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녀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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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녀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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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에서 소은은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쏟아부어 끝내 모든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선왕부 세자 강준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혼인하고 나서...

Chương (1)

第1章

전생에서 소은은 온 마음을 다해 정성을 쏟아부어 끝내 모든 여인들의 선망의 대상인 선왕부 세자 강준의 아내가 되었다. 그런데 막상 혼인하고 나서도, 억지로 아내를 맞이한 강준의 마음은 끝끝내 따뜻해지지 않았다. 밤이 깊어질 때만 그녀를 찾아올 뿐, 강준의 마음은 단 한 순간도 소은을 향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에게 아끼는 여인이 있다는 소문까지— 결국, 소은은 그 여인에게 자리를 내어주리라 결심했다. 하지만 눈을 떠보니 소은은 강준이 그녀를 구해준 열네 살로 돌아와 있었다. 이번 생에 혼인한다고 하더라도 절대 강준만은 아니리라 소은은 결심했다. 듬직한 소년 장군, 기품 넘치는 왕세자, 재주꾼 심씨 가문의 셋째 도련님까지... 모두 하나같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소은이 호기롭게 손수건을 던지려는데 강준의 눈빛이 점점 이상해지며 전생의 기억이 서서히 떠올랐다. "딴 사내? 꿈도 꾸지 말거라." 1 화 충경 6년, 겨울. 선왕부 세자 강준이 요국과의 전쟁에서 대승리를 거두고 개선하였다. 궁에서 봉상을 마치고 돌아오니, 이미 한밤중이었다. 소은은 잠자리에 든 참이었으나, 낮은 목소리로 시녀에게 목욕물을 준비하라 명하는 그의 기척 소리에 무심결 몸을 일으켰다. 강준은 그녀를 곁눈질로 힐끗 보고는 아무런 말 없이 목욕실로 들어갔다.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흐른 뒤, 그가 모습을 드러냈다. 훤칠한 기럭지, 날렵하게 뻗어있는 관자 머리, 그야말로 빼어난 용모를 자랑하는 그가 무표정일 때면 주위가 서늘할 정도였다. 이제는 군공을 떨치고 지위까지 높아져 그와의 거리가 더욱 멀게만 느껴졌다. 그는 손을 뻗어 소은의 턱을 가볍게 치겨올리고는 한동안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 그의 손이 그녀의 옷깃 안으로 파고들었다. "—쾅!" 천둥이 요란하게 울리더니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촉촉이 젖은 복숭아꽃은 매혹적이었고 버드나무 가지는 바람에 흔들리며 애달프게 몸을 떨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나 빗줄기가 가늘어졌다. 이부자리 속에도, 소나기가 지나간 흔적만이 남았다. 보통 부부라면 이즈음 서로를 끌어안고 그리웠던 마음을 나눴을 테지만 그들은 일 년 만에 재회하고도 그저 낯설기만 하였다. 강준은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불과 열일곱부터 선왕을 따라 출정하여 공을 세웠다. 그 준수한 외모와 출중한 능력으로 인해 경성의 여인들이 가장 흠모하는 사내이기도 했다. 소은과 그의 혼사는 부모님의 뜻에 중매인의 손으로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나 정작 강준이 원했던 배필은 따로 있었다. 바로 경국공부의 둘째 여식, 즉 지금의 사황자비였다. 둘은 깊이 연정을 나누었으니 사황자가 끼어들지만 않았다면 이미 혼인했을 터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소은의 마음이 쓰라렸다. 소은 또한 결코 그녀에게 뒤지는 미모는 아니건만 금슬이 좋은 그들 부부와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사흘 후 북지로 돌아가오." 결국 강준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언제나처럼 짧고 담담한 통보였다. 매번 돌아오면 기껏해야 이틀에서 사흘 정도 머물기 일쑤였고 그녀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 후로 강준은 바쁜 나날을 보내며 늘 서재에서 머물렀기에 그녀의 침소에 오지 않았다. 그리고, 떠나는 전날 밤. 소은은 그를 다시 마주하였다. 그녀에게 아무렇지도 않게 몸을 겹쳐오는 강준을 보며 그녀도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저도 북지로 데려가 주세요." 강준은 하던 것을 멈췄다. "…북지는 혹독한 땅이오. 당신처럼 여린 여인이 버틸 곳이 아니니 여기 남아 있도록 하오. 지루하거든 장모님을 자주 초대해도 좋소." 소은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등을 보이며 잠을 청하려 했다. 강준이 다시 그녀를 품으려 했으나, 소은은 몸을 피해버렸다. "제 몸을 조금만이라도 헤아려 주시지요." 강준은 한참이나 그녀의 등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고는 흥미를 잃은 듯 조용히 자리를 정리했다. 소은은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고 눈물만이 베개를 적시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강준이 그녀를 데려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단 하나. 그가 원치 않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눈물을 닦으려는 순간, 커다란 손이 그녀의 허리를 감쌌고, 따스한 체온이 그녀의 몸에 닿았다. "… 어째서 북지에 가고 싶다는 것이오?" 강준의 한껏 깔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겋게 달아오른 눈과는 상반되게 소은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니 궁금했습니다. 허나 춥다 하니 마음을 접겠습니다." "알았소." 그는 그녀가 더 이상 고집하지 않자, 어딘가 안도한 듯했다. 그러나 소은은 그 후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오는 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게 잠든 그녀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옆자리는 텅 비어 있었다. 그때 방에 들어선 시녀가 조용히 인사를 올렸다. "세자께서는 이른 새벽 북지로 떠나셨습니다. 부인께서 주무시고 계시니 깨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소은은 이미 이러한 생활에 익숙해진 듯했다. 그가 언제나 그녀에게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떠났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덤덤히 일어나 시녀에게 머리를 맡겼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삼 년 전과 다를 바 없었다. 단 하나, 눈빛만은 달라져 있었다. 마치 모든 것에 무뎌진 듯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대로 평생을 독수공방하며 살아야 하는 걸까?’ 세상은 그녀와 강준과의 혼인을 두고 ‘천상의 배필’이라 하였다. 그러나 만약,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그녀는 결코 같은 선택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가 원하는 것은, 남들에게 자랑스러울 만한 지아비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외면하지 않는 지아비였다. 소은의 나날들은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아침 식사를 마치면, 어김없이 선왕비께 문안을 드리러 가야 했다. 오늘은 가까운 길로 가려 하다 보니, 연못 뒤편의 가산을 돌아가게 되었다. 그때, 근처에서 나직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거 알아? 왕비마마께서도 세자께 세자비와 함께 가라 권하셨다던데, 세자께서는 혼자 떠나셨대." "세자비께서 어찌 북지에 가실 수 있겠어? 그 소문 못 들었어? 북지에는 세자께서 흠모하는 여인이 계신다잖니… 그자가 사황비를 빼닮았대." 옥순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금방이라도 나서서 꾸짖으려 하였으나, 소은이 가볍게 손을 들어 그녀를 막아섰다. "그만두어라. 가자." 옥순은 분을 삭이지 못했지만, 소은은 이상하리만치 차분했다. 오히려 그 말에 어느 정도 수긍하는 것 같았다. 북지는 본디 미인이 많은 곳이었다. 더구나, 강준은 혈기 왕성한 젊은 나이기에 유혹을 쉬이 뿌리칠 수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녀가 함께 가는 것을 동의하지 않은 것이다. 하인들조차 이 소문을 알고 있을 정도라면, 아마 왕부안에서도 꽤 많은 이들이 눈치채고 있을 터. 어머니께서 줄곧 자식를 보라고 다그치던 것도 그녀가 안주인 자리를 빼앗길까 염려해서였다. 그녀는 정실임에도 불구하고 여직 자식을 보지 못했다. 그런 것들이 그녀를 더 초라하게 만들 뿐이었다. 이럴 바에야, 차라리 갈라서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소은이 생각에 잠겨 있던 그 순간, 발을 헛디뎌 그만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퍽! 머리가 찢어지는 듯한 통증과 코끝을 자극하는 피비린내가 그녀를 감쌌다. 이상하게도 아픔은 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점점 의식은 흐릿해져만 갔다. 설마… 죽는 건가? 그 순간, 강준이 첩을 몇이나 들이든, 이제는 상관없을 것도 같았다. 제발 살아만 있게 해 준다면 강준이 후궁을 백 명 들이더라도 한마디 불평조차 하지 않으리라! "부인!" 옥순이 놀라 소리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소은의 가슴이 저릿해졌다. 옥순뿐만이 아니었다. 지아비를 제외하고도 그녀를 진심으로 아끼는 이들이 많았다. 만약 그녀가 이대로 죽는다면, 그들은 또 얼마나 슬퍼할까? 그러나 그 생각도 끝맺지 못한 채 깊은 어둠이 모든 감각을 집어삼켰다. 2 화 가을비의 찬 기운에 아침 서리가 온 땅에 가득했다. 며칠 전 물에 빠져 혼수상태에 빠졌던 소씨 가문의 넷째 소은이 방금 전 마침내 깨어났다. 이른 새벽이건만 이미 소국공부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였다. "듣자 하니, 소은을 물에 빠뜨린 자가 붙잡혀서 어제 소대감께서 밤새 취조하셨다더군. 허나 가죽이 찢어지도록 매를 맞아도 끝내 배후를 실토하지 않았다 하네." "매를 맞아 죽는다 한들 무슨 소용이겠나? 소은에게 천운이 따라 살아남았으니 망정이지… 심성이 악독한 자라니, 천벌을 받아야 마땅하네!" 문밖에서는 이런저런 수군거림이 끊이지 않았지만, 방 안에 있던 소은은 마음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래도 기쁨이 더 컸다. 그녀가 6년 전으로 돌아온 것이다. 아직 강준과 혼약을 맺기 전, 차갑게 외면당하며 살아가야 할 운명에 놓이기 전으로 말이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난 생에서의 삶이 대체로 순탄했다 하나, 결코 잊히지 않는 몇 가지 후회가 있었다. 그 모든 것을 바로잡을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몸이 아직 허약한데, 어찌 겉옷 하나 걸치지 않은 채 앉아 있는 것이냐?" 그때, 약을 들고 들어선 장명희가 소은이 내의 차림으로 침상에 기대앉아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약을 내려놓고, 곁에 걸려 있던 눈처럼 하얀 옷을 들더니 몸을 숙여 직접 그녀의 어깨 위에 덮어주었다. 바로 그 순간, 소은은 그녀의 품에 안기며 떨리는 목소리로 불렀다. "아… 어머니." 그녀는 전생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다만 단 하나. 자신이 죽고 나면 자식을 잃은 아픔을 겪었을 어머니께서 또다시 딸을 잃고 비통해할 것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장명희는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딸을 더욱 꼭 끌어안으며 그녀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누가 감히 너를 해쳤는지, 어미가 반드시 밝혀낼 것이다. 그러니 두려워 말거라, 소은아." 그 말에, 소은의 온몸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전생에서 어머니는 필사적으로 범인을 찾아냈다. 범인은 다름 아닌 아버지의 측실, 우씨였다. 