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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안개 속에 잠겨 널 잊었다
“고모, 저 생각해봤는데 민 씨 가문을 떠나서 고모랑 해외에서 함께 살려고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원정숙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안도감, 그...
Chương (1)
第1章
“고모, 저 생각해봤는데 민 씨 가문을 떠나서 고모랑 해외에서 함께 살려고요.”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원정숙의 목소리에는 기쁨과 안도감, 그리고 어딘가 간절한 부탁이 담겨 있었다.
[그래, 단비야. 내가 비자 준비를 바로 시작할게. 한 달 정도는 걸릴 것 같으니 조금만 기다려줘. 그동안 친구들도 많이 만나. G국으로 이주하면 다시 만나기 어려울 테니 작별 인사는 꼭 제대로 해야 해.]
[특히 삼촌 말이야. 삼촌은 너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키워줬잖니. 그 은혜는 절대 잊으면 안 돼. 진심을 다해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해.]
“네.”
원단비는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베란다로 향했던 그녀는 천천히 거실로 돌아왔다. 그러다 무심코 테이블 위에 놓인 사진 한 장에 시선이 멈췄다.
제1화
17살의 민태건은 그네 뒤에 서서 활짝 웃으며 7살 난 원단비를 밀어주고 있었고 그녀의 치맛자락은 바람에 휘날려 화원의 튤립들을 스치고 있었다.
비록 여러 해가 지났지만 원단비는 여전히 사진을 찍은 그날 얼마나 즐거웠는지 기억이 생생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 시절은 지났고 원단비와 민태건은 다시는 그때로 돌아갈 수 없었다.
이 생각에 원단비의 눈가에는 약간의 슬픔이 스쳤고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며 옛 생각에 잠겼다.
원씨 가문과 민씨 가문은 대대로 사이가 좋았고 민태건은 원단비보다 10살이 많았는데 그 촌수로 인해 원단비는 어릴 때부터 민태건을 삼촌이라고 불렀다.
원단비가 7살이 되던 해, 그녀의 부모님이 의외의 비행기 사고로 사망하자 민태건은 원단비를 민씨 가문에 데려와 자신의 곁에서 키우기로 했다.
아마도 어려서 부모님을 잃은 원단비가 가여웠던 건지 민태건은 시시각각 그녀를 곁에 두고 모든 것은 자신이 직접 해주곤 했다.
매일 원단비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며 재우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직접 학교에 데려가고 데려왔다.
뿐만 아니라 원단비가 신기하고 재밌는 물건을 보기라도 한다면 모두 사주곤 했었다.
소년은 그렇게 하루하루, 조금씩 조금씩 자신이 데려온 콩알 만하던 아이를 어엿하고 아름다운 소녀로 키워냈다.
민태건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인해 원단비는 어릴 때부터 그에게 달라붙곤 했다.
소녀의 감정이 싹트는 나이가 되자 원단비는 너무나 당연한 듯 헤어나올 수 없을 정도로 그녀와 함께 자란 민태건을 좋아하게 되었다.
원단비가 17살이 되던 해, 민태건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그녀에게 대형 생일파티를 열어주었다.
파티에서 민태건은 술에 취했고 원단비는 그런 민태건을 부축하여 방에 데려갔다.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눈앞에 있는 상황에 원단비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 민태건에게 입을 맞추고 말았다.
순간, 민태건은 눈을 번쩍 떴고 바로 원단비를 소파의 반대편으로 밀어냈다.
원단비는 그 뜻을 헤아리지 못했고 하늘이 준 좋은 기회라고 생각하고 기회를 틈 타 민태건에게 마음을 고백했다.
하지만 민태건의 눈에 이건 인륜에 어긋나는 대역무도한 일이었다.
민태건은 황당하여 한바탕 화를 냈다.
“원단비! 내가 네 삼촌이라는 거 몰라?”
“제가 삼촌이라고 부르는 건 맞지만 저는 원씨이고 삼촌은 민씨잖아요. 우린 아무런 혈연관계도 없잖아요.”
원단비가 여전히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는 모습에 민태건은 낯빛이 어두워졌다.
“난 너보다 10살이나 더 많아! 넌 겨우 17살이니 혈육의 정과 사랑을 구분하지 못하는 거야. 좋아한다는 게 뭔지도 모르고!”
원단비는 언제나 민태건의 말에 따랐지만 이 일만큼은 유난이 고집을 부렸다.
“그러니까 내가 어리다고 거절하는 거예요? 괜찮아요, 저도 클 거니까요. 증명할게요. 전 사랑을 구분할 줄 알고 좋아한다는 게 뭔지도 알아요!”
이 다툼이 마지막에 어떻게 끝났는지 원단비는 이미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원단비는 그녀의 생일이 되면 꼭 한 번씩 민태건에게 고백하곤 했다.
민태건은 매년 원단비를 한 번씩 거절했지만 그녀는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한 달 뒤면 원단비의 21번째 생일이다.
하지만 올해 원단비는 고백하지 않을 생각이다.
한 달 전 민태건이 여자친구를 데려와 소개했기 때문이다.
원단비는 마음이 비참했지만 눈물을 참으며 자신을 여자친구로 자극해 체념시키려는 것이 아니냐고 민태건에게 물었다.
하지만 민태건은 담담하게 원단비를 한 번 쳐다보더니 비할 데 없이 싸늘한 말투로 말했다.
“착각하지 마. 나도 나이가 있고 여자친구를 사귀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정상적인 일이야.”
민태건 눈 속의 태연자약함은 원단비를 마음을 깊이 찔렀다.
원단비는 밤새 울었고 머릿속은 온통 혼란스러웠으며 요 몇 년 동안 있었던 일들을 계속 회상해 보았다.
날이 밝았을 때, 멀리 해외에 계신 고모 원정숙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단비야, 출국해서 나와 함께 살고 싶지 않니?]
[사실 원씨 가문에 사고가 났을 때 난 널 데려오고 싶었지만 그때의 난 사업도 불안정했고 산후 우울증까지 더해져 한동안은 혼자 스스로를 돌볼 수조차 없어서 방치했어.]
