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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의 배신, 이혼만이 답이다!
남편의 첫사랑이 불치병에 걸렸다. 남편은 하지율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지율아, 채아한테 남은 날이 얼마 없어. 그러니까 네가 참아.” 그는 아...
Chương (1)
第1章
남편의 첫사랑이 불치병에 걸렸다. 남편은 하지율에게 이런 말을 자주 했다.
“지율아, 채아한테 남은 날이 얼마 없어. 그러니까 네가 참아.”
그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첫사랑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하지율이 정성껏 준비한 결혼식까지 임채아에게 양보해야 했다.
다섯 살 된 아들이 남편 첫사랑의 다리를 꽉 붙잡았다.
“엄마는 예쁜 누나보다 하나도 안 예뻐요. 왜 예쁜 누나가 우리 엄마가 아니예요?”
하지율은 두 사람을 위해 이혼 합의서를 던져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다.
나중에 남편과 아이가 그녀 앞에 무릎을 꿇는데...
전 남편은 후회로 가득 찬 얼굴이었고 아들은 눈물을 글썽거렸다.
“지율아, 정말 우릴 버릴 거야?”
“엄마, 진짜 우릴 버릴 거예요?”
그때 한 잘생긴 남자가 하지율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여보, 여기서 뭐 해? 아들이 배고프대.”
제1화
새벽 1시, 하지율은 문득 임채아의 SNS를 보게 되었다.
[지후 씨와 윤택이가 준 선물 너무 고마워요. 이 컵은 윤택 어린이가 직접 만든 거랍니다.]
하지율이 사진을 눌렀다. 목걸이 하나와 직접 만든 컵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컵에는 희미하게 ‘엄마 생일 축하해요’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식탁 위에 차갑게 식어버린 음식들과 아직 불조차 붙이지 못한 생일 케이크를 보면서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얼마 전 휴대폰에 뜬 최신 뉴스가 떠올랐다.
[도경시 유명 인사 고지후, 알고 보니 유부남? 게다가 다섯 살 아들도 있다고 밝혀져.]
사진 속에는 키 크고 잘생긴 남자와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자가 다섯 살쯤 돼 보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놀이공원을 걷고 있었다.
임채아는 환하게 웃으면서 고윤택의 머리를 쓰다듬었고 고지후는 그런 그녀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는데 한 번도 본 적 없는 깊고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잘 어울리는 한 쌍과 고지후를 쏙 빼닮은 남자아이, 정말 행복한 가족 같았다.
오늘은 하지율의 생일이자 고지후와의 결혼 5주년 기념일이었다. 하지만 생일을 보낸 사람은 하지율이 아니라 임채아였다.
남편과 아들은 그녀의 생일에 임채아와 함께 있었고 선물조차 임채아에게 주었다.
하지율은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이미 익숙해져 버렸으니까.
임채아는 고지후의 첫사랑이었고 불치병에 걸려 앞으로 1년밖에 살 수 없었다.
죽기 전 마지막 소원이 바로 고지후를 다시 한번 보는 것이었다.
고지후는 임채아를 위해 마지막으로 해주고 싶은 일이 있다며 이해해달라고 했다.
하지율은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를 막을 수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다. 고지후가 진지한 표정으로 그녀에게 통보한 게 처음이었으니까.
마음 한구석이 도려내진 듯 텅 비고 아팠다.
어둠 속에 얼마나 앉아 있었을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고지후가 고윤택과 함께 들어오더니 주방에 앉아 있는 하지율을 보고는 흠칫 놀랐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까맣게 잊은 듯 의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안 잤어?”
하지율이 덤덤하게 말했다.
“할 얘기 있어.”
고지후는 눈살을 찌푸리며 고윤택을 내려다보았다.
“윤택아, 먼저 올라가서 자.”
고윤택은 눈을 비비며 하품하면서 하지율의 옆을 지나갔다. 그러다가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발걸음을 멈췄다.
“엄마, 생일 축하해요.”
고윤택은 고개를 들고 고지후와 똑닮은 예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아빠랑 나 일부러 엄마 생일을 잊으려고 한 건 아니에요. 우린 앞으로 함께할 시간이 많지만 예쁜 누나는 6개월밖에 안 남았잖아요. 별거 아닌 일로 화낼 건 아니죠?”
하지율은 그들이 생일을 잊은 것이 속상한 건지, 아니면 기억하면서도 습관적으로 무시해서 속상한 건지 알 수 없었다.
고윤택이 방으로 돌아간 후 집 안에 침묵이 감돌았다. 고지후가 먼저 입을 열어 침묵을 깼다.
“할 얘기라는 게 뭐야?”
그는 하얀 셔츠에 검은 양복바지를 입고 있었고 얼굴은 조각 같이 잘생겼다. 그리고 분위기는 밤하늘의 달처럼 차갑고 냉정했다.
하지율은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지후 씨, 우리 이혼하자.”
고지후의 눈빛이 바람이 스친 호수처럼 잔잔하게 흔들렸다가 이내 평정심을 되찾았다.
“하지율, 네 생일 잊지 않았어. 선물도 진작 준비했다고.”
“선물?”
하지율이 가볍게 웃었다.
“우리 엄마 목걸이, 임채아 씨한테 줬잖아.”
그 목걸이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서 하지율에게 남겨준 것이었다.
그런데 고윤택을 낳던 날 잃어버렸고 고지후는 찾아주겠다고 약속했다. 나중에 목걸이를 찾긴 했지만 결국 임채아의 손에 들어갔다.
고지후의 얼굴에 당황한 기색이라곤 없었고 그저 눈빛이 평소보다 더 깊고 어두웠다.
“채아한테 잠깐 빌려준 거야. 조만간 돌려줄게.”
“조만간이 언제인데?”
하지율이 되물었다.
“채아 씨가 죽는 날?”
“하지율!”
차가운 목소리가 그녀의 말을 끊었다. 그의 깊은 두 눈에 평소의 냉담한 모습과는 어울리지 않는 분노가 떠올랐다.
