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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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움에 남은 생을 가둘 필요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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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리야, 너 어릴 때 집안끼리 정혼해 둔 상대가 있단다. 이제 네 건강도 많이 회복됐으니, S 시로 돌아와 결혼하는 게 어떠니?” “네가 정말 원하지...

Chương (1)

第1章

“나리야, 너 어릴 때 집안끼리 정혼해 둔 상대가 있단다. 이제 네 건강도 많이 회복됐으니, S 시로 돌아와 결혼하는 게 어떠니?” “네가 정말 원하지 않는다면, 너희 아버지와 다시 상의해서 이 결혼을 없던 일로 해도 괜찮단다.” 어두운 방 안, 송나리는 조용히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화기 너머에서 어머니 장혜정은 또다시 딸에게 거절당할 것을 예감하며 깊은 한숨을 내쉬려 했다. 그때, 나리가 입을 열었다. “...엄마, 엄마 말씀대로 돌아가서 결혼할게요.” 장혜정은 순간 말을 잃었다. 예상치 못한 딸의 대답이었다. “네가... 정말 동의한다고?” 나리는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동의해요. 하지만 H 시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 조금 남아 있어요. 다 정리하고 나서 보름 안에 돌아갈게요. 엄마, 그동안 결혼 준비 부탁드려요.” 그녀는 몇 마디를 더 남긴 후 전화를 끊었다. 제1화 전화가 끊긴 순간,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우렁찬 음악 소리가 귀를 때렸다. 희미하게 들리는 생일 축하 노랫소리, 그리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어우러졌다. 이 자리는 유석진과 지은후가 서호연을 위해 준비한 생일 파티였다. 밖에서 갑자기 발소리가 들렸다. 서호연이 블랙펄 케이크를 들고 환하게 웃으며 방 안으로 들어왔다. “나리 언니, 같이 내려가서 놀아요!” 그녀는 마치 새끼 사슴처럼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나리를 바라보며, 청초한 얼굴 위에는 정성스레 그려진 화장이 돋보였지만, 곳곳에 묻은 크림 자국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겉으로는 이렇게 완벽한 척하면서... 참.’ 송나리는 서호연의 가식적인 웃음 뒤에 숨겨진 진짜 얼굴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나는 할 일이 많아서 못 내려가. 너희끼리 재밌게 놀아.” 나리는 차갑게 말했다. 순간, 호연의 눈에 금세 눈물이 고였다. “언니... 혹시 저 싫어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자꾸 피하시는 거죠?” ‘싫어한다고? 내가 뭐라도 했나? 자기 혼자 피해자 코스프레하면서 내 탓을 할 건 또 뭐야.’ 속으로 비웃는 나리의 눈에는 호연의 연기가 이제 더 이상 들어오지도 않았다. “이런 연기는 너희 석진 오빠랑 은후 오빠한테나 보여줘. 나한테는 소용없어.” 단호한 말투로 내뱉은 나리는 문을 닫으려고 했다. “언니, 그러지 마세요!” 호연이 갑자기 손을 뻗어 문틀에 걸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그녀의 손이 그대로 문틈에 끼였다. 아악- 여자의 하얗던 손등에 금세 퍼지는 시퍼런 멍 자국이 선명했다. 바로 그때, 유석진과 지은후가 계단을 올라오며 이 광경을 목격했다. “호연아!” 두 남자가 동시에 달려와 호연을 끌어안으며 다급하게 그녀의 손을 살폈다. 손등 위의 상처를 확인한 은후의 눈가가 붉어졌다. 평소 직설적인 성격의 그는 참지 못하고 나리에게 쏘아붙였다. “네가 호연이를 싫어하는 건 알겠는데, 이런 비열한 짓까지 해야 해? 송나리, 너 언제부터 이렇게 변한 거야?” 석진은 원래 감정 표현이 거의 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지금 나리를 바라보는 석진의 깊고 어두운 눈동자에는 실망감이 확연했다. “오늘은 그래도 호연이 생일이야. 이렇게까지 하는 건 너무했어.” 남자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하지만 시선을 호연에게 돌리자마자, 석진의 말투는 부드럽게 변했다. “호연아, 매우 아프지? 내가 약 발라줄게. 같이 내려가자.” 석진이 호연의 손많을 잡고 아래층으로 데려가자, 은후도 뒤따르며 다급히 그녀를 달랬다. “호연아, 울지 마. 오빠가 새로 뽑은 스포츠카 너 줄게. 파티 끝나고 내가 드라이브 시켜줄게. 바람 좀 쐬고 나면 기분이 나아질 거야!” 두 남자가 애지중지하며 달래자 호연은 눈물을 거두었지만, 여전히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고마워요, 석진 오빠.” 그녀는 석진에게 감사 인사를 건넨 뒤, 이번엔 은후를 올려다보며 애원하듯 말했다. “은후 오빠, 근데 제발 레이싱은 하지 마요. 레이싱 너무 위험해요. 저 정말 오빠 걱정돼요.” 호연의 간청에 은후는 허둥지둥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알았어! 네가 좋다면 뭐든 하고, 네가 싫은 건 안 할게, 호연아. 그만 울어, 응?” 호연이 눈물을 멈추고 웃음을 되찾자, 두 남자는 그녀를 데리고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그런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리는 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내가 본 것 실화야?’ 나리는 무언가에 머리를 한 방 크게 맞은 것 같았다. 얼마 전까지도 석진과 은후가 옆에 두고 아끼던 사람이 바로 나리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거지...?’ 나리는 한숨을 내쉬며 과거의 기억을 떠올렸다.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던 나리는 천식까지 앓고 있었다. 하지만 S 시는 습하고 비가 자주 내리는 기후 탓에, 그녀의 건강에 좋지는 않았다. 결국, 다섯 살 때 부모님은 그녀를 사계절 내내 온화한 H 시로 보냈고, 의사인 고모 송하선의 집에 맡기게 되었다. 그곳에서 나리는 고모 집 옆집에 살고 있던 석진과 은후를 처음 만났다. 그때부터 세 사람은 함께 자라며 둘도 없는 소꿉친구가 되었다. ‘그때는 나를 그렇게 소중히 대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나리는 그 시절의 추억이 떠올라 씁쓸하게 웃었다. 처음 나리를 본 순간, 석진과 은후는 그녀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두 남자아이는 매일 나리 곁에 붙어 다니며 그녀를 지켜주는 기사 같은 존재가 되었다. 어릴 적, 둘은 나리의 등하교를 책임지며 매일 아침 그녀에게 아침밥을 사주고 우유를 챙겨줬다. 나리가 받은 모든 러브레터는 두 사람이 철저히 차단했고, 더구나 다른 남자아이들이 그녀에게 한 발짝이라도 다가오는 것을 절대 용납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둘은 어른이 되었다. 석진은 가업을 물려받아 냉철한 사업가가 되었고, 은후는 국제적으로 유명한 레이싱 선수가 되었다. 각자 바쁜 일정을 소화하면서도, 석진과 은후는 나리가 사는 집의 양옆에 있는 집을 동시에 사들였다. 그 집터를 허물어서 하나로 만든 뒤, 나리와 함께 살며 매일 집에 돌아와 그녀의 식사를 챙겨주었다. 심지어 나리의 병이 거의 다 나아가고, 가족들이 그녀에게 S 시로 돌아오라고 독촉했을 때도, 석진과 은후는 눈시울을 붉히며 그녀에게 애원했다. “나리야, 제발 우리를 떠나지 마. 네가 떠나면 우리도 여기 다 버리고 너 따라갈 거야.” 두 사람은 항상 말했다. “네가 있는 곳이 곧 우리집이야.” 두 친구의 간절한 부탁과 헌신 덕분에, 나리는 병이 나은 뒤에도 S 시로 돌아가지 못했다. 하지만, 호연이 등장한 이후 모든 것이 변하기 시작했다. 호연은 나리가 회사에서 데리고 있는 인턴사원이었다. 입사 첫날부터 호연은 수줍어하며 다른 직원들과 함께 점심을 먹으러 가는 것을 꺼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나리가 우연히 호연이 구석에서 혼자 마른 빵과 절임 채소로 끼니를 때우는 것을 보고 놀라서 이유를 물었다. 