[하지만 너도 이제 컸고 민씨 가문에 남아 있는 건 불편할 거야. 고모도 이제 괜찮아졌으니 여기 와서 고모 가족과 함께 살지 않을래?]
원단비는 이 메시지에 답장하지 않았다.
원단비는 민태건을 떠나고 싶지 않았고 더 노력해보려 했던 것이다.
하지만 보름 동안 민태건은 마치 자랑이나 하는 것처럼 수시로 여자친구 진민서를 데리고 원단비의 눈앞에 나타났다.
손을 잡고, 포옹을 하고, 키스도 했으며 연인들만 할 수 있는 스킨십은 모두 했다.
어젯밤, 민태건은 진민서를 밤새 집에 머물게 했으며 그녀를 자신의 방에 데려갔다.
원단비는 아래층에서 3시까지 멍하니 앉아있다가 민태건 방의 불이 꺼지는 것을 보았고 안에서는 야시시한 소리까지 들려왔다.
원단비는 한사코 입을 막고 소리 없는 눈물로 소파를 적셨다.
그 순간, 원단비는 마침내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민태건을 좋아하는 걸 포기하기로 말이다.
제2화
문밖에서 갑자기 들려오는 발자국 소리에 원단비는 사색을 멈추었다.
원단비가 소리를 따라 고개를 들어 보니 마침 민태건과 눈이 마주쳤다.
홀로 식탁에 앉아있는 것을 본 민태건은 무의식적으로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는데 곧 11시였다.
민태건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한마디도 하지 않고 위층으로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인사 한마디 없었고 마치 낯선 사람처럼 차가웠다.
원단비는 가슴이 시큰시큰했지만 참지 못하고 민태건을 불렀다.
“삼촌, 저녁은요?”
그러나 민태건은 발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싸늘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민서랑 먹었어. 내가 여러 번 말했지, 나 기다릴 필요 없다고.”
마지막 목소리는 문을 닫는 굉음에 묻히고 말았다.
원단비의 마음도 따라서 철렁했고 단지 눈이 뻑뻑할 뿐이었다.
전에 민태건이 원단비에게 이런 말투로 이야기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민태건은 원단비가 가족을 잃은 후 혼자 있는 걸 매우 두려워하고 혼자 밥 먹는 걸 매우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학업이든 일이든 아무리 바빠도 늘 돌아와 원단비와 함께 식사를 했으며 출국조차도 항상 갔다가 바로 돌아오곤 했다.
오직 원단비가 입맛이 없거나 아플 것이 걱정되어 말이다.
10여 년 동안 예외는 없었다.
하지만 원단비가 처음 고백한 뒤로 모든 것은 변했다.
민태건은 주동적으로 원단비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고 끊임없이 야근과 출장을 반복하며 그녀와의 만남을 피했다.
더군다나 더 이상 원단비에게 깜짝 선물도 준비하지 않았으며 그녀에 대한 모든 편애를 철회했다.
그리고 진민서가 나타난 후, 민태건이 원단비를 보는 눈빛은 더욱 차가워졌고 마치 낯선 사람 같았다.
원단비도 그 연유는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원단비는 식어가는 음식을 젓가락으로 집어 삼킬 수밖에 없었다.
식탁에는 여러 가지 요리가 있었지만 원단비는 오히려 맛이 씁쓸하게 느껴졌다.
배를 채우고 난 원단비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나서야 민태건의 방문 앞에 가서 가볍게 노크를 했다.
민태건은 눈살을 찡그리며 문을 열었고 말투도 그리 살갑지 않았다.
“말했잖아, 별일 없으면 나 귀찮게 하지 말라고.”
원단비는 입술을 오므리고 열손가락을 꼬며 말했다.
“삼촌, 저 방을 바꾸고 싶어요.”
민태건읜 눈에는 약간의 의아함이 스쳤지만 이 일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바꾸고 싶으면 바꿔.”
원단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묵묵히 몸을 돌려 침실로 돌아왔다.
큰 유리창과 각양각색의 정교한 가구들, 옷과 신발 그리고 가방들이 가득한 옷방을 보면서 원단비는 새삼 마음속으로 황홀함을 느꼈다.
이 침실은 별장 전체에서 면적이 가장 크고 채광이 가장 좋으며 전에는 민태건이 쓰던 침실이었다.
원단비가 민씨 가문으로 이사를 온 날, 민태건은 주동적으로 이 침실을 그녀에게 양보했다.
그리고 원단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우리 단비는 공주니까 가장 좋은 방에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제 원단비는 곧 떠날 것이고 진민서가 언제 들어와 살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 고작 손님인 양녀 따위가 무슨 자격으로 주인에게나 어울리는 안방에 살 수 있겠는가?
때문에 원단비는 방을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다.
첫째는 자리를 양보하기 위해서였고 둘째는 물건들을 정리하기 위함이었다.
다음날 점심, 원단비는 모든 물건을 복도 끝의 작은 방으로 옮겼다.
이곳은 원래 민태건의 서재였던 곳이다.
방을 깨끗이 정리한 후, 원단비는 비자를 발급받기 위해 증명서류들을 가지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거실을 지날 때, 원단비는 민태건에게 몸을 살짝 굽혀 인사했고 전처럼 반갑게 인사하지 않았다.
민태건은 원단비의 조용한 모습이 매우 익숙지 않았다.
원단비가 시선을 늘어뜨리고 말없이 밖으로 나가는 모습에 민태건은 그녀가 많이 변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고 참지 못하고 소리쳤다.
“밖에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어딜 가는데? 데려다줘?”
이미 아주 오랫동안 민태건이 먼저 데려다준다는 말을 듣지 못했던 원단비는 잠시 멍해졌다.
“오늘 크리스마스인데 데이트하러 안 가요?”
원단비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민태건은 잘 들리지 않는 듯 다시 물었다.
“뭐라고?”
원단비는 손을 움켜쥐고 시선을 늘어뜨렸다.
“방금 뉴스에서 봤어요. 옥션에서 몇십억짜리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낙찰받으셨다면서요. 설마 오늘 민서 언니한테 주려고 하신 건가요?”
