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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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혼 카운트다운, 너를 버릴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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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서율은 열여덟 살 때부터 차주헌을 좋아했다. 차주헌을 구하다 청력까지 잃었는데도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

Chương (1)

第1章

임서율은 열여덟 살 때부터 차주헌을 좋아했다. 차주헌을 구하다 청력까지 잃었는데도 그를 향한 그녀의 마음은 변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적으로 청력이 다시 돌아왔고 임서율은 제일 먼저 이 사실을 차주헌에게 알려주기 위해 단숨에 달려갔다. 그런데 그녀와 평생을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남자가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에게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제일 기쁜 날이 제일 비참한 날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차주헌의 바람을 알게 된 임서율은 울고불고 난리를 치며 화를 내는 대신 그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져주기로 했다. 차주헌은 그녀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뒤에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서율이한테는 나밖에 없어. 두고 봐. 일주일... 아니, 일주일도 안 돼서 다시 내 곁으로 돌아올 테니까.” 하지만 3개월이 지났는데도 그녀는 돌아오지 않았다. 차주헌은 그제야 미친 사람처럼 그녀의 행방을 뒤쫓기 시작했다. 자존심을 다 내려놓고 그녀의 사진을 보며 애원하듯 외쳤다. “율아, 어디 있어. 재미없으니까 이만 돌아와.” 1년 후. “율아, 제발... 네가 원하는 거 다 해줄게. 그러니까... 빨리 내 곁으로 돌아와.” 2년 후. “내가 죽으면 돌아올 거야? 그러면 나 보러 올 거야...?” 그리고 5년 후, 차주헌은 다시 만난 임서율의 앞에 무릎을 꿇은 채 그녀에게 따뜻한 차 한잔을 건넸다. “차 좀 드세요, 숙모...” 제1화 “이대로 서명하시게 되면 임서율 씨는 앞으로 5년, 어쩌면 그것보다 더 오래 이곳으로 돌아오지 못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회사가 개발한 물품 특성상 저희는 계약이 끝나기 전까지 임서율 씨의 신분을 철저하게 숨길 것이고 그 누구도 임서율 씨를 찾아내지 못하게 할 겁니다. 그런데도 서명하시겠습니까?” “네, 서명하겠습니다.” 임서율은 단호한 얼굴로 서류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적었다. “모든 절차는 10월 20일에 완료될 예정이며 완료 즉시 저희 측 직원이 다시 연락을 드릴 겁니다.” 임서율은 고개를 끄덕이며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늘은 10월 1일, 디데이까지 앞으로 20일 정도 남았다. ... 백화점 앞에 서 있던 임서율은 거대 스크린을 통해 흘러나오는 일주일 전 발표회 영상을 보고는 표정을 굳혔다. “성운 그룹의 차주헌 대표가 웨딩드레스를 아직 입어 보지 못한 아내를 위해 3년이라는 시간을 들여 직접 웨딩드레스를 디자인했다고 합니다. 그 가격은 가히 숫자로 매길 수 없는...” 웨딩드레스 얘기가 처음으로 대외에 전해졌을 당시, 사람들은 차주헌이라는 남자를 가진 임서율이야 말로 인생 승자라며 너도나도 부러워했다. 돈 많고 잘생기고 거기에 로맨틱하기까지 한 남자는 희귀 동물처럼 매우 드물었으니까. 길을 거닐던 두 여자는 발걸음을 멈추며 부럽다는 눈길로 영상을 바라보았다. “너 그거 알아? 차주헌은 자기 와이프가 어떤 걸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는지도 다 알고 있대. 보통은 결혼에 골인하면 관심을 잘 안 가지잖아.” “차주헌 공처가인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전에 와이프가 차 사고로 각막을 이식해야 할 수도 있었을 때 한 치의 망설임 기증 동의서에 서명했잖아. 다행히 수술이 잘 돼서 이식까지는 필요 없었지만.” “어디 그것뿐이야? 꼭 특별한 날이 아니더라고 와이프 기분 좋아지라고 늘 선물을 사준다잖아. 그것도 매번 엄청 비싼 거로. 요즘은 사귀는 사이에도 기념일을 까먹는 남자들이 태반인데 차주헌 와이프는 어떻게 딱 차주헌을 골랐대? 부럽다. 부러워.” 임서율은 두 사람의 말을 들으며 코웃음을 쳤다. 그녀는 이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차라리 귀가 안 들리던 때가 더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임서율이 청력을 잃게 된 건 대학생 시절, 차주헌이 친구와 치고받고 싸우다 의자로 맞을 뻔했을 때 그 앞을 막아서 대신 맞아줬기 때문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뒤 동기들은 임서율만 보면 귀머거리라 놀렸고 또 ‘남자 때문에 청력까지 잃은 미련한 애’라며 빈정거리기도 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를 지켜줬던 남자가 바로 차주헌이었다. “임서율, 너 귀머거리 아니야. 앞으로는 내가 네 귀가 되어줄게. 네가 다른 사람 때문에 상처받지 않게 내가 언제나 곁에서 지켜줄게!” 그러나 영원할 줄 알았던 행복은 짧게 반짝이다 사라지는 불꽃놀이처럼 금방 사라져버렸다. 며칠 전, 청력이 기적적으로 돌아온 그 날, 임서율은 차주헌에게 이 소식을 전하러 갔다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듯한 광경을 목격해버리고 말았다. 그녀 말고는 무뚝뚝한 태도로 일관하던 남자가 꿀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목소리로 웬 여자와 통화하며 사랑을 속삭이고 있었다. 임서율은 그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피가 거꾸로 솟고 심장이 쿵쿵거렸다. ‘차주헌, 나는 널 붙잡을 생각 없어. 내 자존심을 짓밟아가면서 너를 붙잡는 짓, 나는 안 해. 네 세상에서 깔끔하게 사라져 줄 거야.’ 임서율은 미리 준비해둔 이혼합의서를 고이 접어 예쁜 상자 안에 넣었다. 그러고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이만 집으로 돌아가려 했다. 그런데 그때 익숙한 차 한 대가 그녀 바로 옆에 멈춰 섰다. 차주헌은 긴 다리를 뻗으며 차에서 내리더니 빠르게 다가와 수화를 써서 말했다. “미안, 내가 좀 늦었지. 그런데 백화점 안에서 기다리라니까 왜 밖에 나와 있어. 안 추워?” 그는 속상하다는 듯한 얼굴로 임서율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자신의 온기를 나눠주었다. “빨리 차로 가자.” 임서율은 차주헌의 뒤를 따라가며 이를 꽉 깨물었다. 심장이 꼭 날카로운 무언가에 의해 찔린 것처럼 숨이 막힐 것 같았다. 그녀는 사랑이라는 게 생각보다 고결하지 않고 생각보다 빨리 식는 감정이라는 걸 그 사랑이 다 끝나가는 순간이 되어서야 깨달았다. 차로 돌아온 차주헌은 임서율에게 안전벨트를 매주다가 그녀의 무릎에 놓인 상자를 발견하고는 손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그건 뭐야?” 임서율은 금방 터질 듯한 속마음을 애써 억누르며 평소와 다를 바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내가 준비한 우리 결혼기념일 선물.” 차주헌은 그 말에 미소를 짓더니 손을 뻗어 상자를 열어보려고 했다. “잠깐만.” 그런데 그때 임서율이 그의 손을 덥석 잡으며 제지했다. “지금은 안 돼. 이건 기념일 당일에 열어야 해.” 차주헌은 안에 든 내용물이 무척 궁금했지만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사랑스러운 생명체를 만지듯 그녀의 콧방울을 살짝 꼬집었다. “알겠어. 기념일에 열어볼게. 그럼 이제 웨딩 사진 찍으러 갈까?” “그래.” “율아, 나는 드레스를 입은 네 모습이 얼마나 예쁠지 벌써 기대돼. 나중에 할머니 할아버지가 돼서 오늘을 떠올리면 가슴이 찡하겠다. 그렇지 않아?” 임서율은 아무 말 없이 그저 미소만 지었다. 두 사람에게 펼쳐질 미래 같은 것이 있을 리가 없었다. ‘차주헌, 그 상자를 열었을 때 어떤 표정을 지을지... 그게 더 궁금해.’ 제2화 웨딩 샵. 직원은 차주헌을 보더니 곧바로 두 사람을 데리고 탈의실로 향했다. 차주헌이 나왔을 때 직원들은 하나 같이 입을 떡 벌리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는 원체 키가 큰 데다 꾸준한 운동으로 몸까지 탄탄해 마치 런웨이 위를 걷는 모델 같았다. 