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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예린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와 원나잇을 한 남자는 다름 아닌 그녀가 다니는 대학교의 교수님이었다. 게다가 더욱 아찔한 점은 ...

Chương (1)

第1章

신예린은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만 같았다. 그녀와 원나잇을 한 남자는 다름 아닌 그녀가 다니는 대학교의 교수님이었다. 게다가 더욱 아찔한 점은 그날 밤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덜덜 떨며 임신이라는 글이 적힌 결과지를 그의 앞에 내놓았을 때 주시우는 그녀에게 두 가지 방법을 제안했다. 하나는 아이를 지우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그와 결혼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신예린은 얼떨결에 교수님과 결혼하게 되었다. 결혼 후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에서 잤는데 어느 날 갑자기 주시우가 베개를 들고 그녀의 방문 앞에 섰다. “난방에 문제가 생겼나 봐. 내 방이 따뜻하지가 않아. 그래서 오늘 밤은 여기서 자도 될까?” 신예린은 어안이 벙벙한 상태로 그를 방 안으로 들였다. 그리고 다음 날 저녁, 주시우가 또다시 나타났다. “아직 수리가 덜 됐나 봐. 오늘도 신세 좀 질게.” 그렇게 주시우는 자연스럽게 그녀와 같은 방을 쓰게 되었다. 난방비를 아껴서 아이를 키우는 데 돈을 한 푼이라도 더 쓰겠다는 허울 좋은 핑계를 대면서 말이다. ... 주경의 화정대 의대는 명문대였고 주시우는 화정대에서도 굉장히 유명한, 화정대 의대의 최연소 교수였다. 그는 약지에 결혼반지를 끼고 있었지만 그의 곁에 여자가 있는 걸 본 사람은 없었다. 그러다 한 학생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수업 도중에 물었다. “교수님, 이미 결혼하신 걸로 알고 있는데 언제 저희한테 아내분을 소개시켜줄 거예요?” 그런데 주시우가 갑자기 출석 체크를 하기 시작했다. “신예린.” 한 여자가 본능적으로 학생들 사이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학생들의 시선이 쏠린 가운데 주시우는 부드러운 눈빛을 해 보였다. “여러분께 소개할게요. 제 아내 신예린이에요. 아주 훌륭한 심장외과 의사죠.” 제1화 “읍.” 방문이 열리더니 두 사람이 비틀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은 취기 가득한 얼굴로 현관에서 키스를 나누었고 거친 숨소리와 야릇한 분위기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아.” 남자에게 안기게 된 신예린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다. 작고 여린 신예린이 건장한 남자에게 안겨 있는 모습은 사람들의 음심을 자극했다. 그들은 곧장 침대로 향했다. 신예린은 침대 위로 옮겨졌고 거대한 몸이 그녀를 깔아뭉갰다. 남자의 눈꼬리가 빨갰다. 지금 이 순간, 평소 절제미가 느껴졌던 그의 눈동자에서 불꽃이 튀는 것만 같았다. 이성의 끈을 놓은 모습이었다. 신예린은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침대 시트를 힘주어 꽉 쥐었다. 그녀의 눈동자가 아주 잠깐 빛났다. 흔들리는 불빛 아래, 그들의 가쁜 숨소리가 방안에 울려 퍼졌다. ... “예린아.” “예린아!” 신예린은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깼다. 그녀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또다시 그 꿈을 꾸게 되었다. 벌써 한 달이나 지났는데도 매일 밤 그 장면이 꿈에 나왔다. 그날은 여도준의 생일날이었다. 신예린은 들뜬 마음으로 여도준을 찾아갔는데 여도준은 그녀뿐만 아니라 같은 과의 다른 친구들도 불렀고 그중에는 예쁘기로 소문난 강효은도 있었다. 두 사람은 바짝 붙어 앉아서 아무렇지도 않게 스킨십을 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신예린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의 반응이 궁금한 것처럼 말이다. 신예린과 여도준은 같은 과지만 반이 달랐고 과 동기들은 신예린이 여도준을 2년 가까이 좋아했다는 걸 다들 알고 있었다. 심지어 여도준 본인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단 한 번도 그녀를 거절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오늘 친구들의 반응을 살펴보니 이미 다들 강효은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다. 오직 신예린만 바보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여도준은 강효은과 썸을 타면서 어장 관리를 했다. 호기심 가득한 친구들의 시선에 상처를 받은 신예린은 웃음거리가 되어버린 자신의 짝사랑을 이젠 끝내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날 기분이 좋지 않았던 신예린은 술을 많이 마셨고 화장실에 갈 때 취기에 비틀거리다가 다른 사람과 부딪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 한 남자의 그윽한 눈매를 보게 되었다. 남자는 여도준보다 훨씬 더 잘생겼고 더 남자다웠다. 술에 취해 무모해진 신예린은 남자의 멱살을 잡으면서 작게 숨을 내뱉었다. “나랑 잘래요?” 그 뒤는 뻔했다. 두 사람은 함께 호텔로 향했고 그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술에 취해 미친 짓을 저지른 신예린은 다음 날 아침 자신이 다른 남자와 나체로 침대 위에 누워있는 걸 본 순간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서둘러 옷을 챙겨 입고 헐레벌떡 호텔을 떠났다. 신예린은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아무에게도 그 일을 얘기하지 못했고 그 남자가 누군지 알아보지도 못했다. 그러나 그 일을 줄곧 생각하고 있었기에 그로부터 한 달이 지난 지금도 거의 매일 밤 같은 꿈을 꾸었다. 서로 얽힌 나신과 거친 숨소리, 그리고 남자의 그윽한 눈매까지... “예린아, 어서 일어나. 왜 넋을 놓고 있어? 개강하자마자 지각하고 싶어서 그래?” 송지유의 목소리에 뒤늦게 정신을 차린 신예린은 꿈속에서 보았던 장면들을 머릿속에서 지운 뒤 황급히 침대에서 일어났다. 세수를 마친 뒤 신예린은 가방을 들고 송지유와 함께 교실로 향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신예린은 송지유의 발걸음을 따라가기가 벅찼다. “오늘 해부학 수업 있는 거 잊었어?” 송지유가 말했다. “너 요즘 진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아무것도 기억 못 하잖아.” 신예린은 그제야 학교에서 거금을 들여 아주 뛰어난 해부학 교수님을 모셔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교수님은 세계 최고의 의대인 존 헤일리 의대를 졸업한 뒤 바로 교수가 되었는데 의대 역사상 가장 젊은 교수라고 한다. 그 교수님은 개인적인 일 때문에 제때 학교에 도착하지 못했고 학교에서는 어쩔 수 없이 해부학 수업을 한 달 뒤로 미뤘다. 연휴가 끝나고 다시 학교로 돌아왔을 때 그들이 들어야 할 첫 수업이 바로 그 교수님의 수업이었다. “예린아, 그거 알아? 오늘 아침에 그 교수님을 만난 애가 있대.” 송지유가 약간 신난 어투로 말했다. “그 교수님 엄청 잘생겼대. 우리랑 완전히 다른 차원의 사람이라고 하던데. 그것 때문에 지금 학교 완전 난리 났어. 그 교수님 수업을 선택하지 않은 학생들 모두 후회하고 있대.” 송지유는 신예린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우리 빨리 가자. 늦으면 우리 자리가 없을지도 몰라.” 신예린은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이미 3학년이었고 심지어 해부학 수업은 1교시였다. 사실 일부 학생들은 아침에 일어나지 못해 룸메이트에게 대리 출석을 부탁할 때가 있었고 그 탓에 실제로 교실은 텅 비어 있어도 대부분의 학생들이 출석 체크를 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교실 앞에 도착했을 때, 사람들로 북적이는 교실을 본 신예린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평소라면 절대 볼 수 없는 광경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송지유는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한 듯했다. “잘생긴 데다가 학벌도 좋으니 아이돌이 따로 없네.” 그녀는 신예린을 끌고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만요. 들어갈게요. 청강하러 오신 분들은 저희 수강생들에게 자리를 좀 양보해 주시겠어요?” 어렵게 빈자리를 찾아서 앉자 송지유는 뭔가를 발견하고 질린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아침부터 재수가 없네.” 그녀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앞에 여도준과 강효은이 앉아 있었다. 일부 중요한 수업들은 같은 과 학생들이 모두 함께 큰 교실에서 수업을 들었는데 해부학 수업에서 그들과 마주칠 줄은 몰랐다. 그들은 아주 다정한 사이 같아 보였다. 여도준이 귓속말을 하자 강효은이 수줍은 표정으로 입을 가리고 웃었다. 신예린이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걸 발견한 송지유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요즘 정신이 빠진 사람처럼 구는 것도 이해가 가. 2년 동안 짝사랑한 사람이 다른 사람이랑 사귄다는데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지.” 그 말에 신예린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송지유를 바라보았다. “둘이 사귄다고?” “어. 여도준 생일날부터 사귀기 시작했대. 그 표정 뭐야? 설마 지금 안 거야?” 신예린이 대답했다. “응. 방금 알았어.” “그러면 그동안 정신줄을 놓고 다닌 이유가 뭐야?” 개강한 지 거의 한 달이 다 되어가기 때문에 송지유는 신예린의 상태를 알 수밖에 없었다. “...” 신예린은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과 잤다는 말을 차마 하지 못했고, 그녀가 대꾸하지 않자 송지유는 신예린의 어깨를 토닥이면서 말했다. “그래, 알겠어. 네 말을 믿을게.” “...” 그건 사실이었다. “여도준이 좀 잘생긴 데다가 성적이 좋은 건 맞지만 그걸 제외하면 잘난 점 하나 없지 않아? 저런 쓰레기 같은 놈을 좋아할 필요는 없어. 여도준보다 잘생기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이 세상에 널렸거든. 새로 온 교수님도 그렇잖아. 여도준 따위는 비교도 안 되지. 예린아, 차라리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건 어때?” 신예린은 망연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구?” 송지유가 장난스럽게 말했다. “새로 온 교수님은 어때?” 송지유는 못 하는 말이 없었다. 신예린은 송지유의 이마를 찰싹 때렸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갑자기 교실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왔다. 교수님 오셨어.”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교실 안이 삽시에 떠들썩해졌다. 다들 기린처럼 목을 쭉 빼고 교수를 기다렸고 신예린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단순히 그 교수가 얼마나 잘생겼는지가 궁금했을 뿐이다. 정말 그렇게나 비현실적으로 잘생겼을까? 