민태건은 제자리에 멍하니 있다가 무의식중에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건 내가 너...”
따르릉-하는 초인종 소리가 민태건의 말을 끊었다.
곧이어 샤넬풍의 니트 치마에 긴 머리 웨이브는 허리까지 드리워졌고 정교한 화장을 한 진민서가 들어왔다.
진민서는 민태건의 손을 잡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태건 씨,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을 준비했는데 뭔지 맞춰봐.”
모든 것은 원단비의 생각과 같았다.
원단비는 고개를 숙이고 입가에는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떠날 결심을 하고 나니 그들이 데이트하러 간다는 말을 듣고도 원단비는 예전처럼 마음이 아프지 않았고 몇 걸음 뒤로 물러서 길을 열어주었다.
민태건도 더 이상 설명하지 않고 진민서를 데리고 외출하는 김에 원단비도 함께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함부로 가지 마. 어디 가는데? 내가 데려다 줄게.”
원단비는 멍하니 있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고마워요, 삼촌.”
원단비가 이번엔 진심으로 민태건에게 고마움을 전했다.
또한 진심으로 민태건을 삼촌이라 불렀다.
제3화
원단비는 평소 외출을 자주 하지 않았고 대부분 화실에 틀어박혀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폭설이 내리는 날 원단비가 외출을 한다고 하니 진민서도 왠지 궁금해졌다.
“단비야, 너 남자친구도 없는데 이런 날에 나가서 뭐하는 거야?”
원단비는 자신이 떠난다는 사실을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전, 전 볼일이 있어서요.”
어차피 비자처에 도착하면 그들도 아마 알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진민서도 더 이상 묻지 않았고 고개를 돌려 민태건과 오늘의 스케줄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뒷좌석에 사람이 앉아 있는 것을 잊은 듯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빨간 신호등이 걸린 틈을 타 진민서는 립스틱을 꺼냈고 민태건에게 건네며 발라달라고 했다.
민태건도 거절하지 않고 진민서의 얼굴을 받치고 부드럽고 섬세하게 손을 움직였다.
두 사람의 몸은 거의 붙을 것 같았고 원단비는 몸을 돌려 창밖으로 흩날리는 눈을 바라보았다.
목적지에 거의 도착할 무렵, 진민서가 갑자기 집에 가서 겉옷을 챙기고 싶다고 했다.
네비게이션에서 2킬로메터밖에 남지 않았다고 표시됨에도 민태건은 생각도 하지 않고 같은 방향이 아니라며 원단비에게 내려서 다른 차를 타라고 했다.
원단비는 씁쓸하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혼자 차에서 내렸다.
검은 카이엔이 쏜살같이 달려 온통 눈보라가 튀었다.
길에는 사람도 차도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원단비는 눈을 밟으며 2킬로미터를 걸어 비자처에 도착했고 모든 자료를 제출했다.
원단비가 일을 마치고 나오자 입구에서 고등학교 때의 담임선생님을 만났고 두 사람은 몇 마디 인사를 나누었다.
원단비가 해외로 이주한다는 말을 들은 담임선생님의 얼굴에는 의아한 표정이 번쩍였다.
“해외로 가면 다시 안 돌아온다고? 네 삼촌도 허락했니?”
원단비는 왜 갑자기 민태건 말을 꺼내는 건지는 모르지만 일단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허락했어요. 저와 삼촌은 혈연관계도 없고 저도 이제 컸으니 계속 귀찮게 할 순 없잖아요. 해외로 나가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는 것도 좋고요.”
담임선생님은 탄식하며 고개를 끄덕이시더니 잠시 감개무량한 듯했다.
“혈연관계가 없지만 민태건 씨는 너에게 정말 잘해줬었지.”
“당시 시합에 참가한 네가 다른 학교 애들한테 표절했다고 신고 당하고 모함당할 때 네 삼촌은 맹장염이 도졌지만 수술대에서 내려오자마자 현장에 도착해 네 편을 들어주었지.”
“네가 학교에서 넘어졌을 때도 네 삼촌은 몇 억짜리 계약도 포기하고 바로 달려와 널 병원에 데려다 주었고 말이야.”
“네가 양아치들에게 시달릴 때도 네 삼촌이 사람을 시켜 그들을 혼냈어.”
담임선생님이 옛일을 이야기하는 것을 들으면서 원단비도 잠시 옛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마지막쯤 이르러 담임선생님께서는 원단비의 손을 잡고 민태건의 은혜를 잊지 말고 잘 보답하라며 간곡히 당부하셨다.
원단비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원단비는 확실히 떠나기 전 이 몇 년 동안 민태건의 은혜를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민태건에게 있어서 가장 좋은 보답은 원단비가 떠난다는 소식일 것이다.
그러면 민태건은 더 이상 원단비가 포기하지 않을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을 테니 말이다.
집에 도착한 뒤 원단비는 눈에 젖은 옷을 갈아입고 책상 앞에 앉아 계산을 시작했다.
원단비는 민씨 가문에 이렇게 오랫동안 살면서 매년 매달 쓰는 돈에 유의하고 있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대략적인 값을 추려낼 수 있었다.
구체적인 용도가 있는 것뿐만 아니라 많은 보이지 않는 비용은 계산하기 어려우므로 원단비는 그 수치의 3배로 반환할 계획이었다.
오전에 원단비는 이미 전에 민태건이 그녀에게 주었던 모든 선물들을 정리하여 거래 사이트에 올려두었다.
그후 원단비는 부동산 회사에 연락하여 원씨 가문의 저택도 경매에 내놓았다.
이 모든 것을 마치고 원단비는 무거운 짐을 벗은 듯 침대에 누웠는데 갑자기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열어보니 진민서가 보낸 10여 장의 사진과 한 통의 메시지였다.
[단비야, 나와 네 삼촌은 하와이에서 며칠 놀다 갈 거야. 혼자 집에 잘 있어야 해.]
볼 필요도 없이 원단비는 진민서가 보낸 사진은 민태건과 꽁냥거리는 사진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필경 두 사람은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후 테이트 할 때마다 진민서가 이런 사진 한 무더기를 보내곤 했으니 말이다.