그러나 유일한 증인이 우씨에 의해 입을 닫은 뒤였다. 어머니는 우씨가 또다시 소은을 해칠 것을 염려하여 확실한 증거를 잡기도 전에 그녀를 처단하였다. 어머니의 친정이 막강한 권세를 지닌 탓에, 소국공부도 더는 문제를 키우지 못하고 묵인하였으나, 아버지는 결국 어머니가 가혹했다고 원망하게 되었다. 그날 이후, 부부 사이에는 금이 가기 시작했고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렇게 어머니는 아버지와의 불호 속에서 하루도 평온하게 보내지 못하였고 그 뒤로는 자식이 생기는 일도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소은의 유일한 친 오라버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의 몸과 마음은 점점 병들어 갔다. 소은이 곁에 있을 때만이 유일하게 미소를 짓는 순간이었고 대부분의 날들은 어두운 침묵 속에서 살아가셨다. 그리고 오라버니가 목숨 바쳐 쟁취한 공적은 결국 큰집 사람들에게 돌아가 버렸다. 붙잡힌 그 사내는 본래 우씨가 소국공부에 들어오기 전 사귀었던 사내였다. 때문에 그녀를 감싸고자, 끝끝내 진실을 발설하지 않았다. 이 사실을 소은이 알게 된 것은 강준과 혼인한 뒤였다. 허나 그때는 이미 너무 늦었고, 진실을 안다 한들, 부모님의 관계는 결코 회복될 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 이번 생에서는 어머니가 두 번 다시 나락에 빠지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어머니, 아버지를 뵙고 싶습니다." 소은이 고개를 들어 장명희를 바라보았다. "네 아비는 네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지금 급히 돌아오는 중이시다. 곧 도착할 것이니, 우선 약부터 마시거라." 장명희는 다정하게 달래며 약을 건넸고, 소은은 말없이 그릇을 받아 한 방울도 남김없이 들이켰다. 그러자, 멀지 않은 곳에서 묵직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그녀의 아버지, 소철주가 도착한 것이다. 그는 사십을 갓 넘긴 나이에 키가 훤칠하고 등도 곧았다. 궁에서 곧장 돌아온 터라 아직 관복 차림이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차가웠지만 그의 두 눈에는 온기가 가득했다. "…소은아." "아버지." 소은이 그를 향해 미소 지었지만, 눈가가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많이 힘들었구나." 소철주는 소은의 야윈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했다. 칼을 맞아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강인한 사내였으나, 이번만큼은 딸 때문에 몇 번이나 눈물을 삼켜야 했다. "이번 일은 선왕부 세자와 육씨 가문의 둘째가 아니었더라면…" 소철주는 말을 잇지 못했다. 딸을 잃을 뻔했던 그 순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였다. 소은은 ‘강준’이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전생의 기억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가슴 한쪽이 쿡쿡 저려왔다. 강준은 그녀를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를 진심으로 지아비라 여겼다. 그러나 육씨 가문의 둘째라는 낯선 이에 문득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전생의 그녀는 오랜 병환을 앓았기에 자신을 구한 자가 강준과 육씨 가문의 둘째라는 것을 들었을 뿐, 정작 그를 직접 대면한 적은 없었다. "…육지민?" "육지민은 이달 초에야 경성으로 돌아왔으니, 네가 모르는 것도 당연하다. 몸이 좀 더 나아지면 어머니와 함께 선왕부와 육부에 직접 가서 감사를 표하도록 하거라." 소은은 강준을 다시 마주하고 싶지 않았으나, 예를 다하는 일이니 마냥 거부할 수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물에 빠뜨린 자를 아버지께서 직접 심문하셨습니까?" "입이 꽤나 단단하더구나. 허나, 나에게 길들일 방법이 있다." 그는 냉소를 띠며 말했다. 소은은 하려던 말을 삼켰다. 그녀의 주저하는 모습에 소철주가 말했다. "내 앞에서는 굳이 숨길 필요 없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솔직히 말해 보거라." 소은은 잠시 시선을 떨구었다. "아버지, 그자는… 우씨와 정을 나눈 사이라 들었습니다. 혹여, 우씨가 사주한 것이 아닐까요?" 소은이 먼저 말을 꺼냈다. 절대 이번 일에 어머니가 휘말리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마음뿐이었다. 더군다나 우씨와 그 사내가 사통한 것은 사실이니 우씨가 사주했다는 명확한 증거가 나오지 않는다 해도 우씨가 무사히 빠져나갈 가능성은 없었다. 소철주의 얼굴빛이 순간적으로 변했다. "증거가 있는 것이냐?" "그자와 우씨가 서로 부등켜안고 있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전생에서 소은은 그 장면을 보고도 그 두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저 사내가 ‘연아’라고 부르는 것을 들었을 뿐이었지만 그녀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러나 한 번 더 살아보니,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연아’는 우씨가 소국공부에 들어오기 전에 불렸던 이름이었다. 우씨가 소은을 해치려 했던 것은 자신의 치부를 들켰기 때문이다. 소철주의 눈빛이 더욱 싸늘해졌다. 사통한 것도 모자라 자신의 딸을 죽이려 했다니!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우씨를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때 조용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장명희가 코웃음을 쳤다. "참으로 어진 자들을 곁에 두셨군요." 우씨는 어머니의 강요로 들인 여인이었다. 소철주는 반박하지 못했고 그저 묵묵히 받아들였다. 결국 소철주는 한숨을 내쉬며 다짐했다. "이번 일은 내가 반드시 확실하게 해결할 것이니 부인은 걱정하지 마시오." 결정적인 실마리가 잡혔으니, 조사는 빠르게 진행되었다. 소철주는 즉시 사람을 우씨의 본가로 보내 조사하게 했다. 그 결과, 우씨와 그 사내는 죽마고우였고 우씨는 부모에 의해 강제로 팔려 나갔고, 노부인 고금란이 그녀를 곁에서 시중들게 하였다. 그러다 총명한 그녀가 마음에 들어 자신의 아들인 소철주의 첩으로 들인 것이다. 소철주는 이 사실을 무기로 그 사내를 압박했고 그 사내는 소철주가 모든 것을 알고 있다고 생각하여 마침내 입을 열었다. 진실은 소은의 말 그대로였다. 우씨는 자신의 과거가 드러날까 두려워 소은을 제거하려 했던 것이다. 소철주는 자신의 곁에 이토록 독한 여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에 경악을 금치 못하였다. 우씨는 아직 소은의 몸이 온전히 회복되기도 전에 장명희에게 즉시 처단되었다. 그녀가 고금란의 사람이었고 한없는 편애를 받아 왔으나, 이번만큼은 고금란 역시 이를 막지 않았다. 장명희는 소은의 앞에서 이 일에 대해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태연한 모습으로 우씨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는 어머니의 모습에 그녀의 최후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장명희는 절대 억울함을 참고 넘어갈 성격이 아니었다. 찬 바람을 맞은 소은은 감기까지 걸렸고 조용히 요양할 수밖에 없었다. 그녀의 친 오라버니 소혁은 여전히 궁 밖에 머물고 있었으므로, 그녀를 찾아온 사람들은 큰집 사람들과 어머니의 친정 식구들뿐이었다. 그 덕에 오히려 그녀는 조용한 시간을 보내며 푹 쉴 수 있었다. 그렇게 반 달이 지나서야 겨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며칠 뒤면 너를 위한 잔치를 열 텐데, 이 얼굴로 제대로 손님을 맞이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장명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어머님께서는 지금 저더러 못생겼다고 하시는 겁니까?" "내 딸이 어찌 못생겼겠느냐?" 그녀는 한때 경성에서도 유명한 미인이었고 소철주 또한 젊은 시절 풍류를 아는 미남으로 둘에게서 태어난 소은 역시 당연히 미모가 빼어날 수밖에 없었다. 다만, 소은은 이제 곧 계례를 앞두었건만 몸이 이제야 자라기 시작하였으니 여인들 중 늦은 축에 속하였다. 게다가 몸마저 야위니 더욱 작아 보였기에 장명희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마음에 두었던 몇몇 가문의 사내들 또한 하나둘 정혼자가 생겨 이미 선수를 여럿 빼앗긴 터였다. 선왕부의 두 공자, 강준과 강민은 여러 집안에서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심지어 경국공부에서도 그들을 탐내고 있었기에 장명희는 그런 다툼에 끼어들 엄두를 내지 못했다. 하여 아예 고려조차 하지 않았다. 위씨 가문 작은 아들은 나쁘지 않으나 위 부인의 기가 너무 강했기에 장명희는 사랑스러운 딸을 그런 집에 시집보낼 수 없었다. 육씨 가문은 가세가 조금 약해, 시집보내면 고생길이 훤히 보였다. 그래서 애초에 넘기려 했지만 소은을 구해준 육지민의 모습이 문득 떠올랐고 저도 모르게 생각이 깊어졌다. 들리는 말로는 학문도 뛰어나고 용모도 반듯했다. 마음가짐엔 명문가 자제 특유의 거만함도 없었다. 다정하고 예의 바르다 하니 아마도 함께 지내기 편한 이일 것이다. 그렇게 장명희 마음속엔 육지민이 조용히 자리 잡았으나 아직 딸에게는 그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먼저 살펴본 뒤, 정말 괜찮다고 판단되면 그때 가서 딸에서 말할 것이며 만약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조용히 넘길 작정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 어느덧 소국공부에서 연회를 여는 날이 다가왔다. 죽을 고비를 넘긴 소은을 위해 고금란이 일부러 흥겨운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이는 소은이 물에 빠진 뒤 처음으로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낸 자리였다. 비록 예전보다 살이 빠져 앙상했지만 피부는 백옥처럼 맑고 고왔고 키는 늘씬하고 이목구비는 어여쁘기 그지없었다. 미소 지을 때면 두 눈은 마치 맑은 샘물과도 같아 마음이 씻기는 듯하였고, 몸에 두른 연두빛 치마는 그녀와 더없이 잘 어울려, 소은을 한층 더 빛나게 하였으니 마치 막 미어날 듯한 연꽃 같았다. 그녀가 모습을 드러내자마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쏠렸다. 소은은 할머니와 어머니와 함께 손님들과 인사를 나눈 뒤에야 또래 아씨들이 모인 자리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경성의 여러 가문의 공주님들이 저마다의 아름다움을 지녀, 가히 백화제방이라 할 만하였다. "요즘 들어 미모에 아주 물이 올랐군. 구혼자들 때문에 소국공부 문턱이 닳겠어." 그녀가 자리에 앉자, 위씨 집안 셋째 아씨 위경화가 농을 던졌다. 그녀는 소은의 큰 오라버니, 소준과 혼약이 정해진 사이로, 소은과도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내가 너의 심심풀이 땅콩이냐?" 위경화는 그녀 곁으로 몸을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강준이 너를 구해줬을 때 어땠어? 마음이 더 기운 거 아니야?" 잠시 멈칫하던 소은은 이내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강준을 마음에 둔 것을 오직 위경화만 알고 있었고 그 외에는 아무도 몰랐다. 전생에서 강준이 그녀를 구해줬을 때 그녀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채 마음속으로 오래도록 기뻐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마음이 무겁고 복잡하기만 하였다. 소은의 시선이 맞은편에 앉은 한 여인에게로 향했다. 부드러운 눈웃음에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넘치는 그녀는 바로 경국공부의 둘째 아씨, 심지연었다. 이목은 부드럽고 웃음은 온화하여 한눈에 품격이 엿보였으며, 강준이 마음에 둔 여인이기도 했다. 경성에서도 손꼽히는 인물로 미모 또한 뛰어났고 예술이면 예술, 빠지는 것이 없었다. 소은이 가장 닮고 싶은 인물이 바로 그녀였다. 연회는 그리 엄격한 편은 아니었지만 남녀는 늘 따로 앉는 것이 예법이었다. 소은은 무의식중에 사내들이 앉은 쪽을 바라보았고 단번에 너무도 익숙한 한 사람을 찾아냈다. 그녀의 지아비이었던 강준. 그와 삼 년을 함께했고, 같은 이불을 덮고 수없이 많은 밤을 보냈었다. 지금의 강준은 갓 약관례를 마친 터라 훗날보다 체격이 다소 덜 잡힌 상태였지만 소은은 단번에 그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검은 비단 도포를 입은 강준은 오똑한 콧대와 잘생긴 이목구비에 강한 인상이 더해져, 서늘하면서도 고귀한 기품을 뽐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무심하게 여인들 쪽을 향하는 듯했지만 자세히 보면 단 한 사람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에 단 한 사람만 존재하는 듯 그 눈은 오직 심지연만 담고 있었다. 