호연은 산골 마을에서 어렵게 대도시로 올라와 학업을 마쳤고, 집안 형편이 어려워 최대한 아끼며 생활해야 한다고 말했다. ‘호연이에게 이런 사정이 있을 줄 몰랐어...’ 나리는 마음이 아팠다. 송씨 가문의 귀한 딸로서 부족함 없이 자란 나리는, 처음으로 이런 이야기를 듣고 마음속 깊은 곳에서부터 연민을 느꼈다. 그날 이후로, 선한 성품의 나리는 호연을 각별히 챙기기 시작했고, 가끔 석진과 은후와 식사 자리가 있을 때, 호연도 데리고 다녔다. 하지만, 바로 그 일이 화근이었다. 호연은 그렇게 석진과 은후를 알게 되었다. 석진은 차갑고 감정 표현이 드문 성격이었기에, 시끄러운 파티 같은 곳은 절대 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 그는 호연을 위해 그 원칙을 깨뜨렸다. 레이싱을 목숨처럼 여기는 은후는 누구의 말도 듣지 않을 정도로 고집이 셌다. 그런데도 호연이 가볍게 던진 한마디면, 그는 아무렇지 않게 레이싱을 포기했다. 이런 일이 한 달 사이에 수없이 반복됐다. 과거에는 석진과 은후는 나리를 향한 마음을 숨긴 적이 없었고, 나리를 두고 서로 다투며 그녀에게 둘 중 한 명을 선택하라고 강요했던 적도 많았다. ‘그때는 둘 중 한 명을 선택할지 진지하게 고민했던 순간도 있었는데...’ 그 시절을 떠올리며 나리는 씁쓸하게 미소 지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녀의 생각이 달라졌다. ‘집안에서 주선한 결혼을 받아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네.’ 나리는 핸드폰을 꺼내어 이곳을 떠나는 날을 설정했다. ‘앞으로는 더 이상 이 세 사람 사이에서 빠져주겠어.’ 나리는 조용히 한숨을 내쉬며 입꼬리를 당겼다. 제2화 나리는 문을 닫고 귀에 이어폰을 끼웠다. 밖의 시끄러운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이미 결혼하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이곳 일도 정리해야겠지.’ 지금까지 해온 일들을 깔끔히 마무리하고, 누구에게도 아무런 부담을 주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는 것이 나리의 마지막 목표였다. 그녀는 거실 한쪽에 있는 큰 창가에 앉아, 남아 있는 업무를 홀로 처리하기 시작했다. 창밖에는 노을이 지고 있었다. 주황빛 하늘이 점차 어두워지는 것을 보며, 나리는 잠시 손을 멈추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흘렀네.’ 나리는 이어폰을 벗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랜 시간 앉아 있었던 탓에 나리의 몸이 뻐근했지만, 그래도 이제 모든 일이 끝났다는 생각에 안도의 숨이 나왔다. ‘이제 정말 다 끝났어.’ 아래층은 어느새 고요해져 있었다. 나리는 무의식적으로 핸드폰을 들어 잠깐 쉬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 호연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언니, 왜 제 게시물에 ‘좋아요’ 안 눌렀어요?] 나리는 순간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좋아요? 갑자기 웬...? 나는 어차피 항상 누르지도 않잖아.’ 그런데 메시지를 보낸 지 1분도 지나지 않아 또 다른 메시지가 도착했다. [아, 죄송해요, 언니. 제가 실수로 보냈어요. 화내지 마세요!] ‘무슨 의도지?’ 나리는 고개를 갸웃하며, 호연의 메시지를 보고 어쩐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고민하다가 그녀는 호연의 SNS를 열어보기로 했다. ‘대체 뭘 올렸길래 ‘좋아요’를 눌러달라고 한 거지?’ SNS를 열자마자, 화면에 보이는 것은 화려한 사진 아홉 장이었다. 모두 석진과 은후가 호연에게 선물한 것들이었다. 가장 먼저 나리의 눈에 들어온 것은 핑크빛 공주 드레스였다. 정교한 디자인의 드레스는 마치 핑크 구름처럼 펼쳐져 있었고, 옆에는 석진이 보낸 커스텀 메이드 크리스털 힐이 놓여 있었다.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빛을 반사하며 사치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빨간 스포츠카 한 대가 사진 속에 있었다. 누가 봐도 은후가 선물한 것임이 분명했다. 많은 선물이 진열된 한가운데에 자리 잡은 호연의 사진에서는 석진과 은후가 양옆에 서 있었다. 두 남자의 팔을 각각 양팔로 꼭 팔짱을 낀 채, 호연은 환하게 웃고 있었다. 사진 아래에는 짧은 캡션이 적혀 있었다. [예!! 오늘은 나도 공주가 된 날!!] 나리는 화면을 응시하며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축하한다. 네가 공주님이 되었구나.’ 그녀는 핸드폰을 조용히 내려놓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둠이 내려앉은 하늘은 이미 검게 물들어 있었다. ‘이제 정말 그 셋만의 세상이네. 나도 이젠 상관없어.’ 나리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호연이 일부러 이런 걸 올리는 이유는 단 하나, 자신을 자극하고 화를 돋우기 위해서라는 걸. ‘예전 같았으면 분명히 참지 못했겠지. 저런 가식적인 모습도, 석진이랑 은후가 나만을 위해 준비하던 것들을 이제는 알게 된 지 고작 한 달도 안 된 애한테 다 주는 것도.’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나는 곧 떠날 사람이야. 이젠 이런 거에 신경 쓸 필요도 없어.’ 나리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손가락으로 화면을 툭 눌렀다. 호연의 게시물 아래 빨간 하트가 번쩍이며 ‘좋아요’가 눌러졌다. ‘앞으로 나는 석진이랑 은후랑 그냥 친구일 뿐이야. 그 어려운 선택은 이제 네가 알아서 해.’ ... 다음 날, 나리는 회사에 가서 조용히 사직서를 제출했다. 모든 정리가 끝난 뒤 집에 돌아온 그녀는 방 한쪽에 있던 앨범들을 꺼냈다. 나리는 석진과 은후가 함께 찍은 사진들이 담긴 두꺼운 앨범은 무려 열 개가 넘었다. 앨범을 펼치자 어릴 적 기억이 쏟아졌다. 어린 시절, 석진과 은후가 나리와 소꿉놀이 하던 사진들. 중학교 시절, 세 사람이 함께 받은 상장을 들고 환히 웃고 있는 사진들. 대학교 때, 셋이 함께 여행을 다니며 남긴 사진들까지... 모든 기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그땐 정말 즐거웠는데.’ 나리는 천천히 사진들을 넘기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지금은, 이 모든 것이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그녀는 사진 한 장 한 장을 불길 속으로 던졌다. 사진이 타들어 가는 모습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사진 위로 번지는 불길이 빠르게 나리의 모든 추억을 집어삼켰고, 마침내 모든 것이 잿더미로 변했다. 그때, 석진과 은후가 차례로 집에 돌아왔다. 그리고 나리가 하는 일을 목격한 두 사람은 순간 얼어붙었다. 석진은 상황을 파악하자마자 재빠르게 그녀에게 다가왔다. 남자의 목소리는 흔들리고 있었다. “지금 뭐 하는 거야!” 나리는 석진을 흘긋 쳐다보며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별거 아니야. 사진에 곰팡이가 피었길래, 그냥 태워버리는 중이야.” 은후는 남아 있는 사진들을 빼앗으려고 다가왔다. 하지만 그녀는 일부러 손목을 살짝 흔들어 사진들을 모두 불 속에 던져버렸다. 불길이 순식간에 사진들을 집어삼키며, 두 사람에게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았다. 은후는 불길 속에서 아직 다 타지 않은 사진들을 구하려 손을 뻗었지만, 뜨거운 열기에 놀라 손을 금세 움츠렸다. “곰팡이가 폈어도 그렇지, 이건 다 추억이잖아! 왜 태우는 건데!” 은후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눈가에는 붉은 기운이 서려 있었다. 석진 역시 불길을 바라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고 있으며 눈빛에서도 깊은 안타까움과 아픔이 느껴졌다. 그 말을 들은 나리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내가 이렇게 눈 뜨고 살아 있는데, 그동안 서호연 때문에 나에게 몇 번이나 상처 줬으면서.’ ‘이제 와서 고작 사진 몇 장에 이렇게 마음이 아프다니, 참 우습네.’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만약 내가 결혼하겠다고 하면, 이 두 사람은 또 어떤 반응일까?’ 나리의 입가에는 서늘한 미소가 번졌다. 