전에 이런 사진들을 볼 때면 원단비는 불면증에 시달리고 울어서 두 눈은 빨갛게 붓곤 했다.
하지만 지금 원단비는 이미 민태건을 가족으로만 대하기로 결심했기에 더 이상 진민서에게 자극을 받지도 않았다.
게다가 진민서가 고의인지 아니면 별 뜻 없는 건지 원단비는 추측하기도 귀찮았고 평온하게 한 마디 대답했다.
[알겠어요, 재밌게 보내세요.]
제4화
5일 후, 민태건은 진민서를 데리고 돌아왔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원단비의 시선은 진민서 목에 걸려있는 눈부신 목걸이로 향했다.
원단비는 한 번 보고는 눈을 늘어뜨렸다.
원단비는 자신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고 그 목걸이는 역시 진민서에게 줄 것이 맞았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애초에 삼촌이 말하려다 말았던 건 무슨 말이 하고 싶었던 걸까?’
민태건 앞에서 진민서는 줄곧 원단비를 다정하게 대해주었고 주동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았다.
“단비야, 요 며칠 집에 혼자 있어서 심심했지? 내가 물건들 많이 사왔는데 네가 마음에 드는 게 있는지 좀 볼래?”
말하면서 진민서는 외투를 벗었고 원단비를 상자 더미로 끌고 갔다.
원단비는 고개를 저으며 연거푸 거절했지만 진민서는 약간 나무라는 듯한 눈길로 그녀를 한 번 보더니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뭘 사양하고 그래? 미래의 숙모가 너에게 선물 주는 거라고 생각해. 어때?”
“숙모”라는 두 글자를 들은 원단비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었고 한눈에 진민서 어깨와 목에 남겨진 키스자국이 들어왔는데 마음이 살짝 철렁했다.
진민서가 보낸 사진들 중에는 호텔의 큰 침대가 담긴 것도 있었는데 그때 원단비는 그것을 찍은 의도를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진민서에게 남겨진 흔적들을 보니 원단비는 순간 알아차렸고 눈을 떨구고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진민서는 한쪽으로는 원단비를 도와 상자를 뜯으면서 한쪽으로는 오늘 밤 연회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태건 씨, 심민주 아가씨의 성인 연회에 단비도 데려가자. 둘은 나이 차가 별로 나지 않으니 대화가 통할 거야.”
저녁 연회에 관한 말을 들은 원단비는 멍해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민태건이 원단비를 민씨 가문에 데려온 이후로 그녀는 어떤 연회에도 참가한 적이 없었다.
다른 이유가 아니라 단지 사람들이 뒤에서 혀를 놀리며 원단비를 기생충이라 놀렸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민태건은 고개를 저으며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자 진민서는 민태건의 손을 잡고 애교를 부리기 시작했다.
혼자 가면 심심하니 꼭 원단비와 함께 가야 한다며 말이다.
이에 민태건도 더 이상 고집 부리지 않고 못 말린다는 듯 동의했다.
두 사람의 다정한 모습에 원단비는 고개를 숙이고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민태건의 세계에서 진민서는 정말 특별한 존재였다.
민태건은 진민서를 위해서라면 전에 견지했던 모든 마지노선들을 내려놓을 것이다.
보아하니 민태건은 진민서를 정말로 좋아하는 것 같았다.
오직 민태건이 행복할 수만 있다면 설령 그의 곁에 있는 사람이 더 이상 원단비가 아니더라도 그녀는 이제 안심하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연회에서 술잔과 인사가 오고 갔다.
원단비는 혼자 구석에 서서 진민서를 위해 무수한 술을 대신 마시는 민태건을 보면서 묵묵히 손에 든 주스를 마셨다.
이때 몇 명의 소녀들이 웃으며 다가왔는데 실수로 원단비에게 와인을 쏟고는 연거푸 사과했다.
원단비는 이 일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았고 화장실에 가서 정리를 하려 했다.
가기 전, 원단비는 핸드폰과 가방을 민태건의 손에 건넸다.
10분 후, 원단비가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는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을 바라보는 민태건을 발견했고 말투도 약간 이상했다.
“네 고모가 방금 전화 와서 시간이 있냐고 묻던데? 네가 바쁘다고 했더니 나중에 다시 걸겠다고 하네.”
고모라는 두 글자에 원단비는 온몸이 뻣뻣해졌다.
다행히 출국한다는 말은 듣지 못한 듯했고 원단비의 표정은 그제야 많이 느슨해졌다.
민태건은 자연히 원단비의 이상한 낌새를 알아차렸고 참지 못하고 한 마디 더 물었다.
“너와 네 고모는 언제 연락이 된 거야?”
“2주 전에 고모가 할아버지 할머니의 사진을 좀 보내달라고 연락이 왔어요.”
원단비는 아무 핑계나 갖다 붙였고 이에 민태건은 안도한 듯 더는 의심하지 않고 옆으로 돌아 진민서의 흐트러진 헤어스타일을 정리해 주었다.
원단비도 핸드폰과 가방을 돌려받고 다시 구석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이때 높이 쌓인 샴페인 탑이 누군가에 의해 부딪혀 바로 앞의 원단비와 진민서를 향해 떨어지고 있었다.
“조심해!”
민태건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고 무의식적으로 두 사람 중 진민서를 안전한 곳으로 끌어와 품에 안았다.
펑!
큰 소리와 함께 샴페인 탑이 제자리에서 미처 반응하지 못한 원단비를 향해 와르르 무너졌다.
깨진 유리 조각이 사방으로 튀었고 원단비는 바닥에 쓰러진 채 피를 흘렸는데 흰색 드레스가 붉게 물들어 매우 소름 끼쳤다.
이 갑작스러운 사고는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진민서는 비록 다치지 않았지만 놀라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바닥에 피투성이가 된 원단비와 품에 안겨 놀라서 우는 진민서를 보면서 민태건은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결정을 내렸다.
“병원에 데려다 주십시오.”