소은은 그때까지만 해도 강준이 심지연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녀의 바로 뒤에 앉아 있었던 소은은 강준이 자신을 바라보는 줄로만 믿고 있었다. 지금의 소은은 마음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아직도 ‘강준의 아내’라는 지난 삶의 굴레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채, 배우자가 바람이 났다고밖엔 달리 생각할 수 없었다. 소은은 또다시 그들의 첫날 밤을 떠올렸다. 그날 강준은 그녀와 동침하지 않았다. 혼인한 지 석 달이 지나서야 처음으로 그녀의 방에 들어왔다. 그녀가 ‘낭군님…’이라 수줍게 불렀건만 강준은 대꾸도 하지 않았다. "강준이 너를 보고 있는 거 아니야?" 위경화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소은은 마치 찬물 한 바가지를 뒤집어쓴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전생에서의 온갖 서러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마음이 얼어붙는 듯했지만, 그녀는 애써 미소 지으며 나지막하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매님, 선왕부에 들어가고픈 이들이야 많겠지만, 저는 아닙니다. 그러니 제발 그만하시지요?" 더는 상처받고 싶지 않았다. 이번 생에서만큼은 사랑 그 따위를 얻겠다고 스스로를 낮추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 널리고 깔린 것이 사내이니. 3 화 이후 이어진 화주령에서도 소은은 전생에서처럼 돋보이려 하지 않았다. 그땐 그저 누군가의 시선을 조금 더 받고 싶어 나섰을 뿐이었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번 연회에서 두각을 나타낸 이는 임씨 가문의 아씨 임미진이었다. 심지연은 늘 그랬듯 남들 앞에 나서기를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이번에도 그저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미진 아씨의 글재주가 실로 뛰어나군요." "언니께서 양보해 주신 덕분이지요." 임미진이 얼굴을 붉히며 답했다. "양보라니, 그런 말씀은 사양하지요. 그런데 소은 님은 오늘따라 어찌 이리 조용하신지요? 몸이 아직 완전히 회복되지 않은 것입니까?" 심지연이 다정한 눈빛으로 소은을 바라보며 물었다. 소은과 심지연은 친밀한 사이는 아니었기에 이런 식의 관심을 받을 줄은 몰랐던 터라, 그녀는 조금 놀랐다. "아마도 그런 것 같네요. 아직 기운이 없긴 하지만 괜찮으니 마음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오늘 연회의 주최 측은 소국공부였다. 장명희의 집안이 넉넉한 편이었기에 소은 역시 평소에 손이 크고 늘 아낌이 없었다. 이번에 준비한 선물만 해도 상세게 왕조의 유명 화가였던 동귀선생의 그림이었다. 이에 임미진은 기쁨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감사 인사를 표했다. "소은 님의 글재주와 그림솜씨 또한 뛰어나시다고 들었는데 이런 그림은 소은 님이 간직하셔야 헛되지 않을 텐데 말입니다." 소은은 그저 가볍게 미소 지은 뒤, 이내 할머니 곁으로 갔다. "소은이도 어느덧 숙녀가 되어 가는구나." 고금란은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방금 전, 소은이 몰래 선왕부의 셋째 아들을 몰래 훔쳐보던 모습도 고금란의 눈에 훤히 들어왔던 것이다. 선왕부라면 고금란 또한 흡족한 배필이라 여겼다. 소은을 구해준 은인일 뿐만 아니라, 황실과도 가까운 집안. 황제 또한 각별히 아끼는 가문이었다. 다만, 선왕부에서 강준의 혼사에 어떠한 계획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아까는 새언니가 저를 놀려먹으려 하시더니 이제는 할머니까지 그러시는 겁니까?" 소은이 투정 부리며 볼을 부풀리자, 태후는 다정하게 웃었다. "할미가 어찌 그럴 리가 있겠느냐." 한편, 남자들이 모인 자리에는 보다 차분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소준과 강준이 이번 수해와 관련한 대화를 진지하게 나누고 있었고 그 분위기 탓에 다른 이들도 예전처럼 함부로 농담을 주고받을 수는 없었다. 또한 대부분이 과거 준비나 벼슬길에 마음이 쏠려 있다 보니, 화제도 자연스레 정치나 행정 이야기로 흘러갔다. 그런데 그때, 위빈이 불쑥 입을 열었다. "소준, 네 누이 말이야. 작년만 해도 그저 어린아이 같더니 오늘 보니까 절세미인이 따로 없더구나!" 이 말을 듣자, 강준과 진명우가 동시에 그를 바라보았다. "내 누이는 네가 넘볼 상대가 아니다." 소준이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소국공부는 자손이 많지 않았고 오직 두 가문뿐이었다. 소준, 소윤, 소희는 대방의 자식이었고 소혁과 소은은 이방, 소철주의 자식이었다. 소윤은 이미 출가했고 소희는 오늘 자리에 없었으니 누굴 말하는지는 굳이 말하지 않아도 뻔했다. "그럼 너는, 네 여동생이 어떤 사내와 맺어지길 바라는 거냐?" 위빈이 흥미롭게 물었다. 그러자, 영국공은 잠시 말을 아끼다, 슬며시 진명우를 힐끗 바라보았다. 진명우는 평소 의젓하고 말수가 적은 인물이었다. 경성에서 크게 두각을 드러내는 가문이 아니었으나, 눈이 높은 숙모가 웬일로 진명우에 대해 깨묻기 시작했다. 소준은 내심 의아했다. 숙모라면 당연히 강준과 같은 황실 귀족을 택하려 할 텐데, 어째서 진명우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숙모는 언제나 소은이에게 가장 좋은 배필을 찾아주려 했으니 말이다. "적어도 너는 아니다." 소준이 냉정하게 선을 긋자, 눈치를 살피던 위빈도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들 대화에서 강준은 소국공부에서 딸에게 혼처를 알아보고 있다는 것을 대략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면 신경 쓸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소씨 가문의 일일 뿐이었다. 그러다 강준은 문득 소은이 물에 빠졌던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공포에 질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던 소은이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멈칫하더니 곧장 그의 품에 안기며 나지막이 ‘낭군...’이라 읊조렸다. 부부 사이에만 쓰는 단어. 강준은 본디 단지 생명을 구하려 했을 뿐, 이 일로 인해 얽히는 것은 원치 않았다. 그러나 당시 상황이 급박했던 터라, 외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은을 물에서 끌어 올린 뒤 그는 마침 지나가던 진명우를 불러 세워 소은을 맡기고는 자신은 구조 요청하러 달려갔다. ...... "그날 세자께서 나를 붙잡으신 것은 혹여 남녀 간의 소문에 휘말릴까 염려해서였겠지요?" 연회가 끝난 후, 자리를 떠나던 중 진명우가 강준에게 불쑥 물었다. 강준은 별다른 대꾸 없이 앞만 바라보았다. "세자께서 보기에도 소국공부와 저의 혼사는 나쁘지 않다 생각되겠지요? 혹여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다 해도 내가 소국공부에 책임을 질 수 있으니 세자께서는 깨끗이 빠져나갈 수 있을 테고요." 만약 소은이 ‘낭군’이라 부르지만 않았어도 강준이 신경 쓸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는 단지 사람을 구하려 했을 뿐이고 소국공부라면 그가 소은을 껴안은 일쯤은 문제 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소은이 ‘낭군’이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찌 신경 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아가씨가 이 일을 빌미로 자신에게 책임을 지라고 나설지도 모른다. 아직 계례도 치르지 않은 어린 아씨가 입에 담기 쉽지 않은 ‘낭군’이란 말을 내뱉었다는 것만으로도 경계할 이유는 충분했다. "……미안하게 됐습니다." 강준이 사과하자 진명우가 가볍게 웃었다. "세자께서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시는 듯합니다. 저는 그저 마음에 품은 의문을 물었을 뿐, 소은 아씨를 구한 것을 후회하지 않고 어떤 결과든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훗날 후회하게 되시는 일이 없으시길 바랄 뿐입니다." 후회? 강준은 가만히 눈을 들어, 진명우를 힐끔 바라보았고,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소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소준 곁에 서 있는 그녀는 얼굴에 복잡한 기색을 역력했다. 소은은 장명희의 부름을 받아 인사를 전하러 온 참이었다. 마침 소준이 함께하고 있어 뭇사람 입에 오르내릴 염려도 없었고, 어차피 오늘 생명의 은인인 강준과 진명우가 모두 자리에 있었으니, 정중히 인사를 올리는 게 도리였다. "두 분이 모두 계시기에, 누이가 감사를 드리고 싶다 하여 함께 왔소." "그날 강 세자님과 진 공자님 두 분께서 구해주신 덕에, 제가 목숨을 건질 수 있었습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소은의 시선은 오직 진명우에게만 향했다. 생각보다 훨씬 온화한 진명우에 대해서 소은은 별다른 기억이 없었다. 지금 보니 그 또한 나름 훤칠한 인물이었다. 물론 외모만 놓고 보자면, 강준이 더 뛰어난 미남이긴 했다. 허나 그 날카롭고 도도한 인상은 사랑에 빠진 소녀는 몰라도 이미 혼사를 겪어본 소은에게는 진명우처럼 다정한 자가 훨씬 더 편하고 끌렸다. 잠깐 넋을 잃은 그녀의 모습을 그 자리에 있던 세 남자 모두가 눈치챘다. 소준은 묘한 눈빛으로 강준을 한번 흘겨보았다. 얼마 전 위경화가 소은이 강준을 마음에 두고 있다고 은밀히 귀띔해 주었는데, 오늘 보니 또 진명우에게 마음을 빼앗긴 듯했다. 참으로 외모가 중요한 아이로군. 진명우는 담담하게 그녀의 시선을 받아들이며 정중히 물었다. "몸은 좀 괜찮으신지요?" "이제는 완전히 회복되었습니다." 소은은 고개를 살짝 숙이며 진심을 담아 감사 인사를 전했다. "작은 성의지만, 감사의 뜻을 담아 준비한 선물을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그녀는 진명우에겐 귀한 침향나무로 만든 선지를, 강준에게는 《변양선생 시집》을 준비했다. 전생에서 강준은 소은에게 이 시집을 몇 차례나 청한 적이 있었지만, 소은은 결국 그 책을 사황자에게 내어주었었다. 이번 생에서는 그때의 빚을 갚고자 감사의 뜻으로 준비한 것이다. 그녀는 요양 중에도 그 책을 찾느라 장명희가 아껴둔 지참물 상자까지 뒤지며 낯 뜨거운 물건들과도 마주쳐야 했다. 이미 한 차례 혼사를 치른 몸이라 해도, 꺼내 든 물건들은 여전히 얼굴을 붉어질 만큼 민망한 것들이었다. 그럼에도 소은은 꾹 참고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뒤졌다. 강준이 좋은 지아비는 아니었으나, 육체적인 면에서만큼은 묘한 즐거움을 안겨주었고, 그래서인지 마음 한구석에 아직도 미련이 남아 있었다. 그저 한번 눈요기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시집 속 몇몇 시들을 조용히 읽기도 했다. 워낙 안목이 있었던 소은이기에 그녀가 준비한 두 개의 선물은 강준도, 진명우도 거절하기 어려운 물건들이었다. 잠시 뒤, 강준은 적당한 핑계를 대며 자리를 떴고 진명우는 남아 소은과 몇 마디 더 대화를 나누었다. …… 왕부로 돌아온 강준은 목욕을 마친 후 딱히 할 일도 없어 소은이 건넨 《변양선생 시집》을 무심코 펼쳐보았다. 그러나 책장을 넘긴 순간, 그의 손이 멈칫했다. 그 책은 시집이 아니었다. 부부 간의 정사를 상세히 묘사한 화첩이었다. 내용은 방탕하고 적나라했으며 누가 보아도 얼굴이 붉어질 만한 장면이 페이지마다 가득했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책장을 넘기는 강준이었지만 귀가 저절로 붉어져 있었다. 무심코 넘긴 어느 페이지에는 한 여인의 곱고 단정한 필체로 적힌 글이 씌여져 있었다. [강준의 허리 힘으론 이 자세는 어렵겠지] 아쉬움인지 핀잔인지 모를 그 문장에 강준은 한동안 시선을 떼지 못하다가, 이내 쓴웃음을 흘리며 화첩을 옆으로 툭 내던졌다. 4 화 그 뒤로 며칠 동안 소은은 밖에 나가지 않았고 책방에 틀어박혀 밀린 학업을 보충하는 데 매진하였다. 학당에 돌아가기 며칠 전이 되어서야, 장명희를 따라 심원으로 가 할머니께 문안을 드리게 되었다. 진원은 고금란의 처소로 양옆으로 계수나무가 늘어서 있었고 비록 계수꽃은 이미 시들었으나 은은한 향기는 여전히 마음을 맑게 해주어 ‘심원’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할머니." 소은은 문턱을 넘기도 전에 인사를 올렸다. "아이고, 우리 소은이 왔구나. 어서 이리 와서 앉거라." 소은이 다가가 자리에 앉자 고금란을 시중들던 시녀가 손난로를 조심스레 건네주었다. 고금란은 손녀를 찬찬히 살펴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얼굴에 혈색이 도는게 제법 사람 같구나." 