차주헌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한 번 보고는 이내 흥미가 떨어진 듯 소파에 앉아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셔츠 단추 하나를 풀고 다리를 꼬았다. 그 모습은 꼭 영화 속 장면 같았다. 잠시 후, 드디어 임서율도 밖으로 나왔다. 임서율은 소파에 앉아 있는 차주헌의 뒷모습을 보고는 아무 말 없이 그의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말을 걸려는데 띠링 소리와 함께 그의 휴대폰 상단에 메시지 알림 하나가 떴다. [주헌아, 나 위가 조금 아파서 그러는데 지금 바로 여기로 와줄 수 있어?] 차주헌의 바람 상대였다. [아... 오늘 웨딩 사진 찍는다고 했었나? 됐어. 내가 알아서 할게. 신경 쓰지 마.] 차주헌의 바람 상대는 두 번째 메시지까지 보낸 후 대뜸 두 개 메시지 모두 삭제해 버렸다. 임서율은 상대방의 수법에 기가 막힌 듯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보냈던 메시지를 굳이 삭제하는 건 관심을 달라는 뜻이었다. 차주헌은 3초 정도 고민하다가 금방 다시 손가락을 움직이며 답장을 보냈다. [이따 상황 봐서 갈 테니까 위치 보내.] 답장을 본 임서율은 심장이 마구 짓밟혀지는 기분이 들고 숨도 잘 쉬어지지 않아 저도 모르게 가슴을 세게 움켜쥐었다. 어떤 답장을 할지 대충 예상은 했지만 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심장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차주헌은 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그제야 이상함을 감지하며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는 고통스러운 얼굴로 거의 주저앉다시피 한 임서율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율아, 왜 그래?! 어디 아파? 병원으로 갈까?” 임서율은 그의 걱정이 그저 가소로울 뿐이었다. 이렇게 연기를 잘하는 남자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지금도 분명 자신이 아닌 위가 아프다고 했던 진짜 사랑 쪽을 더 걱정하고 있을 게 뻔했다. “요즘 잠을 좀 설쳤더니 피곤하네? 나 이만 집으로 가서 쉬고 싶어.” “그래, 알았어. 이만 가자.” 차주헌은 직원에게 뭐라 얘기를 건넨 후 임서율을 데리고 웨딩 샵을 나왔다. 그런데 나오자마자 다시금 알림음이 울렸고 그는 메시지 내용을 확인하더니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율아, 회사에 급한 일이 생겨서 너 데려다 준 뒤에 바로 회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아.” 미안한 표정으로 수화하는 그를 보며 임서율은 속이 다 울렁거렸다. 차주헌의 이중적인 태도가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그럼 빨리 가봐. 나는 택시 타고 가면 돼.” “아무리 바빠도 너 집에 데려다 줄 시간은 돼.” 차주헌은 두 눈 가득 그녀를 담으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이에 임서율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나야말로 정말 괜찮아. 그러니까 얼른 회사로 가. 너 기다리겠다.” 차주헌은 임서율의 얼굴색이 좀 돌아온 걸 확인하고 나서야 안심하며 다시 수화했다. “그럼 돌아가서 푹 쉬어. 일 끝나는 대로 돌아갈게.” “응.” 임서율은 차주헌의 차량과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졌을 때쯤 택시를 잡고 운전 기사에게 말했다. “앞에 있는 차 좀 따라가 주세요.” 날이 어두워질 무렵, 차주헌의 차량이 멈추고 곧바로 임서율을 태운 택시도 뒤따라 멈췄다. 차주헌이 차에서 내리자 한 여자가 망설임 없이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여자의 얼굴을 확인한 임서율은 눈을 크게 뜨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강수진...?’ 강수진은 차주헌의 첫사랑이었다. 두 사람은 대학생이었을 당시 학교 전체를 떠들썩하게 할 정도의 뜨거운 사랑을 했지만 강수진이 갑자기 해외로 떠나면서 모든 것이 끝나버렸고 그 후로는 서로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았다. 그런데 떠났던 그녀가 다시 돌아왔다. 강수진은 세상을 다 가진 듯한 얼굴로 차주헌을 꼭 끌어안고는 젖은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와줄 줄 알았어.” 차주헌은 그녀의 상태를 살피며 다급하게 물었다. “괜찮아? 아프다며?” “네가 와주니까 하나도 안 아픈 것 같아. 네가 내 만병통치약인가 봐.” 장난기 어린 강수진의 말에 차주헌은 그제야 표정을 풀며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다시는 그러지 마.” “보고 싶은데 그럼 어떡해. 혹시 내가 웨딩 사진 찍는 거 방해했어?” 강수진은 볼을 부풀리며 투정을 가장한 애교를 부렸다. “방해는 무슨. 다음부터는 그냥 보고 싶다고 해. 금방 달려올 테니까.” “헤헤, 알았어.” 강수진은 차주헌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며 생긋 웃었다. “따라와. 너한테 줄 선물이 있어.” 두 사람은 깍지를 낀 채 해안가 근처의 오두막으로 들어갔다. 모든 것을 지켜본 임서율은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꽉 말아쥔 손바닥은 손톱이 파고들어 어느새 피가 맺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심장을 난도질하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비참하고 가슴이 아플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를 사랑했던 감정들이 여전히 몸 군데군데 박혀 있었다. 차주헌과 함께한 시간 동안, 임서율은 그에게서 넘쳐 흐를 정도의 마르지 않는 사랑을 받았고 늘 그의 애정과 관심에 잔뜩 절여져 있었다. 차주헌은 정말 다정하고 좋은 남자였다. 아직 결혼하기 전, 스킨십 중에 분위기가 그쪽으로 무르익을 때도 그는 꾹 참으며 버드 키스로 끝을 냈다. “첫날밤까지 널 아껴주고 싶어. 널 위해서라면 난 얼마든지 참을 수 있어.” 그리고 드디어 다가온 첫날 밤, 차주헌은 그녀의 반응을 세심하게 살피며 그녀에게 잊지 못할 로맨틱한 밤을 선물해주었다. “율아, 사랑해. 평생 너만 사랑할 거야. 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너도 평생 내 곁에만 있겠다고.” 그 순간 임서율은 모든 게 다 값지다고 생각했다. 차주헌이라는 남자와 함께라면 평생이 행복할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다른 여자를 품에 안고 그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그 여자에게 사랑을 속삭였다. 제3화 그날 밤, 차주헌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자정이 조금 넘어갈 때쯤 회사 일이 아직 안 끝났다며 잘 자라는 문자 한 통 보낸 게 다였다. 이른 아침 그 문자를 확인한 임서율은 조금 거칠 게 휴대폰을 내려놓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기분이 더럽기는 했지만 지금은 차주헌과 강수진에게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그녀에게는 차주헌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일이 있었으니까. 성운 그룹. “그거 들었어요?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담당자가 결정이 났는데... 임 팀장님이 아니래요.” 직원들이 한곳에 모여 아침부터 수다를 떨었다. “네? 그거 임 팀장님이 엄청 공들였던 프로젝트잖아요. 그런데 그 자리를 누가 대체해요? 이거 임 팀장님이 아시면 난리 날 것 같은데?” “듣기로 이번에 새로 입사한 신입이 프로젝트 담당자로 확정 났대요. 임원진 투표로요.” “미친, 그럼 팀장님은... 헉, 팀장님!” 직원들은 문을 열고 들어온 임서율을 보고는 화들짝 놀라며 마치 죄지은 사람들처럼 후다닥 자리로 돌아갔다. 임서율은 고개를 갸웃했지만 금세 다시 미소를 지으며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 웃음은 자리에 도착하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책상 위에 있던 그녀의 물건이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다 사라진 상태이었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그때 누군가가 방으로 들어와 임서율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서율 씨.” 고개를 돌려보니 흰색 원피스를 입은 강수진이 사슴 같은 눈으로 천연덕스럽게 웃고 있었다. 