민태건은 한 경호원에게 부탁한 후 진민서를 안고 현장을 떠났다.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원단비는 연민으로 가득 찬 시선 속에서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원단비가 상처를 다 치료하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새벽 1시였다.
의사는 원단비에게 10여 바늘을 꿰매어 준 후 입원을 권했지만 그녀는 거절한 채 약만 좀 가지고 돌아왔다.
민태건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원단비는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워 칠흑 같은 천장을 쳐다보며 멍하니 있었다.
몸 곳곳에서 느껴지는 따끔함에 원단비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3시가 거의 되어서야 원단비는 약간 잠에 들 수 있었다.
이때 갑자기 거실의 불이 켜졌다.
민태건은 온몸에 술기운으로 가득 찬 채 비틀거리며 위층으로 올라갔다.
민태건은 바로 침실로 들어가지 않고 가장 끝방, 바로 그의 서재였던 방문을 살짝 열었다.
잠버릇이 심한 원단비는 몸을 뒤척이다가 상처가 닿은 듯했고 꿈속에서 나지막한 목소리로 끙끙거렸다.
그리고 이 나지막한 목소리가 민태건의 주위를 끌었다.
민태건은 소리의 근원지를 찾아 침대 옆으로 향했고 몸을 숙여 침대 위에 사람을 품에 안았다.
한 손으로는 원단비의 잠옷을 헤쳐 가늘고 부드러운 그녀의 허리를 감쌌고 다른 한 손으로는 원단비의 턱을 들어 입을 맞추었다.
제5화
원단비는 깊이 잠 들지 않았던 터라 곧 인기척에 놀라 깼다.
민태건의 옷깃에서는 익숙한 코롱 향수의 냄새가 났고 원단비는 재빨리 그의 신분을 확정할 수 있었다.
‘삼촌?’
‘왜 갑자기 삼촌이 나한테 덮쳐서 입을 맞춘 거지?’
원단비는 온몸을 흠칫 떨었고 아직 채 반응하기도 전에 민태건의 쉰 목소리가 뜨거운 숨소리와 뒤섞여 들려왔다.
“민서...”
그 순간 원단비는 온몸이 뻣뻣해졌다.
그리고 물씬 풍기는 술냄새가 원단비로 하여금 지금의 상황을 더욱 명확히 느끼게 했다.
‘삼촌은 날 민진서로 착각한 거야.’
방심한 이 찰나, 민태건의 두 손은 점점 밑으로 내려갔다.
원단비는 너무나 당황했고 한쪽으로는 허리춤의 못된 손을 누르면서 다른 한쪽으로는 민태건을 밀어내려 했고 말투에는 긴급함이 가득했다.
“삼촌, 사람 잘 못 봤어요. 전 단비예요!”
민태건은 술에 취한 나머지 알아듣지 못한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원단비의 발버둥이 그의 욕구를 더욱 자극한 것일 지도 모르겠다.
민태건의 키스는 점점 더 거칠어졌고 원단비의 부드러운 입술을 머금고 가볍게 빨아들였다.
원단비는 거의 숨을 쉴 수 없을 지경이었다.
원단비는 급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고 저도 모르는 새에 거즈를 적셨는데 상처에 스며들어 따끔한 통증을 일으켰다.
“삼촌, 저를 아프게 했어요. 상처가 너무 아파요.”
알콜이 효과를 일으킨 건지 원단비의 외침이 작용한 건지 민태건은 몸이 약간 굳어 그녀의 두 손을 놓아주었다.
원단비는 얼른 옆으로 몸을 피해 신발을 신을 겨를 없이 쿵쾅거리며 거실로 달려가 담요를 싸맸고 날이 밝아서야 겨우 잠에 들었다.
다음날 오후, 원단비가 눈을 뜨자마자 눈앞에는 알 수 없는 표정의 민태건을 발견했다.
어젯밤의 일이 떠오른 원단비는 소파 구석으로 움츠러들었다.
원단비의 행동을 본 민태건의 눈에는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어젯밤 네가 날 방에 데려갔어?”
이 물음에 약간 어리둥절한 원단비가 설명을 하려는 찰나 민태건은 갑자기 눈살을 찌푸렸다.
민태건의 굳은 표정을 본 원단비는 입가에 쏟아져 나오는 “삼촌이 취했어요.”라는 말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몰래 입을 맞춘 전적이 있으니 원단비가 지금 어떻게 설명하건 민태건은 믿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원단비는 설명을 포기하고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마루에 두 사람의 그림자가 비쳤고 원단비는 맞은편의 그림자가 손을 들려는 것을 보고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다.
민태건의 손은 원단비의 머리 위에서 멈췄는데 아마도 그녀의 머리를 만지려는 것 같았다.
원단비는 완전히 굳어져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가득 찼다.
어렸을 때 매번 원단비가 가족을 그리워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울 때, 수없이 슬프고 쓸쓸할 때마다 민태건은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위로하곤 했다.
이건 거의 원단비와 민태건의 말하지 않는 암호 같은 거였다.
그러나 원단비가 17살이 된 이후로 이들은 거의 아무런 신체 접촉도 하지 않았다.
원단비는 숨이 멎을 정도로 긴장했다.
곧이어 민태건은 팔을 높이 들더니 원단비 뒤에 있는 캐비닛에서 와인 한 병을 꺼냈다.
알고 보니 모든 건 원단비의 착각이었던 것이다.
원단비는 스스로를 비웃었다.
급하게 팔아야 했기에 전에 사이트에 올렸던 물건과 저택 모두 시장가보다 낮았고 그로 하여 육속적으로 모두 팔려 나갔다.
카드에는 170억 정도가 모였는데 원단비가 상상했던 갚아야 할 액수와는 아직 몇 천만 원이 부족했다.
얼마 지나지 않으면 원단비는 곧 출국하게 될 것이고 남은 시간은 많지 않았지만 이 차액은 모으기 어려웠다.
원단비는 미술 전공이었는데 비록 신인이지만 그동안 상을 적지 않게 받았고 업계에서도 이름이 있는 편이었기에 전시회를 열어 그림을 팔 계획이었다.
하지만 원단비 혼자만의 힘으로는 단시간 내에 이루기는 어려웠고 민태건에게 부탁하기로 했다.