곁에 있던 장명희가 웃으며 덧붙였다. "며칠 뒤면 다시 학당에 들어가야 하오니 오늘은 일부러 어머님께 인사드리러 온 것이옵니다." 이에 고금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안타까운 듯 말씀하셨다. "몸이 이제 막 좀 나아졌는데, 그리 서두를 필요 있느냐?" 그러자 장명희는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공손히 아뢰었다. "석 달 뒤면 육예 시험이 있사옵니다. 소은이는 아직 사격 수준이 미흡하여 서두를 수밖에 없습니다. 국공부의 체면을 구길 수는 없지 않사옵니까?" 평범한 여인이라면 ‘무재도덕’이라 하여 재능을 갖추지 않아도 흠이 아니지만, 경성의 귀한 집 딸들은 예외라 예절, 음률, 사격, 말타기, 서예, 산술 이 여섯 가지를 통과해야 했다. 어느 집 아씨가 육예에 능하지 못하다면, 그 집안은 사람들 입에 마구 오르내리기 십상이었고 반대로 육예에 뛰어나면 인재라 칭송받으며 가문의 이름을 드높일 수 있었다. 전생에서 이맘때, 소은은 병약한 탓에 사격과 말타기를 제대로 익히지 못하여 인재로 뽑히지 못하였다. 혼인하고 몇 달이 지나서야, 강준과 함께 말을 타며 활 쏘는 법을 익혔고 그 실력 또한 제법이었으니 이번 생에는 제대로 도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고금란은 평소 국공부의 체통과 명예를 가장 중요히 여겼다. 게다가 육예를 통과하지 못하면 귀한 집 자제로서 혼처조차 얻기 어려운 법이었다. 그리하여 더 이상 말리지 않았지만 안쓰러운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할머니, 저는 이제 괜찮으니 걱정 마세요." 소은은 할머니의 손을 꼭 잡고 다정히 위로하였다. 고금란은 그녀의 이마를 톡톡 건드리며 나무라듯 말했다. "괜찮다면서, 요 며칠은 어찌 내게 얼굴 한번 비추지 않았느냐?" 꾸짖는 듯하였으나 말투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늘 마음은 할머니 곁에 있었지요. 다만 밀린 공부가 너무 많아 책방에서 빠져나올 틈이 없었을 뿐이에요." 고금란은 이내 진지한 눈빛으로 당부하였다. "이번엔 꼭 사예를 통과해야 한다. 내가 사람들 앞에서 고개조차 못 드는 일은 없어야 하느니라." 소은은 할머니가 국공부의 체면을 얼마나 중시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진지한 얼굴로 약속했다. "꼭 좋은 성적으로 돌아올게요, 할머니." 고금란은 만족스러운 고개를 끄덕이고는 시녀 미향에게 다과가 있는 곁방으로 소은을 안내하라 하였다. 그러고는 장명희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내일 선왕부에 간다 들었는데 나도 준비한 것이 있으니 함께 가져가도록 하거라." "알겠습니다." 장명희는 공손히 답했다. "네 서방이 국공부의 작위를 잇지 못한 이상, 앞날을 개척하려거든 벼슬길 외엔 달리 방도가 없을 터. 지금 선왕은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어 철주나 셋째가 출세하려면 선왕부를 거치지 않을 수 없으니, 예의를 게을리할 수 없지 않겠느냐? 내가 친히 챙겨야 진심이 전해질 것이다." 고금란이 말한 ‘셋째’는 바로 장명희의 아들이자, 소은의 오라버니 ‘소혁’이었다. "마음 써 주시니 송구할 따름입니다." 장명희는 겉으론 공손히 고개를 숙였지만 이미 고금란이 이번 일로 챙기려는 것이 비단 이방뿐만은 아니라는 것을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 대방 또한 선왕부와 인연을 맺기를 바라고 있음이 분명하였다. 소국공부가 점차 쇠퇴하고 있다는 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대방은 예전부터 소윤을 선왕부에 시집보내고자 했고, 그 일로 참 많은 공을 들였으나 눈이 높은 선왕부인에게 퇴짜를 맞았다. 세자 강준 또한 소윤에게 전혀 마음이 없음을 드러낸 바 있었다. 소윤은 소국공부 정실 자제였고 용모도 수려하고 재능 또한 뛰어났다. 자존심이 강한 소윤조차 강준에게 단 한 번이라도 얼굴을 보여달라며 편지를 써 보낼 만큼 자신을 낮추었지만, 강준은 단 한 줄의 회신조차 보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소윤은 한동안 상심이 깊었고 결국 위씨 가문에 시집을 가게 되었던 것이다. 대방은 이 사실이 외부에 새어 나가지 않게 조심했지만 장명희는 이미 그 내막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소은이도 내년이면 계례를 올리게 될 텐데, 상대를 생각해 보았느냐?" 고금란이 문득 장명희에게 묻자, 장명희는 살짝 미소를 지으며 슬쩍 말을 돌렸다. "학업 하나만으로도 머리가 아픕니다. 어찌 그 와중에 혼사까지 생각할 겨를이 있겠사옵니까? 계례 마치고 나서 천천히 고민해도 늦지 않사옵니다." 그러자 고금란이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말했다. "소은이의 혼사는 소국공부에 있어 매우 중대한 일이니 네가 깊이 고민해야 하느니라." 장명희는 미소 띠며 고개를 끄덕였으나 마음속으로 단호히 결심하고 있었다. 그녀는 결코, 소은을 소국공부의 발판으로 삼게 두지 않을 것이었다. 아침 공기는 차가웠다. 소은은 마차에 올라서야 움츠러들었던 몸이 조금 펴졌다. 진영주 부인이 친정을 방문한 탓에 오늘은 선왕부만 방문하면 되는 날이었다. "오늘은 옷차림이 단정하구나." 장명희는 만족스럽게 말했다. "아직 나이가 어리니, 화려한 장신구는 저와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건 어머니께서 하시는 것이 훨씬 잘 어울리옵니다. 아버지께서도 어머니의 그러한 모습을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소은은 두 사람 관계가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를 바랐다. 그래야 다른 이가 틈을 노릴 수 없을 터였다. 하지만 장명희는 콧방귀를 뀌었다. "네 아비 마음이 어디 나한테 있더냐?" "아버지는 풍채도 좋고 기품도 있으신 분이신데 정말로 그 여인을 마음에 두셨다면 어찌 그 여인에게 다른 사내가 생길 수 있었겠습니까? 당시 아버지께서 그 여인을 들인 것도, 할머니의 강요가 있었기에 억지로 받아들인 것이라 들었사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지금처럼 데면데면하신다면 할머니께서 또다시 아버지께 첩을 들이라고 하실 겁니다." 소은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허나 늘 차가운 얼굴로 마주하는 어머니를 보면 그 마음이 상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소은은 아버지가 한 번도 그 여인의 방에 들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말해버리면 어머니가 충격받을 것이 뻔하여 입을 열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아버지께 눈길 한 번 주시면 아버지도 분명 기뻐하실 것입니다." "앞으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은 말거라." 장명희는 말은 그렇게 하였으나 속으론 이미 마음속 깊이 새기고 있었다. 지아비가 자기편에 서야 자식들의 앞날 또한 자신이 주도할 수 있을 터였다. 반 시진 후, 마차는 선왕부 앞에 멈춰 섰다. 선왕부는 황제가 친히 하사한 저택으로, 경성에서 가장 번화한 곳인 장안가의 끝자락에 위치해 있었다. 처마와 기둥 곳곳엔 정교한 조각이 새겨져 있었고, 붉은 담장과 빛나는 유리기와가 햇살 아래 찬란히 반짝이고 있어 웅장하면서도 우아함도 잃지 않았다. 하인들의 안내를 받으며 소은과 장명희는 왕부에 들어섰다. 작은 화원을 지나니 양옆 가득 피어 있는 꽃들 덕분에 은은한 꽃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더 깊숙이 들어가니, 그곳엔 의란정이 있었고 그곳에서 선왕부인을 마주하게 되었다. 곁에는 선왕의 친동생의 부인 즉 둘째 강민의 생모, 이순미가 함께 있었다. 선왕부인은 마흔 즈음의 나이였다. 그녀의 옷차림은 매우 평범했지만, 이목구비는 유난히 화려하였다. 강준은 그녀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선왕부인은 소은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반년 만에 마주한 이 아이는 어느새 모란처럼 봉오리를 틔웠고, 몸매는 버들가지가 바람에 스치듯 가녀렸다. 두어 해만 더 지나면, 그야말로 절세 미녀가 될 터였다. 하지만 너무 돋보이는 여인은 오히려 화가 되기도 한다. 남자란 본디 미색에 약한 법. 그 때문에 선왕도 젊은 시절 많은 기회를 놓쳤고, 그 모든 것을 지켜본 이가 바로 선왕부인이었다. 그 시절은 그녀에게 달콤한 기억일지 몰라도 자기 자식이 아비와 같이 늪에 빠지는 건 원치 않았다. "갈수록 고와지는구나." 선왕부인이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여인이 아무리 곱다 한들, 결국 중요한 것은 학문과 덕성이지요." 장명희는 겉으론 담담히 말했으나, 속으론 뿌듯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전생에 소은의 시어머니였던 선왕부인은 강준의 냉대로 인해 소은에게 미안한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그녀에게 은근히 마음을 써주었고 그로 인해 소은도 진심으로 따르게 되었다. "부인께서 얼마 전 발진이 나셨다하던데 지금은 괜찮으신지요?" 하지만 선왕부인은 그다지 감흥 없는 눈빛으로 받아쳤다. 그녀 눈에는 이것이 순수한 걱정이 아닌, 뭔가 바라는 바가 있어 건네는 아첨처럼 보였다. "이제 거의 나았느니라. 헌데, 어찌 내가 발진이 났다는 걸 알았느냐?" 소은은 이미 대비책을 세워 두었기에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일전에 어의께 진맥을 받았을 때, 왕부에서 막 오시는 길이라 하시어 여쭈었고, 그때 이 일을 알게 되었사옵니다." 선왕부인은 더 이상 따져 묻지 않았다. 그녀는 이내 장명희와 집안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하였다. "심심하면 우리 집 시녀들과 함께 정원을 둘러보아도 되느니라. 춘자야, 아씨를 잘 모셔라." 선왕부인이 시녀를 불렀다. 소은은 고개를 숙여 감사를 드리고 춘자를 따라 뒷마당으로 향하였다. 선왕은 꽃과 나무를 유난히 사랑했기에 정원에는 화초의 종류도 다양하고 관리도 잘 되어 궁궐 못지않은 풍경을 자랑하였다.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왕부는 여전히 생기로 가득하였다. 다만 소은에게는 삼 년을 몸담았던 곳인지라 그토록 놀랍지는 않았다. 그러나 자신이 지냈던 별당, 경화거를 지나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발걸음이 느려졌다. 그곳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엔 수많은 감정들이 스쳐 지나갔다. "저곳은 세자의 침소입니다." 춘자가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세자께서는 그다지 조용한 걸 좋아하시는 분은 아니지만 유독 저 고요한 정원을 직접 골랐습니다. 그 때문에 부인님께서 늘 농을 건네시곤 합니다. ‘훗날 세자빈을 위해 골라둔 곳이겠지’ 하고 말입니다." 소은은 경화거를 그리 마음에 들어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저러한 정취를 좋아할 인물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그 심씨 가문의 아가씨일 것이다. 선왕부인도, 강준도 왕부에 들어올 이가 그 여인일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 여인이 아니었다. "저기 올라 구경해보시겠습니까?" 춘자는 가산을 가리키며 소은에게 물었다. 눈앞에 펼쳐진 익숙한 가산에 소은은 살짝 놀랐다. ‘여기까지 걸어오게 될 줄이야!’ 바로 그곳에서 그녀가 낙상 사고를 당했었으니 자연스레 가슴 한쪽이 서늘해졌다. "아씨?" 춘자가 그녀의 눈길이 흐려진 걸 보고 조심스레 불렀다. "아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진 적이 있어 썩 내키지 않는구나." 새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누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니 그녀는 소중히 여겨했다. ... 가산 위에서는 강준과 강민 형제가 바둑을 두고 있었다. 그들이 앉은 석탁 자리에서는, 막 자리를 뜨는 소은의 뒷모습이 훤히 내려다보였다. "… 방금 저 모습은 어딘가 상심한 듯한 표정인데?" 강민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리자, 강준은 백 자 한 점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난 도리어, 저 아씨가 어찌 이리 왕부의 길을 훤히 아는지 그게 궁금하구나." 강민도 조금 전 정원에 들어설 때, 인도하는 시녀보다 앞서 걷고 있었던 소은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녀는 단 한 번도 길을 헤매지 않았다. 강민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강준이 스무 살이 되기 전 한 번은 어느 한 여인이 하인을 매수하여 왕부의 원림 배치도를 손에 넣고는 연회가 열리던 틈을 타 강준의 침소로 숨어든 일이 있었다. 