“그만해, 좀.”
이제 정말 그만할 때가 된 것 같았다.
딴 여자에게 마음이 있는 남편, 가까이하지 않는 아들, 그리고 그녀를 무시하는 시댁... 이런 날들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고지후가 말했다.
“채아한테 남은 시간이 6개월밖에 없어. 윤택이도 이해하는데 넌 왜 이렇게 속 좁게 굴어?”
더는 참고 싶지 않았던 하지율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 여자한테 시간이 얼마 남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나랑 관계있는 사람도 아닌데 내가 왜 이해해야 해?”
고지후는 늘 고분고분하던 하지율이 이런 말을 할 줄은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그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갑게 식었다.
“하지율, 난 우리가 이미 얘기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하지율이 가볍게 웃었다.
“채아 씨가 첫사랑과의 아름다운 감정을 다시 느끼고 싶다고 하니까 두 사람은 연인처럼 연애했고 결혼한 기분을 느껴보고 싶다고 하니까 지후 씨는 내가 정성껏 준비한 결혼식을 채아 씨에게 양보하라고 했어. 그래서 난 두 사람이 윤택이의 손을 잡고 결혼식을 올리는 모습을 가만히 지켜만 봤어. 채아 씨가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싶다고 하니까 또 세계 일주 여행을 갔고. 만약 채아 씨가 하늘의 달을 따다 달라고 하면 무슨 수를 써서든 따줄 거지?”
하지율과 고지후는 결혼한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않았다.
어느 날 고윤택은 고지후에게 하지율이 웨딩드레스를 입은 모습이 어땠냐고 물었다. 고지후는 그제야 결혼식을 올리기로 결심했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그녀는 6개월 동안 정성껏 준비했지만 임채아의 한마디에 모든 걸 빼앗기고 말았다.
고지후의 시선이 완전히 차가워졌다.
“선 넘었어, 너.”
‘내가 선을 넘었다고?’
숨이 턱 막힌 하지율은 실망감에 눈을 감았다.
결혼 후 그녀는 좋은 아내이자 어머니가 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고지후는 항상 그녀에게 무관심했다.
하여 고지후가 원래 차가운 성격이라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의 첫사랑이 돌아오고 나서야 냉랭했던 고지후에게도 따뜻한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하지율은 식탁 위에 놓인 이혼 합의서를 집어 들었다.
“난 이미 사인했으니까 지후 씨도 빨리 사인해. 채아 씨가 죽기 전에 고씨 가문 사모님 자리까지 넘겨주면 채아 씨도 더 좋아할 거야.”
고지후는 입을 굳게 다물었고 잘생긴 얼굴은 서리가 낀 것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이건 지금 기분이 아주 불쾌하다는 뜻이었다.
“그럼 윤택이는?”
하지율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지후 씨가 키워.”
그가 뭐라 말하려던 찰나 휴대폰이 울렸다.
“지후야, 큰일 났어. 채아 씨가 갑자기 쓰러져서 응급실로 실려갔어.”
제2화
고지후가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대답했다.
“바로 갈게.”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나가버렸다.
하지율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지후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밤늦게 고지후가 임채아의 ‘위독’ 전화를 받고 달려나간 게 벌써 몇 번째인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
다음 날 아침 하지율은 정리한 캐리어를 끌고 떠날 준비를 했다.
고윤택의 방 앞을 지나갈 때 하지율의 발걸음이 저절로 멈춰졌다. 잠깐 생각하다가 떠나기 전에 고윤택을 보고 가기로 했다.
조산으로 태어난 아이라 고윤택은 어릴 때부터 몸이 약했다. 하여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고 모든 것을 직접 챙겼다.
고윤택은 고지후를 많이 닮았고 성격이 냉랭한 것까지 비슷했다.
오늘은 주말이라 유치원에 가지 않고 방에서 숙제를 하고 있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그녀가 들어오는 걸 보고는 평소처럼 인사한 다음 다시 고개를 숙여 숙제하고 있었다.
하지율은 고지후를 쏙 빼닮은 고윤택의 옆모습을 보며 말했다.
“윤택아, 엄마 간다. 아프지 말고.”
“네.”
고윤택은 고개도 들지 않고 대답했다.
임채아가 나타난 후 그녀를 대하는 고윤택의 태도가 점점 싸늘해졌다.
전에 임채아가 SNS에 이런 영상을 올린 적이 있었다. 영상 속에서 고윤택은 솜사탕을 입에 문 채 웅얼거렸다.
“난 예쁜 누나랑 같이 있는 게 제일 좋아요. 예쁜 누나가 맛있는 거 많이 사줘요.”
임채아가 물었다.
“윤택아, 엄마 너한테 잘해주지 않아?”
“엄마는 맨날 이것도 하지 말고, 저것도 먹지 말래요.”
“윤택이는 누나랑 엄마 중에 누가 더 좋아?”
“당연히 예쁜 누나죠. 엄마가 예쁜 누나처럼 잘해줬으면 좋겠어요.”
하지율은 고윤택이 엄격한 엄마보다 마음껏 어리광부리게 해주고 모든 것을 허용해주는 예쁜 누나를 더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이의 건강을 위해 하지율은 매일 밤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도록 했다. 그리고 위가 약했기에 밖에서 파는 음식을 먹지 못하게 했다.
다행히 그녀의 세심한 보살핌 덕에 고윤택은 건강을 되찾았고 예전처럼 자주 아프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점점 그녀에게서 멀어져갔다.
하지율이 막 나가려던 그때 고윤택이 갑자기 그녀를 불렀다.
“엄마.”
그녀가 돌아보자 고윤택이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엄마도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내가 예쁜 누나를 정말 좋아하는데 그럼 엄마도 예쁜 누나를 좋아하겠죠?”
순간 멍해진 그녀는 마지막 남은 감정의 끈마저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율은 천천히 눈을 감고 소리 없이 웃었다.
