 채이 씨 눈앞에서 제가 죽는 꼴 보고 싶어서 그래요?” 루나는 눈물 섞인 울부짖음이 끝나기 무섭게, 루나는 웨딩드레스 자락을 움켜쥐고 옆에 있던 기둥 쪽으로 전속력으로 달려가 몸을 던졌다. 제10화 사람들은 루나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랐다. 여자의 이마에서 흐른 붉은 피가 흘러내리며 하얀 웨딩드레스를 물들이고 있었다. “서루나!” 유겸은 경악한 표정으로 소리치며 루나에게 달려갔다. 루나의 행동은 유겸의 마음속 남아 있던 망설임과 죄책감을 모두 사라지게 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루나를 안아 들며 안타까운 목소리로 물었다. “꼭 이렇게까지 해야 했어? 왜 이런 짓을 해?” 루나는 흐느끼며 말했다. “유겸이 너도 알잖아. 내가 평생 가장 바랐던 건 너와 결혼하는 거였어. 그런데 채이 씨가 나를 이해하지 못하니, 차라리 지금 여기서 죽는 게 낫겠어. 괜찮아. 너 원망 안 해. 채이 씨도 원망하지 않고. 이 모든 게 내 운명이니까.” 말을 마친 루나는 입에서 피를 토하며 비틀거렸다. 그 모습을 본 유겸의 눈빛은 서서히 차가워졌다. 그는 고개를 들어 채이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루나가 이렇게까지 해야만 네 비난이 멈출까? 언제부터 이렇게 잔인하고 냉정한 사람이 된 거지?” 남자의 차가운 비난에 채이는 마음 한구석이 쿡 하고 아팠다. ‘그래, 결국 네 눈에 비친 나는 그런 사람이구나.’ 하지만 그녀는 더 이상 상처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이제 됐어. 이쯤에서 끝내자. 이 연극, 진짜 지긋지긋해.’ 채이는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유겸, 이제 곧 결혼식 시작해야지? 시간 낭비 말고 얼른 들어가.” 유겸은 대답 대신 루나를 품에 안고 채이를 한 번 쳐다보았다. 이제 그의 시선엔 연민도, 미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그 자리에 있던 몇몇 사람들이 채이에게 다가와 위로하는 척하며 말을 건넸다. “채이야, 이제 그만해. 유겸이도 말했잖아? 루나 얼마 못 산다고. 괜히 여기서 사람들 앞에서 더 이상 망신당하지 말고 돌아가.” 채이는 이들의 말에 냉소를 머금으며 차분히 말했다. “내가 아까 말했잖아. 난 오늘 여기 신유겸 때문에 온 게 아니라고!!” 그녀는 주변을 둘러본 뒤 조용히 말을 이었다. “참고로, 나도 오늘 결혼해. 바로 신유겸 결혼식장 옆 홀에서. 시간이 되면, 내 쪽에 들러줘도 좋아.” 그 말을 끝으로 채이는 아무런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겨 호텔 로비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신유겸 진짜 대단하네. 두 여자가 웨딩드레스를 입고 서로 질투하다니, 진짜 막장 드라마가 따로 없다.” 채이가 입장했을 때, 가족과 친척들은 대부분 이미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유독 신랑의 모습만 보이지 않았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한정희가 말했다. “성준이는 왜 이렇게 늦는 거야? 설마 안 오는 건 아니겠지?” “엄마, 고씨 집안 사람들 다 왔잖아요. 성준 씨가 안 올 리 있겠어요? 어제 이미 B 시에서 출발했다던데, 아마 길이 막혀서 늦는 걸 거예요.” 부모님은 속으로 점점 더 초조해졌지만, 채이는 무표정한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었다. ‘괜찮다고는 말할 수 없지. 사실 마음이 편할 리가 없잖아.’ 그녀는 곧 있으면 평생 처음 보는 낯선 남자와 결혼하게 될 건데, 그 사람이 잘생겼는지 못생겼는지, 키가 큰지 작은지조차 알지 못한다. ‘후회할까? 후회하지는 않아. 어차피 나도 나이가 있는데, 이젠 결혼해야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면 뭐 어때? 누가 됐든 상관없어.’ 그때, 옆 홀에서 사회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이는 무심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그와 동시에, 유겸은 옆 홀에서 사회자 앞에 서 있었지만, 여전히 멍하니 있었다. ‘채이... 돌아갔을까? 날 용서해 줄까?’ 그는 온통 채이 생각뿐이었다. “서루나 양, 당신은 신유겸 군을 남편으로 맞아들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신유겸 군을 사랑하며 존중하고, 평생을 함께할 것을 맹세하십니까?” 루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서둘러 대답했다. “네, 맹세합니다!” 사회자는 다시 물었다. “신유겸 군, 당신은 서루나 양을 아내로 맞아들이고, 어떤 상황에서도 그녀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평생 함께할 것을 맹세하십니까?” 하지만 유겸은 채이에 대한 생각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사회자가 부르는 소리조차 듣지 못했다. “신유겸 군, 대답해주시겠습니까?” 사회자는 다시 한번 물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유겸은 아무 대답이 없었다. 루나는 초조해졌고, 하객들 사이에서도 웅성거림이 시작되었다. “유겸아!!” 루나는 남자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왜 그래? 사회자님이 질문하잖아.” “아, 미안.” 유겸은 정신을 차리고 대답하려는 찰나, 갑자기 누군가가 웅성거리며 말했다. “진짜였네! 채이가 아까 장난으로 결혼한다고 한 게 아니었어. 지금 옆 홀에서 진짜 결혼식을 하고 있다니까!” “진짜라고? 설마...” “우리 가서 확인해 보자! 둘이 5년 동안 사귀고 결혼 안 하더니, 오늘 같은 날에 둘이 각자 다른 사람과 결혼한다고? 이건 진짜 예상 못 한 반전이었다.” 그 말을 들은 하객들은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나 옆 홀로 향하기 시작했다. 유겸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갑작스러운 불안을 느꼈다. ‘분명 채이가 그냥 화내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왜 내 마음이 이렇게 조마조마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