강수진은 머리를 뒤로 넘기며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나 기억하죠? 오늘 막 성운에 입사했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임서율은 건네진 손과 자신의 책상을 번갈아 보더니 차갑게 굳은 얼굴로 물었다. “이게 무슨 상황이죠?” 냉랭한 말투에 강수진은 움찔하더니 얼른 수화하며 말했다. “아, 미안해요. 주헌이가 나 먼지 알레르기가 있다고 이 방을 나한테 줬어요. 혹시 기분 나빴어요...? 그러면 주헌이한테 얘기해서 다시 돌려놓으라고 할게요.” 임서율은 기가 찬다는 듯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됐어요.” 자리 하나 때문에 차주헌과 쓸데없는 입씨름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얘기하면 할수록 그녀만 더 비참해질 게 분명했으니까. 강수진은 입을 가린 채 피식 웃더니 금방 다시 임서율을 바라보며 악의 없는 눈웃음을 지었다. “이해해줘서 고마워요. 아, 그리고 오해하지 말아요. 주헌이가 날 여기로 데려온 건 순전히 서율 씨 업무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니까. 절대 다른 감정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에요.” 임서율은 이를 꽉 깨물며 미소를 지었다. 차주헌의 배려에 눈물이 다 날 지경이었다. “회사에서는 대표님이라고 불러야죠?” “네? 아, 네...” 강수진은 떨떠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표님이 강수진 씨를 데려온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죠. 그럼 기대에 잘 부응하길 바랄게요.” 임서율은 말을 마친 후 강수진을 지나 차주헌의 사무실로 향했다. 문을 열자 차주헌이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차주헌의 얼굴을 몇 초간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그의 책상 위로 옮기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차주헌은 그녀의 행동에 상당히 당황한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율아...” 임서율의 손에 든 건 다름 아닌 오아시스 프로젝트의 최종 결정서였다. 임서율은 열 표, 강수진은 열두 표. 두 사람 중 차주헌의 표를 받은 사람은 강수진이었다. ‘하!’ 제일 결정적인 한 표를 그는 자기 아내가 아닌 강수진에게 주었다. 차주헌은 아무 말도 안 하는 임서율이 오히려 더 무서워 얼른 그녀의 팔을 잡았다. “율아, 미안해. 하지만 애초에 임원진들이 수진이로 결정하고 투표한 거라 내가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 아무리 내가 대표라도 모든 걸 다 결정할 수는 없어.” 임서율은 입안이 쓰고 분노와 실망이 뒤섞인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왔다. 하지만 화를 내거나 따지지는 않았다. 그래봤자 결과는 달라지지 않을 테니까. 임서율은 억지로 입꼬리를 올리며 차주헌을 바라보았다. 한때는 그녀만 담고 있던 눈동자인데 지금은 그녀가 아닌 다른 여자가 담겨 있었다. “만약 내가 이 프로젝트를 꼭 해야겠다면?” 차주헌은 예상 못 한 그녀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그것도 잠시, 금방 다시 다정한 눈빛으로 돌아와 그녀를 바라보았다. “네가 이 프로젝트를 위해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잘 알아. 어머님 마지막 소원이라 더 열심히 했잖아. 하지만 율아, 누가 담당하든 성공적으로 마무리만 하면 되는 거 아닐까? 네가 노력한 건 어머님께서 하늘에서 이미 다 지켜보셨을 거야. 그러니까 끝까지 해내지 못한 것에 너무 실망하지 마.” 웃기지도 않는 위로였다. 분노가 가라앉기는커녕 오히려 더 활활 타올랐다. 차주헌은 더 이상 그녀의 편이 아니었다. 그의 관심과 배려는 이제 강수진의 것이었다. 임서율은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한 번 더 얘기해 보았다. “네 말대로라면 성공시키는 역할을 내가 할 수도 있는 거잖아. 나는 내 기획에 자신 있어.” 차주헌은 난감한 표정을 짓더니 다시금 수화하며 입을 열었다. “율아, 이번 딱 한 번만 양보해주면 안 될까? 수진이가 지금 귀국한 지 얼마 안 되기도 했고 부모님도 아프셔서 달리 의지할 곳이 없어. 그러니까 우리가 도와주자. 동문 좋다는 게 뭐야. 이럴 때 서로 도와야지. 안 그래?” 임서율은 그의 변명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적어도 고민하는 척은 해줄 줄 알았는데 차주헌은 단호했다. 이제 그의 눈에는 강수진밖에 없었다. 아까도 그랬다. 강수진이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 자리를 바꿔줬다니, 그녀 역시 먼지 알레르기를 갖고 있고 그것 때문에 하마터면 호흡 곤란까지 왔던 건 기억도 안 나는 모양이었다. 차주헌은 임서율의 눈치를 보더니 한참 뒤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율아, 아니면 내가...” “됐어. 그냥 한번 얘기해 본 거야. 너 부임한 지 얼마 안 돼서 입장이 쉽지 않다는 걸 아는데 굳이 널 더 힘들게 하고 싶진 않아.” 임서율은 차주헌과 조금 거리를 두며 괜찮다고 했다. 사랑이 이미 식어버린 상대에게 여기서 더 얘기해 본다고 한들 달라지는 건 없으니까. 차주헌은 그녀를 성공적으로 달랬다고 생각했는지 그제야 활짝 웃었다. “율이 너라면 이해해 줄줄 알았어. 참, 네가 전에 갖고 싶다고 했던 ‘영원의 심장’ 목걸이 말이야. 곧 경매에 나온대. 내가 그 목걸이 꼭 낙찰받아올게.” 임서율은 그 말에 그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괜찮겠어? 그 목걸이 엄청 비쌀 텐데.” 이건 그저 예의상 하는 말이었다. “네가 원하면 나는 별도 따다 줄 수 있어.” 차주헌은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얼굴을 감싸더니 입을 맞추려는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런데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리며 강수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헌... 아니, 대표님, 회의 곧 시작한다고 빨리 오시래요.” 차주헌은 그 말에 얼른 손을 거두어들이며 임서율에게서 한걸음 떨어졌다. “그러죠.” 강수진은 우물쭈물하며 안으로 들어오더니 갑자기 울상을 지으며 임서율을 향해 수화했다. “혹시 오아시스 프로젝트 때문에 대표님이랑 타투고 있는 중이었어요? 만약 서율 씨가 받아들이지 못하겠다고 하면 그냥 서율 씨가 담당하는 거로 해요...” 임서율은 강수진을 빤히 바라보며 냉랭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럴 필요 없어요. 이미 다른 사람의 손을 타버린 건 별로 원하지 않아서요. 대표님이 동문이라 특별히 신경 써 준거니까 잘 해내기를 바랄게요.” 하지만 임서율의 말이 끝나자마자 강수진은 더 서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 습관적으로 차주헌의 옷자락을 잡았다. “아무래도 서율 씨가 뭔가 오해를 하는 것 같은데 주헌... 아니, 대표님이 대신 얘기해주시면 안 돼요? 이대로 서율 씨랑 사이가 서먹해지는 건 싫어요...” 임서율은 차주헌의 옷을 잡고 있는 강수진의 손을 빤히 바라보았다. 차주헌은 평소 다른 사람이 그의 몸에 손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강수진도 지금 행동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조심스럽게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다. “임 팀장은 그렇게 속 좁은 사람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방금도 싸운 게 아니라 단지 얘기를 좀 했을 뿐입니다.” 차주헌은 그렇게 말한 후 고개를 돌려 임서율을 향해 수화했다. “회의 끝나고 같이 저녁 먹으러 가자. 너 좋아하는 프렌치 식당으로.” “그래.” 강수진과 차주헌이 나간 후 임서율은 강수진의 기획안을 집어 들고 한번 훑어보았다. 임원진들도 다 보는 기획안인데 강수진은 오타 검수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제4화 잠시 후, 대표실에서 나온 임서율은 자신의 기획안을 들고 새로 옮긴 방으로 돌아왔다.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을 본 양지우는 얼른 그녀를 따라 들어오며 수화했다. “너 괜찮아? 오아시스 프로젝트, 정말 뺏긴 거야?” “탕비실로 가서 얘기해.” 임서율은 양지우의 손을 잡고 탕비실로 왔다. “지우야, 나 좀 도와줄래? 중요한 일이야.” “말만 해.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뭐든 도와줄게.” “재호 그룹도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원했던 거 알지? 