그 여인은 강준에게 ‘몸을 더럽혔다’는 누명을 씌워 억지로 책임을 지게 하려는 속셈이었으나 다행히 계략이 들통이 나 큰 화는 면할 수 있었다. "소국공부에서 마음을 굳힌 듯하군. 둘째도 모자라 이제는 넷째까지 들이미는 걸 보면 말이야." 강민이 코웃음을 쳤다. 강준은 그를 흘깃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왕부에 자제가 나 하나뿐이더냐?" 강민도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나 또한 조심할 테니 형도 경계를 늦추지 마. 괜히 저 여인에게 코 꾀어선 안 돼." 소철주는 황제의 미움을 사고 있는 데다 사황자의 책사로도 얽혀 있어 그를 처단할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와 관련된 일은 작은 빌미 하나로도 큰 화가 될 수 있었으니 절대 엮여선 안 되는 일이었다. "허나 소국공부는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냐? 둘째는 국공의 적녀라 치더라도, 넷째는 이방 자제에 재주도 많이 떨어지지 않아? 둘째도 마다한 판에, 넷째를 들이밀어?" 강준은 불현듯 며칠 전 받은 그 방탕한 화첩이 떠올랐다. 소은이라는 여인은, 남자의 마음을 흔드는 데 꽤나 능한 듯했다. 하지만 그런 재주는 어디까지나 정숙한 여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법이었다. 잠시 생각에 잠기던 강민이 조심스레 말했다. "내 생각엔, 심씨 가문의 둘째 아씨와의 혼사를 정식으로 매듭짓는 것이 좋을 것 같아. 밤이 길어지면 괜한 꿈만 많아지잖아." 5 화 사내에게 따로 정해진 혼약이 있다면 소국공부에서도 선왕부와의 혼사를 바란다 하여도 물러설 줄 알아야 하는 법. 더구나 장안의 수많은 귀한 집 따님들 가운데 심지연은 단연 돋보이는 존재로 사내들이 너도나도 사모하는 여인이라 쓸데없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하루빨리 혼약을 정하는 것이 좋다고 강민은 생각했던 것이다. “궁중의 형세가 아직 분명치 않으니, 혼담을 나누기엔 시기가 너무 이른 감이 없지 않아.” 황제의 의심이란, 머리 위에 드리운 칼날 같아, 혹여 성상께서 이 혼사를 권세의 결탁으로 오해하실까 두려웠다. 태자는 아직 책봉되지 않았고, 형세도 어수선하니, 강민 또한 더는 말을 잇지 못하였다. --- 소은과 그녀의 어머니가 선왕부에 머무는 동안, 혼례 적령기의 두 사내는 끝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뜻을 어찌 모를 수 있었을까? 선왕부 측에선 혼인을 맺을 뜻이 없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장명희도 또한 혼인을 염두에 둔 것이 아니었기에 두 사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점심을 마치고, 소은의 어머니는 곧 작별을 고하였고 떠나기 전에 소은이 선왕부인에게 조심스레 말하였다. “동설과 계화, 인동, 택란을 달여 고약으로 쓰시면 흉터에 효과가 있으니 부디 한 번 써보시옵소서.” 전생에서 화상을 입었을 때, 소은은 흉을 지우기 위해 수많은 공을 들인 끝에야 이 처방을 얻을 수 있었다. 선왕부인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리더 그저 희미한 미소로 받아넘겼다. “이리 마음 써주니. 고맙구나.” 소은도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시어머니였던 선왕부인은 오직 가족에게만 따뜻한 사람이었다. 허나 미모에 대한 욕심만큼은 누구보다 지극했기에, 소은이 건넨 방법은 반드시 써보게 될 터이다. 모녀가 떠난 후, 이순미가 감탄하듯 말하였다. “참으로 어여쁘게 자랐군요.” “마음에 든 것입니까?” 선왕부인이 이순미를 바라보며 묻자, 이순미는 고개를 저으며 답하였다. “용모는 내 마음에 꼭 들지만 둘째는 셋째처럼 누구 말을 듣는 아이가 아니지요. 그 아이 일은 내 뜻대로 된 적이 없습니다.” 이에 선왕부인은 속으로 탄식하였다. 사람들은 셋째가 가장 그녀 말을 잘 따른다 여기지만, 실상은 강준이 가장 제 멋대로였다. 소년 시절 학문을 멀리하여 군막에서 부친에게 곤봉으로 얻어맞아, 석 달을 침상에 누워 있었어도 결코 굽히지 않았다. 그 뒤 스스의 뜻으로 배우기 시작한 뒤에야 지금의 문무를 겸비한 강준이 된 것이다. 무언가를 하기로 했다면 그건 반드시 그 스스로의 뜻이었고 그 누구도 강제로 시켜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정희공주가 줄곧 강준을 마음에 두고 있었으나 혼사로 이어지지 못했던 것 또한 그가 일부러 막은 까닭이라, 선왕부인은 믿고 있었다. --- 한편, 소은은 이틀 후 다시 학당으로 돌아왔다. 여자 학당과 남자 학당은 모두 향산서원 소속으로, 건국 초기에 세워진 학당이었고 대연에서 가장 명망이 높았다. 대연 과거 시험에서 장원, 방안, 탐화를 차지한 자들 대부분이 향산서원 출신이었고, 금년 봄 과거 회원은 선왕부의 세자 강준으로, 두 달 남짓 지났건만 아직도 사람들 사이에서 회자되고 있었다. 강준은 지난해 선왕을 따라 전장에 나가 이미 전공을 세웠고, 황제께서 벼슬을 내릴 뜻이 있었기에 굳이 과거에 응할 필요는 없었으나 무장 신분에 만족하지 않고 학문으로 벼슬길에 나아가려 다시금 과거에 응시하였던 것이다. 비록 그가 이미 이미 서원을 졸업한 몸이나 그의 스승은 여전히 자주 이 자랑스러운 제자를 떠올리며 ‘재주가 뛰어나고 행실이 고우며, 기개와 식견이 넓어 반드시 큰 공을 세워 틀림없는 위인이 될 것이다.’라고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여학당에는 소녀들이 삼삼오오 모여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소은이 들어서자, 위경화가 그녀를 향해 활짝 웃으며 말하였다. “가을 사냥에 딱 맞춰 돌아왔네.” 소은이 서두른 이유는 바로 이 가을 사냥 때문이었다. 대연에서는 여인인들이 무덕을 중히 여기지 않기에, 가을 사냥은 본디 남자들의 일이었으나, 이번에 북제 사절단이 방문하면서 상황이 달려졌다. 함께 동행한 북제의 한아공주께서 사냥을 원하였기에 성상께서 여군들도 함께 나서게 하신 것이었다. 소은은 이번 기회에 기마와 궁술을 다지려 하였다. 이미 수년 간 손을 놓고 있었던지라 몸을 다시 익히는 것이 중요하였다. “왜 이번엔 여군들까지 가을 사냥에 나서는지 궁금하지 않아?” 위경화가 슬쩍 묻자 소은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되물었다. “이유가 뭔데?” “북제 공주가 함께 왔거든. 유목 민족은 본래 기마와 궁술에 능하니, 대연의 사냥터를 경험해 보고 싶다 하였지. 그러니 성상께서도 여군들을 함께 보내신 거야.” 위경화는 고개를 살짝 숙이며 소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헌데 들리는 말로는, 부마를 찾기 위함이란 소문도 있어.” 공주의 사적인 일까지 소은의 기억에 없었다. 이번 가을 사냥은 규모가 유례없이 크고 성대하여 학당에서는 여군들을 둘씩 짝지어 마차에 태우도록 하였다. 소은의 짝은 강미였다. 두 사람은 어려서부터 왕래가 거의 없었으므로, 그다지 친하지도 않았다. 그저 형식적인 인사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각자 할 일을 하였다. 그렇게 마차가 길을 달리던 중, 누군가 “오라버니!”하고 부르는 바람에 강민의 시선이 무심코 마차 안을 스쳤다. 그 속에 한 아씨가 책을 읽고 있었다. 강미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분도 바르지 않은 얼굴에 눈빛은 맑고 그윽하여 절세 미녀라 불러도 과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지난 십팔 년간 고요했던 강민의 마음이 알 수 없이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방금 들에서 과일을 좀 따왔는데 맛이 괜찮더구나 너희들도 맛보면 좋을 듯하여 가져왔다.” 그는 애써 시선을 거두며 아무렇지 않은 듯 말하였다. “고마워!” 평소 산해진미만 먹는 강미는 가끔 야생 과일을 맛보는 것 또한 색다른 즐거움이었다. 잠시 생각하던 생각에 잠기던 강민이 조용히 물었다. “너와 함께 마차를 탄 여인은 누구냐?” 강미가 대답했다. “소국공부의 소은 언니야.” 강민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 여인이 소은, 바로 소씨 가문의 넷째 아씨 였던 것이다. 강민도 물론 그녀를 알고 있었지만 대부분 멀리서 스친 것이 전부였고 그날 선왕부에서도 얼굴을 똑똑히 보지 못했기에 그저 여린 아씨로만 여겼으니, 어딘가 익숙한 느낌은 있었지만, 그 여인이 소은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쩐지 소국공부가 또 한 명을 들이밀 용기가 있었던 이유도 소은의 빼어난 미모였던 것이다. “무슨 일 있거든 나를 부르거라.” 강민은 복잡한 마음을 안고 동생에게 당부한 뒤, 조용히 발을 내렸다. 강미는 과일을 소은과 나누며 말했다. “우리 둘째 오라버니는 생김새는 험하나, 마음씨는 참으로 좋은 사람이에요.” 소은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생에서 강민은 그녀를 무척 아껴 주었고, 그녀의 오라버니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었다. 게다가 성품 또한 강직하여 소은은 그에 대한 인상이 매우 좋았다. 길을 가는 도중, 강미는 졸음이 와서 잠시 눈을 붙였지만, 소은은 도통 잠이 오질 않았다. 방금 먹은 과일은 두 알뿐이었고 입맛을 달래기는커녕 도리어 더 먹고 싶은 마음만 커졌다. 마차 밖엔 강민이 여전히 호위 중이었다. 소은이 살그머니 발을 걷었지만 밖은 잘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나직이 묻었다. “강민 도령님, 사냥터 쪽에도 이런 과일이 있을까요?” 허나 그녀는 지금 마차 밖에 있는 이가 강민이 아니라 전생에 그녀의 서방이었던 강준이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녀의 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말투는 듣는 이로 하여금 단순히 과일을 묻는 것이 아니라 말을 걸기 위한 핑계를 대는 듯한 느낌을 주기에 충분했다. 가을바람에 마차의 발이 살랑이며 흔들렸고 살짝 올라간 발 틈 사이로 말을 건 여인의 손이 가끔 보이다가도 흔들리는 발 뒤로 다시 숨었다. 그 모습은 요염하기가 마치 뼈조차도 없는 듯하였다. 소은이 다시 정중히 덧붙였다. “만약 그곳에 없다면... 혹 더 받을 수 있을까요? 강민 도령께서는 인심이 너그러우시다 들었기에, 감히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입다. 훗날 반드시 사례를 드리겠습니다.” 이쯤 되면 그 '사례'라는 말에도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고, 남녀 사이의 정을 암시하는 뉘앙스가 없지 않았으니, 방술에 대해서 평을 늘어놓던 여군이라면 그리 순진한 인물은 아닐 터였다. 강준이 눈을 가늘게 뜨며 속으로 생각했다. 감히 선왕부에서 당나귀를 타고 마을을 찾으려 하다니 머리가 정말 온전치 못한 게 분명하였다. 소은은 그가 두 번이나 답하지 않자, 못 들은 것이 아닐까 싶어 발을 좀 더 걷어 올렸다. 이번에는 밖이 훤히 보였다. 그 순간, 그녀는 깜짝 놀랐다. 호위 중인 인물이 강민이 아니라 바로 세자 강준이었다. 말 위에 앉은 그는 몸에 딱 붙는 군복이 곧은 체격을 한층 돋보이게 하였다. 게다가 강건하면서도 고결한 위엄까지 더해져 어지간한 말로는 감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였다. 그는 그 자리에서 소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나 이 상황이 그리 뜻밖은 아니었다. 본디 강준은 여동생 강미를 극진히 아끼는 사람이었고 여정이 위험할 수 있는 만큼 직접 나서서 곁을 지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소은은 이번 가을 사냥에서 강준과 마주칠 수 있음을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멀찍이서 한두 번 스치는 정도일 줄 알았지, 지금처럼 이리 가까이 얼굴을 마주하게 될 줄은 상상치 못하였다. 그의 얼굴에 서린 의심과 탐색마저도 소은은 또렷이 보아낼 수 있을 정도로 두 사람 거리는 너무나 가까웠던 것이다. 소은은 마차 안에서 조심스레 몸을 낮추어 예를 갖추어 공손히 말했다. “세자저하 만수무강하세요.” 미인은 제대로 예를 갖추지 못하였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법. 허나, 속셈을 품은 미인은 오히려 사람의 경계를 사기 마련이었다. 강준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녕 과일이 먹고 싶어서 그러는 것입니까?” 6 화 소은은 강준이 방금 한 말의 속뜻을 정확히 가늠할 수 없어 잠시 머뭇거렸다. “그대 위해 과일을 따드리면 아씨는 어떤 답례를 할 것입니까?” 강준의 차가운 말투 속엔 어딘가 모르게 의미심장한 뉘앙스가 깃들어 있었다. 이것은 분명 경고였다. 만약 그녀가 관례도 치르지 않은 어린 여인이었다면 이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했겠지만 소은은 이미 한 차례 혼인을 치른 적 있었고 강준과는 부부로 동침했던 사이였으니 그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소은이 '감사의 뜻'이란 명목으로 강민을 유혹하려 든다 생각한 것이었다. 소은은 이미 성숙한 여인이었으니 자연히 혼처를 찾으려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 상대가 선왕부는 절대 아니다. 