아주 늘씬한 남자가 교실 문 앞에 도착했다. 그는 키가 매우 컸고 얼굴도 준수했다. 날카로운 턱선, 쭉 뻗은 콧대에 높은 코끝, 매력적인 입술... 그윽한 눈동자는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 볼 듯했고 점잖으면서도 고고한 분위기는 사람들의 감탄을 자아냈다. 송지유는 옆에 앉은 신예린이 헛숨을 들이키는 걸 들었다. “예린아, 내가 말했지. 진짜 잘생겼다니까.” 신예린은 책상에 납작 엎드렸다. 제2화 원나잇을 한 상대가 자기 학교 교수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예린은 하늘이 무너진다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절실히 느꼈다. 흥분한 송지유는 고개를 숙이는 순간 신예린이 좌절한 얼굴로 책상에 엎드려 있는 모습을 보았다. “예린아, 왜 그래? 왜 똥 씹은 표정이야?” 만약 없던 일로 할 수만 있다면 똥도 기꺼이 먹을 수 있었다. “지유야.” 신예린은 참담한 심정으로 말했다. “나 망했어. 진짜 휴학하고 싶다.” “왜 그래?” 송지유는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때 단상 위에서 감미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용.” 교수의 목소리와 그날 밤 그 남자의 목소리가 겹쳤다. 어쩌면 그가 아닐지도 모른다고 희망을 품었던 신예린은 그 순간 또 한 번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을 느꼈다. 정말로 그 남자였다. 비록 그날 밤에는 지금보다 목소리가 훨씬 낮고 허스키했지만 신예린은 교수가 바로 그 남자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교수가 조용히 하라고 하자 교실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얼마나 조용한지 바늘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까지 들릴 듯했다. 남자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마이크를 통해 교실 곳곳에 울려 퍼졌다. “자기소개부터 할게요. 저는 주시우라고 해요. 오늘부터 여러분들에게 해부학을 가르칠 겁니다.” “우와.” “우와.” 주시우가 말을 마치자마자 곳곳에서 탄성이 터졌다. ‘안 돼!’ 그 순간 오직 신예린만이 절망했다. 특히 그녀의 곁에 앉은 송지유는 매우 흥분했고 신예린은 그녀의 비명에 귀청이 떨어질 것만 같았다. 단상 위에 선 주시우는 멈추라는 듯이 손을 들었고 그 순간 학생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다들 입을 다물었다. “자기소개는 여기까지 하고 오늘은 우선 해부학이란 어떤 것인지에 관해 얘기해 볼 거예요.” PPT를 켠 주시우는 그 자리에 꼿꼿이 서 있었다. 그에게서는 타고난 여유로움과 고귀함이 느껴졌다. “해부학은 인체의 형태와 구조를 연구하는 학문이에요. 육안이나 현미경, 영상학 등을 통해 인체의 장기나 조직의 형태, 위치, 주변 관계, 발달 규칙을 밝히죠...” 차분한 그의 목소리가 교실에 울려 퍼졌고 학생들은 고3 때보다도 더욱 열심히 수업을 들었다. 물론 신예린은 그러지 못했다. 그녀는 수업 시간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 들어 그가 하는 얘기는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신예린의 상태를 눈치챈 송지유는 그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너 치질 생겼어? 왜 그렇게 안절부절못해?” 송지유는 에둘러 말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 같았다. 신예린은 줄곧 움츠려 있는 상태로 감히 고개 한 번 들지 못했다. 그러다가 허리가 너무 쑤셔서 저도 모르게 허리를 곧추 폈고, 고개를 든 순간 마치 운명처럼 단상 위에 서 있는 주시우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순간 신예린은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한편, 단상 위에서 수업을 진행하던 주시우는 잠깐 흠칫하며 신예린이 있는 쪽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뭐야?” “교수님 왜 저래?” 학생들이 수군댔다. 송지유는 신예린의 옷을 잡아당기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교수님 지금 너를 보고 있는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린 신예린은 어색하게 웃으면서 뒤쪽을 바라보았다. “그럴 리가. 우리 뒤에 있는 애들을 본 거 아냐? 수업 시간에 딴짓하다가 걸렸겠지.” 단상 위 주시우의 동공이 살짝 흔들렸다. 그가 당황한 기색을 드러내는 경우는 매우 드물었다. 그러나 주시우는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눈길을 돌리며 수업을 계속 이어갔다. 물론 펜을 든 그의 손끝이 하얘진 것은 아무도 발견하지 못했다. ‘날 알아본 건가? 아닌 것 같은데.’ 신예린은 확신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녀는 주시우가 자신을 기억하지 못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제발, 제발 좀 모른 척해주세요.’ 신예린은 두 손을 모으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이때 단상 위에서 주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면 뒤에서 세 번째 줄, 오른쪽 다섯 번째 회색 재킷을 입은 학생이 대답해 볼래요?” 너무 정확했다. 마치 순환하지 않는 무한소수 원주율처럼 말이다. 신예린은 당황한 표정으로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주시우의 그윽한 시선을 마주하게 되었다. ‘지금 재킷을 벗으면 안 되겠지?’ 신예린은 멍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고 주시우는 온화하게 웃어 보이며 말했다. “조금 전 질문의 답을 얘기해 볼래요?” 이 수업이 시작된 이후로 줄곧 집중을 못 한 신예린은 당연하게도 그가 무슨 질문을 했는지조차 몰랐다. 신예린은 순간 머릿속이 텅 비었다. “무, 무슨 질문이요?” 학생들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고 주시우는 참을성 있게 말했다. “파라핀 절편 염색 방법 중에 가장 일반적인 염색 방법이 뭘까요? 몇 분 전에 말한 적 있어요.” 신예린은 시선을 내려뜨리고 송지유를 향해 도와달라는 눈빛을 보냈고, 송지유는 목소리를 낼 수가 없어 입만 벙긋거렸다. 물론 그녀가 뭘 말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신예린은 착잡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모르겠습니다.” 주시우는 덤덤한 표정으로 신예린을 바라보았다. “학생은 이름이 뭐죠?” 큰일이었다. 신예린은 주시우의 진짜 목적이 자신의 이름을 물으려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신예린은 하마터면 이름을 지어낼 뻔했다. 그러나 감히 그럴 수는 없었기에 울며 겨자 먹기로 대답했다. “신예린이라고 합니다.” 주시우의 눈빛이 살짝 빛났다. “신예린 학생.” 신예린은 머리털이 쭈뼛 서서 감히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첫 수업부터 집중을 못 하네요. 수업 끝나고 내 사무실로 와요.” 신예린은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네, 교수님.” 신예린은 드디어 자리에 앉았다. 이때 그녀는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예린아, 너무 무서워하지 마. 주 교수님 꽤 다정해 보이시는데. 크게 혼나지는 않을 거야.” 송지유는 신예린을 보더니 작은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신예린은 꼼짝하지 않았다. ‘다정? 침대 위에서는 전혀 다정하지 않았는데.’ “그리고 주 교수님 사무실에 가면 주 교수님과 더 오래 같이 있을 수 있잖아. 얼마나 좋아?”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신예린은 그런 기회를 원치 않았다. 숨 막힐 것 같던 수업 시간이 드디어 끝났고 주시우가 교실에서 나갔다. 그 순간 교실이 순식간에 떠들썩해졌다. 다들 새로 온 교수님이 얼마나 잘생겼는지, 목소리가 얼마나 좋은지 의논하고 있었다. 예전이었다면 신예린도 그들과 함께 수다를 떨었겠지만 지금은 웃을 힘조차 없었다. “지유야.” 신예린은 송지유의 손을 잡고 의미심장하게 말했다. “만약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 인터넷 사용 기록 꼭 다 삭제해 줘야 해.” 그렇게 말한 뒤 신예린은 비장한 표정으로 떠났다. 송지유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신예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교수님과 면담하는 것뿐인데 왜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을 사람처럼 구는 걸까? 기껏해야 수업을 열심히 들으라고 타이르는 것뿐일 텐데 말이다. 불안한 마음으로 사무실 앞에 서게 된 신예린은 노크하려고 손을 들었다가 다시 손을 내려놓았다. 그렇게 몇 번 반복하던 그녀는 결국 마음을 굳게 먹었다. 어차피 겪어야 할 일이라면 빨리 겪는 게 나았다. 그리고 그녀가 끝까지 잡아뗀다면 주시우도 그날 밤 그 여자가 그녀라는 걸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신예린은 심호흡을 한 뒤 문을 두드렸고 이내 안에서 주시우의 온화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는 순간, 심장이 쿵쾅대며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제3화 주시우는 창문 앞에 앉아 있었다. 그는 조각상 같은 외모의 소유자였고 그의 눈동자에는 다정함과 냉정함이 공존해서 매우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콧대 중간 부분이 살짝 튀어나왔는데 그 점 때문에 오히려 더 분위기 있어 보였다. 심지어 이 순간 창밖의 햇빛마저 그를 편애하는 것만 같았다. 신예린은 그를 본 순간 헛숨을 들이켰다. ‘너무 잘생겼잖아!’ 그러나 그녀는 이내 그의 외모에 감탄할 때가 아니라는 점을 떠올렸다. 신예린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긴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교수님.” 신예린은 마치 잘못을 저지른 아이처럼 시선을 내려뜨렸다. 그러나 사실은 켕기는 게 많아서 감히 그를 바라보지 못하는 것이었다. 신예린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지만 반대로 주시우는 매우 여유로워 보였다. 그는 진짜 교수님처럼 자신의 맞은편에 있는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요.” 신예린은 감히 앉을 수가 없어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저는 서 있으면 돼요.” 주시우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신예린보다 머리 하나쯤 더 컸고 신예린은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봐야 했다. “얘기해 봐요. 수업 시간에 왜 집중을 못 했죠?” 주시우는 평온한 어조로 물었다. 진짜 그녀가 수업 시간에 집중을 못 한 이유가 궁금한 것처럼 말이다. 신예린은 감히 솔직히 말할 수 없었기에 한참을 우물쭈물하다가 긴장한 얼굴로 말했다. “어, 어제 잠을 잘 자지 못했거든요.” 곧이어 그녀는 정중하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않겠습니다.” 주시우가 그녀의 말을 믿을지는 알 수 없었다. 그는 곧장 커피머신 앞으로 걸어가더니 아주 느긋하게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다. 