“윤택아, 너 예쁜 누나 지켜주고 싶다고 했잖아. 이제부터는 아빠랑 같이 그 누나를 지켜주면 돼.”
고윤택은 그녀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 듯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율은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집을 나갔다.
...
절친 유소린의 차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유소린은 하지율의 캐리어를 차에 싣고는 그녀를 쳐다보며 물었다.
“지율아, 정말 이혼하려고?”
하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결정했어.”
“그럼... 윤택이는?”
“내가 양육권을 주장해도 고씨 가문을 이길 수 없어. 게다가...”
하지율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윤택이도 나랑 살고 싶어 하지 않을 거야. 지금 윤택이한테는 예쁜 누나가 최고니까.”
유소린이 동의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윤택이를 얼마나 힘들게 낳았는데. 거의 죽다 살았잖아. 그리고 항상 옆에서 윤택이를 돌봤고 엄청 많은 걸 희생했어. 근데 어떻게 아빠랑 엄마 사이를 망친 내연녀를 더 좋아할 수 있어?”
하지율이 덤덤하게 말했다.
“그래서 둘이 부자야. 여자를 보는 눈도 똑같고.”
“고지후는? 네가 떠나는 거 알아?”
하지율이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도 첫사랑이랑 같이 있을걸?”
결혼 전 하지율에게 아파트 한 채가 있었는데 지금까지 쭉 비워두었다. 청소를 마친 후 유소린은 그녀를 데리고 시내로 나갔다.
“지율아, 네가 윤택이를 낳고 나서부터 우리 한 번도 같이 쇼핑 못 했어. 이따가 쇼핑하면서 기분 전환하자.”
그녀의 말이 사실이었다. 고윤택을 낳은 후 하지율에게는 집과 아이뿐이었다. 자신도, 삶도, 시간도 모두 잃어버렸다.
하지율은 유소린의 반짝이는 눈을 보면서 문득 과거의 자신도 유소린처럼 활기 넘쳤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5년간의 결혼 생활에 그녀는 생기 없는 노인이 되고 말았다.
하지율의 눈시울이 저도 모르게 붉어졌다.
“그래.”
그때 유소린의 휴대폰이 울렸다. 상대가 뭐라 했는지 유소린이 얼굴을 잔뜩 찌푸리더니 잠시 후 말했다.
“알았어. 바로 갈게.”
그녀는 전화를 끊고 하지율에게 말했다.
“지율아, 네가 악기랜드에 맡긴 바이올린 있잖아. 여름밤의 별. 그걸 비싼 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어. 점장님이 그러는데 보통 사람이 아닌 것 같아서 거절하기 어렵대. 오늘 시간 되니까 같이 가보자.”
‘바이올린...’
하지율은 벌써 5년이나 바이올린을 켜지 않았다. 그동안 고윤택을 돌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바이올린에 관한 모든 것을 유소린에게 맡겼다.
유소린이 갑자기 그 이름을 꺼내니 다른 세상 얘기처럼 낯설게 느껴졌다.
...
하지율은 유소린과 함께 악기랜드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발걸음을 멈췄다.
훤칠하고 키가 큰 잘생긴 남자와 가녀리고 아름다운 여자가 판매 불가라고 적힌 진열장 앞에 서 있었다.
여자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설 속의 여름밤의 별, 정말 너무 예뻐. 지후야, 내가 바이올린 켜는 거 제일 좋아하잖아? 마지막으로 연주회를 열고 싶은데 이 여름밤의 별로 연주하면 어떨까?”
남자의 낮고 굵은 목소리가 곧바로 들려왔다.
“그래.”
점장은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그들의 뒤를 따르며 식은땀을 닦았다.
하지율과 유소린이 들어오는 걸 본 점장은 마치 구세주라도 만난 것처럼 안색이 밝아졌다.
“유소린 씨, 드디어 왔군요. 이분이 여름밤의 별을 사고 싶어 하시는데 가격은 부르는 대로 주겠다고 하시네요...”
제3화
고지후와 임채아를 본 순간 유소린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고 두 눈에 혐오감이 가득 드러났다.
유소린이 차갑게 말했다.
“이 바이올린 안 팝니다, 우리.”
임채아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유소린의 옆에 서 있는 하지율을 쳐다보았다.
청순하고 아름다운 외모와 아담한 체구의 임채아와 달리 하지율은 단정하고 기품이 있었다.
전형적인 달걀형 얼굴에 눈썹과 눈매가 수려했고 아름다운 눈동자는 물결처럼 흔들렸는데 마치 미인도에서 튀어나온 고전적인 미녀처럼 기품이 우아했다.
하지율을 본 순간 임채아의 두 눈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녀는 재빨리 하지율에게 다가가 간절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하지율 씨, 이 여름밤의 별이 혹시 지율 씨 친구의 건가요? 바이올린을 잠시 빌릴 수 있게 친구분한테 말 좀 잘해주면 안 될까요? 저랑 지후 이 바이올린 덕에 인연을 맺었거든요. 그때 제가 정원에서 연습하고 있었는데 지후가 제 연주 소리를 듣고 찾아왔고 그 후로 함께하게 되었어요... 지후는 제가 바이올린 켜는 걸 제일 좋아해요. 지율 씨, 제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 연주회를 성공적으로 열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마지막으로 노력해보고 싶어요.”
의도적인 건지 아닌지 임채아는 고개를 숙이고 목에 걸린 익숙한 목걸이를 보여주었다.
머리 위의 조명이 목걸이에 반사되어 눈이 부시게 반짝였다.
하지율은 눈을 찌푸렸다가 덤덤하게 말했다.
“이 세상에 죽는 사람이 매일 있어요. 그럼 제 앞에 나타난 불치병에 걸린 사람들을 제가 모두 맞춰주고 양보해야 하나요?”
이런 심한 말을 처음 들어본 듯 임채아의 눈시울이 갑자기 붉어졌다. 눈물이 눈가에 고여 금방이라도 쏟아질 것 같았다.