마침 옆에서 이 말을 듣고 있던 진민서의 얼굴에는 놀라움이 번쩍였고 웃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마침 나도 전시회를 준비하고 있는데 같이 하는 게 어때?”
원단비는 민태건을 바라보았는데 이의가 없는 것을 보고 승낙했다.
5일 후, 두 사람의 그림 전시회가 동시에 미술관에서 열렸다.
진민서는 10여년 간 미술을 배웠지만 이번에 처음으로 대형 전시회를 개최했기에 민태건은 유독 신경을 썼다.
민태건은 직접 수백 평방미터의 정면 홀을 진민서에게 안배해 주었고 온갖 수단을 동원하며 홍보하느라 애썼다.
전시회가 열리는 날 전시에 참석한 사회 유명인들, 문인들, 그리고 큰손들은 미술관 관객 유동량의 최고치를 갱신했다.
하지만 측면에 배치된 또 다른 미술관은 그렇게 운이 좋지 않았다.
10여 평방미터의 공간에 백 장에 가까운 그림들이 들어차 있어 사람들이 몸 움직일 틈도 없을 정도로 비좁아 아무도 참관하러 오지 않았고 경매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원단비는 입구에 서서 먼 곳의 떠들썩한 장면을 아득히 바라보았는데 눈에는 상실감과 암담함이 가득했다.
도와주러 온 몇몇 친구들이 원단비를 위로하려던 찰나, 방 안에서 갑자기 비명이 들려왔다.
“단비야, 큰일 났어!”
제6화
누군가 인터넷에 표절 사건을 폭로한 것이다.
그리고 해당 사건의 주인공은 바로 오늘 전시회를 개최한 원단비와 진민서였다.
핸드폰에서 열성적인 네티즌들이 만든 팔레트를 보면 두 그림은 화면과 내용, 구도와 색채까지 거의 모두 똑같다고 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신인 화가 원단비의 표절 의혹#이라는 주제가 실시간 검색어에 올라 화제를 모았다.
몇 명의 친구들은 원단비의 곁을 에워싸고 마치 뜨거운 솥 위의 개미처럼 발을 동동 굴렀다.
“어떻게 단비가 표절한 걸 수 있어? 이 그림의 교복은 분명 우리 고등학교 건데 이 사람들 눈이 먼 거야?”
“그러니까 말이야. 이 여자는 분명 단비 본인이잖아. 우리 모두 증명할 수 있어!”
“분명 이 진민서가 표절한 거야. 뻔뻔하게 표절을 해?”
원단비는 아직 기본적인 이성을 유지하고 있었고 쏜살같이 집으로 달려가 원고를 꺼내 스스로 결백을 증명하려 했다.
가는 길 내내 원단비의 머릿속은 엉망진창이었고 처음 그림을 그릴 때의 장면을 회상했다.
그 해 원단비는 18살이었고 민태건은 더 이상 그녀를 데리고 학교에 가지 않았다.
원단비는 학년 1등 시험지를 들고 집에 돌아와 서재로 달려갔고 민태건을 기쁘게 해주고 싶었다.
방 안은 조용했다.
민태건은 책상에 엎드려 잠에 들었고 원단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석양의 은은한 빛이 민태건의 미간을 비추었고 찬란한 금빛 아래 그는 침범해서는 안 될 신불처럼 보였다.
원단비는 민태건을 그 신단에서 끌어내릴 사람이 되고 싶었다.
때문에 원단비는 시험지를 들어 민태건의 얼굴을 덮고는 그에게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민태건은 원단비 때문에 놀라 깨어났고 또 한바탕 그녀를 꾸짖었다.
하지만 원단비는 오히려 이런 꾸중을 마음에 두지 않았고 곧바로 이 화면을 그림으로 그려 여러 해 동안 세심하게 소장했다.
하지만 지금 원단비는 이미 민태건을 내려놓았고 급히 돈을 써야 했기에 이 그림을 전시회의 작품으로 내놓은 것이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게 원단비에게 오점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집에 도착한 후 원단비는 생각나는 모든 곳을 다 뒤졌지만 원고의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었다.
원단비는 그제야 좀 당황했고 또 어디를 수색하지 않은 건지 애써 회상했다.
딩동-
이때 핸드폰에 친구가 보라고 링크를 보내왔다.
원단비가 그 링크를 누르자 진민서의 얼굴이 화면에 나타났다.
등 뒤에는 ‘기자회견’이라는 몇 글자를 보고 원단비의 마음은 철렁 내려앉았다.
생방송 화면에서 진민서는 엄숙한 표정으로 표절 문제에 대해 진술했고 회화의 모든 과정을 생생히 설명했다.
이어 진민서는 원고를 꺼내 많은 기자와 카메라에 보여주었다.
[저와 표절 사건의 신인 화가 원단비는 잘 알고 있는 사이입니다.]
[원단비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전 고의적으로 한 게 아니라 단지 잘못된 길에 들어선 것일 뿐이라고 생각하기에 원망하지 않습니다.]
이 기자회견에 인터넷 여론도 순식간에 한쪽에 몰렸다.
많은 네티즌들은 원단비의 계정에 몰려와 욕설을 퍼부었고 댓글은 10만 개를 돌파했다.
이와 동시에 또 다른 검색어가 서서히 떠오르고 있었다.
[#진씨 가문 큰 아가씨와 BS그룹 회장의 달콤한 키스, 경사가 멀지 않아 보여#]
이 제목 아래의 영상이 자동으로 재생되기 시작했다.
민태건은 스포츠카를 몰고 기자회견 현장에 직접 왔고 진민서는 웃으며 그에게 달려가 품에 안겼다.
커플은 서로 껴안고 뒷좌석으로 향했고 뚜껑이 닫히기 전 두 사람이 뜨겁게 입을 맞추는 장면이 카메라에 찍혔다.
두 사람의 연애사는 일찌감치 폭로되어 많은 팬층이 만들어졌고 이 영상에는 미친 듯이 댓글이 달렸다.
[너무 달콤해, 너무 달콤해! 정말 취하겠어, 흑흑흑!]