여유로움이 흘러넘치는 움직임이었다. 그는 늘씬한 손가락으로 우아하게 커피를 만들었고,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는 눈이 즐겁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해외에서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국내의 수업 방식에 익숙하지 않아요. 만약 내 수업이 지루했다면 솔직하게 얘기해도 괜찮아요.” 이렇게 잘생기고 겸손한 교수님과 원나잇을 하다니, 신예린은 신성모독을 한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아니에요. 교수님 수업 굉장히 좋았어요.” 신예린은 황급히 대답했다. 비록 그녀는 열심히 듣지 않았지만 수업이 끝난 후 다른 학생들의 반응을 보니 굉장히 잘 가르친 것 같았다. 주시우는 싱긋 웃었다. “다행이네요.” 말을 마친 뒤 그는 자신이 내린 커피를 신예린에게 건넸다. 주시우는 손가락이 예뻤고 손톱도 깔끔하게 잘라서 보기 좋았다. “한 번 마셔봐요. 요즘 애들은 커피 없으면 못 살잖아요.” 주시우는 그녀를 보고 애라고 했다. 얼굴이 뜨거워진 신예린은 손을 뻗어 커피를 받았다. “감사합니다.” 잔이 살짝 뜨겁긴 했지만 손을 델 정도는 아니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고 향긋한 커피 향이 그녀의 코끝을 자극했다. 사무실 안으로 들어왔을 때부터 신예린은 줄곧 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시우는 그날 밤의 일을 언급하지 않았고 오히려 친근하게 그녀에게 말을 건넸다. 거기에 진한 커피 향까지 더해지니 긴장이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고개를 숙이고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입안에 커피 향이 감돌았다. 이때 귓가에서 주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날 밤 그 사람 예린 학생이죠?” 신예린은 날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고개를 번쩍 들고 주시우의 그윽한 시선을 마주했다. 주시우의 눈동자는 모든 것을 꿰뚫어 볼 것만 같았다. 주시우가 그녀와 대화를 나누고 커피까지 건네준 이유는 그녀의 경계심을 무너뜨리기 위해서였다. 콜록콜록. 신예린은 사레가 들렸다. 주시우는 이미 예상했다는 듯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그녀에게 티슈를 건넸고, 티슈를 건네받은 신예린은 황급히 입을 닦은 뒤 숨을 골랐고 이내 부인했다. “아뇨. 저 아닌데요.” 주시우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난 그날이 어느 날인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얘기 안 했는데.” 신예린은 자신이 실수를 저질렀다는 걸 자각하고 당황해했다. 이제 더는 커피를 삼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교수님,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건지는 모르겠지만 뭐가 됐든 저는 절대 아니에요. 그래서 부인한 거예요.” 주시우는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돌연 신예린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의 섬섬옥수가 신예린의 손목을 잡았다. 피부가 닿는 순간, 신예린은 마치 감전된 사람처럼 손을 움찔 떨었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신예린은 순간 바짝 긴장했다. “그날 밤 손바닥에 점이 있는 걸 봤었는데.” 주시우는 그렇게 말한 뒤 신예린의 손을 뒤집어 손바닥을 보았다. 작은 손바닥 위에 점이 하나 있었다. 빼도 박도 못할 증거였다. 주시우는 시선을 들어 신예린을 바라보았다. “이래도 부인할 거야?” 신예린은 순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사실 그냥 모르는 척할 수도 있었다. 손바닥에 점이 있는 사람이 그녀뿐인 것도 아닐 테니 말이다. 그러나 주시우는 기가 워낙 셌고 교수님이라는 신분까지 가지고 있었기에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겁을 먹고 움츠러들었다. 그녀가 부인한다고 해도 주시우는 이미 그녀라고 단정 지었다. 신예린은 눈물이 날 것만 같아서 울먹거리며 말했다. “교수님, 잘못했어요. 제 잘못이에요. 낯선 사람이랑 그래서는 안 됐는데... 그냥 없던 일로 해주시면 안 돼요? 앞으로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절망에 빠진 신예린은 눈물이 흐르기 직전에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문이 닫히는 소리에 주시우는 조금 당황했다.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도망쳐버리다니. 주시우가 신예린을 사무실로 부른 이유는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해 보기 위해서였다. 그도 이런 일을 처음 겪었으니 말이다. 주시우는 알코올 알레르기가 있어서 평소에는 절대 술을 입에 대지 않았는데 그날 밤 친구와 귀국 파티를 하다가 실수로 친구의 잔에 든 술을 마시게 되었다. 잠시 뒤 온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자 주시우는 화장실로 가서 세수해 정신을 차릴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마침 한 여자와 부딪쳤고 그 여자가 글썽글썽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술 때문이었을까? 주시우는 그날 밤 살면서 가장 큰 실수를 저질렀다. 자제력을 잃은 그를 낯선 여자와 관계를 가졌고, 다음 날 아침 정신을 차렸을 때 그 여자는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침대 시트에 남아 있던 붉은 자국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주시우는 그 여자를 찾아보려고 했었다. 게다가 상대는 그보다 어려 보였기에 주시우는 반드시 자신이 이 문제를 본인이 책임지고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상대가 자신의 학생일 줄이야. 너무 충격적인 일이라 그는 수업 도중에 잠깐 평정심을 잃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상대방이 그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듯했다. 제4화 신예린은 교실로 돌아가던 길에 여도준과 그의 친구들을 마주쳤다. 여도준은 친구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고 얼굴도 잘생겨서 유독 눈에 띄었다. 그들은 신예린의 앞으로 걸어갔는데 그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야, 도준아. 너 쫓아다니던 그 껌딱지 말이야. 개강한 이후로 널 찾아온 적이 없지 않아?” “네가 연애한다는 말을 듣고 충격받아서 그러는 거 아니야?” “오늘 주시우 교수님 수업 때도 넋을 놓고 있더라. 너랑 강효은이 마침 걔 앞에 앉아 있었는데 그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웠나 봐. 하하하.” 신예린은 그제야 그들이 본인 얘기를 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신예린과 여도준은 의대에서 10위 안에 들 정도로 공부를 잘했다. 신예린은 여도준을 좋아해서 자주 그와 함께 공부를 했었는데 그의 친구들이 자신을 그의 껌딱지로 생각할 줄은 몰랐다. 신예린은 헛웃음이 나왔다. 여도준 친구들의 태도를 보니 평소 여도준이 그녀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알 것만 같았다. 그러나 매번 신예린이 함께 공부하자고 할 때 여도준은 한 번도 거절한 적이 없었고 함께 문제를 의논할 때도 유쾌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래서 신예린은 자신에게 희망이 있을 거라고 착각했다. 여도준이 말했다. “앞으로 효은이 앞에서 예린이 얘기 꺼내지 마. 효은이가 언짢아할 수도 있으니 말이야.” “그래, 알겠어.” 여도준의 친구가 말했다. “지금 네 여자친구는 강효은이지.” “너는 참 운이 좋다. 강효은처럼 예쁜 여자친구가 있고 신예린처럼 공부 잘하는 애가 널 짝사랑하잖아. 둘과 다 사귀는 건 어때?” “꺼져. 무슨 헛소리야? 신예린은 그냥 친구야.” “너는 걔를 친구라고 생각하겠지만 걔는 네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 하잖아.” “너희는 신예린이 아직도 여도준을 좋아할 거라고 생각해? 도준이가 효은이랑 헤어질 때까지 기다리려고 할까?” “헤어지지 않을 수도 있지.” “도준이가 효은이랑 헤어지지 않는다면 평생 도준이만 기다린다고 결혼을 안 할지도 몰라. 하하하하.” “너 드라마 너무 많이 봤다.” “우리 내기할래? 신예린이 여도준을 위해 몇 년 동안 솔로로 지낼지 말이야.” “1년? 2년? 5년?” 여도준이 그들의 말허리를 잘랐다. “됐어. 그만해.” 비록 그렇게 말했지만 여도준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었다. 의기양양한 모습이었다. 한 여자가 한 남자를 위해 몇 년 동안 솔로로 지낸다는 것은 그들에게 아주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그들이 점점 멀어졌고 그 자리에 서 있던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런 일로 한 사람의 본성을 알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신예린은 오늘 하루 종일 많은 일을 겪었다. 우선은 자신과 원나잇을 한 상대가 교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여도준과 친구들의 대화를 듣고 여도준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었다. 수업이 끝나고 신예린은 송지유에게 자신의 교재를 기숙사로 가져가 달라고 부탁한 뒤 본인은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다. “너는 대학교 1학년 때부터 매일 아르바이트를 했었지. 저녁에 따로 공부하는 것도 아닌데 계속 10등 안에 든 걸 보면 정말 대단해.” 송지유는 신예린이 가방을 챙기는 걸 보면서 감탄했다. “어쩔 수 없어. 난 생활비를 벌어야 하니까.” 송지유는 신예린과 꽤 오랫동안 친구로 지냈기에 그녀의 가정 형편을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너희 부모님도 참 너무하신다. 이렇게 훌륭한 딸을 지원해 주셔야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아들한테는 왜 자꾸 투자하신대?” 송지유는 그렇게 말해 놓고서 신예린 가족들의 흉을 본 것 같아 황급히 사과했다. “미안해, 예린아. 내가 경솔했어.” 신예린은 그녀를 향해 웃어 보였다. “괜찮아. 넌 내 편을 들어주고 싶었던 거잖아. 시간이 빠듯하네. 난 이만 가볼게.” 말을 마친 뒤 신예린은 가방을 챙겨 학교를 떠났다. 교문부터 카페까지 가는 길을 신예린은 1년 넘게 거의 매일 같이 걸었다. 그녀는 남들이 공부할 시간에 아르바이트를 했고 남들이 자고 있을 때는 공부를 했다. 남들은 그녀가 쉽게 장학금을 받는다고 생각했지만 신예린 본인만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알고 있었다. 카페에 도착한 뒤 신예린은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낮에 일했던 근무자와 교대했다. 비록 아르바이트일 뿐이지만 이미 1년 넘게 일했으니 정직원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저녁에는 비교적 한가했기에 다른 직원에게 얘기하고 화장실로 갔다. 화장실에서 일어날 때 신예린은 눈앞이 어지러워 서둘러 벽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심장이 쿵쾅대며 뛰었다. 