아직 아무것도 진행되지 않은 지금이라면 프로젝트는 얼마든지 다시 뺏어갈 수 있어. 그래서 재호 쪽과 한번 컨택해 보려고.” 양지우는 생각보다 충격적인 얘기에 얼른 수화하며 얘기했다. “미쳤어?! 너 그랬다가 회사 기밀 유출 죄로 잡혀 가! 그때는 네 커리어든 뭐든 다 끝이라고! 그리고 재호 그룹 대표가 누군지 알고 그쪽이랑 컨택을 하겠대. 전에 업계 친구한테 들은 적이 있는데 재호 그룹 대표의 배경이 좀 복잡하대. 인터넷에 나온 정보가 다 가짜라는 소리도 있고. 너 그런 사람한테 잘못 걸리면 하루아침에 사라질 수도 있어.” 양지우의 걱정 어린 충고에도 임서율은 자기 생각을 굽히지 않았다. “너도 알잖아. 오아시스 프로젝트가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지. 엄마가 생전에 부탁했던 마지막 소원이야. 꼭 내 손으로 성공시켜야 해.” 그녀에게는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너 진짜...!” 양지우는 임서율을 대학교 때부터 봐왔기에 그녀가 쉽게 번복할 성격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한참 뒤 결국에는 설득을 포기한 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았어. 대신 정말 조심해야 해. 성운 그룹의 대표 와이프가 라이벌 회사를 돕고 있다는 소식이 퍼지면 그때는...” “응, 걱정하지 마. 조심할게.” 임서율은 고맙다고 하며 양지우의 손을 꼭 잡았다. 탕비실에서 나온 후, 임서율은 상자 속에 담긴 자신의 짐을 하나둘 풀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웬 물건 하나가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시선을 아래로 내려보니 차주헌과 함께 찍은 사진이 보였다. 해당 사진은 두 사람이 정식으로 연인이 된 날에 찍은 기념적인 사진이었다. 머리를 맞댄 채 조금 쑥스러운 듯 웃고 있는 모습이 눈이 부시게 아름다워 보였다. 그때의 두 사람은 정말 행복했고 머릿속에 서로밖에 없었으며 아무리 힘든 일이라도 서로가 곁에 있으면 무섭지 않았다. 하지만 그 감정들도 이제는 흐릿하게 바래버렸다. 임서율은 액자를 쓰레기통에 버리더니 다시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짐을 풀었다 그때 양지우로부터 메시지 한 통이 도착했다. [인맥 총동원해서 15분 벌었어. 15분 안에 해결해.] [15분이면 충분하지. 고마워.] 이제 모든 건 그녀의 손에 달렸다. 잠시 후. 재호 그룹 건물 앞에 도착한 임서율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자 함께 와준 양지우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이며 힘을 불어주었다. “꼭 성공해! 정 안 되면 미인계로 유혹해봐!” 임서율은 그녀의 말에 피식 웃으며 장난을 쳤다. “여자를 안 좋아하는 사람이면 어떡해?” “그건...” 양지우는 말문이 막힌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이내 장난인 것을 깨닫고 하하 웃었다. “아무튼 잘하고 와.” “응, 다녀올게.”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에 오른 임서율은 긴장이 밀려오는 듯 가방을 꼭 쥐었다. 재호 그룹의 대표는 사업 수완이 좋기로 유명했다. 3년도 채 안 돼 회사를 이름만 들어도 알 정도의 대기업으로 성장시켰으니까. 업계 전설이라 불려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표이사실 앞에 도착한 임서율은 손을 들어 두어 번 노크했다. 그러자 안쪽에서 듣기 좋은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잘생긴 남자가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다. 거리가 조금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남자가 뿜어내는 냉랭한 기운이 피부를 덮쳐왔다. 임서율은 긴장한 건지 아니면 남자의 기운에 압도된 건지, 사무실 안에 대표를 제외한 부하직원이 두 명이나 더 있었는데도 줄곧 대표인 하도원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하도원은 시선이든 태도든 차주헌보다 훨씬 더 강한 느낌이었다. 특히 살짝 찡그린 미간과 날카로운 턱선이 그를 더 차갑고 냉랭한 사람으로 느껴지게 했다. 임서율은 아주 조용히 소파로 가 살포시 앉았다. 하도원은 그녀가 들어온 걸 잊어버리기라도 한 건지 시선 한번 주지 않은 채 계속 부하직원들과만 얘기를 나눴다. 임서율은 아주 잠깐 끼어들 생각도 했지만 그랬다가는 큰 불똥이 튈 것 같아 얘기가 끝날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로 했다. 잠시 후, 보고를 마친 직원들이 대표이사실을 나가려던 그때 하도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가 멋대로 이곳에 사람을 들여보냈는지 알아보고 싹 다 해고해버려.” 부하직원은 그 말에 멈칫하며 소파에 앉은 임서율을 힐끔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금방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네, 대표님.” 임서율은 생각지도 못한 하도원의 말에 당황한 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칼 같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지만 이렇게까지 단호할 줄은 몰랐다. 그녀가 이곳으로 온 것 때문에 엄한 사람이 해고되어 버렸다. 임서율은 하도원의 앞으로 다가가 이곳으로 찾아온 이유를 설명했다. 하도원이 들어줄 생각 없다는 듯 시선 한번 주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녀는 굴하지 않고 이곳에 온 목적을 얘기했다. 설명이 끝난 후 하도원은 그제야 서류에서 시선을 떼며 임서율 쪽을 쳐다보았다. 그 눈빛이 꼭 맹수 같아 임서율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그런데 분명히 무서운 눈빛인데 이상하게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 대표님,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성공시키게 되면 앞으로 적어도 3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그리고 오아시스 근처의 부지도 충분히 활용하면...” “부부 싸움이라도 한 겁니까, 아니면 이게 성운의 새로운 전략입니까?” 하도원은 그녀의 마음을 꿰뚫어 보려는 듯 시선을 정확히 그녀의 눈동자에 고정하며 물었다. 임서율은 침을 한번 꿀꺽 삼키더니 다시금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뱉어냈다. “제가 의심스럽다는 거 알아요. 하지만 저는 진심이에요. 재호가 이번 프로젝트를 꼭 손에 넣었으면 좋겠어요. 제 실력은 의심하지 않으셔도 돼요. 저만큼 이번 프로젝트를 잘 아는 사람은 또 없을 테니까.” 하도원은 손에 든 펜을 내려놓더니 고개를 조금 기울이며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흙탕물에 뛰어드는 취미는 없어요.”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겠습니다. 대신 경영권을 손에 쥐시면 디자인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해주세요. 저는 그거면 됩니다.” 하도원은 임서율을 빤히 바라보며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임서율 씨가 하려는 일이 뭔지 제대로 알고는 있는 거죠?” “물론입니다. 오늘 일이 밖으로 새어나가면 저는 성운으로부터 책임을 묻게 되겠죠.” 하도운은 재밌다는 얼굴로 계속해서 물었다. “오아시스는 이미 성운으로 넘어간 프로젝트인데 왜 굳이 이런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날 찾아온 거죠?” 임서율은 시선을 내리며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개인적인 일이라 말씀드릴 수 없어요. 하지만 저한테는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예요. 그것만 알아주세요.” “프로젝트 담당자가 임서율 씨가 아닌 신입사원한테 돌아갔다고 한 거 들었습니다.” 하도원은 의자에 몸을 기대며 말을 이어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흙탕물에 뛰어드는 취미는 없습니다.” 제5화 임서율이 내려온 걸 본 양지우는 얼른 수화하며 그녀에게 물었다. “어떻게 됐어?” “잘 안 됐어. 소문대로 만만치 않은 남자더라고.” 심지어 임서율은 너무 긴장한 탓인지 자신의 비밀을 들켜버리기까지 했다. “차 대표 때문에 청력을 잃었다고 들었는데 다시 돌아온 모양입니다?” 하도원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맴돌고 있는 듯했다. ‘비밀 지켜달라 부탁해도 안 들어줄 것 같은데...’ 