제3화 눈앞의 두 남자를 바라보며 나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진일 뿐이야. 다시 찍으면 되잖아.” “깨끗이 태워버렸으니 이제 앞으로 찍으면 되지. 어차피 우리도 여행 안 간 지도 꽤 오래됐잖아.” 석진은 애써 타협하려는 듯 말했다. 은후도 급히 말을 덧붙였다. “이번엔 호연이도 같이 데려가자. 자기는 한 번도 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고 하더라.” 은후의 말에, 나리는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서호연을 데려간다고? 참, 이제는 아예 나한테 의견도 안 묻네.’ 그녀는 대꾸하지 않고 그저 어색하게 웃었다. 두 남자는 나리가 이 제안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는지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둘 다 조용히 안으로 들어가려던 찰나, 거실 한가운데에 놓인 박스들이 눈에 들어왔다. 아침에 나갈 때는 없던 것들이었다. “이건 또 뭐야?” 두 사람은 동시에 물었다. 나리는 박스들을 흘끗 보고 무심하게 대답했다. “아, 나 사직했어. 다른 일 알아볼까 해서.” ‘사직했다고?’ 그녀가 지금까지 얼마나 이 일을 좋아했는지를 잘 알고 있던 두 사람은 눈앞의 나리가 낯설게 느껴졌다. 같은 의문이 두 사람의 마음에 떠올랐다. ‘왜 갑자기 이러는 거지?’ ‘오늘 나리는 어딘가 이상해. 말투도, 표정도 평소와는 다르고...’ 묘하게 불안한 감정이 두 남자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 은후는 더 물어보려는 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 순간, 울리는 전화벨 소리가 조용한 거실의 공기를 찢었다. 석진이 전화를 받자, 수화기 너머로 호연의 다급하고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석진 오빠, 우리 집 갑자기 정전됐어요. 너무 무서워요... 저 어떡하죠?] 은후는 그 말을 듣고 얼굴빛이 변했다. 석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먼저 나섰다. “호연아, 걱정하지 마. 오빠가 바로 갈게.” 석진은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늘 냉철하고 침착하던 그의 얼굴에 평소 보기 드문 긴장감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호연에 대한 걱정이 두 사람의 마음을 가득 채운 듯, 석진과 은후는 말없이 차 열쇠를 집어 들고 나란히 문을 나섰다. 두 사람이 사라진 뒤에도 나리는 내내 평온한 표정을 유지했다. ‘결국 이렇게 가는구나. 한 번도 변함이 없네.’ 그녀는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송하선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릴 때부터 고모 송하선의 집에서 지내던 나리는 고모에게 깊은 애정을 느끼고 있었다. 송하선은 나리를 친딸처럼 아껴주었고, 나리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떠나기로 한 만큼, 나리는 고모와 제대로 작별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나리가 결혼하러 S 시로 돌아간다는 이야기를 듣고, 송하선은 전화기 너머로 아쉬움과 놀라움을 담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리야, 너 결혼하러 간다는 얘기, 석진이랑 은후는 알고 있어?] 나리는 잠시 망설이다가 조용히 대답했다. “아직 몰라요. 고모, 이건 비밀로 해주세요. 괜히 얘기해서 또 일 복잡하게 만들기 싫어요.” 그 말을 듣자 송하선도 잠시 침묵했다. 곧이어 그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래, 네 마음도 이해가 간다. 근데 정말 아깝다... 어릴 때부터 너는 그 둘한테 보물 같은 존재였잖아. 누가 봐도 그 두 녀석이 너 좋아하는 거 다 알겠던데. 너희 셋이 그렇게 붙어 다녔으니, 난 당연히 네가 둘 중 하나랑 결혼할 줄 알았지. 참, 아쉽다...] 나리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아쉽긴요, 우리는 그냥 안 맞는 것뿐이에요.” 송하선은 더 이상 말리지 않고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나리야, 네가 언젠가는 S 시로 돌아갈 거라는 건 알고 있었어. 다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몰랐구나. 내가 너를 어릴 때부터 봐왔는데, 너 떠나기 전에 꼭 한 번 보자. 네가 이번에 S 시로 가면 우리가 언제 다시 볼 수 있을지 모르잖아.] 나리는 웃으며 답했다. “그럼요, 당연히 갈 거예요. 고모께 드릴 선물도 준비했어요. 저도 고모랑 헤어지기 싫어요.” 송하선은 나리의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한 듯, 몇 마디 더 덧붙이다가 전화를 끊었다. 하지만 전화를 끊자마자 또 다른 전화가 걸려 왔다. 이번에는 회사의 디자인팀 팀장이었다. “나리 씨, 전에 나리 씨가 발표한 디자인 작품이 회사 대표로 상을 받았어요. 방금 트로피가 도착했는데, 나리 씨가 퇴사하느라 못 받아 갔잖아요. 그래서 트로피를 인턴사원에게 맡겼어요. 금방 집으로 가져다줄 거예요.”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초인종이 울렸다. 나리는 전화를 끊고 문을 열었다. 문 앞에는 트로피를 품에 안은 호연이 서 있었다. 제4화 호연은 트로피를 품에 안은 채, 나리에게 건네줄 기색은커녕 오히려 입술을 꼭 깨물며 애처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언니, 팀장님이 트로피를 언니한테 가져다드리라고 했어요. 이 상 정말 권위 있는 상이잖아요. 언니 진짜 대단해요.” 잠시 말을 멈춘 그녀는 망설이는 듯하다가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그런데 언니, 제가 정말 두꺼운 얼굴로 한 가지 부탁드려도 될까요? 제가 이런 상을 한 번도 못 받아 봤거든요. 이 트로피를 며칠만 저한테 빌려주시면 안 될까요?” ‘빌려 달라고? 트로피를?’ 나리는 처음 들어보는 황당한 부탁에 잠시 말을 잃었다. ‘내가 이런 말도 안 되는 말을 듣고 있어야 하는 거야?’ 그녀는 이내 미간을 찌푸리며,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지만, 겉으로는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너는 참 얼굴도 두껍다. 그런 부탁은 나에게 안 하는 게 맞지 않을까? 정말 받고 싶으면 네가 직접 대회에 나가서 받아.” 그 말을 마치자마자, 나리는 손을 뻗어 호연 품에 있는 트로피를 가져가려 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나리의 단호한 태도에 호연의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호연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로 말했다. “언니, 왜 그렇게까지 말씀하세요? 제가 트로피를 뺏으려는 것도 아니잖아요. 그냥 집에 잠깐 두고 스스로 동기부여 좀 하겠다는데, 그것도 안 돼요?” 나리가 손을 뻗자, 호연은 트로피를 더욱 꽉 안았다. 호연의 표정에는 억울함과 분노가 뒤섞인 듯했다. ‘뭐야, 이제는 아예 주지도 않겠다는 거야?’ 나리는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손을 뻗었다. 하지만 두 사람이 트로피를 두고 실랑이를 벌이는 사이, 트로피는 호연의 손에서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쾅! 유리로 만든 트로피는 한순간에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마침 그때 석진과 은후가 집으로 돌아와 이 장면을 목격했다. 두 사람은 순간 멈칫하더니, 곧장 달려와 호연을 품에 안았다. “호연아!” 두 사람의 얼굴에는 걱정과 두려움이 가득했다. 둘은 호연이 다치지 않았는지 확인하기 위해 안절부절못하며 호연의 몸을 살폈다. 그러다 석진이 호연의 치맛자락을 살짝 올리자, 그녀의 종아리에는 깨진 유리 조각이 박혀 있었다. 피가 흘러내리는 모습을 본 석진의 눈빛이 순간 차갑게 굳었다. “병원으로 데려갈게.” 그는 단호하게 말하며 호연이 고개를 흔들며 거부해도 상관하지 않았고, 곧바로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집을 나섰다. 나리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눈빛으로 서 있었다. ‘참 우습네. 