그러다 그녀는 문득 아주 무시무시한 사실을 떠올렸다. 그녀는 이번 달에 아직 생리를 하지 않았다. ‘안 돼. 절대 안 돼.’ 신예린은 그날 밤 주시우가 콘돔을 했던 것도 기억했다. 콘돔이 없었더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설마 콘돔에 문제가 생긴 것일까? 신예린은 불안감 때문에 퇴근하자마자 약국으로 가서 임신테스트기를 샀다. 차마 학교 근처에서는 살 수 없어 택시를 타고 학교에서 멀리 떨어진 약국으로 갔다. 임신테스트기를 손에 쥔 신예린은 긴장 때문에 손이 덜덜 떨렸고 결과를 기다릴 때는 화장실에 앉아서 두 손을 꼭 모으고 끊임없이 기도했다. “제발... 절대 안 되는데... 앞으로는 절대 그러지 않을 테니까 제발 임신만은 아니길... 흑흑... 하나님, 예수님, 부처님, 제발 저 좀 살려주세요...” 신예린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신에게 기도하면서 조심스럽게 눈을 살짝 떴다. 임신테스트기 위에 빨간 줄 두 개가 떠 있는 걸 본 순간, 신예린은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끝났어. 진짜 끝이야.’ 제5화 신예린은 한순간의 잘못된 선택으로 인해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며칠 동안 영혼을 빼앗긴 사람처럼 넋을 놓고 다녔다. 그녀는 아직 대학을 졸업하지도 못했다.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절대 불가능한 일이지만, 감히 부모님에게 얘기할 수도 없었다. 그러나 수술하려면 가족들의 동의가 필요했고 수술을 끝마친 뒤에는 몸조리도 해야 했다. 만약 다른 친구들에게 임신 사실을 들킨다면 학업을 포기해야 할 수도 있었다. 신예린은 살면서 처음으로 엄청난 두려움과 불안감을 느꼈다. 심지어 송지유 또한 이상함을 눈치채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예린아, 무슨 일 있어?” 신예린은 며칠 동안 안색이 창백하고 혼이 빠져나간 사람 같았다. 신예린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괜찮아.” 그렇게 말하는 얼굴이 전혀 괜찮아 보이지 않았다. “무슨 일 있으면 나한테 얘기해. 내가 도와줄게.” 송지유는 신예린이 걱정돼서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여도준 일 때문에 그래?” 지금 신예린에게 여도준은 신경 쓸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송지유도 아직 학생이었기에 만약 그녀에게 임신 사실을 얘기한다면 문제가 해결되기는커녕 송지유까지 넋을 놓고 다닐지도 몰랐다. 그래서 신예린은 억지로 미소를 지어냈다. “난 정말 괜찮아. 걱정하지 마.” 송지유는 신예린이 얘기하려고 하지 않자 더는 강요할 수 없어 화제를 돌리려고 했다. “잠시 뒤 마지막 수업은 주 교수님 해부학 수업이야. 우리 일찍 가서 좋은 자리에 앉자.” 그런데 신예린은 그 말을 듣자마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나 수업 보러 가지 않으면 안 돼?” “안 돼. 주 교수님 엄격한 분인 거 너도 알잖아. 거의 수업 때마다 출석 체크를 하는걸. 나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말이야. 그리고 다른 수업은 모르겠지만 주 교수님 수업에 빠지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걸.” 신예린은 빠지고 싶었다. 그러나 감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녀는 지난 2년 동안 단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는 데다가 주시우도 이젠 그녀의 존재를 알고 있으니 송지유에게 대리 출석을 해달라고 한다면 오히려 자기 무덤을 파는 꼴이었다. 아직 수업 시간이 되지 않았는데 송지유는 신예린을 끌고 교실로 향했다. 게다가 운이 나쁘게도 가장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지유야, 우리 뒤에 앉자. 뒤에도 자리 있잖아.” 신예린은 그녀를 설득했다. 주시우와 잤을 뿐만 아니라 그의 아이까지 임신하게 된 신예린은 주시우를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안 돼. 여기가 명당이야.” 송지유는 자리에 앉았다. “여기가 딱 좋아. 가까운 거리에서 주 교수님의 외모를 감상할 수도 있고 말이야.” 신예린은 혼자라도 뒤에 앉고 싶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보니 다들 이미 자리를 차지해서 어쩔 수 없이 첫 번째 줄에 앉아야 했다. 잠시 뒤 수업 종이 울렸고 신예린은 송지유의 뒤에 숨으려고 하면서 최대한 자신의 존재를 지우려고 했다. 주시우는 한결같이 잘생긴 얼굴로 긴 다리를 내뻗으며 교실 안으로 들어왔고 늘씬한 자태로 단상 위에 섰다. 카키색 트렌치코트를 걸친 그는 마치 모델 같아 보였다. 아름다운 눈매와 짙은 이목구비, 평온한 표정을 한 그가 교실 안으로 들어오자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그는 단상 아래를 쭉 둘러보면서 감미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수업 시작하겠습니다.” 이번에 신예린은 감히 집중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주시우가 얘기한 요점을 전부 노트에 받아 적었고 수업에 집중하다 보니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주시우는 신예린이 봐왔던 사람들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는데 차분하면서도 절제된 분위기를 지녔다.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은 분위기도 남다르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었다. 주시우의 수업 방식은 굉장히 훌륭했다. 그는 어려운 것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고 학생들은 그의 수업에 완전히 몰두하여 그가 얘기한 것들을 열심히 생각했다. 신예린도 매우 진지하게 수업을 들으며 주시우를 주시했다. 그러다 주시우가 시선을 옆으로 돌린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신예린은 순간 눈에 띄게 당황하며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문득 주시우가 자신이 임신한 사실을 알면 어떤 반응을 보일지 궁금했다. 주시우는 그녀 배 속에 자리 잡은 아이의 친부인데 그에게 이 사실을 얘기해야 하지 않을까? 신예린은 고민되어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 그녀는 더는 주시우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드디어 수업이 끝났다. 주시우는 PPT를 끄고 입을 열었다. “오늘 수업은 여기서 끝낼게요.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으면 지금 질문하도록 하세요.” “교수님, 저요!” “저도 질문 있습니다.” 많은 학생들이 주시우를 둘러쌌다. 주시우는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해 주면서 곁눈질로 첫 번째 줄에 앉은 신예린이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하듯이 가방을 챙기고 빠르게 떠나는 모습을 보았다. 그동안 두 사람은 학교에서 여러 번 마주쳤었는데 그때마다 신예린은 화들짝 놀라며 빠르게 다른 길로 돌아갔다. 그를 피하는 게 분명했다. 주시우는 신예린의 기록을 본 적이 있었다. 신예린은 올해 21살이고 그동안 한 번도 결석한 적이 없으며 성적은 늘 상위권이어서 매년 장학금을 받았다. 그녀는 누가 봐도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주시우는 시선을 내려뜨리면서 계속하여 학생들의 질문에 대답했다. ... 신예린은 주말에 집에 돌아갈 때가 드물었다. 그러나 최근 발생한 일들 때문에 불안감이 심해져 힘이라도 얻을 겸 금요일 저녁에 집으로 돌아갔다. 문을 열자마자 맛있는 냄새가 코끝을 자극했고 주방에서 임정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민호야, 왔어? 저녁 거의 다 됐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신예린은 가방을 내려놓고 주방으로 걸어가며 말했다. “엄마, 저 왔어요.” 임정희는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더니 신예린을 본 순간 멈칫했다. “집에는 왜 온 거야?” “내일 주말이잖아요.” 신예린의 대답에 임정희는 미간을 찌푸렸다. “올 거면 미리 얘기해야지. 네 몫은 준비 못 했단 말이야.” “저 어제 연락드렸어요.” “그래?” 임정희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내가 깜빡했나 보다. 사람이 그걸 어떻게 계속 기억하고 있어? 그리고 넌 평소 집에 잘 안 오잖아.” 신예린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송지유의 부모님은 매주 주말이 되기 전에 먼저 송지유에게 연락해 이번 주에는 집에 돌아올 거냐고 묻는다. 그러나 신예린의 부모님들은 신예린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뭘 넋 놓고 있어? 가서 수저라도 놔. 그리고 아빠한테 집에 올 때 햇반 좀 사 오라고 해.” “네.” 신예린은 서둘러 손을 씻고 수저를 놓은 뒤 신경무에게 연락했다. 임정희가 저녁 준비를 마쳤을 때 신경무가 햇반을 들고 돌아왔다. 그는 신발을 벗으면서 투덜댔다. “집에 올 거면 미리 연락해야지. 요즘 물가가 얼마나 비싼데. 이 햇반도 1500원이야.” “물가는 점점 비싸지는데 당신 월급은 아직도 쥐꼬리만 하네요. 우리 이제 입에 풀칠하기도 어려워요.” 임정희는 그에게서 햇반을 빼앗아 들면서 말했다. “봉투는 왜 샀대요? 봉투도 비싼데 말이야. 그냥 들고 오지.” 제6화 옆에 서 있던 신예린은 입술을 깨물다가 신경무를 불렀다. “아빠.” 신경무는 그녀를 힐끗 본 뒤 집 안을 쭉 둘러보았다. “민호는? 안 왔어?” 신예린이 모른다고 대답하려는데 임정희가 먼저 선수를 쳤다. “아까 연락해 봤는데 친구랑 농구를 했대요. 방금 친구랑 헤어져서 지금 집으로 오고 있대요.” 신경무는 혀를 찼다. “공부는 제대로 하지도 않고 매일 농구만 하네. 정말 철이 없어. 앞으로 뭐가 되려고 그러는 건지 몰라.” “민호 겨우 고1이에요. 앞으로 뭐든 될 수 있어요. 당신은 민호 아빠면서 왜 그런 말을 해요?” 세 사람은 음식을 다 차려놓고 식탁 앞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신민호가 돌아오기 전까지 그들은 젓가락을 들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신예린은 눈앞에 놓인 음식들을 보면서 멍을 때렸다. “민호 왜 아직도 안 온대요? 설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겠죠?” 임정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다 큰 애가 무슨 일이 있겠어.” 그러고는 걱정스럽게 말했다. “당신이 연락해 봐.” 신예린은 문득 고3 때 생활비가 떨어져 어쩔 수 없이 기숙사를 떠나 주말에 생활비를 받으러 부모님을 찾아왔던 때를 떠올렸다. 그날 집으로 돌아오던 길에 소낙비가 쏟아졌고 신예린은 빗줄기가 약해질 때까지 오랫동안 처마 밑에서 비를 피했다. 온몸이 흠뻑 젖은 채로 현관문을 열었을 때, 그녀의 부모님과 동생은 식탁 앞에 앉아 밥을 먹고 있었고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된 그녀를 보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비가 세게 내리길래 내일 올 줄 알았는데.” 그날 한 시간 늦게 집으로 돌아온 신예린은 가족들이 먹다 남긴 반찬을 먹어야 했다. 그러나 신민호는 달랐다. 부모님은 신민호가 십 분만 늦어도 걱정하며 연락을 했고 밥도 신민호가 도착해야 먹을 수 있었다. 임정희가 신민호에게 연락하려던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임정희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며 문가 쪽으로 걸어갔다. “민호 왔니?” 