고지후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하지율, 겨우 바이올린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사람을 몰아세워야겠어? 원한다면 내가 하나 새로 사줄게.”
하지율이 그를 보며 말했다.
“그래. 겨우 바이올린 하나잖아. 채아 씨가 원하면 새로 하나 사줄 거지, 왜 하필 내 것을 가져가겠다는 건데?”
임채아가 옆에서 애원했다.
“지율 씨, 대체 어떻게 해야 빌려줄 건가요? 조건이 있다면 뭐든지 말해요.”
‘조건? 그래봤자 결국에는 지후 씨가 해결할 텐데.’
하지율은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채아 씨 우리 엄마가 남긴 물건을 아주 좋아하나 봐요? 우리 엄마 목걸이를 탐내더니 이젠 엄마의 바이올린까지 탐내는군요.”
임채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말인지 도통 모르겠네요.”
알면서도 모른 척하는 임채아의 모습에 하지율은 속으로 싸늘하게 웃었다.
“이 여름밤의 별은 우리 엄마가 제게 남겨주신 거고 채아 씨가 목에 한 그 목걸이도 우리 엄마가 남겨주신 거예요.”
임채아의 얼굴이 갑자기 창백해졌다.
“죄송해요. 이게 지율 씨 어머니의 물건인 줄은 정말 몰랐어요... 어젯밤에 윤택이가 목걸이가 든 선물 상자를 가져왔어요. 전 지후가 저한테 주려고 준비한 선물인 줄 알고 그냥 했는데 지율 씨 어머니의 것이었다니...”
하지율이 가볍게 웃었다.
“이제라도 알았으면 그만 돌려줄래요?”
임채아는 목에 걸린 목걸이를 만지면서 입술을 가볍게 깨물더니 눈물을 글썽이며 고지후를 쳐다보았다.
“지후야, 지율 씨가 이렇게까지 말했는데... 이 목걸이 지율 씨한테 양보하는 게 좋겠어. 사소한 일로 지율 씨의 기분을 상하게 해선 안 되잖아.”
‘양보?’
그녀는 돌려준다는 말 대신 양보라고 했다. 그 말인즉슨 이 목걸이가 하지율 어머니의 것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단지 하지율이 달라고 해서 마음이 넓은 그녀가 양보한다는 것이었다.
고지후는 하지율이 그를 협박하려고 이혼 얘기를 꺼냈다고 생각했다. 가뜩이나 기분이 언짢았는데 임채아가 이렇게 말한 순간 표정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럴 필요 없어.”
그의 목소리는 맑고 깨끗했다.
“너한테 줬으니까 이젠 네 거야.”
“하지만...”
임채아가 뭐라 더 말하려던 그때 고지후가 말을 가로채더니 덤덤하게 말했다.
“이미 준 건 다시 돌려줄 이유가 없어.”
임채아의 두 눈에 감동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하지율은 저도 모르게 주먹을 불끈 쥐었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채아 씨가 제 바이올린을 빌리고 싶다고 했죠? 좋아요. 지후 씨가 저한테 부탁하면 고려해 볼게요.”
임채아의 두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고지후가 무서울 정도로 차가운 얼굴로 말했다.
“하지율, 적당히 해.”
그러자 하지율이 코웃음을 쳤다.
“난 지후 씨가 채아 씨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해줄 줄 알았는데 지금 보니... 그건 또 아니네.”
예전에 하지율은 고지후가 임채아를 위해서라면 모든 걸 희생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가 희생할 수 있는 건 중요하지 않은 것들뿐이었다. 예를 들어 중요하지 않은 하지율...
모든 것을 알아차린 후 하지율의 마음은 더 이상 파도가 일지 않았다.
그녀는 옆에 멍하니 서 있는 점장을 돌아보며 말했다.
“제 기억이 맞다면 바이올린을 오늘까지 이 가게에 맡기기로 했는데... 바이올린을 내려주세요. 오늘 다시 가져가야겠어요.”
점장이 고지후의 안색을 조심스럽게 살피자 하지율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왜요? 바이올린의 주인은 전데 바이올린을 가져갈 권리도 없는 건가요?”
“아니요, 아니요.”
점장이 급히 웃으며 말했다.
“지금 바로 돌려드리겠습니다.”
절차를 마친 후 하지율은 바이올린을 들더니 고지후와 임채아를 쳐다보지도 않고 떠났다.
고지후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면서 미간을 찌푸렸다. 임채아는 죄책감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제 네가 지율 씨 생일을 챙겨주지 않아서 화난 게 분명해. 이게 다 내 몸이 좋지 않은 탓이야. 맨날 너한테 민폐만 되고.”
“너랑 상관없어.”
고지후는 시선을 거두고 담담하게 말했다.
“연주회 먼저 준비하고 있어. 여름밤의 별은 조만간 너한테 보낼게.”
임채아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지어졌다.
“알았어.”
...
그날 밤 고지후는 모처럼 시간 맞춰 집에 들어왔다. 하지만 평소처럼 밥상을 차려놓고 그를 기다리던 하지율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이 되자 고윤택도 밥을 먹으러 아래층으로 내려왔다. 그런데 텅 비어 있는 식탁을 보고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엄마 오늘 저녁 안 차렸어요?”
매우 훌륭한 현모양처인 하지율은 지난 몇 년 동안 아내로서의 본분을 지켜왔다.
고지후는 그녀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름 만족했다.
고윤택의 위장이 약한 탓에 가려야 하는 음식이 많아 저녁 식사와 야식은 도우미에게 맡기지 않고 항상 하지율이 직접 만들었다.
낮에 있었던 일이 떠오른 고지후는 불쾌함을 드러내면서 입술을 씹었다.
‘이런 식으로 날 협박해서 통할 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건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한 건데.’
“신경 쓰지 마.”
고지후가 무덤덤하게 말했다.
“아빠랑 나가서 먹자.”
고윤택이 신난 얼굴로 손뼉을 쳤다.