호연이는 저렇게 걱정해 주면서 왜 정작 내가 다친 건 아무도 모를까?’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는 자리를 지켰다. 바닥에 흩어진 유리 파편을 보며, 은후의 얼굴은 단단히 굳어 있었다. 그는 차갑게 나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나리야, 너는 이미 모든 걸 다 가졌잖아. 그런데 왜 호연이랑 트로피를 두고 싸우는 거야?” ‘싸우다니? 내가 트로피를 두고 싸웠다고?’ 그 말을 듣자 나리는 순간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올 뻔했다. ‘이건 내 트로피야. 내가 석 달 동안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성과라고. 내 명예야. 그런데 저 애는 불쌍한 척하면서 안 내놓고 있잖아. 그리고 이제 와서 나보고 싸웠다고?’ 나리는 참을 수 없는 분노에 몸이 떨리면서 바닥의 깨진 트로피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 트로피는 내 거야. 내가 뼈 빠지게 노력해서 받은 결과물이라고. 그런데도 너는 내가 마치 호연이랑 이걸 두고 다툰 것처럼 말하네. 지금 이걸 깨뜨린 것도 저 애잖아. 이번만큼은 꼭 호연이에게 사과받아야겠어. 호연이는 나한테 사과해야 해.” 그녀는 이렇게 말하며 충분히 상황을 설명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은후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 은후의 얼굴이 더 검게 변하더니,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겨우 그 트로피 하나가 뭐가 그렇게 중요해? 너는 원하면 얼마든지 가질 수 있잖아. 그런데 그깟 트로피 때문에 호연이가 다쳤잖아.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건 네가 아니야. 네가 호연이에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는 더 이상 나리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은 채, 다친 호연을 확인하러 서둘러 나가버렸다. 나리는 바닥에 흩어진 파편을 멍하니 바라보며 한동안 꼼짝도 하지 못했다. ‘나더러 사과하라고? 피해자인 내가 가해자에게 사과하라고?’ 그녀의 머릿속에서 은후의 말이 계속 맴돌았다. ‘지은후, 정말 대단하다. 내가 이 꼴을 겪으면서도 아직도 네 편을 들어줄 거라고 생각하나 보네.’ 나리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문득, 그녀는 다리도 욱신거리는 통증이 느껴져서 고개를 숙여 보았다. 자기 종아리에 길게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피가 고이고 상처는 호연보다 훨씬 심각해 보였다. ‘웃기지. 정작 내가 더 다쳤는데 아무도 몰랐네.’ 나리는 이를 악물며 통증을 참았다. 그녀는 바닥에 흩어진 유리 조각을 하나씩 치우고, 겨우 마무리를 끝낸 뒤 방으로 들어가 혼자 상처를 처리했다. 저녁이 되자, 나리의 핸드폰에 어머니 장혜정으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장혜정은 결혼식에서 입을 웨딩드레스를 골라 사진을 열 장 넘게 보내며 마음에 드는 것을 골라보라고 했다. 나리는 하나씩 사진을 넘겨보다가 전화를 걸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눈 후, 장혜정은 나리의 지친 목소리를 듣고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딸, 무슨 일 있니? 목소리가 피곤해 보여.] 오늘 하루 겪은 일들이 떠오르자, 나리의 눈가가 뜨겁게 젖어왔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조용히 화제를 돌렸다. “엄마, 여기 일은 아마 일주일 정도면 정리될 것 같아요. 결혼 준비는 잘 되고 있어요?” 그 순간, 집으로 돌아온 석진과 은후가 나리의 마지막 말을 듣고 멈춰 섰다. 둘은 동시에 물었다. “결혼? 무슨 결혼?” 제5화 나리의 손에 들려 있던 핸드폰이 어느새 끊겨 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숨을 고르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 친한 친구가 결혼해. 왜, 너희도 같이 갈 생각 있어?” 요즘 들어 석진과 은후는 나리에게 점점 더 차갑게 대하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S 시로 돌아가고 나면 이제 다시 만날 일도 없을 텐데. 앞으로 우리 사이는 친구라고 부르기도 어렵겠지.’ 그렇다면 굳이 진실을 말할 필요도 없었다. ‘내가 결혼하러 간다는 말을 굳이 할 필요 없잖아.’ 나리의 말을 들은 석진과 은후는 순간 서로를 쳐다보았다. 둘 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쳤다. “아니, 난 못 가. 회사 일이 바빠서.” 석진은 무심하게 대답한 뒤, 차가운 표정으로 서류를 챙겨 들고 서재로 들어갔다. 은후 역시 무뚝뚝한 표정으로 말했다. “오늘 호연이가 너 때문에 다쳤잖아. 피까지 났는데, 네가 직접 가서 사과하는 게 맞아. 안 그러면, 너랑 같이 결혼식 같은 데 갈 생각 없어.” 그는 말끝을 차갑게 맺고, 휙 돌아서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정말 끝까지 이렇게 나오다니.’ 더는 말싸움을 할 힘도 없다는 듯 나리는 조용히 쓴웃음을 지었다. ... 다음 날 아침, 나리는 평소처럼 일찍 일어나 아침 식사를 준비하려고 했다. 거실로 나서던 그녀는 순간 걸음을 멈췄다. 거실 한복판에 화병들이 열 개도 넘게 놓여 있었다. 화병마다 신선한 꽃들이 가득 꽂혀 있었고, 은은한 꽃향기가 거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부드럽고 상쾌한 향기였지만, 나리의 얼굴은 그 순간 하얗게 질려버렸다. ‘꽃가루...?’ 꽃가루가 바람을 타고 거실을 휘감으며 나리의 주변을 가득 채웠다. 나리는 숨이 점점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게 뭐야... 대체 왜 여기에 꽃이...’ 그녀는 천식 환자였고, 심한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었다. 숨이 막히는 듯한 답답함이 점점 더 심해졌고, 나리의 가슴은 들썩거렸다. “약... 약...” 나리는 머릿속에 남아 있는 기억을 더듬으며 약을 찾으러 비틀거리며 움직였다. 약이 들어 있는 약장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그녀의 시야는 점점 흐려지고 있었다. “제발...” 나리는 손을 떨며 약 보관함을 만졌지만, 손끝에서 점점 힘이 빠지며 제대로 잡지 못했다. 그 순간, 그녀의 손이 약장 옆에 놓인 화병을 쳤고, 화병들이 바닥으로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쨍그랑! 꽃병이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조각이 났다. 꽃병 속의 물과 꽃들은 바닥에 흩어져 엉망진창이 되었다. 깨지는 소리를 들은 석진과 은후는 다급히 거실로 달려왔다. 바닥을 본 두 사람의 시선에는 당황과 분노가 가득했다. 하지만 정작 두 사람은 나리의 상태를 살피기보다는 바닥의 난장판에만 신경을 썼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석진의 목소리는 차갑게 날아왔다. 나리는 간신히 약을 손에 넣었지만, 지금은 숨 쉬는 것조차 힘들어 둘의 말을 들을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은후는 더 다급하게 반응했다. 그는 나리를 밀쳐내듯 옆으로 제치고는, 급히 바닥에 흩어진 꽃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꽃이 다 망가졌잖아. 이게 얼마나 비싼 건데...” ‘나를 밀었어...?’ 은후의 거친 손길에 나리는 중심을 잃고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그녀의 무릎은 바로 옆에 있는 가구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고, 그 자리에서 피부가 까지며 붉게 부어올랐다. ‘너무 아파...’ 나리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무릎을 잡았지만, 그보다 더 심각한 건 점점 심해지는 호흡곤란이었다. 두 손에 쥔 약병이 계속해서 떨렸고, 그녀의 숨소리는 점점 더 가빠졌다. ‘숨을 쉴 수가 없어...’ 결국, 나리는 약병의 뚜껑을 열고, 떨리는 손으로 간신히 스프레이를 찾아내었다. 