지금 소은은 순진한 여군의 탈을 잘 써야 하는 입장이었다. 하여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과일을 따다 주신다면, 소은은 책 한 권 써드리거나, 그림을 그려드릴 것이옵니다. 강민 도령께서 자리에 안 계시니, 세자 저하께서 도와주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애초에 밖에 있는 이가 강준이라는 걸 알았더라면, 절대 이런 말은 꺼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입을 연 이상, 자연스럽게 넘기는 편이 나았다. 이제 와서 물러서기보단, 자연스럽게 이어가는 편이 낫다고 여긴 것이었다. 강준은 의미심장한 눈길을 거두며 냉정하나 예의를 잃지 않고 말했다. “곧 그대들에게 과일을 가져다줄 것입니다. ” 강준은 자신이 던진 경고를 그녀가 알아들었을 것이라 여겼다. 그는 목적을 달성하였기에 더 이상 아무 말 않고 멀찍이 선을 그었다. 그는 ‘그대에게’가 아닌 ‘그대들에게’라고 말했다. 어찌나 많은 여인들이 그를 사모하였기에 이리도 경계하는 것일까? 허나, 소은은 그 여인들 중 하나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세자 저하께 감사를 드리나이다.” 소은은 정중히 인사한 뒤 발을 내렸다. 잠시 후, 누군가가 씻은 과일을 한가득 담은 바구니를 가져왔으나, 소은은 이미 과일을 먹고 싶던 마음이 싹 가셔 있었다. 반나절쯤 지나 잠에서 깬 강미는 창밖을 보다 호위하던 이가 강준으로 바뀐 것을 보고 반갑게 말했다. “오라버니, 기마복을 입은 지연 언니의 모습이 참으로 근사했어. 맞다. 이 과일들 언니한테 좀 전해줄 수 있어?” 과일은 핑계였고 그저 두 사람이 다시 마주하게 하려는 계책이었다. 강준이 그 바구니를 들여다보니, 전혀 손대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물었다. “소은 아씨께선 과일을 드시지 않았느냐?” 소은이 이내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문득 입맛이 사라졌으니 세자 저하께서 가져도 됩니다.” 그러나 소은은 괜히 마음이 불편했다. 방금 전까지 과일을 달라고 해놓고는 한 입도 대지 않았으니, 거짓말을 한 것처럼 되어버린 셈이다. 억울했지만 해명할 길은 없었다. 강준은 그 후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이후의 여정이 적어도 가시방석은 아니었다. “셋째 오라버니는 심지연 언니만 보면 이 여동생은 잊어버리신다니까.” 강미는 툴툴거리며 말했지만, 말투에는 그다시 원망은 담겨 있지 않았다. 소은도 그제야 왜 강준이 돌아오지 않았는지를 깨달았다. 그녀는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고 말없이 있었다. --- 기린산 기슭에 이르자, 수레와 말이 멈춰 섰고, 호위병들이 진을 치기 시작하였다. 막 마차에서 내리려는 찰나, 누군가가 그녀를 불렀다. “소은 아씨!” 소은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진명우가 말에서 뛰어내리더니 그녀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분명 그도 열여덟 즈음 되었지만, 몸짓과 눈빛은 한층 성숙한 남자의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수수한 청색 옷차림에도 준수한 얼굴과 반듯한 기품은 결코 가릴 수 없었다. 한 번 혼례를 치러본 여인은 남자를 겉모습만으로 보지 않게 되니, 소은은 진명우가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이’라는 것을 단번에 느낄 수 있었다. 부부란 서로 애정이 없더라도 ‘부부의 도리’가 얼마나 중요한지 소은은 뼈저리게 느꼈었다. “명우 도령이군요.” 소은은 수줍은 듯 예를 올렸다. “야과를 좀 땄사온데, 아씨께서 좋아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그가 손에 든 포자루를 내밀며 덧붙였다. “억지로 드시지 않아도 됩니다.” 소은은 사실 별로 먹고 싶은 마음은 없었지만, 그의 성의를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잘생긴 사내의 배려는 여인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이었다. 그녀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맙사옵니다, 마침, 과실이 먹고 싶던 참이었사옵니다.” 그녀가 손을 뻗어 받아 드니, 묵직한 무게가 손에 느껴졌다. “다른 여군들에게도 과실을 나눠주셨는지요?” 소은이 물었고, 진명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날 아씨께서 주신 선물이 무척 마음에 들어 감사의 뜻으로 아씨께만 드리는 것입니다.” 말인즉, 과실은 핑계요, 다른 여군들에겐 주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남녀유별이 엄한 시대인지라, 진명우는 오래 머무를 수 없어 간단히 인사만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소은은 그가 일부러 자신에게만 과일을 건넨 일을 곱씹기 시작했다. 비록 ‘연모한다’까진 아니어도, 호감이 있는 것은 분명했다. 진씨 집안 또한 복잡한 세력 싸움과는 거리가 멀었고 진명우 또한 성품이 곧고 얼굴도 준수했다. 만일 마음까지 한결같다면, 그는 충분히 혼처로서 좋은 상대였다. --- 한 번 혼례를 치러본 여인이라면, 상대를 고를 때 그 눈은 현실적이 되는 법이라. 가문, 인품이 먼저요, 그다음이 정이라. 마음은 차차 키워가면 그만이니, 사내가 충분히 괜찮고, 또 집안을 아낄 줄 안다면 여인의 마음은 자연히 싹틀 수 있는 것이다. 소은이 이런저런 생각에 잠겨 있다가 무심코 눈길을 돌려보니 강준이 멀지 않은 곳에 말을 탄 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그녀 손에 들린 보자기를 힐끗 보고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은 뒤 말을 돌려 떠나버렸다. 그 눈빛은 소은의 속내가 순수하지 않음을 암묵적으로 확인하느 듯한 기색이었다. 소은의 안색이 붉게 물들었다가, 이내 창백하게 식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못 들은 척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둘은 남남이니, 그가 자기를 어찌 보든 이젠 상관없는 일이라 여겼다. 저녁 연회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었고 여군들은 눈에 띄지 않도록 조심하며 장막 안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아까는 어느 댁의 도령인지 지연 언니만 뚫어져라 보며 정신을 못 차리더군요.” 그는 주씨 가문의 아씨 주영심이었다. “장안에서 지연 언니를 마음에 두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습니까? 수많은 도령들이 앞에선 물론, 뒤에서도 자주 말을 걸 궁리를 하니 말이지요.” 강미가 거들자, 누군가가 장난스럽게 물었다. “혹여 그대 오라버니께서도 지연 아씨를 마음에 두신 겁니까?” 그러자 강미는 웃으며 심지연을 향해 말했다. “어머님께서 셋째 오라버니께 지연 언니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셨더니 오라버니께서 ‘경국공부의 따님은 글재주가 뛰어나고 학식이 깊으며 예의와 이치를 아는 분이라 존경스럽다’ 하였지요.” 여인들이 그 말을 듣고 은근한 부러움을 품었으나, 심지연이라면 당연히 최고의 짝을 맺어야 한다 생각했기에, 세자가 그녀를 택하였다면, 모두가 고개를 끄덕일 일이라 여겼다. 그러자 심지연이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그만 놀리시지요. 강미 아씨. 세자 저하는 고결하신 분이시니 분명 잘 어울리는 인연이 따로 계실 것입니다. 혼사는 어디까지나 부모님 뜻이 크지요.” 허나 붉게 물든 귀는 그녀의 마음을 숨기지 못하였다. “그럼, 둘째 강민은 어떠합니까?” 누군가 묻자, 강미가 입을 삐죽이며 말하였다. “그저 맨날 칼만 휘두르며 봉술 연습만 하고 있지요. 누군가가 저를 조금이라도 건드렸다 하면 칼을 들고 바로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그야말로 무뚝뚝한 무인이 따로 없지요. 나중에 새언니 되실 분은 진짜 고생 좀 하실 겁니다.”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강민을 마음에 두고 있는 여인도 적지 않았다. 무뚝뚝하고 차가운 면이 오히려 끌리기도 했다. 소은은 불현듯 자신의 셋째 오라버니가 떠올랐다. 그녀의 오라버니 또한 근사한 인물이었지만 변방에 오래 있어 사람들 기억 속에서 점점 잊혀지는 듯했다. 그녀는 문득 먹먹함이 밀려왔다. 전생의 마지막 기억이 차디찬 그의 시신이었다는 사실이 가슴을 아리게 하였다.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라버니는 웃으며 그녀를 시집보냈다. “강준이 혹여 너를 힘들게 하면, 내가 달려가 때려주마. 언제든 선왕부가 싫어지면, 내가 데리러 올 것이다.” 그 따뜻한 약속은, 다시는 지켜지지 못했다. 그녀는 눈에 맺힌 서러움을 감추고자, 장막 밖으로 나와 홀로 호숫가에 앉았다. 가을은 제법 싸늘했다. 차가운 바람이 얼굴에 스치자, 소은은 머릿속이 점점 더 또렷해졌고 잊고 지냈던 기억들이 하나둘 선명해졌다. 오라버니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녀에게 남겼던 편지에는 단 한마디 어머니와 너 자신을 잘 보살펴라는 한마디만 적혀 있었다. 그는 이미 자신이 위험한 처지에 놓였음을 알고 있었다. 그의 죽음은, 결코 단순한 우연이 아니었다. 오라버니의 죽음으로 가장 많은 이익을 본 자들은 대방, 위씨 가문, 그리고 경국공부였다. 하여 그의 죽음이 이들과 절대로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소은은 의심하고 있었다. 대방은 같은 집안 식구라, 오라버니가 쌓은 공을 대신 이어받은 건 어쩔 수 없다지만, 문제는 그 죽음조차도 대방과 연이 되어 있진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소은은 시선을 떨구었다. 그것만큼은 아니길 바랐으나, 만약 그 의심이 사실이라면… 국공부 전체가 그녀의 오라버니 하나만 못한 셈이 된다. --- 그 시각 멀리에서 조용히 그녀를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그는 바로 강민이었다. 그는 소은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해 있었고 마주치지 않으려 자리를 피하려던 찰나, 소은이 느닷없이 호숫가에 앉아버려, 바위 뒤에 몸을 숨긴 채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처음엔 그녀가 금방 떠나겠지 싶어 조용히 기다렸으나 무려 반 시진이 지나도록 자리를 뜨지 않자 더는 머무를 수 없었던 강민이 입을 열었다. “이곳엔 호위병들이 적으니, 속히 돌아가심이 좋겠습니다.” 표정은 무뚝뚝하였으나, 목소리엔 염려가 배어 있었다. 그녀가 진실로 계략을 품고 있든 아니든, 여인이 위험에 처하는 걸 방관할 수는 없었다.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어도 참견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소은은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강준보다는 더 늠름하고, 다부진 몸집, 무인이란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기골이었다. “강민 도령이군요.” 소은은 마음을 추스르고 슬며시 그의 뒤편을 흘깃 바라보았다. 다행히도, 강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소은은 가볍게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호수가 비록 운치는 있으나, 변방이라 언제든 위험이 닥칠 수 있으니 동행하는 이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새겨듣겠사옵니다. 그럼 저는 이만 돌아가겠습니다.” 소은이 고운 미소를 지으며 감사를 전했다. 그 미소는 다정하고도 달콤하여 강민이 가장 꺼려하는 요염한 기녀들이 떠오를 법한 모습이었건만…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싫지 않았다. 도리어 마음이 가벼이 흔들리는 자신의 모습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은이 자리를 떠난 뒤에도 그 자리엔 은은한 복숭아 향이 오랫동안 감돌았다. 지금은 복숭아꽃도, 복숭아 열매도 열리는 계절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 향은... 소은 아씨의 향기일까? 강민은 전장을 누빌 때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던 사내였거늘, 이 순간에는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강민은 자꾸 그 복숭아 향이 떠올랐으니, 강미가 말을 걸어도 건성으로 듣기만 할 뿐이었다. “준 오라버니, 오늘 민 오라버니가 좀 이상하지 않아? 귀신에 홀린 건지, 아님 어느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원..” 7 화 강민은 그 말에 적잖이 당황했다. 남녀 간 농을 들어본 적이 없던 터라 그런 대화엔 도무지 익숙하지 않았다. 