신민호는 올해 16살로 아직 풋풋해 보였고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었으며 반항심이 많아 보였다. 그는 교복 단추를 잠그지 않고 있었다. “배고프지? 네가 제일 좋아하는 찜닭 해놨어.” 임정희가 미소 띤 얼굴로 신민호에게 말했다. “언제 적 얘기를 하는 거예요? 저 찜닭 이제 안 좋아해요.” 신민호가 짜증을 냈다. “그래? 그러면 지금은 뭘 좋아해? 다음에 엄마가 해줄게.” “마음대로 하세요.” 신민호는 투덜댔다. 그는 신예린을 본 순간 흠칫하며 말했다. “저 인간은 왜 왔대요?” 누나라고 부르지도 않았다. “주말이잖아. 집에 밥 먹으러 왔어.” 임정희가 신민호를 주방으로 밀어 넣었다. “얼른 손 씻고 밥 먹어. 음식 다 식겠다.” 신민호는 마지못해 주방으로 들어갔다. 밥을 먹는 내내 신예린은 매우 조용히 있었다. 임정희는 끊임없이 신민호에게 음식을 집어주었고 신민호는 그런 그녀에게 고마워하기는커녕 자꾸 피하면서 짜증을 부렸다. “저도 손 있어요. 제가 알아서 먹을게요.” 옆에서 지켜보던 신경무가 말했다. “정신 사나우니까 그만해. 밥 좀 먹자.” 신예린은 그들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다 무심코 고기 한 점을 먹었고 느끼한 맛이 입안에 가득 퍼지는 순간 속이 울렁거렸다. “웁.” 신예린은 참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토했다. 세 사람은 동시에 신예린을 바라보았고 신민호는 역겹다는 듯이 코를 막았다. 신예린은 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또 한 번 속이 울렁거려서 재빠르게 화장실로 달려가 오늘 저녁에 먹었던 음식들을 전부 토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임정희가 따라 들어와서 신예린의 등을 두드렸다. “갑자기 왜 토하고 그래?” 신예린은 토하다가 눈물까지 흘렸다. 그녀는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임정희의 손에서 전해지는 온기를 느꼈다. 그러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신민호가 태어나기 전에 임정희가 이렇게 자신의 등을 두드리며 달래준 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그 순간 신예린은 가슴이 먹먹해졌고 며칠 동안 억눌렀던 두려움과 불안감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그녀는 엄마에게 임신 사실을 밝히고 싶었다. 그리고 그녀에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냐고, 내 인생은 망한 거냐고 묻고 싶었다. “괜찮아?” 임정희가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고개를 돌린 신예린은 임정희를 바라보면서 고개를 끄덕인 뒤 할 말이 있는 표정으로 입을 뗐다. “엄마, 저...” 그런데 말을 꺼내기도 전에 임정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미간을 찌푸리며 밖으로 나갔다. “괜찮아졌으면 가서 저거 치워. 밥 먹고 있는데 저기에다 저렇게 토하면 어떡해? 참았다가 화장실에서 토해야지.” 임정희의 말을 들은 신예린은 큰 충격을 받았다. 화장실 밖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민호야, 왜 안 먹어? 엄마가 지금 바로 치울 테니까 조금 더 먹어.” 신민호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 먹을래요. 밥맛 떨어졌어요.” 신경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얼른 치워. 밥은 먹어야 할 거 아냐.” 아무도 화장실에 있는 그녀를 걱정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티슈를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고, 입을 헹구라고 물을 건네주는 사람도 없었다. 화장실에 주저앉은 신예린은 눈물을 쏟았다. 그들에게 기대를 품지 말아야 했다. 그녀는 가족들에게서 위로를 받을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동안 그녀가 받은 상처들이 모두 가족들이 준 상처임을 신예린은 잠깐 잊었다. 그녀가 실수를 저질렀을 때 가족들은 그녀를 질타하고 원망했다. 누구도 그녀의 기분을 고려해 주지 않았다. 눈물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을 때, 신예린은 문득 주시우를 떠올렸다. 주시우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지 않을까? ... 늦은 밤, 주시우는 서재에 앉아 있었고 그의 앞에는 노트북 하나가 놓여 있었다. 노트북 불빛이 그의 얼굴을 비추었다. 주시우는 차가운 표정을 한 채로 빠르게 타자를 했다. 삐빅. 옆에 놓인 휴대전화가 갑자기 울리자 주시우는 관자놀이를 주무르며 휴대전화를 들었다. 확인해 보니 낯선 번호였다. “여보세요.” 매우 감미로운 목소리였다. 아무런 대답도 없자 주시우는 다시 한번 말했다. “여보세요.” 상대는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스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시우는 전화를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 버튼을 누르려는 순간 여자의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 주 교수님.” 주시우는 신예린의 목소리라는 걸 바로 알아채고 휴대전화를 다시 들었다. 신예린은 살짝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신예린이에요.” “알아.” “늦은 시간에 전화해서 죄송해요.” 신예린은 조금 긴장한 듯 보였는데 이내 마음을 먹은 건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일 시간 괜찮으세요? 교수님을 뵐 수 있을까요?” 주시우는 질문하지 않고 앞에 놓인 조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 시간과 장소는 주시우가 정했다. 레스토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신예린이 보였다. 그녀는 그와 학교에서 처음 만났을 때 입었던 회색 재킷을 입고 있었고,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테이블 위에 손을 올려두고 있었다. 그런데 많이 긴장한 것인지 손을 계속 꼼지락거렸다. 주시우는 그녀를 향해 걸어갔다. 발소리를 들은 신예린은 고개를 들었고 그 순간 주시우의 얼굴을 보게 되었다. 그녀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교, 교수님.” 주시우는 그녀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한 뒤 본인도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고 앉았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주시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뭐 좀 먹을래?” 신예린은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여기서 만나자고 한 건 같이 밥을 먹자는 뜻이었어.” 주시우는 그녀에게 메뉴판을 건넸다. “네가 좋아하는 걸로 시켜.” 주시우는 단호히 말했고 신예린은 감히 거절할 수 없어 아무거나 가리켰다. “이걸로 할게요.” 확인해 보니 매운탕이었다. 주시우는 종업원을 부른 뒤 매운탕 외에 다른 음식을 더 시켰다. 음식이 올라오기 전, 신예린은 물을 계속 마셨다. 주시우는 별로 급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리에 앉은 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신예린에게 자신을 불러낸 목적을 묻지 않았다. 음식이 올라온 뒤 신예린은 매운탕을 보고 흠칫했다. 그녀는 매운 음식을 잘 먹지 못했다. 조금 전에는 메뉴판을 볼 여유가 없어서 자신이 뭘 가리켰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도 본인이 시킨 것이니 억지로라도 먹어야 했다. 그런데 몇 입 먹지 않았는데 너무 매워서 땀이 나고 입술이 부었다. 주시우가 손을 뻗어 그녀의 잔에 물을 채워줬다. “매운 음식을 먹을 때 레몬 물을 마시면 조금 나아. 매운 거 잘 못 먹으면 그냥 먹지 마.” “죄송해요.” 신예린은 조금 뻘쭘했다. “죄송할 것까지야.” 주시우는 매운탕을 옆으로 밀어두었다. “적어도 네가 매운 걸 잘 못 먹는다는 건 알게 됐네.” 그의 말에 조금 감동을 받은 신예린은 고개를 들어 주시우를 바라보았다. 주시우는 여전히 평온해 보였다. 그는 그녀가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이라는 걸 알았을 때도 아주 잠깐 당황하고는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마 그녀보다 나이가 많아서 그런 걸지도 몰랐다. 사람은 원래 나이가 들면 조금 더 여유가 생기니 말이다. 주시우를 만나기로 한 건 옳은 선택일지도 모른다. 신예린은 갑자기 용기가 생겨서 깊이 숨을 들이마신 뒤 말했다. “교수님, 저 할 얘기 있어요.” 드디어 본론을 얘기하게 되었다. 주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해.” 신예린은 가방 안에서 산부인과 검사 결과지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그녀의 두 손이 형편없이 떨렸다. 제7화 손을 뻗어 검사 결과지를 건네받은 주시우는 신예린이 임신했다는 사실을 확인했을 때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신예린은 조심스럽게 그의 반응을 관찰했다. 그가 말없이 검사 결과지를 빤히 바라보자 신예린은 조금 당황해서 서둘러 말했다. “교수님, 교수님 아이 맞아요. 저, 저 교수님하고만 잤어요.” 말을 마친 뒤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주시우의 시선이 검사 결과지에서 그녀의 얼굴로 옮겨졌다. 신예린이 그토록 긴장했던 이유를 이제 알 것 같았다. 신예린은 아무것도 경험해 보지 못한 21살 대학생이었으니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매우 두렵고 불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다른 방법이 있었더라면 그를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주시우는 단 한 번의 실수로 어린 여학생의 미래를 망친 자신을 속으로 욕했다. 그는 결과지를 테이블 위에 내려놓으면서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는 어떻게 하고 싶어?” 그의 태연한 모습에 신예린은 조금 당황했다. 그의 의도를 알 수 없었다. 신예린은 고개를 저으면서 망연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르겠어요. 저, 저는 조금 무서워요.” 주시우는 끊임없이 떨리는 신예린의 손을 보자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무서운 건 당연해. 다른 사람들도 너 같은 나이에 이런 일을 겪었다면 다들 무서워했을 거야.” 신예린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주시우는 본인의 생각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넌 겨우 21살이고 아직 대학교를 졸업하지 못했어. 지금 네게 가장 중요한 건 학업이야.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아이를 지우는 게 최선이야.” 예상했던 대답이었지만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쿵 내려앉아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부모님에게 얘기하지 못하겠어요. 그런데 수술하려면 가족들 사인이 필요하다고 하더라고요.” 