“좋아요. 예쁜 누나도 불러서 같이 가요. 또 맛있는 솜사탕을 먹을 수 있겠네요.”
“솜사탕?”
고지후가 살짝 멈칫했다.
“네 엄마가 너 유당불내증이 있어서 솜사탕 못 먹는다고 했는데.”
제4화
고윤택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유당불내증이 많이 좋아져서 의사 선생님도 가끔 먹는 건 괜찮다고 했어요. 근데 엄마는 날 통제하고 싶어서 항상 엄마 말만 들으라고 해요.”
'통제'라니... 다섯 살짜리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고지후가 입을 열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전화를 받자 임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후야, 집에 도착했어?”
“응.”
“지율 씨는 아직 안 들어왔지?”
고지후는 잠깐 침묵하다가 말했다.
“무슨 일이야?”
“나... 방금 지율 씨 본 것 같아...”
임채아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떤 젊은 남자랑 밥을 먹고 있었는데... 좀 가까워 보이더라.”
그녀는 멈칫했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낮에 있었던 일 때문에 지율 씨의 기분이 상한 거 아니야? 지율 씨한테 제대로 설명하는 게 어때?”
고지후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집에 와서 저녁밥을 차리는 게 아니라 딴 남자랑 데이트를 하고 있다고?’
그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차가워졌다.
“지금 어디에 있는데?”
하지율이 주소를 알려주자 고지후가 대답했다.
“알았어.”
그러고는 전화를 툭 끊어버렸다.
...
그 시각 레스토랑.
강병주는 하지율을 빤히 쳐다보았다.
“정말 결정했어?”
하지율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름밤의 별은 엄마가 날 위해 특별히 만들어주신 거예요. 근데 난 가정을 위한답시고 5년이나 방치해뒀어요...”
그러고는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실망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지금은?”
강병주가 어두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시 복귀하면 공연도 자주 해야 하고 엄청 바쁠 텐데. 그러면 남편이랑 아이를 돌볼 시간이 없을 거야.”
“윤택이 이젠 많이 건강해졌어요.”
하지율은 자신을 비웃듯 웃었다.
“게다가 이젠 내 보살핌도 필요 없어요.”
“그럼 고지후는?”
강병주가 다시 물었다.
“고지후가 동의할까?”
고지후의 이름을 언급하자마자 하지율의 눈빛이 차갑게 식었다.
“내 일이에요. 그 사람 동의 따위 필요 없어요.”
강병주는 한동안 그녀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네가 나랑 만나는 걸 허락하지 않을 거야.”
“괜찮아요.”
하지율은 고지후의 한마디 때문에 강병주를 멀리했던 일이 떠올라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선배, 미안해요.”
강병주가 고개를 내저었다.
“지율아, 그런 소리 하지 마. 미안한 건 나지. 어머님께 약속했었어. 널 잘 지켜주겠다고. 근데 널 지켜줄 능력이 없어서 네가 고생을 많이 한 거야.”
강병주는 하지율의 선배였다. 두 사람은 어릴 때부터 하지율의 어머니에게서 함께 바이올린을 배웠다.
현재 강병주는 업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바이올리니스트가 되었다.
그의 잘생긴 외모와 타고난 분위기 덕에 바로 유명세를 얻었고 심지어 많은 소녀들의 이상형이 되었다.
인지도가 연예계 최고 스타와 맞먹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리 돈도 있고 유명 인사라고 해도 고지후 같은 자본가의 상대는 아니었다.
하지율이 말했다.
“선배랑 상관없어요. 내가...”
하지율의 말이 끝나기 전에 뒤에서 부드러운 목소리가 갑자기 들려왔다.
“하지율 씨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그녀는 고개를 돌리자마자 하얀 원피스를 입은 임채아를 보았다.
싫어하는 사람을 하루에 두 번이나 만나다니, 정말 재수 없는 날이었다.
하지율이 쌀쌀맞게 말했다.
“그게 채아 씨랑 무슨 상관이죠?”
임채아가 웃으며 말했다.
“화내지 말아요, 지율 씨. 지후가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갔는데 지율 씨가 저녁 준비를 하지 않고 밖에 있어서 이상해서 물어봤을 뿐이에요.”
임채아의 가벼운 말투와 다정한 표정을 보면 참으로 선하고 나긋나긋한 여자였다. 그녀와 달리 하지율은 무정하고 냉혹하며 차가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말속에 도발과 조롱이 숨겨있다는 걸 하지율은 바로 알아챘다. 고개를 든 순간 임채아의 두 눈에 아직 사라지지 않은 우쭐함이 보였다.
하지율이 물었다.
“지후 씨가 왜 모처럼 집에 일찍 들어갔을까요? 그건 지후 씨가 여유 시간을 모두 채아 씨한테 썼기 때문이죠... 채아 씨는 뻔히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건가요?”
임채아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하지율의 손을 잡고 다급하게 설명했다.
“지율 씨, 제 말 좀 들어봐요. 전 그런 뜻이 아니라...”
임채아의 말이 끝나기 전에 하지율이 그녀의 말을 가로챘다.
“알고도 모르는 척하는 게 아니라면 눈치가 없는 거네요.”
그러고는 그녀가 잡고 있는 손을 빼냈다.
“채아 씨, 난 눈치 없는 사람을 싫어해요.”
“으악.”
그런데 그때 임채아가 갑자기 비명을 지르더니 뒤로 넘어지려 했다.
하지율이 반응하기도 전에 훤칠한 키의 한 남자가 넘어지려는 임채아를 붙잡았다.
“채아야, 괜찮아?”
임채아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더니 그 사람을 보자마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마치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가련하기 그지없었다.
“괜찮아, 지후야... 지율 씨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너무 뭐라 하지 마.”
고지후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제야 옆에 있는 하지율을 발견했다. 그는 미간을 찌푸린 채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율, 채아한테 사과해.”
이런 일이 벌써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만약 예전이었더라면 하지율은 분명 초조해하면서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내가 그런 거 아니야. 내 말 좀 들어봐.”