그녀는 구원의 희망처럼 스프레이를 입 가까이 가져가 뿌리기 시작했다. 약이 기도로 들어가자, 불편하고 건조했던 나리의 기도가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했다. 숨을 쉴 수 있게 된 그녀는 겨우 바닥에서 몸을 일으켜, 다리를 절뚝거리며 방 한쪽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곳에서 나리는 힘없이 주저앉아 한 손으로 무릎의 상처를 감싸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석진과 은후는 나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두 사람은 바닥에 떨어진 꽃과 깨진 꽃병을 수습하느라 여전히 분주했다. ‘이제는 나한테 관심조차 없네. 내가 이렇게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다쳤는데도...’ 나리는 속으로 비웃었다. ‘꽃이 그렇게 중요해? 나보다? 이게 진짜 너희들이 생각하는 나와의 관계였던 거야?’ 그녀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차가운 눈빛으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리의 가슴속 깊은 곳이 서늘해졌다. 제6화 나리는 간신히 숨을 고르면서 벽에 기대며 손에는 약을 꼭 쥔 채, 얼굴을 감싸 꽃가루가 더 들어오지 않도록 애썼다. 하지만 아직 제대로 쉬지도 못한 그녀의 귓가에 석진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대체 왜 이렇게 호연이에게 예민하게 구는 거야? 이 꽃들, 호연이가 우리 주려고 애써 준비한 거잖아. 그런데 네가 이렇게 다 망가뜨리고 나니까 속이 시원해?” 바로 이어 은후의 분노 섞인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나리, 요즘 너 정말 이상해졌어. 도대체 왜 이렇게 변한 거야?” 그 말들을 들은 나리는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하지만 숨을 고를수록 몸이 떨리고, 억눌렀던 분노와 슬픔이 그녀의 안에서 끓어올랐다. ‘예민하다고? 변했다고? 정말 내가 변한 거 맞아? 너희가 변한 거 아니고?’ 수없이 하고 싶은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지만, 나리의 입에서 나온 건 단 한 마디였다. “내가 변했다고? 아니, 변한 건 너희야.” 그녀는 목소리를 낮췄지만, 눈가가 붉어지고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다. “내가 천식이 있다는 거, 그리고 꽃가루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 너희 정말 모르는 거야?” 여자의 힘없는 목소리는 크지 않았지만, 그 한 마디 한 마디가 석진과 은후의 귀를 때렸다. ‘그런데도 모른척한다고?’ 나리의 말은 마치 커다란 천둥처럼 둘의 귀를 때렸다. 예전의 두 사람은 나리를 가장 아꼈던 사람이었다. 나리가 천식으로 쓰러지기만 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 손을 잡고 눈물까지 보였던 사람들이 바로 이 둘이었다. 학교에서 몰래 빠져나와 나리 곁을 서성이고, 아무리 선생님이 불러도 끝까지 자리를 지켰던 그들. 하지만 이제는... ‘이제는 너희들이 그것마저 잊어버렸다고?’ 나리는 차갑게 떨리는 눈길로 둘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말에 석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굳어지면서 눈에는 당혹감과 죄책감이 교차했고, 얼굴빛은 점점 창백해졌다. 한참을 서 있던 그는 입술을 꾹 다물고 있다가, 마침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은후는 미간을 깊게 찌푸리며 나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나리의 천식 발작 때마다 곁에 있었던 날들을 떠올렸다. ‘그때마다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내가 누구보다 잘 아는데...’ 그런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그는 한 걸음 앞으로 다가섰다. “괜찮아? 미안해. 방금 한 말은 너무 급해서 그랬어. 이 꽃들, 호연이가 직접 야외에서 정성껏 따온 거라 내가 좀 예민했던 것 같아.” 나리는 여전히 말이 없었다. 은후의 사과에도 그녀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다만 나리의 호흡이 점점 고르게 돌아오는 것을 확인한 석진과 은후는 안도한 표정으로 꽃들을 들고 서둘러 밖으로 나갔다. ... 그 이후 며칠 동안, 석진과 은후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둘의 방 불은 계속 꺼져 있었고, 집 안은 이상하리만큼 조용했다. 나리는 두 사람이 어디에 있는지 신경 쓰지 않았다. ‘바빠 죽겠는데, 둘이 있든 없든 무슨 상관이야.’ 그녀는 자신의 짐을 정리하는 데 집중했다. 짐 정리가 거의 끝나자, 나리는 오래 살던 이 집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그녀가 처음 사들인 집이었다. 하지만 그 후 석진과 은후가 나리 곁에 더 가까이 있고 싶다며 양옆의 집을 각각 매입했고, 세 채의 집을 연결해 지금의 모습으로 만든 것이었다. ‘결국 이 집의 3분의 1만 내 소유네.’ 그녀는 쓰게 웃었다. ‘이 집을 팔려면 그 둘의 동의도 받아야겠지. 그것도 참 번거롭네.’ ... 며칠 후, 석진과 은후가 드디어 집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둘이 들어온 순간, 나리는 응접실에서 공인중개사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거실에 낯선 남자가 앉아 있는 모습을 본 석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당신 누구야? 여긴 왜 온 거지?” 석진의 목소리는 차갑고 날카로웠다. 은후도 눈을 가늘게 뜨며 그를 압박하는 눈빛을 보냈다. 두 사람의 날카로운 시선에 공인중개사는 당황한 얼굴로 연신 고개를 숙이며 급히 설명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공인중개사입니다. 이 집의 소유주께서 집을 매각하겠다고 하셔서 오늘 상담을 위해 방문했습니다.” “매각...?” 석진과 은후는 서로를 바라보았다. 둘의 눈에는 똑같은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둘 다 얼굴을 굳히며 바로 중개사를 쫓아낼 기세였지만, 그 순간 계단에서 나리가 내려왔다. “집을 팔겠다고 한 건 나야. 너희랑 상의하려던 참이었어.” 나리의 말을 들은 석진과 은후는 동시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둘은 입을 모아 물었다. “왜 팔려고 하는 건데? 잘살고 있었잖아.” 은후는 며칠 전 일을 떠올리며 무언가를 깨달은 듯 바로 물었다. “설마... 그날 일 때문에 아직도 화난 거야?” 그는 다급해진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꽃가루 알레르기 얘기 잊어버린 건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진짜 미안해.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 은후의 사과에도 나리는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 일 때문은 아니야...” ‘너희 둘 때문이지.’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말하는 대신 차분하게 말했다. “너희도 알다시피, 나 이제 회사도 그만뒀잖아. 새로운 일을 시작하려면 이 집에 계속 사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 그리고 우리 같이 산 지 몇 년 됐잖아. 이제는 전처럼 굳이 이렇게까지 붙어 있어야 할 이유도 없고.” 나리의 말에 석진은 여전히 차가운 표정을 유지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게 이유라면, 출퇴근은 내가 은후랑 같이 도와줄게. 네가 따로 걱정할 필요 없어. 그리고 너도 말했잖아. 우리 이렇게 오래 같이 살았는데, 왜 굳이 헤어져야 하냐고.” 은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쳤다. “맞아. 우리가 옆에 있잖아. 필요하면 운전기사도 붙여줄 수 있어. 난 절대 따로 사는 거 찬성 못 해.” 