주시우는 신예린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 걸 보았다. “우선 사과부터 할게. 그날 내가 술을 마셔서 잠깐 자제력을 잃은 탓에...” 주시우는 그 얘기를 꺼내기가 힘들었다. “연상인 내가 자제를 해야 했어.” 신예린은 얼굴을 살짝 붉히면서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니에요. 저도 잘못이 있는걸요...” “만약 아이를 지울 생각이라면 내가 끝까지 책임지고 옆에 있어 줄게. 수술 비용이랑 수술 후 몸조리 비용도 다 내가 낼 거야. 네 몸이 완전히 회복될 때까지 말이야.” 그의 차분한 목소리에 놀랍게도 신예린의 불안이 가셨다. 적어도 이 일을 의논할 사람이 한 명쯤은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 위안이 되었다. 신예린은 입술을 깨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주시우는 최고의 선택지를 주었다. 수술 문제와 비용 문제도 전부 해결된 셈이다. 그런데 주시우가 말을 이어갔다. “내 말 아직 안 끝났어. 두 번째 선택지도 있어.” 신예린은 당황했다. “네?” ‘두 번째 선택지?’ 주시우는 그녀를 바라보며 놀라운 말을 했다. “바로 나랑 결혼하는 거야.” ‘뭐?’ 신예린은 그 순간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주시우를 바라보았다. 정작 주시우는 침착했다. 그는 조금 전 자신이 한 말이 충격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아이를 지우는 건 네 몸에 큰 부담이 될 거야. 그리고 우리가 결혼한다면 아이를 떳떳하게 낳을 수 있어. 나는 남편으로서, 그리고 아버지로서 책임을 다할 거야. 그리고 학업도 걱정하지 마. 임신한 기간만 잠깐 휴학하고 출산한 뒤에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 돼. 육아는 내가 할게. 그리고 휴학해서 집에서 지내게 되면 내가 옆에서 가르쳐줄게. 절대 다른 학생들에게 뒤처지지 않을 거라고 내가 장담해.” 주시우는 깜짝 놀란 표정의 신예린을 바라보았다. “물론 내가 너보다 나이가 훨씬 많을 거야. 하지만 그게 꼭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어. 나는 너보다 오래 살았으니까 너보다 더 많은 것들을 경험했고 너와 내 경험을 공유할 수도 있어. 그러니 너도 괜한 고생을 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나는 연금도 너보다 훨씬 일찍 받을 거야.” 웃으라고 한 얘기일까? 신예린은 겨우 몇 분 사이에 주시우가 아주 빠르게 자신이 아버지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두 가지 방법을 제안할 줄은 몰랐다. 심지어 그중 하나는 그와 결혼하는 것이었고 그녀의 학업은 어떻게 할지, 육아는 누가 할지까지 전부 정했다. 역시 교수라서 그런지 남들보다 사고력이 뛰어났다. 신예린은 처음엔 놀랐다가 점점 겁이 났다. “교수님, 농담하지 마세요.” “농담 아니야.” 주시우의 진지한 표정을 본 신예린은 표정이 굳었다. “일단 자기소개부터 할게. 나는 주시우고 29살이야. 주경 사람이고 박사 졸업했어. 지금은 화정 의대에서 일하고 있고 월급도 꽤 많이 받고 있어. 귀국한 지 얼마 안 돼서 지금은 전세로 살고 있는데 집은 언제든지 살 수 있어. 차는 내 명의로 된 차고 술, 담배는 안 해. 가정폭력도 걱정할 필요 없어. 평소 취미는 독서랑 러닝이고 부모님은 작은 회사를 운영하고 계셔서 앞으로 노후 걱정은 안 해도 돼. 결혼한 뒤에 우리 부모님이랑 같이 살아야 할 필요도 없어. 지금은 내가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좀 바쁠 수도 있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야. 주말마다 쉴 거고 방학에도 쉴 수 있어서 너와 아이랑 함께 있을 시간은 충분해.” 주시우는 아주 진지하게 말했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선을 보러 나온 줄 알 것이다. 신예린은 마치 벼락을 맞은 사람처럼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주시우는 넋을 놓고 있는 신예린을 바라보면서 참을성 있게 말했다. “조금 전에 내가 한 얘기들 중에 너의 미래 반려자를 고르는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부분이 있는지 확인해 볼래?”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은 없었다. 신예린은 주시우가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준 선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훌륭한 주시우가 그녀와 결혼하겠다고 하다니. 테이블 아래서 신예린은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보았다. ‘으악, 아파!’ 꿈이 아니었다. 신예린은 주시우의 진지한 표정을 본 순간 그가 한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정말로 진지하게 이 문제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결혼은...’ 신예린은 결혼이 아주 먼 미래의 얘기라고 생각해 단 한 번도 그 문제를 고려해 본 적이 없었다. 그것은 아이를 지우는 것보다도 더욱 중요한 일이었다. 신예린이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교수님, 저 조금 고민해 봐도 될까요?” “언제까지?” “다음 주 월요일까지 결정하고 말씀드릴게요.” “그래.” 주시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신예린은 결정을 내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녀가 넋을 놓은 채로 집에 도착했을 때 문을 열자마자 임정희와 신민호의 목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 “저 신발 사고 싶어요.” 신민호의 목소리였다. “새 신발 산 지 얼마 안 됐잖아.” 임정희가 말했다. “어제 농구하다가 망가졌어요.” 임정희가 조금 망설이다가 물었다. “얼마 주면 돼?” “40만 원이요.” 임정희의 목소리가 순간 커졌다. “그렇게 비싸다고? 민호야, 그렇게 비싼 돈을 주고 겨우 신발 하나를 살 필요는 없어.” 신민호는 또 짜증을 부렸다. “제 친구들은 그것보다 훨씬 더 비싼 신발을 신고 다녀요. 제가 학교에서 얼마나 창피한지 아세요? 됐어요. 사주기 싫으면 말아요. 어차피 저도 친구들에게 놀림당하는 거 익숙하니까요.” 임정희는 서둘러 말했다. “사줄게. 민호야. 엄마가 사줄게.” 신예린은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그들은 집안 형편이 넉넉하지 않았다. 임정희는 전업주부였고 평소 집에서 직접 만든 것을 팔아서 돈을 조금씩 벌었다. 그리고 신경무는 그저 평범한 직장인이라서 월급을 많이 받지 못했다. 신예린은 철이 들 무렵부터 부모님들로부터 늘 그들은 집안 형편이 좋지 않다고, 부모님들이 힘들게 일해서 돈을 버는 것이니 아껴 써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자랐다. 그래서 학교에 다닐 때는 생활비를 거의 받지 못했고 고등학교 때 기숙사에서 지내게 된 뒤에야 겨우 매달 십만 원 정도를 생활비로 받아서 썼다. 게다가 그들은 단 한 번도 먼저 생활비를 준 적이 없었다. 신예린은 매번 돈이 없어 배를 곯을 지경이 되어서야 그들에게 조심스레 생활비를 보내달라고 했고 그때마다 부모님에게 혼나야 했었다. 대학교에 다니게 된 뒤로는 등록금을 제외하면 단 한 번도 부모님에게 손을 벌린 적이 없었다. 고등학교 때 그녀는 40만 원으로 몇 달을 버텼었다. 게다가 그녀는 매번 어렵게 부탁해서 생활비를 받았는데 그의 동생은 아주 손쉽게 용돈을 받았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히면서 이 집에서 벗어나고 싶은 충동이 강렬하게 들었다. 그리고 주시우는 그런 그녀에게 유일한 동아줄이었다. 그대로 집에서 뛰쳐나온 신예린은 아파트 아래에서 주시우의 번호로 연락했다. “여보세요.”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온화하고 다정했다. “교수님.” 그의 목소리를 들은 순간,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녀는 휴대전화를 손에 꼭 쥔 채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결혼해요.” 제8화 주시우는 신예린이 이렇게 빨리 결정을 내릴 줄은 몰랐다. “결정한 거야?” “네.” 신예린은 결연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정했어요. 대신 한 가지 부탁이 있어요.” “얘기해.” “저 결혼한다는 거, 저희 부모님에게는 당분간 비밀로 하고 싶어요.” 주시우는 잠시 침묵했다. “그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야. 결혼은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야. 비록 나는 한동안 해외에서 지냈지만 우리나라에서 결혼하려면 먼저 양가 부모님을 뵙고 동의를 얻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어. 그리고 언제 결혼할지, 예물은 어떻게 할지도 부모님과 다 상의해야 해. 그게 일반적이야.” 신예린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전 그러고 싶지 않아요. 만약 제가 임신했다는 걸 아시면 저희 부모님께서는 무조건 아이를 지우라고 하실 거예요.” 신경무는 체면을 매우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만약 그들이 진실을 알게 된다면 그녀는 온갖 비난을 견뎌야 할 것이다. 주시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신예린은 주시우가 마음을 바꿀까 봐 무서워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어요. 전 그냥 당장 결혼하고 싶어요.” 신예린은 결국 울먹거리며 말했다. “교수님, 제게 필요한 건 집이에요.” 신예린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주시우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신예린이 홀로 외롭게 어둠 속에서 간절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모습이 주시우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잠시 침묵이 흘렀고 신예린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잠시 뒤, 주시우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일단 내 카톡 추가하고 네 기본적인 개인정보들 나한테 보내줘. 일단은 시간부터 정한 뒤에 다시 얘기하자.” 주시우가 동의하자 신예린은 기쁘게 웃어 보였다. “네.” “저녁이라서 밖은 좀 추울 테니까 집으로 돌아가.” 주시우는 그녀가 밖에 있다는 것도 알아맞혔다. 신예린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 “일찍 쉬고 좋은 꿈 꿔.” 그녀의 착각일까? 전화 너머에서 들려오는 주시우의 목소리는 놀라울 정도로 다정했다. 그 뒤로 신예린은 그날 그에게 전화한 것이 최고의 선택이었다고 수도 없이 생각했다. 신예린은 용기를 내어 주시우의 손을 잡았고 주시우는 그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그녀에게 보금자리가 되어주었다. ... 월요일 오전, 신예린은 휴가를 신청한 뒤 주민등록증을 챙겨서 나섰다. 신예린의 주민등록증은 임정희가 관리하고 있었는데 어제 신예린은 학교로 돌아가기 전 임정희에게 주민등록증을 달라고 했다. 학교 일을 처리하는 데 필요하다고 말이다. 당시 신예린은 임정희가 무슨 일로 그러냐고 물을까 봐, 혹시라도 거짓말인 걸 들킬까 봐 매우 긴장했다. 검은색 차가 눈에 잘 띄지 않는 길가에 멈춰 섰다. 주시우는 거울을 통해 신예린을 보더니 차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신예린은 주시우를 본 순간 흠칫했고, 그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주시우는 조수석 옆에 서 있었다. 