[왜 뚜껑을 닫는 건데? 우리 팬들이 못 볼 게 뭔데?]
[들리는 소문에 민태건은 원단비의 삼촌이라던데?]
{원단비와 진민서가 동시에 표절 의혹에 휩싸인 지금 민태건이 가장 먼저 진민서의 편을 들어줬으니 그럼 원단비가 표절했다는 건 더욱 확실해진 거 아닌가?]
원단비는 무감각해진 표정으로 영상을 멈췄고 빛의 속도로 증가하는 댓글 알림을 보고 클릭하니 모두가 그녀를 욕하고 있었다.
원단비가 어려서부터 못된 것만 배웠다고 욕하는 사람도 있고 품위가 없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그녀의 수준이 낮다고 욕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더군다나 원단비의 가족까지 같이 욕했는데 그녀가 교양이 없고 고아라고 욕하는 것도 있었다.
원단비의 손가락은 이 댓글에서 멈췄고 온몸이 떨려왔다.
눈물 한 방울 한 방울이 스크린에 떨어져 글씨를 흐렸지만 원단비 마음속의 아픔만은 흐릴 수 없었다.
원단비는 민태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제7화
첫 번째 전화는 받지 않았다.
두 번째 전화도 여전히 받지 않았다.
원단비는 한 통 또 한 통 전화를 걸었고 아홉 번째에 이르러서야 마침내 전화가 연결되었다.
전화기 너머 차분한 숨소리가 들려오자 원단비는 불현듯 고등학교에 다닐 때 그녀가 다른 사람에게 표절했다고 모함을 당했을 때도 이렇게 한 통 한 통 전화를 걸었던 생각이 났다.
그때 민태건은 딱 한 마디만 했다.
[겁 내지 마, 삼촌이 있잖아.]
그러나 지금 원단비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그림의 원고 삼촌이 가져다 준거예요?”
[그래, 나야.]
전화기 너머에서 긴 숨소리가 들려왔고 말소리에는 뚜렷한 떨림이 섞여 있었다.
“왜 그랬어요?”
몇 초 동안 침묵한 뒤에야 민태건은 입을 열었다.
[그 그림은 세상 사람들 앞에 나타나서는 안 되고 더욱이 네 이름을 씌워서는 안 돼. 너 모르는 거야?]
‘이제 보니 사람들이 눈치 채는 게 두려웠던 거구나.’
여전히 원단비가 민태건에게 분수에 맞지 않은 생각을 품고 있을까 봐 걱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원단비는 입가에 비참한 웃음을 지으며 핏발 서린 두 눈을 감았다.
“하지만 표절을 한 건 내가 아니라 진민서잖아요. 삼촌이 원고를 그녀에게 주면 전 더 이상 이 표절의 오점을 씻을 수 없게 돼요! 내 경력 전체가 망가졌다고요!”
[민서는 단지 실수한 것뿐이지 고의로 하는 게 아니야. 네가 민서를 대신해 누명 한 번 쓰면 뭐 어때?]
[내가 처음에 너에게 미술을 배우라고 한 건 단지 네가 취미를 찾아 주의력을 분산시키길 바랬던 거야. 그러니 그렇게 진지하게 임할 필요 없어.]
[어차피 내가 평생 널 키울 거니 남은 인생 동안의 생계를 걱정할 필요도 없어.]
말을 마친 후 민태건은 바로 전화를 끊었다.
원단비는 여전히 핸드폰을 들고 있었고 눈빛은 앞의 거울로 향했다.
거울 속의 울어서 빨갛게 부은 눈과 초췌한 얼굴을 보고 원단비는 그것이 자신임을 알아볼 수 없었다.
이게 원단비가 맞는 건가?
원단비는 민태건도 낯설게 느껴졌다.
지금의 민태건은 온 세상이 원단비를 배신하더라도 그녀를 위해 온 세상과 등질 수 있던 그 삼촌이 맞는 걸까?
원단비는 이미 알 수가 없었다.
그림 전시회가 무산된 후, 원단비는 민태건에게 돈을 돌려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더욱 굳어졌다.
주변의 몇몇 친구들은 원단비에게 돈을 많이 벌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소개해 주었는데 골프장의 캐디, 고급 룸살롱의 종업원 같은 것들이었다.
가능한 빨리 돈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벌 수만 있다면 원단비는 무슨 일이든 다 받았고 매일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돌아와 사람 그림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출국까지 아직 일주일이 남았을 때, 원단비는 마침내 마지막 몇 천만 원을 채울 수 있었다.
원단비는 종업원으로 옷을 갈아입은 후 룸의 문을 열고 마지막 출근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마지막 날 아르바이트 도중 낯 익은 사람을 만나게 되었다.
한 무리 남녀가 한데 모여 마치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1라운드에서 민태건이 졌다.
게임 진행자는 사람들 앞에서 그의 벌칙을 읽었다.
“좋아하는 이성과 3분 키스!”
한순간 장내가 들끓었고 모두들 부끄러운 듯한 얼굴로 진민서를 쳐다보았다.
민태건은 바로 일어나 사람들을 지나쳐 장외로 나가더니 한 걸음 한 걸음 원단비 앞으로 걸어갔다.
룸 안의 모든 사람들은 제자리에 멍하니 굳었고 수군대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들이 무슨 상황인지 갈피를 잡지 못했고 잠시 뒤에야 민태건은 품에서 핸드폰을 꺼내 원단비에게 건넸다.
“들고 모든 과정을 녹화하세요.”
원단비는 갑자기 무언가를 예감하고 가슴이 움찔했다.
그러나 이 순간 원단비는 자신이 전처럼 그렇게 아프지 않다는 것을 발견했다.
아마도 내려놓기로 결심했기에 이미 더 이상 그녀에게 상처가 되진 않는 것 같았다.
원단비는 차분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받고 카메라를 켜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민태건의 핸드폰은 화질이 아주 좋았는데 비록 불빛이 어둡긴 했지만 원단비는 화면 속 장면을 선명하게 볼 수 있었다.