양지우는 실패했다는 그녀의 말에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도움이 못 돼줘서 미안...” “네가 뭐가 미안해. 미안하다고 해야 할 사람은 나야. 네가 어떻게 만들어준 기횐데.” 임서율은 아까 하도원이 부하직원에게 했던 얘기를 떠올리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네 말대로 하 대표는 정말 무서운... 지우야?” 임서율은 말을 하다 어딘가 멍한 듯한 얼굴의 양지우를 발견하고는 두 손을 들어 그녀의 눈앞에서 흔들었다. “지우야? 내 말 들려?” 양지우는 믿을 수 없다는 듯한 눈빛으로 임서율을 바라보며 말을 버벅거렸다. “너, 너 왜... 나 방금 아무런 제스처도 안 하고 말로만 했는데... 어떻게 알아들었어? 너 설마...!” “쉿!” 임서율은 양지우의 입을 틀어막으며 조용한 구석으로 데려갔다. 청력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양지우는 잔뜩 흥분하며 임서율의 팔을 찰싹찰싹 때렸다. “왜 이제야 말해! 그런 기쁜 소식은 나한테 제일 먼저 공유했어야지!” 역시 사랑보다는 우정인 건지 양지우는 정말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내가 공개할 때까지는 비밀로 해줘. 아직 차주헌도 몰라. 그리고 기회 만들어줬던 친구한테 미안하다고 전해줘. 나 도와준 것 때문에 일자리 잃게 생겼어...” 임서율은 죄책감 가득 서린 눈빛으로 하도원이 했던 말을 얘기해주었다. “하 대표 생각보다 더 칼 같은 사람이었네... 그럼 네 계획은 완전히 물 건너 간 거야?” “응, 그런 것 같아.” ... 임서율은 집으로 돌아온 후 가장 먼저 방으로 가 옷장부터 열었다. 그러고는 차주헌이 선물한 웨딩드레스를 여러 각도로 사진 찍고는 그대로 중고 사이트에 올려버렸다. 오아시스 프로젝트가 그녀의 원대로 흘러가든 흘러가지 않든 그녀가 차주헌의 곁을 떠나는 건 이미 확정된 사실이었기에 나중을 생각해서라도 최대한 자금을 모아야만 했다. 그녀는 더 이상 부잣집 딸이 아닌 평범하디 평범한 일반인이었으니까. 10억이라는 엄청난 내놓은 거라 팔리기까지 며칠은 걸릴 줄 알았는데 올린 지 30분도 안 돼 금방 누군가가 사겠다며 선입금을 해왔다. 임서율은 통장에 입금된 돈을 보며 오늘 처음으로 활짝 웃었다. 그녀는 콧노래를 부르며 이 돈으로 뭐부터 할까 고민했다. 그런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차주헌이 안으로 들어왔다. 차주헌은 이마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힌 채로 다가오더니 대뜸 무릎 하나를 꿇으며 다급하게 물었다. “드레스는 왜 팔았어? 그건 내가 너를 위해 직접 디자인한 거잖아. 내가 뭐 잘못한 거라도 있어?” 임서율은 걱정이 가득 어려 있는 그의 눈빛을 보며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 한때는 그 누구보다 차주헌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그와 눈을 마주치고 있어도 무슨 생각을 통 알 수가 없었다. 임서율은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그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나한테는 너무 과분한 드레스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래. 내가 전에 보육원 얘기한 거 기억하지? 드레스 판 돈으로 보육원에 기부하려고.” 차주헌은 반신반의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정말이야? 프로젝트가 강수진한테 넘어간 것 때문에 화가 나서 팔려는 건 아니고?” “응, 아니야.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차주헌은 그 말에 그제야 안도하며 활짝 웃었다. “그래, 율이 너라면 마음 넓게 양보해 줄 줄 알았어. 프로젝트는 내가 꼭 성공시킬 테니까 걱정하지 마!” 임서율은 큰소리로 비웃고 싶은 것을 꾹 참았다. ‘차주헌은 내가 마더 테레사라도 되는 줄 아나 보네? 그러니 마음이 넓다느니 네가 양보하라느니 같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지.’ 그때 차주헌의 휴대폰이 갑자기 요란하게 울려댔고 그는 발신자를 보더니 황급하게 전화를 끊어버렸다. 발신자가 강수진인 걸 봐버린 임서율은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 “전화 온 거 아니야? 그냥 받아.” “회사야. 신경 쓸 거 없어. 나는 회사 일보다 우리 율이 기분 풀어주는 게 더 중요하니까.” 차주헌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렇게 말하며 임서율의 볼을 매만졌다. “그냥 받아. 급한 전화면 어떡해.” 임서율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또다시 휴대폰이 울렸고 이에 차주헌은 잠시 고민하다 결국에는 방을 나서며 전화를 받았다. 차주헌이 나가자마자 임서율은 바로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거짓말을 이렇게도 잘하는 남자인 줄 왜 전에는 몰랐는지, 왜 전에는 의심조차 하려 들지 않았는지. 임서율은 차주헌이 전에 해줬던 말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오아시스 프로젝트만은 꼭 그녀가 담당하게 해주겠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 약속을 임원진들 핑계를 대며 바로 깨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얼마나 공을 들인 프로젝트인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그는 망설임 없이 그걸 강수진에게 넘겼다. 띠링. 임서율이 분노를 삭이고 있을 그때 양지우로부터 메시지가 도착했다. [친구한테서 들은 얘기인데 오늘 저녁에 있을 자선경매 행사에 하도원도 참석한대.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부탁해봐. 혹시 알아? 하도원이 생각을 바꿀지.] 메시지를 확인한 임서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얼른 양지우에게 답장을 보냈다. [나 해볼래! 고마워, 지우야. 진짜 너밖에 없어.] 답장을 보내고 나니 마침 차주헌도 통화를 마치고 방으로 들어왔다. “왜 서 있어?” “아무것도 아니야.” 차주헌은 다시 의자에 앉은 임서율의 앞으로 다가가 조금 미안한 얼굴로 얘기했다. “같이 레스토랑으로 가서 저녁 먹으려고 했는데 거래처 미팅이 잡혔어. 많이 배고픈 거 아니면 나 기다려줄래? 내가 빨리 처리하고...” “그러지 말고 편히 일하고 와. 레스토랑은 다음에 가면 되지.” 마침 그녀도 해야 할 일이 생겼기에 지금은 차주헌의 얘기가 무척 반가웠다. 차주헌은 그녀의 답변에 감동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여 이마에 가볍게 입맞춤을 했다. “난 정말 너 없었으면 어떻게 살았을까? 예뻐 죽겠어.” “얼른 가.” 임서율은 말을 하며 그의 가슴팍을 티 안 나게 뒤로 밀었다. 강수진을 만졌던 손으로, 강수진에게 키스했던 입술로 자신을 만지고 있다는 사실이 역겹고 더러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차주헌은 그녀의 미묘한 거부를 눈치채지 못한 채 활짝 웃으며 방을 나섰다. 달칵. 차주헌이 가버린 후 임서율은 서둘러 옷을 갈아입고 메이크업도 했다. 그러고는 15분 만에 급히 집 문을 나섰다. 행사장에 도착한 그녀는 초대장을 꺼내 직원에게 보여주었다. 성운 측에도 며칠 전에 초대장이 도착해서 망정이지 아니면 피곤한 일을 겪을 뻔했다. 안으로 들어간 임서율은 오늘의 목적인 하도원부터 찾았다. 그런데 찾아야 하는 사람은 안 보이고 이곳에 있어서는 안 되는 두 남녀가 대뜸 눈에 들어왔다. 강수진은 차주헌의 넥타이를 정리해주며 사랑 가득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임서율은 기막힌 광경에 헛웃음을 쳤다. 이게 차주헌이 말한 미팅인 건가? 하지만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녀를 놀라게 한 건 차주헌의 다음 행동이었다. 차주헌은 직원이 건넨 빨간색 상자를 열더니 그 안에 든 팔찌를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강수진의 팔에 채워주었다. 임서율은 그 장면을 본 순간 심장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 같았다. 차주헌이 건넨 팔찌는 그녀가 대학교 때 처음으로 디자인한 팔찌였다. 당시 임서율은 어머니 병원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팔찌를 팔아야 했고 그걸 알게 된 차주헌은 그 팔찌가 경매에 나오는 즉시 다시 찾아오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그 팔찌를 차주헌은 그녀의 손목이 아닌 다른 여자 손목에 채워주었다. 그녀에게 어떤 의미가 담긴 팔찌인지 뻔히 알면서 그는 다른 여자에게 그 팔찌를 선물했다. 