허나 여전히 굳은 얼굴이었기에 겉으론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내 어찌 미색에 이끌려 정사를 그르칠 사람이겠느냐. 그런 일은 없으니 염려 마라.” 그는 꼿꼿이 앉아 정색한 채로 대답하였다. 강미는 너무나 진지한 그의 태도에 장난칠 맛이 떨어졌다. 하지만 속으로는 ‘정말 재미 없는 사람’이라며 그를 나무랐다. 한편 강준은 그가 방금 전에 소은과 마주쳤다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여인의 수작이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니라 판단하였기에 경계할 필요조차 느끼지 못했다. 밤에 있을 모닥불 연회를 앞두고, 여군들은 일찍이 의복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평소의 화려함은 아니었지만 각자 자신만의 개성을 살려 충분히 눈길을 끌 수 있도록 공을 들였다. 소은은 연한 빛깔의 몸매 라인을 살린 옷으로 준비했고 머릿장식 또한 눈에 띄지 않도록 했다. 그 모습은 너무나 소박하고 평범했다. 위경화가 그녀를 이리저리 훑어보며 말하였다. “장안에서 내노라 하는 도령들이 오늘 이 자리에 모였거늘, 넌 어찌 이리도 수수하게 입고 나온 거야?” 소은은 타고난 미모였으나 이 차림으로는 사람들 속에 섞이면 눈에 잘 띄지도 않을 판이었다. 허나 그녀는 바로 이점을 노린 것이다. 전생에도 혼약을 맺기 전, 몇몇 골칫거리들이 그녀에게 관심을 보였다. 그 중 한명이 바로 육황자였다. 그는 한때 그녀를 측실로 맞이하려 했었다. 만약 그때 강준과의 혼약이 없었더라면, 그 운명도 피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이번에도 황자들 중 오직 육황자만이 경성에 머물고 있어 오늘 연회에도 반드시 참석할 터이니, 소은은 그의 관심을 끌고 싶지 않았다. “나는 기마와 궁술을 익히러 온 것이지, 배필을 찾으러 온 것이 아니야.” 소은이 해맑게 웃으며 답하자, 위경화도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눈에 띄는 것도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는 법이지. 나는 춤을 준비하러 가야 하니,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위씨 가문은 무예에 조예가 깊었고 그녀의 할아버지는 예부에 몸을 담고 있어, 사절단이 올때마다 연무를 총괄하고 있었다. 이날 연회 역시, 위경화가 무예를 도맡아 준비하고 있었다. 소은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연회는 유시에 시작되었다. 경성의 여인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자, 그 자리는 찰나에 백화가 만개한 듯 화려하게 물들었다. 맑은 연못에 핀 연꽃처럼 청아하되 절대 요염함이란 찾을 수 없는 이는 심지연이었고, 무궁화처럼 봄바람에 흔들리며 자유롭고 사랑스러운 이는 강미였으며, 난초처럼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이는 부가영이었다. 미인들이 저마다의 자태를 뽐내며 아름다움을 겨루듯 화려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들의 모습에 아직 혼약이 정해지지 않은 사내들의 마음은 이리저리 요동치기 시작하였다. 한편, 소준은 한참을 두리번거렸지만 도무지 여동생이 보이지 않았다. “오라버니.” 누군가 그의 옷자락을 살며시 잡았다. 고개를 돌리니, 연한 빛의 옷차림을 한 이는 다름 아닌 소은이었다. 여전히 빼어난 미색을 지녔으나 오늘의 옷차림은 눈에 띌 만한 장식도, 색감도 없어 유심히 보지 않으면 시녀들과 구분이 어려울 정도였다. “내일 말 좀 빌려줄 수 있어?” 소은은 그의 곁에 몸을 내리며 조심스레 물었다. 그녀는 이번 기회에 호걸의 칭호를 얻고자 했다. 기린산은 지세가 험하고 복잡하여, 이곳에서 승마와 활쏘기를 익힌다면 훗날 궁술과 승마 과목에서 상등의 성적을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한 것이었다. 하지만 소준이 고개를 저었다. “너는 승마에 능한 자가 아니니 이토록 험한 곳에서 연습하는 건 위험할 수 있어.” 소은은 무심코 맞은편에 앉은 진명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꼿꼿한 자세로 앉아,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는 묘한 애틋함이 어려 있어 마치 잃었던 것을 되찾은 듯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소은이 그를 향해 해맑게 웃어보이자, 진명우는 잠시 멍하니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하지만 그의 평온한 얼굴과는 달리 그의 귀는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잠시 생각하던 소은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기회에 제대로 배워보고 싶어. 오라버니가 명우 도령께 승마를 가르쳐 줄 수 있는지 한번 여쭤봐 줄 수 있어?” 소준은 무관이 아닌 문관인지라 무예에 능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 있는 수많은 도령들 중 진명우야말로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인품이 올곧아 아무나 흘깃거리는 가벼운 자들과는 거리가 멀었다. 무엇보다 그의 궁술과 승마 실력은 꽤나 뛰어난 편이라 알려져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소은은 그와의 접촉이 싫지 않았다. 소준은 마음이 다소 복잡하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 그자가 내게도 이 말을 꺼내더구나. 네가 혹 모르는 것이 있거든, 자신에게 물어봐도 된다고 말이다.” 소은은 혹여 누군가가 먼저 그에게 배움을 청했을까 염려하였으나, 소준의 말에 마음이 놓였다. 진씨 가문이 경성의 명문가들 사이에선 존재감이 크지 않았지만 진명우는 여인들사이에서 꽤 인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 즈음, 경무제와 북제 한아공주가 모습을 드러냈다. 올해로 쉰을 넘긴 경무제는 흰 머리 하나 없이 정정하고 기백이 넘쳐 그 풍채와 위엄은 산과도 같아 경외심을 품도록 하는 제왕의 기운을 뿜고 있었다. 북제 공주는 이목구비가 선명하여, 한인과는 다른 이국적인 미를 지녔다. 단연 흔치 않은 절세미인이었다. 그 일행 중에는 강준과 육황자도 있었다. 두 사람은 외사촌지간으로, 육황자의 생모는 선왕의 친여동생인 운귀비였고, 지금껏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이러한 자리에서 황제와 동행할 수 있는 이가 오직 강준뿐이라는 것은 선왕부 황제의 신임을 받는 외가라는 소문이 결코 과장이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폐하, 대연의 여인들이 하나같이 천상의 선녀와 같아 눈이 어지러울 지경입니다.” 북제 공주가 웃으며 말하니, 경무제가 유쾌히 응하였다. “허면 대연의 도령들은 그리 잘생기지 않았다는 말입니까?” “세자저하와 육황자를 먼저 뵈었으니 말이지요. 옥처럼 빛나는 군자들을 보고 나니 그 뒤로는 아무리 준수하다 한들 성에 차지 않습니다.” 그녀는 슬며시 강준을 바라보았다. 이번에 그녀를 맞이한 이도 강준이었다. 그를 처음 보았을 때 꽃이 향기를 잃고 옥은 광채를 잃은 듯 존재만으로 주위를 무색케 하는 이라 느꼈다. 세자저하의 모습은 마치 매화처럼 고결하고 냉담하여, 향기가 뼛속에 배어 있는 듯했다. “내 조카를 옥이라 부르니, 차라리 짝을 맺어주는 것이 어떠합니까?” 경무제는 강준을 바라보며 슬며시 농을 던졌다. 하지만 그 말에 자리에 있던 사람들 중 꽤나 많은 이들의 표정이 굳어버렸다. 소은은 공주가 이번에 경성에 내려온 이유가 짝을 고르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 상대가 강준일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심지연의 낯빛이 어느새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소은이 슬쩍 강준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전혀 동요한 기색이 없었고 그저 태연하고 침착한 모습이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소은은 마침내 그 뜻을 깨달을 수 있었다. 선왕이 병권을 틀어쥐고 있으니, 선왕부 세자를 외국 공주에게 내줄 리 없었고, 그저 강준이 혼사에 대해 의중을 떠보려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황제가 선왕을 신임하긴 하나 선왕부가 지나치게 강대해지는 것은 바라지 않았다. 황제가 바라는 것은 언제나 신하들 사이의 견제와 균형, 강자들끼리 손잡는 것이 아닌 서로 부딪히는 구도였으니 말이다. “폐하께선 진정 세자저하를 제게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공주는 농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녀는 진심을 담아 두 눈을 반짝거렸다. 경무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은 채 말했다. “그야 세자 본인의 뜻에 따르는 것이지, 억지로 명할 수는 없는 일이지요.” 공주의 기대에 찬 시선이 강준에게 향하자 강준은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북지의 전란은 비록 평정되었으나, 앞으로 일 년은 여전히 불안정 할 것입니다. 부친 선왕께서도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으니 저는 당분간 가정을 이룰 뜻이 없습니다.” 소은은 그가 선왕을 이유로 이를 슬쩍 피해 가려는 것임을 곧바로 짐작했다. 지난해 큰 전공을 세운 선왕은 현재 북지에 머무르며 정세를 다스리는 중이라, 황제 또한 함부로 말할 수 없을 터였다. 소은은 다시 심지연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한결 누그러진 표정은 다시금 평온을 되찾은 듯했다. 허나 북제 공주는 거절당했음에도 전혀 낙담하는 기색없이 쿨하게 웃으며 말했다. “세자저하, 저를 좀 더 알아가신다면 제 매력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강준은 여전히 예를 갖춘 채로 답하였다. “공주께서는 귀한 몸이오니 그 진가를 모를 이 없을 것이지요. 허나 저는 뜻이 없습니다.” 이에 경무제가 부드럽게 마무리했다. “세자가 국정을 염려하고 있으니 나도 더는 곤란하게 하지는 않겠소. 허나 대연에 훌륭한 사내가 많으니, 공주와 어울리는 배필을 꼭 찾아드리죠.” 이후로 연회는 노래와 춤이 어우러지는 흥겨운 분위기로 바뀌었다. 북제 공주는 직접 나서서 검무를 펼쳤고, 그 기세 넘치고 호쾌한 자태에 장내에서 탄성이 끊이질 않았다. 소은은 소준 옆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도 수수하여 육황자는 물론, 눈치 빠른 강준조차 그녀를 눈치채지 못하였다. 허나 소은은 검무를 편히 감상하지 못했다. 어느새 조용히 다가온 한 시녀가 조용히 그녀에게 속삭였다. “소은 아씨, 경화 아씨께서 아씨를 찾으십니다.” 조급함이 서린 시녀의 눈빛에 소은은 단번에 무슨 일이 터졌음을 알아차렸다. 소은은 곧장 그녀를 따라 무대 뒤편으로 향했다. 무대 뒤에서 기다리던 위경화는 금방이라도 울기 직전이었다. “아흐, 소은아… 이를 어찌하면 좋아…” 소은이 다정히 다독였다. “우선 진정하고, 무슨 일인지 천천히 말해 봐.” --- 위경화는 심호흡을 가다듬고, 차분히 입을 열었다. 본래 무희들이 추기로 한 춤은 이미 다 짜여 있었으나, 무대와 구성을 지나치게 중시한 나머지, 한 가지 중요한 부분을 간과한 것이 문제였다. 방금 한 무희가 ‘옥체횡진’이라 불리는 춤사위가 대연에선 평범한 춤 동작이나, 북제에선 황실의 방탕함을 풍자하는 금기된 동작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이건 단순한 무대 사고가 아니라 자칫 외교 문제로 번질 수 있었다. “이 무대는… 서면 안 될 것 같아.” 소은은 이내 차분히 결론을 내렸다. 위경화도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대신 접요무로 바꾸려고. 무희들이 익숙하니 실수는 없을 거야. 다만… 한 자리가 비어.” 그녀는 말을 흐리며, 소은을 바라보았다. 소은은 무슨 뜻인지 금세 알아차렸다. 소은은 접요무를 출 수 있었다. 허나 여군은 단정하고 절제되어야 하기에 이런 자리에서 무희들과 함께 춤을 추다 들통 난다면 그 평판은 물론, 국공부의 명예에도 손상이 갈 것이었다. 하지만 위경화는 소국공부의 예비 며느리다. 그녀가 실수로 나라의 체면을 손상시킨다면, 그 책임은 위씨 가문뿐만 아니라, 소국공부도 함께 져야 할 터였다. 소은은 머릿속으로 손익을 재빨리 따져보았다. 위경화는 늘 진심으로 소은을 대해주었다. 정말 부득이한 상황이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런 부탁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이 일은 우리 둘만 아는 일이야. 혹 누가 묻거든, 몸 상태가 좋지 않아 장막에서 쉬고 있다고 해줘.” 그러자 위경화는 고개를 끄덕이고 시녀에게 명했다. “너는 소은의 옷으로 갈아입고, 장막에 누워 있거라. 혹 누가 들이닥치더라도 말하지 말고, 자는 척만 해야 한다.” 소은은 병풍 뒤로 가 재빨리 무희의 옷으로 갈아입었다. 무희의 옷은 신체의 곡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정교하게 재단되어 있었다. 