민태건은 몸을 돌려 자리로 돌아와 진민서를 품에 안고 몸을 숙여 입을 맞추었다.
스크린 화면 위로 시간이 표시되어 있었다.
3분, 180초, 1초도 많지도 적지도 않았다.
하지만 영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키스가 끝난 뒤 민태건은 바로 한쪽 무릎을 꿇고 주머니에서 다이아몬드 반지를 꺼냈는데 말투에는 부드러움이 가득했다.
“민서야, 나와 결혼해줄래?”
‘삼촌이 진민서에게 프러포즈를 했어!’
진민서가 구체적으로 뭐라고 대답했는지 원단비는 똑똑히 듣지 못했다.
화면 속 두 주인공은 인파에 의해 철저히 가려졌고 사방팔방에서 들려오는 하늘을 찌를 듯한 고함소리와 미친 듯이 소란스러운 소리가 원단비의 귀에 꽂혔다.
원단비는 조용히 손을 내려 녹화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 순간 매니저가 다가와 옆 룸에 새 손님이 왔다며 도와달라고 요청했다.
원단비는 잠시 망설임도 없이 옆에 있던 동료에게 핸드폰을 건네고는 뒤돌아 룸을 빠져나갔다.
더 이상 머물 이유도, 한 발자국 더 있을 마음도 없었다.
제8화
모든 일을 마친 원단비는 지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민태건은 먼저 집에 도착했고 거실 소파에 앉아 원단비가 돌아온 것을 보고는 그녀를 불렀다.
“거기 서!”
“왜 그런 곳에 일하는 거야? 돈 부족해?”
“집에 심심해서 다양한 생활을 체험해보고 싶었어요.”
이에 민태건 얼굴의 분노는 가라앉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차가웠다.
“앞으로 가지 마.”
원단비는 이제 확실히 갈 필요가 없었다.
원단비는 대충 대꾸하고 고개를 숙인 채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 후 며칠 동안 민태건은 거의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진민서가 매일 수많은 사진을 원단비에게 보내곤 했다.
반지, 웨딩 사진, 결혼식장, 부케 등 매 한 장 속에는 모두 결혼의 행복과 기쁨이 내비쳐졌다.
원단비는 진민서에게 답장하지 않았고 짐 싸느라 바빴다.
마지막 셋째 날 아침, 원단비는 계단 입구에서 막 외출하려던 민태건을 만났고 얼른 그를 불렀다.
“삼촌, 3일 후 한 시간만 내서 저와 생일 보내줄 수 있어요?”
민태건이 원단비를 이렇게 여러 해 동안 키워줬으니 그녀는 민태건과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민태건에게 이 말을 도발처럼 들렸다.
때문에 민태건은 생각도 하지 않고 거절했다.
“내가 너에게 이런 요구를 하지 말라고 여러 번 말했지!”
민태건이 또 화를 내는 것을 본 원단비는 얼른 두 마디 설명했다.
“이번엔 기분 나쁜 짓도 안 하고 몇 년 전처럼 고백도 안 하고 그냥...”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고 싶었던 건데.”
두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고 원단비는 마지막 몇 글자를 들리지 않을 정도로 낮게 중얼거렸기에 민태건은 한 글자도 듣지 못했다.
원단비가 몇 마디 정상적인 말을 하는 걸 듣고나서 민태건은 비로소 마음을 놓고 고개를 끄덕였다.
생일날, 원단비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기다렸지만 여전히 민태건은 오지 않았다.
곧 이륙 시간이 다가오자 원단비는 핸드폰을 들고 전화 한 통을 걸었다.
벨소리가 울린 지 10초 만에 귓가에는 진민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태건 씨는 샤워하고 있어서 전화 받기 불편해.]
진민서의 말투에는 의미심장한 의미가 담겨 있었고 이 말을 들은 원단비는 심장이 저릿했다.
원단비는 손목시계를 보더니 집요하게 물었다.
“그럼 얼마나 더 기다리면 나올 수 있나요? 전 기다릴 수 있어요.”
전화기 너머에서 웃음소리가 한바탕 들려왔다.
[원단비,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야? 태건 씨는 샤워 중이야.]
[사실대로 말할게. 우리는 지금 호텔에 있어. 너도 성인인데 샤워하고 나면 우리가 뭘 할지 모르는 거야? 모든 과정을 구경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태건 씨는 네 삼촌이야, 네가 좋아하는 건 그렇다 치고 이제 결혼도 할 건데 아직도 그 집에서 나가지 않고 왜 매일 들러붙어 있는 건데? 염치도 없어?]
매우 모욕적인 말들이 바늘처럼 원단비의 가슴을 찔렀다.
원단비는 눈가의 눈물이 떨어지지 않도록 입술을 꽉 깨물었다.
시원하게 감정을 털어놓은 후, 진민서는 전화를 끊었다.
화면에 표시된 “통화종료”를 보면서 원단비는 의기소침하게 손을 내려놓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원단비는 상자에서 촛불을 꺼냈다.
케이크의 크림은 보일러에 의해 약간 녹았고 “21”은 삐뚤삐뚤 꽂혀 있었다.
촛불에 불을 붙인 후, 원단비는 몸을 숙여 불을 끄고는 마음속으로 묵념했다.
원단비의 21번째 생일 소원은 더 이상 삼촌과 영원히 함께 하기를 바라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민태건이 오래오래 살고 해마다 건강하며 앞으로 남은 인생 동안에는 원단비 자신이 없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묵념을 끝낸 뒤 원단비는 촛불을 껐다.
마지막으로 원단비는 자신의 모든 흔적을 정리하고 10여 년 동안 살았던 이곳에 딱 세 가지만을 남겼다.
하나는 그동안의 양육의 은혜를 갚기 위한 190억이 담겨 있는 은행 카드였다.
다른 하나는 민태건이 사랑하는 사람과 백년해로하기를 기원하는 신혼 선물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작별 인사였다.
[삼촌, 저 포기했어요. 행복하세요.]
필을 놓은 후, 원단비는 캐리어를 들고 마지막으로 이 집을 한 번 훑어보았다.
그리고 돌아서 뒤돌아보지 않고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