“아니야, 나. 나 좀 믿어줘.”
그리고 고지후는 그녀의 편에 선 적이 한 번도 없었고 매번 그녀더러 임채아에게 사과하라고 강요했다.
하지율이 사과하지 않으면 고지후는 냉랭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녀의 전화를 받지 않았고 문자도 답장하지 않았으며 게다가 말을 섞기는커녕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야말로 투명 인간 취급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나중에는 고윤택마저 냉랭해지고 그녀를 무시한 바람에 결국 고개를 숙이고 잘못을 인정하는 수밖에 없었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 하지율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왜 지후 씨 말을 들어야 하지? 지후 씨가 뭔데?”
고지후는 순간 잘못 들은 줄 알았다.
“뭐라고?”
하지율은 고지후를 보면서 차갑게 말했다.
“내가 지후 씨를 신경 쓸 때는 지후 씨 말이 곧 법이었어. 근데 이젠 신경 쓰지 않는데 내가 왜 지후 씨 말을 들어야 하지?”
고지후는 마침내 그녀의 뜻을 이해했다.
그가 알고 있는 하지율은 이런 태도로 그와 얘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항상 상냥하고 배려심이 깊었다.
늦게 들어올 때는 불을 켜놓고 기다렸고 서재에서 늦게까지 일할 때는 야식을 만들어줬다. 그리고 술에 취했을 때는 해장국도 끓여줬다.
비록 임채아가 돌아온 후 하지율이 예전만큼 그를 만족시키진 못했지만 오늘처럼 그의 뜻을 거스르고 맞선 건 처음이었다.
웬일인지 고지후는 저도 모르게 짜증이 밀려왔다.
그때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엄마, 잘못했으면 사과해야 한다고 가르쳤잖아요. 지금 엄마가 잘못했으니까 당연히 채아 이모한테 사과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제5화
하지율은 고지후의 뒤에 서 있는 고윤택을 돌아보았다.
지금 하지율에게 말하고 있지만 걱정스러운 시선은 줄곧 임채아에게 향해 있었다.
전에 임채아에게 조금이라도 무슨 일이 생기면 고지후와 고윤택은 몹시 긴장했다.
한번은 그들 네 명이 함께 공원에 간 적이 있었다.
임채아가 더위를 먹은 건지 아니면 병이 발작한 건지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갑자기 쓰러지려 했다.
그 순간 고지후와 고윤택은 동시에 임채아에게 달려갔다.
다급한 나머지 고지후가 하지율을 밀어 넘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가장 어이가 없는 건 나중에 고지후가 그녀의 손에 붕대가 감긴 것을 보고 어쩌다가 다쳤냐고 물었다는 것이었다.
가냘픈 목소리가 하지율의 생각을 끊었다.
“윤택아, 내가 제대로 서 있지 못해서 그런 거지, 네 엄마 탓이 아니야.”
임채아는 고윤택에게 고개를 저으면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 몸이 너무 약해서 그래...”
고윤택이 입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내가 분명히 봤어요. 엄마가 채아 이모를 밀어 넘어뜨리는 걸요.”
그러고는 하지율을 돌아보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는 어릴 때부터 잘못을 했으면 뉘우칠 줄 알아야 한다고 가르쳤잖아요. 엄마는 어른이니까... 말 바꿀 리는 없겠죠?”
하지율은 고윤택의 건강을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일상적인 학습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겨우 다섯 살밖에 안 된 고윤택은 세 개 국어에 능통했고 말솜씨가 뛰어났다.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어른들을 말문이 막히게 할 때도 있었다.
고지후의 어머니는 고윤택의 영리함이 고지후가 어릴 때와 똑 닮았다고 했다.
지금 고윤택은 예쁜 누나를 위해 그녀에게 대들었다. 어른이자 고윤택의 엄마로서 당연히 모범을 보여야 했다.
자신도 지키지 못하는 것을 어떻게 아이에게 지키라고 할 수 있을까?
그녀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나중에 아이를 어떻게 가르친단 말인가?
하지율은 임채아 주변에 있는 고지후와 고윤택을 쳐다보았다. 문득 자신보다 그들이 더 가족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이미 이 부자에 대해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고윤택의 태도를 본 순간 하지율은 마음이 너무도 아팠다.
그녀는 고윤택의 눈을 빤히 보며 말했다.
“네 말이 맞아. 잘못을 했으면 사과해야 한다고 했었지. 하지만...”
하지율은 멈칫했다가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말했다.
“난 잘못한 게 없는데 왜 사과해야 해?”
예전 같았다면 하지율은 분명 고윤택을 위해 타협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은 그러지 않았다.
고윤택이 무의식적으로 말했다.
“엄마가 채아 이모를 밀어버리는 걸 봤단 말이에요.”
하지율은 변명하지 않고 그저 미소만 지어 보였다.
“엄마가 밀었다고 해서 꼭 엄마 잘못이라고 누가 그래?”
“엄마가 다른 사람을 때리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요...”
하지율이 덤덤하게 말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괴롭히면 안 되지만 괴롭힘을 가만히 당하기만 해서도 안 된다고 했어. 만약 어떤 사람이 계속 선을 넘으면서 널 괴롭힌다면... 절대 봐주지 마.”
고윤택이 영특한 건 사실이지만 그래봤자 겨우 다섯 살짜리 아이일 뿐이었다.
하지율이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한 바람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멍해졌다.
그때 강병주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윤택아, 엄마한테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강병주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고지후와 고윤택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쏠렸다. 그제야 강병주가 있었다는 걸 안 듯했다.
고윤택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병주 아저씨?”
고지후의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병주 씨가 왜 여기에 있는 거죠?”
강병주는 하지율의 선배이자 어릴 때부터 함께 자란 죽마고우였다. 고지후도 그를 여러 번 만난 적이 있었고 하지율에게서도 그에 대해 들었었다.