몸에 딱 맞는 정장은 그를 더욱 늘씬해 보이게 했고 뚜렷한 이목구비와 차분한 눈빛이 유독 매력적이었다. 주시우는 한껏 차려입었는데 그와 반대로 신예린은 누가 봐도 대학생 같아 보였다. 그녀는 조금 긴장한 얼굴로 자신의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 제대로 꾸미고 나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주시우도 두 사람의 차이를 의식한 건지 신예린과 자신의 옷차림을 번갈아 보다가 싱긋 웃어 보였다. “내가 너무 차려입었네.” 신예린은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뇨. 제, 제가 차려입었어야 하는 건데... 지금 바로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고 올게요.” 말을 마친 뒤 신예린은 기숙사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주시우가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따뜻한 온기에 신예린은 흠칫 놀라면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주시우의 잘생긴 얼굴을 마주하게 되었다. 주시우가 말했다. “지금 가야 제때 도착할 수 있어. 돌아가서 옷을 갈아입으면 늦을걸.” 신예린은 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이건 해결하기 쉬운 문제야.” 주시우는 그렇게 말한 뒤 정장을 벗었다. 그는 안에 흰 셔츠를 입고 있었는데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도 두 개 정도 풀었다. 그러니 엄숙함이 줄어들고 섹시함이 더해졌다. 살짝 튀어나온 목젖, 쇄골, 그리고 그 아래... 신예린은 황급히 시선을 내려뜨렸다. “어때? 이제 덜 늙어 보이지?” 주시우는 신예린이 긴장한 걸 알아채고 일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신예린은 주시우가 매우 진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서 그가 이런 농담을 할 줄은 몰랐다. 그녀는 살짝 멈칫했다가 이내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나이 들어 보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다고 해서 나이 차이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었다. 물론 대놓고 말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생각했다. 나이 있는 남자들은 모두 나이 얘기에 민감하다고 하니 말이다. “늦겠다. 얼른 타.” 주시우는 신사처럼 차 문을 열었고 신예린은 감사 인사를 한 뒤 조수석에 탔다. 곧이어 주시우도 차에 올랐다. 그는 신예린에게 종이백을 하나 건넸다. “아침이야.” 신예린은 주시우가 아침까지 준비해 줄 줄은 몰랐다. 오늘 그녀는 룸메이트가 다 외출한 뒤에야 외출할 수 있었고 그 탓에 학식도 먹지 못했다. 사실 학식을 먹어도 상관없었다. 그저 도둑이 제 발 저려서 감히 가지 못한 것뿐이다. “감사해요.” 신예린은 조심스럽게 종이백을 받았다. “식기 전에 먹어.” 주시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차에 시동을 걸었다. 신예린은 샌드위치와 우유를 들고 있다가 뭔가 떠올리고는 물었다. “교수님은 아침 드셨어요?” “응. 난 신경 쓰지 않아도 돼.” 주시우는 핸들을 쥐고 앞을 바라보았다. “네.” 신예린은 짧게 대답한 뒤 샌드위치를 한 입 먹었다. 에그마요 샌드위치라서 느끼하지 않고 맛있었다.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기분이 좋아졌다. 그렇게 샌드위치를 다 먹은 뒤 신예린은 우유를 마셨다. 그런데 빨대를 꽂는 순간 우유가 흘러나왔다. ‘티슈, 티슈...’ 신예린은 차를 더럽히게 될까 봐 황급히 움직였다. “티슈는 앞에 있는 수납함에 들어 있어.” 옆에서 주시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전하고 있는데 그녀가 티슈를 찾고 있다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신예린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 수납함을 열어 티슈로 손을 닦았다. 구청에 도착했을 때 신예린은 샌드위치를 다 먹었다. 주시우는 신예린이 샌드위치가 들어있던 종이백을 구청 앞에 있는 쓰레기통에 버리는 걸 보고 결론을 내렸다. ‘음, 입맛은 있나 보네. 아직 입덧이 심하지 않은가 봐.’ 구청에 들어간 신예린은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아서 멍해졌다. 그녀는 강아지처럼 주시우의 뒤만 졸졸 쫓아다녔다. 사진을 찍을 때 웃으라고 하면 웃고, 개인 정보를 적으라고 하면 개인 정보를 적었다. 반대로 주시우는 모든 것이 익숙해 보였고 결국 신예린은 참지 못하고 물었다. “교수님, 혹시 전에 결혼하신 적 있으세요?” 당시 주시우는 두 사람의 서류를 구청 직원에게 건네주고 있었다. 신예린의 질문에 주시우뿐만 아니라 직원까지 그녀를 바라보았다. “...” 신예린은 자신이 말실수했다는 걸 눈치채고 뻘쭘해했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거야?” 주시우의 질문에 신예린은 얼굴이 빨개진 채 말했다. “굉장히 익숙해 보여서요.” 주시우는 웃었다. “여기 직원분이 증명해 주실 수 있어. 나는 오늘 인생 처음으로 혼인신고를 하는 거야. 미리 인터넷으로 찾아봐서 그렇게 보였나 보네. 나는 뭐든 미리 준비해야 하는 성격이거든.” 주시우는 그렇게 말하면서 신예린을 힐끔 보았다. “너는 예외지만.” 신예린은 그 말을 들은 순간 저도 모르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교수님. 그런 말은 위험하다고요!’ 제9화 구청에서 나왔을 때 신예린은 그제야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이렇게 결혼을 해버리다니.’ 게다가 상대는 교수님이었다. 고개를 돌려 주시우를 보니 혼인관계증명서를 들고 사진을 찍고 있었다. 물론 주시우가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SNS에 올리지는 않을 것이다. 신예린이 그렇게 생각한 이유는 그의 SNS를 몰래 염탐했을 때 게시물이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주시우는 그녀의 시선을 느끼고 설명했다. “부모님께 말씀드리려고.” 신예린은 멈칫했다. “그러면 아저씨, 아주머님을 뵈어야...” 주시우는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신예린은 그 순간 얼굴을 붉히면서 말을 바꿨다. “아버님, 어머님을 뵈러 가야 하는 거 아닌가요?” 너무 어색해서 소름이 돋을 것만 같았다. “급해할 것 없어.” 주시우는 서류를 챙기며 말했다. “지금 두 분은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계셔. 당분간은 귀국하시지 않을 거야.” “혹시 두 분께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시면...” 신예린이 걱정했다. 주시우는 매우 훌륭한 사람이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주시우의 부모님이 자신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걱정하지 마. 네가 귀엽다고 하셨어.” “네?” 신예린은 고개를 들어 주시우를 바라보면서 눈을 빛냈다. 주시우가 설명했다. “네 사진을 보셨거든. 귀여운 아이니까 나더러 잘 챙겨주래.” 신예린은 순간 얼굴을 붉혔다. 주시우는 빨개진 신예린의 귀 끝을 바라보며 입꼬리를 당겼다. “오늘 약속 없으면 나랑 어디 좀 갈래?” “어디로요?” “가면 알게 될 거야.” 주시우와 함께 집을 보러 가게 된 신예린은 조금 당황했다. 부동산 중개인이 앞에서 걸으며 소개했다. “이 집은 남서향이고 베란다에서 노을을 볼 수 있어요. 가장 편리한 점은 인테리어가 다 되어 있어서 바로 입주 가능하다는 점이에요. 가구는 두 분이 원하시는 걸로 구매해서 놓으시면 돼요. 저랑 같이 방을 구경해 보실까요?” 신예린은 주시우의 뒤를 따르고 있었는데 주시우가 갑자기 걸음을 멈춰서 하마터면 그와 부딪칠 뻔했다. “조심해.” 주시우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면서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 “여긴 어떤 것 같아?” “네?” 신예린은 멍한 표정이었다. “이 집 마음에 들어?” 신예린은 더듬댔다. “저, 저는 잘 모르겠어요.” 주시우는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잘 모르겠다니. 앞으로 우리 집이 될 수도 있는데. 네가 그랬잖아. 집이 필요하다고.” 신예린은 그 순간 한 방 먹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주시우는 그녀가 한 말을 모두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 감정이 격해져서 충동적으로 내뱉은 말이었는데 그것까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신예린이 넋을 놓고 자신을 바라보자 주시우는 그녀의 손을 잡고 안방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안방이야. 꽤 넓은 편이고 옷장도 커. 하지만 화장대가 없으니까 인터넷으로 네가 원하는 걸 사면 돼. 그리고 작은 방은 앞으로 아이 방으로 쓰자. 그리고 아이가 좀 크면 여기서 같이 지내면 돼. 가장 작은 방은 서재로 쓰는 게 어때? 너는 그곳에서 공부하는 거야. 나는 저기 안쪽에 있는 서재를 쓸게. 앞으로 둘째가 생긴다면 방이 네 개짜리인 곳으로 이사를 가든가 이 방을 다시 침실로 바꾸든가 하자.” 주시우의 차분한 목소리가 신예린의 귀속을 파고들었다. 신예린은 그의 말을 들으면서 앞으로의 결혼 생활을 상상해 보았다. 주시우와 함께 서재에서 책을 읽고, 함께 아이들과 놀아주고, 함께 베란다에 앉아서 노을을 구경하고... 그런 나날들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결국 주시우는 그 집을 사기로 결정했다. 집을 구경하고부터 구매하기까지 두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뒤 주시우는 신예린을 학교로 데려다주었다. “가구는 작은 건 네가 고르고 큰 건 내가 고를게. 그리고 사기 전에 미리 너한테 의견을 물어볼 거야. 아마 앞으로 몇 년 동안은 이곳에서 살게 될 텐데 혹시 마음에 안 든다면 바로 얘기해.” 신예린은 조수석에 앉아서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보름 안에 입주하게 될 것 같은데 미리 기숙사에 퇴실 신청하는 거 잊지 마.” “네?” 신예린은 놀란 얼굴로 주시우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빨리 주시우와 동거하게 되다니. 주시우는 신예린의 생각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했다. “넌 지금 임신해서 기숙사에서 지내면 불편할 거야. 나도 널 돌보기 힘들고.” “저는 제가 알아서 챙기면 돼요.” 신예린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알아봤는데 너희 기숙사 2층 침대라며? 위험할 것 같은데.” 신예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주시우는 시선을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른 걱정되는 점이라도 있어?” “친구들이 저희가 결혼한 사실을 알게 될까 봐 걱정돼요.” 주시우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사람들이 알면 안 돼?” 신예린은 그가 오해할까 봐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사람들이 알게 되면 스트레스를 받을 것 같아서요.” 주시우는 학교의 유명 인사였다. 