임서율은 치밀어 오는 분노를 꾹 참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얼마나 세게 깨물었는지 피가 다 고일 정도였다. 강수진은 팔찌를 보더니 눈이 휘어지도록 웃으며 차주헌의 품에 와락 안겼다. “고마워. 주헌이 너밖에 없어.” 하지만 곧바로 멈칫하며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차주헌을 올려다보았다. “네가 이 팔찌를 나한테 준 걸 알면 서율 씨가 화내지 않을까?” 제6화 “너 입사 기념 선물이라고 하면 이해해 줄 거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서율이는 이런 거로 쪼잔하게 화내지 않아.” 차주헌의 말을 들은 임서율은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차주헌은 그녀가 마음이 넓다는 것을 핑계로 프로젝트도 팔찌도,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 강수진에게 바쳤다. 이쯤 되니 임서율은 문득 자신이 인생을 잘 못 산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겪고 있는 이 모든 고통이 모두 자신이 바보라서 생긴 것 같았다. “임서율 씨가 왜 나한테 그런 제안을 하나 했는데 남편이 애인을 둬서 그런 거였네요.” 그때 바로 옆에서 장난기가 살짝 어린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임서율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며 뒷걸음질을 쳐버렸다. 하지만 그때 신발이 카펫에 걸려버렸고 그녀의 몸은 중력을 따라 뒤로 넘어가 버렸다. 임서율은 엄청난 고통이 따를 것을 예상하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데 몸이 반쯤 넘어가던 그때 누군가의 단단한 손이 그녀의 허리를 덥석 잡아버렸다. 임서율은 콩닥콩닥 뛰는 심장을 느끼며 살았다는 표정으로 하도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그 순간, 하도원이 입꼬리를 살짝 올리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손을 다시 거둬가 버렸다. ‘이 남자가 진짜!’ 임서율은 이에 이를 꽉 깨물며 하도원의 옷깃을 확 낚아챘다. 그 행동으로 하도원은 어쩔 수 없이 다시 그녀의 허리를 잡을 수밖에 없게 되었다. 하도원의 가슴팍에 그대로 돌진해버린 임서율은 눈을 살짝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하도원이 재밌다는 듯 웃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내 품이 생각보다 따뜻한가 보죠?” “!” 임서율은 그 말에 그제야 가슴을 퍽하고 밀어내며 거리를 벌렸다. 첫인상도 그러했지만 하도원은 정말 호감이 갈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방금도 그가 손을 거둬들이지만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다. “저도 모르게 손이 나갔어요. 죄송해요.” 임서율은 하도원이 괘씸해 조금 새침한 말투로 사과했다. 하지만 말을 다 내뱉고 난 뒤 지금은 이럴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금세 다시 태도를 바꾸며 미소를 지었다. “하 대표님도 이제 제 상황이 어떤지 보셨으니 아시겠네요. 저는 성운에서 보낸 스파이가 아니에요. 정말 진심으로 도와드리고 싶어서 이러는 거예요.” 하도원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느긋한 말투로 답했다. “임서율 씨와 차 대표가 짜고 연기하는 걸 수도 있죠.” 임서율은 생각보다 더 의심이 많은 그의 태도에 속으로 질색했다. 이 정도의 의심병이면 자기 아내가 외간 남자와 잠깐 대화를 나누고 있어도 바람이라고 확정 지을 게 분명했다. ‘누가 이런 남자랑 결혼하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벌써 불쌍하다.’ “제가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죠. 그리고 그렇게 의심스러우시면 하 대표님이 직접 한번 조사해보세요.” 강수진과 차주헌이 과거에 얼마나 뜨거운 사랑을 했는지는 조금만 알아봐도 나오는 얘기였다. 하도원은 잠시 고민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번 프로젝트, 만약 재호가 뺏어오면 차 대표는 분명히 조사를 진행할 거고 그렇게 되면 임서율 씨의 행동도 금방 드러나게 될 겁니다. 또한 소식이 새어나가면 임서율 씨는 물론이고 재호도 휘말리게 되겠죠. 어쩌면...” 하도원은 말끝을 흐리더니 갑자기 앞으로 다가오며 임서율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임서율 씨가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헛소문도 돌게 될 수도 있어요. 그래도 정말 괜찮겠습니까?” 장난기가 조금 어린 말투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전혀 가볍지 않았다. 하도원이 무슨 뜻으로 이런 말을 하는지 임서율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리스크가 따른다고 해도 그녀는 오아시스 프로젝트를 포기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뭐라 하든 그녀에게는 엄마의 소원이 더 중요했으니까. 임서율은 단호한 얼굴로 하도원을 바라보았다. “그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하 대표님은 그저 프로젝트로 얻게 되는 수익에만 집중해 주세요.” 사실 임서율이 굳이 하도원을 찾아간 건 그가 성운 그룹의 라이벌 회사 대표인 것도 있지만 더 많게는 하도원이 차주헌을 겁낼 만한 사람으로는 안 보였기 때문이다. 하도원은 천천히 자세를 바로 하더니 갑자기 피식 웃으며 임서율을 불렀다. “임서율 씨.” “네.” “임서율 씨 남편분이 우리 쪽을 보고 있는데.” 임서율은 그 말에 하도원의 시선을 따라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정말 차주헌이 이쪽을 정확히 바라보며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동시에 서로 흠칫했다. 차주헌은 임서율이 이곳에 있다는 사실에 깜짝 놀랐다가 그녀 옆에 서 있는 하도원을 본 순간 바로 표정을 굳혔다. 한편 차주헌의 표정 변화를 보지 못한 강수진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임서율의 앞으로 다가왔다. “서율 씨도 참석하는 줄 알았으면 저는 오지 말 걸 그랬어요. 아, 오해하지 말아요. 대표님이 함께 갈 파트너가 없다고 해서 어쩔 수 없이 온 거니까.” 강수진은 서툰 수화를 하며 그녀에게 말했다. 하지만 말을 하다 자기 스스로도 말이 안 된다 생각했는지 눈동자를 굴리며 눈치를 보았다. 임서율은 그녀의 행동에 마치 스스로가 착한 신데렐라를 괴롭히는 계모가 된 듯했다. 차주헌은 임서율의 눈빛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집에서 쉬라니까 왜 나왔어.” 임서율은 순간 그의 말이 걱정인지 책망인지 구분이 서지 않았다. “내가 대학교 때 디자인 했던 팔찌가 오늘 경매에 나온다길래 한번 와봤어. 너한테 연락하려고 했는데 회사일 때문에 바쁠 것 같아서. 그래서 혼자 왔어.” 강수진은 그 말에 얼른 손목을 숨기려다가 임서율에게 딱 걸리고 말았다. “그거 내가 디자인한 팔찌 아니에요? 근데 그게 왜 강수진 씨한테 있는 거죠?” 임서율이 강수진의 손목을 낚아채는 바람에 빼도 박도할 수 없게 되었다. 하도원은 팔짱을 끼며 눈 앞에 펼쳐진 연극을 재밌다는 듯이 바라보았다. 갑자기 싸늘해진 분위기에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기 시작했고 임서율은 강수진의 손목을 잡은 채로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갑자기 목소리 톤을 높이며 차주헌을 바라보았다. “알았다. 이거 서프라이즈지? 나한테 이 팔찌 주려고 일부러 급한 일 때문에 나간다고 한 거구나.” 차주헌은 멍하니 있다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들켜버렸네? 네 말대로 몰래 낙찰받아서 너한테 서프라이즈 해주려고 한 거야. 수진이가 차고 있었던 건 전주인이 팔찌를 한 번도 착용하지 않은 것 같길래 괜찮나 한번 차보라고 한 거고.” 임서율은 예쁘게 웃으며 차주헌과 강수진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수진 씨, 고마워요. 괜찮아 보이는 것 같으니까 팔찌 주세요.” 강수진은 표정이 확 어두워져서는 뭐라 대꾸를 하지 못했다. 상황이 이렇게 흘러가리라고는 아주 조금도 생각하지 못한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녀는 느릿느릿 팔찌를 빼고는 임서율에게 건네주었다. 임서율은 만족한 듯 바로 손목에 차보더니 일부러 더 보란 듯이 두 사람 앞에서 손목을 흔들었다. “어때? 잘 어울려?” “당연하지. 딱 율이 네 거야.” 차주헌은 늘 그렇듯 다정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머, 하 대표님 아니세요? 