나리는 둘의 고집스러운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왜 이렇게까지 집착하는 거야?’ 그녀는 잠시 생각에 잠긴 뒤, 마지막 카드로 승부를 보기로 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이 집을 팔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자. 그러면 호연이도 같이 들어와 살 수 있잖아.” ‘호연.’ 그 이름이 나오자, 두 남자의 반응은 즉각적이었다. 둘의 눈이 순간 반짝였다. 그러나 석진과 달리 은후는 바로 입을 열었다. “그런 거라면... 뭐, 괜찮을 것 같아.” 하지만 석진은 여전히 뭔가를 고민하듯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너... 진짜 호연이랑 같이 살고 싶어?” 석진의 물음에 나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왜 안 돼? 우리 다 친구잖아.” 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와 미소에 석진은 순간 말을 잃었다. 나리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바로 결정을 내렸다. “그럼 그렇게 하자. 이 집 팔고, 새집으로 가자.” 그녀의 말이 떨어지자, 석진과 은후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다 묘한 침묵 속에서 나리를 바라볼 뿐이었다. 제7화 집 문제를 드디어 해결한 나리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마음의 짐을 덜어냈다. ‘이제야 조금 편해졌네.’ 계약서에 사인을 하며 문득 일정표를 확인한 나리는, 집을 정리하고 소유권 이전 절차를 밟는 날이 마침 자신이 이 도시를 떠나는 날과 겹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딱 좋네. 굳이 석진이나 은후한테 딱히 뭐라고 설명할 필요도 없겠어.’ 계약서에 사인을 끝내고 나자 나리의 몸은 한결 가벼워졌다. ‘이제 정말 끝나가는구나.’ 하지만 아직 끝내야 할 마지막 일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백화점에 들러 시간을 들여 고심 끝에 마사지기와 고급 보석 팔찌를 골랐다. 그리고 송하선의 집으로 향했다. ... 문을 열자마자 송하선은 두 팔을 벌려 나리를 꽉 끌어안았다. “나리야, 네가 떠난다고 생각하니, 정말 섭섭하고 허전하다. 네가 여기 H 시에 있는 동안, 난 너를 진짜 내 딸처럼 여겼는데... 네가 떠나면 나는 어떻게 지내겠니?” 송하선은 눈물을 훔치며, 나리의 손을 꼭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나리의 마음도 찡했다. ‘나도 마음이 아프지만, 가야 하는 걸 어떡해.’ 그녀는 억지로 미소를 지으며 송하선을 위로했다. “고모, 나도 정말 아쉬워요. 하지만 우리는 가족이잖아요. 비행기도 있고, KTX도 있으니, 명절 때 금방 다시 볼 수 있어요.” 송하선은 나리의 말을 듣고 조금씩 마음을 추스르고, 손수건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러더니 조카딸을 소파에 앉히며 말했다. “얘야, 착하게 여기 앉아 있어. 네가 간다고 해서 며칠 휴가를 냈어. 며칠 동안 내 집에서 지내라. 네가 좋아하는 음식들 잔뜩 만들어줄게.” 나리가 미처 거절할 틈도 없이 송하선은 주방으로 가서 분주하게 요리를 시작했다. 잠시 후, 나리가 좋아하는 음식들이 차려진 식탁이 그녀 앞에 놓였다. 바쁜 와중에도 웃음 짓는 송하선을 보며, 나리의 얼굴에도 자연스럽게 미소가 번졌다. ‘역시 고모는 내가 아무리 말해도 소용없는 분이에요. 며칠 머물면서 고모랑 시간을 보내야겠네요.’ 그녀는 결국 고모의 제안을 받아들여 집에 며칠 머물며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고, 떠날 날이 가까워졌다. 더 이상 시간을 미룰 수 없었던 나리는 마침내 송하선에게 작별을 고했다. “고모, 이제 정말 가야 해요. 사흘 뒤면 S 시에 가서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하거든요.” 송하선은 눈물을 참으며, 억지로 웃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미리 준비해 둔 두툼한 축의금을 나리 손에 쥐어주며 말했다. “그날 내가 수술이 세 건이나 잡혀 있어서 못 갈 것 같아. 하지만 이건 내 진심이야. 나리야, 꼭 행복해라.” 그 말을 들은 나리는 눈가가 더욱 붉어졌다. 그녀는 고모의 축의금을 두 손으로 공손히 받으며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네, 고모. 할아버지가 직접 골라주신 분이니, 고모도 안심하세요.” 바로 그때,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석진과 은후가 등장했다. 두 사람은 각각 왼쪽과 오른쪽에 서 있었고, 둘 사이에는 호연이 함께 있었다. 둘이 문을 나오자마자 보게 된 것은 나리와 송하선이 눈물을 닦으며 작별 인사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 장면을 본 두 사람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상한 예감에 휩싸인 석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나리야, 하선 이모, 무슨 일이에요? 왜 울고 계세요?” 나리는 그제야 눈물을 닦아내고 차분히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고모랑 오랜만에 만나서 얘기하다 보니, 헤어지려니 아쉬워서 그래.” 그 말을 듣자 석진과 은후는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별일 아니었구나.’ 둘의 긴장했던 얼굴이 서서히 풀어졌다. “어차피 하선 이모가 H 시에 계시니까 자주 뵈면 되잖아. 너무 멀지도 않은데.” 석진이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송하선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 둘이 아직도 아무것도 모르고 있구나... 나중에 알게 되면 대체 어떤 반응일까?’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말하려다, 나리가 먼저 분위기를 바꾸었다. “호연이도 같이 왔네? 무슨 일이야?” 나리는 고개를 돌려 호연을 바라보며 자연스럽게 물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석진과 은후는 약간 당황한 기색으로 서둘러 대답했다. “오늘 추석이잖아. 호연이 혼자 보내기 좀 그래서, 우리랑 명절 같이 보내려고 데려왔어.” “맞아. 너도 오해하지 마. 너한테도 전화했는데 네가 안 받았잖아.” 둘의 서두르는 변명에 나리는 속으로 씁쓸하게 웃었다. ‘그렇게 급하게 말할 필요는 없는데...’ 예전에 추석이면 두 사람은 항상 나리를 서로 데려가 명절을 지내려고 경쟁을 벌였다. 이 명절은 가족과 함께 보내는 날이기에, 자신이 데려가는 여자는 곧 가족으로 인정받는 여자를 의미했다. 결국 매번 나리는 유씨 가문의 본가에 갔다가 지씨 가문의 본가에 들르는 방식으로 하루를 보냈었다. 하지만 올해 추석, 두 사람은 나리가 아닌 호연을 데려왔다. ‘이게 무슨 의미인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제 알겠네.’ 나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대신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알았어. 잘했네. 다들 즐겁게 보내. 난 이제 짐 싸러 가야겠다.”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후 걸음을 돌려 엘리베이터 쪽으로 향했다. ‘이제 더는 저 세 사람 사이에 끼어들지 않을 거야.’ 그녀는 그렇게 마음을 정리했다. 그때, 석진과 은후의 목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나리!” “나리야!” 제8화 나리가 돌아서자, 석진과 은후는 그녀가 화가 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석진은 몇 걸음 앞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짐 정리는 네가 안 해도 돼. 너무 많아서 힘들잖아. 나중에 내가 집에 기사 불러서 새집으로 같이 옮기자.” 은후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맞아, 혼자 하기엔 힘들 거야. 우리와 같이하면 돼.” 둘의 배려 넘치는 말에, 나리는 순간 두 사람의 얼굴에서 어릴 적 자신만 바라보던 그들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땐 모든 게 참 단순했는데.’ 