그녀가 환복하고 나오자 위경화는 얼굴을 붉혔다. 위경화가 소은을 이끌고 무희들 대기장소로 데려갔다. 한 번 맞춰 본 뒤, 소은은 곧장 무대에 오를 준비를 했다. 소은은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면사를 쓰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정중앙은 아니었나, 수많은 시선들이 그녀에게로 쏟아지고 있었다. 소은은 무심코 진명우를 바라보았다. 그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소은은 다시 강준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은 시선이 마주쳤고 강준의 시선이 소준 곁으로 천천히 옮겨졌다. 그 순간, 소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등줄기 위로 싸늘한 한기가 번져나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여유가 없었다.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소은은 그 소리에 맞춰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그 자태는 마치 눈꽃이 흩날리는 듯하였다. 허리선은 고운 실처럼 유연하고, 요염히 몸을 돌릴 때에는, 누구도 그 우아함을 넘보지 못할 정도였다. 아름다움은 언제나 사람의 이목을 끄는 법. 사내들의 시선이 소은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무용이 중반에 이르고 소은은 다른 한 무희와 자리를 바꾸었고 하필이면 그 자리가 강준의 바로 정면이었다. 그 앞에서 허리를 휘며 춤을 추는 것은 다소 민망했다. 전생에 동침한 적은 있어도 이렇듯 요염히 몸을 움직이지는 않았다. 강준의 시선이 그녀의 허리선에 잠시 머물렀고, 이내 술잔을 들어올리며, 그녀를 바라보다 다시 그녀의 허리에 시선을 두었다. 그러나 그의 표정은 담담하기만 했다. 소은은 면사 아래 얼굴을 감추고 있어 그나마 민망함을 감출 수 있었다. 이 짧은 무용이 소은에게는 유난히 길고 고통스러웠다. 무곡이 끝나고 그녀는 서둘러 무대를 빠져나왔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소은은 육황자 택문이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시선은 너무나 노골적으로 그녀의 가슴에 머물고 있었다. 그녀가 이 세상에서 가장 피하고 싶은 인물 바로 그 육황자였다. 황권에 가까운 자일수록 더 위험한 법. 전생에도 그때문에 많은 곤욕을 치렀었다. 그녀를 하찮게 여기면서도 억지로 자신의 측실로 삼으려 했던 자였다. 소은은 곧장 걸음을 옮겼다. “예부에서 데려온 무희들이 꽤 흥미롭구나.” 택문은 무희들의 뒷모습을 보며 건성으로 말했다. 강준은 술잔을 어루만지며 말없이 그 말을 흘려보냈다. 8 화 “내 부주의였군. 형은 저런 무희들 따위엔 흥미가 없으신 분이지요. 우리 가문의 호희들조차도 그의 눈엔 들지 못하였으니 말이지.” 육황자가 보기에 강민은 남녀에 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고 강준은 모든 것을 꿰뚫고는 있으나 여색에는 그다지 흥이 없는 자였다. 그의 뜻은 오로지 권세에만 있었고 다른 것은 관심 밖이었다. 헌데 선왕부는 그의 모후인 운귀비의 친정이었고, 그 세력이 날로 창대하여 천자까지도 그 움직임을 살핀다 하였으니, 택문은 그 권세의 팽창을 오히려 반기고 있었다. “내 그대에게 호희들을 들여보낸 것은 즐기라 하여 그런 것이 아니었소.” 강준이 담담하게 말했다. “형님, 공과 사란 것이 때로는 경계가 흐려지기도 하지요.” 육황자는 가볍게 답한 뒤, 하인에게 명했다. “가서 무희들 중 가장 어여쁜 이를 데려오거라.” 강준은 다시금 소준 쪽으로 시선을 돌렸고, 진명우 또한 그 방향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의 입가에 걸린 냉소가 흘러간 듯 스쳐 지나갔다. --- 무대에서 내려온 소은은 재빨리 의복을 갈아입고 위경화가 기다리고 있는 장막으로 돌아갔다. “이번 일은 정말... 내가 어떻게 너에게 보답해야 할지 모르겠다!” 위경화는 소은의 손을 꼭 쥐며 말했다. 그제야 잔뜩 긴장했던 마음이 놓이며 눈물이 왈칵 터져버렸다. 소은은 그런 그녀를 꼭 안아주며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내가 줄곧 친언니로 여겨온 걸 알지? 그래서 언니가 다치는 일은 절대 없었으면 해.” “이 몸은 이제 네 거야. 네가 곤경에 처하면, 나 또한 목숨 걸고 도울게.” 위경화가 눈물을 닦고 결의 찬 목소리로 맹세했다. 둘 사이가 예전보다 훨씬 더 단단해진 느낌에 소은은 가슴이 뭉클했다. “혹 누군가가 무희에 대해 묻거든, 나와 체격이 비슷한 이를 내세워 얼버무리면 돼.” 밤중이라 똑똑히 본 이는 없을 것이었다. 소은이 너무 눈에 띄었다는 것은 위경화도 부정할 수 없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그녀가 그저 무희에 지나지 않았으니, 흑심을 품고 접근하려 들 것이었다. “걱정 마, 아무도 네가 그 무희였을 거라곤 상상도 못 할 거야.” 하지만 소은은 속으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이미 그녀를 알아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날 밤, 소은은 다시는 연회장에 가지 않았다. 그 일로 말미암아 대사단은 없으리라 여겼지만, 혹시라도 퍼지기라도 한다면 어찌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 밤새 뒤척였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내린 결론은, 지금의 선택이 최선이었다는 것이다. 국공부와 위씨 가문은 이미 한배를 탄 사이라, 한쪽이 무너지면 함께 타격을 입는 운명 공동체가 되어 있었다. 나라의 존엄을 회손한 일로 번지기라도 한다면 위경화는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국공부 역시 무사할 리 없고 아버지, 큰 아버지 두 오라버니의 관직과 앞길까지 모조리 위태로워질 것이다. 그녀는 그렇게 밤새 한숨도 잠들 수 없었고 소은은 결국 병이 나고 말았다. 의녀가 맥을 짚어보더니 근심이 쌓여 병이 된 데다 원래 체질도 허약하여 찬 기운에 감기까지 들었다고 했다. 위경화는 사냥에도 나가지 않고 소은 곁을 지키며 그녀를 정성껏 돌보았다. 밖에서는 사냥이 한창이라 꽤 흥겨운 분위기였지만 소은과 위경화는 그저 장막 안에 머물 수밖에 없었다. “네 예상이 맞았어. 무희에 대해 캐물으러 온 자들이 꽤 있었지. 하지만 전부 돌려보냈어.” 소은은 기운이 없어 대답할 힘조차 없었다. 위경화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덧붙였다. “참, 조금 전 세자 저하를 뵈었는데 네 안부를 물으시더라.” 소은은 ‘강준’이라는 이름에 덜컥 겁부터 났다. “그분이... 내 안부를 물었다고?” “그래, 몸이 좀 나아졌는지만 물으셨지. 그 외엔 별말씀 없었어.” 그가 갑자기 왜 자신의 안부를 묻는 것인지, 그 속셈을 알 수 없었으니 우선은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해가 조금 저문 뒤, 소준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함께 온 이도 있었으니, 바로 진명우였다. 외간 남자를 대면하는 건 예에 어긋나는 일이었으나 오라버니가 함께 있으니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왔어?” “떠나기 전, 숙모께서 너를 잘 돌보라 하셨는데… 이렇게 몸져누웠으니, 뭐라 말씀드려야 할지 모르겠구나.” 소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며칠만 쉬면 금방 괜찮아질 테니 걱정하지 마. 곧 다시 훈련에 임할 수 있을 테니 그때는 명우 도령께 폐를 끼쳐야 할 듯합니다.” 그녀가 진명우 쪽을 바라보니 그의 표정은 어쩐지 평소와 달랐다. 그는 묘하게 냉담했다. 그가 이리도 차갑게 구는 건 처음이었다. “폐는 아니지요.” 그 말에 소은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생에서 그녀는 이미 강준의 차갑고 무심한 태도에 익숙해졌기에 이제 더는 마음을 쓸 열정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틀 뒤, 병세가 나아진 소은은 승마 훈련을 위해 마장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진명우가 바위 곁에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그것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의 차가운 태도에 소은이 자신이 언제 말을 타러 올 것인지 일부러 알리지 않았었다. 계속 이 자리에 있었던 걸까? “명우 도령.” 소은이 다가가 인사를 건넸다. 자리에서 일어선 진명우는 먼지도 없는 옷자락을 툭툭 털었다. “소은 아씨.” “요 며칠... 계속 여기 계신 겁니까?” 진명우는 그녀를 바라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소은은 괜스레 마음이 약해져 조금 더 따뜻하게 말을 건넸다. “약조를 미리 했어야 했는데, 괜히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곧장 말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그는 차근차근 성의를 다해 알려 주었고 실력 또한 뛰어나 한눈에 그녀의 부족한 점을 짚어내곤 했다. 다만 말투는 여전히 무뚝뚝하였고 소은이 묻지 않으면 그도 굳이 말을 하지 않았다. 소은은 기분이 다시 언짢아져 툭하고 내뱉었다. “명우 도령께서는… 한 사람을 꼭 닮으셨습니다.” 진명우가 돌아보며 담담히 물었다. “누구 말씀이오?” 소은은 고개를 숙이고 더는 말을 잇지 않았다. 강준, 지금의 강준이 아닌, 그녀의 지아비이었던 강준말이다. “혹 요 며칠 제가 뭐 잘못한 게 있다면 그냥 솔직히 말씀해 주시지요.” 잠시 생각에 잠시던 소은이 말을 이었다. “제가 알던 명우 도령은 이토록 차가운 분이 아니셨잖습니까? 저를 시큰둥하게 대하는 건 싫습니다. 좀 상처거든요.” 그 말에 멈칫하던 진명우가 나직이 물었다. “그날… 무희들 사이에 계셨죠?” 마치 비밀을 들킨 자처럼 소은의 어깨가 순간 살짝 움츠러들었다. “무희 관련 일은 경화 아씨께서 맡고 있고 사고가 생긴 듯하니, 아씨께서 나서신 것이겠지만 그리 무모하게 나서신 건 옳지 않았습니다.” “그날 일을 생각하면 저 또한 지금도 아찔합니다. 앞으론 절대 경솔하게 굴지 않을 터이니 그 일은 외부에 알리지 말아 주시길 바랍니다.” 그러자 진명우는 미간을 찌푸리며 말하였다. “아씨와 연관된 일이니 밖으로 새는 일은 없을 겁니다.” ------ 소은의 승마 실력은 나쁘지 않았다. 이틀 정도 지나자 곧 감을 잡았다. 진명우가 어디까지나 외간 남자인 만큼, 이후론 주로 홀로 훈련했다. 가끔 심지연과 강준이 함께 있는 것을 보기도 했다. 세자는 본디 남을 챙기는 성격은 아니었고 늘 바쁜 몸이었다. 그에게 제발 가르쳐달라고 애원하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지만, 그는 오직 심지연의 부탁만 들어주었다. 다만 두 사람은 언제나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심지연은 조심스러웠고, 세자 또한 행실에 흠잡을 데 없이 신중한 사람이었다. 두 사람은 모두 남녀 간의 예법을 가장 중히 여기는 자들이라 괜한 구설 수에 오를 일은 하지 않았다. 소은은 이들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 일부러 피해 다녔다. 하지만 때로는 그런 조심스러움이 지나쳐 오히려 눈에 띄기도 했다. 어느 날, 소은은 늘 그렇듯 이른 새벽에 일어났다. 산 중턱에 안개가 자욱하게 깔려 그 모습은 마치 선계라도 된 듯했다. 산엔 안개가 자욱하고, 그 자태는 마치 신선이 머무는 곳인 양 신비로웠다. 말고삐를 잡은 그녀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모두가 그녀의 실력이 빠르게 늘고 있다고 칭찬하고 있지만 사실은 남들보다 일찍 일어나 몇 배는 더 노력했기 때문이었다. 호숫가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녀는 말고삐를 풀어 잠깐 쉬어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녀가 무심코 고개를 든 순간, 예상치 못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강준은 상의를 벗은 채 서 있었다. 넓은 어깨와 단단한 허리, 금방 목욕을 마친 듯한 모습이었다. 그 모습은 마치 물 위에 피어난 연꽃처럼 눈부셨다. 남자의 아름다움이 이토록 매혹적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완벽한 자태였다. 이곳은 워낙 외진 곳이라 도성처럼 편리하지 못했다. 일손도 넉넉지 않아, 온수는 여인들이 우선 사용할 수 있었고 남자들은 주로 사람이 드문 틈을 타 호숫가에서 씻는 경우가 많았다. 강준은 이내 옷을 갈아입고, 허리띠를 매며 상의를 갖춰 입었다. 소은은 숨을 삼켰다. 상황이 너무나도 불리했다. 그녀가 먼저 사내의 몸을 본 셈이고, 지금 이곳엔 두 사람뿐. 자칫 그녀의 명예가 나락갈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 말발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강준이 돌아보았고 순간, 숨이 턱 멎을 만큼 눈부셨다. 준수한 얼굴에 오묘한 기운이 스쳤다. 하지만 눈빛만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