근데 왜 서율 씨랑 같이 있어요? 혹시 두 사람 서로 아는 사이에요?” 그때 강수진이 갑자기 하도원을 바라보며 순진한 얼굴로 물었다. 제7화 강수진의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갑자기 하도원과 임서율에게 집중됐다. 성운 그룹과 재호 그룹이 라이벌 관계라는 건 이곳 행사장에 있는 모두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 지금 이 상황은 그다지 좋을 게 없었다. 여차하면 이상한 뒷말이 나올 수도 있는 분위기였으니까. 임서율은 최대한 태연한 표정을 지으며 하도원 대신 답했다. “실수로 하 대표님의 신발을 밟아버려서 사과하려던 참이었어요. 혹시 사과하는 것도 문제가 되나요?” 그때 가만히 상황을 보고 있던 하도원도 한마디 거들었다. “맞습니다. 임서율 씨가 사과하려던 차에 차 대표님이 갑자기 오셔서 사과가 끊겨 버렸죠.” 차주헌은 하도원과 함께 있는 지금 이 순간이 매우 불편한 사람처럼 좀처럼 표정을 풀지 않았다. “삼...” “이렇게 된 거 차 대표님이 아내분 대신 사과하는 건 어떨까요? 안 그래도 여성분한테 사과의 말을 들으려니 영 못될 짓을 하는 것 같더라고요.” 하도원은 차주헌의 말을 가볍게 자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임서율은 옆에서 그 말에 듣고는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하도원을 바라보았다. ‘뭐 이런 뻔뻔한 인간이 다 있지? 아까 나한테 그런 짓까지 해놓고 뭐? 영 못될 짓을 하는 것 같아? 하!’ 한편 차주헌은 아무 말 없이 여전히 잔뜩 굳은 얼굴로 하도원을 바라보았다. 임서율은 오늘따라 차주헌이 매우 이상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이런 적 없었는데 하도원 앞에 서니 묘하게 불안하고 또 초조해 보였다. 하도원은 침묵이 길어지자 눈썹을 꿈틀거리며 재촉했다. “공처가라고 소문이 자자하던데 꼭 그렇지도 않은가 봅니다?” 반말을 한 것도 아니고 화를 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그의 말에서는 압박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만약 예전의 임서율이었으면 지금쯤 앞으로 나서며 차주헌을 감쌌을 것이다. 언제나 자기보다는 차주헌을 더 생각하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은 나설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한번 보고 싶었다. 차주헌이 과연 어떤 선택을 할지. 자존심 강한 차주헌이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과연 그녀를 위해 라이벌 회사의 대표에게 사과할 수 있을지 없을지. 분위기가 점점 더 싸늘해져 가자 옆에 있던 강수진이 갑자기 끼어들며 말했다. “하 대표님, 큰일도 아닌데 사과까지 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기분이 나쁘셨다면 저희가 똑같은 신발로 변상해 드릴게요.” 하도원은 강수진을 힐끔 보더니 퉁명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그쪽은 차 대표님 애인이라도 되나 보죠?” 그의 한마디에 강수진은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고 차주헌은 그런 그녀를 자신의 뒤로 보내며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분은 저희 회사에 새로 입사한 강수진 씨입니다.” 하도원은 시선을 내려 손목시계를 한번 확인하더니 심드렁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기억할 필요가 없는 사람의 이름은 머리에 저장해두지 않는 편이라.” 강수진은 그 말에 굴욕감을 느낀 듯 눈이 빨개져서는 차주헌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 “주헌아...” 차주헌은 주먹을 한번 쥐었다가 풀더니 이를 꽉 깨물며 다시금 말을 내뱉었다. “제 아내가 잘못한 건 당연히 남편인 제가 책임을 져야죠. 말씀해 보세요.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하도원은 옆을 지나가던 웨이터를 불러세우더니 그의 손에 들린 샴페인 병을 집어 들었다. “이거 한 병 다 마시면 없던 일로 해드리죠.” “안 돼요!” 강수진이 재빨리 외쳤다. “주헌이는 주량이 약해서 그렇게 많이 못 마셔요. 제가 대신 마실게요!”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샴페인을 집어 들고 마시려는데 차주헌이 화를 내며 빼앗아갔다. “알코올 알레르기 때문에 한잔도 못 마시면서 지금 뭐 하는 거야!”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던 임서율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 들어 얼른 곁에 있는 의자를 덥석 잡았다. 자신의 처지가 비참하고 한심해 미칠 것 같았다. 차주헌은 샴페인을 그대로 원샷 하기 시작했고 강수진은 걱정 가득한 얼굴로 그런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하도원은 의자에 기댄 채 두 사람의 모습을 구경하다 차주헌이 술병을 다 비우자마자 곧바로 박수를 보내왔다. “차 대표님 술 잘 드시네요. 약속대로 아내분 일은 없던 일로 해드리죠.” 그는 말을 마친 후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넣으며 유유히 행사장을 벗어났다. 차주헌은 금방이라도 토할 것처럼 속이 울렁거렸지만 꾹 참고 임서율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살짝 휘청이며 그녀에게 수화했다. “하도원은 무서운 인간이야. 그러니까 앞으로는 근처에 있지도 마.” 임서율은 그가 넘어지지 않도록 팔을 부축해주었다. “알겠으니까 이만 집으로 가자. 너 취했어.” 차주헌은 옆으로 고개를 돌리며 이번에는 강수진에게 말을 건넸다. “너는 택시 타고 가. 도착하면 문자 하고.” “응, 알겠어.” 강수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행사장을 나가려다가 할 말이 남은 듯 다시 고개를 돌려 임서율을 바라보았다. “주헌이 잘 부탁해요. 아마 내일 아침 일어나면 위가 아프다고 할 테니까 죽 좀 꼭 끓여주고요.” 임서율은 그녀를 몇 초간 바라보더니 대답이 아닌 대뜸 당부의 말을 건넸다. “조심해서 가요. 그리고 회사에서도 얘기했지만 호칭에 주의해주세요. 유부남과 이상한 스캔들에 휘말리는 거, 수진 씨도 원하지 않을 거 아니에요.” 그녀는 말을 마친 후 강수진에게 반박할 기회도 주지 않고 차주헌과 함께 밖으로 나가버렸다. 강수진은 멀어져 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되로 주려다 말로 받아버렸다. 임서율은 차주헌을 부축하며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다 부가티 차량에 기대있는 하도원과 눈이 마주쳐버리고 말았다. 하도원은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고 입에는 담배를 물고 있었다. 차갑고 시린 그의 눈동자와 마주친 순간, 임서율은 괜히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어 얼른 시선을 거두어들이며 차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마치 짐짝을 밀어 넣듯 차주헌을 뒷좌석에 밀어 넣었다. 차량이 하도원의 옆을 스쳐 지나갈 때 임서율은 일부러 시선을 내리며 옆을 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아까 행사장에서 하도원이 했던 행동은 누가 봐도 시비였다. 아무리 서로 라이벌 회사라고 해도 오늘 일은 지나쳤다. 하지만 제일 이상했던 사람이 누구냐고 물으면 망설임 없이 차주헌이라고 답할 것이다. 오늘 그는 평소와 달리 꼭 만나면 안 될 사람을 만난 것처럼 불편해하고 또 조금 초조해했다. ‘두 사람 사이에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었나?’ 임서율은 이런저런 추측을 하다가 스멀스멀 올라오는 알코올 냄새에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샴페인이라도 한 병을 다 마시니 소주 못지않게 냄새가 독했다. 차창을 열고 환기를 조금 시키고 나니 그제야 냄새가 조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집에 돌아온 후, 임서율은 비서인 이재우와 함께 차주헌을 부축해 방으로 들어갔다. 이재우는 차주헌을 침대까지 데려다준 후 임서율을 보며 말했다. “사모님, 그럼 저는 숙취해소제 좀 사서 오겠습니다.” “그래요.” 임서율은 차주헌에게 물이라도 떠줄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그때 차주헌이 그녀의 손을 잡으며 잔뜩 취한 목소리로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가지 마... 내 곁에 있어... 내가 돈을 많이 벌어서... 널 다시 내 곁에 데려다 놓을게. 수진아...” 임서율은 그 말에 머리를 한 대 세게 맞은 것 같았다. 