그 시절, 서로 웃고 떠들던 장면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린 시절의 약속은, 결국 다 헛된 말뿐이었나.’ 나리는 이내 시선을 돌려 호연을 바라보며 고개를 가볍게 저었다. “괜찮아. 짐은 내가 직접 정리할게. 내가 할 일이니까.” 그녀는 단호하게 말한 뒤, 두 사람의 반응을 신경 쓰지 않고 그대로 뒤돌아 걸어 나갔다. ... 집에 돌아온 나리는 남은 짐을 정리하며 분주한 시간을 보냈다. 정리를 끝낸 뒤 샤워하고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전화벨이 울렸다. 화면에 뜬 이름은 호연이었다. 통화를 받자마자, 호연의 달콤하고 가벼운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러나왔다. [언니, 오늘 밤에 나 석진 오빠랑 은후 오빠 집에 다녀왔어요. 오빠들의 부모님이 저한테 정말 잘해 주시더라고요.] 그녀의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우쭐함이 섞여 있었다. [근데 있잖아요, 오빠들 부모님이 오늘 저한테 각각 집안의 가보를 꺼내 주셨어요. 이게 무슨 뜻인지... 혹시 제가 이제 그 집안의 며느리가 된다는 걸 의미하는 거 아닐까요?] 호연의 말을 듣는 순간, 나리는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았다. 나리는 조용히 숨을 고르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호연아, 너랑 그 두 사람 사이의 일에는 나는 관심 없어. 굳이 내게 이런 말 전하지 않아도 돼.” 나리의 목소리는 차갑고 단호했다. 그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전화를 끊었다. ... 떠나기 전날, 나리는 오랜만에 집 밖으로 나갔다. 오늘은 특별히 고설아와 만나기로 약속했기 때문이다. H 시에 오래 살았지만, 나리의 친구는 많지 않았다. ‘이것도 그럴 수밖에 없지. 어릴 때부터 석진이랑 은후가 내 주변 사람들을 하나하나 다 막아버렸으니까.’ 그녀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남자 친구는 물론, 여사친조차도 쉽게 사귈 수 없었다. 석진과 은후는 늘 나리의 곁을 맴돌며 말했다. “나리야, 우리가 있잖아. 너한테 우리만 있으면 충분하지 않아? 너는 너무 좋은 애라서 여자애들도 널 좋아할까 봐 걱정돼.” 석진과 은후의 지나친 집착은 때로는 나리를 답답하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집착 속에서 자신을 향한 진심을 느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두 사람이 먼저 나리를 멀리 밀어내고 있었다. ... 새로 오픈한 서양 레스토랑. 고설아는 이미 자리에 앉아 나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리가 도착하자마자, 설아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녀를 꽉 끌어안았다. 나리가 곧 S 시로 떠난다는 사실에 설아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나리야, 네가 이렇게 갑자기 S 시로 돌아가서 결혼한다니... 정말 아쉽고 섭섭해.” 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아쉬움을 드러냈다. “난 솔직히 네가 석진이나 은후 중 한 명이랑 결혼해서 H 시에 계속 남을 줄 알았는데. 그랬다면 우리 자주 만날 수 있을 텐데.” 나리는 설아의 말을 듣고 살짝 미소 지었다. “둘에겐 다른 선택이 있고, 나도 다른 길이 있는 거지.” 그녀의 담담한 대답에 설아는 기운이 빠진 듯 표정이 굳어졌다. 그러다 호연을 떠올린 설아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말했다. “너, 그 서호연한테 그렇게 잘해줬잖아. 근데 그 애가 결국엔...” 하지만 설아의 말을 끝까지 듣기도 전에 나리가 미소를 지으며 가로막았다. “됐어. 그런 하찮은 애 얘기하면서 시간 낭비하고 싶지 않아. 어차피 내가 결혼하면 그 애를 다시 볼 일도 없겠지. 이제 그 애가 뭘 하든 나랑은 상관없어.” 나리의 단호한 말에 설아는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그 순간, 레스토랑 입구에서 호연이 들어왔다. 나리와 설아의 테이블은 입구 바로 옆에 있었기에, 호연은 두 사람이 나누던 대화를 어렴풋이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호연은 대화의 전부를 듣지 못했기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나리 언니, 누가 결혼한다고요? 저도 초대받을 수 있어요? 사실 전 아직 결혼식에 한 번도 못 가봤거든요!” 나리는 살면서 호연처럼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과의 경계선을 무시하는 사람은 보기 드물었다. 하지만 호연의 이런 행동도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게다가 곧 떠날 예정이라 그런지, 전혀 화가 나지 않고 그저 평온하게 상황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옆자리의 설아는 참지 못했다. 그녀는 손에 쥔 나이프와 포크를 탁자 위에 소리 나게 내려놓더니, 매서운 눈길로 호연을 노려보며 말했다. “내 결혼식이야! 네가 왜 거기 올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이 정도면 답이 됐지?” 이어진 설아의 말은 더 직설적이었다. “야, 너 진짜 예의라는 걸 모르냐? 우리와 네가 무슨 사이라도 돼? 뭘 그렇게 매사가 다 궁금해? 너 혹시 길 가는 음식물 쓰레기차 지나가면 그 냄새 맡고 간 보고 싶어지는 거 아니야?” 설아의 목소리는 다소 컸고, 말투는 너무나도 날카로웠다. 그 말에 호연은 몸을 움츠리더니, 금세 눈물을 또르르 흘렸다. 그녀는 울먹이며 뒤돌아서서 방금 막 레스토랑에 들어선 석진과 은후를 향해 눈길을 보냈다. 그 눈빛에는 ‘구해주세요’라고 적혀 있는 듯했다. 석진은 상황의 전말을 제대로 알지 못했지만, 들어서자마자 눈물 흘리는 호연의 모습을 보자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그는 한걸음에 다가와 호연을 품에 안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오빠가 있는데 네가 가고 싶은 결혼식이라면, 누구 결혼식이든 갈 자격이 있어.” 은후는 한 발 더 나가 말했다. “맞아. 울지 마. 결혼식이든 뭐든 너 하고 싶은 거 다 해. 네가 별이라도 원하면, 오빠가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따 줄게. 그런 말에 신경 쓰지 마.” 두 사람은 호연을 감싸며 그녀를 위로했다. 석진과 은후의 따뜻한 말과 행동 덕분에 호연은 결국 환하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여전히 자신이 두 사람에게 특별한 존재라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제9화 말이 끝나자, 석진과 은후는 호연을 데리고 나리가 앉은 테이블의 바로 옆에 자리를 잡았다. 두 사람은 서로 경쟁이라도 하듯 호연에게 음식을 챙겨주며, 호연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애정과 배려가 가득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설아는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설아는 손에 든 포크로 스테이크를 쿡쿡 찔러대더니, 결국 고기를 으깨버렸다. 하지만 나리는 여전히 태연한 모습이었다. ‘늘 그랬듯이, 신경 쓰지 않겠다는 거지.’ 설아는 한숨을 내쉬며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호연과 함께 레스토랑을 떠났다. 나리는 설아와 작별 인사를 나눈 뒤 집으로 돌아갔다. ... 그날 밤, 석진과 은후는 끝내 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나리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오든지 말든지, 이제 나한텐 중요하지 않아.’ 그녀는 마지막 짐을 정리하며 분주히 움직였다. 다음 날 아침, 밖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나리는 석진과 은후가 돌아왔음을 알았다. ‘오늘은 이사하는 날이니까, 이제야 돌아왔네.’ 그녀는 고개를 들어 밖을 바라보지 않았다. ‘하지만 둘이 모르는 건, 그 새집엔 내가 없다는 거지.’ 