하지율은 강병주가 어릴 적부터 부모님이 없었고 할아버지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고 했다.
중학교 때 강병주의 할아버지 할머니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면서 강병주 혼자 남게 되었다.
마침 그때 하지율의 어머니가 강병주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제자로 삼았다. 하지만 그 시절의 강병주는 늘 침울했고 누구에게도 마음을 열지 않았다.
하지율이 무려 3년이나 노력한 끝에 강병주는 그녀를 후배이자 친구로 받아들였다.
하지만 고지후는 강병주를 만난 순간부터 왠지 모르게 그를 몹시 싫어했다.
“지후 씨는 전 여친도 만나는데 지율이가 어릴 적부터 함께 자란 선배랑 밥을 먹으면 안 되나요?”
강병주의 목소리에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틀린 말이 아니었고 조롱도 가득했다. 그리고 고지후와 임채아의 파렴치한 관계를 들춰낸 거나 마찬가지였다.
고지후의 눈빛이 어두워졌고 잘생긴 얼굴도 눈에 띄게 굳어졌다.
“하지율, 집에 가자.”
그런데 하지율이 덤덤하게 거절했다.
“싫어. 아직 선배랑 식사 다 하지 못했어.”
고지후의 목소리에 차가움이 감돌았다.
“하지율, 마지막으로 한 번만 말할게. 집에 가자.”
하지율은 지금 그의 분노가 극에 달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만약 계속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면... 단순히 냉전으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무조건 다른 방법을 써서 그녀를 굴복시킬 것이다.
그녀는 폭우가 쏟아지던 그날 밤을 영원히 잊지 못했다. 온몸이 젖은 채 고지후의 발아래 꿇어앉아 눈물을 흘리면서 고윤택을 돌려달라고 애원했었다.
고지후는 하지율을 내려다보면서 물었다.
“네가 뭘 잘못했는지 알아?”
그녀의 눈물은 빗방울처럼 바닥에 떨어졌고 임채아가 물에 빠진 것에 대해 사과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항상 그녀를 다루는 방법을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생각에 하지율은 소리 없이 웃으며 붉은 입술로 두 글자를 내뱉었다.
“싫어.”
고지후의 눈빛이 차가워지더니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율, 결과가 어떨지 잘 생각해.”
“지후 씨가 무슨 방법을 쓰든 난 절대 후회하지 않아.”
그녀의 약점은 고윤택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고윤택도 포기했기에 고지후는 더 이상 그녀를 협박할 방법이 없을 것이다.
하지율이 강병주를 돌아보며 말했다.
“선배, 여기 공기가 안 좋네요. 다른 곳에 가서 밥 먹을까요?”
강병주는 잠시 조용히 있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지율은 더는 세 사람을 쳐다보지 않고 테이블 위에 놓인 가방을 챙기고는 떠나려 했다.
뒤에서 고윤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정말 채아 이모한테 사과하지 않을 거예요?”
하지율은 발걸음을 잠깐 멈췄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버렸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고지후의 눈빛이 차갑고 어둡게 변했다. 고윤택도 하지율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았다. 예쁜 얼굴에 약간의 당혹감이 떠올랐다.
‘엄마가 조금 달라진 것 같은데?’
임채아는 두 사람의 시선이 모두 하지율에게 향한 걸 본 순간 얼굴에 싸늘한 기색이 스치더니 갑자기 낮은 신음을 냈다.
“으악.”
고지후와 고윤택의 시선이 다시 임채아에게 쏠렸다.
창백한 얼굴에 서 있기도 힘든 듯 몸을 비틀거렸는데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이었다.
고지후의 눈빛이 살짝 변했고 망설임 없이 임채아를 안아 올렸다.
제6화
고지후가 옆에 서 있던 고윤택에게 말했다.
“윤택아,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고윤택은 고지후가 임채아에게 응급 처치를 해야 한다는 걸 알고 고분고분 고개를 끄덕였다.
고지후가 가자마자 옆 테이블에서 낮게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박서원, 저 애 좀 봐. 너보다 훨씬 어린 것 같은데 엄마를 지켜주고 엄마를 괴롭히는 내연녀를 내쫓았어. 너도 나중에 저런 나쁜 여자를 보면 쟤처럼 무서워하지 말고 쫓아내야 해. 알았지?”
그 말에 고윤택의 시선이 그들에게 향했다.
30대쯤 돼 보이는 여자와 7, 8살쯤 된 남자아이가 밥을 먹고 있었다. 박서원이라는 남자아이가 고개를 힘껏 끄덕이더니 고윤택이 쳐다보는 걸 보고는 의자에서 뛰어내려 고윤택에게 다가갔다.
“진짜 대단하다, 너. 어떻게 하면 내연녀를 쫓아낼 수 있는지 가르쳐줄래?”
고윤택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연녀?”
박서원은 고윤택이 내연녀가 무슨 뜻인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진지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빠 엄마 사이를 망치는 여자를 흔히 내연녀라고 해. 그런 여자들 때문에 아빠 엄마가 이혼하고 엄마가 슬퍼하는 거야. 그런 여자는 다 나쁜 사람이야.”
박서원이 잔뜩 화난 표정을 지었다.
“요즘 어떤 나쁜 여자가 자꾸 우리 아빠한테 들러붙어. 근데...”
박서원의 얼굴에 다시 실망한 표정이 스쳤다.
“근데 난 그 여자를 쫓아내고 엄마를 지키는 방법을 모르겠어.”
그러고는 존경하는 눈빛으로 고윤택을 쳐다보았다.
“너 아까 진짜 멋있었어. 말 몇 마디로 내연녀를 쫓아내고 아빠 엄마 사이를 다시 좋아지게 만들었잖아. 어떻게 한 건지 나한테도 좀 가르쳐줄 수 있어?”
고윤택은 여전히 상황 파악이 잘 안 된 듯했다.
“아빠 엄마 사이를 다시 좋아지게 만들었다고요?”
‘엄마는 먼저 가버렸는데?’