그녀는 차주헌이 회사를 물려받기 위해 노력하고 또 가문 사람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게 전부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는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차주헌이 힘들 때도 늘 곁에 있어 줬고 그가 접대를 마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와도 불평불만 한번 없이 옷을 갈아입혀 주고 위가 아플 그를 위해 약과 죽을 준비해두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이것 또한 그녀의 착각이었다. 차주헌을 움직이게 한 동력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줄곧 강수진이었다. “나는... 나는 대체 너한테 뭐였어?” 임서율은 쌔근쌔근 잠이 든 차주헌을 고통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제8화 차주헌은 그날 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아침에 깨어난 뒤에도 머리가 어지럽고 온몸이 찌뿌둥하며 속까지 쓰렸다. 그는 몸을 뒤척이며 움직이다 옆자리가 텅 비어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율아...” 그때 방문이 열리고 이재우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표님, 깨셨어요?” 차주헌은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서율이는?” “사모님은 벌써 출근하셨습니다.” “그래.” 차주헌은 옷을 갈아입은 후 식탁으로 향했다. 식탁 위에 죽이 아닌 빵과 우유가 놓여 있는 것을 본 그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죽은?” “사모님께서 끓일 시간이 없으시다고 알아서 드시라고 하셨습니다.” 차주헌은 그 말에 짜증이 확 밀려왔다. 술을 마시고 들어온 그다음 날은 항상 임서율이 직접 끓인 죽으로 속을 달랬었다. 그녀가 이런 식으로 아무것도 해주지 않은 적은 오늘이 처음이었다. 속이 점점 더 쓰려오는 것을 느낀 차주헌은 허리를 구부정하게 말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위장약 좀 가져와.” 이재우는 황급히 집안 곳곳을 둘러보다가 다시 돌아와서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대표님... 구급상자는 어디에 있습니까?” “뭐?” 위장약도 매번 임서율이 준비해줬던 터라 그는 구급상자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했다. “서율이한테 전화해서 물어봐.” “네, 알겠습니다.” 이재우는 그의 말대로 임서율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몇 번을 걸어봐도 좀처럼 연결이 되지 않았다. “사모님께서 전화를 안 받으시는데요...” 차주헌은 짜증이 점점 더 강하게 밀려오는 것을 느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나가서 사와. 나간 김에 죽도 사 오고.” “네, 알겠습니다.” 차주헌은 알지 못했다. 밖에서 사 온 죽 따위가 임서율이 정성을 다해 끓인 죽과 같을 리 없다는 것을. 이재우가 사 온 죽도 나름 유명한 가게의 죽이었지만 아니나 다를까 차주헌은 딱 한 입만 먹고 금세 맛이 없다며 치워버렸다. ... 그 시각, 임서율은 카페에 앉아 여유롭게 커피타임을 즐기고 있었다. 그녀는 휴대폰 가득 날아든 부재중 전화 알림에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임서율이 차주헌에게 헌신하고 마음을 다했던 건 사랑밖에 모르는 미련한 바보라서가 아니라 당연히 상대방도 자신과 똑같은 마음일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차주헌은 이미 다른 여자의 것이 되어버렸고 즉 그렇다는 건 그녀의 배려와 사랑도 더 이상 당연한 게 아니라는 뜻이다. 앞으로 열흘 뒤면 너덜너덜해져 버린 이 감정도 완전히 끝이 난다. ‘그 시간 안에 어떻게든 하도원을 설득해야 하는데... 그 목석같은 남자를 어떻게 설득하지?’ 임서율의 머릿속은 지금 온통 하도원을 설득하는 일뿐이었다. 하도원은 뼛속까지 비즈니스맨이라 감정을 호소해서는 씨알도 먹히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이런 유형의 사람은 그 사람의 성격에 맞게 최대한 그가 만족할 만한 조건을 내걸어야 한다. ‘그래, 포기하지 마. 엄마 소원이잖아. 끝까지 해보자!’ 임서율은 시간을 한번 확인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회사로 향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강수진이 동료 직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수진 씨, 목걸이 너무 예쁘다. 그거 어젯밤 경매에 나왔던 거 맞죠? 엄청 비싸다고 들었는데?” 강수진은 사람들 중심에 서서 행복한 웃음을 흘렸다. 어제 행사장에서 하도원에게 무시당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녀는 목걸이를 매만지며 자랑하듯 말했다. “네, 맞아요. 남자친구가 낙찰받아 줬어요. 남들 앞에서 꿀리면 안 된다고.” “부럽다. 저도 그런 남자친구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저도요.” 강수진은 부끄러운 듯 볼을 핑크색으로 물들였다. “남자친구가 저 나중에 임신하게 되면 그때는 더 큰 선물을 해주겠대요.” 뒤에서 대화를 전부 듣고 있던 임서율은 냉랭한 얼굴로 강수진 쪽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때 누군가가 임서율을 발견했고 활기차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임 팀장님, 좋은 아침입니다.” 임서율은 표정을 다시 원래대로 돌려놓으며 똑같이 인사했다. “네, 좋은 아침이에요.” “팀장님, 수진 씨 목걸이 좀 보세요. 너무 예쁘지 않아요?” 동료 한 명이 강수진의 목걸이를 가리키며 임서율에게 말했다. 강수진이 한 목걸이는 다름 아닌 차주헌이 낙찰받아오겠다고 했던 ‘영원의 심장’이었다. 누가 바람도 부지런해야 가능하다고 했는데 정말 그 말이 딱 맞았다. 아내와 애인 사이에서 남편과 남자친구 역할을 해야 하는 것도 모자라 회사 경영까지, 차주헌의 부지런함과 마르지 않는 에너지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쁘네요. 그런데 어제 낙찰받은 거면 남자친구분도 경매장에 있었다는 소리인데 왜 못 봤지? 기회 되면 저희한테도 얼굴 보여주세요.” 강수진은 임서율의 말에 예쁜 눈웃음을 지으며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기회 되면 꼭 팀장님한테 보여줄게요.” 임서율은 강수진의 목걸이 쪽으로 시선을 내리더니 손을 뻗어 아주 살짝 스치듯 만지며 다시 말을 내뱉었다. “그런데 남자친구분이 돈이 많은가 봐요? 업계 사람 중에 이 정도 가격의 물품을 부담 없이 낙찰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얘기를 들어봤을 것 같은데 성이라도 얘기해 줄래요? 혹시 우리도 아는 사람일 지도 모르잖아요.” 동료들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업계 사람이면 우리 팀장님이 모를 리가 없어요.” “수진 씨, 얼른 말해줘요.” 강수진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생글생글 웃다가 남자친구 성을 알려달라는 얘기에 천천히 웃음을 지웠다. 임서율은 그런 그녀의 표정 변화를 빤히 바라보며 끝까지 캐물었다. “왜요. 혹시 말하기 곤란해요?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는 건가?” 그녀의 말은 상상을 불러일으키기 충분했고 아니나 다를까 직원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으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아침부터 즐거워 보이네요. 다들 일은 안 하십니까?” 그때 등 뒤에서 차주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강수진과 임서율을 제외한 나머지 직원들은 고개 숙여 인사하더니 빠르게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차주헌은 아직도 술이 안 깬 건지 평소와 달리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모습마저도 어딘가 나른해 보여 시선이 갔다. 그는 임서율의 앞으로 다가오더니 휴대폰을 그녀의 앞에서 흔들어댔다. “전화는 왜 받았어?” “무음으로 해놔서 몰랐어.” 임서율은 그렇게 대답하고는 강수진 쪽을 힐끔 바라보며 물었다. “방금 직원들과 함께 수진 씨 목걸이에 관해 얘기하고 있었어. 남자친구분이 주신 거래. 우리랑 같은 업계 사람인데 혹시 너는 누군지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