밖에서는 짐을 옮기는 소리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분주하네. 나와 상관없지만.’ 나리는 무심하게 자신의 짐을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바로 그때, 장혜정의 전화가 걸려 왔다. 전화기를 들어 통화를 받자, 어머니의 따뜻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 비행기 도착시간 몇 시야? 엄마가 마중 나갈게.] 나리는 잠시 앱을 열어 항공권 정보를 확인한 뒤 조용히 대답했다. “아마 저녁 7시쯤 도착할 것 같아요.” 그 순간, 방문이 불쑥 열렸다. 나리는 고개를 돌려 문 쪽을 바라봤다. 석진과 은후가 문 앞에 서 있었다. 은후가 무심하게 물었다. “누구랑 통화하고 있어?” 나리는 바로 전화를 끊고 차갑게 대답했다. “아무도 아니야.” 그녀의 냉랭한 목소리가 두 사람의 귀에 스치자, 석진과 은후는 잠시 멍해졌다. ‘요즘 들어 나리가 왜 이렇게 냉정하게 변했지?’ 호연이 나타난 뒤, 나리는 두 사람에게 점점 더 차가워지고 있었다. 석진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나리의 달라진 모습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내가 뭘 잘못한 걸까?’ 그는 결국 입을 열었다. “나리야, 호연이는 너랑 달라. 그 애는 집안 사정이 안 좋아서 어릴 때부터 아주 힘들게 살았잖아. 그래서 우리가 도와주는 거야. 다른 뜻은 없어.” 은후도 곧바로 말을 덧붙였다. “맞아. 우리는 그냥 그 애가 안쓰러워서 그러는 거야. 그리고 애초에 호연이를 우리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너였잖아. 너 설마 질투하는 거야?” 나리는 여전히 평온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런 말은 나한테 왜 하는 건데?” 그녀의 무심한 반응에 두 사람은 동시에 외쳤다. “네가 신경 쓰고 있으니까!” 셋이 어릴 적부터 함께 자라며, 오랜 세월 동안 쌓인 서로에 대한 이해와 호흡이 있었다. 석진과 은후는 나리가 한마디만 하면 그다음 말이 무엇인지 바로 알았고, 나리가 손을 내밀기만 하면 그녀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 둘이 정말 날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하지만 두 사람은 점점 나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나리는 차갑고 담담한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시선은 마치 낯선 사람을 대하듯 냉정했다. “내가 신경 쓴다고? 아니, 전혀. 너희가 호연이를 친구로만 생각한다고 했잖아. 나도 너희랑 친구일 뿐이고. 그런데 내가 뭘 신경 쓴다는 거야?” 나리의 담담한 말에 두 사람은 순간 말문이 막힌 듯 입을 열지 못했다. 석진은 한동안 침묵을 지키더니, 끝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리야, 너도 알잖아. 내가 원하는 건... 친구 같은 사이가 아니야.” 은후는 더 이상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터뜨리듯 말했다. “그래, 내가 너한테 몇 년 동안 어떻게 했는데? 너 진짜 우리가 그냥 친구라고 생각해?” 둘의 말을 들은 나리는 속으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물론 알아. 너희가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내가 모를 리 없잖아.’ 두 사람은 나리를 좋아했고, 함께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보여준 행동은 달랐다. ‘호연을 나보다 더 우선순위에 두고 나를 상처 입히는 게... 너희가 말하는 사랑이라면, 난 그걸 감당할 수 없어.’ 나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담하게 말했다. “그래. 친구 말고 다른 사이가 될 수는 있겠지.” 그녀의 말에 석진은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다른 사이...?’ 그는 불안한 기색으로 나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나리는 두 사람에게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았다. ‘다른 사이... 곧 낯선 사람이 되는 거지.’ 그녀의 말은 뭔가를 암시하듯 차가웠다. 석진은 마음속에서 불안이 치솟는 것을 느끼며 입을 열려 했지만, 그 순간 집사 겸 운전기사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짐을 옮기겠습니다.” 기사는 나리의 짐을 들고 나갔고, 나리는 석진과 은후를 지나쳐 방에서 천천히 나왔다. 두 사람은 여자의 뒷모습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서 있었다. ... 나리는 짐을 옮기려는 기사를 손으로 막으며 말했다. “먼저 가세요. 짐은 제가 직접 옮길게요.” 그 말을 들은 은후는 이내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많은 걸 네가 혼자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만 고집부려. 내가 잘못했어. 미안하다. 됐지?” 하지만 나리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정말로 필요 없어. 너희는 가서 호연이나 도와줘. 그 애는 혼자 살잖아. 게다가 여자라 힘도 약하고 뭐 하나 제대로 못 하잖아. 그 애가 너희 도움을 더 필요로 할 거야.” 나리의 말은 겉으론 평온했지만, 어딘가 냉소적인 느낌이 묻어나왔다. 그걸 눈치챈 석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런데 바로 그때, 호연의 전화가 걸려 왔다. [석진 오빠, 은후 오빠, 저 좀 도와주시면 안 돼요? 저 혼자선 진짜 아무것도 못 하겠어요... 제가 너무 서툴러서...] 호연의 여린 목소리는 수화기를 통해 또렷이 들려왔고, 그 방에 있던 모두의 귀에 꽂혔다. 그 목소리에는 의도적으로 담긴 무력함과 간절함이 느껴졌다. 석진과 은후는 서로 눈길을 교환하며 나리를 한 번 더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여전히 단호했고, 자신에게 도움을 주겠다는 둘의 마음마저 차단하려는 듯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은 호연을 돕기로 결정했다. 석진이 전화를 끊으며 말했다. “호연이 혼자선 무리겠지. 내가 가서 도와줄게.” 은후도 차 키를 집으며 따라나섰다. “나도 같이 갈게. 얼른 가자.” 출발하기 전, 석진은 다시 돌아서며 덧붙였다. “나리야, 지금은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너한텐 안 들리겠지. 하지만 이사 끝나면 식당 예약해 뒀으니까 우리 넷이 같이 저녁 먹자. 호연이 얘기도 그때 제대로 설명할게.” 나리는 대꾸하지 않았고, 석진은 답을 기다리지 않은 채 서둘러 나갔다. 두 사람이 문을 나서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리는 조용히 입가를 비틀어 웃었다. ‘나중에? 무슨 나중에. 우린 이제 더는 나중이 없어.’ 그녀는 차가운 눈빛으로 그들이 사라지는 방향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동안 너희가 보여준 행동들로 대체 뭘 더 설명하겠다는 거야?’ 그때, 나리의 핸드폰이 다시 진동했다. 호연이 보낸 메시지가 화면에 떠올랐다. [언니, 미안해요. 제가 한마디 하니까 또 석진 오빠랑 은후 오빠가 언니를 두고 저한테 와버렸네요. 앞으로 우리 네 명이 함께 살게 될 텐데, 잘 부탁드려요!] 그 도발적인 메시지를 본 나리는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손끝으로 몇 글자를 입력했다. [너희 셋이 알아서 잘 지내라. 난 빠질게.] 메시지를 보내는 동시에, 그녀는 호연의 연락처를 바로 차단했다. 그러고는 석진. 마지막으로 은후까지. 그렇게 나리의 핸드폰 연락처 목록에서 세 사람의 흔적은 모두 지워졌다. 짐을 마저 챙긴 나리는 거실에 잠시 서서 집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수많은 추억이 담긴 공간이었지만, 이제 과거는 과거일 뿐이었다. 나리는 머뭇거리지 않고 캐리어를 끌고 문을 나섰다.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미련 없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