박서원이 의아한 표정으로 고윤택을 쳐다보았다.
“아까 그 내연녀 말이야. 네가 몇 마디 하니까 화를 내면서 도망갔잖아. 그리고 네 아빠가 네 엄마를 안고 갔고.”
‘엄마? 채아 이모를 우리 엄마로 착각하고 있었구나.’
그때 박서원의 엄마도 다가오더니 고윤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했다.
“착하기도 해라. 엄마가 아주 든든하겠어. 우리 서원이는 그 나쁜 여자가 고작 사탕 하나 줬다고 좋다고 했었는데.”
박서원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면서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엄마가 자꾸 사탕 못 먹게 하잖아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어요.”
“엄마가 사탕 못 먹게 하는 건 네 이가 썩을까 봐 그런 거야. 나중에 어른이 되면 얼마나 먹든 엄마는 상관 안 해.”
박서원이 그녀의 팔을 붙잡고 애교를 부렸다.
“내가 잘못했어요. 엄마가 날 위해서 그런다는 거 알았으니까 더 이상 화내지 말아요.”
“그 여자한테 팔릴 뻔하더니 이제야 엄마가 좋은 줄 아네.”
박서원이 헤헤 웃었다.
“지금이라도 알아서 다행이죠.”
여자는 겉으로는 툴툴거렸지만 눈빛은 한없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30분 정도 지난 후 고지후와 임채아가 돌아왔다. 임채아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지후야, 나 진짜 괜찮아. 아까는 그냥 저혈당 때문에 그래... 정말 병원에 안 가도 돼.”
고지후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쓰러지는 횟수가 전보다 잦아졌어. 병원에 가서 검사받아야 해. 병이 더 심해지기 전에.”
임채아의 표정이 저도 모르게 잠깐 굳어졌다.
최근 하지율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고지후를 불러낸 횟수가 전보다 많아진 건 사실이었다.
임채아가 말했다.
“괜찮아. 시간도 늦었는데 얼른 밥부터 먹자. 윤택이도 저녁 못 먹었잖아. 병원은 내일 가도 돼.”
두 사람은 얘기를 나누면서 고윤택에게 다가갔다.
고윤택이 텅 빈 식탁에 홀로 앉아 창밖을 멍하니 쳐다보았는데 얼굴에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막연함이 묻어있었다.
고지후는 고윤택의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채 다가갔다.
“채아 이모가 몸이 안 좋아서 먼저 병원에 가봐야겠어. 병원에 갔다가 저녁 먹으러 가자.”
고지후의 목소리가 덤덤했지만 한 글자 한 글자에 거절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졌다. 뼛속까지 강압적인 사람이라 한번 내린 결정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평소였더라면 고윤택은 망설임 없이 동의했겠지만 오늘은 웬일인지 자꾸 하지율의 모습이 떠올랐다.
오늘 전까지 하지율은 매일 꼬박꼬박 밥을 차려줬다. 고윤택의 위장이 약해서 제때 밥을 먹어야 했다.
가끔 임채아와 함께 외출할 때 밥 먹을 시간이 되면 먼저 간식이라도 먹이곤 했다. 고윤택의 특별한 체질 때문에 하지율은 간식도 직접 만들었다.
하지율의 요리 솜씨가 좋긴 했지만 자꾸 같은 것만 먹으니 질릴 때도 있었다. 밖에서 파는 음식이 다양하고 맛도 좋아서 고윤택은 하지율이 만들어주는 음식이 점점 싫어졌다.
임채아의 다정한 목소리에 고윤택은 하던 생각을 멈췄다.
“지후야, 윤택이는 몸이 약해서 뭐라도 좀 먹이는 게 좋겠어.”
고지후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윤택이보다 네 몸이 더 중요해.”
그 말에 임채아의 두 볼이 발그스름해지더니 더는 거절하지 않고 고윤택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윤택아, 딸기 케이크라도 사서 가는 길에 먹을까?”
딸기 케이크는 고윤택이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평소였더라면 뛸 듯이 기뻐했겠지만 오늘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네.”
임채아는 고윤택이 오늘따라 어딘가 이상한 것 같았지만 깊게 생각하진 않았다.
그녀는 종업원에게 딸기 케이크를 포장해달라고 부탁한 후 고윤택의 손을 잡고 식당을 나섰다.
병원으로 가는 길에 조수석에 앉은 임채아는 연신 뒤를 돌아보면서 고윤택에게 케이크를 먹을 때 조심하라고 주의를 줬다.
임채아가 미안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차멀미만 안 했어도 윤택이 옆에 앉아 챙겨줬을 텐데.”
하지율이 있을 때도 임채아는 항상 조수석에 앉았다. 이유는 차멀미를 해서 앞자리에 앉는 게 더 편하다는 것이었다.
고윤택은 손에 들린 케이크를 보며 문득 박서원의 엄마가 사탕을 못 먹게 하는 이유가 박서원을 위해서라는 말이 떠올랐다.
고윤택이 갑자기 물었다.
“이모 혹시 내연녀예요?”
임채아가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잘못 들은 줄 알고 고윤택에게 되물었다.
“뭐라고?”
고윤택이 고개를 들고 다시 한번 진지하게 물었다.
“이모 혹시 내연녀예요?”
아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내연녀라는 단어는 그 어떤 여자에게든 아주 치명적인 말이었다. 임채아의 표정이 확 굳어지더니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고윤택!”
고지후가 불쾌한 듯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알기나 해? 평소 배운 예절은 다 어디다 팔아먹었어?”
그때 임채아도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지후야, 윤택이한테 화내지 마. 아직 어려서 뭘 모르잖아.”
그러고는 잠깐 멈칫했다가 슬픈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율 씨가 날 싫어한다는 거 알아. 근데 윤택이한테 이런 말까지 해선 안 되지. 어른들 일에 아이를 끌어들이지 말았어야 했어. 아이는 아무 죄가 없잖아. 이제 몇 살이라고...”