만약 다른 학생들이 그녀가 주시우와 결혼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앞으로 학교생활이 어려워질 것이다. 주시우는 미간을 찌푸린 채 그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사실 네 배가 불러오기 시작하면 우리가 결혼했다는 사실은 결국 밝혀지게 될 거야. 하지만 지금 당장 사람들에게 알릴 필요는 없으니 당분간은 비밀로 하자. 하지만 기숙사에서 지내는 건 안 돼.” 주시우의 말대로 임신한 상태로 2층 침대를 사용하는 것은 꽤 위험한 일이었다. 신예린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학교 근처에 도착하게 되자 신예린은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잠깐만.” 주시우가 그녀를 불렀다. 고개를 돌리니 주시우가 그녀를 향해 카드 한 장을 내밀고 있었다. 신예린은 화들짝 놀라며 황급히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받아.” 주시우는 카드를 그녀의 손에 쥐여주었다. “난 네 남편이고 이건 내가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야.” 신예린은 도저히 그 카드를 받기 힘들었다. 주시우는 신예린의 불안감을 눈치채고 그녀를 위로했다. “안에 천만 원밖에 안 들어 있어. 그냥 용돈으로 쓰면 돼. 넌 아직 어리니까 일단은 이걸 쓰고 앞으로 몇 년 더 지나면 네게 월급이 들어오는 카드를 맡길게.” 월급이 들어오는 카드를 맡기겠다니, 신예린은 그런 일을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비밀번호는 이거야. 그냥 내 카드를 긁어도 되고 앞으로 여유 있을 때 네 카드로 계좌이체 해서 써도 돼.” 주시우의 다정함에 신예린은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제 가봐. 몸조심하고.” 그렇게 신예린은 넋을 놓은 채로 차에서 내린 뒤 주시우의 차가 멀어지는 걸 바라보았다. 오늘 하루가 그녀가 살아온 지난 21년보다 훨씬 더 다채로웠다. 신예린은 다시 한번 자신의 손을 꼬집어 보았다. ‘악, 아파.’ 꿈이 아니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카드를 본 신예린은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변을 둘러보다가 서둘러 카드를 가방 안에 넣었다. 학교 안으로 들어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점점 더 가벼워졌다. ... “예린아, 왜 화장대를 보고 있어?” 갑자기 다가온 송지유가 자신의 옆에 앉아 있는 신예린이 인터넷으로 화장대를 검색하는 걸 보고 궁금한 표정으로 물었다. “집에 하나 사두려고.” 신예린은 얼버무렸다. “네 그 작은 방에 화장대를 놓겠다고? 책상 하나 놓는 것도 힘들 텐데 거기다가 화장대까지 놓을 거야?” 송지유는 신예린이 보고 있는 화장대를 보면서 말했다. “이렇게 예쁜 걸 거기에 놓겠다니, 너무 아깝다.” 신예린은 그녀의 말을 무시하고 물었다. “어떤 게 더 예쁜 것 같아?” 송지유는 조금 더 부드러운 느낌의 화장대를 골랐다. “이거. 그런데 좀 비싸서 굳이 이걸 살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신예린도 그것이 마음에 들어서 캡처해 두었다. 그녀는 비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예쁜 만큼 값을 할 테니 말이다. 그리고 아르바이트를 해서 번 돈으로 자신이 좋아하는 화장대를 사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예린아, 너 어제 어디 갔었어?” 송지유가 갑자기 물었다. 제10화 “어?” 신예린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내, 내가 얘기 안 했었나? 내 동생이 농구하다가 다쳤거든. 그래서 병원에 데려다줬어.” “너희 엄마 계시잖아.” “엄, 엄마는 점심을 준비하셔야 하잖아.” “너희 가족들은 네 남동생을 진짜 아낀다. 너 대학교 다니면서 한 번도 결석한 적 없잖아. 그런데 동생이 다쳤다는 이유로 수업도 보지 못하고 동생을 돌봐주러 가야 하다니.” 송지유가 툴툴거렸다. 신예린은 너무 켕겨서 마음이 불편했다. 만약 임정희가 신예린이 신민호를 저주했다는 걸 알게 된다면 아마 칼을 들고 학교까지 찾아올지도 몰랐다. “참, 어제 교수님도 휴가 내셨다던데.” 송지유는 그 순간 손을 움찔 떨었다. “사실 어제 교수님 수업 있으셨거든. 그런데 다른 교수님께서 대신 수업을 하셨대. 그 교수님이 주 교수님에게 뭐 하러 가냐고 물으니까 주 교수님이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처리하러 간다고 하셨대.” “그래?” 신예린은 웃으며 말했다.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일이 뭘까?” 신예린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그,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송지유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내 생각엔 결혼하러 가신 거야.” 콜록콜록. 신예린은 갑자기 사레가 들렸고 송지유는 신예린의 모습을 보고 크게 웃었다. “뭘 그렇게 당황해하는 거야? 농담이야.” 전혀 재밌지 않은 농담이었다. 신예린은 식은땀이 흐를 것만 같았다. 그녀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만약 주 교수님께서 정말 결혼하셨다면?” “말도 안 돼. 다른 교수님 말을 들어 보니 입사하실 때까지만 해도 미혼이었다고 하던데?” 어쩌면 어제 결혼한 걸 수도 있지 않은가? “만약에 교수님이 정말로 결혼하셨다면?” “나는 상관없어. 나는 그래도 이성적인 편이라서 말이야. 그냥 잘생기고 똑똑한 교수님을 보니까 부러운 거지. 하지만 다른 애들은 어떨지 모르겠어.” 송지유는 눈을 가늘게 떴다. “예전에 들은 소문인데 우리 학교에서 이미 결혼한 교수님을 좋아한 학생이 있었대. 그런데 그 학생이 교수님의 아내를 납치해서 교수님과 이혼하라고 협박한 일이 있었대.” 신예린은 그 말을 듣고 덜컥 겁이 났다. 지금 이혼하면 안 되는 걸까? 송지유는 신예린을 힐끔 보았다. “왜 무서워 해? 주 교수님이랑 결혼할 사람이 너일 리도 없는데.” “내, 내가 언제 무서워했다고 그래?” 신예린은 인정하지 않았다. “하하하.” 송지유는 신예린의 뺨을 꼬집었다. “귀엽긴. 사실은 내가 꾸며낸 말이야.” 신예린은 송지유를 주먹으로 퍽퍽 쳤다. 두 사람이 장난을 치고 있는데 기숙사 문이 열리며 한 사람이 들어왔다. 그 여학생은 두꺼운 앞머리와 커다란 안경으로 예쁘지도, 못생기지도 않은 이목구비를 가렸고 온몸에서 우울한 기운을 내뿜었다. 신예린과 송지유는 시선을 주고받은 뒤 장난을 멈췄다. “소윤아, 왔어?” 신예린이 먼저 인사를 건넸지만 정소윤은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자신의 자리에 앉은 뒤 책을 펼쳤다. 분위기가 조금 어색해졌다. 송지유는 몰래 신예린을 쿡쿡 찌르면서 문 쪽을 바라보았고 신예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소윤아, 나랑 지유는 수업이 있어서 먼저 가볼게.”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송지유는 신예린을 끌고 밖으로 나갔다. “간다.” 그들은 계단 쪽에 도착해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무섭다니까. 벌써 2년이 됐는데 아직도 저 모습엔 익숙해지지 못하겠어.” 송지유가 입을 열었다. “나도.” 사실 그들의 기숙사는 4인실이었다. 서다연은 3학년 개강 때 중도 퇴실을 신청했고 정소윤은 그들과 같은 과 학생이었는데 성적이 매우 좋았다. 그러나 성격이 아주 음침한 데다가 늘 혼자 다녀서 2년 동안 함께 지냈어도 말을 섞은 적이 거의 없었다. 신예린과 송지유는 정소윤과 함께 있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오늘은 병리학 수업이 있는 날인데 교수님께서 10분 정도 늦을 수 있다고 미리 공지를 해서 신예린은 참지 못하고 조금 전 캡처했던 화장대 사진을 주시우에게 보냈다. [이 화장대 사도 돼요?] 주시우는 빠르게 답장을 보냈다. [수업 시간에 휴대전화 보고 있었던 거야?] 신예린은 억울했다. 주시우는 너무 교수님처럼 굴었다. [저 수업 있는 거 어떻게 아셨어요?] [나한테 네 시간표가 있거든.] 신예린은 그가 보낸 메시지를 본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주시우가 왜 그녀의 시간표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앞으로 수업을 빼먹는다면 거짓말을 할 수도 없었다. [교수님께서 아직 오지 않으셨어요.] [그래. 네 마음에 드는 거면 다 좋아.] 신예린은 그것이 조금 전 화장대를 사도 되냐는 질문에 대한 답이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잠깐 고민하다가 물었다. [베란다에 식물 길러도 돼요?] [그럼. 너는 그 집의 안주인이야. 네가 꾸미고 싶은 대로 꾸며도 돼.] 안주인이라는 말에 신예린은 얼굴이 화끈거렸다. 곧이어 휴대전화가 진동했고 주시우가 200만 원을 입금했다는 알림이 떴다. [???] [사고 싶은 거 다 사.] [아까 카드 주셨잖아요.] [그걸 쓸 생각은 있고?] 비록 안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주시우는 신예린이 어떤 성격인지 대충 알고 있었다. 그는 신예린이 자신의 카드를 쓰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저도 돈 있어요.] [넌 아직 어리잖아. 돈은 어른이 내면 돼.] 신예린은 저도 모르게 볼을 부풀렸다. 주시우는 그를 애처럼 대했다. 그러나 그가 애처럼 생각하는 신예린은 지금 배 속에 그의 아이를 품고 있었다. 신예린은 어떻게 답장을 보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바로 그때, 주시우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 [지금 너는 학업이랑 아이에게만 신경 쓰면 돼. 다른 건 걱정하지 마. 알겠지?] 신예린은 그 메시지를 본 순간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 주시우는 별 뜻 없이 한 말이겠지만 신예린은 자기도 모르게 그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자신에게 그런 얘기를 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너무 다정하잖아!’ 신예린은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하면서 감정을 갈무리한 뒤 답장을 보냈다. [알겠어요.] 그리고 돈도 받았다. 주시우는 당부를 잊지 않았다. [수업 열심히 들어.] 신예린은 경례하는 얼굴 이모티콘을 보냈다. 그 뒤로 주시우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았고 신예린은 채팅 기록을 다시 한번 보았다. 왠지 모르게 얼굴이 자꾸만 뜨거워졌다. “예린아, 왜 그래? 너 얼굴이 왜 이렇게 빨개?” 송지유는 이상함을 눈치채고 물었다. 신예린은 송지유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으면서 자기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그 뒤로 신예린은 수업할 때만 가끔 주시우를 보게 되었고 그 외에는 거의 메시지로 연락했다. 두 사람이 가장 많이 나눈 대화 주제는 가구였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주시우가 물었다. [퇴실 신청은 했어?] 신예린은 시간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해서 아직 신청하지 않았다. [아직 못 했어요.] [얼른 해. 다음 주면 입주할 수 있으니까.] [네.] [신청서 있어?] [아뇨...] [그러면 수업 끝나고 내 사무실로 와서 가져가.] [네.] 주시우의 사무실에 가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지난번에는 그냥 죽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이번에는 교수님과 몰래 연애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